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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0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0. 종교개혁의 대부 루터의 출현 후스를 중심으로 보헤미아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종교개혁의 여파는 독일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지난 회에서 언급했던 프라하에서 있었던 두 가지 그림 사건, 예수와 교황의 모습을 대비한 그림 때문에 발생한 프라하 대학의 대소동 때문에 독일에서 유학 온 수백 명의 학생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후스에게 성경을 배운 그들은 독일의 각처에서 가톨릭의 가르침과는 대조가 되는 참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니까, 루터가 나타나기 오래 전에 이미 독일에도 종교개혁의 싹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후일에 루터는 후스의 저서를 읽고, 이미 오래 전에 보헤미아의 한 개혁자가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하여 주장한 사실을 발견하였다고 술회한바 있다. 루터의 출현과 개혁의 출발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483년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의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산업에 종하고 있었고, 성격이 강직할 뿐만 아니라 정직하고 결단력이 있는 소신 있는 사람이었다. 루터는 아버지의 그러한 성향을 물려받아서 늘 원칙에 충실하며 진지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진실하면서도 강직하고 학문에 익숙한 특출한 인물이었다. 루터는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서 법학공부를 하고 있었으나 자신은 신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집에서 대학으로 가던 길에서 바로 옆에서 떨어진 벼락 때문에 큰 공포심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신부가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루터는 신부로서 다른 어떤 사람들 보다 성경을 깊이 있게 열심히 연구하였으며, “기도를 잘 하는 것은 공부의 반 이상을 한 것이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영성이 충만하고 경건한 수도승이었다. 그가 성경을 깊이 연구할수록 현재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가톨릭교에서 가르치는 교리나 예배나 제도상에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많은 모순점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정식 신부로 임명된 후에는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성경에 충실한 그의 강의(시편, 복음서, 편지서 등)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의 설교는 진리를 아주 명료하고 힘 있게 증거하였으므로 청중들에게 확신을 주었고 그의 열정적인 설교는 늘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교회에 대한 루터의 대실망과 면죄부 사건루터가 꿈에 그리던 거룩한 도성이자 가톨릭교의 본산지인 로마를 여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루터는 그 여행과 로마 방문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과 가치관에 큰 혼란이 일어났고 교회에 대하여 대실망을 경험하게 되었다. 수도사들의 부요함과 사치와 화려함에 놀랐고, 그들의 생활 속에 만연해 있는 죄악상에 전율하였다. 심지어는 주교의 입에서 나오는 야비한 농담과 불경스러운 언행, 그들의 방탕함과 주색에 빠져있는 생활상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루터는 로마에서 감행되고 있는 온갖 죄악의 참상과 파렴치한 행동들을 목격한 다음, 로마가 지옥 위에 건설된 성(城) 같다고 술회하였다. 당시에 교황의 법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빌라도의 계단’이 있었는데, 누구든지 무릎으로 그 계단을 끝까지 올라가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였다. 어느 날 루터가 경건한 마음으로 그 빌라도의 계단을 오르다가 갑자기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 2:4; 롬 1:17)는 말씀이 우레처럼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두렵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급히 일어나서 나온 다음, 고행으로 받는 구원을 가르치는 로마교회를 더 신뢰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특히 그는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면죄부 판매를 대대적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견딜 수 없는 울분을 경험하면서 가톨릭교와 멀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그가 충성을 다하던 교회와 단절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면죄부 사건은 루터의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독일에서 면죄부 판매책임을 맡은 테첼이라는 수도사가 비텐베르그 성에 도착하여 온갖 미신적인 언사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면죄부를 팔았다. 면죄부를 사면 현재의 죄는 물론이고 미래의 지을 죄도 용서받을 수 있고 심지어는 죽은 자들의 죄까지고 용서받을 수 있다고 외치면서 면죄부 판매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목격한 루터는 죄 용서는 면죄부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면죄부를 사지 말고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라고 목청을 높여 외쳤다. 마침내 루터는 면죄부의 부당성과 비성경적인 사실을 입증하는 95개의 논제를 정리하여 비텐베르그 성 교회의 출입문에 붙여 놓았다. 이 때에 루터의 나이는 34세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교황청은 노발대발하였으나 이 95개항의 면죄부 반박문은 급속히 독일을 넘어서 스위스, 프랑스, 네델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종교개혁의 불이 지펴진 것이다. 교황청과 수도사들은 루터에 대하여 참람된 자라고 비난하면서 교만하고 건방진 행위를 하고 있다고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드디어 선과 악 사이에 역사적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치열한 싸움터에서 루터에게는 동역자가 필요하였다. 이 때에 나타난 인물이 바로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로 함께 일하던 멜란히톤이었다. 그는 겸손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판단력과 지식과 웅변술은 출중하였다. 순결하고 고상한 인품을 가진 그는 사람들의 칭송과 존경을 받던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루터의 과감하고 용감한 성격과 조화를 이루어 종교개혁의 큰 역사를 이루는 일에 위대한 공헌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보헤미야의 개혁자 후스에게 제롬을 보내주셨고 루터에게는 멜란히톤을 보내주셨다. 중세 종교암흑시대를 깨뜨리는 종교개혁의 역사에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고 계셨던 것이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식구리라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전개되는 싸움은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자와 ‘다르게’ 믿는 자 사이의 투쟁이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고, 이스마엘과 이삭이 집안에서 싸웠다. 에서와 야곱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있었고, 유대 민족들이 선지자를 핍박하였다. ‘말씀’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바른 진리를 선포하셨을 때에 유대의 지도자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공격하였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기독교가 성경을 파묻어놓고 지극히 인위적인 종교로 둔갑을 시켜 성경과는 무관한 미신적인 로마교회가 세상을 지배하였을 때, 성경의 진리를 들고 나온 빛의 자녀들을 어두움의 자식들이 극렬하게 박해하며 살해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매우 슬프고 모순된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루터와 같은 진리의 투사들이 나타나서 참 빛을 드러내며 증거 할 때, 타락하고 배도한 교회의 오류에 대하여 공감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함께 나서는 용감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교권의 힘으로 개인과 도시를 파문시키면서 핍박을 하게 되면 함께 일하던 동역자들까지도 자취를 감추게 되어, 개혁자들은 사실 외로운 투쟁을 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 개신교회는 어떠한가? 개혁할 과제들이 없어서 잠잠한 것인가? 아니면, 개혁의 소리를 낼만한 루터와 같은 능력과 열정을 갖춘 인물들이 없는 것인가? 혹시 그렇게 정의롭고 용감한 개혁자들이 나타나서 엘리야나 세례 요한과 같은 개혁의 소리를 외칠 때에, 어떤 희생과 손실을 무릅쓰고라도 함께 연합하고 힘을 모아서 동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교권의 힘이나 여론이 두려워서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0-14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9-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19. 경건한 개혁자 후스와 동역자 제롬 서기 9세기 경 보헤미아(현재의 체코 서부와 중부)에 개혁적 복음이 들어갔다. 그리고 보헤미야에서는 비교적 선교가 순조롭고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자국어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권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보헤미아에도 어두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 7세는 보헤미아어로 예배드리는 것을 금지시키는 교서를 내렸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신다. 이 법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악과 이단이 생기게 되었다.”(-Wyile, b. 3, ch.1)는 것이 교서의 골자이다. 이 내용은 당시 교황권의 권세와 횡포를 대변하는 단면이기도 하다. 종교의 탈을 쓰고 정치적 권력으로 인간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가톨릭교의 전횡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상식적, 비과학적, 비인간적이었다. 이러한 시대가 거의 일천년 이상 계속되었으니 종교적 타락과 도덕적 부패와 이에 따른 그 폐해(弊害)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후스의 출현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거주하던 왈덴스인들과 알비젠스인들이 종교적 박해를 견디다 못해 좀 더 자유로운 곳을 찾아서 보헤미아로 이주하여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개혁적 가르침과 분위기가 이미 보헤미아에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비행과 백성들의 타락상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규탄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수도사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주장과 활동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그들을 격렬하게 핍박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숲속과 산속으로 피신하여 예배를 드렸다. 