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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대선 #한국교회 #대통합, 그리고 ‘푸른 우물’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고 치열한 대선이다. 한 번도 겪지 못했던 무한의 위기가 반복되는 상황은 국민들에 있어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최고조에 끌어 올렸다. 대선은 국민들에 있어 어떠한 선택을 하던 결국 실패로 귀결되는 예정된 결말이지만, 이를 알면서도 매주 사게 되는 복권처럼 혹시나 하는 기대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아마도 사전 투표율이 역대 최고치인 35%에 육박했다는 사실은 국민들이 그토록 배신만 당해왔던 선거에 다시 한 번 희망을 걸고 있다는 씁쓸한 반증일 것이다. 희망을 잃어버린 시대, 아무도 희망을 책임지지 않은 시대,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대통령 선거조차 한 판의 도박처럼 모험을 걸어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지금은 교회의 존재 가치에 대한 본질적 회고를 요구하고 있다. 얼마 전 하나님 품에 안긴 시대의 지성 고 이어령 교수는 소강석 목사의 시집 ‘외로운 선율을 찾아서’의 발문에서 교회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교회의 위기는 시대의 위기요. 역사의 위기로 종결된 경우가 많다. 시대와 역사를 위해서라도 교회는 끊임없이 정화되고 정신적, 사상적 샘물을 흐르게 하는 깊고 푸른 우물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지난 역사에서 언제나 시대의 최후의 양심이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교회에 본질적으로 부여한 사명이자 역할이었다. 교회가 무너진 시대가 온전한 적이 없었고, 반대로 교회의 부흥은 곧 그 사회와 국가의 번성으로 이어졌다. 한국교회가 70~80년대 기적과도 같은 부흥을 이룰 때, 국민들은 교회를 보며 희망을 노래했다. 반복된 전쟁이 가져온 배고픔과 가난, 성숙치 못한 민주주의에 따른 시대의 혼란과 억압 속에 갈 길을 잃은 국민들은 교회의 십자가를 보며, 앞으로 전진했고, 미래를 일궈냈다. 교회 자체가 복음이었고, 국민들의 삶에 스며든 희망이었다. 대선 정국이 뜨거워지며, 한국교회 역시 줄 서기에 한창이다. 1번과 2번이란 별반 다를 바 없는 숫자를 오가며, 치열한 눈치전을 반복하고 있다. 서로의 선택을 두고 정치권의 당사자들 못지않은 이전투구를 펼치며, 스스로 이번 대선의 최고 수훈임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사이 고 이어령 교수가 말했던 ‘푸른 우물’은 점점 오염되어 버렸다. 바닥 끝까지 보일 듯 투명했던 푸르름은 이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탁수(濁水)가 되어 그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교회의 위기를 시대의 위기라고 했던가? 스스로의 과오로 시대를 위기로 몰아넣은 교회가 이제는 더 큰 욕심으로 마지막 양심마저 저 버리려 하고 있다. 어느 순간 아무도 교회를 보며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요 근래 “한국교회는 누구를 택해야 하나?” 란 질문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누구를 택할 때 한국교회에 좀 더 유리하며, 한국교회에 혜택이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가득한 물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 역사적 의의를 생각하며, 이 질문의 본질적 오류를 생각해 봐야 한다. 누구를 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누가 되든 상관없는 한국교회를 어떻게 구축할 것이냐에 대한 물음을 먼저해야 한다. 어떠한 공격도 견뎌낼 굳건한 교회,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불의한 탄압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정의로운 교회, 스스로 예배를 지키며 성도들을 보호하며 국민들에 신뢰와 지지를 얻어내는 희망의 교회를 구축할 수 있다면, 굳이 이번 대선에 교회 스스로의 운명을 내던질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물음의 해답은 결국 ‘한국교회 대통합’이란 주제로 귀결된다. 한국교회가 하나되어 진정한 ‘원 리더십’으로 시대를 이끌 수 있다면, 그 어떤 불의한 상황이 닥쳐도 국민들을 보호하며, 시대에 여전히 희망의 빛을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03-05
  • [기자수첩] NCCK의 ‘무속’ 비판이 씁쓸한 이유
    전 세계 기독교 경악한 ‘초혼제’ 잊었나? “특정후보 간접적 지지 아니다" 제 발 저린 도둑의 커밍아웃? 코 앞으로 다가온 대선 정국에 기독교 역시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 정권 들어서 총체적 위기를 보이는 국가적 혼란 앞에 이번 대선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대한 선택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문제는 이러한 중요 시국속에서도 정치질을 멈추지 않는 한국교회다. 대선이 한달 밖에 남지 않았지만, 여전히 한국교회의 내부는 정치적 계파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최근 특정 후보를 겨냥해 ‘무속 비선 정치’ 시비를 걸고 있는 진보계의 행태는 이미 도를 심히 넘어선 모습이다. 근래 한 공중파에서 특정 후보 부인의 녹취록을 공개한 이후, 기독교 진보계는 일제히 비난성명을 발표하고 ‘무속 정치’ 타파를 외치고 있다. 지난 달 말 ‘비선정치·무속정치를 염려하는 그리스도인 선언’을 시작으로, 교계 진보 신학자 28인이 ‘사이비 주술 정치 노름에 나라가 위태롭다’는 성명을 냈고, 2월 3일에는 NCCK와 YMCA가 ‘무속 비선 정치가 주권재민의 공론장을 대신할 수 없다’는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또한 같은 날 '주술에 국민과 국가의 내일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는 제목의 기독교대한감리회 목회자 486인 선언이 발표됐다. 특히 한국교회 대표 연합기관을 자처하는 NCCK가 이러한 입장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단순한 종교적 비판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노골적이고, 정치적이며, 충분히 의도적이라는 지적이다. 이러한 비판과 의심의 바탕에는 교계 진보계가 그동안 ‘무속’에 대해 어떠한 거부감도 드러낸 적도 없으며, 오히려 매우 친밀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WCC의 ‘초혼제’다. 정현경 교수는 지난 1991년 호주 캔버라 제7회 WCC 총회에서 ‘초혼 의식’을 거행하며, 전 세계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WCC는 국내에서 예장통합, 기감, 기장, 성공회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곳으로, 이들 교단은 동시에 NCCK에서도 함께 가입되어 있다. 