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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한목협 제34차 열린대화마당 ‘한국교회 개혁의 방향’(1)
    본고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대표회장 김경원 목사)가 지난 9월 6일 서울 연지동 연동교회에서 개최된 제34차 열린대화마당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교회 무엇을 어떻게 개혁해야 할 것인가?’에서 이세령 목사가 발제한 ‘한국교회 개혁의 방향’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위기를 말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내년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다. 때를 맞춰 교회들은 일제히 교회의 개혁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 앞에 닥친 위기 상황을 파악하고 개혁의 방향성을 논의하기에 앞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복음의 기초 위에서 오늘의 교회 현실을 가늠하고 개혁의 방향성을 타진해야 한다. 엉킨 실타래와 같은 한국교회 현실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복음이라는 중심 주제를 따라 한 걸음씩 새롭게 걸음을 옮겨가야 할 것이다. 교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1. 복음만을 전하는 교회인가?교회는 복음만을 소유하고, 복음만을 전할 사명이 있다. 500년 전에 루터는 면죄부에 대한 95개 논제를 서술하는 중에 제62조에서 "교회의 참된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라고 진술했다. 교회는 이런 복음의 보화만을 증거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세상 나라나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오직 복음만을 전하고, 복음에 근거한 교회를 세우고, 복음만이 지배하는 교회질서를 만들고, 복음에 합당한 나그네의 삶을 세상 속에서 살아내도록 성도들을 양육하여야 한다. 과연 오늘의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만을 전하고 있는가? 기복신앙과 세상의 이념들과 물신(맘몬) 지향적인 설교들이 강단을 차지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성공, 교회는 수적 성장이란 가치만을 추구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이 왜곡될 위험이 농후한 현실임을 부인하기 어렵지 않은가? 오늘 교회가 놓인 현실 속에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번역하고, 적용하는 참된 설교가 건강한 성도와 교회를 세워 갈 것이다. 2. 회개 없는 세례의 중단: 교회 회원권을 강화하라참된 회개도 없이 기복 신앙의 설교를 듣고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교회는 세례를 베풀어 왔다. 회개의 참된 증거, 거듭남의 증거도 없이 (학습과) 세례를 베풀어서 교회의 정식 회원으로 받음으로, 세례는 통과의례일 뿐 진정 거듭남과 성화의 동력과 동기도 없는 성도들을 양산해 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버리고 따르도록' 하셨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고향 땅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약속의 땅과 번성과 새로운 이름의 권위를 주시는 나라로 나아갔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복음을 듣고 나아온 무리들에게 세례를 주는 과정에서 자신의 죄와 죄의 습관과 영향력 및 세속적인 세계관을 끊어버리는 참된 회개가 없다. 따라서 세례를 베풀 때에 일정한 교육만이 아니라 회개의 구체적인 증거로서 버림이 있는 삶을 사는지, 주변에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으로 드러나는 지를 확인하고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3. 죄를 대항하고 이겨내는 참된 믿음의 결여를 극복하라성공의 복음은 성도들이 죄와 대항하는 연습을 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결과는 실패와 좌절 앞에서 쉽게 좌절하게 만든다. 죄를 이겨내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회개와 권징이다. 성공은 모든 것을 덮고, 교회에 헌금하는 교회당 중심의 신앙생활로 면죄부가 주어지는 오늘의 현실은 죄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극복하는 훈련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자살의 유혹 앞에 쉽게 무너진다. 우리의 생을 통해서 죄를 이기고 의를 이루는 삶으로의 부르심의 복음이 없기 때문이다. 4. 목회자들의 성윤리 부재 극복 방안을 찾아내라목회자들의 성윤리의 상실은 철저한 세속화의 결과이다. 물질 중심과 성공 중심의 목회 철학을 가진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삶의 참된 과제를 제시하지 않는다. 거룩과 의로움, 약자에 대한 배려 없이 성공한 교인들을 데리고 치리를 어떻게 할 것이며, 또한 약한 교회들이 어려워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외면하면서, 대형화된 교회의 목사들이 어떻게 그들의 약함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최근에 불거진 목회자들의 추문은 잘못 이해된 복음이 지배하는 교회의 현실을 반영한다. 죄를 제어하고 다스리는 데 필요한 치리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교회 속에서 성도들은 자신의 잘못을 제어할 길을 찾지 못한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권징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 교회가 연합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면 모든 교회가 공동으로 바른 치리를 시행할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될 것이다.5. 교회당 중심의 신앙생활을 벗어나라그러므로 회개가 없는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기복신앙이 선포되는 교회 안에서만 인정되는 신앙생활에 머물도록 교회당 중심의 신앙생활만을 강조당하기 십상이다. 삶의 자리에서 거룩한 생활로 나아가도록 격려 지 못한다. 이렇게 형성된 교회당 중심의 신앙생활은 죄와 싸우는 성도들을 위한 삶보다는 성공과 성장을 위한 삶을 지향하게 되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부자와 출세와 치유와 건강을 추구하게 된다. 결국 이런 증거를 가진 자들이 직분자의 자리에 앉게 되고, 교회를 주도하게 됨으로써 교회는 더욱 성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달려가게 된다. 목회자가 성도들의 죄를 다스리는 권세를 행사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성공의 설교나 권면을 하는 일에 만족한다. 그리함으로 교회에 성공한 사람들이 가득차기를 바라고, 계속해서 성장하기를 바란다. 교회는 이런 ‘성공한’ 목사들을 찾는다. 목사를 참된 복음의 선포자로서 받아들이기 보다는 교회를 성장시킬 수 기술자로 간주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목사들의 태도와 교회의 분위기를 보면서 자라는 목사 후보생들이 무슨 생각을 하게 될지는 명약관화하다. 그 결과 교회는 세상의 가치와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지위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의를 도모하고 죄를 다스리는 심방과 목회,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직분자들로 구성된 치리회로의 회복이 절실하다. 6. 이명증 부활과 실종된 공교회성 확립무조건 ‘내 교회’로 모여들면 그만인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이다. 교회 간에 지켜야 할 질서는 없다. 등록한 성도들이 다양한 이유로 교회를 옮겨갈 때, 지켜야 할 질서는 완전히 무시되어 왔다. 이명증도 없이 쇼핑 장소를 옮기듯이 성도들이 교회를 옮겨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복음의 열매인 성도들이 교회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정당한 절차를 밟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성도로서의 삶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교회간의 교제를 이어갈 수 있다.무질서한 수평이동은 교회 성장을 위한 좋은 발판이 되었지만, 그러나 최근에 이단 대처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있다. 가만히 들어온 여우가 포도밭은 무너뜨리는 일은 이명증 하나만 있었으면 절대로 가능하지 않는 일이었다. 복음에 기초한 공교회 됨을 서로 확인하는 절차가 이명증이다. 참된 복음의 열매인지를 교회들이 서로 확인하고 감사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송하는 것이다. 이런 공교회적인 질서의 표지를 성장이란 이름하에 사라지게 한 결과 이단에 속수무책으로 넘어지게 되었다. 교회들마다 신천지 추수꾼들은 오지 말라고 광고하는 것은 공교회 됨을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7. 공교회성의 회복과 대형교회 지향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대형교회는 성공과 성장의 특별한 결실이다. 산업화와 강남 개발 및 신도시 개발과 같은 인구 유동 및 밀집적인 아파트 문화가 원인이 되어 대형교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왜 이 시점에 사람들이 교회로 몰리게 되었는가? 성장 중에 있는 한국 사회에 교회는 성공의 복음을 선포하는 종교가 된 것인가? 떠남이 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는 일을 채찍질해주는 종교가 기독교가 아니었던가? 교회의 성장에는 전도와 수평이동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전도의 결과가 복음이 요청하는 세속적 가치를 떠남과 회개가 없는 세례를 양산한다. 그리고 또한 수평이동에서 교회적인 질서가 무너진다. 교회당으로 찾아오면 슈퍼마켓에 손님이 오듯 그냥 환영한다. 어떤 삶의 배경과 신앙생활을 했는지를 묻지 않는다. 이전 교회들의 수고와 섬김을 배려하지도 않고 자신의 영광과 성장만을 위한 대상으로 수평이동이 진행된다. 이명증 없는 수평이동의 무질서가 주변의 교회들을 황폐화시킨다. 대형교회는 성공과 성장이 만들어내는 복음이 아닌 신화에 목마른 사람들이 몰려간다. 이명증 없는 성도들의 이동으로 형성된 대형교회들은 복음의 선한 질서인 공교회성을 끝내 무너뜨린다. 이명증 없는 수평이동을 즐겁게 누리던 대형교회들, 개교회 성장만을 추구해온 교회들은 공교회적 질서를 중시하지 않는다. 성장이 새로운 표준이 되어서 작은 교회들도 이런 무질서에 지배당한다. 결국 교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교회성을 상실한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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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08
  • 학술/ 이성봉 목사의 가난과 고난과 섬김의 삶을 기리며
    본고는 지난 7월 19일 열린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 발표회 ‘신앙 선배들의 가난과 고난과 섬김의 삶을 기리며’에서 김명혁 목사가 이성봉 목사에 대해 발제한 원고를 소개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부흥사 이성봉 목사님(1900-1965)께서 우리 곁을 떠나 주님의 품으로 가신지 50여 년이 지났지만 그분이 한국교회와 우리들의 가슴에 남기고 간 주님 사랑과 영혼 사랑의 순수함과 뜨거움은 아직도 냉랭해진 우리들의 가슴에 모닥불을 피우는 영원한 불꽃이 되고 있습니다. 그분은 한 평생을 편안하게 살지 않았으므로 장수하지 못하고 65세의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주님과 복음 전파를 위하여 다른 사역자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면서 가난과 고난과 섬김의 길을 걸어가는 값진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세기에 십여 명씩 귀중하게 쓰시는 당신 마음에 합한 종들을 이 땅에 보내시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귀중하게 쓰시던 길선주, 이기풍, 최봉석, 김익두, 이성봉, 주기철, 손양원, 한경직, 박윤선, 방지일 목사님들과 같은 충성된 종들을 다시 보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그러면 이제부터 이성봉 목사님의 “은혜 체험적 삶”과 함께 “가난과 고난과 섬김의 삶”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해서 발표를 하려고 합니다.첫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은혜 체험적” 삶이었습니다.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이인실 씨와 김진실 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성봉은 복음이 간리에 전해진 해인 1905년(6살 때)부터 어머니의 철저한 신앙의 훈련과 감화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성봉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성경을 읽게 했습니다. 성봉은 6살 때 신약을 일독했고 예배당에서 “누구든지 성신이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하시오” 하면 즉시 기도를 해서 칭찬을 받곤 했습니다. 소년 이성봉은 김익두 목사님이 운영하시던 황해도 신천의 경신소학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김익두 목사님의 신앙적 감화를 받으며 김익두 목사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청년 시절 이성봉은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3년 동안의 투병생활은 청년 이성봉으로 하여금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히게 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손길에 붙잡히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 이성봉은 1925년 동양선교회 성서신학원(현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하여 3년 동안 신앙 훈련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깊은 회개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성서신학원을 졸업하자 이성봉 전도사는 목회와 부흥 사역에 투신했습니다. 