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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기고] 송덕 목사의 ‘목회성공과 교회부흥의 그 비결’ 18
    제2장 목회자의 자비생활 6.구제생활 실천요청 (1) 뜻으로 본 구제생활 목회생활에 구제생활 힘쓴 목회자, 분명히 목회성공과 교회부흥에 틀림없는 목회자 된다. 그 목회는 좋은 목회요, 물질 선용법을 아는 목회다. 또한 그는 꼭 있어야 할 소중한 목회자이다. 목회자 여러분! 구제생활에 앞장 서 보라. 복회성공과 교회부흥은 자동 케이스다. 또한 내가 베푼 그 사람, 나에게 구제받은 그 사람, 평생 나를 잊지 못하며, 또한 나의 사람이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니 나의 교인이 된다. 여러분 목회자들이여! 구제생활에 앞장 서 봤는가? 혹여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문전박대는 안했는가? 부디 권하노니 교회재정, 나의 생활비 중 구제사업에 많은 예산 세워 실천해보라. 목회가 첫째는 복음전파요, 둘째는 구제사업 목회되도록! 이런 목회자 성공 못한 사람없고 실패한 목회자 없더라. 그러면 구제(救濟)란 뭣인가? 궁핍하고 어려움 당한 자에게 동정과 자선과 자비로 관대하게 아낌없이, 값없이 베풀어주는 것이다. 여러분! 궁핍하고 어렵고 불쌍한 자들을 보고도 구제하지 않고 외면한 자들이 어찌 된줄 아는가? 신 15:9, "여호와께서 그가 호소하면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마 25:1-46, "내가 주릴 때에... 목마를 때에... 나그네 되었을 때에... 벗었을 때에... 병들었을 때에... 옥에 갇쳤을 때에, 모른체 하고, 돌보지 않은 자는 저주를 받을 자들...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지옥불에 들어가라"고 했지 않은가. 조심하라! 지금 조심해야 한다.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한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궁핍하고 불쌍한 자를 돌보지 아니함은 무엇 때문인가? 궁궐같은 내 집, 호의호식 연락생활, 고급승용차에 명예와 지위유지, 통장에 가둔 재물욕망, 마귀가 유혹한 욕망의 덫에 걸렸기에 남의 사정을 살펴볼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 자신의 생활이 가난하여 못함이야 어쩔 수 없지만, 호의호식 생활은 서민생활로 좀 낮추면 된다. 잘 들어라! 어려운 사람 구제는 성경이요, 하나님의 명령이요, 예수님의 엄명이다.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 21:13). 여러분! 1923년 미국 시카고 에지워터 비치호텔에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부호들, 세계적 재벌들 9명이 모여 세계경제를 논의한 회합을 잘 아실게다. 그들은 세계 강철회사 사장 챨스 슈압, 세계 최대 전기회사 사장 사무엘 인설, 세계 최대 가스회사 사장 하워드 합슨, 세계 최대 소맥회사 사장 아더 카튼, 뉴욕 증권회사 사장 리차드 휘트니, 월스트리트 주식거래 사장 제씨 리브모어, 특허공사(전매회사) 사장 이버 크레이커, 국제은행(산업은행)장 레온 후레이저, 정부 경제관료(내무부장관) 엘버트 휠 등인데, 그후 25년이 지난 1948년경 그 부호들이 어찌 된줄 아는가? 챨스 슈압은 빚더미에 눌려살다 죽고, 사무엘 인설은 법에 쫓겨 살다가 무일푼 객사, 하워드 합슨은 정신병자로 사망, 아더 카튼은 부채로 도망다니다 병사, 리차드 휘트니는 부정사건에 연류되어 뉴욕형무소에서 기억상실증을 앓다가 사망, 제씨 리브모어와 이버 브레이커와 레온 후레이저는 자살, 엘버트 휠은 부정사건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단다. 하나님의 섭리도, 불쌍한 자 구제도 아무것도 모르고, 오직 돈과 명예와 지위 그리고 호의호식, 부귀영화만 쫒다 25년 후를 생각지 못한 자들의 말로를 보라! 손에 가졌을 때, 높은 자리에 앉았을 대, 생명의 호흡이 있을 때, 불쌍한 자들 구제에 힘썼더라면 저들의 말로도 자자손손 천추에 이르도록 번영으로 서광이 빛났을 터인데! 모든 인생들은 들으라. 이는 저들의 인생사만 아니란걸! 들으라. 내일을 아는가? 1년 또는 5년 후를 누가 아는가? 몇년 후엔 이 땅위에 없을지도 모른다. 숨쉴 때 구제하고, 손에 쥘 때 구제하시라.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의 아버지가 되시게! "환상 중에 밝히보매...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 10:1-4). 우리교회 목회자, 한국교회 목회자, 그 기도와 구제도 상달 상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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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2
  • [특별기고] 장로회정치의 통치기준 시비 소고 (하)
    청원의 기준, 허락의 기준도 동일한 헌법의 규정 법을 떠난 재량권, 융통성 내세운 인간통치 옳은가? (승전) 그리하여 출석회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며, 세례교인(입교인) 과반수가 서명날인한 위임목사 청빙 청원서에 이력서, 당회록 사본, 공동의회록 사본을 첨부하여 노회에 제출한다. (통합: 정 제5장 제28조). 시찰위원회의 경유과정을 거쳐야 함은 물론이다(통합: 정 제11장 제79조). 다른 교단들의 경우도 기본적인 규정은 모두 동일하다. (합동: 정 제15장 제2조~제3조, 합동보수: 정 제15장 제1조~제2조, 개혁: 정 제5장 제6조 1~2, 합신: 정 제6장 제1조~제2조, 고신: 정 제5장 제36조, 기장: 정 제4장 제22조). 이제는 노회의 치리권에 의한 하회 청원에 대한 허락권 행사를 본다. 노회는 소원이나 상소에 의해 당회의 잘못을 바로잡는 상회이니, 상회원된 목사와 장로들이 하회(당회)의 청원에 대하여 허락하고 싶으면 허락하고, 말고 싶으면 말 수도 있겠는가? 사람들에게 맡겨진 인치(人治)인가? 법의 규정을 따라야 할 법치(法治)인가? 치리회의 구성요원이 되는 목사와 장로들의 임직서약에서 “본 장로회정치와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을 정당한 것으로 승낙하느뇨?” (합동: 정 제15장 제10조 ③, 동 제13장 제3조 3, 합동보수: 정 제15장 제9조 1의 ③, 동 제13장 제3조 3, 개혁: 정 제5장 제5조 1의 3), 동 제6장 제6조 2의 3, 합신: 정 제6장 제9조 1의 (3), 동 제11장 제3조 1의 (3), 고신: 헌규 제10장 제2조 1의 (3), 동 제4조 1의 3), 통합: 예식서 목사임직식 1.서약의 3, 동 장로, 집사, 권사임직식 1.서약의 3)라는 서약에서 완연(完然)히 들어난다고 할 것은 목사와 장로들이 임직된 후(목사만 가지는 교훈권 외에), 목사 일, 장로 일이 치리권을 행사하는 일이기에 치리권 행사의 기준인 “본 장로회정치와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을 정당하다”는 서약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할 것이니 말이다. 즉 하회의 청원권 행사에 법의 기준을 따라야 한 것처럼, 상회의 허락권 행사도 똑같이 법의 규정을 허락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위임목사 청빙에 대하여 상회인 노회가 허락하는 기준도 위에서 본 위임목사 청빙청원권 행사의 기준과 다를 수가 없는 것은, 헌법의 규정에 맞추어 청원하면 합법적인 청원이요, 합법적인 청원인 여부가 상회인 노회가 허락권 행사의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니 하는 말이다. 그런데 통합측 헌법은 2014. 12. 8. 공포 시행된 정 제5장 제28조에 6항(위임목사 또는 담임목사 청빙에 있어 아래 각 호에 해당하는 이는 위임목사 또는 담임목사로 청빙할 수 없다. 단, 자립대상교회에는 이를 적용하지 아니한다. ①해당교회에서 사임(사직) 또는 은퇴하는 위임(담임목사)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과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 ②해당교회 시무장로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과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 를 신설하고 있는데, 우선 용어부터 본다. 통합: 정 제27조 목사의 칭호에 의하면 위임목사, 임시목사, 부목사 등 10가지 칭호에 「담임목사」가 없는데, 신설된 제28조 6항에는 “위임목사 또는 담임목사 청빙에 있어…”라고 규정되었으니 웬 일인가? 