그리고 WCC와 NCCK는 신앙고백을 공유하고 있다. 무속 행위에 가까운 초혼제 사건이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 보수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음에도 NCCK를 비롯한 이들 교단들은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한국교회에 반WCC 정서가 완전히 뿌리내린 근저에는 바로 ‘초혼제’가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여기에 이어지는 NCCK의 ‘나무아미타불 아멘’ 사건은 종교혼합의 극치였다. 어쩌면 무속보다도 못한 행위조차 스스로 용납해 왔다. 또한 NCCK의 총무가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7대종단협의회에는 한국민족종교협의회가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그동안 NCCK와 서로 종교 간의 예우를 다해 왔다. 그런 상황에 NCCK를 비롯한 진보계가 대선을 코 앞에 두고 특정 후보의 ‘무속’을 문제 삼고 나오는 것이 결코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내로남불’, 사실 특정후보를 지지하건, 비판하건 그들의 자유지만, 자신들의 신념이나 과거마저 뒤집어 엎어가며, 이를 비판하는 행위에 교계가 그 의도를 의심하는 것이다. 애초 무리한 비판이나 성명이기에 그 내용에 모순이 가득한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NCCK와 YMCA는 공동 성명에서 “무속의 운명론적 세계관이 형성하는 심리적 강제력은,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해치고 공론의 장을 해체하거나 사유화한다. 미신과 무속에 기반한 사교의 정치적 본성은, 세속 권력자들을 숙주로 삼아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을 사유화한다”며 ‘무속’을 노골적이고, 강력하게 비판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은 “결코 이웃 종교에 대한 배타적 시비도 아니며, 특정후보에 대한 간접적 지지도 아니며, 건전한 민족종교의 전통 문화에 대해 존중한다”고 한발 빼고 있다. 참으로 복잡한 성명서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무속이 좋다는 것인가? 나쁘다는 것인가? 온갖 비난과 비판을 해놓고, 나중에는 존중한다는 결론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것인가? 그렇기에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스스로 언급한 “특정 후보에 대한 간접적 지지가 아니다”는 입장은 오히려 제발 저린 도둑의 커밍아웃에 가까워 보인다. 건전한 민족종교라고 했는가?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건전한 무속은 무엇이며, 불량한 무속은 무엇인가? 스스로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제기는 그저 시비에 불과하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02-03
  • [기자수첩] 소강석 목사의 설교 논란에 입 연 신학자들
    소 목사는 ‘자기비하’ 통해 자신은 낮추고, 성령만 드높이는 광대 유행가 논란? 성 프란스시스, 칼빈도 설교 중에 대중가요를 사용했다 “소강석 목사의 독특한 설교는 신학적 유산으로서의 분명한 가치가 있다” 시종일관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전개로 유명한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의 설교가 근래 유튜브 등에서 크리스천들의 큰 각광을 받고 있는 가운데, 일부 목회자들이 소 목사의 설교 행태를 시비하며, 때아닌 논란이 일고 있다. 스스로 ‘광대’를 자처하며, 목회자로서의 정형화된 고정관념과 권위를 내던진 것으로 유명한 소 목사이기에, 사실 이번 논란 자체가 시기적으로 매우 부적절하고, 부자연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다만 코로나 확산 이후 시대의 대세가 되어버린 유튜브를 통해 소 목사의 ‘설교’ 역시 높은 인지도와 함께 그 인기가 급상승하며 새로운 반항을 일으킨 것 역시 사실이다. 문제는 이번 ‘설교 논란’ 자체가 기존 소 목사를 향한 정치적 공격과 그 맥락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이들 상당수가 이전에도 소 목사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자주 해 왔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당연히 설교의 행태, 구성, 유행가 삽입 등 소 목사의 행태를 두고 도를 넘는 온갖 문제를 제기하지만, ‘비판을 위한 비판’에 매진하다보니, 딱히 설득력은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튜브, SNS 등을 통해 해당 논란이 끊임없이 재생산, 확대 되며, 논란은 쉬이 사그러들지 않았고, 결국 정통 신학자들까지 나서 해당 논란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밝히고 나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김덕현 교수(칼빈대 설교학 교수) 등이 참여한 토론에서 나온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 목사의 설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철저히 개혁주의적이며, 자기희생적인 매우 훌륭한 설교다. 이번 논란이 오히려 전문가들로 하여금 소 목사의 설교를 검증하고, 인정하게끔 만들어 준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논란과 별개로 소 목사의 설교에 대한 두 교수의 견해는 교계의 또다른 주목을 받고 있다. <영상보기: youtu.be/iRC2NN8AP5s> 김덕현 교수 “소 목사는 광대 설교의 표본” 신성욱 교수 “바울과 같은 아이덴티피케이션(자기 동일시)’기법 적용” 먼저 김덕현 교수는 세계적인 설교학 박사 요한 H. 실리에(Johan H. Cilliers/ 남아공 스텔렌보쉬대 교수)가 주창한 ‘광대 설교’가 소 목사의 설교 행태와 정확히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광대 설교’의 핵심은 ‘자기비하’로 자기를 낮추고 희생함으로 청중들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성경 인물이 다름아닌 ‘바울’이었다. 다음은 요한 H. 실리에 박사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의 어릿광대’에서 표현한 바울의 모습이다. “바울이 보는 설교자의 모습은 보다 이상하고 불편한 그것, 바로 바보의 모습이다··· 우리는 바울을 연극 안의 바보처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예고도 없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와 그의 발칙한 말들과 익살맞은 행동들도 극 전체를 헤집어 놓는 바보 말이다. 