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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연합’에 목숨걸던 한기총 어디갔나?
    임원회 ‘절차상 하자’로 재개최 불가피 WCC 소속 교단 이유로 통합 거부하는 것은 ‘억지’ 한기총 설립 예장통합측 한경직 목사 주도 한기총 설립 정체성은 오직 연합, WCC 논쟁 없었다 한기총-한교총 간 ‘통합 기본 합의서’를 부결시킨 한기총 임원회에 제기된 ‘절차상 하자’ 이의가 사실로 확인되며, 임원회 재개최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회의에 보고되지 않은 인원들이 대거 의결에 참여한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 만큼, 더 큰 혼란과 법적 다툼을 막기 위해서라도 빠른 시일 내 임원회를 재개최하는 것만이 유일한 최선이다. 그런 상황에 다시금 관심을 모으는 것은 ‘한국교회 대통합 프로젝트’다. 앞선 임원회에서 한기총-한교총 간 ‘통합 기본 합의서’가 부결되며, 사실상 ‘통합 무산’이라는 씁쓸한 결말을 맺는 듯 했으나, 해당 임원회의 명백한 하자가 드러나며, ‘한국교회 대통합 프로젝트’는 극적인 부활을 이뤘다. 관건은 ‘WCC’다. 한기총 내 일부 회원들은 한교총 회원 중 WCC에 소속한 교단이 있다며, 한교총과의 통합을 극구 반대하고 있다. WCC는 한국교회 분열의 시작이자, 보수-진보 대립의 상징과도 같은 주제, 그런 만큼 이번 통합 프로젝트의 논란이 될 것을 예측 못한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마냥 받아들이기에는 눈에 보이는 의도 가득한 억지가 이를 상당히 곤란하게 만든다. 물론 WCC는 보수교회에서 있어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영역이다. 한국교회는 지난 역사에서 WCC로 인해 합동-통합(장로교), 예감-기감(감리교)이 분열하는 아픔을 겪었고, 기성-예성(성결교)은 WCC와 신앙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NCCK 가입을 놓고, 분열하고 말았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WCC가 몰고 온 한국교회의 상처이자, 불행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상처와 불행을 치유코자 초교파적 연합운동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오래 전부터 NCCK가 있긴 했지만, 너무도 진보 일색인 탓에 한국교회 전체의 의견을 담아내지 못한 한계가 있었고, 이에 교계 주요 지도자들이 정치와 이념을 초월한 연합기관 설립에 손을 모았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즉 한기총이었다. 한기총이 보수색채를 띄기는 했지만, 그것은 NCCK와 대비되는 측면에서 유독 부각된 것이었고, 실제는 매우 중립적이었고 이성적이었다. 애초에 보수교회를 대변한다는 것보다는 한국교회를 대변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졌기에 결코 어느 한쪽에 일부러 치우쳐질 필요도 없었고, 특정 세력 혹은 교단을 배제할 필요도 없었다. 현재 한기총의 일부 임원들이 예장통합측과 함께 할 수 없다며, 한교총을 거부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기총을 설립한 이는 다름 아닌 예장통합측의 한경직 목사였다. 그 이후로도, 김기수 목사, 박종순 목사, 이광선 목사 등 통합측의 지도자들 다수가 한기총의 대표회장을 맡아 한국교회를 이끌었었다. WCC로 인한 한국교회 분열의 상처를 치유코자 만든 한기총에서 당연히 WCC는 논란의 이유도, 주제로 거론될 필요도 없었다. 한기총이 ‘반WCC’ 기조를 갖게 된 것은 지난 2012년 한기총-한교연의 분열과 그 즈음 대표회장에 오른 홍재철 목사의 탓이 크다. 홍재철 목사는 예장통합, 기성, 백석 등이 한교연으로 빠져 나간 한기총을 자기 신앙적 정체성에 맞춰 완전한 보수단체로 새로이 구축했다. 여기에 당시 한국교회를 뜨겁게 달궜던 ‘2013 WCC 부산총회’에 맞춰 한기총을 ‘반WCC’의 대표 단체로 만들었다. 중대형교단이 대거 빠져나가며, 대표성을 잃은 한기총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며, 존재감을 과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 때 홍재철 목사는 반WCC에 대한 부분을 한기총 정관에까지 삽입한다. 설립 당시의 한기총 정관과 완전히 달라진 당시의 정관을 일부 관계자들이 ‘홍재철 정관’, 혹은 ‘홍정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난 임원회에서 홍재철 목사는 자신이 만든 ‘홍정관’을 앞세워, WCC 회원교단과 함께할 수 없다는 이유로, 통합 거부 여론을 주도했다. 그리고 이 여론에 경도된 상당수 임원들이 ‘반대’에 표를 던졌다. 하지만 이런 선택에는 상당한 오류가 있다. 엄밀히 이들은 WCC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WCC에 속한 회원교단이 가입되어 있는 한교총을 거부했다. 