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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어처구니 없는 교단 분열의 명분
    한국기독교는 교파주의 교회로 구성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 그들 교파에서 갈라진 교단까지 300여 개에 이른다. 교회의 분열이 심각하다는 뜻이다. 가장 심각한 분열은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이다. 어떤 공동체든 그것이 분열하면 그 집단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교회가 대내외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이유도 바로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해 있다는 약점이다. 그런데 이 장로교 교단분열의 명분이 참으로 희안하다. 신사참배 문제로 갈라진 고신측과 신신학적 문제로 갈라진 기장측을 제외하고, 예장의 분열에는 모두 WCC나 NCCK가 등장한다. WCC는 1948년 결성된 국제기구인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를 이르는 말이고, NCCK는 1924년 한국기독교의 유일한 교단연합체로 결성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 이어 1946년 '한국기독교연합회'에 기반을 둔 순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1970년 개명)를 이르는 말이다. WCC는 세계 1,2차 대전으로 수많은 인명이 무고히 희생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세계교회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는 자괴감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평화를 위해 뭔가를 해 보자고 모인 세계 교회의 모임이다. 이 모임에 참여한 한국교회는 예장통합, 기장, 기감, 한국성공회로, 단 4개 교단 뿐이다. 한국교회의 300여 개 교단 중에 단 4개 교단만 가입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WCC가 생기기 전부터 한국교회를 대표해온 NCCK에는 예장통합, 기장, 기감, 성공회, 복음교회, 루터교, 기하성, 한국정교회 등 단 7개 교단만 가입해 있다. 그런데 뭐가 두려워서 예장쪽 인사들은은 교단을 새로 만들 때마다 'WCC와 NCC를 반대한다'는 명분을 앞세우는지 알 수 없다. 솔직히 한국교회에서 교단 따로 차례 나가는 그들에 대해 WCC나 NCC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예장 소속 목회자들 중에 막상 WCC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도 알 수 없다. 대부분이 '용공주의'니, '종교혼합주의'니, '동성애 지지'니 하는 남들의 비난에 그냥 동조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WCC의 에큐메니칼운동은 용공주의도, 종교혼합주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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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6-15
  • [사설] 북한의 지금 외교정책으로는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없다
    북한의 지난해(1920년) 국민소득(GNI)은 우리 돈으로 1인당 141만원이었다. 전년 대비(141만8000원) 약 2만원 정도가 줄었다. 이는 남한의 27분의 1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세계에서 최하위 수준이다. 북한의 이 같은 경제 실패는 미국이나 유엔의 제재 때문만은 아니다. 제재 이전에 이미 고난의 행군이니 뭐니 하며 대량 아사 사태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북한 인민들의 목숨을 건 탈북사태가 이어졌음을 세계가 잘 알고 있다. 원인은 북한의 외교 정책의 실패에서 온 것이다. 1945년 해방 후 남북한이 갈라질 때 북한의 경제는 남한 지역보다 월등이 앞서 있었다. 김일성이 6.25 전쟁을 일으키고 사회주의 정책을 고수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 대결한 결과가 오늘의 현실을 낳은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지금의 사회주의 경제정책으로는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립을 자초하며 인민의 삶을 왜 이토록 피폐하게 방치하는가. 이유는 권력 세습에 있다. 봉건사회의 왕조가 아니면서도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 세습 국가는 북한 외에 사회주의 국가 어디에도 없다 북한이 과연 핵과 미사일로 무장했다고 해서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마도 개혁개방 노선으로 외교 경제 정책을 바꾸기 전에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이대로는 정상적인 국가로서의 구실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유엔의 회원국이면서도 이미 외교 무대에서 정상적인 국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더 어리석은 정책은 아직도 남한에 대해 적화통일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소득 1인당 141만원으로 그 몇 십배가 넘는 경제대국인 남한을 먹겠다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한 남북한의 경제 규모는 갈수록 더 벌어지게 될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21세기는 경제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국가의 국방 안보 어떤 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이 사느냐 죽느냐는 핵이나 미사일 개발이 아니라 외교 정책에 달렸다. 북한은 미국의 트럼프 정부 때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 이제 바이든 정부가 어떤 정책을 내어놓느냐에 따라 북한의 미래가 달렸다. 지금의 반미정책과 남한에 대한 적화통일 정책으로는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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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6-15
