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9(월)

해설/기획
Home >  해설/기획  >  손석태

실시간뉴스

실시간 손석태 기사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5
    시편에는 119편처럼 176절에 달하는 긴 것도 있지만 117편처럼 단 두 절의 짧은 것도 있다. 133편은 3절에 불과하다. 117편에 이어 두 번째로 짧은 시이다. 그 주제는 형제들이 연합하여 사는 것이 아름답다는 단순한 서술이지만 그 이유를 2개로 비유로 설명하고 있어서 독자들은 그 정확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 시의 저자는 다윗이라고 했다. 다윗은 형제들이 연합하여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감탄하고 있다. 형제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비유로 말하고 있다. 첫째는 머리에 부은 기름과 같다고 했고, 둘째는 시온의 산들에 내리는 헬몬의 이슬과 같다고 했다. 형제간의 불화는 아담과 하와의 자식들인 가인과 아벨 사이에 일어난 살인 사건이 그 시초이다. 가인과 아벨은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들이지만 가인은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살인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 때문에, 더구나 형제지간에, 그것도 아주 계획적으로 일어났다. 우리 인간 역사에 있어서 분쟁은 형제간에 처음 벌어졌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죄의 충동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살인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사람은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은 생명체요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부여하고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신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소유에 대하여 어떠한 이유로든지 손을 대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 형제 우애에 대해서 언급하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 시의 저자가 다윗이라고 전해 내려오기 때문에 우리는 다윗이 형제들간의 우애에 대한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서 추측해 보지 않을 수 없다.다윗은 형제간에 싸우지 않고 연합하여 사는 것을 마음에 갈망하며 산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맏아들 암논이 배다른 그의 누이 다말을 성폭행하고 매정하게 버리자, 다말의 친 오라비 압살롬이 2년 동안이나 복수의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그의 양털 깎는 날을 택하여 암논을 자기 집에 초청하고, 술을 먹인 후 그를 살해하여 누이를 대신한 복수를 감행했다. 온 집안이 박살이 났다. 다윗은 이 사건 후 날마다 울며 지냈다고 했다(삼하 13:34-36). 그러나 압살롬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여 난을 일으켰다. 백전백승의 대 장수인 아버지 다윗이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아들을 피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궁전을 떠나 피난을 가야 했다. 살인자, 아들의 광기를 피하여 도망가는 아버지의 심정이 참담했을 것이다. 결국 압살롬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그는 다시 궁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궁전은 옛날의 궁전이 아니었다. 피 비린내 나는 자식들의 칼부림을 보고 겪으며 그는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시편 133편은 다윗이 이러한 배경을 두고, 형제우애의 아름다운 모습을 동경하며 쓴 시가 아닌가 싶다. 이 시의 부제는 “올라가는 노래”라고 했다. “실 하마알롯”()이라는 부제는 시편 120-134편에 연속적으로 붙여지고 있는데, 그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축제 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가 아닌가 추측한다. 하나님께 경배하러 나아가며 형제자매 친구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축제를 앞두고 모두 즐겁고 재미있게 동행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손을 멈추고 동네 사람들이 함께 길을 가며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때가 되면 함께 앉아서 싸가지 온 음식도 나누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시이다. 다윗은 이러한 광경을 되돌아보며, 형제들이 연합하여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모습이 마치 제사장 아론의 머리로부터 수염을 타고 내려와 옷깃을 적시는 값진 기름과 같다고 비유한다. 이 모습은 제사장이 다른 사람, 곧 다른 제사장이나 왕을 세우는 위임식처럼 양식은 같지만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바로 제사장 자신, 아론이다. 레위기 8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아론을 제사장으로 기름붓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아론의 몸을 씻기고, 우림과 둠밈을 담은 가슴패와 이스라엘 12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온갖 화려한 제사장의 제복을 입히고, 금을 입힌 거룩한 판을 붙인 관, 곧 모자를 씌우고, “또 붓는 기름을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그를 거룩하게 하였다.”(12)고 했다. 거룩하다는 말은 깨끗하고 구별되다는 말이다. 빛나고 위엄이 있고, 순결하여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에게 제사장을 세우는 날은 참으로 복되고, 기쁘고, 즐거운 날이다. 그래서 한글 성경은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가”라고 번역했는데, “Hinneh mah-tov wumah na‘yim” ()은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How beautiful and pleasant!) 혹은 “얼마나 복되고 사랑스러운가!”(How blessed and lovely!)라고 번역이 더 원문에 가깝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아론의 위임식이 하나님께서 명하셔서 모세가 행한 일이라는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장벽이 생기고 부부간에 또한 형제간에 장벽이 생기고 서로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장을 세우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가 놓이고, 형제지간에 피를 흘린 자들을 위한 중보자가 세워진 것이다. 그래서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속죄의 길이 열리고 형제들 사이에 평화의 싹이 트게 되는 세상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된 것이다. 만일에 아론의 제사장직이 모든 향제들 사이의 분쟁을 그치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의 죄가 온전한 속죄를 이루는 것이었다면 다윗은 이러한 소망을 가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윗은 비록 지금은 자식들 사이에 생긴 분쟁과 살상을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지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영원하고 온전한 제사장을 세우셔서 모든 인생들이 형제들과 연합하여 함께 동거하는 세상을 이루실 것을 마음에 그리고 바라며 이 시를 썼을 것이다.다윗은 형제들이 연합하여 동거하는 세상이 언젠가 이루어지기를 동경하며 죽었다. 그런데 이 다윗의 소망과 비전이 이루어졌다. 제사장 아론이 이루지 못한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의 온전한 속죄와 중보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친히 거룩한 속죄의 제물이 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해와 중보를 이루게 하셨디. 아론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딤전 2:5)라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인이 흘리게 한 피, 암논과 압살롬이 흘리게 한 피를 씻으시고, 형제들이 화해하고 연합하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다. 한 성령으로 우리를 띠띠우시고 한데 묶어 한 하나님의 자녀, 한 형제가 되게 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한 형제, 자매가 되었다. 형제로서 연합하게 하셨디.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그러나 그 때에 멀리 있던 너희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다. 자신의 육체 안에서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중간에 막힌 담, 곧 원수된 것을 제거하신 분이시며 ...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는 것이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3-16)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게 하시고 세례를 통하여 이를 인치셨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게 하셨다. 서로 연합된 한 몸, 한 형제가 되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아론의 머리로부터 수염으로, 그리고 옷깃으로 기름이 넘쳐흐르듯이 성령의 역사가 넘치는 형제, 자매의 연합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서로 하나되는 아름답고 즐거운 사귐을 갖게 된 것이다.다윗은 형제간의 우애를 아론의 머리로부터 흘러내리는 기름에 비유할 뿐만 아니라 시온의 산들 위에 내리는 이슬로 비유하고 있다. 예루살렘에는 시온산, 성전산, 감람산 등 세 개의 산이 있는데, 시온은 시편에서 하나님의 성산으로 불리우고,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시온은 유다 지역에 있다. 유다 지역은 지중해 지역처럼 비옥한 땅이 아니다. 지중해에 접해있는 해안 지역은 비가 자구 오기 때문에 비옥하여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지만 중앙산맥 동쪽, 유다지역은 비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무나 풀이 자랄 수 없어 메마른 광야이다. 그리고 전형적인 열대지방 기후라서 낮에는 사막처럼 뜨거운 햇볕이 내려쬐지만 밤에는 기온이 낮다. 그래서 낮과 밤의 온도차가 심해서 이슬이 흠뻑 내린다. 그래서 유다지역에서는 포도나 올리브, 바나나와 같은 열대성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그래서 비가 오지 않아도 이슬만으로도 과일이 풍성하게 생산된다. 참으로 신비한 나라이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 산들에 내림과 같다는 말은 마치 이슬이 헐몬 산에서 내린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해하기 쉽다. 헐몬 산은 높아서 사시사철 눈이 덮여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름에도 스키를 타러 간다. 헐몬 산에서 녹아내리는 물은 요단 강을 이루고 이 강물이 갈릴리 호수와 사해로 흘러내려 간다. 이스라엘의 젖줄이다. 갈릴리 지역의 풍성한 농산물은 다 갈릴리를 지역을 관통하는 요단 물 먹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 마치 할몬 산의 물이 갈릴리에 온갖 풍성한 농산물을 생산해내듯이, 시온의 이슬도 유다 지역에 온갖 풍성한 과일을 생산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다윗은 형제들이 연합하여 함께 동거하는 이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부요한 모습을 마음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형제들이 연합하여 함께 동거하는 모습이 부족함이 없이 부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사실 그렇다. 우리 성도들이 연합하여 함께 사는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말씀이 있고, 찬송이 있고, 기도가 있고, 나눔이 있다.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우정을 나누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용기와 위로와 소망을 나눈다. 물건을 나누고, 음식을 나눈다. 성도들 사이의 이러한 풍성함을 한번 맛본 사람은 다른 곳에 갈 수가 없다. 떠날 수가 없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10-25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24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면서 첫 번째 주신 명령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글로 번역하고 있는 “생육하다”말은 히브리어로 “파라”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그 의미는 “열매 맺다” “열매가 풍성하다”(bear fruit, be fruitful)라는 의미이다. 사람이 열매 맺는다는 말은 자식을 낳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이 자식을 낳되 많이 낳아서 기르라는 것이다. 자식을 많이 낳아 번성하여 땅을 충만하게 채우라는 것이다. 시편 127편에 보면 자식이 많은 사람을 화살 통에 화살이 가득한 장사로 묘사하고 있다(시 127:5-6). 자식이 많은 것이 복이요 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식을 낳고 기르도록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가정을 세우셨다.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많은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다. 하나님의 이 명령과 뜻을 거역하는 어떤 이론이나 행동도 다 악이다.