연극 속의 바보처럼 바울은 관습을 거스르는 행동들을 보인다. 십자가를 선포함으로써 그는 힘과 지혜에 대한 세상의 이해를 바꾸어 놓는다" 김 교수는 “요한 H. 실리에 교수는 성경에서 드러나는 전형적인 설교자의 이미지를 광대로 봤고, 그 대표적인 인물로 바울을 지목했다”면서 “자기비하를 통해 스스로를 낮추고, 오직 성령만 드높이는 것이 바로 광대설교다”고 말했다. 이어 요한 H. 실리에 교수가 그린 ‘광대상’에 소강석 목사가 매우 근접했다며 “만약 요한 H. 실리에 교수가 한국어를 배워, 소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면 ‘한국에 이런 설교 컨텐츠가 있구나’ 하고 놀랐을 것이다”고 말했다. 신성욱 교수는 소 목사의 설교를 ‘아이덴티피케이션(자기 동일시)’ 기법의 전형으로 봤다. 자기를 낮춰서 상대를 배려하며, 이를 통해 감동을 주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인데, 이 역시 ‘바울’의 설교 기법이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신 교수는 소 목사의 설교가 ‘개혁주의’가 아니라는 비판에 대해 지속적인 변화와 수정을 의미하는 ‘reform’에 오히려 매우 충실함을 지적했고, 김 교수는 ‘유행가’ 논란을 놓고 과거 성 프란시스와 칼빈도 설교 중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사용했고, 실제 많은 호응을 받았음을 설명하며, 일각의 근거없는 비판들을 일축했다. ‘나’의 기준을 ‘기독교’의 기준으로 삼아선 안돼 사실 이번 논란은 굳이 전문가의 평가나 신학자들의 연구가 아니더라도, 이를 듣는 청중들의 반응에서 그 결과가 증명되고 있다. 진지함으로 포장한 권위에 도취된 일부 목회자들이 다름과 틀림의 구분 없이 무조건 비판으로 일관하는 자세는 오직 스스로만 옳다는 자만을 증명할 뿐이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변치 않지만, 교회와 예배의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또한 보는 이들의 관념에 의해서도 옳고 그름이 판단된다. 당장 우리가 예배 중에 아무렇지 않게 부르고 있는 복음성가나 지금은 은혜의 척도처럼 되어버린 ‘통성기도’가 불과 30~40년 전 만해도 장로교에서 금기시되었던 사실은 지금으로써는 결코 상상키 어려운 일이다. 또한 지금도 일부 보수교단에서는 복음성가는 물론 설교 중 ‘예화’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하고 있다. 예배의 권위를 떨어뜨린다는 이유에서다. 윤항기 목사는 자신의 곡 ‘여러분’의 가사를 철저히 성경을 염두하며 썼다.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라는 가사의 ‘나’는 바로 ‘하나님’을 뜻하고 있다. 일반사람들은 서울국제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여러분’을 단순 대중가요로 기억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게 ‘여러분’은 은혜로운 복음성가다. 비판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면 이를 부정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인지하는 것보다 많은 변화를 겪었고, 또 그 변화에 자연스레 익숙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와 예배는 그 익숙한 변화를 통해 점진적인 진화를 이룬다. 이를 인정치 않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개혁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01-26
  • [기자수첩] 천주교, 기독교 그리고 교계 대통합
    교계 대통합을 향한 3개 기관의 노력이 올해도 계속되는 가운데, 최근 한교총 대표회장 류영모 목사가 매우 의미있는 행보를 펼쳐 주목을 받고 있다. 류 목사는 지난 1월 21일 천주교 정순택 대주교를 찾아 환담을 나누고, 종교 간 협력과 교류를 당부했다. 이날의 만남은 그저 종교 대표간의 만남이라는 주제만 놓고서는 크게 주목받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류영모 목사가 속한 예장통합측은 NCCK를 통해 천주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터라, 이러한 모습이 매우 익숙해 보이기까지 한 것이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이날 대화의 내용이다. 류 대표회장이 천주교와의 관계에 있어 매우 전향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이날 류영모 대표회장은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기후 위기, 통일, 낙태 등 사회 문제에 공동의 메시지를 냈으면 한다”며 “신학적인 차이는 서로 존중하고, 약자를 위해 하나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국민들이 원하는 일이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먼저 류 대표회장은 천주교와 개신교 간의 신학적인 부분을 ‘차이’로 규정하고, 이를 비판이나 정죄가 아닌 ‘존중’의 대상으로 인정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대다수 보수 교단이 천주교와 그들의 신학을 ‘이교’ 혹은 ‘이단’으로 보고 있는 상황에, 보수교회를 대표하는 한교총의 대표회장이 ‘차이’와 ‘존중’이라는 말로 천주교-개신교 간의 신학적 간극을 메우는 모습은 매우 파격적일 수 밖에 없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류 대표회장은 “약자를 위해 하나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국민들이 원하는 일”이라며, 개신교와 천주교 간의 연합과 협력을 당부했다. 사회와 국민을 위해서 신학과 종교를 뛰어넘는 ‘연합’의 중요성을 설파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대목에서 류 대표회장이 자신의 이러한 전향적 관점을 교계 기관 대통합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각 기관 통추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어느정도 해소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단 문제’가 통합의 쟁점으로 자리하고 있는 상황에, 류 대표회장이 천주교를 향해 보였던 ‘차이’와 ‘존중’이라는 시각은 ‘이단 문제’의 근본적 해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 신성’ ‘연옥설’ 등 기독교의 신학에서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예민한 문제조차 ‘정죄’의 대상이 아닌 ‘차이’가 될 수 있다면, 한교총이 지적하는 한기총 내부의 문제나 한기총이 한교총을 향해 제기하는 ‘WCC’ 문제는 어쩌면 논쟁할 필요조차 없는 매우 가벼운 주제일지 모른다. 여기에 류 대표회장은 이 모든 이유를 ‘연합’이라는 말 한 마디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됨이 곧 희망이고, 국민들을 위한 길이라는 그의 말은 당연하게도 한국교회 전체가 염원하는 교계 대통합의 취지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이단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지만, 오히려 과한 경계는 우리 스스로의 신학적 기준에 모순을 남길 뿐이다. 지금은 내가 아닌 우리, 일개 교단이 아닌 한국교회 전체를 생각해야 할 때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01-22