이를 WCC 거부로 받아들이기는 너무도 억지스럽다는 것은, 사실상 한국교회에서 WCC에 속한 예장통합, 기감 등과 섞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이를 어느 곳에서도 문제 삼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선교단체, 지역연합회, 복지, 교육 등 한국교회 어느 단체를 가든 통합, 기감의 교회는 주축을 담당하고 있다. 당연히 한기총의 임원들 역시 또 다른 단체와 영역에서 통합, 기감과 함께하고 있고, 이에 대해 어떠한 문제제기도 하지 않고 있다. 유독 한기총에서만 통합과 기감 자체를 이단시 하며,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집단인 듯 말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과 함께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절대 이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듯 말하는 억지를 범하는 것이다. “한기총은 다르다” “한기총만은 반WCC 정체성을 지켜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가? 헌데 위에서 말했듯 한기총의 본래 정체성에 ‘반WCC’는 없다. 한기총은 WCC를 포함한 각종 분열로 상처입은 한국교회를 하나로 엮기 위해 나온 연합단체다. 그리고 지금 본래의 취지를 잃고 다시 분열된 연합단체를 회복시키기 위해 ‘한국교회 대통합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기총의 정체성을 지키는 길은 분열의 지속인가? 아니면 연합의 회복인가? 한국교회 대통합이라는 역사적 사명 앞에 한기총 임원회의 전향적 고민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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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2022-03-14
  • [기자수첩] #대선 #한국교회 #대통합, 그리고 ‘푸른 우물’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고 치열한 대선이다. 한 번도 겪지 못했던 무한의 위기가 반복되는 상황은 국민들에 있어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최고조에 끌어 올렸다. 대선은 국민들에 있어 어떠한 선택을 하던 결국 실패로 귀결되는 예정된 결말이지만, 이를 알면서도 매주 사게 되는 복권처럼 혹시나 하는 기대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아마도 사전 투표율이 역대 최고치인 35%에 육박했다는 사실은 국민들이 그토록 배신만 당해왔던 선거에 다시 한 번 희망을 걸고 있다는 씁쓸한 반증일 것이다. 희망을 잃어버린 시대, 아무도 희망을 책임지지 않은 시대,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대통령 선거조차 한 판의 도박처럼 모험을 걸어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지금은 교회의 존재 가치에 대한 본질적 회고를 요구하고 있다. 얼마 전 하나님 품에 안긴 시대의 지성 고 이어령 교수는 소강석 목사의 시집 ‘외로운 선율을 찾아서’의 발문에서 교회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교회의 위기는 시대의 위기요. 역사의 위기로 종결된 경우가 많다. 시대와 역사를 위해서라도 교회는 끊임없이 정화되고 정신적, 사상적 샘물을 흐르게 하는 깊고 푸른 우물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지난 역사에서 언제나 시대의 최후의 양심이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교회에 본질적으로 부여한 사명이자 역할이었다. 교회가 무너진 시대가 온전한 적이 없었고, 반대로 교회의 부흥은 곧 그 사회와 국가의 번성으로 이어졌다. 한국교회가 70~80년대 기적과도 같은 부흥을 이룰 때, 국민들은 교회를 보며 희망을 노래했다. 반복된 전쟁이 가져온 배고픔과 가난, 성숙치 못한 민주주의에 따른 시대의 혼란과 억압 속에 갈 길을 잃은 국민들은 교회의 십자가를 보며, 앞으로 전진했고, 미래를 일궈냈다. 교회 자체가 복음이었고, 국민들의 삶에 스며든 희망이었다. 대선 정국이 뜨거워지며, 한국교회 역시 줄 서기에 한창이다. 1번과 2번이란 별반 다를 바 없는 숫자를 오가며, 치열한 눈치전을 반복하고 있다. 서로의 선택을 두고 정치권의 당사자들 못지않은 이전투구를 펼치며, 스스로 이번 대선의 최고 수훈임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사이 고 이어령 교수가 말했던 ‘푸른 우물’은 점점 오염되어 버렸다. 바닥 끝까지 보일 듯 투명했던 푸르름은 이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탁수(濁水)가 되어 그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교회의 위기를 시대의 위기라고 했던가? 스스로의 과오로 시대를 위기로 몰아넣은 교회가 이제는 더 큰 욕심으로 마지막 양심마저 저 버리려 하고 있다. 