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계획을 세우셨다. 새로운 아담을 세우시고, 새 아담을 중심한 새로운 사람들을 모아 새로운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었다. 그 계획은 옛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을 세우고, 새 아담을 통한 새사람들을 모으고, 그들 가운데 새로운 조직과 질서가 있는 새 나라를 세우는 일인 만큼 오랜 동안의 준비가 필요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새 나라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넘치는 세상, 그리하여 이 땅에 공의와 정의가 세워지고 사랑과 평화가 왕노릇하는 세상이었다(사 2:1-4; 11:1-9). 이러한 계획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많은 자손, 그리고 그들이 살아야 할 땅,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의 그들의 역할 등을 말씀하셨다(창 12:1-3).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말씀은 창세 때에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과 같다. 그러나 창세기 18장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를 더 자세하게 말씀하신다.“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민족이 되고, 땅의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내가 그를 택한 것은 그가 그의 자식과 그 가족들에게 명령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것을 그에게 이루려 하는 것이다.”(창 18:18-19)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크고 강한 민족을 이루게 하고, 그와 그의 가족을 통하여 세상 만민들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종말의 비전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시고자 하는 세상,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열매는 “여호와의 도를 통한 공의와 정의가 있는 사랑과 평화의 세상”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도”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호와의 도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뿐만 아니라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가르침, 하나님의 사역과 방법 등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말이다. 공의와 정의는 다같이 법정용어로 “관계어”이다. 공의는 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의는 사람과의 바른 관계에 쓰이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공평해야 한다. 그러나 공평하다고 해서 다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공평하기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정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정의롭다고 해서 다 공평하지도 않다. 또한 사람이 사는 사회가 다 공평하고 정의롭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다 의로운 것은 아니다. 공평과 정의는 상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공의가 필요한 것이고, 공의와 정의는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이 세상에는 공의와 정의가 없어졌다. 그래서 이사야서는 이러한 세상을 포도원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사야 5장에서 여호와는 포도원 주인, 이스라엘은 포도원, 포도나무는 유다이다. 포도원 주인은 땅을 파서 훌륭한 포도밭을 일구었고, 포도를 수확해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한 포도주 술틀도 만들었다. 부족함 없이 완벽한 최고의 포도원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기대와는 달리 들포도를 맺고 말았다. 이사야는 이러한 포도밭을 향하여 주인인 여호와께서 이 포도밭을 황무지로 만들 것임을 선언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다. 그분은 그들에게 정의를 기대하였으나 도리어 살육이고, 공의를 기대하였으나 보아라, 울부짖음이다.”(사 5:9).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유다에게서 구했던 열매는 공의와 정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공의와 정의를 잃은 나라가 되었다. 이들에게는 이제 멸망이 남아 있을 뿐이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참 포도나무를 새롭게 심으신다.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농부 하나님은 다시 밭을 갈고, 참 포도나무 예수님을 심으신 것이다. 요한 15:1에는 예수께서 “나는 참 포도나무이고, 내 아버지는 농부이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5절에는 “나는 곧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이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다 들포도나무 가지와 같은 자들이다. 그런데 이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께 젖붙임을 받아 참 포도나무가 되고, 그 나무로부터 진액을 받아 참 포도가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원리를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참 올리부 나무와 돌 올리부나무를 비유해서 가르친다. 참 포도나무이든 참 올리부 나무이든 가지는 나무에 접붙여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근본 종자가 들포도이고 돌 올리브이면 아무리 좋은 거름을 주고, 물을 주어도 그 열매는 먹을 수 없다. 그래서 농부는 접붙이기를 한다. 예수께서는 15:4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내가 곧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들이다. 내 안에 거하여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 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내가 곧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들이다. 그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으니, 이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이 땅에 보내셨다. 들포도나무 가지들인 우리들은 이제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 안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처럼 버려져 마르게 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모아 불사를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수님 안에 있으라고 명하신다.그렇다면 가지인 우리는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우리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갈 5:22-23에 보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했다. 온갖 아름다운 신앙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영적 열매를 맺기 위해 할 일이 있다. 첫째는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 붙어 있어서 항상 예수님으로부터 물과 양분을 공급 받아야 한다. 영적 호흡인 기도와 영적 양식인 말씀을 떠나서는 살 수도 없고, 열매도 맺을 수 없다. 둘째는 요한 15:2에 보면 가지치기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가지치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했다. 헬라어로 “카다이로”, 영어로 pruning이라는 말을 쓴다. 짤라내어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무슨 나무든지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관상용도 과수용도 다 가지치기를 안 하면 나무를 버린다. 가지치기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버려 양분이 낭비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열매를 맺되 양질의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작은 열매가 많이 맺으면 양분이 분산되어 양질의 과일을 수확하기 어렵다. 열매가 많이 열리는 것보다는 숫자가 적을 지라도 좋은 열매를 많이 맺게 하기 위하여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다. 농부는 전정가위를 쓰지만 우리 신자들은 말씀 가위로 가지치기를 한다. 요사이 말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말씀으로 내용 없이 인생을 허비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드신 세상에 여호와의 도를 통한 공의와 정의를 세워 사랑과 평화가 있는 세상을 이루시길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 가지 된 인간들은 그가 보내신 참포도나무, 예수께 접을 붙여 영혼의 호흡을 하고 생명의 양식을 먹음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도 가지치기가 필요하고, 우리 개개인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여호와의 도에 맞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잘라내고 버려야 한다. 전정가위가 녹이 슬고, 무디어지면 가지치기를 제대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말의 비전은 열매 맺는 세상, 공의와 정의가 있는 사랑과 평화의 세상, 곧 하나님의 말씀과 여호와의 도를 통하여 깨끗케 된 새하늘과 새땅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10-1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3
    예수께서는 복음 사역을 시작하며 열두 제자들을 불러 세우셨다. 그리고 자신이 성령의 권능으로 악령의 우두머리, 바알세불을 내쫓은 분이며, 그를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자신의 가족이라고 선언하시며, 제자들을 그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신다. 이어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치셨다. 바쁜 시간을 보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시려고 배를 타셨다.항해 중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폭풍이 몰아쳐 예수님 일행을 태운 배는 파도가 몰아치고 배에 물이 차올라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이 상황을 제자들은 자기들이 죽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 죽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자기들을 돌봐주시지 않는다고 말한다(38). 죽음의 파도가 몰려오는 이 상황 속에서 두렵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폭풍이 몰아칠 것을 예상했다면 배를 타지 않았을 것이고, 꼭 배를 타야할 상황이라면 이를 대비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폭풍이라는 것을 당시 사람들이 예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예기치 않게 갑자기 사람을 죽음의 코너로 몰아넣는 이 상황은 우리들이 일상 겪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갑자기 몰아치는 태풍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온통 마음이 얼어붙고, 우리의 두뇌 활동이 마비되어 꼼짝할 수가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구렁이 앞에 떨고 있는 쥐새끼와 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비상시에 더 정신을 차려야 살아남을 수가 있다. 정신을 놓으면 게임은 끝나는 것이다.폭풍이 몰아치자 제자들은 두려운 가운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다. 그들은 예수께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 불평을 털어 놓는다.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라고 말한다. 그러자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다. 이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선생님”(διδα、σκαλοV) 이라고 부른다. “주” (The Lord) 라는 말을 쓴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주여! 우리를 살려주십시오.” 라든지 “선생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청했어야 할 자들이, 왜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십니까? 라고 도와주지 않는 선생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다. 결국은 예수께서 이들을 살려 주시기는 했지만 예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노를 젖거나 배에 차오르는 물을 함께 퍼주시기를 기대한 것이지 바람과 바다를 꾸짖고(ε’πιτιμα、ω) 잔잔하게 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상상을 초월한 지혜와 능력으로 자연을 다스리시는 창조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제자들의 상상을 초월한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우리의 경우도 그렇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잘 모른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만 천지창조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별로 실감있게 믿지를 못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태풍이 몰려오면 예수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부모나 가까운 형제, 친구, 오빠를 먼저 찾기 마련이다. 