  • [연지골] 분열의 상징
    우리사회에는 ‘대한경신연합회’(大韓敬信聯合會)라는 무속집단 조직이 있다. 이 단체는 무당 등 무속과 관련해 활동하는 사람들이 회원으로 가입한 단체이다. 그런데 본래 무속 사회는 그 어떤 조직도 없었다. 이유는 무당은 그 섬기는 신(神)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연합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단체가 한때 60만 회원을 거느리고 신한국당 직능단체로 활동하기도 했다. 자신이 섬기는 신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들의 무속 활동에 도움이 된다면 함께 모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조직된 정치단체가 대한경신연합회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집권세력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성은 매우 혼란스럽다. 섬기는 신이 다른 사람들끼리 한 자리에 모여 공동의 목표를 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당은 철저하게 분열되어 있다. 따라서 무당이 지배하는 사회 역시 불신과 분열이 지배할 수 밖에 없다. 무속과 미신이 사회 발전에 위해(危害)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현대사회는 무속을 경계한다. 그럼에도 신년이 되면 당골네나 점집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올해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좀 수그러 들었지만, 그래도 연초에 수 많은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 새해 운수를 점쳤다. 뿐만 아니라, TV나 대중 언론 매체들이 흥미 위주로 무당 사회를 방송하거나 또는 어떤 잘 알려진 특정 인물이 어떤 계기로 무병을 앓다가 무당이 되었다며 연예 프로 등에 소개한다. 그러나 무속 사회가 가진 분열의 속성을 안다면 이런류의 프로그램 제작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떠한가? 기독교는 오직 ‘하나’의 신을 믿는다. 살아 계시고 참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 6). 그런데 어찌하여 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갈갈이 분열해 있는가. 신앙도, 신학도, 교리도 모두 똑 같은데 분열한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교회는 신앙적 윤리적 수준이 무속 집단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런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로지 ‘하나’이다. 나와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 자체가 곧 '이단'인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이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는가. 마치 무당네처럼 300개 장로교단 부끄럽지 않은가? 아무런 힘도 없이 갈라져 있는 교단연합 단체가 부끄럽지 않나?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은 더러운 이(利)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딛 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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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5
  • [데스크칼럼] 부패 완판
    현 정부 여당이 검찰개혁이란 명분 아래 '검수완박'을 말하자, 당시 검찰총장 윤석열은 검수완박은 곧 '부패완판'이라고 응수했다. 검수완박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한다는 뜻이다. 이에 윤석열은 그렇게 되면 부패가 완전히 판치게 될 것이라고 맞 받은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정치권과 검찰과의 권력 다툼의 한 단면을 한 마디로 보여주는 말이다. 에덴에서 타락한 인간은 욕망과 욕심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인간의 그 욕심은 끝이 없다. 그것이 재물이든, 명예든, 지식이든, 거기에 욕심이 개입되면 쌓고 또 쌓아도 한이 없다. 특히 재물에 대한 욕심은 인류 사회에 물질문명의 번영을 촉진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 윤리를 일탈하면 인간 사회 전체를 타락시킨다. 인간의 이 욕심을 다스리기 위해 나타난 것이 종교(宗敎)이다. 모든 종교의 근본은 타락한 인간이 가진 욕심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인간 본디 모습을 회복하라고 가르치는 데 있다. 축(軸)의 시대에 나타난 인류의 스승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욕심을 경계했다. 그래서 종교의 교조들을 모두가 존중하고 그 가르침을 받드는 것이다. 인류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사회적 가치관은 그 사회의 주류종교에서 나온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20세기에 공산주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있었지만, 공산주의는 한 세기가 다하기 전에 소멸해 가고, 역시 그 자리를 종교가 대체해 가고 있다. 그런데 이 막중한 사명을 가진 종교마저 교권화 되고 세속화 되어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종교와 함께 그 사회도 결국 망하고 만다. 그것은 수 천년의 역사를 가진 클래식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와 종교가 한 배를 탄 꼴이다. 