군사들은 그곳에까지 추격하여 살육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1372(?)년, 남 보헤미아의 후시네쯔라는 시골 마을에 얀 후스(John Huss)라는 인물이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경건한 신앙을 가진 어머니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은 없지만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고자 좀 더 큰 도시(프라하)로 이주하여 프라하대학에 입학시켰다. 후스는 학업에 있어서 탁월한 면모를 보였을 뿐 아니라, 그의 생활이 깨끗하고 성품은 온유하면서도 쾌활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고 좋아하였다. 또 한편으로 그는 로마교를 열렬히 신봉하는 교회에 충성된 사람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부가 된 후스는 그의 뛰어난 실력과 고매한 인품 때문에 신속히 승진하여, 왕실 전속 승정이 되었고, 모교의 교수를 거쳐서 그 대학의 총장까지 되었다. 동시에 그는 성직을 시작한 지 수년 후에 베들레헴 회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어 정기적으로 말씀을 전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개혁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후스의 개혁사업후스에게 개혁의 불을 붙였던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영국에서 어떤 학식 있는 설교자이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 두 사람이 프라하에 왔다. 그들은 교황을 정면으로 대적하였기 때문에, 당국으로부터 발언을 금지당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황의 비리와 부패를 지적하는 두 장의 그림을 그려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무언의 설교를 시작하였다. 하나는, 겸손한 모습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있는 예수님을 초라한 복장을 한 제자들이 따라가고 있는 그림이고, 또 한 그림은 교황이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에 삼층 면류관을 쓰고 요란스럽게 장식한 말을 타고, 앞에는 나팔수들이 뒤에는 역시 사치스러운 복장을 한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따라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보는 모든 사람들은 그 의미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달았고, 그 그림의 영향력은 프라하의 주민들에게 신속히 퍼져나가서 그야말로 프라하에 대소동이 일어났다. 후스도 이 그림에 큰 감동과 깊은 영향을 받았다. 후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민한 식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비록 교회에 충성하는 신부이기는 하였으나, 가톨릭교의 비성서적인 교리나 가르침과 의식들에게 대하여는 공감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정직한 양심을 가졌던 후스는 교회의 그러한 비리들과 오류들, 그리고 부패한 타락상들을 지적하여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는 로마 가톨릭교에 저항하고 교황을 대적하는 개혁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후스는 가톨릭교의 이교적인 의식들과 미신적인 교리들과 성직자와 신도들의 부패와 타락상에 대하여 과감하게 개혁을 주장하였다. 교마교 지도자들의 오만하고 부패한 생활에 비하여 후스의 삶은 매우 순결하고 경건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후스의 편에 가담하였고 그의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후스의 동역자 제롬과 두 사람의 최후후스의 이러한 개혁사업이 진행되는 중에 영국에 체류하면서 위클리프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제롬이 보헤미아로 와서 후스와 합류하게 되었다. 제롬은 매우 대중적인 인물이었고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언변과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의 역동적인 사역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교의 오류와 비리를 깨닫게 되었고 참된 진리의 빛을 받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개혁자들을 통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진리의 빛을 드러내 주셨고 그들을 개혁의 길로 인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교황의 권세과 교권이 이들의 활동을 방치할 리가 없었다. 후스는 당시 교황 요한 23세가 이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소집한 콘스탄스 회의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후스는 그 회의석상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확고부동한 입장을 주장하였으며, 그곳에 참석한 교회의 지도자들과 정부의 고관들 앞에서 교권의 부패를 거침없이 규탄하였다. 마침내, 후스는 자신이 주장하는 성서적 교리를 취소하든지 화형을 당하든지 선택해야 할 마지막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는 주저 없이 순교자의 길을 선택하였다. 화형대의 불을 지피기 직전 다시 한 번 후스는 자신의 오류를 취소하면 살려주겠다는 권고를 받았다. 후스는 “무슨 오류를 취소하라고 하는가?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저술한 것과 전파한 것은 모두 사람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거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저술하고 전파한 진리를 나의 피로써 확인하기를 매우 기뻐한다.”고 외치면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후스의 뒤를 이어 개혁 사업을 하던 제롬도 역시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약 1년을 감옥에서 지나는 동안 제롬은 몸이 쇠약해지고 마음도 함께 약해져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 후, 제롬은 후스의 뒤를 이어 순교하기로 작정을 하고, 주교들에게 지난 번에 했던 말을 취소한 다음 그들의 비행과 만행을 지적하면서, “나는 다만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내 생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불의한 선고를 하지 않도록 너희들에게 권고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보다 너희들을 위한 것”이라고 외쳤다. 화형장으로 끌려 간 제롬은 사형집행자가 자기 뒤에서 불을 붙이려고 하자 “꺼릴 것 없이 앞으로 나와서 나의 눈앞에서 불을 붙여라. 내가 두려워했다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면서 화형장의 잿가루로 사라졌다. 많은 개혁자들이 이와 같은 모습으로 순교를 당하였으나 그들이 전파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보여준 그들의 영광스러운 광채는 소멸될 수 없었다. 악한 자들이 그들의 목숨은 빼앗아 갔으나 그들이 밝혀놓은 진리의 빛은 꺼지지 않은 채 후세대로 이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0-11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8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 18. 탁월한 지성적 개혁자 존 위클리프로마 가톨릭교의 배도와 타락, 그리고 교권에 의한 탄압으로 종교적 암흑이 지배하던 시대에 일반인들이 성경을 자유롭게 보기는 거의 불가능 하였다. 그러나 모든 시대마다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성경의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신변의 온갖 위협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감추어지고 가려진 진리의 보화를 찾고자 갈망하였다. 그들은 하늘에서 보냄을 받은 사자(使者)와 같은 사명감을 가지고 발견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증거하면서 오류와 미신의 사슬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참된 자유를 얻으라고 호소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바로 14세기에 혜성같이 등장한 영국의 존 위클리프이다. 개혁자로서 위클리프의 능력과 정의감위클리프는 이미 대학 시절부터 비범한 재능과 학식을 겸비한 열성 있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다양한 방면의 학문을 섭렵하면서 철학, 교회법, 국가법 등에 정통하였고, 사변철학에 능하여 후일에 조직적으로 논리적으로 오류에 대항하여 논박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인물로 성장하였다. 또한 위클리프는 대학에 있는 동안 그의 전공 과목과는 별개로 성경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 당시 로마 가톨릭교에서 가르치는 많은 교리들이 성경과 위배될 뿐만 아니라 너무나 크게 빗나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의 스콜라 철학이나 교회의 가르침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있던 위클리프는 성경 연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값없는 은혜로 주시는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였다.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가톨릭교의 그릇된 많은 가르침에 대하여 매우 실망하였고, 계속적인 성경 연구를 통해서 발견한 진리들을 자신의 인생을 바쳐서 전파하기로 결심하였다. 개혁의 포문을 열다위클리프는 처음에 이러한 개혁 사업을 시작하였을 때, 가톨릭교를 떠날 마음도 없었고 고의적으로 교회에 반기를 들고자 하는 동기도 없었다. 단지 현재 교회의 가르침들 중에서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오류들을 지적하고 바로 잡아서 신도들이 성경의 진리에 입각한 바른 신앙을 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교회의 지도자들은 좀처럼 기존의 그릇된 오류들을 시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성경적으로 올바른 교리를 주장하고 가르치는 개혁자들을 무시하고 핍박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투쟁은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행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죄인들이 사는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고정된 법칙인지도 모른다. 위클리프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유전을 받아들이며 성경의 진리를 저버린 신부들을 담대하게 질책하면서 백성들에게 성경을 돌려주고 교회 안에서 성경의 권위를 다시 확립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의 영향력은 신속히 증대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의 성실하고 깨끗한 생활, 어떤 불의에도 굴복하지 않고 정의를 구현하는 그의 담대한 용기가 그의 사역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그 동안 로마 가톨릭교의 비리와 모순을 보면서도 용기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위클리프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일어났다. 그는 당시에 영국의 왕이 교황에게 바치는 조공에 대하여 부당함을 지적하고 철폐할 것을 주장하여 교황의 최상권에 큰 타격을 주었다. 