  • [기자수첩] 새해 다시 대통합의 희망을 노래하자
    하나됨을 꿈꾸지 않는 교회에 복음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 연합기관의 하나된 힘을 ‘병폐’로 단정 지어서는 안돼 현대사의 가장 큰 재앙으로 기록될 코로나19의 지독한 확산세가 전혀 주춤할 줄 모르는 와중에서도 여전히 새해의 아침은 밝아왔다. 코로나와 함께하는 세 번째 새해는 이제는 공포가 아닌 무던한 익숙함 속에 우리가 코로나로 수년 간 잊고 지냈던 본연의 일상에 안부를 묻고 있다. 나는 누구이고, 당신은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었나? 우리 모두에게 코로나는 공동의 적이자, 서로의 관심을 공유하는 중대한 매개지만, 반대로 코로나가 없었던 우리의 일상이 어렴풋한 기억에만 맴도는 것은 우리가 어느덧 삶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다는 씁쓸한 반증일 것이다. 새해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다시금 깨우칠 것을 요구한다. 코로나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우리의 신앙이 이제 다시 삶의 중심으로 당당히 자리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신앙은 점차 한국교회 전체로 확산되어 코로나에 경도된 이 사회를 새로운 빛과 희망의 이슈로 끌어줄 것을 확신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코로나를 억누를 새로운 빛과 희망의 이슈는 무엇인가? 단연 ‘대통합’이다. 하나됨은 그 자체로 희망이며, 복음의 실현이다. 한국교회 본연의 사명이자, 분열의 시대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의 목표가 바로 ‘대통합’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대통합’을 부르짖고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자행한 분열의 결과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의 교단이 300개의 교단으로 흩어졌고, 이를 하나로 묶고자 탄생시킨 연합기관은 다시 세 개로 나뉘었다. 어떠한 변명으로도 결코 정당화 되지 않을 과거의 죄악 앞에 우리가 ‘대통합’을 얘기하는 것은 죄에 대한 철저한 인정이며, 새로운 미래를 위한 당연한 ‘회개’다. 하나됨을 꿈꾸지 않는 교회나 목회자가 복음을 얘기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죄를 인정치 않는 오만함에 두 눈이 가려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제멋대로 찢어 놓은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그대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잔인함은 지체들의 고통과 아픔을 굳이 외면하려는 무책임이다. 그런 관점에서 연초 기관 대통합을 대놓고 반대하고 나선 기성 지형은 총회장의 발언이 매우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교계 분열의 죄책을 누구보다 먼저 얘기해야 할 주요교단의 지도자가 앞장서 통합을 반대하고 있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납득키 어렵다. 자신이 통합을 반대하는 이유를 온갖 미사어구를 들어 설명하지만, 실상은 설득력 없는 조악한 논리일 뿐이다. “연합기관에 힘이 생기면, 병폐도 생긴다”며 지금처럼 삼분열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서 장도 담그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전형이다. 연합기관에 힘을 싣고자 하는 것은 이 사회와 교회 내의 불의를 타파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키 위함인데, 애초에 이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처사다. 마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놓고, 주인에게 칭찬받기를 바라는 우둔한 종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하나된 힘이다. 그 힘을 어찌 ‘병폐’라 먼저 단정하는가? 과거 하나였던 한기총이 과도한 권력에 불의한 일을 저질렀던 것은, 그 ‘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를 사용한 이들의 욕심이 컸던 탓이다. 오히려 스스로 한국교회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이제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말고, 제대로 된 연합기관의 기틀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니겠나? 여기에 한교총의 공동대표제를 개정한 것조차 문제를 삼는 것은 그야말로 시대에 역행하는 발상이다. 공동대표제는 권력의 분산이라는 이득이 있을지는 몰라도, 동시에 책임의 분산이라는 엄청난 문제를 내포한다. 단순히 권력의 독점이나, 부정부패를 막겠다는 발상은 그 단체의 대표성을 해칠 뿐 아니라 발전을 저해한다. 예장합동측이 금권선거를 예방하겠다며 만들었던 제비뽑기 제도를 결국 폐지한 것은 ‘인물난’에서 오는 손해가 너무 컸던 탓이다. 그리고 제비뽑기 제도를 폐지하고, 합동측은 통합측을 제치고 교계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스스로가 내부의 권력의 독점이나 부정부패조차 막지 못한다고 단정한다면, 과연 한국교회가 종교로서 무슨 존재가치가 있겠나? 여기에 “한교총 만으로 충분하다. 교단이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열을 고착화하는 동시에, 또다른 분열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 과거 한교연이 한기총에서 분열할 당시, 스스로 한국교회 보수 연합운동의 새로운 대표이자, 대안임을 자신했다. 허나 수년이 지나 한교연에서 한교총이 분열하며, 이제는 한교총이 대표성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권력을 탐하는 ‘교단’들이 있었다. 분열은 또 다른 분열을 정당케 한다. 한교총의 분열이 정당화되는 것은 또 다른 분열을 야기할 뿐이다. 반대로 한교총이 결코 이상적이지 않아야 하는 것은 더 이상 대형교단들이 자기 이권에 맞게 한국교회 연합운동을 좌지우지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새해 한국교회는 다시금 대통합의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품는 지금의 희망이, 세상과 국민을 향한 기쁨과 치유로 열매맺길 기대할 뿐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01-17
  • [기자수첩] 누가 소강석 목사의 정치력을 의심했나?