어느 순간 아무도 교회를 보며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요 근래 “한국교회는 누구를 택해야 하나?” 란 질문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누구를 택할 때 한국교회에 좀 더 유리하며, 한국교회에 혜택이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가득한 물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 역사적 의의를 생각하며, 이 질문의 본질적 오류를 생각해 봐야 한다. 누구를 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누가 되든 상관없는 한국교회를 어떻게 구축할 것이냐에 대한 물음을 먼저해야 한다. 어떠한 공격도 견뎌낼 굳건한 교회,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불의한 탄압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정의로운 교회, 스스로 예배를 지키며 성도들을 보호하며 국민들에 신뢰와 지지를 얻어내는 희망의 교회를 구축할 수 있다면, 굳이 이번 대선에 교회 스스로의 운명을 내던질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물음의 해답은 결국 ‘한국교회 대통합’이란 주제로 귀결된다. 한국교회가 하나되어 진정한 ‘원 리더십’으로 시대를 이끌 수 있다면, 그 어떤 불의한 상황이 닥쳐도 국민들을 보호하며, 시대에 여전히 희망의 빛을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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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5
  • [사설] 신천지에 대해 '사교'운운 하는 정치인의 망발
    20대 대선에 느닷없이 '신천지'가 소환되었다. 여당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야당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다. 윤석열 후보가 검찰총장 당시 신천지에 대한 수색영장 발부를 거부한 것으로 봐서 신천지와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우파 기독교인들의 윤석열 지지를 분열시키기 위한 마타도어인 듯 하다. 한국기독교는 신천지라면 무조건 치를 떤다는 정서를 이용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신천지는 한국기독교의 이단집단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여당 후보가 선거 연설 중 신천지를 향해 공개적으로 수 차례에 걸쳐 '사교'(詐敎)라고 발언했다. 과연 종교의 자유가 있는 사회에서 '사교'란 말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사교란 말은 종교를 빙자하여 남을 속여 그 재산과 생명을 갈취하는 사기꾼 조직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사회에 유사종교인 '사이비교'(似而非敎)란 말은 있을 수 있어도, 사교란 말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집단이 있다면 이는 당연히 범죄집단으로서 두말할 필요없이 형사처벌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당 후보의 이 발언은 신천지에 대한 명예훼손을 넘어 심각한 종교자유의 침해로 밖에 볼 수 없다. 신천지는 기독교의 '이단'임엔 틀림 없다. 그 집단에 교주를 '보혜사'로 보는 교주우상주의가 있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기독교를 심각히 왜곡하고 있다. 기독교의 보혜사는 성자 그리스도와 성령을 일컫는 말이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이단이 된다. 그러나 이단의 문제는 종교집단 내부의 정통성의 문제이지, 결코 사회적 문제는 아닌 것이다. 설혹 신천지가 특정 정치집단과 연계되었다 할지라도, 신천지에 대해 '사교'라고 하려면 그 집단의 행태에 사교라고 일컬을 만한 어떤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강조하거니와 사교이면 당연히 우리사회에서 척결되어야 마땅하다. 사교는 범죄집단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 기독교를 비롯한 기존 종교단체들도 우리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유력한 정치인들의 종교에 대한 망발을 그대로 침묵해서는 안된다. 비록 신천지가 이단일지라도 그 집단을 향해 사교 운운하는 것을 용납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종교세력이 정치권으로부터 그 같은 공격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더 이상 종교자유에 대한 침해를 받지 않으려면 기성종교단체들이 정치인들의 망발에 경고해야 한다.