또 그 당시 악폐와 악습으로 유행하던, 탁발승들이 구걸하면서 무위도식하는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국민들의 재정에 손실을 초래하고, 젊은 청년들이 노동을 경시하게 만들고 부도덕하고 게으른 삶을 조장하는 그 부조리한 제도의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교황이 승려들에게 부여한, 죄를 용서하는 권세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었다. 이 제도 때문에 승려들은 우매한 신도들의 죄를 용서해주는 대가로 선물과 금품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로 그들은 치부(致富)하면서 호의호식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부조리한 제도에 대하여 위클리프는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악의 뿌리를 공격하였다. 위클리프의 가장 위대한 업적-성경 번역위클리프의 이러한 개혁의 행보는 마침내 교황의 분노를 일으켰고 그는 교황이 제거하고자 하는 표적이 되었다. 교황은 이단의 주동자인 위클리프를 침묵시키기 위하여 즉각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내리도록 영국에 교서를 전달하였다. 이러한 조치 때문에 사실상 위클리프는 화형을 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있었다. 그를 죽이려 했던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갑자기 죽었다. 그 후 교권의 어지러운 틈을 타서 위클리프의 개혁 사업은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개혁을 넘어서 신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한 격한 활동의 결과로 위클리프는 신속히 노쇠하였고 중병으로 눕게 되었다. 사제들은 매우 기뻐하며 큰 용기를 가지고 위클리프를 찾아가서 죽기 전에 그 동안의 모든 죄과를 뉘우치고 자신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촉구하였다. 위클리프는 즉시 침상에서 일어나 정색을 하면서 그들을 향하여 또렷하고 큰 음성으로 경고하였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탁발승들의 악행을 공개할 것이다.” 갑작스럽게 예기치 않은 질책을 받은 사제들은 망신을 당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후 위클리프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일반인들이 볼 수 없었던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위클리프는 “성경이야말로 ‘국민에 국민의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후일에 링컨이 이 말을 인용하였다. 여러 가지 시련과 난관이 있었지만 마침내 영어 성경을 완성하여 국민들의 손에 들려주었다. 이제 교황과 가톨릭교는 위클리프 보다 더 두렵고 더 큰 힘을 발휘할, 결코 제거할 수 없는 개혁자를 만나게 되었다. 위클리프야말로 교황권과의 전투에서 위대하고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이다. 위클리프의 만년(晩年)과 그의 승리그 후 위클리프는 그를 제거하려는 교권에 의해서 몇 차례 법정에 소환되었으나, 그는 어떤 자리에서든지 생명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가르치는 성경의 진리를 담대하게 주장하였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의 오류를 강력하게 반박하며 공격하였다. 그는 참으로 해박한 지식과 명석한 사고력을 가지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진리를 옹호하고 주장한 위대한 개혁자였다. 위클리프는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보호하시며 그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에, 그는 원수의 손에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고 루터워드 교구의 자기 교회에서 성찬식을 집례하려던 중 중풍으로 쓰러져 얼마 후 사망하였다. 결국 가톨릭교의 거대한 권세가 한 사람의 개혁자 위클리프를 제거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위클리프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죽이려고 했던 원수들의 증오심은 4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나타났다. 콘스탄스 공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그의 유골을 다시 파헤쳐서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 그 재를 근처의 시냇물에 던져버렸다. 그 재는 시냇물을 따라 강으로 흘러들어 영국 해협을 지나 대양으로 스며들었다. 그와 같은 모습으로, 위클리프의 영향력은 영국을 넘어 보헤미야의 얀 후스(John Huss)를 감동시켰고, 보헤미야에서 또 다른 나라로 확장되어 나갔다. 위클리프가 번역해 놓은 영어 성경은 성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잊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게 하였고, 그러한 분위기는 장차 나타나게 될 위대한 종교개혁의 전주곡이 되었던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9-22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7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17. 진리를 지킨 왈덴스 사람들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곡해하고 그릇되게 해석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과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멸망당하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활동해 왔다. 이러한 사탄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이교(異敎)의 풍습들과 로마의 정치와 기독교 교리가 혼합된 상태로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등장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출현은 매우 고무적이고 성공적인 기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 세대가 지나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래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단지 교권의 힘에 의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매우 피동적으로 변질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역사 이래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의 말씀을 변형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존하며 지켜온 소수의 무리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로 무장한 신실한 종들은 그 진리를 수호하는 일을 위하여 어떠한 고난이나 희생도 감수하였으며, 심지어는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도 진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때로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며 지켰다. 진리의 수호자들이와 같이 진리를 지켜 내려온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시대적 이단자들이다. 교권을 지배하고 있는 다수의 세력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고 그들의 성품은 중상모략을 당하고 그들의 주장을 기록해 놓은 저서들은 몰수를 당하고 이단으로 낙인이 찍힌 채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노아가 그러했고,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그러했고, 예수님도 그 시대의 이단자였고, 사도들이 그러했다. 사도들에 의해서 전수된 복음의 진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이단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고, 변질된 교리가 많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어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단의 세력은 더욱 강대해졌고, 정통 진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감소되어 급기야는 소수로 남아있는 정통이 이단이 되고 세력이 커진 이단이 정통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반복되어온 기독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정통성을 가진 진리가 보존되기 힘든 이유가 몇 가지 있다.첫째는, 인간의 본성이 죄악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통 교리를 따르기 보다는 인간의 성향에 맞추어 보다 편리하고 쉽게 믿을 수 있도록 변질된 교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정통에서 벗어나서 인간적이고 인위적인 교리와 가르침에 물들어 익숙해진 사람들은 거짓을 말하고 술수를 사용하여 사람을 기만하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신조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하여는 무력과 폭력을 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세월이 오래 지나고 나면 자연적으로 비정통 교리를 따르는 무리들의 수는 증가하고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 충실한 사람들의 수는 감소하기 때문에 다수가 소수를 압도하게 되고 정통 교리와 진리를 추구하고 수호하는 사람들은 일반 사회로부터 배척을 당하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의 교권이 확장되고 세계의 역사가 종교암흑시대로 접어들면서 진리를 가진 소수의 무리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숨어 있었다. 부자 상인 왈도의 신앙과 그의 활동가톨릭 교권의 영향력이 강성해지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무렵, 12세기 초에 프랑스 리옹 출신의 왈도라는 사람이 이끄는 개혁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왈도는 상업을 하여 부자로 살던 사람인데, 기독교 진리를 배운 후에는 그 진리를 지키고 보존하고 전파하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투신하였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도움을 많이 베풀었고, 그의 순수한 자선적인 삶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많이 일어났다. 특별히 왈도의 주변에는 그 동안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정통 진리를 수호하고 보존해 왔던 후예들이 많이 있었고, 왈도의 재력과 지도력의 결과로 그들의 활동은 큰 활력을 얻게 되었다. 왈도를 따르는 무리들은 가톨릭의 배도에 과감하게 저항하여 그 교회가 가르치며 주장하는 연옥설, 미사, 마리아 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 비성경적인 가르침들을 배격하고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표준임을 주장하였다. 역사를 그들을 ‘왈도파’ 혹은 ‘왈덴스인’이라고 부른다. ■ 왈덴스인들이 남긴 교훈왈도가 태어나기 전부터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던 사람들이 왈도와 연결되었고, 그 후 또 다른 개혁파들이 왈도의 무리들과 연합하여 개혁 사업을 이루어 갔다. 후에는 이들을 모두 ‘왈덴스인’이라고 부른 것 같다. 