예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이 태풍 속에서 나를 건져 주시리리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설령 생각이 난다 할지라도 이처럼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할 만큼 큰 기적을 내게 가져다 주리라고 기대하지 못한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항상 피상적으로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성경 이야기를 좀 아는 수준이지, 그것이 내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이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머릿속의 위기 대처 프로그람 속에 예수님이 빠져 있는 것이다. 설령 성능이 좋은 프로그람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작동시킬 방법이 서툴거나 우선순위가 틀려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내 곁에 게시지만 예수님은 주무시고, 나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지냈지만 예수님을 정확하게 잘 모른 것 같다. 예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해주셨으면 제자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르며 만세를 부르면서 배가 뒤집힐 만큼 높이 뛰며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배 안이 오히려 적막하다. 그들에게 두려움, 아니 무서움이 엄습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들이 말했다. “도대체 이 분이 누구이시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복종하는가?” 본문의 상황을 보면 제자들은 폭풍이 몰려올 때보다 더 큰 두려움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제자들은 폭풍도 두려웠지만 예수님도 두려운 것이다. 이들은 온통 두려움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제자들은 죽게 되었어도 두렵고, 살려놔도 두렵다. 그렇다면 이들이 두려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신다(40).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신다. 하나님을 믿어도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없으면 인생은 항상 두려운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을 불안한 존재로 인식한다. 삶 그 자체가 불안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고, 구원자가 없는 인생들에게는 무엇을 해도 두려울 수밖에 없다. 내일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일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내일 전쟁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내일 우리 자식이나 가족들에게 무슨 변이 생기는 것이 아닌지? 나도 암에 걸리는 것이 아닌지? 등등 이런 확실치 않는 정체불명의 불안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살다 보면 어떤 때는 가슴이 뛰고 숨이 막혀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믿음을 갖고 교회 생활에 충실해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면 불신자와 다를 바 없이 인생은 불안하기 마련이다.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태풍이 불고 역풍이 분다. 이때 예수님께 대한 바르고 깊은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해 주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내 마음 속에 예수님이 자리 잡고 계시지 않으면 예수께서 내 옆에 계시고, 내 옆에 누워 계셔도, 불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해야 한다. 그보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말씀이 내 안에 거해야 한다. 내 속에 바알세불이 있어도 안 되고, 가시덤불이 차 있어도 안 된다. 말씀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해야 이런 불안의 씨, 태풍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마가가 이 사건 앞에 바알세불 문제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언급한 것은 바로 성령과 말씀을 통한 예수님과의 동행을 말하고 싶은 목적이 있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과의 동행은 예수님과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폭풍 속에 주무시는 예수님과 함께 잠이 들 수 있는 사람이 진정 불안의 문제를 이긴 사람이다. 폭퐁 속에 잠을 못 자고 제자들처럼 아우성치는 사람은 몸은 예수님과 함께 한 배를 타고 예수님 곁에 있어도, 그 속마음은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다 깊고 성숙한 믿음과 불안을 초월한 동행을 원하신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9-0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2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 분이다. 특히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는 분이다. 신령한 복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엡 1:5).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셔서 그의 아들을 삼으셨다는 말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고대 근동 세계의 신들처럼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그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아들 삼으셨다는 것은 설명이 많이 필요한 대목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만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도 그의 아들이라고 부르신다. 이 경우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혹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고대 근동의 입양관계를 빌어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자식이 없을 경우 자기가 부리는 노예나 마음에 드는 노예를 사서 자기의 아들 삼는 풍습이 있었다. 노예에게 신분을 바꾸어 주고, 자기 이름을 따라 부르게 해주고, 자기의 가문의 유산을 상속받게 해주었다. 입양아는 그의 양부모 노경의 봉양자요, 양부모가 죽었을 때에 장례를 치러주고, 대신 양부모의 재산 상속자가 되었다. 아들을 입양할 때에는 입양 계약서를 썼으나 입양을 철회하는 경우에는 다시 노예의 신분으로 돌려 보냈다.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실제로 입양이 행해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나 입양 풍습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은유 관계를 통해서 설명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로 있을 때에, 바로의 장자와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희생시키고, 이스라엘을 바로로부터 해방시키시고, 그의 아들로 삼으신다. 출애굽기 4장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맏아들이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시내 산으로 데려와 언약을 맺으시는데, 이 언약식이 마치 입양 문서를 작성하고 도장을 찍어 계약을 맺는 입양식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기업의 백성,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업의 땅, 혹은 유업의 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 노릇을 잘 하지 못하였다. 결국 그 땅에서 쫓겨나 바벨로니아의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구출하여 그에게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킨다. 이렇게 한 민족의 역사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은유하고 이해하는 경우는 아마도 세계 역사 어느 민족에게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자 관계는 일종의 모형적 사건이며, 그 실상은 앞으로 다가올 신약시대의 새 이스라엘, 기독교 신자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서 죄와 죽음의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가? 어떻게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반역하여 죄와 죽음의 종노릇을 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신다. 그것은 창세전에 예비하고,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으로, 그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의 아들로 삼으려는 것이었다(엡 1:3-14).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처녀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그에게 죽음으로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살리심으로 아담의 모든 죄 값을 온전히 치렀다는 것을 확증하시고 죄와 죽음의 굴레를 벗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아들을 희생하여 이스라엘을 노예로부터 해방시키셨듯이, 그의 아들 예수님을 희생시켜 우리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왕노릇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제는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왕노릇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었다. 그러면 아담 안에서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에 있던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새로운 세상의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옛 아담을 대신하여 그의 아들, 예수께서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만물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심으로 그들이 더 이상 죄와 죽음의 굴레를 쓰고 살지 못하게 하셨다. 죄 값을 치뤘기 때문에 죄는 죄인에게 더 이상 죽음의 권세를 휘두르며 목숨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아담과 연대성 아래 있던 모든 만물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새 아담,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죄가 더 이상 죄인을 죽음으로 가두어 둘 수 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아담의 범죄에 대한 완전한 속죄에 대한 증거이고, 표징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속죄가 완전하지 못한 것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거짓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4에는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셔서 권능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선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이 되셨고, 죄와 죽음이 없는 새하늘과 새땅의 새로운 통치자, 새로운 왕이 되셨다. 그래서 골 1:13에서 바울은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 (βασιλει、α του˜ υι、ου˜)로 옮기셨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아래서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된 백성들을 구출하여 새 아담인 자신과 언약적 연대성을 맺어 그의 왕국의 백성을 모으려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치 암탉이 자기의 날개 아래 병아리를 모으듯이 그의 백성을 모으려 했다고 하셨는데(마 23:37), 이제 그의 백성을 그의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모으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새언약을 세우시고(눅 22:20),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언약을 종결하셨다. 그의 새 나라의 건국이 선포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예수님 나라의 새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도중에 베드로가 예수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고백했듯이 새로운 왕 앞에 충성을 맹세하면 된다. 