교회정치 문답조례 70 문답에 의하면 “담임목사(Pastor)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하여 “지교회의 청빙으로 노회가 1개처 이상의 교회를 관리하도록 그 청빙교회에서 위임식을 행한 목사를 담임 목사라 한다”고 하였으니, 위임목사란 담임목사요, 담임목사란 위임목사를 가리킴인데 “위임목사 또는 담임목사 청빙에 있어서…”란 규정은 오착(誤錯)인 것 같다. 더욱이 동 ①에서는 “…은퇴하는 위임(담임)목사…”란 바른 규정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6항 단서에 “미자립대상 교회에는 이를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는데, 법으로 금해야 할 사항(죄?)이면 자립교회는 물론 미자립교회도 금해야 하고, 허용해야 할 정당한 사항이면 미자립교회는 물론 자립교회도 허락함이 옳지 아니할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통합: 권제 1장 제3조는 “교인과 직원 및 치리회가 다음 사항을 위반하였음을 범죄라 한다. 1. 신앙과 행위가 성경이나 헌법, 또는 본 헌법에 의거 제정된 제 규정을 위반한 행위 2. 예배 방해 행위 3. 이단 행위와 그에 동조한 행위 4. 기독교인으로 심히 부도덕한 행위 5. 치리회 석상에서 폭언, 폭행, 기물파괴 행위 등 6. 타인에게 범죄케 한 행위라고 하였으니, 재판사건이 성립되려고 하면 첫째로 위와 같은 범죄행위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동 제6조의 규정대로 그 범죄자를 피고로 고소, 고발하거나 기소하는 원고가 있어야 재판사건이 성립된다 하겠는데, 총회재판국에서 판결한 것을 보면 재판사건의 성립은 물론 노회재판국에서 판결했고, 이 판결에 대하여 원, 피고 중 한분의 상고가 있었으니 총회재판국에서 판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총회재판국은 국원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면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가 있겠는가? 사람 마음대로 하는 인간통치(人間統治)인가? 세상 법관들은 헌법 제 103조(법관의 독립)의 규정에 따라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심판의 기준을 명백히 함과 같이 교회 재판의 판결도 재판관된 국원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없고, 반드시 성경과 교회헌법과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국원들의 신앙양심이 판결의 기준이라고 하는 말이다. 결론컨대 장로회정치의 치리권은 개인 아닌 치리회에 있고, 치리회의 치리권 행사는 목사, 장로의 임직서약대로 성경과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이 그 기준이니, 상회도 하회도, 청원권에도 허락권에도 이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이 법의 규정에 의한 판단은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통치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동일하다고 믿게 될 때에 그 권위와 효능을 발하게 된다. 상회의 통치권 행사에서 법의 규정한 기준을 떠나 인간적인 재량과 융통성에 따르는 판단을 권위로 여기는 상황을 질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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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2
  • [독자기고] 송덕 목사의 ‘목회성공과 교회부흥의 그 비결’ 17
    제2장 목회자의 자비생활 5. 구명운동 앞장 요청 (2) 결과로 본 구명운동 여러분! 이제 구명운동의 그 결과를 들려주고자 하는데 큰 거울 되었으면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눅 6;9). 이는 손마른 병자를 고치는 사건이지만, 법망과 안식일 법망 때문에 구명운동을 사장할 수는 없다는 것 아닌가. 상기한 바 주님의 구명운동을 배우자. 여러분! 이승만 박사 독립운동 당시 구명운동을 아시는가? 일제가 당시 거액인 삼천만불의 현상금을 걸고 이 박사의 머리를 구했다. 그때 우리 민족은 이 박사를 관 속에 담아 들여왔고, 관 속에 뉘이어 대통령에 취임케 했으니 우리 민족의 구명운동은 세계에 자랑할 만 하지 않는가. 살얼음판 같은 세상에서 구명받은 이 박사는 90여 평생 독립운동과 나라건국에 일생을 바쳤다. 나라가 이만큼 선 것은 첫째, 하나님의 은덕이요, 둘째, 선진 위인들의 덕택이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 죄는 천추에 큰 과오다. 이로써 그 이루었던 그 공적이 다 불에 녹아 재가 되어버렸으니, 오호라 오호 통재! 불쌍하구나! 여러분! 영국 혁명시대 구명운동은? 찰스 1세가 처형될 때 왕국시인 따베난트도 형장에 함께 끌려나갔다. 이때 크럼웰의 비서 밀턴이 목숨 걸고 전력 다해 따베난트를 구해냈다. 그후 12년 만에 정국이 뒤집혀 역대 죄인 크럼웰의 시체를 파내어 불사르고 그 비서 밀턴도 사형장에 끌려나갔다. 그때 따베난트가 역시 목숨 걸고 전력 다해 밀턴을 구해냈으니 그래도 세계에서 영국 문명 위대성이 여기에 보이지 않는가? 여러분! 광해군 계해년 인조 반정 사건은 어떤가? 1623년 3월 13일 반정군이 자하문(창의문)으로 쳐들어와 무력으로 광해군을 퇴위시키고, 선조의 후궁 임빈 김씨 소생 원종의 아들 능양군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는데 이 사건을 '인조반정'이라 한다. 이로써 서인 정권 입각, 인조가 통치함에 광해군 계모 인목대비는 과거 원한 갚고자 수상(首相) 이원익에게 광해군 사형하라 추상같은 교지 내림에, 이원익 수상 왈, "나는 구군(舊君)을 죽일 수 없다"하고 사표를 내던지고 통곡하니, 혁명주체 서인 정권도 모두 다 감동되어 광해를 살려냈다. 이러하여 살아난 광해가 강화도를 거쳐 제주도로 떠날 때 서울 장안 백성이 다 울었다 하지 않는가. 광해군 구명은 수상 이원익이 사표 내던지고 통곡한데서 왔다. 예수의 구명운둥은 성경을 읽은 사람이면 다 안다. 요한복음 8:1- 이하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붙잡혀 예수의 판결을 구하러 왔을 때다. 저희들 왈, "이런 여자는 모세 율법에 돌로 치라 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예수는 이 여자가 모세 법망에 걸려 죄인으로 죽게 된 것도 알았지만 죽여라 하지 않고,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하시면서 두 번이나 땅에 글을 쓰시어 변호했다. 예수는 간음한 여인은 범죄자요, 모세의 법을 범한 자인줄 알면서도 죄를 묻는 것도, 법망으로 처단한 것도 다 덮고 구명할 때 저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씩 다 떠났다. 이로써 구사일생 이 여자는 용서받고 재생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예수는 왜 구명했느냐? 법대로 죽이지 않고! 예수는 죽이러 온 것이 목적이 아니요, 죄인을 살리려 오지 않았느냐. 범죄자들 눈에는 사람 생명 하나가 파리 목숨처럼 보이지만 예수의 정신에는 온 천하보다 더 귀한 것. 이 여자는 이 만큼 주의 구명은덕 입었으니 그 감격 눈물은 갈릴리 바다 해수요, 흐느낀 그 울음 소리는 갈릴리 파도 소리요, 평생 보답 그 성덕은 헤르몬 산을 덮었을 게다. 왜냐? 구명받고 보답없이 살아간 사람 인류 역사상 없지 않든가! 여러분! 구명, 구명운동은 예수의 운동 기독교의 운동 아닌가. 여러분은 구명운동에 앞장 서 봤는가? 구명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체 하지는 않았는가? 강단에 설 때 그들이 안 보이든가? 여러분은 하나님 종인가? 바리새인 종인가? 교회, 노회, 총회, 사회, 국가 구명운동에 앞장 서라. 나도 구명이 필요할지 누가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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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5
  • [독자기고] 송덕 목사의 ‘목회성공과 교회부흥의 그 비결’ 16
