• 최종편집 2024-03-27(수)

칼럼
Home >  칼럼  >  목회자

실시간뉴스

실시간 목회자 기사

  • 회장님 어떻게 이렇게 성공하셨습니까?
    일본의 세계적인 부호이자 산업가이며 내셔날 상표의 창업가인 마스시타 고노스게가 95세로 운명하기 전 ‘회장님! 어떻게 하여 이렇게 크게 성공 하셨습니까?’ 하고 묻는 한 직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나는 세 가지 하늘의 은혜를 입고 태어났다. 가난 속에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는 잘 살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또 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을 일찍이 깨달아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써 지금 아흔이 넘었어도 30대의 건강으로 겨울철 냉수마찰을 한다. 또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했기 때문에 항상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나의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려 노력하여 많은 지식과 상상력을 얻었다. 이 불행한 환경이 나를 이만큼 성장시켜 주기 위해 하늘이 준 시련이라고 생각되어 늘 감사하고 있다.’ 이처럼 감사의 조건을 찾아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는 사람은 매사에 불평만을 하면서 사는 사람보다 확실히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 날 감사함을 표시하는 사람의 수는 날이 갈수록 감소하는 추세이다. 감사해야 할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류역사상 최고의 수준의 삶을 살고 있다. 더 고급스러운 아파트와 자동차 더욱 좋은 물건을 매입하여 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행복으로 직접 연결된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을까? 아니다. 한 전문기관의 한 조사에 의하면 ‘행복하다’고 답변하는 미국인의 수는 50년 전 35% 였으나 지금은 30%로 줄었다고 한다. 50년 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음에도 말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실로 삶에서 가장 결핍된 것은 감사하다는 마음이 아닐까? 지금 우리의 영혼이 이렇게 빈곤한 까닭은 그동안 감사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그래서 항상 부족하고 채워지지 않아 고달팠다. 왜 이렇게 부족 한 게 많았을까? 하는 결핍의식은 우리를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감사할 줄 알면 항상 풍요로워지고 감사할 줄 모르면 항상 빈곤해진다는 이 평범한 진리를 이제 우리들은 깨달아야한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 평범한 일상을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온 일이다. 그 평범한 삶속에서 일어난 크고 적은 일 등에 대한 감사이다. 작은 일에 감사를 느끼지 않는다면 큰 일에도 감사를 느끼지 못 한다. 감사는 작은 물방울이 모여 큰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는 것과 같다. 자꾸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긴다. 한번 감사하고 말면 더 이상 감사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 감사할 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이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의미 한다. 우리의 삶이 감사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남의 것을 탐내지 말아야한다. 남의 콩이 더 커 보이기 때문에 남의 것을 자꾸 탐하게 되면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진정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내게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어야한다. 그런데 우리는 가진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항상 가지지 못한 것만 생각 한다. 존 팔 머는 미국에서 가장 우울한 사람이었고 가정도 파멸로 이끌어 갔으나 한 상이 군인을 통해서 생각을 바꿈으로써 파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한다. 그는 군대 제대 후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 되어가는 것 같았으나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이제는 부품과 원료를 구입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그래서 밤낮 술에 의지하여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공장에서 일하던 한 상이군인이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죤 사장님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장님은 마치 사장님만이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장님이 회사를 닫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금만 참으면 경기가 풀리고 모든 문제가 풀릴 터인데 말입니다. 사잠님에게는 감사해야 할 일이 많은데 불평불만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장님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에게는 팔도 하나뿐이고 얼굴도 상처로 일그러져 있습니다. 만약 사장님이 계속 불만 불평만 한다면 사장님의 건강은 물론 가정마저 잃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의 말을 통해서 많은 감동을 받았고 행복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한다. 이제 우리는 큰 일 보다는 작은 일에 평온한 일보다 고통스러운 일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야한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고자 한다면 노예근성의 동물적인 탐욕을 버리고 사고를 고양시켜야한다. 탐욕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히 건설적인 사고를 할 수 없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도 없다. 또한 잠재적인 능력을 개발하지 못하므로 무슨 일을 하던 실패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고를 조정하지 못하므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거나 어떤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7-09-22
  • 말 한마디가 중요하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여자를 보고 ‘아기씨는 여우같으신 군요’ 라고 말하자 그 여자는 ‘뭐요?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라며 화를 벌컥 냈다. 남자가 즉시 웃음 띤 얼굴로 ‘영화배우 같으시다는데 왜 그래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아 미안해요. 저녁이나 함께 하실래요’ 라고 태도를 급히 바꾸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사람은 한 마디 말에 따라 분위기와 상황이 정반대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행복 디자이너로 잘 알려진 최윤희씨. 그녀는 방송이나 강연에서 특유의 유머로 화법을 구사하면서 ‘웃고 살면 인생 대박이지만 징징 짜면 인생 쪽박이에요’ 라는 말을 자주하고 그녀는 방송과 강연의 섭외 일순위로 스타급 강사여서 하루 스케줄이 빼곡하게 짜여 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다음 강연 장소로 급히 이동하기 위해 강연 전 미리 콜택시를 예약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강연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약속한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택시가 있는 곳으로 갔다. 모르기는 몰라도 택시 기사는 기다리는 동안 서서히 짜증이 쌓였을 것이다. 