우리가 이 신앙고백을 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의 연대성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존재가 되는 것이며, 이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우리는 세례를 받고, 그 순간에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도장을 찍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연합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성경은 성령을 가리켜 “그 아들의 영”(갈 4:6), “양자의 영”(롬 8:15)이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이 양자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한다고 했다(롬 8:16; 갈 4:6).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다(눅 11:2).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요 1:12).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 나게 하신 것은 우리로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갈 4:4~5). 그리고 계속해서 아들이면 상속자라고 했다. “너희는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속에 보내셔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그러므로 너는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들이다. 아들이면 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상속자이다.”(갈 4:6-7). 그리고 로마서 8장 17절에는 “자녀이면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으시고 왕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왕이 되고 왕노릇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창세전부터 예비된 나라이고, 그 나라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상속해 주시기 위하여 세우신 나라이다(마 25:34). 누가 복음에는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12:32)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골로새서 1장13절에는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하고 있다.우리 같은 죄악되고 비참한 인생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상속자가 되어 그의 왕국을 다스리는 왕노릇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고, 영광인지 헤아릴 수 없다. 우리는 이 신령한 복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자녀이면 또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다.”(롬 8:17).라는 권면의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생철학과 도덕과 윤리가 있어야 한다. 바람에 나는 겨처럼 시류에 따라 사는 사람들과 살다보면 고난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고난을 이겨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8-2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21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6일동안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는 일을 하시고 제7일에는 안식하셨다. 하나님은 창조활동을 마치시고 안식하시는 신이다. 뿐만 아니라 제7일에는 그가 만드신 사람 사람은 물론 모든 만물에게 쉼을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노동과 안식과 결혼을 창조시에 사람이 지켜야 할 규정으로 세우셨다. 우리는 이것을 창조규정 (Creation Ordinance)라고 칭한다. 사람은 일해야 할 존재이고, 일을 하면 쉬어야 하는 존재이고, 가정을 세우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남녀노소, 종족과 나라, 종교와 이념을 초월하여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피조물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정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쉴만한 여유가 없다. 눈코 뜰 시간이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진정한 쉼의 세계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쉼이란 노동을 전제한 말이다. 일하지 않는 자에게 쉼이 필요할 리가 없다. 사람은 창조시부터 땀을 흘리고 노동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반역한 후에는 전보다 더욱 수고하여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창세기 3장 17절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 동안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다음 절에는 “네 얼굴에 땀을 흘려 음식을 먹을 것이다.”라고 부연하여 말씀하신다. 먹고 사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수고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이차본”()을 번역한 것인데,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내린 저주의 말씀 가운데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때의 “고통”이라는 말과 같다. NET 나 NIV 에서는 “painful toil” (아픈, 혹은 괴로운 수고, 고통스러운 노동)이라고 번역했고, KJV에서는 “슬픔 가운데”(in sorrow) 라고 번역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는 잉태하고 출산하는 고통을, 남자에게는 땀 흘려 일하는 고통을 주신 것이다. 먹고 사는 일이 고생 정도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다. 노동이 괴롭고 아프고 슬픈 것이 되었다. 죄로 말미암은 인생살이가 고통스럽고 슬프고 힘든 것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피곤하고 병들게 되었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다 보면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사람은 육체와 정신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이 있다. 내가 죄를 짓고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과 함께 교제를 할 수 없다. 내 안에 있는 죄가 내 마음을 짓누르고, 내 양심을 괴롭히기 때문에, 심령이 메말라 가 마음에 평안이 없다.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다. 찬송가는 울리는 꾕가리 소리 같다. 기도를 하려고 해도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주님의 일이 나를 오히려 피곤하게 한다. 영적인 탈진 상태에 빠지게 한다. 마치 바알 선지자들과 사활을 건 전투를 마친 엘리야처럼 오히려 하나님께 죽음을 청하는 것처럼 맥이 빠져버린다. 우리 인생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피곤한 존재들이다. 전도서 1:8에는 솔로몬은 만물이 피곤한 것을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솔론몬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1:1). 또 2장 23절에는 평생을 수고하여도 근심과 고통 뿐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인생이 헛되다고 말한다. 모든 만물에게 쉼이 필요한 세상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피곤한 만물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시고, 새로운 힘, energy를 충전시켜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들에게도 쉼을 주신다. 6일 동안 일하고 제7일에는 안식하라고 명하신다(출 20:9-11).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의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먼저 쉬셨듯이 7일 째 안식일에는 모든 그의 피조물에게 쉬라고 명하신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40년 동안 광야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을 시키셨다. 안식일에는 아예 만나를 내려주지 않았다. 양식 창고의 문을 닫으시고, 식당문도 닫은 것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생명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듯이 우리 사람들도 우리의 생업으로부터 쉬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생리적으로 먹고, 일하고, 잠 자고, 쉬는 사이클을 가진 생명체로 창조하셨다. 그래야 새로운 생명력이 재충전되고, 새 힘을 가지고 활력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일하느라고 밥을 제 때에 못 먹는 사람, UTube 보며 밤새거나 일이 많아 잠을 못자는 사람, 다 하나님이 만드신 life cycle을 자기 좋을 대로 조작해서 결국은 자신을 망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육체는 강철이 아니고, 우리의 두뇌는 컴퓨터의 software가 아니다. 가장 쉽게 망가지기 쉬운 유기체이다. 한번 뇌세포에 변형이 일어나면 회복이 쉽지 않고 결국 미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일에 빠져서는 안 되고, “중지”할 줄을 알아야 하고, 쉴 줄을 알아야 한다.시편 23:1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노래한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안식”으로 부르신다. 예수깨서는 우리 인생들을 다 수고 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로 부르신다. 우리는 고통스럽게 일하고 무거운 죄짐을 진 자들이다. 사람이란 다 지겟꾼이다. 빵의 짐과 죄의 짐을 지고 힘겹고 고통스럽게 나그네 길을 가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빵의 짐을 내려 놓을 수 없고, 한 번 지게 된 죄의 짐은 내려놓을 길이 없어 발버둥을 친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 지겟 짐을 져 주시겠다고 우리를 부르신다.예수께서는 우리가 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신다.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에 안식을 얻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멍에를 매는 것이다. 멍에는 농부들이 논밭을 갈 때나 달구지를 사용할 때, 소들의 목에 메는 막대기나 기구이다. 우리나라의 쟁기나 수레와는 달리 근동이나 동남아세아 지역에서는 두 마리의 소가 하나의 멍에를 매고 함께 쟁기질을 하거나 수레를 끌게 한다. 두 마리의 소를 한 멍에로 함께 목을 메어 놓았기 때문에 이들은 떨어질 수 없다. 함께 서고, 함께 걷고,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멍에는 서로 뗄 수 없는 연대성을 상징하는 말이다. “멍에”라는 말은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는 장치나 제도들 의미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되는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다.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우리 인간은 다 멍에를 메고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담과의 연대성 때문에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의 죄를 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형수, 아담의 가죽 죄수복을 입고, 아담과 함께 죄의 멍에를 지고, 비틀거리며 가는 농부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고 싶어서 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세움 받은 아담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말미암아 강제로 지워진 멍에, 곧 연대성 때문이다. 아담과 함께 아담의 멍에를 지고 사는 사람들, 곧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하시는 말씀을 보면 우리가 지고 있는 이 짐은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이다. 우리는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을 지고 버벅대고, 허우적거리며 힘든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께서 쉼을 주시겠다고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의 짐을 지고 바둥대며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새 아담, 예수님을 세워 그에게 우리의 모든 죄짐을 대신 지게 하셨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를 그에게 넘겨씌우셨다”고 했다. 또한 11절에는 “그가 자기 영혼을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할 것이니, 내 의로운 종이 그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하며, 또 그들의 죄를 친히 짊어질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종, 메시야가 사람들의 죄를 친히 짊어지셨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죄 짐을 지고,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부활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이 되셨다. 그 새 아담이 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그의 멍에는 그가 우리에게 지워주시는 짐이 아니다. 그의 멍에는 우리를 그와 함께 메는 띠, 곧 band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멍에를 매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걷고, 함께 쉬고,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이 예수께 묶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쟁기질을 하고 함께 달구지를 끌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두 멍에, 곧 옛 아담의 멍에와 새 아담의 멍에를 동시에 멜 수 없다. 