    제2장 목회자의 자비생활 5. 구명운동 앞장 요청 (1) 의미로 본 구명운동 목회자의 목회 중에 교회, 노회, 총회, 국가 등 여러 곳, 여러 사건에서 뜻하지 않는 인사들이 법망과 위기에 처해 구명의 손길이 요처되는 것을 종종 보아왓다. 이 때 나의 손길이 필요한 자면 적극 다방면의 구명, 구출, 살려야 함이 목회자의 도리인 줄 아노라! 하나님의 사람, 교회의 사람 국가의 사람, 이 사람들을 구명해 놓으면 차후에 귀한 보답, 귀한 소득을 분명히 얻게 될 것 아닌가? 구명도 목회성공 교회부흥에 매우 소중한데, 보고도 못본 체 강건너 불구경하 듯 지나가버린다면? 자주있는 사건도 아닐터인데, 차후에 몹시 얼마나 후회될까? ‘구명’이란 무엇인가? 한자는 생명구명, 영어는 ‘to save life’, 헬라어는 ‘프쉬케 소조’, 히브리어 ‘네페쉬 마라트’ 등으로 일컫는데, 이는 목숨(생명)을 구출한다, 보호한다, 위험에서 피하게 한다. 완전하게 만든다 등의 뜻이다. 위기에 처한 자들 구명운동에 그 후에 선덕이 얼마나 지대하든가? 다윗이 사울왕 추격의 위기 일발 때 미갈의 구명운동을 잊지 않는다. 미갈이 다윗에게 일러가로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그가 도망하며 피하니라”(삼상 19:11~12). 충신과 양처는 북풍한설 재난 중에 본다고! 미갈이 부왕 잘못 만난 죄로 기구하기도 했지만(부왕 때문에 발디, 아비갈, 아미노얌의 처가 되었기에) 그래도 남편 다윗 구명에는 착한 양처였다. 이때 미갈의 구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다윗은 있었을까? 없었을까? 보라! 구명운동 그 결과를? 요셉은 어떠한가? 요셉이 죽음에 처했을 때, 루우벤의 구명운동은 장하지 않든가? “루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루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자.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창 37:21~22). 루우벤은 서모 빌하를 범한 때는 천하에 불효자식이었다. 그래도 동생 요셉 구명운동엔 위인, 착한 형이 아닌가? 레20:11대로 루우벤을 죽여버렸더라면 요셉 구명운동은 누가하며, 루우벤 지파는 어디서 났겠는가? 요셉이 구명되니 애굽 총리도 되고, 기근 때 형들 모두를 다 구원하니, 이스라엘 12지파가 서지 않았던가? 여러분! 구명운동은 때가 가기 전에 하라! 지난 후엔 후회한다. 만사엔 때가 있다 하지 않던가 천하의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를 때가 있나니(전 3:1). 여러분! 영국 에드워드 7세 왕이 아들 요크 왕자와 식사자리 대화시간에 되어진 말? 아들 요크가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함에도 왕은 식사시간에 예절을 지키라고 화를 내며 꾸짖어 말문을 막아버렸다. 식사가 끝나자 왕은 아들에게 묻기를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애썼니? 왕자 왈 “이젠 늦었습니다. 늦었어요” “그것이 뭔데?” “할아버지 음식에 벌레가 들었는데, 할아버지 배 속에 있을거예요!” 여러분! 옛날 상고시대 꼬오트 족에 데오도림왕 이야기를 아실게다. 데오도림이 왕위에 올라 정치를 부정하게 함에 친구 몇 명이 시정 요구 간언을 한즉 듣기는커녕 괘씸하다고 밉게보여 감금하고 학대했다. 이걸 본 다른 친구가 구명운동을 벌인즉, 그 자까지 구속, 부하시켜 왕 자신 목전에서 목을 졸라 죽이게 했다. 그때 목졸라 죽는 이들은 소리치면서 죽을 일은 안했으니 살려 달라고! 그러나 무자비하게 죽이는데 저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려 이를 갈면서 숨을 거두었다. 그 후, 올라온 밥상을 보니 생선이 구워져 있는데 그 생선 아가리 이빨이 그 죽은 자들 이빨, 그 생선 두 눈은 죽은 자들 두 눈, 꼭 그처럼 보여 두려움이 감돌아 밥상 물리고 고민하다 삼일만에 죽었다. 세상을 온통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나봐! 그러기에 성경도 역사도 공부를 해야 해! 성경의 원인과 결과의 천리의 철학, 인간 행함의 결과인 역사의 철학을 못 배우면 그렇게 되는 법! 데오도림이 간언자들도 구명자들도 생명을 살렸다면 자신도 오래오래! 여러분! 구명운동의 요청이 여기에 있고 구명운동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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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5
  • [독자기고] 송덕 목사의 ‘목회성공과 교회부흥의 그 비결’ 15
    제2장 목회자의 자비생활 4. 자비생활 힘쓸 요청 (2) 예증으로 본 자비생활 자비목회를 예증으로서 그 결과를 거론한다. 왜 자비생활이 목회중심이 되어야 하는가? 주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절대 순종해야 하니까. 주님 가라사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 12:7).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5). 그런고로 목회자는 자비의 목회를 중심하지 아니하면 헛 목회 된다. 여러분! 하나님의 지음받은 똑같은 인생 소돔 고모라가 왜 망한 줄 아시는가? 망한 이유는 다양하지만 이스라엘의 미스라쉬 제1권에 의하면 그들의 무자비한 악법 때문이란다. 그 무자비한 악법이란? 첫째, 가난한 거지에게 돈은 주되 먹을 것은 주지 말 것, 나중에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으면 돈을 도로 가질 수 있기 때문. 둘째, 손님은 절대 대접하지 말 것. 셋째, 지나가는 나그네의 모든 것은 모두 다 빼앗을 것. 넷째, 부요한 사람의 재산도 방법을 가리지 말고 빼앗을 것. 이것이 소돔 고모라의 무자비한 악법이다. 하나님의 명령 자비의 법 어기고 무자비한 법 썼으니, 유황불로 역사에서 사라지게 한 것 아닌가? 여러분 자비성 없는 발언 자비성 없는 단체 모임, 하나님 큰 일 날 줄 알고 자비하심을 배우라. 여러분! 중국 위 나라 위문제가 누구인 줄 아는가? 삼국시대 중국의 위나라 조조가 둘째 아들 조비와 함께 사냥할 때 조조가 어미 사슴을 쏘아 잡으니 새끼 사슴이 갈 곳 잃고 애처로운 모습으로 아들 조비의 말 앞에 엎드렸다. 조조 왈 “새끼 사슴이 네 말 발 앞에 엎드렸으니, 칼로 찍어 잡으라”고 소리쳤다. 그때 아들 조비는 말에서 내려 활과 칼을 땅에 던지면서 “아버지 어미 사슴을 잡았는데 어미 잃은 불쌍한 새끼 사슴까지 잡아 죽이면 되겠습니까? 어미 잃은 이 새끼 불쌍하지 않습니까?” 하고 울었다. 조조도 그 말에 크게 감동되어 “참 네 마음이 착하다. 장차 좋은 임금이 되겠구나”. 칭찬하고 그 아들 조비에게 위나라 후계를 전하니 그가 위문제였단다. 여러분, 천도(天道)가 있는 법(法) 아닌가? 어미 잃은 새끼 사슴에 자비를 베푼 조비가 어떠한가? 부친은 감동받고 새끼 사슴은 살아나고, 조비는 왕관을 쓰지 않았는가? 자비생활에 하나님의 축복의 천도가 있음을 잊지 말고 행하라! 또한 다시 보라 옛날 신의주제일교회 안승선 장로님, 그 분의 미덕의 이야기이다. 모두 다 아실게다! 여러분은 아시는가? 안 장로님 시골생활 할 때 밭에 옥수수 따는 소리들려 들어가 본즉 한 여인이 열두 살 되는 아들과 함께 광주리에 자기 옥수수를 따 담고 있더란다. 그 때 이 여인은 도둑질 하다 잡혔으니 그 마음이 어땠을까? 아 이젠 죽었구나 했을 것 아닐까. 또 안 장로님은 어땠을까? 도둑을 잡았으니 잘됐다 했을 것 아닌가. 자,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깊이 한 번 생각해 보라. 안 장로님은 이러했단다. 책망과 꾸중도 않고, 경찰서에 끌고 가지도 않고, 광주리의 옥수수를 뺏지도 않고, 자비한 마음으로 오히려 옥수수를 가득히 따서 보냈더라 하지 않든가. 그런 후 신의주로 이주해 살 때 아들이 전기제품상사 ‘안국상회’를 운영하는데 그 당시 압록강을 막아 수력댐을 만든다는 큰 회사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모든 전기재료를 안국상회에서 구매함으로 크게 사업이 번창해졌다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구매책임자가 한국인인데 과거 자기 밭에서 어머니와 함께 옥수수 따가던 그 아이가 그렇게 성장했더란다. 아마 계속된 가난과 어려운 생활에도 안 장로님 옥수수밭! 안 장로님의 자비한 은덕 때문에 굶어죽지 않고, 그렇게 살아 성공, 안 장로님 댁에 보답했던 것 아닐까? 여기에 하나님은 축복을 가지고 등장하신다. 이걸 믿고 자비한 목회를! 그러나 무자비한 목회자를 들어보라. 옛날 평양에 이용도에 관련된 사건으로 평양노회가 신학생은 신학교에, 숭대생은 숭대에, 교인은 해당 교회에 처벌을 명함에, 서문밖교회 목사는 김지영 집사 모자를 무자비로 처단했는데, 그 후 그 목사의 말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목사는 강단에서 쫓겨났고, 그 목사의 자녀는 망했고, 삼천명 교인은 쪼개지고 말지 않더냐? 왜 조비와 안 장로님과 주 하나님의 자비심을 잃었든고? 죽으려면 무슨 짓은 못하는가? 아니다. 자비한 목회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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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5