그리하여 종교가 그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재물이나 명예심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그 종교는 진리를 설파하는 '참된 종교'가 아니라 '세속주의화 된 종교'로 전락한 것이다. 그것은 간판에 붙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무늬만 종교일 뿐, 그런 종교는 사람을 회개시키거나 또 사회를 변화시키는 아무런 영적 능력도 갖지 못한다. 오로지 사회 구성원의 한 이익집단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교회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한다. 빛과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정치권이 검찰의 수사권을 박탈하여 사회에 부패가 완전하게 판치게 된다면 그거야 말로 사회를 타락케 하는 적폐이다. 이 때는 반드시 부패를 막아야 할 사명이 있는 종교가 나서야 한다. 종교가 헌법상 정교(政敎) 분리원칙만 되뇌이며 부패한 권력을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 앞과 그 사회에 죄를 짓는 것이다. 사회적 부패를 막아야 할 책무가 종교에 있기 때문이다. 검찰총장 윤석열의 '부패완판'(腐敗完판)이란 화두가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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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2021-06-15
  • [사설] 팬데믹으로 잃은 교인 성경공부로 다시 찾자
    한국교회는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그 어느 기관보다 큰 피해를 입었다. 더구나 방역당국의 대면예배 금지조치가 교회에 끼친 부정적 영향은 너무 깊다. 백신 접종으로 금년 하반기가 지나면서 팬데믹 상황이 풀린다 하더라도 교회의 회복은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사실 방역당국이 걸핏하면 교회를 표적으로 옥죄는 동안 세속 언론들의 무분별한 보도는 마치 교회가 코로나19의 진원지 마냥 떠벌여 교회가 너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질병관리청의 지난 1년간 코로나19 확진자 감염원 발표는 교회발 확진자가 11%로 나타났다. 이조차 모두 교회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고 밖에서 전염된 것이다. 그러나 국민여론은 교회발 확진자가 44%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목회데이터연구소).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것은 방역당국이 만만한 교회를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급락했다는 조사도 있다. 그렇다고 팬데믹 이후 그들을 탓하고만 있을 수 없다. 교회의 부흥을 꿰해야 한다. 역사적 교회는 시대마다 두 가지 원리에 의해 이끌려왔다. 하나는 성령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이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사도들을 부흥현장으로 내몰았고, 중세교회는 성경이 부흥운동을 이끌었다. 20세기에 시작된 현대오순절 성령운동으로 급성장한 한국교회도 이젠 성경으로 그 내실을 다져야 한다. 특히 팬데믹으로 위축된 교회를 바로 세우는 데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치는 것이 가장 유익한 일이다. 먼저 소수 정예에게 성경을 가르치다 보면 어느 날 교회 안에 한국교회를 살리는 새로운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로 불리는 농민운동가 그룬트비 목사가 19세기 후반 덴마크가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온 국민이 좌절과 실의에 빠졌을 때,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다사 찾자"며 삼애운동(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땅 사랑)을 일으켜 나라를 구했듯이, 한국교회도 이제 팬데믹으로 잃은 교인들을 성경공부로 다시 찾는 운동에 나서야 할 때이다.
    • 연지골
    • 사설
    2021-06-15
  • [사설] 그래도 분열을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
    코로나 팬데믹이 남긴 구호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였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만고의 진리가 무색케 된 것이다. 그러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는 교회건, 사회건 똑같이 영원히 적용된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둘 다 같은 당에서, 같은 지지자들에 의해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란히 감방에 가서 앉았다. 이 엄청난 역사적 사건은 그 원인이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소위 그 잘난 '친이계'와 '친박계' 간의 분쟁의 결과이다. 2017년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해 온갖 수작을 부리고 광화문에서 촛불이 난무했다 하더라도 국회에서 박 대통령 탄핵에 동조한 친이계의 반란이 없었다면, 헌법재판소의 탄핵재판이 있을 수 없고, 박 대통령이 임기를 끝까지 마쳤다면, 이명박도 감방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비단 정치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교계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수백 개의 교단으로 갈라져 있는 한국교회는 오로지 연합과 일치만이 그 답이다. 그러나 교계는 교회협을 비롯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으로 나누어져 대표성을 잃고 연합과 일치는 간데 없이 사라진 상태이다. 