그동안 메고 있던 아담의 멍에를 벗어야 새 아담, 예수님과 함께 하는 멍에를 멜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고 있던 빵의 짐과 죄의 짐을 끄는 옛 아담의 멍에를 벗겨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형수 아담에게 입히셨던 가죽을 벗기시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시고, 편하고 쉬운 예수님의 멍에를 우리가 함께 메게 하셔서 예수님과 동행하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안식, 하나님의 안식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므로 예수님과 함께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8-0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21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 사이에는 언약이라는 관계 안에서 권위와 질서가 있는 일종의 조직체이다. 위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다음에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인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는 만물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권위 체계를 우리 가정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남자로부터 여자를 만드시고 남자와 여자로 가정을 세우셨다.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살펴보면 여자의 창조는 창조의 climax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은 무에서 창조하셨지만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창세기 1-2장의 창조 기사의 막이 내린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는 가정을 그 목적지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정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정도 언약적 권위 체계와 질서를 가진 조직체로 만드신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한 세상을 그를 대신하여 다스릴 우두머리요 대리통치자로 아담을 세우셨듯이, 그가 세우신 가정에서도 남자를 머리로 한 가족을 이루게 하고 가정을 다스리는 책임자로 세우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가정은 아담을 머리로 혈연공동체이자 언약적 공동체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언약적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의 시작인 남편과 아내의 결혼이 바로 계약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1:3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니,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여자의 머리 는 남자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기를 원한다.”이 말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나 남자를 머리라 말하고 있는 데, 이들은 다같이 여러 지체를 가진 몸이라는 것을 전제한 말이다. 그리스도라는 몸에는 하나님이 머리이고 더불어 다른 지체가 있으며 남자는 그 지체중의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남자의 몸에는 그리스도가 머리이며 그 안에 여자를 비롯한 다른 지체들이 있다. 따라서 남자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머리가 되어 여러 지체를 가졌는데 여자는 그 지체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남자는 이중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동시에 여자의 머리이다. 남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만물의 일원인 동시에 자기를 머리로 하는 가정, 곧 가족의 우두머리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관계와 질서를 설명하기 위하여 고전 11:7에서 남자를 하나님의 형상이며 영광이라고 말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지상의 왕을 신의 형상이라고 지칭했다. 왕이 천상의 신을 대신하여 신민을 다스리는 자로 생각한 때문이다. 창세기 1:26-28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리는 대리통치자로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신다(시 8:6). 이와 같은 원리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바로 남자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의 우두머리요 대표자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가정을 다스리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형상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오히려 남자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여자가 있으므로 남자가 영광스럽게 된다는 뜻이다. 성경애서 다스린다는 의미는 섬기다는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 남자는 가정의 우두머리요 하나님 앞에서 가정의 대표자로서 가정를 지키고, 보호하고, 가족들을 부양하고, 돌보는 자이다. 남자는 하나님 앞에서 가정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 가정 예배를 인도하며,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이다. 이러한 모든 일은 여자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고, 그래서 여자를 종을 부리듯이 부려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 또한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 ... 그러나 주 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또한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또한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 님께로 부터 났다.” (고전 11:8-12)이 말씀의 의미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힘의 우열아나 서열을 논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정은 혈연으로 맺어진 유기체이자 언약을 통하여 세워진 언약공동채로 하나님께서 새우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님 앞에서 머리가 있어야 하고 대표자가 있어야 한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고, 가족의 구성원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다 동등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서 가정의 대표자가 될 수는 없다. 여자가 없는 데 남자가 대표자가 될 수도 없고, 가정과 가족이 성립될 수도 없다. 우리 몸의 모든 지체가 다 각각의 역할이 있고 필요하듯이 가정에도 역할이 있고 필요가 있다. 우리 몸에 얼굴이 있듯이 남자는 가정이라는 몸의 얼굴이다.이상을 살펴볼 때 가정은 언약적 체계를 갖추고 위계적인 질서가 있는 일종의 유기체적 성격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가정은 하나님 앞에서 온 가족이 아버지를 머리로 하는 언약적 연대성을 가진 운명 공동체이다. 가정은 하나님의 소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을 그의 형상대로 세우셔서 그를 대신한 만물의 왕으로 세우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창조하시고 남편을 가정의 왕으로 세우시고 가족들을 섬기는 대표자의 사명을 맡기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상에 하나님-사람-만물 사이에 질서가 있듯이 가정에도 하나님-남편-가족이라는 질서가 있다. 가정의 질서는 절대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바로 이 질서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에게 “네 하나님이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가 주신 땅에서 그의 생명이 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다. 그래서 성경은 이 땅을 “기업의 땅,” 혹은 “유업의 땅”이라고 칭한다..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자 관계로 전제하는 말이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고 시내 산에 언약을 맺었다. 이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양자 삼으시고, 이들에게 가나안 땅을 아들에게 주시는 유산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시내 산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왕과 백성의 관계, 혹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이해하고 해석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한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에브라임은 내 아들, 내 장자이다. 내 아들을 보내라.” 고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여호와께서는 고대 근동 사람들이 자식이 없을 경우 노예들을 양자로 삼고 입양언약을 맺는 풍습을 빌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 내어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시는 데, 이것을 일종의 입양 언약으로 비유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유산으로 주셨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기업의 백성, 이들에게 주신 땅을 기업의 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에서, 무엇보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야 할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오래 복스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자이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입양 관계를 철회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결국은 망했다.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에게 망한 이스라엘은 포로가 되어 이스라엘 땅에서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그들이 살던 땅을 빼앗기게 되었다. 물론 이스라엘의 이 비극적인 멸망을 부모를 공경하지 못한 때문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말하자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시내산 언약이고, 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는 것이며, 그 경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아내서 결국 그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열 개 중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십계명의 두 부분, 즉 1-4계명은 하나님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5-10계명은 이웃 사랑,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도리와 규범에 관한 계명이다. 윤리와 도덕에 관한 계명이다. 십계명은 1-4계명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5-10 계명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 부모 공경에는 사람과의 관계, 곧 도덕과 윤리를 다루는 계명에 있어서 첫 번째 계명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관계성이 부모와의 관계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에베소 6:2에서 바울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것이 인간인데, 이 땅이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한된 시간 안에 이 땅에서 살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이 땅에서 장수하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부모는 부모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다. 부모이기 때문에 순종하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바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식된 도리이다. 아무리 부모가 마음에 안 들고, 부족하고, 부끄러운 짓을 많이 할지라도, 부모를 무시하고, 멀리하는 자는 그 생명이 길지 못한다. 부모를 무시하고 멀리하는 사람치고 잘 되는 사람 없다. 부모를 공경하고 공양하라는 가르침은 삼강오륜에서도 가르치는 윤리의 대 강령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함은 그의 아버지 노아를 욕되게 한 사람이다.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다. 사사시대의 이방 여자 룻은 오갈 데 없는 그의 시모, 룻을 죽기 까지 따라서 나서서 남의 밭에 나가서 이삭을 줍고, 일꾼들이 먹다 남은 밥을 얻어와 시모를 공양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보아스라는 남편을 주시고, 그의 후손 가운데 다윗이 나왔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그의 제자 요한에게 부탁했다. 그의 공생애를 마치며 최후로 하신 일, 그의 사역 (His last ministry)이 그의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었다. 고령화 사회, 노령의 인구가 급팽창하는 한국 사회에서 노인 복지 문제는 심각하다. 우리 기독교인은 성경에 나오는 선배들의 부모 사랑을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한다. 늙은 부모를 양노원에 보내고 그 비용을 부담한 것이 부모 공경의 전부는 아니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7-1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20