1928년부터 3년 동안 계속한 수원에서의 목회사역과 부흥사역에 회개의 역사와 함께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고 이성봉 전도사 자신은 신비한 영적 체험을 했습니다. 1931년부터 6년 동안 계속한 목포에서의 목회사역과 부흥사역에도 회개의 역사와 함께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렇다고 이성봉 목사가(1932년에 목사 안수) 신비주의를 주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목포교회에서 목회할 때 신비주의로 나가는 여신도를 책벌한 일이 있는데 앙심을 품은 그 여신도의 아들에게 폭행과 모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1936년 신의주 동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부흥사로 활동하게 되었는 데 1937년 서울에서 모인 성결교 총회 기간 동안 이성봉 목사님은 성령의 뜨거운 불 세례를 체험했습니다. 총회 기간 동안 피곤한 몸을 잠깐 쉬고 있는데 당시 유명한 부흥사인 김익두 목사님이 다가와서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는데 그의 손이 닿자마자 너무나 뜨거워 깜짝 놀라 침대에서 뛰어 올랐다가 떨어졌는데 꿈이었습니다. 그날 밤 총회 회의에서 그는 전국 부흥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937년부터 이성봉 목사님은 능력의 사자로 가는 곳마다 강한 성령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1937년 용정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는 2,000여 명이 회개하여 자복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1938년에는 한 해 동안에 50여 회 이상 부흥회를 인도하며 회개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1928년 수원에서 목회와 부흥사역을 시작한 후 1965년 7월 23일 성결교 합동총회에서 “주를 사랑하자” 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설교를 하고 8월 2일 주님 품으로 돌아가기까지 37년 동안 한국과 만주와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수많은 부흥회를 인도하는 동안 자기 스스로 수많은 영적 체험을 계속하며 기사와 이적을 동반하는 회개와 부흥의 역사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항상 경계했습니다. 지식과 기술과 경영과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고 있는 현대교회 목회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은혜 체험과 성령의 역사에 붙잡혀서 한 평생을 살며 사역한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우리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둘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구령과 교회부흥에 헌신한 수고와 고난과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잠자는 교회를 일깨우기 위해 농어촌 교회까지 찾아가서 부흥회를 인도한 부흥사의 삶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모든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심지어 청주에서 있었든 셋째 딸의 결혼식에 인사하러 올라가서도 몇 마디 인사를 하고는 이어 전도 강연을 했습니다. “그의 눈 앞에는 세상의 부귀영화는 아랑곳 없었고 명예 지위도 거들떠 볼 새도 없이 다만 한 영혼에게라도 더 많이 전도 구령하겠다는 일념에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령의 사명 완수를 위해서 그의 온 정력 모든 시간과 물질과 심지어 가족까지 다 희생의 제물로 주님께 바쳤습니다. 순회 집회하는 부흥 목사로 불가피하게 가족을 위해서 작은 집 한 채를 준비했던 일이 있는데 얼마 안 가서 어떤 교회 건축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근근이 장만한 그 집을 선뜻 팔아 전도사의 손에 들려주고 가족은 셋방으로 옮아 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만주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어머니 병환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성봉 목사님은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결국 어머니를 주님께 맡기고 집회를 계속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6·25 동란 이후에는 무너진 성결교회 제단 하나하나를 다시 세우는 교회 재건 운동을 일으켰고 마지막에는 일체의 큰 집회나 외부 집회를 단절하고 매일 수십 리씩 걸어 다니며 농어촌 교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소 구루마로 덜커덩 덜커덩 돌아다니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리어카를 타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자전거 꽁무니에 타고 가다가 험한 길에 넘어져서 버드럭 거리기도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때로는 트럭 신세도 졌습니다. 장마통에 지게로 전도 기구를 짊어지고 걷기도 했습니다. 고장난 차를 떠밀고 대관령에서 비를 흠뻑 맞아가며 넘기도 했습니다. 새벽 차를 타고 종일 차 속에서 시달려 정신을 못 차리고 허덕일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밤낮 침식을 잊고 하루에 천여 리를 차 속에서 산 때도 드문드문 있는 일이었습니다.”이성봉 목사님은 때로는 1년에 82곳의 집회를 인도했고 때로는 하루에 5, 6회의 집회를 인도하다가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순수한 구령과 복음 전파보다는 자기 교회 확장에 그리고 자기 희생보다는 대우 받음에 치중하고 있는 현대교회 목회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영혼 사랑과 교회 사랑에 사로잡혀 복음 전파에 한 평생을 헌신하며 수고와 고난과 섬김의 길을 걸어가신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우리들에게 감동적인 도전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셋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현세를 초월한 깨끗한 청빈의 삶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청년 시절부터 철저한 회개에 기초를 둔 성결하고 깨끗한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어떤 애착을 두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성의 정욕과 물질의 탐욕을 항상 경계하는 금욕적 삶을 살았습니다. 돈과 이성의 유혹에 빠지면 목회자의 삶은 끝장이란 말을 거듭해서 강조했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거듭해서 경고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일종의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정서가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부흥회 때마다 “허사가”를 즐겨 부르곤 했습니다. “꿈결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 일생의 향락 좋대도 바람을 잡누나 험한 세월 고난 풍파 일장 춘몽이 아닌가 슬프도다 인생들아 어디로 달려 가느냐”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영화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 옥답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그래서 정성구 교수는 이성봉 목사님은 “성경과 복음으로 시작해서 허무주의로 마감하는 느낌이다”라고 혹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성봉 목사님의 “허무주의적 정서”를 비판적으로만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세 부정을 통한 현세 긍정적 신앙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세 부정을 통한 내세 긍정적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현세 부정적 요소가 나타나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빌4:7-8).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과 설교에 일종의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정서가 나타나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현실 교회와 사회에 대해 무책임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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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2016-08-18
  • 학술/ 장기려 박사의 가난과 고난 섬김의 삶을 기리며
    본고는 지난 7월 19일 열린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 발표회 ‘신앙 선배들의 가난과 고난과 섬김의 삶을 기리며’에서 이상규 교수가 장기려 박사에 대해 발제한 원고를 소개한 것이다. <편집자 주> 성산(聖山) 장기려(張起呂, 1911-1995) 선생은 선한 의사로 일생을 살며, 기독자적 가치를 실천했던 의료인이었다. 부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일생을 살며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제도인 청십자 의료협동조합을 창설하고 청십자의원을 개원하는 등 가난한 서민을 위한 의료 활동을 전개하는 등 섬김의 삶을 사셨다. 그의 삶을 결정했던 행동양식, 신념체계, 그리고 그의 사회적 활동의 기초는 기독교신앙이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기초하여 자신에게는 인색했으나 남에게는 관대한 삶을 사셨다. 그래서 청빈과 가난은 그의 삶의 태도였고, 섬김은 그의 삶의 방식이었다. 이재 그의 삶의 여정과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그의 생애와 삶장기려는 106년 전인 1911년 8월 14일(음)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 739번지의 한학자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적 배경에서 성장했다. 고향의 의성학교(1918-1923), 송도고등보통학교(1923-1928)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1928-1932)에서 수학하고 의사가 되었다. 의전에 입학할 당시인 17세 때 하나님께서 의사가 되게 해 준다면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이것이 ‘선한 의사’로서의 첫 결단이었다. 경성의전을 졸업하던 해 곧 21세 때 김봉숙(金鳳淑)과 결혼하고, 장인 김하식의 권유로 백인제(白麟濟)선생 문하에서 외과를 전공하게 된다. 이때부터 패혈증 연구에 몰두하게 되는데 1940년 9월에는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나고야(名古屋)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동안 경성의전에서 일했으나 1940년 3월 평양의 연합기독병원으로 옮겨갔고, 두 달 후 안도선(安道宣, A. G. Anderson)의 후임으로 병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인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모략과 질시 때문에 다시 두 달 만에 원장직에서 물러나 외과과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심리적 고통이 있었으나 변함없이 성실하게 봉사한 일은 아름다운 일화로 남아 있다. 1943년에는 간상변부에 발생한 간암의 설상절제수술(楔狀切除手術)을 실시하여 주목을 받았고, 1945년 11월에는 평양도립병원장 겸 외과과장으로 약 일년간 일하다가 1947년 1월부터는 김일성대학의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일하게 된다. 김일성대학으로 갈 때 주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갔고, 이곳에서도 환자를 수술할 때는 먼저 기도하는 등 일관된 신앙의 길을 갔다. 그는 이곳에서도 신뢰를 받았고, 1948년에는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다.시련과 고난평양연합병원에서 질시를 받은 일도 심리적 고통이었지만 이보다 더한 고난은 6.25전란 때 가족과 별리한 일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후 평양에서 군용차로 이동하던 중 부인과 곧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으나 영영한 이별이 되었고, 이때의 고통은 그후 45년간 계속되었다. 월남 후 여러 차례 재혼을 요청받은 바 있으나 그후 독신으로 일행을 살았고,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한 고통이 없었을 것이다. 차남 가용(家鏞)만을 데리고 남하한 그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안고 일생을 살았다.남하한 장기려 박사는 제3육군병원에서 약 6개월간 봉사했다. 그 후 경남구제위원회의 전영창 총무, 서기겸 회계인 김상도 목사, 그리고 초량교회 담임이었던 한상동 목사의 요청으로 1951년 6월 부산 영도 남항동에서 무료의원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선한 의사로 일생을 살았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어디든 도움을 베푼다는 의미에서 복음병원 원장으로 재작하면서 동시에 서울의대 외과학 교수로(1953. 3-1956. 9), 부산의대 교수 및 학장으로(1956. 9-1961. 10), 혹은 서울 가톨릭의대 외과학 교수로(1965-1972. 12) 봉사했다. 의료 활동 외에도 장기려 박사는 1956년 “부산모임”을 시작하였고, 1959년에는 ‘부산기독의사회'를 조직하였다. 1968년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복음병원 분원에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한 것은 그가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 라는 취지로 시작된 이 의료보험조합은 정부가 의료보험제를 실시하기보다 10년 앞서 시작된 순수 민간단체에 의한 의료보험 기구였다. 이 의료보험조합은 1975년에는 의료보험조합 직영의 청십자의원 개원을 가능케 했고, 이듬해에는 한국 청십자사회복지회를 설립하게 된다. 이것은 기구와 제도를 통해 섬김을 삶을 지향했던 그의 삶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가 1979년 8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이런 봉사에 대한 공적 인정이었다. 장기려 박사는 복음병원에서 은퇴한 후에도 청십자의원에서 진료하는 등 여러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였고 1995년 12월 25일 84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삶의 기초로서의 기독교 신앙장기려 박사의 삶의 행로를 인도해 갔던 이념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기독교신앙은 그의 삶과 인격과 봉사의 삶을 주형했다. 말하자면 그의 이타적 삶, 가난한 이들에 대한 헌신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84년간의 생애를 움직여 왔던 축이었다. 그 할머니를 통해 신앙을 접하게 되었지만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깨닫고 신앙적 삶을 모색하게 된 것은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였다. 