어쨌든 이 왈덴스인들의 순수한 신앙과 그들의 열정은 후일에 일어난 종교개혁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들의 활동을 통해서 오늘 현대의 세속화된 기독교 개혁을 위하여 필요한 몇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그들은 성경의 진리를 중시할 뿐만 아니라 말씀의 교훈을 따라 살았다. - 왈덴스인들은 성경의 진리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하여 일반인들이 볼 수 있는 프랑스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할 정도로 말씀 보존에 충실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며 평화롭게 살고자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평화주의자들이었다. (2) 그들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삶의 고통과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였다. - 그들은 진리를 주장하면서 진리를 따라 살기가 불가능해진 현실 사회를 떠나 궁벽한 산속에서 삶의 온갖 고통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라도 성경의 진리를 보존하는 일에 그들의 인생을 바쳤다. (3) 그들은 진리를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자녀의 신앙 교육에 철저하였다. - 왈덴스인들은 그 소중한 성경의 진리를 후 세대에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자녀들을 세속 교육에 위탁하지 않고 목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자신들의 가정에서 철저하게 성경 중심의 교육을 하였다. 그들의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환난을 견디고, 부모나 지도자들의 통제에 순종하고, 성경 말씀에 입각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4) 그들은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하였다. - “왈도파는 성경과 신앙 서적으로 사람들을 회심시켰다. 그들은 행상인으로 시골집이나 귀족의 성을 방문해서는 직물이나 보석을 팔려고 내놓았다. 그리고 다른 것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했다. ‘예, 아주 진귀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보석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불붙이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이들 행상인들은 보배로운 두루마리 성경을 꺼내어 놓았다.”<아미티즈(Armitage), “침례교도 역사” I. p. 301>.(5) 그들은 배도하고 타락한 교권에 저항하여 오류를 지적하면서 개혁을 주도하였다. - 그들은 용감하였다. 죄를 죄라고 지적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성경에서 벗어난 잘못된 가르침을 지나쳐 버리지 못하는 바른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타락한 권세나 그들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 하나님이 사자들이었다. [결론] 가톨릭의 무력과 폭력으로 수많은 왈덴스인들과 개혁 신앙인들이 순교를 당하였지만, 그들이 흘린 피 때문에 진리는 여전히 살아 있고, 성경의 능력이 아직도 역사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피 흘리고 목숨을 바쳐서 보존해 온 진리를 너무나 쉬운 거래를 통하여 세상과 타협하고, 신앙의 표준을 현실에 맞추어 평가절하시켜 조절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면, 통절히 회개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우리는, 이제 다시 제 2의 종교개혁, 신앙개혁을 위하여 깃발을 들고 일어서야 할 때가 되었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9-11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6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 16. 진리의 등불이 꺼진 암흑세상천지를 개벽시킨 예수와 그 제자들의 엄청난 위력의 효과는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사탄의 집요한 방해와 전략도, 세상의 어떤 공격이나 핍박도, 폭발적으로 번져나가는 성령의 능력을 막을 길이 없었다. 제자들의 능력 있는 설교를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여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께로 나아왔다. 하루에 수 천 명씩 세례(침례)를 받아(행 2:41)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강력한 능력을 가진 천국 복음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지나 로마 전역으로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로마 유수한 귀족들이나 권세 있는 자들도 복음을 받아들였다.서기 60년대에 등장한 사악한 황제 네로가 마침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고, 그 박해의 불길은 네로 이후 약 10대의 걸친 황제들을 통해서 매우 조직적으로 잔인한 방법으로 감행되어 이제 막 태어난 기독교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더욱 단합된 힘으로 로마에 저항하였고 그리스도인의 수는 오히려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단편적으로 입증해 주는 다음과 같은 세계사의 기록이 있다. “이 일신교(一神敎 : 기독교)는 로마의 다신교(多神敎)와 충돌하여 280년간 역대 황제들의 사정없는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교도들의 열성과 붉은 피는 나날이 신도를 늘게 하니 콘스탄틴 황제는 마침내 그 신앙을 공인하였다.”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과 기독교 타락콘스탄틴은 매우 영민한 황제였다. 그가 통치하고 있는 로마 제국 안에 거대한 두 종교집단이 있었는데, 한 무리는 기독교도들이었고 또 한 집단은 태양신을 숭배하는 미스라 교도들이었다. 콘스탄틴은 이 두 무리를 하나로 연합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하면서 의도적이고 파격적인 행동을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이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경쟁자였던 멕센시우스와의 전투에서 기독교의 신이 자기를 도와서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침내 콘스탄틴은 서기 313년에 밀란칙령을 내려 그 동안 박해하던 기독교에 자유를 선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군복무 면제, 세금 면제 등 많은 특혜를 베풀었고 기독교인들을 선대(善待)하였기 때문에 많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였다.“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AD 313년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건은 당시 박해를 받던 기독교인들에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 핍박을 당하던 교회 지도자들이 황제의 인정을 받고 후한 봉급까지 받게 되니 이교도(異敎徒) 사제들도 기독교로 함께 개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제들이 개종한 것은 시대의 흐름에 의한 형식적인 개종이지 실제적인 개종은 아니었다.”이러한 배경에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와 태양신을 숭배하는 미스라교가 혼합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이교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신도들의 수(數)가 크게 증가하여 기존의 기독교인들의 세력보다 더 크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기독교는 이제 세상에 영향을 주는 종교에서 이교도의 영향을 받는 종교로 변질되었다.이러한 과정 속에서 콘스탄틴이 시도했던 매우 교묘한 전략 중의 하나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의 신(하나님)을 믿도록 권장하는 과정에서 이교도들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예배일(일요일)을 기독교에 접목시킨 것이다. 그 당시 태양신을 섬기던 미스라 교도들의 예배일은 일요일(Sunday)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풍습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와 배경을 가지고 콘스탄틴은 마침내 321년에 일요일 휴업 법령을 반포하였다. 물론 이 날에 예배를 드리라는 명령은 아니었지만, 자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분위가 조성된 것이 사실이고, 바로 이것이 효시가 되어 오늘날 모든 문명국가에서 일요일을 공휴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역사적 기록이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원래 일요일을 중히 여기는 일은, ‘솔 인빅투스’(Sol Invictus)나 ‘미트라주의’(Mithraism)에서 ‘태양을 존경하는 날’ 즉 Sun-day로 ‘태양’이라는 일(日) 요일이었고 태양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쉬는 날이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 이들과 동화하기 위해서 일요일을 쉬는 날로 정하고 주님의 날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기독교에 유입되는 오류와 함께 탄생한 가톨릭그후, 기독교 안에는 이방신들을 섬기는 수많은 풍습들이 들어와서 기독교의 본질은 왜곡되었고 세상을 비추고 있던 성경의 진리의 빛은 서서히 사라지고 흑암의 세력이 지배하는 암흑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그 당시 이교도로부터 기독교로 유입된 풍습과 교리들을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부활절행사 도입(325년), 로마교회 감독이 이교도 승원장 겸직(378년), 로마 교회 감독을 교황이라고 호칭(590년), 마리아 숭배(800년), 묵주기도(1090년), 종교재판소 설립(1184년), 화체설(1215년), 고해성사(1215년), 평신도 성경 금서(禁書)(1229년), 연옥설 확정(1439년), 면죄부 판매(1506년), 영혼불멸설(1513년), 교황무오설(1870년) 등. 이 외에도 이방 종교를 본 받아 수많은 우상들을 만들었고 성경 말씀에 충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하는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며 오랜 세월동안 세상을 암흑천지로 만들어 지배한 교회가 바로 가톨릭교회이다. 기독교가 가톨릭교회로 변질되고 발전한 과정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① 서기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밀란칙령 이후 기독교는 세속화, 정치화, 이교화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기독교 안에는 이교도에서 개종한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면서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교도들이 기독교의 분위기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② 서기 331년 콘스탄틴 황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으로 옮김에 따라 로마 교회의 감독이 로마의 실질적인 주권자가 되어 그 세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③ 니케아(AD 325)와 콘스탄티노플(AD 381)의 두 공의회(公議會)를 거쳐서 “보편적인” “일반적인”의 의미를 가진 “가톨릭”(Catholic)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교회의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④ 당시 교세가 가장 크고 강력했던 로마 교회 감독의 지위와 권력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378년에는 로마 교회 감독이 이교도의 승원장직을 겸직하게 되었다. ⑤ 395년에는 로마가 동서(東西)로 분리되었으며, 서로마는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476년 완전히 패망하였다. 이에 따라 로마 교회의 감독이 서로마 제국의 옛 영토에서는 가장 큰 권력자가 되었고, 동로마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⑥ 590년에는 로마교구 감독 그레고리에게 ‘교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후에 동로마 황제 포카스가 607년에 교회의 수위권을 로마의 대감독 보니파시오에게 수여하므로 ‘교황’ 명칭을 공식화 하였다. ⑦ 그 후로 교황의 세력과 권위는 점차로 확대되고 강성해져서 마침내 로마의 황제도 교황의 말에 복종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1077년 1월 28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시킨 교황 그레고리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 카놋사에 찾아가 용서를 구한 ‘카놋사의 굴욕’ 사건은 그 당시 교황의 권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가톨릭교회는 이와 같은 풍토와 배경에서 자라난 ‘변질된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그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본질상 변함이 없고 정치적 요소와 이교적 요소들이 혼합된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교회이다. 아마도 개신교의 어느 교회가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는 연옥설이나 마리아 숭배나 고해성사를 가르친다면 당장 이단으로 정죄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가톨릭교회를 정통교회라고 인정하면서 함께 연합하려고 하는 오늘날 일부 한국 개신교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지금 한국교회는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만 하는 절박한 위기의 상태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8-25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5