    요한복음 10장은 9장의 연속이다. 안식일에 자기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끈질지게 주장한 사람을 출교한 바리새인들을 오히려 그들이 소경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예수께서는 이제 그들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목자가 아니라 강도요, 절도요, 도적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참 목자가 누구인가를 가르치신다. 고대 근동 세계의 사람들은 거의가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양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아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고대의 대 제국의 통치자들은 자기를 가리켜 “목자”로 칭한다. 바빌로니아 제1왕조 6대왕(1792-1750 BC)이었던 함무라비는 그의 법전 서문을 “엔릴의 부름을 받은 목자, 나 함무라비는 부요함과 풍성함을 다같이 모으며...”라고 시작한다. 또한 법전 후기에도 “나는 진실로 평화를 가져오는 목자”라고 쓰고 있다. 함무라비 이전에 우륵의 왕, 엔메르카르, 라가쉬의 엔시, 세계 최고 오래된 법전을 만든 우루-남무, 이쉰의 리피트 이쉬탈 등도 다 자기를 목자로 칭하고 있다. 심지어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디그랏 빌리셀, 아수르 바니팔, 에사르하돈, 앗수르 바니팔 등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누비던 왕들이 다 자기를 “목자”라고 부른다. 이집트의 아멘호텝 3세(1411-1374)도 자신을 “선한 목자요 모든 백성을 위하여 불침번을 서는 자”라고 칭하고, 세티 1세(1313-1292)는 “선한 목자요, 그의 군사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왕들이 자기를 목자에 비유하는 것은 아마도 목자의 역할과 왕의 역할의 유사성 때문인 것 같다. 양들은 물과 목초와 그들을 지켜주는 목자가 필요한 존재이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이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그들을 지켜 보호해줄 왕이 필요한 존재이다. 따라서 왕들은 그의 백성들이 쉽게 잘 이해할 수 있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하여, 왕과 백성의 관계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한 것이다.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은유의 대상이 다르다. 양떼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자기 소유의 양떼들을 위하여 정치지도자나 종교지도자들을 그의 목자로 고용하여 그들을 먹이고, 돌보며, 보호하고, 지키도록 양떼를 맡기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자기 살기 위하여 오히려 양떼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며, 유기하고, 흩어버렸다. 양들이 흩어지면 당장 포식자들의 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책임한 목자들을 하나님은 삯군 목자요, 강도요, 절도요, 도적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들로부터 목자의 직분을 빼앗고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시겠다고 선언하신다(겔 3:10). 겔 34:15-16에 보면 “내가 내 양을 치며, 내가 그들을 눕게 할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 내가 그 잃어버린 것을 찾으며, 그 흩어진 것들을 돌아오게 하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며, 병든 것을 강하게 할 것이며 ... 정의로 그들을 먹일 것이다.”라고 선언하신다. 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목자가 되시겠다는 것이다. 영역본 ESV나 한글판 개역에서는 “양을 치다”는 동사를 명사형으로 바꾸어 “내가 내양의 목자가 되며”(I myself will be the shepherd of my sheep)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다윗을 목자로 주신다는 약속을 하신다. “내가 그들을 먹이는 한 목자, 곧 내 종, 다윗을 그들 위에 세울 것이니,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는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가운에 지도자가 될 것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겔 34:23-24)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다윗을 목자로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다윗은 에스겔보다 이미 500년 전에 유다 나라의 왕으로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다윗은 실제로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사울을 이은 2대 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목자”라는 의미라고 할 것이다. 다윗은 어떠한 목자였기에 다윗과 같은 목자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사무엘 상 17장을 보면 소년 다윗이 사울 왕 앞에 나가서 자기가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우겠다고 자청하며, 자기가 어떠한 목동이였는가를 진술한다(17:34-37). 다윗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비록 아비의 양을 치는 목동에 불과 했지만 그가 맡은 양 치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아비의 양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거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정신과 책임감과 열정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골리앗을 타도하도록 일어나게 하였으며, 결국 그는 목숨을 걸고 도저히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은 골리앗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워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양떼들을 보호하고 지켰다. 아버지의 양떼를 맹수들로부터 지킨 사람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백성을 골리앗으로부터 지켰다.뿐만 아니라 사울이 놉의 제사장 85명을 죽이고 계속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하자 그는 아둘람 굴로 피난 갔는데, 이때에 다윗은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도망다니며 떠돌이가 된 400명 가량의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계속 생사를 같이한 동역자드로 삼았다(삼상 22:1-2). 세상에서 발붙이기 어려운 인생들을 받아주고 안아주고 생사의 고락을 함께 나누는 목자였다. 올데 갈 데가 없는 인생들을 받아 주고, 품에 안아, 상처를 싸매고 위로하며,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생명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였으며, 세상에서 쫓겨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도망 다니는 인생들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어 이들을 살리는 일을 했다. 참으로 위대한 목자였다.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러한 다윗과 같은 목자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을 향하여 “너희는 내 양떼 곧 초장의 양떼이다. 너희는 사람이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겔 34:31). 언젠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목자가 되시고, 또한 다윗과 같은 사람을 목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하나님,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과 같은 사람을 목자로 주셔서 그의 백성을 모으고, 먹이고, 돌보고, 지키고, 인도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대 근동세계의 목자에 대한 문화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이제 요한복음 9장에 이어 10장을 살펴보아야 한다.예수께서는 10장 서두에 아주 직설적으로 자기가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를 비교하신다. 삯군 목자는 절도요 강도요 도둑들이라서 양들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파괴할 뿐 아니라 포식자들이 나타나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 도망간다는 것이다. 양떼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둘째 치고, 책임감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양들은 다만 자기들이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떼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이다. 삯군들은 양들을 이용하여 자기 살 길을 찾는 자들이지만, 선한 목자는 자기를 희생하여 양떼들을 살리는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치 다윗이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사자와 곰들과 싸우고, 골리앗과도 싸운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도 내 목숨을 빼앗지 못하나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어 놓는다. 나는 목숨을 내어놓을 권세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18). 이 세상에 자기 목숨을 내놓을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선한 목자이고, 자기의 목숨을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내놓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세를 자신이 가졌음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 자신과 같은 신적인 목자,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과 같은 인간 목자를 보내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바로 예수께서 그 약속의 하나님-목자임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목자이시다. 양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시는 하나님, 곧 선한 목자이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선언하신다. 예수께서는 에스겔서 34장을 배경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목자 하나님-다윗과 같은 목자가 바로 자신임을 목숨을 걸고 맹인을 고쳐주심으로 증명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다윗과 같은 목자이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신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10:30).예수께서는 맹인을 고쳐주심으로 그가 천지창조의 권능을 가진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시고, 출교 당한 그를 찾아가 그를 그의 제자로 받아 주심으로 그가 바리새인들과 다른 선한 목자이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는데 나는 그들도 인도해야 한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고 한 목자 밑에서 한 떼가 될 것이다.”(16). 이 말씀은 예수께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받아 선한 목자 예수님의 우리 안에 함께 들어와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이방인들의 전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그에게 그의 양을 치도록 목자로 세우신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목자가 되라는 부탁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그만큼 간절하게 부탁하신 것이다. 결국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님처럼 목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양들, 장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마지못하여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며, ....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어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벧전 5:2-4)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목자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목자장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양을 치는 목자가 되라고 명하셨고, 이제 베드로는 그의 양들에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이제 목자가 되어야할 차례이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가 주신 명령이 그의 양을 치라는 것이다. 이 명령은 우리가 순종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의 우리 안에 들어있는 양이라면 나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6-2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19