    • 연지골
    • 사설
    2022-02-22
  • [사설] 새해 첫 주일날 예배에 참삭한 여야 후보들
    지난 연초 2022년 1월 2일 첫 주, 대표적 장로교회 두 곳에 여야 대선 후보들이 각각 예배에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후보는 용인의 새에덴교회(소강석 목사)에,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서울 명성교회(김하나 목사) 예배에 참석한 것이다. 이는 오는 3월 제20대 대선에 있어 매우 상징적인 사건으로 읽힌다. 이 두 교회는 합동측과 통합측에서 각각 대표적 신흥세력으로 급부상한 교회이다. 새에덴교회는 목사가 호남 출신으로서, 교인들의 분포가 대체로 민주당 지지세가 많고, 명성교회는 설립자 김삼환 목사가 영남출신으로서, 교인들의 분포가 국민의힘 지지세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교회는 각기 이들을 교회 앞에 소개하고, 교인들은 박수로 응답했다. 여기까지는 여타 교회들이 각급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을 소개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일은 새해 대선정국에서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이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이 두 교회는 각기 합동과 통합의 교단적 색깔이나 정서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카리스마적 목회자의 지역색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선거에 교회세력을 이용하려는 후보들의 득표전략에 한국교회가 휘둘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어서 경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역주의로 표출되어서는 안된다. 한국교회는 대통령 선거를 치를 때마다 많은 휴유증을 앓아왔다. 멍청한 교회지도자들의 영웅심의 발로로 선거를 치루고 나면 교인들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특정 후보에 대한 목회자의 호불호(好不好)는 있을 수 있지만, 여기에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를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교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있을 뿐 여야가 없다. 따라서 목회자가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듯한 언동을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럼에도 역대 대선에서 아예 내놓고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지역주의 맹주들이 있었다. 이러한 행위는 곧바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차라리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목회를 그만두고 정치권으로 나서는 것이 옳다. 그래도 이번 대선에는 진보. 보수로 갈라져 있을 뿐, 지역색을 대표하는 후보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망국적 지역주의를 이런 기회에 소멸시켜야 한다. 특히 한국교회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3월 9일 대선까지는 주일날이 5-6번 더 남았다.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대형교회들이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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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2-04
  • [사설] 이재명 후보 크리스챤은 맞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에 대한 '가짜 교인' 논쟁이 뜨겁다. 이재명 후보가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나는 아내와 함께 분당우리교회에서 주님을 모신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 교회에서 10년 전에 이미 제적된 사람이라고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재명은 '가짜 교인'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런 비난은 틀린 것이다. 이재명 후보는 현재 그 교회에서 10년 전에 제적되었다면, '분당우리교회' 교인이 아닐 뿐, 한국기독교의 '크리스챤'은 맞는 것이다. 왜냐면 한번 그리스도에 대한 공적인 신앙고백을 한 사람은 어떤 특정교회의 교인명부에 올라있는가 여부에 관계 없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 이를 흔히 크리스챤 노미날리티(Nominality)라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에는 교인의 정의를 "교인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그리스도인(크리스챤)이라 부른다"라고 되어 있을 뿐, 특정교회 등록 여부를 따지지는 않는다. 단지 교인의 의무를 다 했느냐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공적인 신앙고백을 통해 성도가 된 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거룩한 교제와 교통을 유지해야 한다"(제26장 제2항). 또 총회 헌법 제19조에는 "교인이 신고 없이 교회를 떠나 의무를 행치 않고 6개월을 경과하면 회원권이 정지되고 1년을 경과하면 실종교인이 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 소속 교회의 교인의 자격정지일 뿐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격정지는 결코 아니다. 따라서 '가짜 교인'이란 말은 틀린 말이다. 한국교회 주변에는 이들 노미날리티 외에도 특정교회에 소속되지 않고 믿음을 가지는 크리스챤들도 상당히 많다. 이들은 공적인 신앙고백을 통해 세례를 받고, 한때 특정교회에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하다가, 교회 구성원 간의 갈등이나 어떤 이유로 매 주일 교회에 출석하지는 않지만, 자기의 종교적 신분을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집에서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며, 교회의 특정행사, 즉 성탄절이나 부활절 또는 기독교 의식으로 진행되는 친인척의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에도 부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또 교회 앞에서 세례를 받거나 공적인 신앙고백이 없었다 하더라도, 창세 전에 예정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된 자라면 구원 받은 성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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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4