  • [독자기고] 송덕 목사의 ‘목회성공과 교회부흥의 그 비결’ 14
    ‘제2장 목회자의 자비생활’ 4. 자비생활 힘쓸요청 (1) 의미로 본 자비생활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차제에 목회자의 생활에 자비의 생활을 기술하고자 한다. 이는 목회성공과 교회부흥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부분일게다. 목회자가 다른 면이 좀 부족해도 자비생활이 풍성하면 흠모받아 성공한다. 이것이 성경의 대언이다. 기억하라! 불쌍하고 어려운 자 데려다가 밥을 주고 옷을 주고 잠재워 주며, 노자까지 주는데, 그 목회자의 생활이 이러한데, 소문에 착한 목자로 자비한 참 목자로! 여기에 성공과 부흥이 있다.! 그러면 자비의 문자적 뜻은 한자로 사랑할 자(慈), 슬플 비(悲)자요, 영어로 ‘Mercy, pity, Kindness 등일 것이요, 헬라어로 ’엘레오스‘요, 히브리어로 ’카시프‘ 등을 들 수 있다. 종합적 뜻은 어려움과 슬픔 당한 자, 도움이 필요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며 긍휼히 여겨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것 그것이다. 인자, 예수는 이 자비로서 인간구원 천국복음 전해 하나님의 뜻 나타내려고 이 땅에 오셨다. 그의 생활 고난, 복음 십자가도 여기 이 속에 있지 않은가? 의사가 건강한 자에게가 아니고 병든 자에게, 예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이 뜻에 무슨 뜻인지 배우란 것 아닌가?(마 9: 12~14). 여러분! 배웠는가? 이 뜻을 진실로 배웠는가? 행함으로 사는가? 예수는 이 자비의 생활로 사셨는데, 목회자가 감히 주께서 다시 하신 말씀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 이 명령을 어기면?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이지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나오는 교훈이 있다. 하늘나라에 미하엘이란 천사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천사더러 지상에 내려가 내가 명하는 한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라 명을 받은 천사가 그 여인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그 여인이 자기를 데려가려고 온 천사인 줄 알고 미하엘 천사님! 저의 죽음을 조금만 더 연장을 소원 드립니다. 왜냐하면 제 남편은 몇일 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나는 몇일 전에 쌍둥이를 낳았는데 기진맥진 탈진상태여서 죽을지경이요, 또한 우리는 아무 친척도 없습니다. 만일 저를 데려가신다면 이 피투성이 아이들은 누가 키워주겠습니까? 생명연장 소원에 그 천사는 측은히 여기고 또 측은히 여겨 하나님께 올라가 사정 이야기를 다 했더니 하나님은 매우 노하시면서 왜 데려오라면 데려오지 네가 명을 어기는가? 당장 그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라. 그래서 그 천사는 다시 땅에 내려가 그 여인의 영혼을 데려왔으나 하나님은 명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이유로 그 천사의 금빛 두 날개를 벗겨서 날개없이 지상으로 추방시켜 버렸다는 내용이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 완고한 것은 사술의 우상과 같다(삼상 15:22~23). 자! 보라! 하나님의 명령은 어떤 경우든 어길 수 없지 않는가? 천사라도, 왕이라도, 하물며 목회자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 주님은 자신만 자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자비를 원하신다고! 오늘날 현대교회의 병폐는 도덕적인 문제실격엔 심한 매룰 가하면서도, 왜 자비심없는 자에게는 말 한마디 없는가? 다른 면 좀 부족해도 자비심만 풍성하여 살면 다 덮어 넘어가는데! 이 사람이 일등 목회자된다! 이제부터 자비생활에 투자하라! 교회재정도, 호주머니도, 밥상도, 옷장도, 신발장도, 침실도! 귀한 것도, 고운 것도, 통장도, 목회일생도! 자비 목회로 한둘하라! 계속! 계속! 또한 계속! 다시 들으라! “하나님은 자비한 자에게 주의 자비 하심을 나타내신다” 하지 않는가? 아! 하나님은 자비한 자의 목회생활에 등장 하시니 얼마나 기쁠고! 여러분! 이런 체험 해보셨는가? 하나님이 동행해주신 목회? 다시 언급하는데 “하나님은 자비한 자에게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신다”(삼하 22:26), 여러분! 여러분은 자비한 자의 목회인가? 무자비한 자의 목회인가? 어느 목회자, 먼 길을 가다가 여비는 떨어져가고, 갈 곳은 없고, 배는 고파 안다는 목회자님 찾아갔더니, 밤 9시 넘어서는 전화도 친구집도 찾아가면 안되는 것이라고, 훈계 반, 꾸중 반 미안해 어쩔 줄 몰라 생각하다 급한 핑계로 인사하고 기차역 대합실에 잠을 청하는 밤 12시경, 이름 모를 신사 한 분이 호주머니 깊숙이 봉투 주면서 쉬쉬하며 쓰리꾼들 조심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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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5
  • [특별기고] 박병진 목사의 ‘장로회정치의 통치기준 시비 소고(상)’
    당회조직은 수(數)단위 아닌 반(班)단위 조직 당회의 성수, 당회장과 장로 과반수 규정이 실증 회장의 표결권, 회원의 동의, 재청권도 서로 못 바꿔 근간 어느 대형교회 목사가 정년은퇴 하면서 그의 아들이 후임목사가 되니, 세습(世襲)을 반대하는 이들의 반발에 부닥쳐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 또는 노회 안에서만 분규 가 격화되는 것 같더니, 마침내 총회재판국에서 오랜 진통 끝에 세습무효 판결이 내려 9월 총회에서 “총회재판국 판결이 중대한 잘못이 있을 때, 당사자의 신청으로 총회에서 재석 3분의 2 이상의 가결이 있을 때에는 특별재판국에 회부하여 다시 재판하게 한다” (통합: 권 제5장 재77조)고 하였으니, 총회재판국의 세습무효 판결이 그대로 채택될 수도 있고, 특별재판국에서 다시 재판할 수도 있는 벼랑 끝에 이르렀다고 일반 TV 방송에서까지 보도하고 있다. ◈ 당회조직의 단위는 수(數) 아닌 반(班) 교회를 다스리는 정치형태는 교황장치와 감독정치, 자유정치와 조합정치, 그리고 장로회정치로 대별(大別)하는데, 교황정치와 감독정치는 성직자의 전제정치이니 평신도의 기본교권은 아예 없거나 제구실을 할 수가 없게 되고, 자유정치와 조합정치는 평신도 가 교회를 다스리게 되니, 성직자의 치리교권은 아주 없거나, 있다고 해도 제구실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 장로회정치는 “…교회치리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고 당회, 노회, 대회, 총회 등 치리회에 있다” (합동: 정 제8장 1조, 합동보수: 정 제8장 제1조, 합신: 정 제14장 전문(前文), 기장: 정 제8장 제41조, 개혁: 정 제12장 제1조)고 하였고, 치리회(당회, 노회, 대회, 총회)의 구성요원은 “교회 각 치리회에 등급은 있으나 각 회원은 목사와 장 로 뿐이므로 각회가 다 노회적 성질이 있으며, 같은 자격으로 조직한 것이므로 같은 권리가 있으나, 그 치리의 범위는 교회헌법에 규정하였다 (합동: 정 제8장 제2조, 합동보수: 정 제8장 제2조, 개혁: 정 제12장 제3조 1, 합신: 정 제14장 제1조)고 치리회 안에서 목사와 장로의 동등함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목사와 장로의 치리회 안에서의 동등규정이 빠진 교단들도 민주적인 회의는 회원평등의 원칙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어서 규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치리권이 치리회에 있으니 치리권을 행사하려고 하면 치리회가 회집하여 결의하게 되는데, 교회마다 당회장인 목사는 오직 한분인데, 장로는 한분도 없는 미조직교회도 있는가 하면 여럿인 경우가 더 많으니, 장로회정치는 소수는 다수에게 복종하는 민주적인 정치이니, 이런 교회에서는 당회에서 장로들이 똘똘 뭉쳐 있으면 항상 1(당회장 목사)대 다수(장로들)이니, 결국 장로들이 하자는 대로 목사는 네! 네! 하면서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되겠는데, 이것이 과연 장로회정치인가? 헌법의 규정을 보면 일찍이 1922년 판 헌법시대 이래로 “…장로는 2가 유(有)하니, 1.강도함과 치리함을 겸한 자를 목사라 예칭(例稱)하고, 2.