    모든 대립과 법적 모순 해결, ‘정회’가 살린 한교총 지도자 한 명의 판단이 한국교회 전체를 ‘좌지우지’ 한국교회총연합이 완전한 ‘속회’로 교계 제1의 연합단체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이날 속회는 지난 2일의 ‘정회’가 매우 적법한 ‘신의 한 수’ 였음이 증명된 자리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교계 일각에서는 의장 소강석 목사의 앞선 ‘정회’를 두고, 독단과 불법이라는 비난과 함께 단체의 분열까지도 염려했지만, 소 목사는 이런 의심을 불식시키며, 완전한 ‘속회’로 한교총의 더욱 높아진 위상을 증명했다. 애초 한교총은 상위법과 하위법이 충돌하는 법적 모순과 이에 바탕한 내부의 대립이 실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런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 강행된 정기총회가 결코 순탄할 리 없었고, 자연스레 회의가 점점 파행으로 치닫자, 소강석 목사가 의장 직권으로 ‘정회’를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정회’를 통해 확보한 시간동안 한교총은 근본적으로 내재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시작했다. 미진했던 정관들을 전면 개선했고, 무엇보다 내부 세력 간 대립을 해결했다. 이 시기에 가장 빛났던 것은 역시 소강석 목사의 ‘정치력’이었다. 특유의 화합의 리더십을 통해 단 한 명의 이탈자 없이 모든 문제의 합의를 이끌어 냈고,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회의 내내 단 한 명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견도 없었다. ‘정회’를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진 회의 분위기가 오히려 놀라울 지경이었다. 일부 언론들이 ‘정회’를 보며 한교총이 깨어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결과적으로 정회는 깨어질 위기에 있던 한교총을 살린 ‘신의 한 수’가 됐다. 완전히 뒤바뀐 분위기 속에 새롭게 대표회장에 올라선 류영모 목사(예장통합 총회장)는 ‘정회’의 사실상 가장 큰 수혜자라 볼 수 있다. 만약 지난 정기총회에서 ‘정회’ 없이 임원인선이 강행됐다면, 류 목사는 불법 시비의 중심에 설 것이 확실한 상황이었기에, 소 목사의 정회 판단이 결과적으로 류 목사를 살린 셈이다. 더구나 금번 총회는 3인 공동 대표제를 1인 대표회장 체제로 바꾸는 매우 예민한 회기로, 조금의 하자만 있어도, 당장 시비가 걸릴 판이었다. 허나 ‘정회’가 벌어다 준 시간 덕에 정관 전체를 다시 한 번 손 볼 수 있었고, 류영모 목사가 아무런 반발 없이, 1인 대표회장으로 우뚝 올라 설 수 있었다. 그리고 1인 대표회장 체제에 무사히 안착한 한교총은 앞으로 더욱 강화된 권한과 위상으로 시대의 위기에 정면으로 대응할 기반을 갖추게 됐다. 이번 ‘정회’는 지도자 단 한 명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다. 회원들 간 고성이 오가는 극한 혼란 속에 소 목사가 자칫 ‘정회’를 망설였다면, 새로운 한교총도 없었다. 무엇보다 소 목사가 자신의 판단에 몰아칠 논란과 비난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이는 다름아닌 바로 한국교회였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한국교회에 현명한 지도자, 현명한 정치가 왜 그토록 절실히 필요한 지를 새삼 깨달을 필요가 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12-20
  • [기자수첩] 한교총은 깨지지 않는다
    ‘정회’ 자체가 아닌 ‘정회’로 번 시간을 주목해야 정관개정 보류 시 신 임원 추대에 심각한 모순 발생 ‘한교총, 5년 만에 깨지나?’ 지난 12월 2일 열린 한교총의 제5회 정기총회를 지켜본 한 교계언론 기사의 타이틀이다. 혼란과 대립, 고성 그리고 ‘정회’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듯한 그 날의 정기총회를 바라본 기자의 눈에 한교총의 모습은 분명 불안했고, 막연했다. 무법과 불법의 논란이 끊이지 않고, 절차와 원칙에 대한 서로의 입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습은 분열에 익숙한 한국교회에 있어 결코 놀랍지도 않기에 오히려 씁쓸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 ‘한교총, 5년 만에 깨지나?’란 제목처럼 한교총의 분열을 염려하는 언론들의 의문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면 한교총은 깨지지 않는다. 그 과정이 수월할지, 복잡할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한교총은 결코 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자가 이를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단 한 가지. 바로 ‘정회’다. 한창 분위기가 끓어오르던 정기총회를 한순간에 멈춰버린 고퇴 소리, 그 ‘정회’가 한교총을 살린 것이다. 이날 한교총의 정기총회는 여러모로 불안을 안고 있었다. 정관개정의 기본인 대차대조표가 제공되지 않았고, 사무총장 연임이 걸린 사무처 규정 개정에 있어 대대적인 반발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 총대들 간의 충돌은 당연했다. 물론 그 안에는 정치적 이권과 한교총 내 보이지 않는 대립이 큰 이유를 차지했지만, 그렇다고 눈에 뻔히 보이는 논란의 여지를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그 날의 혼란은 매우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이날의 진짜 문제는 치열한 혼란도, 대립도 아니었다. 의장의 재량에 따라 혼란은 수습하면 되고, 대립은 중재하면 그 뿐이지만, 당장 이를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불법’의 가능성이었다. 이날 정기총회에서 가장 쟁점으로 대두된 문제는 바로 ‘정관개정’, 내용도 내용이지만, 기본적인 대차대조표조차 총대들에 제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를 그대로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분위기 상 정관개정을 보류할 수 밖에 없는데, 바로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사실 정관개정 보류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뒤에 따라올 임원인선으로 엄밀히 말하면 개정될 정관에 맞춰 조각된 ‘신 임원’이었다. 