  • [사설] 한국교회여, 자학하지 마라
    한국교회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사회 각층에서 들린다. 대체로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도 교인들의 삶과 신앙이 일치되지 않고,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다. 때때로 목사나 장로 등 교회의 중직자들 중에도 '한국교회가 타락했다'는 둥, '더 이상 목사에게 속지 말라'는 둥,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둥, 무책임하고 자학적인 발언을 일삼는 자들도 있다. 이는 한국교회의 윤리적 패배의식에서 나오는 자학(自虐)이다. 그러잖아도 한국교회 주요 교단들의 교인 수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2020년 지난 한 해 1년동안 대교단 중심으로 전년 대비 39만명이 줄었다는 매우 충격적 통계도 제시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 '개혁'이란 이름 아래 자학적 발언이 지나치면 한국교회의 민족복음화에 크나큰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솔직히 한국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에 비해 사회 윤리적 의식이 비교적 높다고 할 수 있다. 우리사회에서 국내외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구호단체'가 수십 개가 활발히 움직이는데, 이들 단체들에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는 회원들의 상당수는 한국 기독교인들이다. 가난한 이웃을 돕고, 자신의 것을 조금이라도 베풀고자 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비기독교인들 보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많다는 뜻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기적이란 말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가 교회에 거는 기대가 있는데, 한국 기독교인들의 삶이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우리사회가 그 기대를 너무 높게 보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국 기독교인들이 일방적으로 비난 받아야 할 일은 결코 아니다. 또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 가운데 헌금 수준이 가장 높은 교회이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등 중직자는 말할 것도 없고,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교회에 매달 십일조와 매주 헌금을 한다. 교회는 이 헌금을 교회 안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여, 자학하지 마라.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삶은 비교적 잘 조화되고 있다. 지금 우리사회의 교회를 향한 비판은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한다'는 말과 같이, 사회를 향한 봉사와 사랑의 정신에 더 성숙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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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2-04
  • [연지골] 소명과 지혜
    사실 목회자(전도자)는 사명감(使命感) 없이는 그 직을 하루도 버티기 어렵다. 하나님으로부터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았다 하더라도 사명감이 결여되면 그 소명은 힘든 짐이 되고 만다. 우리 주변에 목회자로서 사명감을 가졌다며 나서는 사람들 중에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자들도 더러 있다. "어리석은 자가 사명감 느끼면 주변 사람들이 피곤케 된다"는 말 그대로 이다. 그러므로 소명을 받은 사람은 무엇보다 그 소명을 감당하기 위한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끝없이 지혜를 구하는 기도가 요구된다. 성경은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 3:15-18)라고 했다. 그러므로 소명(召命) 받은 자는 그 소명을 감당하기 위한 사명감과 함께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언제나 하나님께 지혜의 충만을 간구해야 한다. 성경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 5-8)라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는 구하지 않은 채, 자기 말재주만 믿고 어리석고 무지한 채로 교회의 지도자로 나설 때 그 공동체는 그런 지도자로 인해 분쟁과 분열에 휩싸이고 혼돈에 빠진다.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자신의 판단을 스스로 믿기 때문이다(잠 14;16). 한국교회도 지혜롭지 못한 인사들이 지도자 연체 하며 사명감을 드러내는 바람에 교계연합이 파탄나고, 교단이 분열과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교단의 총회장들도, 각 연합단체의 대표들도, 누가 봐도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미달한 데도 자신의 세속적 욕망과 명예심 만을 앞세우는 바람에 연합단체가 분열하고 교단이 흩어지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장로교 300개 교단 시대도 이런 어리석은 자들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은 채 사명감을 앞세우는 바람에 생겨난 현상이다. 자신은 소명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누구든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이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지혜는 '소피아'(Sophia)이다. 이는 모든 사물에 대한 완전한 인식 곧 최고선(最高善)에 대한 지식을 이르는 말로써, 소피아는 곧 그리스도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품 속에 독생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떠나서는 진정한 지혜를 만날 수 없다. 지혜는 사람의 지식과 가르침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도 없다. 지혜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이미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소명을 받은 목회자는 반드시 성령의 충만과 함께 지혜의 충만도 구해야 한다.