그런데 까칠한 택시 기사에게 그녀가 허겁지겁 달려와 날린 말 한마디는 그야말로 촌철살인 이었다. ‘내 평생 나를 이렇게 오래 기다려준 남자는 기사님이 처음이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화를 내려던 택시 기사는 붕 뜬 기분이었고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휘파람 까지 불며 그녀를 목적지 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주었다. 만약 최씨가 택시 기사에게 건성으로 사과하거나 본체만체 했다면 목적지 까지 가는 동안 택시 기사는 마음속으로 ‘재수 옴 붙은 날이다’ 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녀 역시 마음이 불편해서 다음 강연은 물론 그날의 스케줄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녀는 ‘강연 때문에 늦었으니 이해해 달라. 택시비를 더드리겠다’ 하며 자신이 늦은 이유를 늘어놓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덕분에 누군가 참 오랜만에 나를 기다려 주었다는 설렘을 느꼈습니다’ 사람은 진심으로 배려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화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선한 말은 마치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마음을 즐겁게 한다. 선한 말은 부작용 없는 보약과 같다. 이처럼 말은 우리 인간의 생활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 사용 방법과 목적에 따라 오히려 하지 않음만도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면 실수하고 낙심되고 혹은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는 대부분의 경우가 말과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예컨대 ‘지고는 못 산다’ 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내뱉는 것이 바로 우리이다.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지하철이나, 거리나 골목 어귀에서 큰 소리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국가의 장래와 세계 평화 때문일까? 아니다. 상대가 던진 사소한 말 한마디 때문일 경우가 많다. 사소한 문제였지만, 상대가 좀 심한 말을 한다 싶으면 거기에 한마디 덧붙여 말하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또 다른 말을 덧붙이는 연쇄적인 반응 때문일 경우가 많다.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이인 부부간에 서로 격렬히 싸우는 것도 자신을 얕보거나 공격하는 상대의 한마디 말로 인한 분노를 참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 우리는 상대방의 지극히 작은 자극적인 공격에 쉽게 분노하고 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상대에게 더 심한 자극을 주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존재이다. 내 마음에 상대의 화살이 꽂힘과 동시에 더 치명적인 화살을 상대에게 날리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살기 위해 때론 독이 묻은 화살을 시위에 놓고 상대의 마음 정중앙을 향해 날리기도 한다. 즉 오고가는 대화 속에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격려하는 말보다는 증오와 폭력, 혹은 성적 호기심이나 허영심 등을 자극하는 말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서신에도 이미 망령되고 쓸데없는 말로 인해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명령이 있다(살후 3:11, 딤전 5:1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을 잘할 수가 있을까?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배워야한다. 예컨대 우리 얼굴을 보자. 두 개의 귀와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콧구멍이 있는 코와 한 개의 입을 볼 수가 있다. 왜 하나님께서 역으로 우리가 주님을 닮으려 노력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로 인해 다른 이로 하여금 분노를 갖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주님의 모습을 본받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서 분노를 제어하고 공격적인 적인 말을 자제해야 한다. 그렇다 말이 문제이다. 즉 말이 화근이다. 물론 모든 말이 화근은 아니다. 말 중에는 지혜로운 말도 있다.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주는 말도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앙을 고백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된 말도 있고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게 하는 말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말을 통해 상처를 주고 상처받으며 또 다투고 자기와 다른 사람의 인생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 칼럼
    • 목회자
    2017-09-08
  • 한 노인의 노래
    한 노인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내려쬐는 뙤약볕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지팡이로 박자까지 맞추며 신나게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다. 참 이상하다. 저 노인은 이제 인생 다 살았는데 뭐가 저렇게 즐거운 것일까? 목을 쭉 빼고 노인을 쳐다보던 길가의 나리꽃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노인의 노래 소리는 이 산 저산으로 메아리가 되어 계속 울려 퍼져 나갔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여기에요. 여기!’ 나리꽃은 할아버지가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길을 재촉하려 하자 크게 소리쳤다. ‘응 응. 예쁜 나리꽃이로구나 네가 날 불렀니?’ ‘예, 할아버지’ ‘그래, 왜 날 불렀니?’ ‘예,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뭐가 그리 즐거우세요? 저는 이제 곧 시들어버릴 것을 생각하면 슬픈데, 할아버지는 어째서 그렇게 행복해 보이세요? 할아버지도 이제 인생을 다 사셨잖아요?’ ‘그래, 그래서 나를 불렀구나. 나리꽃아 너무 슬퍼하지 마라. 나도 얼마 있지 않아 이 세상을 떠나겠지. 하지만 소중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나의 현재를 망칠 순 없지 않겠니?’ 노인은 나리꽃을 향해 방긋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곤 지팡이로 다시 박자를 맞추면서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유유히 산모퉁이로 돌아갔다. 필자는 이 예화를 읽으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이 참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사실 나는 현재라는 이 순간을 살아오면서 과거에 붙들려 있을 때가 참 많았던 것을 고백 한다. 과거의 일이 오늘의 내 발목을 꽉 잡고 있어 한발 자국도 나갈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도대체 세상을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았고 자꾸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많았다. 특히 억울한 일이 상처가 되고 미쳐 행하지 못해 후회가 되는 일들이 자꾸 떠올라 잊혀 지지 않는다. 잊혀 지기는 커녕 잊으려 하면 다시 화가 난다. 하지만 이런 일은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의 일은 돌이킬 수 없고 똑같은 강물에 똑 같은 손을 두 번 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과거의 행복했던 일보다 불행했던 일을 더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과거의 불행에다 오늘의 불행의 원인을 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소중한 시간의 낭비가 아닐까?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소중한 시간을 낭비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과거는 오늘이 아니다. 현재에 선한 일을 하면서 기쁘게 사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악취와 먼지를 뒤집어쓴 쓰레기통을 치우고 거리를 청소하는 일을 평생 해왔다. 