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 칭하나니, 이는 회원의 대표자니라. 이 두 직분은 성찬 참여하는 남자라야 피택되느니라(1922년 판 정 제3장 제2조)고 ”…2가 유하니“가 1930년 판에 이르러서는 ”…장로는 두 반(班)이 있으니“ (1930년 판 정 제3장 제2조)로 구체화되었고, 두반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교단은 합동측(정 제3장 제2조), 합동보수측(정 제3장 제2조)이요, 통합측(정 제4장 제22조)과 개혁측(정 제4장 제3조 2)은 ”두 가지로“, 그리고 합신측과 고신측은 아무런 규정도 없어 보인다. 이 규정은 기본치리회인 당회조직은 수단위(數單位) 조직이 아니고 반단위(班單位) 조직임을 가리키는 규정인 것은 당회의 성수규정에서 완연해진다. 즉 “당회에 장로 2인이 있으면 장로 1인과 당회장의 출석으로 성수가 되고, 장로 3인 이상이 있으면 장로 과반수와 당회장이 출석하여야 성수가 된다…” (합동: 정 제9장 제2조, 합신: 정 제6장 제2조, 개혁: 정 제5장 제6조 2, 합동보수: 정 제9장 제2조) 당회장인 목사는 하나이니, 하나 이상도 하나 이하도 아니고 하나 출석으로 전부출석이요, 장로도 하나일 경우 목사의 경우와 역시 동일하며, 둘일 경우 물건 아닌 사람을 과반수라고 하나 반쪽을 만들 수 없어 역시 하나일 수밖에 없으나, 3인 이상일 경우에는 장로 과반수가 회집해야 전체가 회집한 것으로 간주하고 성수를 이루게 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두 가지”로 규정했던 기장측과 통합측은 “당회는 당회장을 포함한 회원 과반수의 출석으로 개회성수가 된다” (기장 정 제9장 제46조), “당회의 성수는 당회장을 포함한 당회원 과반수의 출석으로 한다. 단, 대리당회장은 성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통합 정 제10장 제65조)고 규정하고 있다. ◈ 당회장의 표결권과 장로의 동의 재청권 두 반의 조직 즉 목사반과 장로반의 조직은 당회장(목사)반과 당회원(장로)반의 조직이다. 노회장은 노회에서 회원들이 선거하며, 대회장은 대회에서 회원들이 선거하며, 총회장은 총회에서 회원들이 선거한다. 그러나 당회장은 당회에서 당회원들이 선거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청빙 청원에 따라 노회위임국에서 위임식을 통해 선포된 위임목사들의 당연직이요, 또는 임시목사인 경우 노회에서 임명한다. 그리고 당회장은 항상 당 회장이요, 더 높아지거나 낮아지기도 하는 그런 직분이 아니다. 그리고 회원인 장로들도 역시 동일하다. 승진 하여 장로 상(上)이 될 수도 없고 장로 하(下)가 될 수 없단 말이다. 당회에서 회의를 행함에 있어서도 당회장은 개회 폐회를 주관하며, 회무를 질서 있게 진행되도록 선도하며, 난숙한 토론을 거쳐 표결하는 등 당회장이 당회에서 해야 할 일이 정해진 것 같이, 당회원인 장로들이 당회에서 해야 할 일도 역시 정해져 있으니, 언권을 얻어 토론에 참가할 뿐 아니라, “모든 회원은 재청자와 함께 동의할 자유가 있으며, 토론하기 전에 또한 이를 취하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토론이 시작된 후에는 본회의의 허락 없이는 취하할 수 없다.” (장로회 각치리회 보통회의 규칙) 회장이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 하고 회원이 할 일을 하지 못하며, 회원(장로)이 회장(당회장 목사)이 할 일 즉 “가 하면 예!라고 하세요. 부하면 아니라고 하세요” 하지 못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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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8
  • 목회성공과 교회부흥의 그 비결
    제2장 목회자의 자비생활3. 미움금지 중심요청(2)결과로 본 중심요청 인류 역사상 대부분은 서로 미워서 죽이고 죽는 역사이다. 이조 제6대 왕(1452~58) 단종을 보라! 그는 문종의 아들로 1855년 숙부 수양대군에 왕위를 찬탈 당하고 58년 영월에 추방된 후, 동년 12월 24일 살해되었다. 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로 단종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미움의 발로는 살인의 열매를 맺는 법!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의 “한, 맺힌 이야기는 모를 사람 없을게다” 현덕왕후 입에 피를 물고 수양대군 꿈에 나타나 네 놈이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 그 후 그 아들이 죽고 세조 수양대군도 50여세 제위 10여년에 제명 못 다 살고 갔으니 미움은 죽이고 죽는 법인가? 이제 미움의 역사를 알 듯 하도다 미움이란 무엇인가? 한자에 미워할 憎(증)과 미워할 惡(오)로 ‘증오’함이요, 싫어할 嫌(혐)과 미워할 惡(오)로 ‘혐오’로 몹시 싫어하고 몹시 미워함이요, 영어로 ’hate’이다. 예수께서 증거하심(마 5:21~22)과 성경의 (요1 3:15) 미움의 거론은 매우 심각하고, 또 증오와 혐오 때문에 살인의 결과를 낳는 자는 마귀 아닌가?(요 8:44) 가인 이후로 증오하고 혐오하여 죽이고 죽임받는 것이 못된 놈 마귀의 놀아남에 그랬던 것이다.(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제외하고) 만일 목회자가 증오와 혐오심을 품고 강단에 서면 그 설교가 어떠할까? 그 날 휘두른 칼날에 수많은 교인들의 영혼은 관 속에 묻혀 나갔다. 마귀의 유혹인 증오와 혐오심을 회개로 청산하고 강단에 서라(마5:23~26), 그래야 하나님의 종이요 그렇지 않으면 마귀의 종 된다. 역사 이래 증오와 혐오자들의 그 말로를 알지 않는가? 로마에는 4걸이 있는데 증오와 혐오로 서로 죽이고 죽이는 자들이 4걸이란다. 폼페이는 시저에게 죽고, 시저는 풀타스에게 죽고, 풀타스는 안토니가 죽이고, 안토니는 옥타비아누스가 죽였단다. 증오와 혐오가 유명한 자들이 로마의 4걸, 사람 잘 죽인 자들이 영웅, 그 뿐인가? 나폴레옹, 히틀러, 무솔리니, 동조대신, 네로는 어떠한가? 또 산헤립, 가인, 하만, 사울왕은? 헤롯 안티바스, 광해군 인목 대비는? 증오와 혐의로 죽인 자들, 사람 죽인 자들의 그 결과는 ‘행복인가? 비극인가? 어떤 자는 중병에 어떤 자는 임직 10년에 어떤 자는 죄책과 암병에 어떤 자는 자살로 어떤자는 전사에, 단두대에 어떤 자는 천벌에 갔다. 이것이 증오와 혐오로 얻은 소득이었다. 미움, 곧 증오와 혐오의 소득을 여러분은 듣고 보았다. 미움 그것이 별 것 아닌 줄 알았지만 아니다. 증오와 혐오가 마음자리 잡는 날에는 그 상대는 밤 사이에 사라지고 만다. 이것이 미움 세계 역사다.여러분! 이 증오와 혐오의 독성이란 상대를 죽이는 것이기에 미움 금지를 중심으로 간절히 요청한 것 아니냐? 우양사업 전문가의 증언을 외국에서 들어보셨을까? 전문가 왈 “소가 화내고 성질 부릴 때 젖을 짜지 않는다 하지 않는가? 왜 그때 젖을 짜서 먹으면 젖 속에 독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하물며 수많은 영혼들을 먹이는 목회자야 증오와 혐오, 소위 미움이란 실로 심각한 문제다. 여러분은 계시록 박사님일게다. 7대 범죄자들은 새 예루살렘성에 못 들어간다고, 또한 8대 범죄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한다고! 보라 미움의 발로에서 살인이 발생한 것 아닌가? 좋아하고 사랑해서 죽이겠는가? 미워하기에 살인했지? 그렇다면 다시 또 보라 주 예수 가라사대 “형제에게 노하는 자, 나가라 하는 자,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마다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고”(마 5:21~22) 또한 성경의 증언 왈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1 3:15). 미움으로 살인하고 살인해서 영생이 없다면? 그건 모든 것 헛되고 또 헛되며 구원이고 천국이고 볼장 다 본 것 아닌가? 현대 뉴스에 물통에 죽이고, 구타해 죽이고, 밥 굶겨 죽이고, 가방에 죽이는 등등 증오와 혐오가 꽃피워 살인이란 열매를 맺은 것 아닌가? 이들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영생이 없을까? 있을까? 신자라 해도 여러분 교인들이여! 목회자들이여!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미워하면 살인하고 살인하면 영생은 없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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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4