    • 연지골
    • 연지골
    2022-02-04
  • [기자수첩] NCCK의 ‘무속’ 비판이 씁쓸한 이유
    전 세계 기독교 경악한 ‘초혼제’ 잊었나? “특정후보 간접적 지지 아니다" 제 발 저린 도둑의 커밍아웃? 코 앞으로 다가온 대선 정국에 기독교 역시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 정권 들어서 총체적 위기를 보이는 국가적 혼란 앞에 이번 대선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대한 선택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문제는 이러한 중요 시국속에서도 정치질을 멈추지 않는 한국교회다. 대선이 한달 밖에 남지 않았지만, 여전히 한국교회의 내부는 정치적 계파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최근 특정 후보를 겨냥해 ‘무속 비선 정치’ 시비를 걸고 있는 진보계의 행태는 이미 도를 심히 넘어선 모습이다. 근래 한 공중파에서 특정 후보 부인의 녹취록을 공개한 이후, 기독교 진보계는 일제히 비난성명을 발표하고 ‘무속 정치’ 타파를 외치고 있다. 지난 달 말 ‘비선정치·무속정치를 염려하는 그리스도인 선언’을 시작으로, 교계 진보 신학자 28인이 ‘사이비 주술 정치 노름에 나라가 위태롭다’는 성명을 냈고, 2월 3일에는 NCCK와 YMCA가 ‘무속 비선 정치가 주권재민의 공론장을 대신할 수 없다’는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또한 같은 날 '주술에 국민과 국가의 내일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는 제목의 기독교대한감리회 목회자 486인 선언이 발표됐다. 특히 한국교회 대표 연합기관을 자처하는 NCCK가 이러한 입장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단순한 종교적 비판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노골적이고, 정치적이며, 충분히 의도적이라는 지적이다. 이러한 비판과 의심의 바탕에는 교계 진보계가 그동안 ‘무속’에 대해 어떠한 거부감도 드러낸 적도 없으며, 오히려 매우 친밀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WCC의 ‘초혼제’다. 정현경 교수는 지난 1991년 호주 캔버라 제7회 WCC 총회에서 ‘초혼 의식’을 거행하며, 전 세계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WCC는 국내에서 예장통합, 기감, 기장, 성공회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곳으로, 이들 교단은 동시에 NCCK에서도 함께 가입되어 있다. 그리고 WCC와 NCCK는 신앙고백을 공유하고 있다. 무속 행위에 가까운 초혼제 사건이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 보수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음에도 NCCK를 비롯한 이들 교단들은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한국교회에 반WCC 정서가 완전히 뿌리내린 근저에는 바로 ‘초혼제’가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여기에 이어지는 NCCK의 ‘나무아미타불 아멘’ 사건은 종교혼합의 극치였다. 어쩌면 무속보다도 못한 행위조차 스스로 용납해 왔다. 또한 NCCK의 총무가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7대종단협의회에는 한국민족종교협의회가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그동안 NCCK와 서로 종교 간의 예우를 다해 왔다. 그런 상황에 NCCK를 비롯한 진보계가 대선을 코 앞에 두고 특정 후보의 ‘무속’을 문제 삼고 나오는 것이 결코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내로남불’, 사실 특정후보를 지지하건, 비판하건 그들의 자유지만, 자신들의 신념이나 과거마저 뒤집어 엎어가며, 이를 비판하는 행위에 교계가 그 의도를 의심하는 것이다. 애초 무리한 비판이나 성명이기에 그 내용에 모순이 가득한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NCCK와 YMCA는 공동 성명에서 “무속의 운명론적 세계관이 형성하는 심리적 강제력은,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해치고 공론의 장을 해체하거나 사유화한다. 미신과 무속에 기반한 사교의 정치적 본성은, 세속 권력자들을 숙주로 삼아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을 사유화한다”며 ‘무속’을 노골적이고, 강력하게 비판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은 “결코 이웃 종교에 대한 배타적 시비도 아니며, 특정후보에 대한 간접적 지지도 아니며, 건전한 민족종교의 전통 문화에 대해 존중한다”고 한발 빼고 있다. 참으로 복잡한 성명서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무속이 좋다는 것인가? 나쁘다는 것인가? 온갖 비난과 비판을 해놓고, 나중에는 존중한다는 결론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것인가? 그렇기에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스스로 언급한 “특정 후보에 대한 간접적 지지가 아니다”는 입장은 오히려 제발 저린 도둑의 커밍아웃에 가까워 보인다. 건전한 민족종교라고 했는가?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건전한 무속은 무엇이며, 불량한 무속은 무엇인가? 스스로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제기는 그저 시비에 불과하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02-03