이때 그는 후지이 다께시(藤井武),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야나이하라 다대오(失內原忠雄), 김교신(金敎臣, 1901-1945), 함석헌(咸錫憲, 1901-1989) 등 무교회적 인사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성서조선』 정기구독자라는 이유만으로 김교신의 1942년 3월 『성서조선』 제158호의 권두문 “弔蛙”가 문제시되었을 때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12일간 구금된 일이 있었다. “김교신은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장기려 선생은 김교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장기려는 무교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 자신은 무교회주의자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해방 후 산정현교회가 다시 집회를 시작했을 때부터 장기려는 산정현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곧 집사가 되었다. 그가 평양인민병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인 1948년 8월에는 산정현교회 장로가 되었다. 말하자면 교회주의자로 제도교회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무교회주의자들의 성경연구와 그 가르침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남하한 이후 장기려는 이이라 장로, 박덕술 권사와 함께 1951년 10월 부산 중구 동광동에서 산정현교회를 재건했는데, 그는 이 교회로 장로로 봉사하고 1981년 12월 은퇴하였다. 그 후 1987년부터는 흔히 ‘종들의 모임’이라고 불리는 비교파적, 비조직적 신앙운동에 관여하였고 그가 치료차 서울로 옮겨가기까지 이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필자는 이 모임에서 휠체어에 않아서 예배드리던 장기려 박사와 만난 일이 있다. 평소 제도교회의 모순과 문제점을 보고 지냈던 장기려 박사는 외형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복음운동에 매력을 느꼈고, ‘종들의 모임’에서 영적 안식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그의 신앙 여정을 종합해 볼 때, 장기려 박사는 외적인 조직으로부터 자유 한 복음적 신앙에 착념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교회의 전통이나 신앙고백, 교리적 내용(doctrinal integrity)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런 것들에 메이지 않는 신앙운동, 곧 섬김과 봉사라는 신앙적 실천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실천적 삶: 사랑과 섬김그의 실천적 삶의 측면을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사랑을 실천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의 여정을 통해 위로 하나님을 섬기며, 아래로 사람을 섬기는 생애를 살았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선의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외연이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는 도움을 준다는 것이 그의 삶의 철학이었다. 그가 복음병원장직에서 은퇴한 이후 청십자의료조합과 청십자의원을 개원한 일이나, 부산의 아동병원, 거제도의 애광원, 그리고 보건원의 자문의로 봉사한 것도 이런 정신의 일단을 보여준 것이다. 실천적인 사랑과 선의(goodwill)는 그의 일관된 삶이었다.둘째, 무사무욕(unselfishness)의 삶을 사셨다. 그에게 있어서 소유는 궁극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는 수단이었다. 그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했고, 물욕에나 명예욕에 빠지지 않았다. 그가 살아온 삶의 여정이나 그가 남기고 간 유품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검소하게 살았고, 무소유의 삶을 지향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도 늙어서 가진 것이 별로 없다는 다소의 기쁨이기는 하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없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 그는 그 작은 소유조차도 부끄러워했다.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고신의료원 3동 8층 옥탑방에 가보면 그의 세간이 얼마나 단출했던가를 알 수 있다. 개인기록과 사진첩, 늘 입고 다니던 옷가지가 전부였다. 책이라고는 십여권의 의학서적과 성서조선(聖書朝鮮),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전집, 그리고 야나이하라 다대오(矢內原忠雄)의 강해집이 고작이었다.성산은 사리나 사욕을 추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기적 부의 추구를 가능케 해 주는 자본주의 제도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필자와의 대화에서도 한국교회의 지나친 물량적 성장제일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한 일도 있다. 무사무욕은 한 시대를 이끌어간 명의(名醫)로서 갖기 어려운 삶의 태도였다. 그는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았고, 사랑과 배품의 윤리를 실천했다. 사실 청빈과 무소유는 기독교전통에서도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으로 권장되어 왔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가치에 영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 시민으로 살고자 했다. 두 발은 땅을 딛고 살았으나 그 시대의 가치로부터 자유했던 심리적 이민자들이었다. 말하자면 나그네와 행인 같은(벧전2:11) 역려과객(歷旅過客)에 불과하다고 인식했다. 이들을 파로이코이(παροικοι), 곧 ‘나그네’라고 불렀다. 이들에게 있어서 부와 명예와 권력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이런 삶의 방식에 해당하는 라틴어가 페레그리누스(peregrinus)였다. 영어의 필그림(pilgrim)은 여기서 기원하였다. 이 말 속에는 소유욕과 배치되는 비영속성, 일시성, 잠정성 등의 의미가 있다. 소유에의 욕망은 세욕이었고, 낯선 가치였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장기려의 삶이었다. 셋째, 함께 사는 사회(togetherness) 추구했다. 장기려의 생애가 보여 주는 또 한 가지 이념은 ‘함께하는 사회’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상부상조, 공생과 상생은 그의 윤리였다. 근본적으로 그의 모든 것, 곧 소유, 학문, 학위, 명예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창설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도 같이 살기 위한 것이었다. 가난하고 불쌍한 환자들을 위해 조합운동을 시작할 때 “건강할 때 병자를 돕고, 병에 걸렸을 때 도움을 받자”는 공생(共生)과 상상(相生)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1975년에 부산 수정동에서 청십자 의원을 시작한 것도 가난한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행려환자의 구호, 기독의사회를 통한 구급활동, 간질병환자를 위한 장미회의 운영, 가난한 이웃을 위한 의료보험조합운동, 이것은 공생과 동거(同居)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형제애를 강조하되, 북한의 무신론자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함께 사는 사회’는 그의 일관된 신념이자 실천 강령이었다. 결국 그는 사랑의 보편주의(love-universalism)를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네번째, 장기려 박사는 종파주의로부터의 자유 했다. 그는 순수한 복음적 믿음을 추구했지 교파나 교단이나 인간이 만든 외형적 조직에 메이지 않았다. 그는 특정 교파나 교단을 절대시하거나 독선주의나 편협한 배타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무교회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성의 조직교회를 경시하지 않았고, 장로교회의 장로로 봉사하면서도 무교회 신앙이나 케이커교도와의 교류를 계속하였다. 그는 교리우선주의나 교파주의적 오만에 빠져 남을 정죄하거나 자신의 신앙만을 절대시하지 않았다. 그는 외형보다는 순수한 복음을 지향했다. 말하자면 그는 신앙의 정통성(Orthodoxy) 보다는 신앙의 정체성(Identity)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가 이해한 기독교 정체성이 바로 남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드리는 이타적 섬김과 봉사였다. 다섯째, 기독교적 가치(Christian values) 고양했다. 그는 일생동안 봉사자의 삶을 살았고 겸손하고도 소박한 삶을 살았다. 그는 기독자적 사랑을 강조하였고 그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굴절된 삶의 행태로 비난받는 우리 시대에서 언행일치, 신행일치의 삶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고양하여 주었다. 동시에 그는 기독자적 삶이 얼마나 큰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기독교 신앙은 그를 움직이는 이념이자, 초석이었다. 맺는 말앞에서 지적한 바처럼 성산 장기려의 삶을 결정했던 신념, 행동양식, 사회활동은 기독교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장기려 박사에 있어서 사랑, 섬김 혹은 봉사에 대한 단순한 인도주의적 접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의 생애와 삶의 여정이 인도주의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기독교 신앙 때문이었다. 그의 삶과 실천은 바로 그의 신앙고백이었고, 신적 명령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래서 의료인으로서 그의 모든 활동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였고, 이차적으로는 인간을 섬기는 행위였다. 장기려 선생에게 있어서 의사라는 직업은 더 높은 신분에로의 부름이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도구였다. 이것이 그의 소명(calling)이었다.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두 측면은 그의 생애와 삶, 의료 활동을 이끌어간 두 기둥이었다. (paxsglee@hanmail.net, 010-8520-8011)
    • 해설/기획
    • 학술
    2016-07-29
  • 학술/ 이기풍 목사의 선교와 삶
    본고는 지난 7월 19일 열린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 발표회 ‘신앙 선배들의 가난과 고난과 섬김의 삶을 기리며’에서 박명수 교수가 발제한 원고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제주선교와 이기풍 목사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선교가 시작된 것인 제주도민과 천주교도 사이에 빚어진 신축교란의 광풍이 지나간 20세기 초였다. 당시 제주도 출신으로서 육지로 나가있던 사람들 가운데 신자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돌아와서 기독교신앙을 유지했다. 특히 제주출신 조봉호는 애비슨의 세브란스에서 치료를 받고, 신자가 되어 다시 제주도에 돌아왔으며, 또 다른 제주출신 조봉호는 서울에서 경신학교와 평양에서 숭실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기독교와 잡했다(박정환 195). 장로교 독로회는 이들을 근거로 해서 제주도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였고,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제주도선교사로 임명된 사람은 이기풍 목사였다. 그는 1907년 최초의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생 가운데 한 사람이며, 이들은 다같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여기에는 길선주목사도 포함되었다. 이기풍은 1908년 초 제주를 향해 출발하였다.천주교가 외세의 힘을 빌어서 선교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면 이기풍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이기풍은 힘을 가진자로서가 아니라 힘 없는자로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천주교의 선교가 서양의 힘을 배경으로한 선교였다면 이기풍의 선교는 고난의 길로서의 선교였다. 신축교란으로 외세에 대해서 배척하던 제주도에 선교는 쉽지 않았고, 이기풍은 사람을 만나서 전도할 수가 없었다. 결국 고난에 지쳐서 쓰러져 있는데, 이것을 해녀들이 보고 구원해 주었고, 그 해녀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첫 번째 전도였다고 한다. 이기풍은 사랑의 헌신으로서 선교하였다. 제주도사람들은 외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큰 홍수가 났고, 여기에 한 여인이 휩쓸리게 되었다. 이기풍은 대동강을 건너던 수영실력을 발휘해서 이 여인을 살려냈고, 이것은 제주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기독교인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이기풍은 병든 자를 고치는 신유의 사역자였다. 이기풍은 초기에 11살 먹은 절름바리를 만났는제, 목포의 병원에 갔으나 치료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기풍은 이 아이를 위해서 기도했고, 이 아이는 기적적으로 치유를 받았다(KMF Nov. 1911). 이것은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12년의 선교보고에 의하면 “교인 중에 권능을 받아 병고치는 자 많고, 전도인이 전도함에 문이 크게 열렸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다.(박용규, 162). 이기풍의 아내 윤함예는 이미 신유의 체험을 한 사람이었다.이기풍은 영적 전쟁을 통해서 선교를 했다. 제주도는 미신이 많은 지역이었다. 특별히 뱀을 숭상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뱀을 “뒷집 하라방”이라고 불렀고, 뱀을 위해서 밥도 준비했다. 이기풍은 큰 몽둥이를 들고 뱀을 잡았다. 사람들은 놀랐지만 이기풍의 기도로 죽어가는 환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이기풍의 전도를 받아들였다. 이기풍은 기도로 영적인 전쟁을 통해서 승리하였다. 이기풍은 그 주변에 있는 토착 기독교인들과 협력하여 사역하였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기풍이 제주도에 오기 전에 이미 제주도에는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왔으며, 이들은 이기풍이 오자마자 이기풍과 함께 사역을 했다. 당시 제주도에는 박영호가 유배되어 왔고, 이어서 이승훈도 유배되어 왔다. 