  • [박병진 목사] 간음 중에 잡힌 여인과 주님의 처결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하신 주님의 처결돌로 쳐야한다는 바리새인들과 한패 되었는가?오래 전에 강도사고시 「교회정치」 과목에서 이런 객관식 문제를 출제한 일이 있었다. ‘교회의 각 치리회 회의는 공개가 원칙이다. 다만 당회는 비공개가 원칙이다.’ 그랬더니 대다수의 수험생들이 X가 정답인데도 O표를 하고 있어 한국교회의 현실만 알고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의사공개의 원칙」은 사회자 공평의 원칙, 회원 평등의 원칙, 발언자유의 원칙과 함께 회의의 공정운영 확보를 위한 원칙 중 하나이다. 그리고 철칙(鐵則)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으나 원칙은 어디까지나 원칙이요 철칙이 아니니 예외가 있을 수 있게 된다. 장로회 각 치리회 보통회의 규칙 에 의하면 “어느 치리회든지 사건이 공개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질 때에는 비밀회로 회집할 특권이 있다.”고 하였고, 권 제4장 「각항 재판에 관한 보통규례」에 의하면 ‘치리회는 회원 3분의 1 이상의 결의로 비밀재판회를 열 수 있다’ (합동: 권 제4장 제32조, 고신: 권 제 장 제27조, 통합: 권 제 장 제44조, 합동보수: 권 제4장 제32조, 개혁: 권 제 장 제27조, 합신: 권 제 장 제32조)고 하는 규정이 이에 속한다.비단 회의나 재판과정만이 아니다. 예배모범 제16장 「시벌」규정에 의하면 판결 후에 언도하는 일에 대해서도 일률적으로 공개시벌이 아니고 비밀히 책벌할 경우도 있다고 하였으니, 즉 “교회의 책벌은 그 범과의 성질에 의하여 합당하게 베풀지니, 개인 자신에 관한 죄 같으면 혹 재판석에서 비밀히 책벌하든지, 혹 본 치리회 회원 2, 3인을 파송하여 대표로 시벌한다. 뚜렷이 범한 죄 같으면 본치리회 공개석에서 책벌하거나, 흔히 교회에 공포한다. 들어난 죄라도 이상한 형편이나 특별한 이유가 있어 그 성질이 과히 중하지 아니한 때는 비밀히 권계하든지 혹 유기 책벌한다…”(예 16:1)고 규정한다. 공개가 원칙이면서도 예외규정을 두어 비공개의 경우를 허용하게 된 것은 공개로 말미암는 파국과 파탄(破綻)현상을 방지하기 위함이다.어느 목회자가 세상 사람들의 표현대로 꽃뱀(이라는 어느 간교한 여인)에게 물렸는지, 남의 가정을 파괴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일 때문에 그 목사의 소속노회에서 재판에 계류(繫留) 중에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 문제의 사건이 널리 알려졌는지, 그가 시무했던 교회는 물론, 교계의 어느 단체에서까지 왜 어서 속히 준엄한 판단을 내리지 아니하고 주저주저하느냐는 요지의 성명서가 적지 않을 광고비를 들여 신문지상에 대서특필 하는 중에, 그 교단의 기관지에까지 버젓이 광고되고 있다. 그리고 성명서를 읽고 나면 필자도 나도 모르게 그 성명서를 낸 분들과 한패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할뿐 아니라, 과거 오랫동안 교회재판에 관계했던 경험에 비추어 문제의 사건은 그렇게 복잡한 사건 같지도 아니한데, 왜 해를 넘기고서도 결말이 나지 아니하고, 또 해를 넘기고 넘기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어찌되었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명의와 그 직권으로 판단할” 책임이 노회재판국에 있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는 엄숙하고 지엄한 일을 노회재판국이 짊어졌는데, 따라서 매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닌데 매거나, 푸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닌데 풀었을 경우 이에 따르는 판단을 받아야 할 자도 역시 노회재판국인데, 풍설만 알고, 여론만 알고, 사건의 당사자도 아니면서 이미 일어나 피고된 그 목회자를 재기할래야 재기할 수 없을만치 짓밟고 또 짓밟아 버렸으니 이것을 옳다고 해야 하겠는가?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하겠나이까?” 하고 주님을 시험할 때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였더니,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다 떠났고,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았을 때에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다는 교훈을 본다. 사건 처결의 최선의 방도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이다. 즉 권 제5장 제35조나 제6장 제41조에 규정한 권계, 견책, 정직, 면직, 수찬정지, 제명출교의 목적이 동 제1장 제2조에 의하면 “진리를 보호하며, 그리스도의 권병(權柄) (즉 온 인류의 생사화복을 임의로 주장하시며 섭리하는 주님의 지위)과 존영(尊榮)을 견고하게 하며, 악행을 제거하고, 교회를 정결케 하며, 덕을 세우고, 범죄한 자의 신령적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설명의 편의상 셋으로 구분한다면 첫째의 목적은 “진리를 보호하며 그리스도의 권병과 존영을 견고케” 하는 것이고, 둘째의 목적은 “악행을 제거하고 교회를 정결케 하며 덕을 세우고…”이고, 셋째의 목적은 “범죄한 자의 신령적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둘째의 목적은 끝끝내 돌이킬 줄 모르는 죄인을 잘라버리라는 것이 되고, 셋째의 목적은 돌이킬 수 있는 죄인에게 돌이켜 회개하고 살게 하려는, 즉 매를 들어서라도 회개케 하여 다시 바로 살게 하려는 목적으로 볼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책벌하는 일은 모조리 그냥 잘라버리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범죄한 자로 돌이켜 회개하게 하고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으로는 여기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주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고 하셨고, 마 9:12~13에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醫員)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으며 거듭 말하거니와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모세는 율법에 돌로 치라고 하였다며 주님을 시험 할 때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니, 그 바리새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 씩 하나 씩 다 물러간 후에 주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1) 하셨는데, 너는 기어이 돌을 들어 치는 자와 한패가 되었겠는가? 아니면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하신 주님의 처결에 아멘으로 응종하는 자가 되겠는가? 바리새인들도 다 물러갔는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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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4
  • “합당한 예배 드리지 못하는 교회는 존재 이유 상실”