  • [기자수첩] 소강석 목사의 설교 논란에 입 연 신학자들
    소 목사는 ‘자기비하’ 통해 자신은 낮추고, 성령만 드높이는 광대 유행가 논란? 성 프란스시스, 칼빈도 설교 중에 대중가요를 사용했다 “소강석 목사의 독특한 설교는 신학적 유산으로서의 분명한 가치가 있다” 시종일관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전개로 유명한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의 설교가 근래 유튜브 등에서 크리스천들의 큰 각광을 받고 있는 가운데, 일부 목회자들이 소 목사의 설교 행태를 시비하며, 때아닌 논란이 일고 있다. 스스로 ‘광대’를 자처하며, 목회자로서의 정형화된 고정관념과 권위를 내던진 것으로 유명한 소 목사이기에, 사실 이번 논란 자체가 시기적으로 매우 부적절하고, 부자연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다만 코로나 확산 이후 시대의 대세가 되어버린 유튜브를 통해 소 목사의 ‘설교’ 역시 높은 인지도와 함께 그 인기가 급상승하며 새로운 반항을 일으킨 것 역시 사실이다. 문제는 이번 ‘설교 논란’ 자체가 기존 소 목사를 향한 정치적 공격과 그 맥락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이들 상당수가 이전에도 소 목사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자주 해 왔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당연히 설교의 행태, 구성, 유행가 삽입 등 소 목사의 행태를 두고 도를 넘는 온갖 문제를 제기하지만, ‘비판을 위한 비판’에 매진하다보니, 딱히 설득력은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튜브, SNS 등을 통해 해당 논란이 끊임없이 재생산, 확대 되며, 논란은 쉬이 사그러들지 않았고, 결국 정통 신학자들까지 나서 해당 논란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밝히고 나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김덕현 교수(칼빈대 설교학 교수) 등이 참여한 토론에서 나온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 목사의 설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철저히 개혁주의적이며, 자기희생적인 매우 훌륭한 설교다. 이번 논란이 오히려 전문가들로 하여금 소 목사의 설교를 검증하고, 인정하게끔 만들어 준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논란과 별개로 소 목사의 설교에 대한 두 교수의 견해는 교계의 또다른 주목을 받고 있다. <영상보기: youtu.be/iRC2NN8AP5s> 김덕현 교수 “소 목사는 광대 설교의 표본” 신성욱 교수 “바울과 같은 아이덴티피케이션(자기 동일시)’기법 적용” 먼저 김덕현 교수는 세계적인 설교학 박사 요한 H. 실리에(Johan H. Cilliers/ 남아공 스텔렌보쉬대 교수)가 주창한 ‘광대 설교’가 소 목사의 설교 행태와 정확히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광대 설교’의 핵심은 ‘자기비하’로 자기를 낮추고 희생함으로 청중들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성경 인물이 다름아닌 ‘바울’이었다. 다음은 요한 H. 실리에 박사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의 어릿광대’에서 표현한 바울의 모습이다. “바울이 보는 설교자의 모습은 보다 이상하고 불편한 그것, 바로 바보의 모습이다··· 우리는 바울을 연극 안의 바보처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예고도 없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와 그의 발칙한 말들과 익살맞은 행동들도 극 전체를 헤집어 놓는 바보 말이다. 연극 속의 바보처럼 바울은 관습을 거스르는 행동들을 보인다. 십자가를 선포함으로써 그는 힘과 지혜에 대한 세상의 이해를 바꾸어 놓는다" 김 교수는 “요한 H. 실리에 교수는 성경에서 드러나는 전형적인 설교자의 이미지를 광대로 봤고, 그 대표적인 인물로 바울을 지목했다”면서 “자기비하를 통해 스스로를 낮추고, 오직 성령만 드높이는 것이 바로 광대설교다”고 말했다. 이어 요한 H. 실리에 교수가 그린 ‘광대상’에 소강석 목사가 매우 근접했다며 “만약 요한 H. 실리에 교수가 한국어를 배워, 소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면 ‘한국에 이런 설교 컨텐츠가 있구나’ 하고 놀랐을 것이다”고 말했다. 신성욱 교수는 소 목사의 설교를 ‘아이덴티피케이션(자기 동일시)’ 기법의 전형으로 봤다. 자기를 낮춰서 상대를 배려하며, 이를 통해 감동을 주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인데, 이 역시 ‘바울’의 설교 기법이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신 교수는 소 목사의 설교가 ‘개혁주의’가 아니라는 비판에 대해 지속적인 변화와 수정을 의미하는 ‘reform’에 오히려 매우 충실함을 지적했고, 김 교수는 ‘유행가’ 논란을 놓고 과거 성 프란시스와 칼빈도 설교 중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사용했고, 실제 많은 호응을 받았음을 설명하며, 일각의 근거없는 비판들을 일축했다. ‘나’의 기준을 ‘기독교’의 기준으로 삼아선 안돼 사실 이번 논란은 굳이 전문가의 평가나 신학자들의 연구가 아니더라도, 이를 듣는 청중들의 반응에서 그 결과가 증명되고 있다. 진지함으로 포장한 권위에 도취된 일부 목회자들이 다름과 틀림의 구분 없이 무조건 비판으로 일관하는 자세는 오직 스스로만 옳다는 자만을 증명할 뿐이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변치 않지만, 교회와 예배의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또한 보는 이들의 관념에 의해서도 옳고 그름이 판단된다. 