이들은 제주도민들에게 근대문명에 대해서 말했고, 제주도민들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근대문명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고 생각된다.이기풍은 육지에서 선교를 위해서 건너 온 많은 사람들과 협력하여 사역을 하였다. 먼저 평양노회 여전도회연합회에서는 여전도사를 파송하여 주었고,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 와서 이기풍을 도왔다. 특별히 윤명식목사는 이기풍과 더불어서 함께 사역한 사람으로서 목포 양동교회 담임목사로서 1907년 대부흥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목포의 부흥운동은 대단해서 교회를 새로 짓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따라서 이기풍과 윤명식의 지도아래 제주도는 1907년 대 부흥운동의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 할 수 있다. 또한 제주도의 선교는 남장로교회의 도움을 부정할 수 없다. 원래 제주도 선교는 독로회 전도국이 담당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전라노회, 후에는 전북노회 및 전남노회가 담당하게 되었고, 1930년대에는 재주노회로 독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었다. 그래서 남장로회 노회가 이곳에 성경학교, 간이 진료소등을 설치하여 도움을 주었고, 이런 관계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신사참배와 이기풍의 순교이기풍 목사는 제주선교 약 10년 후에 제주도에서 나와서 전남지방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가 다시 육지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건강 때문이었다. 제주도의 삶이 힘들었고, 여기에 실음증까지 생겨서 한동안 쉬어야 했다. 특별히 3/1운동 기간에 그는 전혀 활동할 수 없었다. 하지만 3/1운동이후 다시 목회를 시작하였고,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다시 1927년 제주도에 가서 제주선교를 위해서 일하였고, 1932년 다시 돌아와서 전남 순천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이기풍 목사의 초기 사역이 제주도 복음화로 빛을 냈다면 그의 말기 사역은 순교신앙으로 빛을 발하였다. 이기풍 목사가 우학리교회를 중심으로 도서선교를 하고 있을 때 한반도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시작하였고, 이어서 내선일체를 위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이미 천주교와 감리교는 여기에 항복하였고, 장로교는 여기에 항의하다가 1938년 굴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순복한 것은 아니었다. 이기풍은 바로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이기풍은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인들과 함께 일찍이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처음부터 우상숭배를 반대해 온 한국 기독교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기에다 이기풍은 제주도 선교와 도서선교를 통해서 강력한 영적 전쟁을 치루었으며,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했다고 본다. 아울러서 이기풍이 함께 사역했던 남장로회 선교부가 신사참배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다는 것도 참고사항이 될 수 있다. 이기풍 목사의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은 그의 딸의 교육에 대한 입장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기풍은 막내 딸 이사례에게 학교에서 신사참배를 하지 말 것을 교육했으며, 이것으로 불온사상학생으로 낙인 찍혔다. 학교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광주 수피아여고에 진학하였으나 신사참배 거부문제로 폐교되었고, 결국 당시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있던 부산 호주 장로교회가 운영하는 일신여고에 진학하여 졸업하게 되었다. 당시 일신여고는 전국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교역자 자녀들이 진학해 오는 유일한 학교였다. 하지만 결국 일신여학교도 폐교되고 말았다. 이기풍의 신사참배 반대는 단지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녀교육의 문제였던 것이다.1940년 순천노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기풍 목사가 우학리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그리고 이미 그의 나이가 70을 훨씬 넘은 나이에 이기풍 목사도 함께 체포되었다. 그의 나이가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건강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일제는 이기풍 목사를 석방하였다. 하지만 그는 얼마 가지 않아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42년 6월 20일이었다. 이기풍 목사의 순교에는 몇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그는 평생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이것을 자녀교육에도 실천하였다. 둘째, 일제말 기독교인들은 친미주의자로 몰렸고, 이것이 일제의 기독교 박해의 주요원인이다. 셋째, 일제 말 한국 기독교인들은 천천년설을 믿었고, 이것은 현실적으로 일본의 지배와 대립이 되는 것이었다.이기풍의 생활과 오늘의 한국기독교이기풍 목사의 삶을 돌아보면서 오늘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을까? 첫째, 교회의 공적 개념이다. 이기풍 목사는 안수를 받을 때부터 전도목사로 부름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한 곳에 머물러 왕국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고, 순회하면서 사역을 하였다. 현재 한국교회는 바로 이 점이 부족하다.둘째, 이기풍 목사는 사모와 공동의 사역을 하였다. 윤함애 사모는 원래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남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천주교는 독신으로 사목을 한다. 하지만 개신교는 결혼을 해야만 목회를 할 수 있다. 부부가 함께 사역함으로서 시너지 효과가 나야 할 것이다. 이기풍 목사는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셋째, 이기풍 목사는 신앙으로 자녀를 교육하였다. 이기풍은 위대한 신앙인이다. 하지만 그의 위대한 신앙은 단지 그 자신의 신앙만이 아니라 그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신앙으로 키우는 것을 볼 때 확인할 수 있다. 넷째, 이기풍은 영적인 전사였다. 그는 제주도와 전남의 섬 지방을 주 대상으로 해서 사역을 했다. 이런 지역에서 사역하기 위해서는 단지 도덕만 가지고는 안 된다. 사람들은 복음을 통한 능력을 원한다. 이기풍의 사역은 많은 경우 영적인 능력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매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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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2016-07-19
  • 학술/ 한국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공공신학과 공공정책
    이글은 한국공공정책개발원이 지난 7월 4일 생명나무숲교회에서 개최한 ‘한국공공실천포럼 창립기념 세미나’에서 장헌일 목사(한국공공정책개발연구원 원장)가 강연한 ‘한국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공공신학과 공공정책’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 불신의 근원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중 부도덕성을 큰 하나의 근원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윤리와 도덕성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과 교회 홍보를 위한 보여주기식 봉사가 아닌 진정성 있는 사회봉사와 진정한 사랑을 담은 구제가 신뢰회복의 근거와 신뢰도를 높이는 중요한 척도로 나타나게 된다.특히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깊이에 따른 삶의 태도와 실천이 중요한 변수로서 신뢰도에 있어 한국 교회가 가장 불신을 받는 것은 무종교인들뿐만 아니라 종교인 가운데서도 믿음이 깊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신학이 기독교 공동체의 우선적 배려나 편의 그리고 이익을 비롯 신학적 전통의 보장 등을 위한 실천이 아니라 교회의 공교회성과 공공성에 입각한 공공선(common good)을 추구하려는 실천적 사명이 되어야 그 본래적 의미를 살릴 수 있게 된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이러한 다양한 관점에서 공공신학에 의한 공공신앙은 크게 신앙생활의 공적 영역의 문제와 교회의 공적 성격으로 구분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어떤 형태와 방법을 통해 시민사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그래서 공공신학은 단지 선언이나 담론 형성 자체로 그쳐서는 안 되며 시민사회의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관계함으로써 공공선에 기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공공신학에서 신학의 공공성(publicity)을 증언하는 일이다. 공공신학은 시민사회와 협력하며 정책 입안에도 기여한다. 영국 상원은 성공회 주교를 참여시켜 약자의 권리를 반영토록 한다. 아프리카 극빈국 부채 탕감 캠페인 ‘빈곤을 역사 속으로(make poverty history)’는 교회가 처음 주도했다. 공공신학이 적용 가능한 6가지 카테고리로, 국가, 시장, 미디어, 시민사회, 학계, 종교계를 꼽았다. 한국의 경우 국가와 시장, 미디어 등이 공공영역을 주도하고 있으며 교회는 이들 영역 속에서 공공의 선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미국의 대표적인 공공신학자, 스택하우스(Max Stachhuose)는 이 공공신학을 넓은 의미로서 정의한다. 그는 신학이 ‘공적’(public)이라고 불릴 수 있는 두 가지의 근거에 대해서 말한다. “첫째는 기독교인들이 믿는 바와 같이 우리는 비밀스런 집단이 아니며, 어떤 특권층도 아니고, 비합리적이지도 않고 접근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에게 이해되어질 수 있고 필요한 존재라고 믿는다. 우리는 힌두교도 및 불교도들과, 유대교인 및 회교도들과, 인문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과 합리적인 입장에서 논의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이러한 신학은 공적인 삶의 구조와 정책으로 인도될 것이다. 공공신학은 본성적으로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는 공공신학의 자료 또는 근거(warrant)가 성경, 전승, 그리고 이성과 경험이라고 하였으며, 이것들을 근거로 하여 창조, 해방, 소명, 언약, 도덕법, 죄, 자유, 교회론, 삼위일체론, 기독론 등의 주제(theme)들을 다루게 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독일의 공공신학자 중의 한 명인 몰트만(J. Moltmann)은, 공공신학(theologiapublica)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역사의 공적 세계 속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관심과 희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것은 기독교의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공공신학은 사회의 공적 문제들에 대한 신학의 공적 상관성을 강조한다.(노영상, 한국기독교윤리학회 학술대회, 2008) 한국교회의 이러한 현실과 이를 회복케 하기 위한 방안으로 교회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교회와 회중의 정체성을 통한 대사회적 영향력의 확대와 세상과의 적극적인 참여와 소통을 통한 교회의 공교회성의 역할과 다각도의 사회 변혁의 방안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에서 공공신학에 의한 공공신앙은 크게 신앙생활의 공적 영역의 문제와 교회의 공적 성격으로 구분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어떤 형태와 방법을 통해 시민사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이런 의미에서 공공신학은 단지 선언이나 담론 형성 자체로 그쳐서는 안되며 시민사회의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관계함으로써 공공선에 기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공공신학에서 신학의 공공성을 증언하는 일이다.신학 안에 명시적 공공성을 완벽하게 장착하는 것만이 신학자의 과제는 아니다. 그 신학이 교회 안에서 실제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게 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도 신학자의 과제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의 개인주의적 퇴행에 대한 우려는 명시적 공공성에 대한 우려에서 기인하기보다는 실제적 공공성에 대한 우려와 관계가 깊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교회의 실제적 공공성을 고양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스택하우스가 언급한 ‘에토스’에 관심을 갖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스택하우스는 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에토스(ethos)를 형성하여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사회의 보이지 않는 에토스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추천하는 것이다. 이것을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교회 갱신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의 공공성을 고양하는 방향으로 작동되는 에토스를 교회에 새롭게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회의 참된 갱신은, 교회의 에토스가 갱신되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김병권,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 2014년 11월 22일) 한국에 소개되고 있는 공공신학은 크게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과 독일의 볼프강 후버(Wolfgang Huber)의 공공신학으로 나눠질 수 있다. 이중에서 스택하우스 공공신학이 한국에서는 주로 논의되고 있다. 