    1부 성경에 기록된 신앙개혁의 역사15. 천지를 개벽시킨 예수와 제자들 이 지구상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 중에 가장 쇼킹하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최대의 파격적인 사건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의 탄생, 장차 세상을 진동시킬 그 엄청난 사건이 유대 땅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에서 조용하게 일어났다. 그 후 그분의 행동 역시 세상을 소란하게 할 만큼 요란스럽지도 않았고 선동적이지도 않았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도, 주먹을 불끈 쥐고 목소리를 높여서 외치는 웅변이 아니었고 침착하고 조용하지만 권세 있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말과 행동은 그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가르침과는 판이하게 다른, 당시의 상식과 풍습을 뒤엎어놓는 ‘파격’ 그 자체였다. 그분의 오심으로 세상의 역사적 시간을 카운트하는 시간이 BC(Before Christ, 주전)와 AD(라틴어 Anno-해, 년, Dommini-주님, 주후)로 갈라졌고, 지상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졌다. 오늘날 세상에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거의 없으며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20억 명이 넘는다. 예수는 그야말로 천지를 개벽시킨 분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가르침을 전파한 제자들은 온 세상을 “소요케 하는”(행 24:5) 혁명가들이었다. 천지개벽의 주인공-예수예수의 출생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고, 구약 성경 전체의 흐름을 관통하면서 이미 예고되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사람이 범죄한 직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시 구원하시겠다고 선언하신 창세기 3장 15절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이 바로 그분이었다. 발꿈치에 상처(십자가 희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를 입으면서, 악의 세력을 지배하고 있는 사탄(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여 멸망시킬 주인공이 세상 역사에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자신의 머리를 상하게 할 예수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헤롯왕을 충동하여 그 아이를 죽이려고 하였고 그 이후에도 그는 예수를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는 그의 사명을 다할 때까지 이곳저곳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마 4:23)쳐 주셨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살려주셨다. (1)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임하신 예수 예수는 어두운 세상에 임하신 빛이었다. 사도 요한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세상에 대하여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요 1:5)였다고 개탄하였다. 온갖 죄악과 불법이 가득한 어두움의 세상에 처하여 죽어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예수는 빛과 생명으로 임하셨던 것이다.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희망의 빛을 보았으며 사망의 골짜기에서 생명의 세계로 인도함을 받았다. 예수께서도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빛이요 그 빛이 생명임을 천명하셨다. (2) 죽은 자를 살게 하신 예수사람은 수백만의 사람들을 죽일 수는 있지만 단 한명의 죽은 자도 살려낼 수 없다. 전쟁에서 수백만 수천만 명이 죽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죽은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은 인간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파격 중의 파격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그 주변에 함께 살았던 사람들은 죽은 사람도 살 수 있다는 증거를 보았다. 예수께서는 이미 죽은 어린 소녀를 “달리다굼”(일어나라)이라는 말씀으로 살려 내셨고(막 5:41), 매장하기 위해 사람들이 메고 나가는 과부의 죽은 아들에게도 “청년아 … 일어나라”(눅 7:13)고 하였을 때 살아났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무덤에서 썩어가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고 하시니 그가 살아서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가 살아나는 장면들을 목격하였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요 1:25)다는 그분의 말씀은 진실이었다. 예수님 자신도 죽은 지 3일 만에 살아나심으로 부활과 영생이 실증을 보여주셨다. (3)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주신 예수 예수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으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삶을 통하여 친히 보여주심으로 그리스도인 생활의 완벽한 모델이 되셨다.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하셨으며,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유익과 행복을 위하여 봉사하셨다. 마침내 그분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아낌없이 내어 주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살 것을 요구하셨다. 그분은 문자그대로 “사랑의 화신(化身)”이었다. 사도 바울은 후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는 말씀으로 권면하였다. 세상을 진동시킨 예수의 제자들예수님은 3년 반에 걸쳐서 ‘가르치심으로’ ‘보여주심으로’ 그의 제자들을 교육하셨다. 제자들은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배우는 일에 매우 둔하고 더디긴 하였으나 예수님의 삶의 마지막 순간, 그분의 십자가 희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목도한 후에는 이전의 그 말씀과 가르침들이 생명과 능력이 되어 화산의 불길처럼 솟아올랐다. 특별히, 예수님의 약속을 따라서 임하신 성령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하였을 때 그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이 되었고 온 세상을 진동시키는 ‘복음의 사신’이 되었다.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이적이 일어났고 그들이 전하는 생명과 능력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면서 회심하고 회개하여 예수의 이름을 믿고 구원받는 자들이 하루에도 수천 명씩 허다하게 증가되었다. 학문에 익숙지 못하고 가난한 어부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제자들이 변화되어 하늘의 능력이 임하였을 때 나타난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당대의 수많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의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예수에 대하여 전하는 권세 있는 메시지에 아연실색(啞然失色) 하였고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소신이 없고 비겁했던 베드로의 힘 있고 담대한 설교에 넋을 잃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는 용감한 베드로와 요한의 말에 대하여 할 말이 없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의 영향력과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위대한 능력이 되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행 24:5)라고 부르짖었으나 그들을 제재하거나 그들의 활동을 중단시킬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복음의 능력’이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건은 아무도 막을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그야말로 지상 최대의 사건이었다. 개혁을 넘어선 개벽이었고 인간의 지식과 상식을 초월하는 파격이었다. 오직 나의 신으로“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분과 관련된 모든 것은 영적인 일이며, 그 영적인 일은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일어난다. 예수님의 탄생 자체도 ‘성령’으로 시작되었으며, 그분의 사역을 폭발시키는 일도 ‘성령’ 충만한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 이후에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모든 역사도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었다. 예수 승천 이후 시작된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복음이 발아(發芽)하여 급속히 세상에 퍼져나간 것이 성령의 역사였다면, 예수 재림 직전에 천국에 들어갈 알곡들을 추수할 때에도 역시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 이것으로 ‘1부 성경에 기록된 신앙개혁의 역사’를 끝내고 다음 호부터는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에 대하여 연재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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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8-11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4