    이 글은 김남식 박사(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가 11월 30일 백주년기념관에서 행한 한국기독언론협회 제18회 기독언론포럼에서 기조강연으로 발제할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긴급성' 가운데 '예배의 회복' 원고를 발췌해 실은 원고이다. -편집자 주 예배의 회복 한국교회는 지난 아홉 달 넘게 제대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였다. 이 일로 코로나19 방역에는 크게 기여했지만, 교회는 안팎으로 큰 타격을 받아 고통과 침체 가운데로 빠져들고 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예배를 생명으로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의 의식도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예장통합 총회가 5월 말에 교단 소속 담임목사 1,135명을 대상으로 한 포스터 코로나19 설문조사에서 설문 당시 교회의 가장 어려운 점을 39%가 ‘교인들의 주일성수 인식과 소속감이 약해졌다’를 꼽고, 재정 문제(20.8%), 다음 세대 교육(15.3%) 등을 꼽았다. 그리고 코로나19의 긍정적인 면은 44.2%가 현장예배의 소중함을 경험하게 됐다고 하였다.지난 6월 말에 리얼미터에 교역자와 교인 2,56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에서는 코로나 사태 이후 한국교회의 가장 큰 숙제는 ‘예배에 모이는 교인 수의 감소와 주일성수 약화’를 37.7%가 꼽았고, 예배의 중요성 하락과 신앙 기본 의식 해이, 교회 재정자립 위험 등을 꼽았다. 통계가 없어서 그렇지 코로나 방역 2.5단계 아래 실시했으면 결과는 훨씬 더 부정적일 것이다. 참으로 기막힐 일이 한국교회에 일어나고 있다. 모이는 예배, 온라인 예배로 교회끼리 성도끼리 갈등하고 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코로나 사태 이후의 우리 교회의 미래가 특히 예배 생활이 어둡다.1. 예배의 간절한 회복 그동안 우리는 한국교회의 자랑은 성도들의 헌신과 열심,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부흥으로 인한 교인 수와 교회 수 증가, 아름답고 웅장한 예배당과 교육하고 훈련할 수 있는 시설들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코로나19 방역이라는 이유로 그 많은 성도가 모여 예배하던 자랑스러운 크고 아름다운 예배당과 교육관들은 텅 비어 있고, 교회의 모임과 예배당이 사회적으로 비방 거리가 되고 혐오 대상이 되어 버렸다.하나님께서 살아 계심과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믿는다. 특별히 자기 교회를 다스리고 계심을 확신한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세상을 향해 교회를 세우시고 부흥케 하신 하나님은 자랑하지 않고, 교인 수를 자랑하고,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과 시설을 자랑하고, 복음의 본질에 집중하지 않고, 겉모양에 열심을 내었던 결과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못했음을 책망하시어 교회당에서 쫓겨난 것은 아닌가? 강제적으로 모이지 못하도록 함은 예배를 향한 간절한 마음을 회복시키시기 위함이 아닐까?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두 번이나 하나님이 떠난 성전에 모인 자들을 책망하며 쫓아내신 이유도 건물과 숫자가 아니라 참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셨기 때문이다. 2. 교회의 본질인 예배회복 교회는 하나님이 세상의 소망으로 이 땅에 세우셨고, 그 소망은 합당한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회가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교회의 존재 이유가 상실된다. 교회는 예배공동체다. 예배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교회마다 같이 모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지만, 교회는 모여야 하고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교회의 용어가 아닌 정부가 만들어준 ‘비대면예배’라는 것은 특수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본질이요, 생명인 합당한 예배 회복을 위하여 진력해야 할 것이다.이제는 속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자랑은 교인 수가 아니요, 건물과 프로그램이 아니라,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인 것이다. 합당한 예배는 아벨의 예배이다. 즉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이다. 코로나 사태를 이겨내고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합당한 예배 회복이다. 합당한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과 복음이 아닌 것을 자랑거리로 삼았음을 회개함으로 시작된다. 코로나 사태의 기간이 바로 회개의 은혜를 누릴 시간이다. 버리지 않으면 회복될 수 없다.예배에 목숨을 걸고 예배드리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예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다. 3. 바른 예배의 회복 개체교회의 공적예배를 관장하는 권세는 개체교회의 당회가 가지고 있다. ‘장로들의 회’는 말씀과 교리, 성례와 치리를 관장할 사명을 짊어진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 창설 직원인 사도들에게 위임한 것이며, 이제는 교회 항존 직원인 장로들에게 위임되어 있다(마 28:18-20; 막 16:15; 행 20:28-3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0장). 세상 정부와 공직자는 공적예배 개최와 폐쇄를 주도하고 명령할 그 어떤 권세도 가지고 있지 않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3). 당회는 이를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동시에 세상 정부와 공직자를 공경할 것도 가르쳐야 한다. 특히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분파주의, 검증되지 않은 뉴스나 루머 전달 등을 엄금해야 한다.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서 함께 모이는 것이 공적예배임을 가르쳐야 한다. 피치 못한 사정으로 인해 영상으로, 각 가정별로 경건회를 할 수밖에 없는 교회가 부지기수이다. 예배당에서 공적예배로 모이면서, 영상을 함께 송출하는 교회도 많다. 그러나 당회는 영상 경건회, 가정 경건회, 개인 경건의 시간을 공적예배와 같은 수준으로 격상시키거나 대체 수단인 것처럼 가르쳐서는 안 된다. 이는 공적예배로 모이기 힘든 상황에서의 피치 못한 차선책일 뿐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온 교회가 결핍을 깨닫고 애통해야 한다. 그럴 때, 공적예배 시행과 참석이 값없는 은혜이며, 얼마나 고귀한 가치가 있는지 알고 사모하게 된다.한국교회 약화의 가장 큰 원인은 핍박이 아니라 목사의 설교이다. 목사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아니라(겔 33:32) 구원과 심판의 나팔을 부는 파수꾼이다(겔 33:1-7). 책망과 교정의 설교(딤후 3:15-16)는 영혼을 구원하지만, 협박하는 설교는 상처를 준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보다 윤리적으로 더 타락했다고 손가락질한다. 이 때문에 목사들은 윤리적인 설교에 대한 압박감이 심하다. 그러나 윤리적인 설교가 난무할 때, 교회는 언제나 윤리적으로 타락해 왔다. 목사는 도덕?윤리 대신 성도들이 세상에서 도무지 들을 수 없는 것,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윤리성을 회복한다. 심방은 목사의 아내와 여전도사가 아니라 장로들의 사명이다(약 5:14-20).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알아야 돌봄과 치리가 가능하다. 지금이야말로 장로들의 심방을 회복할 절호의 기회이다. 걱정 대신 심방해야 한다. 직접 방문이 힘들면, 전화로라도 부지런히 성도들을 돌봐야 한다. 영상 경건회에 참여했다고 신앙이 유지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집사들의 사역과 활동이 두드러져야 정상이다. 교회 안에 재정적으로 어려운 이가 얼마나 많이 발생하고 있는가? 세상 사람들은 사재기를 통해 자신을 보호하지만, 집사들은 나눔과 베품을 통해 교회를 보호한다.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 장로의 심방, 집사의 위로를 통해 COVID-19 가운데서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참 교회의 보존과 성장을 세상 권력의 이동이 아니라 직분자들의 봉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결론 개혁교회 예배는 그 낱말이 뜻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경배하며, 그를 섬기는 봉사의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예배는 앞서 예배의 개념적인 이해에서 밝혔던 것처럼, 예배를 섬김과 봉사의 의미로 이해할 때,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섬김(봉사)을 전제로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인류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일을 전제로 하여 한 말이다. 