누가 봐도 쉽지 않은 일에다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직업도 아니고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니다. 신기한 것은 표정이 늘 밝다는 점이다. 무엇이 좋아서 저리도 싱글거리는 것인지 궁금하게 여기던 한 젊은이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청소부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한 모퉁이를 청소하고 있는 거라네, 그러니 즐겁지 아니한가?’ 이것이 행복한 사람이 갖고 있는 프레임이다. 그렇다. 행복은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행복은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것,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일, 내가 지금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지 어제 내가 지니고 있던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과거가 소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오늘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그의 ‘인생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이 순간이며 또 가장 중요한 사람도 바로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내 손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만일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교훈하였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교훈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바로 성경이 일찍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만사에는 모두 때가 있다고 말씀하면서도(전 3:1~8) 동시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 지금 이 순간 받은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딤 후4:2). 그런데도 우리 지혜 없는 인간들은 대게 이와는 반대로 살아가기 일쑤이다. 곧 악한 일은 지금 당장 하려 하면서도 선한 일은 대게 뒤로 미룬다. 그리하여 지금이 아니라 그 뒤에도 전혀 할 필요도 없고 아니해서도 안되는 일 들은 서둘러 하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늘 뒤로 미루다 결국 때를 놓치고 두고두고 후회하곤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만 붙잡혀 현재의 일을 그르치고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미래만 꿈꾸며 현재의 일을 소홀히 하다 정작 그 순간이 왔을 때는 미쳐 준비가 되지 않아 모든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그러기에 성경의 교훈대로 먼저 우리의 날이 신속히 지나감을 깨닫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시 90:9~12). 따라서 이 짧은 인생을 후회 없이 살아가는 길은 오직 이 순간에 충실 하는 것을 깨달아 무릇 손에 닿은 대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받은 사명을 위해 온 힘을 쏟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전 9:10).
    • 칼럼
    • 목회자
    2017-08-11
  • 바른 인간관계를 회복하자
    사람들은 대게 서로 앙숙이 되거나 상대에게 상처를 주려 하지 않는 본능이 있다. 이는 모든 이들의 희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살다보면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관계에 금이 가는 때가 종종 있다. 또 금이 틈이 되고, 조그만 틈이 더욱 벌어져 도저히 회복될 수 없어 결별을 선언하기도 한다. 나빠진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참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만 보아도 가슴이 덜컹 내려않고 죄진 것도 없는데 찜찜하다. 그래서 회복하려고 성급하게 말을 붙였다가 더 틈이 벌어지기도 한다. 독자들도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첫 단추를 잘 끼워야 옷을 제대로 입을 수 있듯이 인간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선 첫 사역을 잘해야 한다. 기본 주춧돌이 이상하게 놓이면 그 위에 탑을 높게 쌓을 수 없다. 또 쌓는다 해도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게 되면 곧 무너진다. 때문에 주춧돌이 중요한데 인간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한 주춧돌은 바로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즉 상대방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에서부터 바른 인간관계는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관계가 위축되는 가장 근본 이유는 ‘내’가 ‘너’ 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생각, 성격, 학력, 문화, 습관, 언어가 다를 수 있는데 그 차이로 내가 당신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면 어찌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호감이 있어 곁에 갔다가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상처받고 돌아오지 않겠는가. 고로 상대와 자신을 동등하게 생각하고 존중해야만 관계가 바로 유지될 수 있다. 이것이 바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기초다. 말로만 서로 존중하라는 뜻이 아니다. 존댓말을 쓰는 것보다 먼저 상대를 나만큼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한다.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도 이를 무시하면 분명 관계에 틈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상대를 나와 동등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이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빠져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또 느끼는 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 한다. 누가 뭐래도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말이다. 절대적 기준이 ‘나’ 이다. 어른이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해도 당신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바라보거나 따진다. 한마디로 세상의 중심이 ‘자신’ 이 된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기준을 정해 놓고 그 안에서 행하는 자신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을 정당화 한다. 안타깝다. 더불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뤄야 할 사람들이 자기 고집만 세운다. 예컨대 직장, 학교, 사회, 민족, 국가, 심지어는 가정마저도 자기중심적인 기준을 세우고 그것이 정의라고 고집 한다. 자랑은 아니더라도 절대 굽히는 법이 없다. 그래서 공동체는 금이 가고 질그릇처럼 깨진다. 큰 문제는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나 싸우고 심지어는 소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실로 주님의 몸을 무너지게 할 수 있는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이다.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한다. 그리스도인(Christian) 이라는 말은 원래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이는 당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며 섬기는 무리라는 의미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을 가리킬 때 사용했던 특수 용어였다.