어느 쪽 공공신학을 논의하든, 그 출발점은 대체로 한국 교회의 개인주의적 퇴행에 대한 우려와 그에 대한 대안 모색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공공신학에 대한 평가의 기저(基底)는 긍정적이다. 공공신학이 교회 및 크리스천의 개인주의적 퇴행 성향에 제동을 걸고 공공성 회복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에 소개되고 있는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을 살펴보면, 그의 신학은 교회 및 신앙의 개인주의적 퇴행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지구촌의 세계화 현상에서 야기되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스택하우스는 “‘공공신학’이야말로 그 잠재적인 역량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화가 제기하는 쟁점들을 다룰 수 있는 오늘날 가장 중요한 신학적 발전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의미하는 ‘세계화’는 ‘특정 콘텍스트 초월’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특정 콘텍스트를 포괄하고 상대화시키는 보다 광범위한 공중(public)에 대한 인식을 요구한다”고 한다. 바로 이 점에 근거하여 스택하우스는 유럽의 ‘정치신학’과 자신의 ‘공공신학’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는 “정치신학은 사회에 대한 정치적 관점으로 기우는 경향”과 함께 “정부를 사회의 포괄적인 제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기에, ‘특정 콘텍스트 초월’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일반은총 개념의 토대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적 세계관이 이러한 행태의 공공신학의 대표적인 실례이다. 레슬리 뉴비긴 등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기독신앙의 공공성에 대하여 더욱 근본적인 신학적 토대를 제공한다.많은 신앙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삶 속에서 공개적으로 적극적으로 증언하기 위해 부름 받았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고백이 하나님의 사역을 새롭게 하는 것이며, 또한 그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건전한 교리는 윤리를 동반하는 것이다. 말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적인 도리이다. 이 때 핵심적인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느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많은 신학자들은 교회의 사회를 향한 도전과 응답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적 성격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그러나 공공성을 강조하는 교회의 본질과 소명에 대한 논의들은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의 본질과 소명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존재하고 있음을 결코 간과할 수는 없는 사실이다. 나름대로의 공공신학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러한 모호성과 다양한 의견의 존재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점검과 비판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이와 함께 비록 신학적 견해에는 일치가 있다 하더라도 상황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여전히 논란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흠 없는 공공신학, 이견의 여지가 없는 공공신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과제이다.이러한 한계에 좌절하기보다는 오히려 살아계신 주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의 지속적인 증인이 되려는 자세와 태도, 즉 영성을 유지하면서 복음을 향한 끊임없는 복종과 섬김의 삶을 모색하고, 결단하고, 실천하는 공공신학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6-07-08
  • 학술/ 종교개혁 500주년에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방향
    본고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지난 6월 21일 나사렛대학교에서 개최한 ‘한목협 제18회 전국수련회’에서 발제한 안인섭 교수의 원고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한국의 종교개혁 신앙 수용한국이 종교개혁 신학을 수용한 것은 독일,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 등 유럽과 비교할 때 매우 다른 특징들을 보인다. 그들은 자신이 로마 가톨릭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종교개혁을 맞게 되었다. 또한 유럽인들이 미국에 정착해서 시작된 북미의 개신교도 결국은 그 연장선 위에 있다.그러나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종교개혁 수용은 이와 다르다. 다양한 종교적, 문화적, 그리고 역사적 배경들 속에서 서구 선교사들의 선교 사역을 통해 복음이 전해졌고 개신교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의 정체성은 서구 개신교회를 통해서 소개된 성경과 그 위에 서 있는 종교개혁 정신, 그리고 한국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컨텍스트의 만남을 통해서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종교개혁 정신을 수용한 것의 특징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첫째로 한국의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기독교의 진리 그자체로서 받아들였다. 이것은 또한 한국에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개신교는 한국의 가톨릭과 독립적 관계 속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두번째로 한국의 개신교는 19세기의 서양의 선교사의 선교 사역을 통해서 활성화 되었다. 물론 한국의 개신교는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탁월한 자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생적인 개신교의 탄생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번째로, 한국의 개신교는 한국의 20세기 역사적 발전에 따라서 다양한 성격을 보여주었다. 네번째로, 한국은 개신교 각 교단의 신학이 종교개혁 정신 이해에 영향을 주었다. 즉 한국의 개신교는 종교개혁 저작을 읽고 영향을 받아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각 교단별로 교회가 세워진 이후에, 이 교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세워 나가는 과정에서 종교개혁 신학을 다시 돌아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종교개혁신앙 수용의 방향종교개혁 정신은 끊임없이 한국 교회를 독려했다. 예를 들어 칼빈의 신학의 경우가 그러하다. 앞으로 한국 교회는 종교개혁 정신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수용해 가야 하는가? 몇가지로 나누어서 살펴 보려고 한다.(1) 성경에 근거한 신학적 진리성에 기초함한국 교회는 무엇보다 종교개혁 정신 위에 다시 세워져야 한다. 종교개혁의 Sola Scriptura 정신을 이어 받아서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와 진리성을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 놓아야 한다. 그리고 Sola Fide의 정신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Sola Gratia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은혜 위에 우리의 구원과 신앙의 체계를 세워져야 한다. 이 정신에서 이탈하게 되면 한국 교회는 세속주의와 이단의 도전, 그리고 기복신앙과 공로주의적인 신앙에무기력 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성경적 토대 위에 한국 교회를 다시 정초해야만 한국 교회의 사회적 지도력과 성도들의 성숙한 삶이 유도될 수 있다.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한 매우 긴급하고 절박한 사안이라고 사료된다.(2) 사회 변혁을 위한 교회의 능동적 참여교회의 정치참여 문제는 시대 변화에 따라 그 의미가 발전해 왔다. 문민정부 이전에는 주로 진보적인 진영의 특징이었다.1990년대 이전 이 주제는 주로 정부에 대한 저항이나 지지라는 비교적 단순한 논리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위 민주적인 정부가 출범한 1990년대 이후에 교회의 정치 참여 문제는 반정부, 친정부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보다 다각적인 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특별히 현대의 민주화된 사회 속에서 개인과 단체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고, 이러한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율할 수 있는 실제적이며 최종적인 권위를 국가가 부여 받게 된 상황 속에서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문제는 보다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하고 있다.한국의 민주화 이후에는 신학적인 보수와 진보의 구별 없이 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그 범주도 사회정의와 생태학적인 측면 뿐 아니라, 사회 복지 활동과 평화 통일 등을 위한 교회의 사회 참여가 증가하고 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정부가 추구하는 정책에 대한 신학적 고려에 근거하여 그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표명하는 방향으로 교회의 사회 참여가 진행되기도 하는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그런데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현대 사회 속에서 교회의 정치 참여 문제는 단순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 더욱 더 쉽지 않다.(3) 양극화 해소를 위한구호 활동16세기 유럽에서 복지 개혁을 위한 움직임의 확산은 거의 정확하게 종교개혁의 확산과 함께 전 유럽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종교개혁자들은 많은 정통 가톨릭에게 도전을 주었다. 특히칼빈의 리더십 아래에서 제네바가 이룩한 사역은 초기 개신교의사회복지 개혁에 대한 중요한 모델이 된다.제네바의 복지 개혁은 당시의 다른 도시의 일반적 형태를 그대로 따랐다. 제네바 시에 의해서 빈민과 병자를 치료할 목적으로 운영하는 종합 구빈원이 그것이었다. 이 제네바 종합 구빈원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있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환대를 제공하는 다목적 기관이었다. 대부분 전쟁으로 인한 고아와,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없는, 너무 늙고, 아프거나, 심한 장애를 가진 소수의 노인들에게 집을 제공하였다. 그곳에서는 가난한 가정에게 빵을 매주 나눠주었고, 자신들의 숙박료를 지불할 수 없거나 막 제네바에 도착한 유럽의 방문객에게 매일 저녁 쉼터와 음식을 제공하였다. 그런데 이 구빈원의 실무를 담당하는 인력은 “집사”였는데 이들이 교회의 직분으로서 그 사명을 감당했다.(4) 국제적 네트워크의 형성16세기 지도를 보면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루터주의, 영국의 성공회 그리고 급진 종교개혁운동이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칼빈주의는 16세기 전 유럽에 확산되어 있었다. 종교개혁의 특징 중의 하나가 “국제화”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종교개혁은 민족적인 개념이나 국가적인 경계선을 초월하여 성경과 신학을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국가나 민족을 넘어 신학적인 연대감 속에서 전 유럽으로 확산된 것이 칼빈주의다. 특히 16세기 종교개혁자 칼빈을 21세기에도 여전히 배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점이다. 칼빈은 그 시대 유럽 전체에서 제기되는 교회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성경의 정신에 근거한 개혁신학으로 해결책을 제시했으며, 또한 목회 현장과 국제적 무대에서 실제로 성공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했던 제네바의 빈민을 위한 구제 사역도 스위스 뿐 아니라 국제적인 네크워크를 통해서 더욱 심화될 수 있었다.한국교회도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가기 원한다면 성경에 근거한 신학을 토대로 한국 사회뿐 아니라 국제적인 교회의 사역을 위해서 더욱 밀접하고 강력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해 가야 할 것이다. (5) 종교개혁과 남북 평화 통일종교개혁 정신이 그러하듯이 통일을 위한 교회의 사역도 성경에 근거해야 하며사회적 이데올로기 위에 세워져서는 안된다.그 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이란 타자를 위한 사랑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칼빈은 “자신의 이기심을 포기하고 타자를 유익하게 할 때” 비로소 자아의 거듭남이 “증명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북한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통일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구원을 위한 전제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더 깊이 숙고해 보면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면서 자기의 이기심을 버리고, 북한의 동포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유익을 구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거듭남을 증명해 주는 한 요소가 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6) 생태계보전을 위한 구체적인 사역종교개혁 신학의 토대가 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를 아버지의 사랑으로 돌보라는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함으로 그 본래적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을 때, 인간 뿐 아니라 전 창조 세계에 그 비참한 결과가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전 우주적 구속 사역으로, 모든 피조물은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이에 근거하여 한국 교회는 현재 생태계의 파괴와 그로 인해서 파생되는 온갖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이 인간의 범죄에 근거함을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위임해 주신 인간의 본래적인 삶을 이탈하여 발생한 창조 세계의 훼손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제는 창조 세계를 보존하도록 보다 전향적이고 능동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6-06-30