거기에다가 코로나로 인해 모임도 가질 수 없으니 교계연합은 그 존재조차도 희미해져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 코로나는 이달부터 시작된 백신 접종이 이루어지면 후반기에는 우리사회가 어느 정도 일상적 활동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계 역시 이에 적극적 대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이 보수교계 연합단체들의 통합이다. 그래야만 팬데믹으로 침체된 한국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늦어도 상반기 중에는 이루어져야 한다. 옛말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언필칭 1천만 기독교인을 자랑하는 한국교회 역시 연합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회를 향한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다. 교계를 대표해야 할 연합단체들이 분열한 사이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세속 상업언론과 좌파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이대로는 안된다는 자학적 목소리가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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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5
  • [연지골] '몸의 부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기독교 외에 그 어떤 종교도 부활을 논한 경전을 가진 종교는 없다. 부활이란 개념은 성경이 제시한 특수용어로서 하나님이 인간과 약속하신 구속사업의 가장 핵심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에게€에덴의 모든 과일은 임의로 먹되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나 하와와 아담은 뱀의 유혹으로 그 경고를 무시하고 그 나무의 과일을 먹고 죽은 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인간세계에€죽음이란 특수현상이 들어왔다. 죽음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생긴 죄의식의 열매였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인간은 영생의 존재로 창조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창 3:20). 첫 사람 아담은 생령으로서 산(生) 자였고, 하와는 모든 산(生) 자의 어미로 지음 받았다. 그런데 하와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그 죄로 인해 죽은 자가 되어 하와는 ‘모든죽은(死) 자의 어미’가 되고, 아담의 허리에 있던 모든 인류는 죄 아래서 죽은(死) 자로 태어나게€된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인간론이다. 따라서 죽음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특수의식이다. 다른 생물들은 살다가 소멸되어€갈 뿐€그들에게는 죽음의식이 없다. 그리고 생령으로 지음받은 인간만이€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욥은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욥 15:14)라고 고백한다. 이는 아담의 범죄 이후 인류역사는 하와가 낳은 죽은 자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품 안에 있던 독생하신 하나님을 성령으로 잉태한 동정녀 그가 곧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만이 흠과 점이 없는 자이다(벧전 1:19). 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보내셨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따라서 그리스도의 그 말씀이 곧 생명과이다. 이 생명과를 먹는 자는 마지막 날 영생의 부활에 이르게 된다. 그때 살아있는 자는 그 몸이 변화되어 본디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된 생령이 되고, 죽은 자는 그 몸이 부활하여 생령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의 부활을 체험한 기독교는 처음부터 인간의 몸의 부활을 믿었다. 사도신경은 “몸이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하고,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그가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몸으로서 부활할 것”을 고백하며,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마지막 심판 날 살아남아 있는 성도들은 죽지 않고 그 몸이 변화될€것이며, 이미 죽은 모든 성도들은 전과 같이 여전한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질적인 면에서 그 전과 같지 않으며, 그 몸은 자신의 영혼과 영원히 결합하게 될€것이다”(제32장)라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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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5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자유의 가치, 종교의 자유’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막대한 희생 위에서 세워진 것이며, 그것을 인지하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간에 우리는 받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발간된 6.25전쟁에 관련된 가슴 아린 책이 나왔다. “후크고지의 영웅들”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와는 특별한 교류관계도 없었던 영국이 1950년 소련, 중공, 북한의 공산군이 불법과 무력으로 남침해 왔을 때,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하는데, 그때 영국군이 치룬 전투 가운데, 1953년 5월 28일 경기도 연천 일대에서 영국의 웰링턴 연대와 중공군 1개 사단이 50시간이 넘는 육박전을 벌이는 참혹한 혈투 속에서 후크 고지를 지켜내므로 연천군의 정남면, 백학면, 미산면, 왕징면 일대를 자유의 품에 들어오게 한 전투에 참여했던 노병들이 수기를 모아 책으로 지난달에 발간한 것이다. 6.25를 통하여 국군 62만명, 유엔군 16만명, 민간인 250만명, 이재민 370만명, 전쟁과부 30만명, 전쟁고아 10만명, 이산가족 1,000만명 등 남북한 인구 3,000만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였다. 