당장 우리가 예배 중에 아무렇지 않게 부르고 있는 복음성가나 지금은 은혜의 척도처럼 되어버린 ‘통성기도’가 불과 30~40년 전 만해도 장로교에서 금기시되었던 사실은 지금으로써는 결코 상상키 어려운 일이다. 또한 지금도 일부 보수교단에서는 복음성가는 물론 설교 중 ‘예화’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하고 있다. 예배의 권위를 떨어뜨린다는 이유에서다. 윤항기 목사는 자신의 곡 ‘여러분’의 가사를 철저히 성경을 염두하며 썼다.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라는 가사의 ‘나’는 바로 ‘하나님’을 뜻하고 있다. 일반사람들은 서울국제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여러분’을 단순 대중가요로 기억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게 ‘여러분’은 은혜로운 복음성가다. 비판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면 이를 부정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인지하는 것보다 많은 변화를 겪었고, 또 그 변화에 자연스레 익숙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와 예배는 그 익숙한 변화를 통해 점진적인 진화를 이룬다. 이를 인정치 않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개혁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01-26
  • [기자수첩] 천주교, 기독교 그리고 교계 대통합
    교계 대통합을 향한 3개 기관의 노력이 올해도 계속되는 가운데, 최근 한교총 대표회장 류영모 목사가 매우 의미있는 행보를 펼쳐 주목을 받고 있다. 류 목사는 지난 1월 21일 천주교 정순택 대주교를 찾아 환담을 나누고, 종교 간 협력과 교류를 당부했다. 이날의 만남은 그저 종교 대표간의 만남이라는 주제만 놓고서는 크게 주목받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류영모 목사가 속한 예장통합측은 NCCK를 통해 천주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터라, 이러한 모습이 매우 익숙해 보이기까지 한 것이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이날 대화의 내용이다. 류 대표회장이 천주교와의 관계에 있어 매우 전향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이날 류영모 대표회장은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기후 위기, 통일, 낙태 등 사회 문제에 공동의 메시지를 냈으면 한다”며 “신학적인 차이는 서로 존중하고, 약자를 위해 하나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국민들이 원하는 일이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먼저 류 대표회장은 천주교와 개신교 간의 신학적인 부분을 ‘차이’로 규정하고, 이를 비판이나 정죄가 아닌 ‘존중’의 대상으로 인정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대다수 보수 교단이 천주교와 그들의 신학을 ‘이교’ 혹은 ‘이단’으로 보고 있는 상황에, 보수교회를 대표하는 한교총의 대표회장이 ‘차이’와 ‘존중’이라는 말로 천주교-개신교 간의 신학적 간극을 메우는 모습은 매우 파격적일 수 밖에 없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류 대표회장은 “약자를 위해 하나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국민들이 원하는 일”이라며, 개신교와 천주교 간의 연합과 협력을 당부했다. 사회와 국민을 위해서 신학과 종교를 뛰어넘는 ‘연합’의 중요성을 설파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대목에서 류 대표회장이 자신의 이러한 전향적 관점을 교계 기관 대통합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각 기관 통추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어느정도 해소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단 문제’가 통합의 쟁점으로 자리하고 있는 상황에, 류 대표회장이 천주교를 향해 보였던 ‘차이’와 ‘존중’이라는 시각은 ‘이단 문제’의 근본적 해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 신성’ ‘연옥설’ 등 기독교의 신학에서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예민한 문제조차 ‘정죄’의 대상이 아닌 ‘차이’가 될 수 있다면, 한교총이 지적하는 한기총 내부의 문제나 한기총이 한교총을 향해 제기하는 ‘WCC’ 문제는 어쩌면 논쟁할 필요조차 없는 매우 가벼운 주제일지 모른다. 여기에 류 대표회장은 이 모든 이유를 ‘연합’이라는 말 한 마디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됨이 곧 희망이고, 국민들을 위한 길이라는 그의 말은 당연하게도 한국교회 전체가 염원하는 교계 대통합의 취지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이단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지만, 오히려 과한 경계는 우리 스스로의 신학적 기준에 모순을 남길 뿐이다. 지금은 내가 아닌 우리, 일개 교단이 아닌 한국교회 전체를 생각해야 할 때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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