    예수님의 제자들이 맹인으로 태어나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을 만나 “랍비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입니까?”라고 묻는다. 제자들의 질문은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죄 때문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죄가 누구 때문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지은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려는 것이다.”(3)고 대답하신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 사람이 죄 때문에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하여 그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한다는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고귀한 뜻을 가지고 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예수님의 이 대답은 이 문제 많은 인생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며 진리의 말씀인가? 제자들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죄 가운데 태어났다면 우리는 참으로 비참하기 그지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고,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고 하셨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뜻 없이 하실 리가 없고, 창조의 과정 가운데 실수나 하자가 있을 수 없다. 창세기 말씀대로 우리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준비와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 아무리 맹인이라 할지라도 어머니 뱃속에서 열달이 차야 출산한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가르친다.“우리는 그분의 피조물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어 우리로 그것들 가운데 행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2:10)이 말씀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미리 정하시어 우리가 그 선한 뜻 가운데 살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우리 개개인을 위한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다. 그 뜻은 갑작스럽게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만들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따라 살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뜻 없이 태어난 자는 없다. 의미 없이 이 세상에 내 던져진 사람은 없다. 태어 나서는 안 될 사람이 태어난 경우도 없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이고, 우리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셨다. 눈이 안 보이고, 쌍꺼풀이 없고, 코가 낮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다 지으시고 기뻐하신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가 알아서 세상을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시지도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이 선을 이루도록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또한 이렇게 가르칩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롬 8:28)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서로 합력하여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비록 내가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괴로운 인생을 살지라도 그것은 선을 이루기 위한 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어떤 일은 우리에게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고, 어떤 일은 꼭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우리가 보기에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결국 선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바냐 3:5에는 “하나님은 실패하시지 않는다”(God never fails, , lo ne‘dal) 라고 말하고 있으며, 한글 역본에서는 (Πι’στοV ’Ο θε、οV,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를 영역본에서는 “God never fails”로 많이 번역하고 있다(고전 1:11; 고후 1:18; 수 21:45; 신 7:9). 우리 신자들은 이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는 실패라는 것이 없다. 그런데 요한 9장에 나오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확실한 신앙이 없었던 것같고, 더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맹인을 고치셨기 때문에, 선지자일 리가 없고, 오히려 죄인이라고 말하고(25), 또한 예수께서 고친 이 맹인이었던 사람이 이제 눈을 뜨고 보고 걸어다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가리켜 “네가 전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34)고 책망한다. 이들이 보기에는 안식일을 안 지키는 예수님도 죄인이고, 맹인이었던 자는 아예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고 선언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잘 못이나 불행에 대하여 그들의 부모를 탓하는 경우가 많다. 시편 51편에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회개하는 시를 쓴 가운데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말한다. 마치 자기 부모들이 몹쓸 짓을 하여 자기가 태어났고, 자기 어머니 때문에 자기가 죄를 지은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의 본문을 살펴보면 번역상 문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죄악 중에” 혹은 “죄 중에”라고 할 때 사용되는 히브리어 비분리 전치사 “벳”()은 시간의 진행 과정을 묘사하는 의미도 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정점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대개의 영역본에서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악하였고, 내가 잉태할 때부터 죄가 있었습니다”(Surely I was sinful at birth, sinful from the time my mother conceived me. NIV) 혹은 “내가 출생할 때부터 죄가 있으며, 내 어머니가 나를 잉태한 순간부터 죄인이었습니다.”(I was guilty of sin from birth, a sinner the moment my mother conceived me. NET)라고 번역하고 있다. “가운데”라는 말을 쓰지 않고, “때” 혹은 “순간”이라는 의미로 번역하여 그의 모친의 행동과 자신와 죄인 됨의 연관성을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기가 언제부터 죄인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자기는 이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 말하자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기의 생명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과정과 경로를 통해서 출생하게 되었느냐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잉태와 출생 때부터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잉태할 때도 죄가 있었고, 그가 출생할 때도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가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서 죄인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칫하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아담의 연대성 안에서 계속 죄인을 양산하는 일을 하시는가? 하는 질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에서 말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라고 말한다. 이제 “아담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하게 만들어졌고, 선한 일을 하여, 결국 선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출생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임을 믿어야 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우리의 부모는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하나님께서 쓰신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어머니 뱃속에 내 생명의 씨를 심으시고, 때가 되어 그 생명이 싹을 트고 나와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게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우리 부모가 비난을 받거나 궁극적으로 책임 져야할 의무가 없다. 그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주장하시고, 인도 하시고,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게 하시는 것이다.맹인이었던 자는 그가 눈을 뜨기까지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은 일을 했다. 그가 창세 이후에 맹인으로 태어난 자의 눈을 뜨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9:32), 그는 이 세상에 그의 눈을 뜨게 해 줄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 같다. 어쩌면 그런 기대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까지 계속 자기는 죄인으로 알고 살아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가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라는 말씀과 더불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빛이다”(9:5)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의 마음 눈을 뜨게 한 것 같다. 그는 예수께서 그의 눈에 무엇을 발랐는지 알 리가 없었겠지만 그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실로암 못까지 가서 눈을 씻었다. 그리고 보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맹인으로 태어나 죄인 취급당하고,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세상 사람들의 잘못된 출생관을 바로 잡아 주셔서, 그들을 얽매고 있는 모든 어두운 운명의 사슬을 다 풀어주셨다. 그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씀해주시고, 소망을 심어주시고, “내가 맹인이었다”고 외치면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불어 넣어 주셨다.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의 육신의 눈도 뜨게 하셨다. 예수님은 운명과 율법에 억눌려 죄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빛과 자유를 주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6-0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18