  • 학술/ 보수 교단 내 평등적 가치 실현을 위한 실천신학적 접근
    본고는 지난 6월 2일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주최한 ‘여성 리더십에 대한 신학적 모색’ 포럼 ‘여성안수 신학적 확신에 답하다’에서 강호숙 교수가 발제한 ‘보수 교단 내 평등적 가치 실현을 위한 실천신학적 접근’을 발췌한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여성안수반대’가 야기하는 성차별의 문제 보수교단의 가부장적 질서에 의한 성차별은 대략 네 가지 측면에서 발생한다. 첫째, 여성안수반대는 여성 리더의 부재로 여성들의 실존적인 삶의 필요와 경험을 담지하지 못하거나, 여성됨을 축소시키거나 오해함으로써 복음의 왜곡을 가져오게 된다. 예를 들어 여성의 몸과 관련된 임신, 출산 및 고부갈등과 낙태, 우울증 등 실존적 삶의 문제와 고통을 복음과 연계하지 못하고 단지 ‘교회 일’만 하는 ‘하녀’처럼 몰아가고 있다. 둘째, 가부장적 교회법, 행정과 정치는 교회여성들로 하여금 직위와 처우에 있어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게 함으로써 사랑과 정의, 평화와 연합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훼손시킨다. 셋째, 성차별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성적 자유와 성적권리를 제한함으로써 성 혐오와 성적 타락을 야기할 수 있으며, 설교와 교육에서 성비하, 성희롱, 성역할 분업관 등의 성차별적 발언으로 상처와 피해를 입히게 된다. 넷째, 교회구성원의 약70%를 차지하는 여성들의 고유한 가치와 경험, 은사와 소명을 배제함으로써 복음의 위축은 물론이거니와 인권, 성 이슈들(sexual issues), 환경, 이혼과 가정폭력, 이단, 노령화 사회에 대처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성차별이 미치는 영향 교회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성 혐오와 성차별의 결과를 가져온 사건은 중세의 ‘마녀사냥’이라고 할 수 있다. 마녀사냥은 성 쾌락을 원죄로 본 어거스틴의 성 혐오사상과 남성보다 더 ‘약한 성’으로서 차별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여성관이 ‘여성혐오’라는 절정에 다다랐고, 13세기 당시 거대한 이단운동에 직면하여 악마이론을 광범위하게 전개시키면서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대략 백만 명 가량의 여성들을 잔인하고 끔찍하게 대학살한 사건이다. 대체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의존적이며, 종교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데, 물론 이러한 특징 역시 교회로부터 학습된 것이기도 하지만, 여성들이 그만큼 압박받거나 고통스런 현실에 처해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성혐오와 성차별은 여성 개인이나 교회공동체에 즉각적인 손실과 잠재적인 손실을 가져옴으로써, 여성들뿐 아니라 남성자신들, 교회공동체를 비인격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교회의 성차별적 환경에 순응하는 여성들은 낮은 성적자존감을 갖게 되며, 자포자기, 박탈감, 수치심, 죄의식, 우울, 분노, 억울함 등의 심리적인 증상이 나타날 수 있는 반면, 성적 자아가 강한 여성은 성차별에 환멸을 느껴 신앙을 포기할 수도 있다. 사회적 증상으로는 부부갈등, 자녀교육의 어려움, 직장생활의 어려움, 사회적 고립, 무기력 등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성차별의 위험성은 성폭력, 강간, 성희롱, 성추행, 살인의 범죄를 유발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여성리더십(women's leadership)의 특성과 장점 1) 여성리더십의 특성 여성리더십의 특징을 말할 때 전제되어야 할 것은 여성은 인간됨을 구성하는 파트너(parter)로서 남성과 똑같이 독특하게 창조된 존재라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힘과 권리, 견제와 상호보완적 책임을 지닌 인격적인 존재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존재로서 창조와 다스림, 사회성, 도덕적 선택, 정의와 평화, 성령의 열매에서 자유를 실천해 나가는 존재로서 여성리더십의 특징을 말해야 한다. 그래서 ‘여성성이란 이것이다’라고 규정하는 자체가 불평등이나 억압이 될 수 있고, 여성이라 해도 성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 앞에서 각 개인이 규정할 자유가 있기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는 특징으로는 첫째, 수평 관계성이고 둘째, 정서적인 성향으로 공감, 열림과 유연성, 돌봄과 배려가 있으며, 셋째, 권력과 맞닿지 않은 도덕적 순결성이라고 말한다. 여성들은 거의 대부분 어머니의 양육으로 인해 독립개체성향과 성취지향성을 지닌 남성들과는 달리, 대체로 관계지향적인 성향과 자기개방, 정서적이고 공감과 유연성, 부드러움과 따뜻함에서 나오는 돌봄과 권력과 맞닿지 않은 도덕적 순결성을 지니게 된다.2) 여성리더십의 장점들여성리더십의 장점이 될 수 있는 첫 번째 요소는 여성성이다. 현대사회는 열림과 소통, 다양성과 전문성의 시대이며, 직관적 감수성과 정신적 역량에 기초한 권위가 부상하는 시대이다. 따라서 여성들의 공감과 배려와 돌봄의 성향이 전인적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데 큰 장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요소는 여성의 소명과 은사이다. 교회가 여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과 은사를 모두 환영하고, 여성들의 탁월한 정신 세계와 전문성, 공감능력과 돌봄의 리더십을 활용할 때, 교회와 사회, 그리고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확장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 요소는 여성리더십은 목회에 있어 큰 장점이 된다. 자격과 전문성을 갖춘 여성리더를 세움으로 목회대상의 약 70%를 차지하는 여성들의 삶의 필요와 경험을 적절하게 원용하는 목회 돌봄이 될 수 있다. 남성 목회자가 여성들의 삶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는 많은 한계를 지닌다. 목회는 ‘영혼 돌봄’으로서 여성이 갖고 있는 모성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네 번째 요소는 교회 갱신적 차원에서 여성리더십은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찍이 Jacques Ellul은 기독교가 왜곡된 이유가운데 여성을 배제하여 남성중심의 교회가 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교회는 여성이 주로 관심을 갖는 기독교의 탁월한 혁신, 은총, 사랑, 박애, 생명체에 대한 염려, 비폭력, 사소한 것에 대한 배려, 새로운 도전과 소망과 같은 것들을 남성들의 성공과 영광을 위해 모두 외면해 버렸다고 비판하였다.현재 한국교회는 물량주의, 개교회주의, 성장주의로 약자와 눌린 자,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잃어버렸으며, 최근 목회자의 성적부패와 관련된 사건들이 터지면서 성적타락이 위험수위에 다다랐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갱신에 있어 가장 시급한 일은 여성리더를 세워, 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남성에 대한 견제장치로서의 역할을 하며, 성경적 해석에 있어서도 여성입장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고, 복종이나 침묵보다는 자유, 선택, 정의, 사랑, 평화의 복음적 가치들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1세기 보수교단 내 남녀파트너십의 과제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의 언약과 섭리에 따라 왕적 지도권을 갖고서 하나님의 문화명령에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며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돌보며, 주님의 복음전파 사명을 위해 성령 충만을 입어 헌신하는 파트너들이다. 초기 한국교회 때, 자유와 구원, 그리고 남녀평등 사상을 가르친 기독교 복음은 남존여비로 인해 눌리고 차별받아온 여성들을 한국교회의 정착과 부흥을 일궈내는 역동적인 일꾼으로 변화시켰다. 향후 개혁교회 내 남녀파트너십과 관련된 다각도의 연구들이 활발해지기를 바라며, 양성평등하며 윈윈(win-win)하는 남녀파트너십의 실천과제를 제안해본다. 첫째, 보수교단 내 남녀파트너십의 실천과제에서 선행되어야 할 일은 남녀가 평등하다는 인식과 동등한 직분관계로의 전환이며, 여성신학자들을 연구에 가담시켜 남녀파트너십에 대한 신학적, 성경적, 교회사적, 실천적인 논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남녀에게 은사와 전문성에 따른 직위를 부여함으로써, 영적인 통찰과 전문적 경험, 아이디어를 수렴. 공유하여 결혼, 이혼과 재혼, 자녀교육, 인생의 주기(태아기-유야기-청소년기-청년기-장년기-노년기-사망기)와 관련된 목회담론의 인프라를 구축해야 할 과제가 있다. 셋째, 남성들이 하기 어려운 특수사역에서 여성리더들을 적극 활용해야 할 과제가 있다. 여선교사들에게 성례권을 줌으로써 모슬렘 여성들이나 미전도 종족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세례를 베풀도록 해야 하며, 여군목을 세워 군선교가 활발히 이뤄지도록 해야 할 것이며, 또한 창녀촌, 이혼녀, 가출청소년, 탈북여성을 돌보는 사역에 헌신할 여성리더들을 발굴하고 세워야 한다. 넷째, 신학대학원 교육에서부터 남성과 여성이 서로 파트너십을 형성할 수 있는 여성교수 확보와 여성관련 교육과정의 다양한 과목을 개설하여 여성사역자 뿐 아니라 남성사역자도 파트너십 교역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다섯째, 교회의 노령화에 직면하여 노년층의 활성화와 교도소 선교, 각종 중독(성중독, 마약중독, 인터넷중독), 정신적 질병, 호스피스, 장례 등 삶의 총체적 돌봄을 위한 조정자, 의사, 간호사, 목사, 사회복지사, 영양사, 지원봉사자 등 남녀전문 인력들을 세워 교회와 지역사회봉사를 위한 남녀파트너십 네트워킹을 구축할 과제가 있다. 여섯째, 교회교육의 활성화, 교회연합, 기독윤리를 비롯하여, 환경문제, 남북통일, 북한인권, 경제침체, 정의실현 등 사회적 책임과 관련하여 남녀파트너십의 역량이 발휘되도록 교단적인 관심과 제도적 지원이 마련되어야 할 과제가 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6-06-16
  • 학술/ 칼빈의 종교개혁과 시민사회개혁
    이 글은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회장 김경원 목사)가 지난 5월 10일 덕수교회에서 개최한 제33차 열린대화마당에서 심창섭 교수(전 총신대 신대원장 및 부총장)가 발제한 원고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칼빈의 시민사회개혁의 신학적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 과제는 여러 관점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칼빈의 성경주해를 통해서 그리고 기독교강요 연구를 통해서 집중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강요에 인용된 사도행전 2장 24절, 로마서 12장, 야고보서 1장 5절, 그리고 이사야 23장 18절에 대한 해석이다. 본고에서는 두 가지 관점에서 칼빈의 시민사회개혁의 근거를 검토하려 한다. 하나는 그의 신학주제 중 하나인 생명의 실존적 삶에 대한 그의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섭리교리와 정치윤리의 견해이다. 생명의 실존적 삶에 대한 이해칼빈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로부터 부여 받은 생명을 가진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요 소유주이신 하나님을 쫓아서 삶을 이끌어 갈 때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참된 근원으로부터 그것의 교훈을 이끌어낸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요 소유주이신 하나님께로 우리의 삶을 이끌도록 언급할 뿐 아니라 우리가 창조의 참된 조건과 기원에서 타락했다는 것을 가르치며 또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표현해야 할 패턴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다.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삶의 모범에 쫓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한 삶을 추구하므로 하나님과의 연합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함이 공로가 되어 그 근거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중생한 삶의 결과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악과 부정을 원치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한다면 당연히 우리의 삶이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칼빈은 그리스도로부터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적인 삶의 당위성을 속죄와 구원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중생한 자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요. 하늘에 소망을 둔 삶이어야 함을 강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의식이야 말로 올바른 삶을 세우는 가장 확실한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일반 철학자들의 도덕론은 단순히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데 그치며 그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것이다.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행동을 하나님이 다스리게 해야그래서 칼빈은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권면하고 있다. 칼빈은 이렇게 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생각과 뜻이 하나님의 계획과 행동을 주관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뜻과 지혜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다스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삶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을 향한 삶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생명에 이르는 관문이라는 것이다.