(행11:26) 즉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 어떠한 우상이나 황제도 숭배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고 섬기는 것을 보며 ‘그리스도에 속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이라는 의미로 그들을 가리켰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나 지금이나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 위해서는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오직 그리스도만 믿고 따르며 섬기는 삶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섬기며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한다.(마22:39)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 증표가 되기 때문이다(요일4:21).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미국에 교환 교수로 있던 집사님이 한국에 돌아와 친구 성도들에게 미국 체류 중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집사님이 언젠가 미국인 동료교수의 초대를 받아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놀란 것은 자기를 초대한 교수가 그 날을 위해 한 달 전부터 세심하게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그 교수는 자기 한 사람을 초대하기 위해 벽난로에 피울 숯을 직접 장작을 패 준비했는가 하면 자녀들에게도 한국 손님이 오시니 선물을 준비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집사님이 방문하자 주인 교수 내외는 한 달 전부터 준비한 숯불을 피우고 자녀들로 하여금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며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집사님은 지금 까지도 그처럼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았던 적이 없었다며 두고두고 그 일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7-07-28
  • 상처 없는 독수리는 한 마리도 없다
    날개를 크게 다친 독수리의 한 마리가 벼랑 위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몇 번이나 하늘을 높이 날아오르려고 했으나 다친 날개로는 도저히 높이 날 수가 없다. 결국 날기를 포기하고 지난날을 생각했다. 태어나자마자 형제들을 벼랑 아래로 떨어뜨린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나는 평범한 새가 아니야’ 그는 벼랑 아래에 죽은 독수리의 뼈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그 속에는 아버지의 뼈도 쌓여 있었다. ‘독수리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은 이 방법밖에 없어’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순간 어디선가 대장 독수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잠깐’하고 소리쳤다. ‘형제여 왜 자살을 하려고 하는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났다니?’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저는 더 이상 높이 날 수가 없습니다. 독수리의 명예를 잃게 되었습니다‘ 대장 독수리는 한 참 동안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날개를 활짝 폈다. 그의 몸엔 상처 자국이 있었다. 솔가지에 찢긴 자국, 다른 독수리에게 할 뀐 자국 등 수많은 상혼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를 바라보라. 내 온몸은 이렇게 상처투성이잖니 상처 없는 독수리가 어디 있겠니’ 자살하려고 했던 독수리는 대장 독수리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대장 독수리가 말을 이어갔다. ‘이것은 곁에 드러난 상처 일뿐이다. 내 마음의 상처는 이보다 더하다. 일어나 날아보자. 상처 없는 독수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린 독수리뿐이다’ 대장 독수리의 말은 옳았다.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인생은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 의미가 있고 힘든 것이라는 사실을 수용하게 되면 남은 인생을 더 열심히 살 수 있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문제를 만났을 때 ‘왜 나에게만 이런 문제가 닥쳤다’고 불만 불평하는 대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런 문제는 나에게만 닥치는 문제가 아니라 ‘인생은 힘들기에 누구에게나 다 찾아오는 일’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의 인생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려고 하지 않고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을 탓하고 불평 한다. 하지만 불평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만일 우리에게 고난과 시련이 찾아온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후회 없이 살기위해 더 늦기 전에 꼭해야 할 일’의 저자 오그만디노는 5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긍정적인 마음 자세를 갖는다.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은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 한다. 이들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그 상황이 어떻게 해서 벌어졌는지 자문해 보고 그런 상황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배운다는 것이다. 둘째 실패로부터 배운다. 실패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며 배움의 기회로 삼는 것이다. 셋째 남을 탓을 하지 않는다. 실패했을 경우 실패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대신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살핀 후 두 번 다시 그런 실패를 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넷째 언제나 자신감을 유지 한다. 항장 자신감에 넘쳐있다. 이 자신감으로 어떤 역경이라도 자신이 추구하던 목표를 바꾸거나 변경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이다. 다섯째 잘 참고 인내 한다. 끈기와 인내심이 있다. 따라서 상처를 받아도 인내하고 참고 견디어낸다. 성공학의 대가 데일 카네기의 젊을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는 젊은 시절을 가리켜 ‘한낱 보잘 것 없었던 불행한 시절’ 이었다고 충격적인 고백을 한 바 있다. ‘최고의 성공학’의 대가로 불리는 그가 누구보다도 더 불행한 청년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이다. 한때 그는 생활고로 인해 트럭 세일즈맨으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트럭에는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직업을 경멸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의 생활에는 희망이라는 것이 없었다. 재미없는 일과를 마치고 시름에 빠져 돌아온 자취방 역시 그를 좌절시켰다. 허름한 자취방은 진드기와 각종 바퀴벌레로 득실 거렸다. 그 즈음 그 고민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그의 이야기를 보면 ‘그 시절 나는 학창시절의 꿈이 수포로 돌아가 반항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붙잡고 이것이 인생이냐 묻고 싶었다. 마음에 없는 일을 하고 진드기와 같이 살며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하며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이것이 진정 내 인생의 전부냐고?’ 젊은 날의 그 역시 지금의 우리와 같이 고민하며 원망하며 불평을 했던 것이다. 카네기는 25세에 인생을 다시 쓰기로 했다. 싫은 일은 과감히 그만 두었고 초심으로 돌아가 모든 일에 정열적으로 매달렸다. 카네기의 성공학은 그런 결단의 작품 이었던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7-07-14
  • 열정적인 사람이 되라