이것은 역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계시에 근거해서 한 말이기도 하다. 어쨌든 예배는 봉사의 의미를 전제하여 이제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봉사는 곧 공적인 예배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인의 전 삶의 봉사로서 신앙적인 삶을 뜻한다(롬 12:1). 그 때문에 예배신학자 프리드리히 칼브(F. Kalb)는 기독교의 예배를 가리켜서 신앙적인 삶의 총체적 표현이라고 했다. 그것은 신앙적인 삶의 근원이 바로 예배에 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기독교의 예배와 그리스도인의 삶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말해 준 것이다.그렇지만 예배의 근본적인 출발은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 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주권적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에게 놓여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계시에 근거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행위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계시 의존적 관계에 있으며, 그 중심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예배신학자 아담(Adam)의 정의에서도 확인된다. “기독교의 예배와 예전은 먼저 인간 편의 노력에 의한 그 무엇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의 계속적인 선포와 작용으로써 인간을 섬겨 주시는 하나님의 봉사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배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취 행위에 대한 응답과 감사로써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적인 행위가 수반된다. 이것은 예배의 주도권이 어디까지나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며,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는 역시 인간의 참여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섬김의 열정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한 섬김은 예배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으로 귀결된다. 그 만남은 역시 대화의 과정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그 대화의 과정은 하나님의 구원계시에 대한 인간 응답으로써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교회의 봉사로 전개되는 영적인 대화의 사건인 것이다. 역시 신약신학자인 로마이어(E. Lohmeyer)도 예배를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의 관계로 설명하였다. “인간의 모든 예전적인 행위는 다만 하나님이 행하신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반응이다.”그리고 현대 신학자들도 예배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이러한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는데, 바르트는 신적인 행위로써 교회의 예배와 인간적인 행위로써 교회의 예배를 강조하였고, 동시에 예배를 하나님이 먼저 주도하신 구원의 계시적인 사건에 따라 행해지는 인간의 반응과의 양면적인 관계의 활동이라 하였다. 실천신학자 브루너(P. Brunner)도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일로서의 예배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교회의 봉사로써 예배를 말하였다. 신약신학자 한(W. Hahn)도 예배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섬김과 예배 가운데서 인간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하였다. 바이차(V. Vajta) 역시 일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일로서의 예배와 믿음의 일로서의 예배로 설명한다. 스위스의 개혁주의 예배신학자 폰 알멘(J.J. von Allmen)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하나님은 기독교 예배의 주체이면서 대상이시고 그는 섬기면서 경배의 대상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예배를 요구하시면서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말씀하시면서 말씀을 들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탄원하며, 우리의 간청을 들으시는 분이시다”라고 하여 예배의 성격을 새롭게 제시하였다. 그리스 정교회의 신학자 니시오티스(N. A. Nissiotis)도 예배란 먼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임재행위로 정의하였다. 즉, 예배는 인간의 주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그 바탕이라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개혁교회예배의 중심으로서 감사의 제물(그리스도의 십자가)은 인간의 대답과 인정에 비하여 절대적인 하나님의 우선권과 행위를 암시하고 있다고 말한다.이로써 예배의 중심에는 예수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화목의 복음이 선포됨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섬기며, 예배에 참여한 회중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의 드림은 자신을 드리는 헌신으로 표현된다. 그 때문에 바르트는 개혁교회의 예배야말로 이 땅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급하고, 가장 영광스런 일이라고 역설하였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바른 예배의 실종과 함께 성도의 수가 줄어든 현실에 직면했다. 여기에 대한 바른 대응이 절실히 요청된다.2019년 한 해 주요 장로 교단들의 목사 수는 2018년 대비 증가했으나, 성도 수는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이하 예장) 합동 통합 고신 합신과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가 올해 총회 보고한 교세 통계를 살펴보면, 5개 교단 모두 목사 수가 소폭 증가했으나 예장고신을 제외하고는 총 교인 수가 하락했다(예장고신은 세례교인 수로 집계). 교회 수는 예장합동 외 4개 교단이 증가했다.예장합동은 목사 수가 2만4395명에서 2만4855명으로 460명 증가했다. 교회 수는 1만1885개에서 1만1758개로 소폭 하락했으며, 총 교인 수는 265만6766명에서 255만6182명으로 무려 10만 명이 감소했다. 예장통합은 목사와 교회가 모두 늘었다. 목사는 2만506명에서 2만775명으로 269명 증가했고, 교회는 9190개에서 9288개로 98개 많아졌다. 총 교인 수는 250만6985명으로 전년 대비 4만7242명 줄었다.예장고신은 목사 수가 7명, 교회 수가 19개 증가해 각각 3876명과 2110개다. 세례교인 수도 늘어 889명이 늘어나 27만8441명을 기록했다. 예장합신은 목사 수가 72명 증가한 2485명, 교회 수는 11개 증가한 972개며 총 교인 수는 13만8968명으로 전년에 비해 4753명 줄어들었다. 기장의 경우 1년간 목사 28명, 교회 2개가 증가하면서 각각 3221명과 1636개였다. 총 교인 수는 1만 2877명 감소한 21만9086명으로 보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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