그 당시 참전했던 한 영국군 병사의 아내가 쓴 편지를 이 책에서 소개하는데, 앞부분을 살펴보자. ‘남편은 1943년 버마와 인도에서 복무한 바 있었고, 1946년이 되어서야 예비군이 되어 귀가했다. 우리는 지역의 가스 공장에서 일하면서 고용주가 빌려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집배원이 가지고 온) 편지를 가지고 위층으로 올라가 야근에서 돌아와 막 자려던 남편을 깨워 전달하였다. 그 내용은 (1950년) 8월 10일까지 콜체스터 부대에 입영하라는 동원 영장이었다. 남편은 가스 공장 사장에게 더 이상 일할 수 없다고 알려야 했다. (나는) 우리가 남편이 입대한 후 이 집에서 계속 살 수 있을까? 마지막 봉급은 어떻게 되는가?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았다. 나는 매일 울어야 했다. 큰 아이는 1년 8개월, 작은 아이는 8개월짜리였다...’ 영국군은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사를 한국의 전쟁터에 파병하여 연인원 56,000명, 전•사상자 5,000명으로 우리나라를 지켜 주었다. 뿐만이 아니라, 6.25전쟁 당시 전투 부대 파병 국가가 16개국, 의료지원국이 5개국, 물자 및 재정지원국이 39개국, 지원의사 표명 3개국, 그래서 당시 유엔에 가입된 국가 가운데 공산국가를 뺀 대부분의 나라인 63개국이 우리를 지원했다. 그들의 피와 희생이 오늘의 우리 “자유”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래서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알고 있는가? 지난해부터 시작된 코로나는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였다. 최근 “예배회복을 위한 자유시민연대”(이하 예자연)의 활동에 보니, 전 국무총리를 대상으로 민사소송과 공직감사를 청구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지난 해 7월 8일 당시 총리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 모두 발언에서 ‘최근 감염 사례를 분석해 보면 교회의 소규모 모임과 행사로부터 비롯된 경우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교회에서의 모든 대면 예배 중단과 활동 제한 문제가 논의된다. 이틀 후인 10일 정부로부터 전국 교회에 시달된 내용에는 이와 같은 방역 금지 조항들과 위반 시 3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8월 19일 국무총리의 대국민 담화가 있었고, 이런 내용들은 강화되고, 8월 27일 청와대에서 가진 교계 지도자들과의 모임에서도 대통령도 ‘8월부터 시작된 코로나 재확산의 절반이 교회에서 일어났다’는 말을 하였다. 이에 예자연이 올해 3월 5일 국무총리실에 ‘감염 사례 절반이 교회에서 나왔다’는 진위여부를 질의하였고, 3월 12일 답신에서, 7월 5일부터 7일 사이, 교회발 확진자가 49.4%였다는 답을 들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질병관리청 자료는 이와는 다른 퍼센테지를 차지하여, 다시 4월 1일 추가로 질의하니, 12일 답이 오기를, ‘2020년 1월부터 7월 7일까지 신천지를 포함한 종교 시설에서 발생한 확진자가 44%를 차지한다’는 동문서답의 황당한 답을 들었다고 한다. 언제부터 신천지가 기독교로 편입되었나? 총리의 정확하지도 않은 자료에 의하여 한국교회가 지난 1년 동안 ‘종교의 자유’ 즉 ‘예배의 자유’가 침해를 당했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인간에게 ‘자유’는 수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자기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타인의 것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함이 있다면, 이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지켜야 하겠는가? 이 땅에서의 자유는 그렇게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잠시의 방심을 틈타서, 그것을 우리가 지키지 못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정부는 지난 2월 1일 중앙재난대책본부 방역총괄반장과 중앙사고수습본부 사회전략반장의 입을 통하여, ‘(예배 환경이) 밀집도가 상당히 낮고, 마스크 착용, 손 씻기, 사전 방역조치 등이 이뤄지기 때문에 교회에서 대면예배를 통한 감염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럼 코로나의 진원지처럼, 온갖 비난과 저주와 욕설을 해댄, ‘교회발’은 무엇이었나? 우리는 정말 자유의 가치를 알고 있는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를 모든 자유의 근본이요, 시작임을 인식하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 연지골
    • 토요시평
    2021-06-15
  • [기자수첩] 한국교회 대통합 “모든 준비는 끝났다”
    코로나 위기로 ‘대통합’의 필요성 절감 소강석 목사의 ‘7단계 통합안’ 실현 가능성 높여 어느덧 2021년 새해도 중반을 향해 흘러가고 있는 가운데, 한동안 주춤했던 교계 대통합의 목소리가 다시금 고조되고 있다. 오랜만에 교계 대다수가 한 자리에 함께하며, 대통합의 가능성을 내비친 지난 부활절연합예배가 새 시대를 향한 한국교회 변화와 각성의 새로운 시발점이 된 것이다. 가뜩이나 다툼과 분열로 얼룩졌던 한국교회에 깊게 스며든 우리 사회의 정치적 이념 갈등이 교계의 통합마저 정면으로 가로막던 불의한 상황에, 금번 부활절은 복음 안에서 진보와 보수도 하나라는 부활절연합예배 본래의 취지를 그대로 되살리며, 꺼져가던 대통합의 불씨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물론 한국교회의 통합이 당장 어제 오늘만의 주제는 아니었다. 지난 한기총과 한교연의 분열 이후, 현재까지 한국교회에 발표된 통합선언만 무려 4차례에 달했고, 특히 한교총과 한교연은 통합총회까지 열었지만, 결국 통합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한국교회에 있어 통합이라는 단어는 ‘양치기 소년’의 “늑대가 나타났다”는 외침처럼, 어떠한 신뢰도, 감동도 주지 못하게 됐다. 