    1부 성경에 기록된 신앙개혁의 역사14. 개혁자의 대명사 세례(침례)요한 페르샤를 정복한 알렉산더가 죽은 이후 분열된 헬라 제국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셀류커스 왕국과 남방의 프톨레미 왕국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쟁 때문에 끔찍한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특히 셀류커스 왕국의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는 유다 나라의 종교와 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핍박을 가하였다. 유다인의 안식일 준수와 절기와 축제들, 제사, 할례의식 등을 금지시켰고, 율법서를 불태우고 유대교에서는 금지하는 돼지고기를 제단에 올려놓고 제사를 드리는 등 잔인한 핍박을 일삼았다. 헬라 제국를 정복한 로마 제국의 치하에서도 여전히 유다 민족들은 처절한 고난의 세월을 보내며 아무런 미래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속히 나타나서 그들을 구출하여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기를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 이상 선지자의 음성도 들리지 않았다. 유다 민족들은 저들의 허전하고 갈급한 마음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새로운 종교를 고대하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영토 안에 있는 나라들은 대체로 한 가지 언어로 소통할 수 있었고 도로망도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로마 전역에 복음이 신속히 전파될 수 있는 조건도 갖추어졌다. 마침내 메시야가 도래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기가 온 것이다.왕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사명 예수는 비록 인간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출생하실 것이었지만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다. 그 당시에는 왕이 어떤 지역에 행차하게 되면 선발대가 미리 가서 왕이 지나가는 길을 평탄하게 하고 왕의 행로가 안전하게 되도록 준비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왕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그 길을 미리 준비하는 단계가 필요하였고, 그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 예수님 보다 약 6개월 정도 먼저 태어난 요한의 출생도 예수의 출생처럼 예언되어 있었다. 제사장이었던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전 봉사를 하던 중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되었고 천사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였다. 그 아내엘리사벳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눅 1:17)할 것이라고 전하였다.그는 특별한 사명을 가진 구별된 아이였기 때문에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말아야 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랍비의 교육을 받는 것이 마땅했으나, 인간이 만들어 낸 세속의 교육을 받지 않고 광야의 외진 곳에서 천연계의 사물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분의 뜻을 깨달아 순종하는 것이 그가 받아야 할 교육이었다. 먹는 음식도 극히 절제된 것이었고 몸과 마음을 순결하고 단순하게 가꾸어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정결한 통로로서 준비되어야 하였다. 인간의 때가 묻지 아니한 이러한 교육 과정을 통해서 성장한 그가, 30세가 되어 그 사명을 실현하기 위하여 대중 앞에 나타났을 때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위엄 있는 외모와 거룩한 능력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사람들이 목도하게 되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감히 저항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 그 동안 대중 앞에서 설교하던 제사장이나 학생들을 가르치던 랍비들과는 차별된 위엄과 군중들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유대 광야로부터 혜성같이 나타난 세례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었다. 청중들은 요한의 말을 들으면서 새롭고도 이상한 능력을 감지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상당히 가혹하고 직설적이었지만 희망이 가득찬 음성이었다. 그는 국가적인 부패를 지적하고 위선적인 지도자들을 향하여 날카로운 견책을 하였고, 당시에 만연한 사회적 죄악들에 대하여 가차 없이 질책하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귀족들을 포함하여 세리들, 농부들, 군인들, 심지어는 랍비들과 제사장들까지도 그의 메시지를 듣기 위하여 몰려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면서 침례(이 당시에는 세례가 없었음)를 받았다. 외적인 경건의 모습을 자랑하고 외식을 추구하면서 백성들에게 강요된 존경을 받고 싶어하던 유대 지도자들의 마음에 숨겨있던 은밀한 죄악들이 드러났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는 이 젊은 선생에게 동조하므로 저들의 영향력도 확대해 보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여 침례 받기를 청하였다. 요한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이 참된 회개를 하지 않고 소위 포플리즘에 영합하고자 하는 그 기회주의자들의 마음의 동기를 꿰뚫어 보면서 신랄하게 견책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을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7~9).세례요한이 가까이 왔다고 외친 그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하는 메시지였다. 예수를 ‘천국’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를 영접한 마음이 천국, 곧 ‘은혜의 왕국’이 된다는 것이다. 그 순결하고 거룩하신 예수를 맞이하려면 마음이 청결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숨겨진 죄들을 회개하라고 외친 것이었다.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예수를 영접할 수 없기 때문에, 나중에 예수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마 5:3)라고 말씀하셨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마 5:8)라고 하셨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예수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정결한가? 과연 가난하고 겸손한가? 과연 날마다 죄를 씻고 살면서 죄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가?세례요한이 주는 현대적 교훈예수께서 이 땅에 초림하신 것은 ‘은혜의 왕국’이 임한 것이었다. 겸비한 심령으로 그분을 영접하는 마음이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요한의 사명은 예수를 영접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이미(already) 도래한 ‘은혜의 왕국’에 동참한 자들의 그 다음 희망은 장차 올(not yet) ‘영광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 엘리야”(말 4:5)가 출현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는데 그가 바로 요한이었고, 예수님도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14)는 말씀으로 그 사실을 인정하셨다. 이제 또 한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올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영광의 왕국’의 왕으로 임하실 예수의 재림이다. 예수의 재림 전, 백성들이 재림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이 시대에 세례 요한과 동일한 심령과 사명으로 사람들을 깨우치는 현대의 엘리야가 필요하다. 그들은 요한과 같은 자질과 성품을 가지고 죄를 죄라고 지적할 수 있는 용기와 영성이 있어야 한다. 견책과 함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위엄 있고 권세 있는 음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한처럼, 세속과 격리되어 철저하게 절제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다져지고 고착된 확고부동한 믿음과 경건한 삶의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아마 오늘날에도 어디에선가 세례 요한의 정신을 품고 마지막 시대에 백성들을 일깨우기 위하여 준비된 개혁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나타날 것을 기대해 본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7-28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3
    1부 성경에 기록된 신앙개혁의 역사13.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 정신 유다 민족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 차매 주전 537년 바사 왕 고레스가 유다 백성들의 귀환 명령을 내렸다(스 1:1~4). 이때에 유다 백성들의 귀환을 주도한 인물은, 여호야김의 손자인 유다 총독 스룹바벨이었다. 그가 4만여 명의 유다인들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최우선적으로 시도한 사업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과 주변 나라 백성들의 방해로 성전 재건은 쉽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멸망한 북방 이스라엘의 열 지파 자손들 중 살아남은 자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낳은 후손들이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재건에 동참하려고 하는 의사를 보였지만, 그것은 남방 유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성전재건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고, 그것을 스룹바벨 성전이라 부른다. 다시 주전 520년경 다리오 1세가 내린 조서(스 6:1, 8~11)에 따라 유다인 2차 귀환이 이루어졌고, 이미 재건된 스룹바벨 성전의 미흡한 부분들을 완성하여 성전을 봉헌하게 되었다(스 6:13~18). 마침내 주전 457년 아닥사스다 왕이 3차 귀환령(스 7:7~26)을 내렸고, 이 3차 귀환령에 의해 예루살렘 성곽을 수리하고, 유다 나라의 자치권을 회복하기까지 헌신한 두 지도자가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이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스 7:6)였다. 느헤미야 역시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요구도 왕이 순순히 들어주었다. 유다 왕국의 회복과 개혁의 완성은 사실상 이 두 인물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에 이 두 사람의 인품과 신앙과 개혁정신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에스라의 인품과 그의 개혁정신에스라는 유다인의 율법에 정통한 학자일 뿐만 아니라, 그는 혈통적으로도 아론의 16세손이었고, 원칙에 매우 철저하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려고 하는 의지가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고 늘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을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영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그의 백성과 함께 귀환하려고 할 때에 그들이 가지고 가는 많은 재물과 보물 때문에 혹시 이주하는 도중에 노략을 당할 위험이 있어서 왕에게 함께 동행해 줄 군사를 요청할 마음이 있었으나, 에스라는 그러한 시도를 포기하였다. 