신 임원 추대는 정기총회의 가장 핵심인 만큼 당연히 이뤄질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 되면 개정이 보류된 정관으로 뽑힌 신 임원이 추대되는 매우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당연히 이에 따른 불법시비는 피할 수 없다. 만약 별다른 대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 이날 회의가 그대로 강행되어 신 임원 선출이 이뤄졌다면, 이를 둘러싼 총회 파행은 물론이고, 추후에는 비상대책위원회의 발족과 함께 총회무효 혹은 대표회장직무정지 등의 가처분까지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한국교회 연합단체들이 숱하게 반복해 온 분열의 수순과도 같다. 이날 의장을 맡았던 소강석 목사의 ‘정회’가 한교총을 살린 ‘신의 한 수’ 였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분열의 수순을 사전에 차단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정회’ 자체를 두고 “일방적인 독단”이라는 식의 비난을 쏟아내기도 하지만, 나무가 아닌 숲의 관점에서 이번 사태를 바라본다면, ‘정회’ 자체의 정당성은 결코 아무런 시비거리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정회’를 통해 한교총이 ‘시간’을 벌었다는 사실이다. 상위정관과 하위규정이 충돌하고, 정관개정 자체의 모순도 발견된 상황에 한교총에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강행보다는 이를 바로잡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정회’를 통해 확보된 시간동안 한교총은 내부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해결에 있어 상당한 진척을 이룬 것으로 보이고 있다. 필자가 앞서 “한교총은 깨지지 않는다”고 단언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교총은 이제 오는 20일 속회를 앞두고 있다. 그리고 이제 한국교회가 기대고 기대하는 한교총의 위엄과 신뢰를 보여줘야 할 때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12-16
  • [기자수첩] 한기총의 화합을 가로막는 ‘윤리위원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임시대표회장 김현성 변호사)가 근래 임원회를 통해 단체 내부를 재정비하며, 재도약을 약속했지만, 이에 따른 잡음 역시 끊이지 않고 있어 우려가 일고 있다. 한 달이 지나도록 계속되는 논란의 핵심은 바로 윤리위원회다. 한기총 내 ‘검찰’을 자처하며, 이번 임원회에서 회원들에 대한 대규모 치리를 주도한 곳인데, 이들의 조사와 치리가 결코 공정치 않다는 일부 회원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다. 당시 임원회는 윤리위의 조사와 구형을 토대로 4인에 대한 제명과 3인의 자격정지 2년, 총무협 소집금지 2년 등을 최종 결정한 바 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계속되는 잡음이 일고, 회원들의 반발이 거센 것은 윤리위가 문제 삼은 사유들이 결코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회원정지 2년이 선고된 박OO 목사에 대한 사유는 비상식을 넘어 매우 충격적일 지경이다. 앞서 박OO 목사는 한기총 전 대표회장이었던 전OO 목사로부터 한기총 운영비 횡령 등의 혐의로 고소를 당했는데, 윤리위가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이 사건의 내용 자체는 한기총 운영비 횡령을 다룬 만큼 치리의 충분한 사유가 될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죄가 인정됐을 때의 경우다. 허나 윤리위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하고, 단순히 ‘피고소’ 자체를 문제 삼아 회원 자격 2년을 구형했고, 임원회는 이를 받아들였다. 일반적인 상식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총무협과 총무협 회장 김OO 목사는 한기총 명의를 불법 사용해 합동측에 서신을 발송했다는 혐의로 회원자격이 정지됐다. 총무협이 한기총의 허락을 득하지 않고, 한기총 명의로 합동측에 서신을 발송했다는 것인데, 이를 두고 총무협 회원들의 반발이 매우 거세게 일고 있다. 이들은 먼저 한기총의 명의를 불법으로 사용했다는 혐의에 대해 공문의 주최가 ‘한기총’이 아닌 ‘한기총 총무협’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애초 이를 한기총 명의 도용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특히 총무협은 출범 이후 그간 자체적인 공문을 수시로 띄우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치리가 매우 객관적이지 않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공문 내용 자체가 ‘한국교회 통합을 위한 합동교단의 한기총 복귀’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오히려 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벌을 줬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더욱이 한국교회 통합은 한기총도 적극적으로 임했던 상황, 이런 윤리위 모순된 판단에 교계 언론들도 나서서 이를 비판하는 실정이다. 윤리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애초 윤리위가 객관적인 조사나 판단이 불가능한 집단이라는데 입을 모으고 있다. 전임 대표회장 시절, 윤리위로부터 수차례나 제명당한 인물이 위원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결코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임원회에서 윤리위원장은 자신이 전임 윤리위로부터 7차례나 제명 당했다는 사실을 수차례나 얘기했었다. 그리고 우연(?)찮게도, 이날 제명당한 이들 중에는 전임 윤리위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기총은 지난 2년 가까이 임시 체제를 유지 중이다. 최근 가까스로 2차례의 임원회를 구성하며, 정상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비상적 조치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시급한 사안 외에 용인될 수 있는 안건은 없다. 누군가를 치리코자 한다면, 임시 체제가 아닌 정상 체제에서 이뤄져야 함이 옳다. 지금은 안으로는 한기총의 정상화, 밖으로는 한국교회의 통합을 위해 모든 전력을 기울어야 할 뿐, 시기에도 맞지 않는 이러한 치리는 밖에서 볼 때 그저 허울좋은 칼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한기총은 전임 대표회장 시절, 이미 숱한 내부 분쟁을 겪었다. 그 와중에 지금의 윤리위원장처럼 무려 7차례나 제명당하는 매우 불의한 일도 일어나고 말았다. 허나 그것이 불의한 일이었다면,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장담컨대 이대로 가면 또다시 칼부림의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한기총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더 이상 과거의 기억에 발목이 메이지 말아야 한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12-04