    유명한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르느와르(Augute Renoir,1841~1919)의 열정의 이야기이다. 그는 노년에 다리와 양손이 마비되는 악성 관절염으로 고생했다. 심지어 붓을 잡는 것조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 속에서 결코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림에 대한 열정은 더욱 뜨거워 갔다. 어느 날 절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가 그를 방문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있거나 누워있을 줄로 알았던 르느와르가 손에 연필을 붕대로 감은 채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 연필로 하나하나 그려갈 때마다 르느와르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지만 그는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마티스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친구에게 물었다. ‘오, 르느와르,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까지 그림을 그리다니... 이제 그만 쉴 생각은 없나?’ 그러자 르느와르가 대답했다. ‘고통은 순간이지만 그림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는다내’ 이처럼 열정은 인생에서 우선 그 개인의 삶을 역동적으로 만든다. 열정은 내면에서 발산되어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일단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행동으로 이끈다. 그리고 행동을 열심히 정열적으로 하게 된다. 그러니 매사에 힘이 넘치고 최선을 다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만족할 수밖에 없고 행복을 덤으로 찾아오게 한다. 열정은 나이에 상관없이 그토록 자신의 삶을 멋지게 이끌 뿐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염성이 있기 때문이다. 열정이란 단어의 열자는 한자로 ‘따뜻함, 뜨거움’을 의미한다. 즉 열정은 힘이 넘치는 뜨거운 마음이다. 그래서 그 뜨거움은 전염될 수밖에 없다. 열정의 사람을 보자. 한국 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을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의 나이는 무려 70세였다. 그는 매일 시 한 편을 암송 했다. 영국 시인 새무얼 울만이 쓴 ‘청춘’ 이란 시였다. ‘진정한 청춘이란 젊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젊은 정신 속에 있다. 장미 빛 볼, 앵두 같은 입술, 유연한 신체, 이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풍부한 상상력, 타오르는 정열, 이런 것이다. 펑펑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정신은 오늘도 신선한가? 생동감이 넘치는가? 용기 없는 정신 속에 청춘은 존재 하지 않는다. 위대한 사랑을 위해 드러내는 용기와 모험 속에 청춘은 존재한다. 용기 없는 20대라면 그는 이미 노인, 용기 있는 60대라면 그는 한창 청춘이다’ 새무얼 울만이 ‘청춘’ 이란 시를 지은 것은 그의 나이 78살 때라고 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단지 나이를 먹는다고 늙은 것은 아니다. 꿈을 버릴 때 우리는 늙는다. 인생은 마음가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약관의 나이에도 비관에 빠지면 이미 늙은 것이다. 나이가 여든이라도 삶에서 희망을 본다면 여전히 젊은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젊음을 창출해 내는 강력한 힘이 도사리고 있다. 열정, 패기, 도전이라는 단어는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붙잡기만 하면 삶의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 피터드리커는 95세가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했다. 늙은 것은 일종의 습관이다. 늙는 것을 생각하고 늙은 사람처럼 말하고 늙은 것처럼 행동하면 정말 몸과 마음의 노화가 진행 된다. 나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일에 열정을 가져야 하나? 성경의 인물 바울처럼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바울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매 맞음으로 인한 상처, 또 육체의 가시, 육체의 고통이 떠날 날이 없었다. 이러한 그라면 이제 전도사역을 마무리하고 평안한 생활을 선택해도 누구 하나 나무랄 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을 알았기에 더 할 일이 있고 그것을 이루고 싶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군데군데 상처로, 오랜 여독으로, 또 성도들의 오해와 근심으로, 심리적으로 지쳐 있었을 텐데도 그 고난이 두렵지 않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안정된 생활보다 불안정한 생활을 택하였다. 지금에 안주하지 않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계를 누비겠다고 했다. 마침내 그는 당시의 심장부인 로마에 까지 복음을 전했고 전승에 의하면 그가 가기를 소원했고 당시의 세계의 끝이라고 여겨진 서바나 곧 스페인에 복음을 전했다(롬 15:21). 쉬고 싶고 낙담되는 상황이 없지 않을 텐데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복음을 전함으로 끝내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역을 이루는 주역이 되었다. 그의 인생의 말년(빌 1:9)에 이르러서까지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다. 이는 모두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명확히 알았기에 가능하였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육신의 피로도 감정의 기복도 이 부르심을 이해한 바울의 심정을 식히지 못했다. 이처럼 자신의 계획을 발견하는 사람은 역동적인 삶 즉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 비전을 떠나 살 수 없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재확인하면서 역동적이며 활기찬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7-07-07
  • 앵무새 이야기
    한 여인이 고독을 달래고자 애완동물 가계에서 앵무새를 샀다. 하지만 이틀 후 화가 잔뜩 난 채 가계에 나타났다. ‘앵무새가 말을 한마디도 안해요’ 주인이 말했다. ‘거울을 넣어주세요. 앵무새는 거울로 자기 모습을 비쳐보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여인은 거울을 사 집으로 갔다. 그런데 거울을 비춰주어도 앵무새는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가게를 찾았다. ‘앵무새는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것을 좋아하니 사다리를 넣어주세요’ 그녀는 주인의 말대로 사다리를 사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날 여인은 또 가게에 나타났다. 앵무새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네를 사다주세요. 앵무새는 그네를 타고 한가로이 노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다음날 여인은 가게 주인에게 앵무새가 죽었다고 말했다. 그 말에 주인은 여인을 위로하며 말했다. ‘정말로 안됐습니다. 혹시 앵무새가 죽기 전 무슨 말을 하던 가요?’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이곳에 모이를 파는 곳은 없는가요?’ 앵무새는 죽어가면서 왜 모이를 찾았을까? 모든 생명체는 영양분을 필요로 하며 그 영양분으로 성장하고 생명을 유지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람에게 있어서 육신의 양식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적인 식욕 이상의 욕구를 가진 존재이며 인간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존속되고 유지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옛날에는 선지자와 예언자들을, 오늘 날에는 목회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요 21:15~17). 고로 목회자들은 바른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야한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게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이기 때문이다(벧전 2:2). 그래서 성경은 말씀을 양식으로 묘사한다(벧전 2:2). 