그저 때 되면 벌어지는 교계 정치꾼들의 허울좋은 ‘이벤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교계의 움직임은 확실히 예전과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단체의 수뇌부 혹은 정치꾼들이 무언가를 취하기 위한 꿍꿍이가 아니라 순수한 ‘통합’ 그 자체만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이다. 한국교회 전체에서 모이는 기대가 결코 아깝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번 ‘대통합’의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수년 째 계속된 한국교회의 추락이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바닥 끝에 맞닿아 있다. 형제간의 다툼도 먹고 마실 것이 풍족한 집안에서나 가능한 일, 코로나 이전부터 계속된 한국교회의 오랜 침체는 연합단체의 운영마저 힘들게 만들었다. 존립할 능력도, 이유도, 명분도 없는 상황이 점차 고조되는 것은 반대로 대통합에 대한 당위성을 제공하고 있다. 둘째는 코로나 펜데믹의 충격이다. 코로나가 한국교회를 큰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한국교회를 각성케 한 계기가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사실 한국교회의 위기는 딱히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심각했고, 계속 진행 중이었다. 더욱이 당시 한국교회는 지속적인 다툼과 분열, 맘몬에 오히려 무너지는 천장조차 의식하지 못할 만큼 위기에 둔감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 전례 없는 펜데믹을 가져온 코로나는 위기에 물든 한국교회에 매우 효과적인 충격요법으로 작용했다. 결정적으로 코로나는 이념 갈등에 신음하는 한국교회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코로나 발생 이후, 정부의 부당한 예배제재에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황, 정부의 반기독교 정책은 한국교회가 하나로 힘을 합칠 명분을 제공했다. 물론 대정부 정책을 놓고, 내부의 이견이 심각히 갈린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교회의 보호’라는 궁극적 목표가 같다는 점은 통합을 위한 충분한 합의점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재 한국교회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의 결단이 남다르다는 점이다. 사실 위 두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도, 교계 지도자들이 서로 손을 잡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통합에 이를 수 없다. 그간 한국교회가 수차례가 통합을 논의하면서도, 정작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탓이 바로 이들의 정치적 경쟁과 실무자들의 이해관계가 얽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하나됨이라는 거대한 명제를 위해 누구보다 먼저 스스로를 희생했어야 할 이들이 욕심 앞에 단 하나도 내려놓지 못했기에, 한국교회는 하나가 되지 못했었다. 올해가 기대되는 것은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된다”는 공통적인 문제제기에, 모든 교계 지도자들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금번 부활절연합예배에 한국교회의 참여율이 더욱 돋보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가 바탕에 있다. 여기에 현재 한국교회의 최일선에서 통합 작업을 이끌고 있는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의 존재는 대통합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이고 있다. 지난 9월 예장합동 총회장, 12월 한교총 이사장에 오른 소 목사는 근 2년 새, 한국교회 최고 지도자로 우뚝 섰다. 그런 소 목사가 취임 이후, 자신이 가진 거대한 내·외적 영향력을 오직 ‘통합’에 쏟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에 상당한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최근 소 목사가 발표한 ‘7단계 통합안’은 통합을 위한 전제부터, 행동요소, 시간별 추진 사안 등 통합을 위한 실제적인 요소를 담고 있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이전 통합 논의에서는 찾아 볼 수 없던 것으로, 소 목사는 그간 통합을 가로막았던 여러 방해요소들을 가감없이 지적하는 등, 한국교회의 분열과 통합에 대한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제 한국교회는 대통합을 위해 본격적인 행보에 나섰다. 목표로 삼은 통합을 위한 최종 시한은 고작 6개월 남짓,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통합에 대한 당위성이 섰고, 의견이 뭉쳤으며, 실행을 위한 모든 분석과 준비가 끝난 상황인 점을 감안하면,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다. 남은 것은 바로 이 글을 읽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결단이다. 지금 교계에 뜨겁게 불어닥친 ‘대통합’의 열기가 반드시 그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바로 당신부터 하나됨을 위한 위대한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할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4-27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미얀마의 민주화, 북한의 인권’