왜냐하면 이전에 그가 왕에게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스 8:22)신다고 하였기 때문에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스 8:22) 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고귀한 믿음인가? “믿습니다”라는 기도는 열심히 하면서도 모든 일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어보려고 하는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매우 값진 교훈을 주는 대목이다.그의 이러한 성품과 신앙 때문에 그가 아닥사스다의 귀환 명령에 따라 유다 나라로 돌아가서 나라의 회복과 개혁을 시작하려고 마음을 작정한 다음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스 9:6). 이것이 그의 회개의 기도였다. 모세나 다니엘이나 위대한 지도자들의 특성은 언제나 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겼다는 점이다. 특히, 그가 회개한 것은 유다 백성이 이방인을 취하여 아내로 삼고 자식을 낳은 것이었다. 이러한 죄악을 선두에서 저지른 사람들이 유다의 “방백들과 고관들”(스 9:2)이었다. 에스라는 이 일에 대하여 통절하게 회개하고 유다 관원들의 협조를 얻어 과감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 개혁은 매우 구체적이고 조직적이었다. 우선 이방인과 결혼한 자들의 명단을 세밀하게 작성한(스 10:18~44) 다음, 그 이방인 아내들과 자식들을 그들의 나라로 돌려보내는 뼈아픈 개혁을 시작하였다. 개혁이란 회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잘못된 것을 과감하게 고치는 것이다.에스라는 학문에 깊은 통찰력을 가진 학자였다. 그는 백성에게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에 비추어 그들의 죄와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에스라가 일하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성경 연구의 부흥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부흥과 개혁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것이었기 때문에 거부하거나 핑계를 댈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이 본 받아야 할 핵심적인 교훈이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모든 교리나 영적 표준은 오직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 성도들을 가르치거나 그들에게 설교를 할 때에도 그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목회자들이 말씀을 강론할 때에, 성경절 한두 절 읽고 나서 정치 이야기나 자신의 자랑 또는 인간적 이론을 전개하는 일은 성도들의 회개나 개혁, 영적 성숙이나 건전한 교회 성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점을 가슴 속 깊이 새겨야 한다.느헤미야의 능력과 과감한 결단느헤미야는 신앙심이 투철한 정치가였다. 느헤미야가 비록 포로로 잡혀온 유다 민족의 후손이지만 바사의 왕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술 맡은 관원직을 부여한 것은 그의 능력과 정직하고 냉철한 성품을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후에 그가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된 것을 보면 그는 조직적이고 유능한 정치적 지도자였던 것 같다. 그가 왕궁에 거하는 동안, 그의 형제 중 하나가 유다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의 형편을 전하였다. 유다인들이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느 1:3)는 보고를 들은 느헤미야는 며칠 동안 통곡하고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유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나라를 회복시켜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왕의 마음을 움직여 느헤미야에게 특별한 기간을 할애하여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데 필요한 많은 물자와 물품들을 제공하면서 성을 수축할 것을 허락하였다. 느헤미야는 편안하고 아무런 염려가 없는 왕궁을 떠나 시련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조국을 향하여 머나먼 여정 길에 올랐다.무너진 성벽을 수축하고 불타서 못쓰게 된 문짝들을 달고 성을 재건하는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방해와 파도같이 밀려오는 도전들이 있었다. 특히, 그 당시 사마리아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산발랏과 그를 돕던 도비야의 음모와 방해는 매우 집요하였고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어떠한 협박과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한 신념과 사명감으로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52일 만에 공사를 마치고 성벽과 성문이 든든하게 세워졌다. 느헤미야는 그가 12년 동안 유다 총독으로 있었으나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치는(느 5:4) 백성의 피폐한 형편을 고려하여 총독의 보수를 받지 않고 자원해서 봉사하는 어질고 자비심이 많은 총독이었다.그들은 유다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민족의 영적 부흥과 회복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희생하면서 헌신한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이었다. 오늘날 이와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성경을 깊이 철저하게 연구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찾아서 백성을 옳은 길로 인도한 에스라와 같은 목회자, 정당한 보수까지도 거절하고 순수한 봉사와 희생의 정신으로 국가의 발전과 백성의 복리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가 이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하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7-26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2
    1부 성경에 기록된 신앙개혁의 역사12. 다니엘과 세 친구의 위대한 신앙 솔로몬의 치세가 끝나면서 이스라엘은 남방 유다과 북방 이스라엘로 분열되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추종하는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남방 유다를 세웠고, 나머지 열 지파는 솔로몬의 신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을 따라 북방 이스라엘 왕국을 만들었다. 북방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게 멸망하기까지 19명의 왕이 있었고, 남방 유다는 주전 586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마지막 왕 시드기야까지 20명의 왕이 일어났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히스기야나 요시아를 비롯한 극소수의 왕 이외에는 모두가 악한 왕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 지도자의 부실함과 불안정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의 완전한 지도자는 하나님 밖에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왕들의 무능함과 실책 때문에 나라는 늘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 우상숭배에 빠져들었고 국가는 피폐해져 갔다. 남방 유다의 계속적인 배도와 타락의 결과로 당시 신흥 강대국으로 등장한 바벨론이 하나님의 채찍이 되어 유다에 징벌이 내려지려 하고 있었다. 예레미야를 통해 보여준 행동화된 비유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예레미야는 한 가지 특별한 일을 시도하였다. 그 당시 가장 경건하고 자신들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로 알려진 레갑 사람들(겐 족속 요나답의 후손들 : 왕하 10:15,16 참조)이 있었다. 예레미야는 성전의 한 방으로 그 사람들을 모은 다음 포도주를 차려 놓고 마시도록 권하였다. 레갑 사람들은 그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유는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렘 35:6)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조의 명령을 200년 이상 충실히 지켜온 레갑 사람들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조시켜서 그들의 불순종과 배도를 깨닫도록 하셨다.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언하신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는지 다소나마 느낄 수 있다(렘 35:14~17).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뜻을 정한” 다니엘마침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이 바벨론을 통해서 내리기 시작하였다. 주전 605년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하여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고 성전의 기물들도 탈취해 갔다. 이 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느브갓네살 왕은 유다 포로들에 대하여 특별한 정책을 세웠다. 유다의 왕족들과 귀족들 가운데 총명하고 탁월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왕궁으로 불러들인 다음, 그들을 바벨론화 시켜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 익숙한 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을 시도한 것이다. 이 교육 과정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며 원칙을 고수하는 일에 있어서 매우 확고한 입장을 취하였다. 왕궁에서 제공하는 기름지고 화려한 육류 위주의 식단을 거부하고 깨끗한 물과 채식을 요청하였다. 교육 책임을 맡은 환관장은 매우 황당하였으나, 10일의 시험 기간을 거친 다음 다시 의논하기로 하고 다니엘의 요청대로 채식을 제공하였다. 그 결과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10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단 1:20).성경에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내용들은 주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역사가 아무리 흘러도 인간의 속성은 거의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 교훈이나 일상생활에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은 곧 오늘날 우리 각 개인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요청은 매우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리와 생리와 인체의 필요를 정확하게 아시고, 사람의 몸과 마음을 가장 건강하게 건전하게 관리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 하나님의 어떤 말씀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면 결코 인간에게 손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큰 유익과 축복이 된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뜻을 정하여”(단 1:8) 바로 이 선택을 한 것이다. 결과는 큰 축복이었다. 