따라서 목회자는 좋은 설교를 하기 위해서 충분히 준비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조직이나 기구 따위로 영혼을 살찌우게 못 한다. 목회자의 설교 속에 영혼에 필요한 영양가가 충분히 함유돼 있어야만 성도들이 건강한 영적 상태를 유지하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갈 수 있다. 좋은 설교란 문장력이나 매끄러운 전달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왜곡됨 없이 전달되는 설교, 성도들의 영혼을 깨워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는 설교, 이것이 좋은 설교이다. 목회자가 설교준비에 소홀하거나 설교보다 다른 일에 더 관심이 있다면 이는 명백한 직무 유기이다. 정치도, 구제도 중요하며 여가를 즐기는 것도 필요하지만 설교준비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설교의 내용과 수준에 따라서 우리 시대의 영적 상태와 교회의 위상 사회의 미래 등이 좌우된다는 점을 목회자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간혹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는 분들도 있다. 예컨대 ‘목회자의 중심은 말씀보다는 인간관계’라고 하면서 설교는 다른 사람의 설교집을 적당히 베끼거나 옛날 원고를 다시 활용하면서 뒷전으로 두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는 일에만 정신을 쏟는다. 설교가 부실하다는 지적이라도 있으면 소위 특별식을 먹인다면서 유명한 강사를 초빙하는 것으로 모면한다. 또 지나치게 사회 참여와 봉사를 강조한 나머지 설교를 온통 정치, 사회적인 내용으로 채우면서 말씀은 결론에서 읽는 둥 마는 둥 지나친다. 말씀을 등한시 한다면 교회에서 진정한 구원과 성령의 역사는 물론 올바른 사회 변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자들은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말씀의 종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말씀으로 성도들을 먹이고 돌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여타의 것들과는 달리 창세전에 예비하시고 감추어둔 것이요. 따라서 오직 은혜의 성령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비밀 중의 비밀이기 때문이다(고전 2:7). 그리고 목회자들이 주님의 은혜의 사명을 제대로 행하려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기 위한 집중적인 말씀의 연구와 묵상은 말할 것도 없고 성령의 조명을 위한 부단한 기도가 있어야 한다. 동시에 세상의 흐름을 정확히 짚어내어 가장 적절하고 필요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섬세한 기술도 있어야 한다. 성도들도 말씀의 사역자에게 하나님의 그 계시에 대한 증거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같은 말씀이라도 보다 재미있으면 좋고 외모도 보기에 좋은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목회자들은 말씀의 종이지 개그맨이나 패선 모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사역자들 역시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부분적인 약점과 부족한 면을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목회자들에게 말씀 이상의 무리한 요구를 하며 문제를 일으켜서도 안되고 목회자들 역시 이러한 기대에 맞추기 위해 말씀과 진리를 넘어서도 안 된다. 모든 성도와 목회자들은 오직 말씀과 이에 합한 거룩한 삶을 서로에 대한 기준으로 삼아 서로 위로하며 격려함으로써 어찌 하든지 이 땅에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만이 증거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7-06-23
  • 예수님의 성공적인 삶을 생각하자
    만일 지구상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한 분을 뽑으라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단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마지막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승리를 외치셨고 이후에도 인류역사상 그분처럼 많은 사람들의 경배를 받은 분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예수님의 삶은 결코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면 주님은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사셨기에 성공한 분이라고 하는가? 실로 주님께서는 머리 둘 곳도 없을 만큼 가난하게 사셨고 사역의 결과 얻은 것은 몇 명 안 되는 무명의 제자들이었으며 게다가 예배당 건축이나 복지 시설하나 남기지 않으셨다. 또 세상으로부터 지위와 명성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많은 핍박과 멸시를 받으셨고 마침내는 중죄인으로 취급받아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누가 이러한 주님의 삶을 성공적인 삶이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오늘 날 그분의 삶을 실패했다고 보는 이는 없다. 모두가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추앙한다. 그분이 고통을 당하신 목적은 바로 창세 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의 영광을 온 땅에 드러내었기 때문이다(빌 2:5~11). 그뿐이었을까? 고난 받으신 주님께서 결국에는 그 고난으로 영광을 받으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고난 받는 예수 그리스도를 천지 만물이 무릎 꿇는 가장 존귀한 자로 높여 주셨다. 정리하면 선을 행하고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유익이 있다는 말이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 우리는 흔히 오직 말씀대로 살면서 세상의 반대와 핍박을 받으면 피하려하고 심지어 실패했다는 생각에 빠져 절망할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성경을 보자. 주님은 친히 주께 속한 자는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요 15:19). 고로 우리가 말씀대로 살다가 어려움을 겪는다면 이는 역설적으로 결코 불행이나 실패가 아니라 주님처럼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세상의 핍박이 없이 출세와 성공을 거듭한다면 이것이 오히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대로 살며 그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되겠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삶으로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 진정한 성공과 영광의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과 함께 더욱 큰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장차 재림하셔서 각 사람을 평가하실 때 그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그의 삶과 행위라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그렇다. 높임을 받으신 주님께서 최종적으로 각 사람을 평가하실 때 무엇보다 먼저 그의 내적 모습을 볼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불신자는 물론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정직한 삶과 행위가 아닌 세상의 잣대로 평가의 기준을 삼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상 사람들은 흔히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을 평가 할 때도 삶과 행위보다는 가문이나 재물, 권력, 인기, 세상의 평판, 학위, 훈장 등과 같이 외적인 것들을 더 중요한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 또 성도들이나 목회자들 역시 사역의 성공 여부를 예배당 규모나 집회 수, 헌금, 교회 내에서의 직분 등으로 평가하곤 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정직한 삶과 행위를 통해 얻어진 것이라면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주님도 높이 평가해 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이 궁극적이고도 절대적인 기준은 결코 될 수 없다. 