  • [기자수첩] “한국교회, 제2의 펜데믹을 대비하라”
    일일 확진자 최대, 오미크론의 등장 ‘제2의 펜데믹’ 확실 ‘원 리더십’ ‘원 메시지’ 없는 한국교회, 위기 앞에 여전히 불안해 분위기가 다시 심상치 않다. ‘위드코로나’를 기념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현재, 코로나 확진자가 연일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증가 수치가 ‘위드코로나’ 전환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전 국민 백신 접종률이 80%에 달하며, 사실상의 집단면역이 이뤘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믿었던 해법이 무너진 매우 절망적 상황임은 분명해 보인다. 결정적으로 ‘델타’ 변이의 전파력에 500%에 달한다고 알려진 신종 변이 ‘오미크론’의 등장은 결코 상상키 싫은 제2의 펜데믹을 현실로 이끌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꿈꿔왔던 일상회복은 또다시 수면 위로 가라앉고 있다. 방역당국은 다시 최고수준의 방역강화를 검토하고 있다. 마땅한 해법이 보이지 않은 상황에, 일단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다시 일상의 모든 것을 묶는 것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 우리의 시선은 당연히 교회의 예배로 쏠린다. 그토록 원하고 갈구하던 ‘예배회복’이 고작 한 달 만에 다시 무너질 우려가 크다. 텅 비어진 예배당, 찬양을 부르지 못하는 찬양대, 결코 떠올리기 싫은 펜데믹의 기억은 한국교회에 있어 되돌아갈 수 없는 잔혹한 트라우마가 됐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이상 예배의 자유를 빼앗길 수 없다. 목숨보다 귀한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던 아픔을 기억하기에 이제 우리는 예배를 수호키 위한 전향적인 자세를 갖춰야 한다. 일단 지금의 상황 앞에 냉정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비판이나 남 탓은 또다시 찾아온 위기를 타개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이를 바탕으로 한 대비가 필요하다. 한교총 대표회장 소강석 목사는 한 달 전 한국교회에 ‘예배 회복’에 대한 소식을 전하며, 동시에 제2펜데믹을 대비할 것을 강력히 주문한 바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이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결코 쉽게 사그러들지 않을 것이기에, 이를 미리미리 대비해, 교회와 예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교회는 이미 펜데믹에 대한 경험이 있어, 이에 대한 대비책 역시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확실히 아는 만큼 제대로 대비한다면, 결코 펜데믹이 예배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였다. 허나 이러한 바램과 달리, 한국교회의 현실은 2년 전 코로나 초기와 여전히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면 된다”는 듯 폭풍전야의 고요함에 그저 평안히 안주하려는 안일함이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 일각에서는 여전히 상대를 구분치 않는 비판과 내부총질에만 열을 올리는 있다. 남에 대한 비난 속에서도 스스로의 존재감을 입증하는 행태는 당장의 위기 앞에서도 이성적 판단을 불능케 할 뿐이다. 지난해 초 신천지 사태가 터질 당시, 소강석 목사 등의 일부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의 선제적 대처를 강조했었다. 당장 방역 체계를 완벽히 구축치 못하면, 언젠가 정부의 통제가 교회 안으로 뻗칠 수 있다는 경고였다. 그리고 그 일은 현실이 되어, 지난 1년 넘게 한국교회의 예배를 탄압해 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에 연연하는 것이 아닌, 과거를 통해 미래를 대비하는 현명함이다. 우리는 과거의 실패를 통해 선제적 대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당장 이번 한 주간이 앞으로의 교회 예배를 사수할 골든타임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 다시금 씁쓸해지는 것은 9부 능선에서 멈춰버린 한국교회의 대통합이다. 1차 펜데믹 당시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했던 ‘원 리더십’ ‘원 메시지’가 아직까지도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한국교회의 가장 큰 불안요소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무지’라고 했다. 제2의 펜데믹을 앞둔 지금, 한없이 무지한 이들에 대통합이 가로막혔다는 사실은 한국교회 역사에 두고두고 남을 통한이 될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11-28
  • [기자수첩] 진실을 외면한 비판은 폭력이다 #소강석 목사 #정부 #사과