어떤 면에서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식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진리’로 인정하여 믿고 순종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실천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라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잘 했다’고 별도의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 자체(순종의 열매)가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느브갓네살 왕은, 바벨론 국가의 영원한 존속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두라 평지에 거대한 금 신상을 세우고 그 낙성식에 나라의 모든 관리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낙성식의 핵심적인 의식은 당일 행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그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절을 하지 않으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단 3:6) 죽일 것이라는 경고가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감히 절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요동치 않았고 그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꼿꼿이 서 있었다. 그들은 즉시 왕 앞에 붙잡혀 갔다. 왕은 그들이 평소에 매우 충실하고 탁월한 청년들이라 죽이기는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어 살려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절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단 3:17)실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대답이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라고 공손하면서도 확고한 모습으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의 호의를 무시하는 이 괘씸한 청년들에 대하여 왕의 분노가 격발되었다. 풀무불을 칠 배나 뜨겁게 하여 그들을 집어 던져 넣었다. 세 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네 사람이 풀무불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에서 온 사자가 그들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목도한 왕과 모든 관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단 3:28).오늘날 이 시대에도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므로 성도들에게 본을 보이는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어떤 환경이나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굳건하고 순결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종들이 많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바로 교회의 희망이고 능력이다. 교회의 개혁은 어떤 전략이나 이벤트나 서적이나 설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 같은 확고부동한 믿음의 전사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 본을 보이면서 전진할 때에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것이다. 변화나 개혁이라고 하는 것은 ‘가르침’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바라봄’으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도 그의 양심적이고 확고한 신앙과 인품이 뒷받침되지 않았더라면 실패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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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7-07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1
    1부 성경에 기록된 신앙개혁의 역사11. 살신성인의 선지자 예레미야 요시야가 일으킨 개혁은 가시적(可視的)인 분야였다. 우상을 숭배하는 산당들과 목상(木像)들과 기물들은 파괴되었고 성전은 재건되고 율법책을 펼치긴 하였으나 그 율법책의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심령에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더 나아가 그 기록된 말씀에 순종하며 개인들의 삶이 변화되는 일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요시야의 개혁이 더 발전되어 백성들의 심령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젊은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예레미야였다. 예레미야서 전반에 걸쳐서 감지되는 그의 성격은 수줍어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백성 중에 만연한 죄악에 대하여 심히 괴로워하며 탄식하는 양심적인 선지자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나 책임에 매우 충실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의(義)를 바르게 세우는 일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고 굳게 설 수 있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황폐해가는 유다 백성들의 죄를 깨우치고 그들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감당할 선지자로 예레미야를 선택하셨다. 구별된 소수와 다수의 범죄 집단죄악적인 성향을 가진 인간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면 그 집단도 역시 죄악적인 성향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그 조상의 시대로부터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듣고 경험하였으나, 그들의 성향과 죄된 습성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구별된 소수의 개인들은 있었지만, 집단적으로는 언제나 누적된 죄악으로 파국을 맞이하는 것이 인류 역사에 나타난 교훈이다. 이렇게 반복된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가련한 죄인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도 날마다 깨어서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인간의 죄악적인 경향과 타락한 상태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언제나 죄를 지적하는 곧은 메시지였고,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과 약점을 파헤쳐 지적하는 선지자의 음성 듣기를 싫어하였고 그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선지자들을 미워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미움을 많이 받았고 죽음의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했던 선지자가 바로 예레미야였다. 예레미야가 전한 개혁의 메시지타락한 백성들의 죄악적 유형이 늘 대동소이(大同小異)하기 때문에, 시대 시대마다 일어난 선지자들이 외치는 메시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왠지 보다 강렬하고 더욱 열정적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그는 감성이 풍부했던 선지자였던 것 같다. 예레미야는 성전 마당에 서서 성전을 출입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임한 경고를 전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 내용은 주로 이러한 것이었다.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렘 7:2~7). 한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흉악한 죄악과 불법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궤가 있기 때문에 불레셋 사람들과 싸워서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몽상에 불과했다. 법궤까지 빼앗기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와 비슷한 동기에서, 유다의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출입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 ‘착각’에 대하여 경고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마 23:27)다는 말씀이 그들의 실상이었다. 예레미야의 이러한 직설적인 경고의 메시지가 외식하는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심기(心氣)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고 큰 부담을 느끼게 하였다. 특히 제사장들에게는 격렬한 분노를 일으켰으며 심지어는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계획까지 세웠다. 아마, 요즘 시대였더라면, 제사장들은 총회를 소집하여 예레미야를 ‘이단’으로 결의하여 백성들이 예레미야와 상종을 하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의 행태는 거의 유사한 것 같다. 마음이 유약했던 예레미야는 이러한 사람들의 저항과 분노 때문에 크게 상심하기도 하였다.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렘 20:7,10). 그러나 하나님의 보증이 있었다.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여 건짐이니라”(렘 15:20). 그리고 백성들 중에서도 예레미야 선지자의 음성을 듣고 각성하여 회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도움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예레미야는 죽음을 면하고 끝까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주는 현대적 교훈예레미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성전 마당에서 전했던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이다. 제사장들과 유다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었고 성전을 출입하면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가득하였고 그들의 외형은 위선으로 가리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성전을 출입하면서 드리는 제사 의식 자체가 자신들을 성별하여 이방인으로 둘러싸인 환경 속에서도 거룩한 백성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대단히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하고 유명한 목사를 초빙한 다음, 그 교회에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물론 그 안에도 신실한 성도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당시 유대사회의 형식화되고 왜곡되었던 신앙의 형태가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에 반복되었고, 중세기 암흑의 터널을 지나면서 발생한 개신교에 또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요시야의 개혁이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타락의 행태를 청산하는 것이었다면, 예레미야의 개혁은 각 개인의 심령의 부흥과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개혁이었다. 심령의 부흥과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는 이방 나라의 채찍을 통하여 징계를 받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 수순이었다. 어제나 그제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방법도 언제나 동일한 것이다. 오늘날 이 교회에 니느웨 성에서 일어났던 회개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욘 3:5-8). 오늘날에도 니느웨 왕 같은 양심과 정신을 가지고 백성들과 교회의 죄악을 직시하며 회개를 촉구할 수 있는 영적 지도력의 필요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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