불의와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반드시 그의 삶 밑 행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 땅에서는 얼마든지 불의한 방법을 통해서도 이러한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심지어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들과 그의 삶이 정반대인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이 우리를 향해 내리는 판단과 결정이 결코 옳은 것도 아님을 알고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도 불꽃같은 눈으로 선인과 악인을 주목하시고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선한 성도는 보호하시고 그 기도에 응답 하시고 은혜를 주신다(벧전3:12). 그러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마지막 때 ‘심판의 부활’이 아닌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요 5:29) 창세전부터 예비하신 하나님의 축복을(마 25:34) 영원히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되겠지만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본인에게도 유익이 되는 가치 있는 고난만큼은 결코 회피하거나 거절해서는 안된다. 아니 주님의 제자로서 그러한 고난을 받게 된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알고 기쁨으로 감내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본분이자 삶의 행복이요 진정한 성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남은여생 주님의 제자답게 기꺼이 십자가만을 붙잡고 살아야가야 할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7-06-09
  • 왜 성형 수술을 할까?
    한 TV 토크쇼에 출연했던 성형외과 전문의 이야기이다. 그는 성형 수술에 대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대로 성형 수술은 외모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부분만을 바꿀 있을 뿐이며 그것 또한 많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에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되도록 삼가야 한다’ 유머로 표현하기도 했다. ‘성형 수술이란 A를 B나 C로 바꾸는게 아니라 단지 A+ 정도로 바꾸는 것으로, 성형 수술을 한다고 해서 향단이 얼굴이 춘향이처럼 변하지 않는다’ 우스갯소리처럼 소위 ‘원판 불변의 법칙’에 의해 제아무리 정교한 성형 수술일지라도 사람의 외모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과도한 기대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말 아름다워지고 싶다면 성형수술에 의존하기 보다는 음식과 운동 등으로 건강미를 가꾸고 교양과 지성을 쌓음으로써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을 추수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의 여성들 아니 남성들도 단지 성형수술로 인기 연예인과 같은 외모를 지닐 수 있다고 착각하며 비싼 돈을 지불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뼈를 깎는 수술대 위에 오른다. 때로는 무면허 의사에게 얼굴을 맡기다 심한 부작용으로 이전보다 더 추한 모습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무리한 수술로 목숨을 잃는 어리석음도 범한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내면의 아름다움과 인격의 성숙 없이 단지 수술로 외모를 바꾸고 값비싼 화장과 악세사리로 겉모습만 치장하는 것은 그 누구로부터도 진정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단지 세상의 남자들로부터 몸매와 얼굴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치 있게 평가받을 뿐인데 그들 중 대부분은 여성을 일시적 쾌락의 대상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여성 특히 주님을 믿는 여성들은 잠시 있다 사라질 외적 아름다움을 위해 세상의 헛된 것으로 자신을 꾸미지 말고 성령과 진리로 내면을 가꾸고 외적으로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한다. 아름다운 삶이란 먼저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다. 박목월의 시 중 이러한 구절이 있다. ‘우리의 신앙을 손이 증명하자, 신앙의 발이 증명하자, 신앙을 코가 증명하자, 주의 뜻에 사는 자의 그 정결한 손, 그 조심스러운 발, 그 향기로운 심령의 향기를 풍겨야 한다’ 이 향기는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실천할 때 한 것 풍겨나는 것으로서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란 주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는 삶이다(요일 2:6). 즉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엡 5:8)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가운데서 행하여야 한다(엡 5:2). 그런데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다 우리는 번번이 실패 한다. 사랑을 행해야 하는 순간에 미운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내며 소리도 지르고 욕설도 하게 된다. 사랑을 어떻게 할까? 자신을 버려야 한다.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실천해야 한다. 타인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사는 것이다(벧전 4:10). 주님께서 섬기며 사셨던 것처럼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도리어 섬기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마 28:29). 다음으로 선한 열매를 맺어야한다. 과실나무는 반드시 과실을 맺어야 한다. 과실을 맺히지 않는 나무는 땅만을 헛되게 낭비한다. 이 같이 주를 믿는 여성들이나 남성들은 주님의 삶과 인격의 삶을 그 삶의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내야한다. 즉 온갖 착함과 의로움과 선한 열매를 그 삶에 맺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전도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롬 6:16).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요 12:24). 죽어야한다. 즉 세상과 육신에 속한 모든 욕심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사랑과 평화와 겸손과 희생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이다(갈 5:22~24). 세상의 밀알이 되어야 할 성도들이 오히려 죽기를 거부하고 살아있다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리고 주안에 거하여야 한다.(요 15:4) 주안에 거하지 않고는 착한 행실과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주안에서 선한 뜻을 두고 행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고로 주를 믿는 여성도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고(롬 6:16) 선한 일을 행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으면 그 삶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기 때문이다(마 12:35). 하나님은 이렇게 생활하는 성도에게 더욱 풍성한 구속의 은혜와 하늘나라의 축복을 내려주신다. 마지막으로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성도들의 생활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즉 세상 사람들의 언어, 생활, 습관, 가치관과는 달라야한다. 세상 사람들이 불의를 행할 때 주를 믿는 성도들은 의를 행하여야 하며 거짓을 행할 때 선을 나타내야 하며 추악하고 더러운 생활을 할 때 정결하고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스의 피로 구속받아 의롭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도들이 순결함을 유지해야 할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후사로서(롬 8:17)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나라의 유업을 받기 때문이다(갈 4:7).