칼빈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그리도인들이 소유한 생명의 존재 의미와 가치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일어나야 할 축복된 삶의 형태이며 이것은 곧 자기 비움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부인의 삶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과 이웃의 유익을 위한 삶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칼빈은 왜 자기 부인의 삶을 강조했는가? 칼빈은 자기 부인의 삶이 없이는 세상의 정욕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삶의 추구가 불가능 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돼그것(자기를 부인함)이 한번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 교만과 허식 탐욕과 욕심 그리고 화려함을 좋아하는 것과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온갖 종류의 악행들의 여지가 없어진다(참조 딤후 3:2-5). 반면에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추하고 거짓된 죄악에 빠지든지 어떤 유사한 덕목을 나타낸다 해도 그것은 자기 영광을 위한 부패한 욕심에서 나타난 것이다.칼빈은 자기 부인은 주님의 명령이며 그것 없이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가능치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의무는 자기 포기라는 결단이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포기를 주장하는 칼빈은 인간의 본성은 원천적으로 자신만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결국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무엇이든지 이웃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웃과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신자의 삶의 자세는 무엇인가? 칼빈은 우리가 교회의 공동 유익과 이웃을 위해 섬기는 태도는 청기지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생각은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이웃을 돌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물질관 때문이다. 그리고 칼빈은 청지기의 사역을 감당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모든 것들에 대한 청지기이며 그로 인해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고 청지기직의 평가를 계산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올바른 유일한 청지기직의 길은 사랑의 법에 의해 시험되는 것이다.그러면 칼빈이 이웃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칼빈은 왜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가? 칼빈은 인간을 단순한 생태학적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생명체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칼빈의 위대한 인간존중의 사상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사람들이 선을 받을 자격이 대부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서로 선을 행하라고 하나님이 가르친 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원리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귀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여기서 성경은 가장 최상의 길을 보여준다. 즉 우리가 사람들을 그들의 행위의 공로에 따라 판단하지 말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인간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과 영예를 받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엄성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든, 비천한 사람이든, 불학무식한 사람이든 혹은 전혀 가치 없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그 사람들 속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빛나고 있으므로 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는 언제라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은 마 5:4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를 밝히고 있다.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 주며,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한다는 것은(마 5:44) 정말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도 완전히 거스르는 일인데, 그런 일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가지 밖에는 없다. 곧 사람의 악한 것에 개의치 않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선물칼빈의 이웃사랑과 존엄사상은 또한 인간의 외형적인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칼빈은 사랑을 베푸는 자들이 인격적인 내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 자신을 죽이는 일이며 그것은 사랑의 수혜자의 위치에 자신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바로 그 사람의 입장에 자기를 가져다 놓고서, 그 사람의 불행을 마치 자기가 당하는 것처럼 그렇게 안타깝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다운 감정이고 참된 동정심이라는 것이다.칼빈은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선물이므로 우리의 삶 자체가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귀한 존재임을 주장하면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칼빈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쫓아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청지기로서의 삶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삶이 지속될 때에 생명의 가치와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다. 칼빈의 인간 생명 존중 사상을 보면 그가 왜 제네바 시민사회의 개혁을 위해 목회적 차원에서 온힘을 쏟았는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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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0
  • 학술/ 언더우드 선교사의 제자도 : 경건, 열정, 희생
    이 글은 지난 5월 28, 29일 서울 새문안교회 교육관에서 열린 언더우드 선교사 서거 100주년 기념 제9회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에서 윤경로 장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사장)가 특별강연으로 발표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제자도: 경건, 열정, 희생 그리고 그의 삶” 가운데 ‘언더우드 목사의 목회상의 특징과 공적’을 간추린 것이다. -편집자 주 언더우드 목사의 목회상의 특징과 공적1885 년 4월, 25세의 젊은 나이로 내한하여 1916년 10월 하늘의 부름을 받기까지 31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언더우드 목사의 목회 공적과 활동은 매우 다양 다기했습니다. 31년간의 한국에서 활동한 언더우드 목사의 주요 업적을 추려 보면, 새문안교회 목사로 섬기는 외에 한글 성경번역위원회를 결성하여 <성경전서>의 번역을 주도하였고, 최초로 <찬양가>를 제작 보급하여 교회음악의 기초를 놓았으며, <한국어문법>과 <한영자전>, <영한자전>을 편찬하였고, <죠션 그리스도인 회보>, <그리스도신문>을 간행하여 기독교언론의 기초를 놓는 등의 일을 하였습니다. 이 밖에 36개의 기독교단체 책임자, 연합신학대학 학장이자 심리학·철학·윤리학 교수, YMCA 이사장, 조선예수교서회 실행위원회 회장, 피어슨신학교 교장, 서울전도위원회 회장, 성경개혁위원회 회장, 선교회 집행·교육·재정위원회 위원, 세브란스병원 이사회 위원, 서울 초등학교 위원회와 연합공의회 법정위원회 위원 등 주요 직함만도 10여개 넘을 정도였습니다. 오늘 강연에서는 그의 복음 선교사로서의 공적과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는 데 한정하고자 합니다.재한 선교사 가운데 언더우드만큼 쉼 없이 선교활동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선교사는 없다 하겠습니다. 내한 초기 그의 열정적인 전도와 선교의 열정은 말년에도 전혀 늦춰짐이 없었습니다. “그는 방대한 선교사업과 서신 교환을 위해 미국인 선교사 보조원을 포함하여 한국어와 영어에 능한 비서 두서너 명과 타이피스트 3~4명 외 한국인 번역자와 필경사를 옆에 두고 일했을” 정도로, 말년에도 그의 전도와 선교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었습니다.한 예로 부인(L.H. Underwood)이 펴낸 ‘한국의 언더우드가(家. The Underwood of Korea ’(1918)에 보면 “1915년 4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한 해 동안에 각지로 보낸 편지 및 보고서가 무려 2,300여 통에 달할 만큼 열정적인 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교열정이 그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는 아쉬움도 없지 않지만, 한국을 향한 그의 선교열정이 적극적이었으며 시종여일(始終如一)했다는 점은 그가 한국교회에 남겨준 귀중한 정신적 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이스라엘을 다니면서 회개와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의 그 열정과 희생의 헌신된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사람들에게서도 당연히 필수적 요소인데 언더우드 역시 구원의 열정을 갖고 수많은 일들을 열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었고 결국 이 땅에서 온 몸을 바쳐 희생하고 헌신하였던 것입니다.지방전도여행엔 한국인 동역자 대동1900년대 접어들어 전도활동이 자유스러워지면서 그의 본격적인 지방전도활동이 시작되었는데, 그는 매우 독특한 전도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지방전도여행에는 한국인 동역자들을 대동하였는데 이들 가운데는 두서너 명으로 구성된 코르넷(cornet) 연주자와 환등기 기사를 꼭 대동하였습니다. 일단 전도집회 장소에 도착하면 우선 천막을 치고 그 앞에 대형 크기로 그려진 예수 초상화를 걸어 놓은 후 나팔수를 앞세워 주변 동네를 다니며 전도지를 돌리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운집하면 코르넷 연주자의 선도로 찬양가를 힘차게 부르고 이어 환등기를 돌려 마치 무성영화 시절 변사(辯士)의 구성진 소리모양 그림 설명이 시작되면서 참석자들의 마음을 한껏 사로잡았던 것입니다.그런데 언더우드가 참여한 지방전도여행이 특별히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미국인 언더우드 자신이 지방민들에게 더없는 호기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시골에서 말로만 듣던 ‘파란 눈’(碧眼)의 ‘코쟁이’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코쟁이’ 외국인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을 모으기에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지방전도여행을 떠나면 적어도 하루에 짧게는 40리길, 길게는 60리길을 걸으며 전도여행을 강행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이 같은 남다른 전도방법을 살펴볼 때 매우 조직적인 두뇌와 사업가적 기질을 지닌 ‘수완가’였다는 점 등 그의 개인적인 특징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남다른 사업가적 솜씨 때문에 한때는 타자기 회사를 경영하는 형님으로부터 부사장 자리를 맡길 터이니 미국으로 돌아와 달라는 요청을 받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원일한 장로 증언). 이러한 사업가적 기질은 여러 면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는 초기 선교비 염출의 한 방법으로 석유, 석탄, 농기구 등을 수입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학계에서 처음 공개된 1906년에 작성된 유언장에 보면 황해도 소래(松川)에 ‘소래비치회사’(Sorai Beach Company)를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하였음이 새롭게 밝혀졌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안식년이면 본국에 돌아가 미국 전 지역 교회를 돌며 한국선교를 위한 상당한 후원금을 모금해 왔는데,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강점당한 1910년 한 해만도 선교지원금으로 17만 불을 모금하였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놀라운 사업적 수완가이기도 했던 것입니다.또한 그는 남다른 친화력과 뛰어난 조직력의 소유자였으며 일에 대한 추진력이 대단하였습니다. 즉 성경 보급과 판매를 위해 서울 중앙(새문안교회)에 도매서(都賣書, Colporteur; 宋淳明 장로)를 두고 지방 매서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점이며,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어려움에 봉착했던 한글성경 번역사업을 기필코 해 낸 일, 이 밖에 수십 개 선교단체의 책임을 맡아 그 소임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가 뛰어난 조직가로서 인화력과 일에 대한 남다른 추진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교단·교파간의 선교지 분할 성공시켜이 밖에도 선교사 언더우드가 한국교회에 남긴 정신적 유산으로 교회의 연합정신과 일치운동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189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선교 활동이 자유스러워지자, 구미 각국의 여러 교단과 교파 선교사들이 대거 한국을 찾았습니다. 따라서 한국이라는 하나의 선교의 장(場)을 놓고 교단과 교파 사이에 선교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여기에 이즈음 신구교(新舊敎) 간의 갈등과 반목이 한국에서 또한 재연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교회 안팎으로 어려움에 봉착했던 이 시기 교파간 선교경쟁이 갈등과 대립으로 비화되지 않고 오히려 상호 협조적인 호혜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언더우드의 연합정신과 인화력 및 지도력의 공헌이라 할 것입니다.