    이쯤되면, 애초부터 진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듯 보인다. 그저 잘못된 오해나, 가짜뉴스에 의한 헤프닝일 것이라 생각했던 사건이 어느 순간 맹목적인 비판으로 흘러가고 있는 모양새다. 그저 ‘비판을 위한 비판’, ‘반대를 위한 반대’에 매진하며, 수면 위로 드러난 진실을 애써 외면하는 자기합리화는 지금 이 상황을 매우 지저분한 밑바닥으로 이끌고 있다. “소강석 목사는 한국교회가 정부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모 단체의 대표인 한 원로 목회자의 발언, 그리고 이를 미끼로 대중들의 분노에 불을 지핀 단체 소속의 일부 목회자들, 이들이 제기한 문제의 핵심은 바로 ‘정부’와 ‘사과’였다. 허나 소 목사는 애초 ‘정부’란 말을 꺼낸 적이 없다. 엄밀히 ‘사과’를 직접 입에 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를 바로 잡을 틈 없이, 해당 발언은 완전한 사실이 되어 세간에 일파만파 퍼져 나갔고, 이를 접한 대중들의 분노는 다시 고스란히 소 목사로 향했다. 자연스레 ‘진실게임’ 양상으로 접어든 이 사건에서 다행히 당사자인 원로 목회자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적극적인 유감을 표했지만, 문제는 그 주변인들이었다. 소 목사를 위해 해명방송까지 하겠다는 대표의 입장조차 무시한 채, 여전히 해당 발언이 사실임을 주장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결국 보다못한 교계 언론들까지 나섰다. 문제의 발언 자체가 지난해 말 예장합동측이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나왔다기에, 당시 자리에 참석한 언론들이 스스로 그때 상황을 증언하고 나선 것이다. 기자회견 현장에서 이를 직접 목격한 목격자들의 증언과 팩트 체크, 더 이상 이보다 정확한 진실은 없을 것이기에, 매우 이례적이지만, 언론들의 증언은 불필요한 분란 해소에 분명 도움이 될 듯 보였다. 하지만 며칠 후, 올라온 한 목회자의 반박 영상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애초 “정부에 사과해야 한다”는 말을 문제 삼았던 상황에서, 기자들의 증언이 이어지자, 말을 슬그머니 바꿔 사과를 한 것 자체가 문제이지, 그 대상은 전혀 중요치 않다는 듯 말한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소 목사는 사과란 말은 한 적이 없지만, 발언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사과였고, 특히 이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든 정부에게 사과하든 사과해야 한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애초에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 모 단체 대표인 원로 목회자는 “소강석 목사가 한국교회가 정부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발언했다. 그리고 이 비판의 핵심은 바로 ‘정부’였다. 하지만 ‘정부’란 단어가 완전한 거짓으로 밝혀지자, 이제는 소 목사의 발언을 “국민에게 사과하든 정부에게 사과하든 사과해야 한다”로 새롭게 꾸며내며, 자신들의 거짓을 감추려 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진실이 드러난 상황에, 억지로 이어가는 비판은 무리일 수 밖에 없다. 그의 논리를 축약하면, 한국교회는 코로나 사태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 잘못하지 않았으니 국민에게 사과해서는 안된다 -> 소강석 목사와 한교총은 국민들에 사과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을 말리지 않았다 -> 이를 말리지 않아 한국교회가 코로나 발원지로 인식됐다 한국교회가 국민에게 사과를 함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꼴이 되고, 이로인해 한국교회가 코로나 발원지가 됐다는 논리인데, 이러한 발상 자체가 매우 놀라울 지경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국민들에 대한 사과에 매우 적극적인 종교다. 어쩌면 단 한 순간도 국민들에 대한 미안함을 가지지 않은 적이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특히 지난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 당시에는 “한국교회가 국민들 앞에 잘못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한국교회가 함부로 사과조차 해서 안되는 그런 고고한 종교가 되어 버렸나? 더욱이 일부 교회에서 부정할 수 없는 대규모 확산까지 터져, 이를 우려하는 국민들의 시선이 가득한 상황에, 사과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만약 한국교회가 혹 국민들에 코로나 발원지로 잘못 인식됐다면, 그것은 ‘사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정부와 언론의 잘못된 여론몰이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소 목사는 올 초 이러한 문제를 매우 정면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또한 그는 소 목사측이 비판 영상을 내리라고 요구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소 목사측은 그런 적이 전혀 없었다는 반응이다. 사실 원로 목회자나 위 목회자가 속한 단체는 한국교회를 매우 사랑하고 예배를 사랑하는 단체다.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사역을 하면서 굳이 남을 비판하며, 자신을 드러낼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지금 한국교회의 예배 회복을 위해 노력해 왔던 모두는 서로간의 방식이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그것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니다. 오직 자기 기준으로 남을 평가하며, 이를 비판하는 것은 상대방에 충분히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최근 한국교회가 이뤄낸 예배회복은 모두의 노력이 더해진 결과다. 어느 한 사람, 혹은 어느 한 단체만의 노력으로 쟁취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 목사 역시, 충분히 이를 인정하고 있다. 예배 회복이 발표된 당일 소 목사는 자신의 SNS에서 한교총 뿐 아니라 한국교회 주요 연합단체들과 중요 단체들을 거론하며, “모두의 노력”이라고 감사를 전한 바 있다. 그리고 그 감사 속에는 바로 위 단체도 들어 있었다. ‘위드 코로나’에 접어든 한국교회는 이제 새로운 출구 전략을 도모하고, 이를 실행해야 한다. 그저 비판을 목적으로 한 불필요한 시비는 위기를 가까스로 견디고 버텨낸, 개교회들의 회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제 진정 한국교회의 미래와 온전한 회복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힘을 합쳐야 할 때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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