    • 칼럼
    • 목회자
    2017-06-02
  • 현명한 아내와 어머니 이야기
    ‘완전한 여성’이라는 책을 저술한 ‘마라벨 몰간’ 여사는 그 책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였다. 자신은 원래 성격이 공격적이라서 매사에 남편과 자녀에게 바가지 포를 쏘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늘 자녀들에게 ‘옷을 치우라’ ‘숙제를 해라’ 등의 잔소리를 했고 이 습관이 남편에게도 나타나 6년간이나 남편이 집에만 돌아오면 ‘집안 청소를 하라’ ‘자기 어머니에게 친절 하라’ 등의 잔소리를 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자기가 잔소리를 늘어놓자 남편은 참다못해 ‘나는 당신의 남편이요’ 라고 항변하면서 ‘당신은 오늘 나에게 쓰레기를 내다버리라는 말을 여섯 번이나 했는데 나는 당신이 그 소리를 멈출 때까지 일부러 버리지 않겠소’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그 순간 남편이 가정이라는 왕궁에서 왕 노릇 하지 못하고 종과 노예로 살아오면서 얼마나 고민했던가를 불현 듯 깨달았고 이후부터는 일체의 잔소리를 멈추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잠시 후에 쓰레기가 말끔히 치워져 있는 것은 물론 남편은 다른 가정 일에도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그 모습도 역시 밝게 변하더라는 것이다. 이에 그녀는 아내의 잔소리가 오히려 남편과 결혼 생활을 죽이며 반대로 남편에 대한 순종이 가정을 살린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 이후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한 단계 성숙해 졌다고 한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아름다운 가정들이 부부간의 욕망 즉 성격, 대화 단절, 환경, 경제, 여권신장, 성 개방 풍조 등과 같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어떤 가정은 깨어지고 어떤 가정들은 불안한 침묵으로 간신히 유지 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일까? 이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모르는 무지에 있다. 그러므로 믿는 여인들은 세상이 그 어떤 소리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근거하여(창2:24)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시듯 가정의 머리는 남편임을 다시 한 번 깨닫고(엡5:23) 남편을 사모하며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현명한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로 돌아가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처럼 복을 받을 것이다. 신약 성경 벧전3:6절을 보자.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을 주로 칭하며 복종 했다’라고 하였다. 성경은 사라가 이처럼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그녀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지적 한다. 그녀가 그토록 온전히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완벽한 남편이거나 그녀에 대한 생살여권을 쥔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녀가 소망을 두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었기에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성경을 보면 ‘거룩한 부녀들’이란 놀라운 칭호를 받은 자들은 자신의 소망의 근거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남편을 섬긴 여인들 이었다.(벧전3:5) 사라 한 사람만이 아니다. 이삭과 야곱의 아내들도 그러했다. 이삭이 때로는 우유부단하고 부친 아브라함처럼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등의 나약한 모습을 보였을 때에도 불구하고(창26:7) 또 야곱 역시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며 가정의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내들은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에 그토록 불완전한 남편에게 절대 복종했다.(벧전 3:5,6) 그러면 사라는 어떤 복을 받았을까? ‘사라’의 원래 이름은 ‘지배하는 여주인’ ‘공주’라는 뜻의 ‘사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열국의 어미‘란 의미를 가진 ‘사라’라는 이름을 그녀에게 새로이 주신다. ‘사래’는 아브라함의 공주였지만 새 이름을 받음으로써 ‘사라’는 약속의 자녀인 이삭의 어머니와 이스라엘의 민족의 어머니가 되었고 또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었으며(창 17:6) 후세의 믿는 여인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처럼 사라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도 남편을 주로 섬겼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의하면 어거스틴은 이렇게 적고 있다.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녀의 주인으로 섬겼다. 그리고 하나님 당신께서는 저의 어머니로 하여금 행동으로 설교하게 하심으로 아버지를 당신에게로 인도하게 하셨다‘ 이처럼 남편에게 순종하는 여인들은 복을 받았다. 하지만 남편에게 불순종하고 패역한 여성들은 저주를 받았다. 예컨대 남편 아합 왕으로 하여금 불의한 방법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던 사악한 여인 이세벨(왕상 21장), 아하수에로 왕의 부름을 무시함으로써 왕후의 자리 마져 빼앗긴 와스디(에1장), 딸 살로메를 이용하여 남편 헤롯왕으로 하여금 세례 요한의 목을 베도록 했던 간악한 여인 헤로디아(마14:1~12) 등이 있다. 이제 우리 주님을 믿는 아내들은 겉모양보다는 속사람을 성령과 진리로 단장하고 주안에서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며 순복해야 한다(골 3:18).
    • 칼럼
    • 목회자
    2017-05-1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