그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던 교단, 교파간의 선교지 분할을 성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각기 다른 선교기관과 교회 사이의 연합운동을 가능케 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물론 이 같은 선교지 분할은 훗날 한국교회를 교파주의적 교회와 지방색에 의한 교권분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러한 조치를 함으로써 일찍이 몰려올 교파간의 분쟁을 사전 봉쇄했으며,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기독교 기관들이 연합과 일치운동의 전통을 마련하게 되었다 하겠습니다.에큐메니칼 정신의 실천자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문안 강단에 에큐메니칼(Ecumenical, 교회일치 운동) 정신의 고양과 실천을 위해 다른 교단과 교파 교역자들을 세웠던 일이며, 기독교 연합행사를 주로 새문안교회에 유치했던 것도 그의 이러한 목회철학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연합신문의 창간이며, 연합찬송가의 발간 그리고 많은 선교사들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면서 기독교 연합교육기관으로서 연희대학교를 세운 것도 바로 그의 연합정신의 적극적인 표현이자 실천이었던 것입니다.이 같은 언더우드 목사의 목회철학과 정신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가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남긴 정신적 선교적 유산은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새문안교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언더우드 선교사 서거 100주년을 추모하며 이상에서 언급한 언더우드가 이 땅에 남겨놓은 신앙적 유산과 역사적 정신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한국교회 특히 새문안 목회 강단과 교인들이 이어가야 할 사명이자, 마땅한 도리라 할 것입니다.돌이켜보면 언더우드가 ‘회중교회’ 전통의 경건한 신앙 가문에서 물려받은 ①‘경건신앙’, 청소년기에 네덜란드 계통 ‘개혁교회’에서 배운 ②‘개혁신앙’, 개혁신학의 전통을 이은 뉴브런즈윅 신학교에서 신학을 통해 배운 ③‘선교신앙’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삶에 세 기둥이 되었습니다.이 기둥 위에서 미지의 조선을 향해 선교의 결단을 내린 ‘개척정신’, 서로 하나가 되어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 명령을 따라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힘쓴 초교파적 ‘연합정신’, 규모 있게 조직적, 체계적으로 각종 선교사역을 열정적으로 추진하면서 조선의 근대화와 복음화를 위해 애쓰고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한 십자가의 ‘희생정신’은 예수 그리스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제자도의 핵심 요소라는 점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야말로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명령한 제자도를 온전히 실천하고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 걸어간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6-06-02
  • 학술/ 통합측 총회의 이단 연구보고서에 나타난 문제점
    본고는 지난 5월 9일 한국기독언론협회가 주최한 제16회 기독언론포럼 “한국교회 분쟁의 갈등과 치유”에서 발표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통합측 이단연구 보고서에 나타난 모순점1. “유아세례를 반대함으로 이단이다”라고 한다.통합측은 1983년 제68회 총회에서 “유아 세례를 성경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인하며, 구원의 확신이 생긴 후에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구원파의 권신찬 목사를 ‘이단’이라고 규정한 일이 있다. 그러나 교회사적으로는 유아 세례가 6세기 이전에는 기독교에 없었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그러나 문제는 통합측이 “유아 세례를 반대함으로 이단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극히 장로교적인 규정으로 대단히 위험한 결정이다. 전 세계 환원주의 교회들과 침례파 교회들은 유아 세례를 성경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한다. 성경에서는 명시적으로 “유아 세례”의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 세계 개신교 인구의 약 절반에 이르는 그들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자들이 모두 이단이란 말인가. 그렇게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학문적 배경을 가졌다 하더라도 ‘무지’라고 밖에 할 수 없다. 한국교회에도 침례교, 그리스도교, 오순절 등이 유아 세례를 반대한다. 만약에 “유아 세례를 반대함으로 이단이다”라고 규정하려면, 특정인에게만 그렇게 적용할 것이 아니라,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그들 교단들도 모두 이단으로 규정해야 할 것이다.2. “성령은 허수아비와 같다”고 했다며 이단이라고 한다.통합측은 1987년 제72회 총회에서 베뢰아운동의 김기동 목사는 ‘성령을 허수아비와 같이 본다’며 이단이라고 했다. 김 목사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 하나님이 보내신 영들은 천사들을 말하는 것이지 성령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거짓말이다.그러면 과연 김기동 목사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사건에서 성령이 임하신 것이 아니라, 천사가 임한 것이라고 말하는가? 아니다. 김 목사는 성령이 임히실 때, 성도들을 돕는 천사들이 수행한다는 것이지, 천사가 임한 것이 곧 성령이 임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통합측 이대위 보고서는 김기동 목사가 성령을 허수아비로 본다며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김목사는 그의 ‘성경에 나타난 세 영적 존재’ 32쪽에서 “성령은 모든 영들의 본영입니다. 모든 영들은 창조된 영이지만 성령은 조물주의 영이요 창조주의 영입니다. 천사들은 창조된 영이지만 성령은 창조되지 않은 영, 그 자체가 조물주입니다. 모든 영을 창조하신 영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김 목사의 그런 성령 이해가 ‘허수아비와 같은 것’이란 말인가?3. “하와가 뱀과 성관계를 하여 가인을 낳았다고 한다”며 이단이라고 한다.통합측은 1991년 제76회 총회에서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목사에 대해 “타락론의 측면에서 볼 때, 하와가 뱀과 성관계를 맺어 가인을 낳았다고 함으로 통일교와 같은 성적 모티브를 가졌음으로”이단이라고 했다.이에대해 박윤식 목사는 “어찌 파충류인 뱀과 인간이 성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상식이 있는 사람이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말이다. 만약 최삼경씨의 주장대로 내가 그런 말을 했다면 지금이라도 분명히 언제, 어디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출처를 밝히라”고 요구하며, 그 증거를 제시하는 자에게 1억원을 주겠다고 현상금까지 내걸었다.그런데도 총회 앞에서 그런 주장을 당당하게 한 사람도, 그런 주장을 그대로 믿고 그 보고서를 받아들여 박윤식 목사를 이단으로 정죄한 1500명의 통합측 총대 중에서도, 단 한 사람 그 증거를 제시하고 현상금을 타간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통합측뿐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박 목사가 그런 주장을 한 것처럼 알고 있다.4.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살과 피를 취하셨으나 “성령의 눙력으로 죄는 없으시다”고 하는 것이 통합측의 신앙고백이라고 한다.통합측은 2010년 제95회 총회에서 통합측 이단연구가 최삼경 목사에 대해 “예수님이 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셨음에도 어떻게 죄가 없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 장로교회의 전통은 성령의 능력이라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본 교단은 예수님이 사람의 피와 살을 취하여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인성을 가지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죄는 없으시며,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심음 고백한다.”고 했다.그리고 이어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살과 피를 취하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죄는 없으시다고 고백하는 우리 교단의 전통에서 볼 때 그의 사상이 본교단의 전통을 떠난 이단적이라고 볼 수 없다”라고 했다.그런데 이 표현은 심각하게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왜곡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살과 피를 취하셨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죄는 없으시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태초부터 죄가 없으신 분이지, 성령의 능력으로 죄가 없으신 분이 아니다. 더우기 통합측 신앙고백 어디에도 그런 고백은 없다. 이 보고서를 쓴 사람의 신학적 사상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통합측의 신앙고백서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의 역사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성육신 하신”(21세기 신앙고백서 160, 162쪽) 분으로 고백하고 있을 뿐이지, “성령의 능력으로 죄가 없으신 분”으로는 고백하지 않는다. 이 보고서는 통합측 신앙고백서를 심히 왜곡 변조한 것이다. 로마교회 교리에서 볼 때, 성령의 능력으로 죄가 없으신 분은 성모 마리아 뿐이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으로 곧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다(요 1;1-50). 어떻게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죄는 없으신 분이 되는가? 이는 심각한 이단설이다. 이런 이단설을 지난해(2015년) 고신대학교 교수회가 고신측 총회에 보고한 보고서에도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그러면 정말로 통합측이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죄는 없으시다”고 고백하고 있는가? 통합측이 채택한 신앙고백서사도신경“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제8장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제2항, “삼위 중에 둘째 위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참하나님인 동시에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에서 나왔으며 따라서 아버지와 동일하시다. 그는 때가 이르매 사람의 본체를(요 1:1-14, 요일 5:20, 빌 2:6, 갈 4:4) 입으셨다. 사람이 가지는 모든 근본적 요소와 거기서 나오는 일반적 결점을 가졌으나 죄만은 가지지 않으셨다(히 2:14, 16-17, 4:15). 그는 성령의 힘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그 여인의 몸에서 (눅 1:27, 31, 35, 갈 4:4) 탄생하셨다…”대한예수교장로회 12신조제7항, “하나님이 인류의 죄와 부패함과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고자 하셔서 무한하신 사랑으로 그의 영원하신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으니 그로만 하나님이 육신을 이루셨고 또 그로만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 영원한 아들이 참사람이 되어 그 후로 한 위에 특수한 두 성품이 있으니 영원토록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시다.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하셔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났으되, 오직 죄는 없는 분이시다…”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제3장 예수 그리스도, 제1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과(요 1:14) 그가 하나님이시요, 또한 사람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의 중보자가 되신 것을 믿는다(엡 2:13-16, 딤전 2:5). 그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시사 완전한 사람이 되어 인류 역사 안에서 생활하셨다(마 1:23) ...”21세기 신앙고백서제1장 제3항, 제2장 제3항,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말씀으로 영원히 거하시며, 성령님의 역사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성육신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위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성령의 힘으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음을 강조할 뿐 어디에도 “성령의 능력으로 죄가 없으신 분”이란 말은 없다. 결론으로한국교회는 통합측의 무분별한 이단 시비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크게 해치고, 분쟁과 갈등을 유발시켜 왔다. 대교단의 심각한 교권주의적 ‘갑질’을 일삼은 것이다. 그로인해 한국교회는 이단 아닌 이단이 너무 남발되었다. 교계언론이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 ‘이단을 옹호한다’며 쌍심지를 켜고 나서는 자들도 있다. 자기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 ‘이단 옹호’ 운운하는 것은 ‘편협성’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이 시대 이단 연구가들만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다. 그간 한국교회는 이런 편협한 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바람에 분쟁과 갈등에 휘말려 왔다. 이제 편협성에서 벗어나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돌아가 교회의 분쟁과 갈등을 치유하고 민족복음화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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