    미얀마에서 지난 2월 1일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고, 유혈사태가 벌어져 세계를 경악케 한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비난과 제재를 가하는 등, 미얀마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입장들이 거세지고 있다. 미얀마(옛 이름은 버마)는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1948년 버마 연방으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1962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2011년까지 정권을 장악하였다. 군부는 미디어, 기업, 산업체를 국유화시켰으며, ‘버마식 사회주의’를 표방하였다. 1991년 미얀마의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NLD)이 1990년 총선에서 승리를 거뒀으나, 여전히 군부가 통치를 하였다. 그러다가 2015년 총선을 통해 NLD가 다시 압승을 하여, 2016년 비군부 출신이 최초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리고 2020년 다시 총선을 통하여 NLD가 대승을 거뒀지만, 군부가 이를 거부하고 2021년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로써 미얀마는 민주화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폭력과 살인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묵인해서도 안 된다. 국제 사회는 무력과 폭력으로 인명을 살상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미얀마 쿠데타 세력에 대하여 보다 강력하고 엄중한 경고를 보낼 필요가 있다. 우리 기독교도 지구상의 모든 폭력과 살인, 무력과 독재의 해체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며, 그 나라들이 민주화와 평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도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마26:52)고 하셨다. 그런데 미얀마에만 이런 폭력과 살인 군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고 하고, 헌법상에 우리 영토에 해당하는 북한 지역에서도 지속적인 인권 유린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오픈도어선교회가 매년 발표한 세계 기독교 박해 순위를 보면, 지난 20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게 기독교를 박해한 국가가 북한이다. 북한 당국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주민들에 대한 무차별의 억압과 탄압으로 최악의 인권 유린국가로 악명을 떨친다. 현재 3만 명이 넘는 탈북민들이 한국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북한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김일성 이후 3대 세습과 함께, 현재 김정은 1인 독재를 위하여 주민들이 희생되고 있는가를 여실히 증언하고 있다. 이런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의 바람을 불어 일으키는 것이 탈북민들에 의한 ‘대북 전단지’이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15일 국회에서는 “대북전단살포금지법”(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개정)이 통과 되었다. 이 법은 2021년 3월 30일부터 발효되며 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게 된다. 북한 인권에 대하여 일체 함구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대북전단이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인가? 북한 김정은 정권의 독재와 폭력, 자유와 인권 탄압의 심각성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를 우리 정부와 국회가 막은 것이다. 또 문재인 정부에서는 유엔에서 북한의 인권결의안을 채택하는데, 공동 제안국에서 3년 연속 빠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국제 사회는 한국을 인권탄압의 동조국가로 보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왜 2,500만명 북한 주민들의 인권 유린에 대하여는 외면하는 것인가? 미얀마의 민주화에 대하여 한국 사회에서도 그 군부를 비난하고 민주화에 동조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2월 24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서는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기도와 연대를 요청하였다. 또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 등도 호소문을 발표하였고, 교계 연합 단체들도 미얀마를 위한 기도를 한다고 한다. 천주교 쪽에서도 3월 25일 서강대에서 미얀마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불교계도 3월 23일 조계종 중앙종회가 미얀마 민주화 지지와 군부의 폭력진압 반대를 촉구하는 성명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전국언론노동조합과 한국기자협회, 한국PD협회 등이 미얀마 시민불복종 운동에 연대한다고 하였다. 대단한 일이다. 다른 나라 민주화에 이처럼 종교계, 언론계가 발 벗고 나선다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 우리 동포요, 통일시대 함께 살아야 할 북한 주민의 인권에 대해서는 이처럼 성명서를 내고 연대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북한 주민의 인권과 북한의 민주화는 중요하지 않은가? 미얀마의 인권보다 북한의 인권은 그보다 못한 것인가? 미얀마의 민주화의 중대성을 깨달았다면, 이제부터라도 북한 주민의 인권에 대하여 함께 힘쓸 때이다. 마침 부활절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모든 인류, 거기에는 북한 주민의 생명과 영혼, 인권까지도 포함되며, 그들도 살리시기 위함이 아니었나!
    • 연지골
    • 토요시평
    2021-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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