    오순절애 성령세례를 받은 베드로는 새 술에 취했다고 자기들을 조롱하는 유대인들에게 자기들이 성령세례를 통하여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받았음을 설명하고, 이들에게 “성령의 선물”(δωρε、 του˜α′γι’ου πνευ’ματοV)을 받으라고 말했다(행 2:38). 새언약의 선지자요 하나님의 입으로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는데 그는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베드로는 분명히 성령세례와 성령의 선물을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40절에는 “이 사악한 세대에 구원을 받아라(σω、θητε).”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말하는 “성령의 선물”은 “성령세례”와 구별되는 “구원”을 의미하는 말이다. 중생을 포함한 영혼의 구원을 의미하는 말이다. 결코 그들을 향하여 지금 이 상황에서 선지자가 되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그런데 성경에는 “성령의 선물”과 유사한 말로 “(성령의) 은사”라는 말이 있다. 성령의 선물이라는 말을 쓸 때 헬라어 “도레아”(δωρεα)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라는 말을 쓸 때는 “카리스마”(Χαρισμα)를 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카리스마” 앞에는 “성령”을 붙이지 않는다. 그냥 “은사”이다. 영역본에서는 “성령의”라는 말이 없이 “gifts”(선물들, 은사들)로 복수를 사용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은사라는 말을 쓸 때 많은 경우 앞에 성령을 붙여 “성령의 은사”라고 말한다. 은사가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성령의 선물”과 “성령세례”, 그리고 “(성령의)은사”라는 말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어서 많은 혼돈을 야기 시키고 있다. 또한 서양의 역본들도 헬라어의 “도레아”와 “카리스마”를 다같이 “gifts”로 번역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도 혼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은사일 경우 복수를 쓰는 것은 좀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물론 이들도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물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경우는 분명 중생과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동시에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시대 이후 이러한 경우는 흔치 않는 일이다. 따라서 성령의 선물이라는 말은 성령세례를 포함한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한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은사” 곧 “카리스마”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위하여 특별한 사람에게 주시는 특별한 재능(talent)을 말한다.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특별한 재능을 주시는 데, 그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지식의 말씀을, 믿음을, 병 고치는 은사를, 기적 행함을, 예언을, 영들 분별함을, 방언을, 방언을 통역하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고, 이것을 통하여 성도들의 믿음이 견고해지고 성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은사 가운데 특별히 방언이 문제이다. 방언은 은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순절에 제자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인치는 데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셨다. 선지자들을 구약에서 “하나님의 입“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들의 입에 성령으로 도장을 찍고, 여러 나라 말을 넣어 주시어 각각 다른 나라 말을 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통역이 없이도 소통이 가능하게 하셨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를 비롯한 다른 교회에서 행한 방언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말(혹은 발성)을 하고, 통역이 필요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모조방언“(Counterfeit Tongue) , 혹은 ”유사방언“(Pseudo-tongue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성령세레의 증거로서의 방언, 엄격하게 말하면 ”언어“와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분명 다른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방언으로 말한다고 했다(고전 14:18). 그리고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했다(고전 14:39-30). 그러나 모든 것을 적절하게 하고 또 질서 있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몇 가지 지침을 주신다. 방언을 하려면 그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해야 하고, 조용한 곳에서 해야 하며, 교회 안에서 하려고 할 때는 많은 사람이 악을 쓰며 한꺼번에 시끄럽게 해서는 안 되며, 꼭 대중 앞에서 하기를 원할 경우 두 세 사람만 나와서 차례로 하되, 반드시 통역을 두라고 했다. 그러나 일부의 성도들은 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교회를 어지럽힌다. 방언이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기본 목적과 원리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전 14:12).우리는 오순절을 맞으며 성령의 선물, 성령세례, (성령의) 은사 등에 대해서 좀 더 정교한 설명과 이해가 필요함을 살펴보았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가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할 선지자적 사명을 부여받은 선지자들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 말씀대로 우리는 성령을 우리 뜻대로 부릴 수 없다. 우리가 오시라고 해서 오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가시라고 해서 가시는 분도 아니다. 성령은 그의 뜻대로 일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성령은 말씀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시다.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이 임하시고, 말씀이 머무는 곳에 성령이 머무시며,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일하신다. 따라서 성령이 일하게 하시려면 우리는 말씀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해야 한다. 말씀이 충만한 곳에 성령이 충만한 것이다(겔 3장). 내 속에 말씀이 충만해야 성령이 내 안을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며, 나를 충만하게 하신 성령이 나를 새롭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에 말씀이 충만해야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게 일어나고 교회가 부흥한다. 사도 바울이 본의 아니게 에베소를 떠나며 에베소 장로들에게 주시는 고별사는 항상 우리가 새겨야 할 말씀이다. “이제 나는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니, 그 말씀이 너희를 굳게 세우고 거룩함을 입은 모든 이들 가운데 너희에게 유업을 줄 것이다.”(행 20:32). 그는 그의 양떼들을 성령께 부탁한다고 말하지 않고, 말씀께 부탁한다고 말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5-2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17
    예수님 부활 후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이 “방언”을 하자, 유대인들이 그들을 새 술에 취했다고 희롱하였다. 이때에 베드로는 긴 연설을 통하여 자기들이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죽인 예수님을 살리시고, 그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자기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인증하는 성령의 도장을 찍으신 결과 그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다고 자신들을 변증한다. 자신들의 과오를 깨달은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향하여 “그러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탄식하며, 그들이 살길이 무엇인지 묻는다. 베드로는 이들에게 “회개하라. 그리고 너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각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령세례룰 받은 베드로는 이들에게 자기들처럼 성령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베드로가 받은 “성령세례”와 베드로가 말한 “성령의 선물”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선물, 성령세례, 나아가서 성령의 선물과 같이 쓰여 지고 있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확실한 상이점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성령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일을 하셨다. 창 1:2에 보면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감돌고 계셨으며,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일을 기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이루시는 일을 했다. 뿐만 아니라 아담의 범죄로 타락한 이 세상을 구원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일도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고, 결국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죄와 죽음 안에 가두어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 아담을 세워 아담의 죄 값을 그의 죽음으로 대신 치르게 하고 죄와 죽음의 권세에 갇혀 있는 만물을 해방시키고 구출하는 하신 것이다. 따라서 새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세상 역사에 있어서 옛 아담과 그의 나라의 종언(終焉)과 더불어 새 아담과 그의 나라의 개시(開始)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창조의 시작이며, 새 하늘과 새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새로운 백성을 모으는 시작이다. 새 언약의 발효점이다. 나라는 백성이다. 백성이 새로워져야 나라가 새로워지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새로워져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불 수 없다”(요한 3:3). 또한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고 선언하셨다. 여기서 물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물은 씻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물로 씻어주시고(요한 13), 15:3에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곧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다.”(벧전 1:23)고 가르치신다. 이들의 말씀에 따르면 물은 말씀이고, 말씀이 거듭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 곧 말씀과 성령이 하는 것이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이 임하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일하신다. 이 둘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성령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요한 3:8). 성령을 통한 거듭남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성령이 언제, 어디로부터 나에게 임하는 지 알 수 없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중생의 역사가 언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마치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얻을 때도 언제 임신이 되었으며, 언제 낳았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어머니가 우리가 낳았던 생일을 알려주어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중생을 성령세례와 동일시 할 수 없다. 성령은 우리가 중생하고, 성장하는 모든 과정을 주관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론이라고 할 때는 전통적으로 구원론을 의미한다. 성령이 예수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 놓은 구원을 우리 각각 개인에게 적용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성령은 우리 구원의 모든 과정을 주관한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예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그를 그의 백성으로 인증하는 성령의 도장을 찍으신다. 물세례이다. 물세례를 통하여 중생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가 된다(롬 6:3).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과 불가분리의 신비롭게 밀접한 관계에 들어가게 되며, 중생과 세례에 더불어 그리스도와의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는 우리의 신앙적 정체성을 확고하게 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서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복음 사업을 처음 시작하실 때, 물로 세례를 받으셨는데, 이때에 예수님 위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가리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사건을 예수님의 메사야로서의 취임식이라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복음 사역을 시작하며, 물세례를 받으셨으며,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했다.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따라서 물세례는 성령세례의 가시적인 예식(visible ceremony)이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새 아담이요, 하나님의 복음 사역의 일꾼, 곧 선지자로 인치시는 인증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지를 그의 백성들에게 대언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손을 예레미야(렘 1:9)나 이사야(사 6:7)의 입에 대어 그를 선지자로 세우고 인치시고, 그 선지자를 “여호와의 입”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점은 그의 공생애를 선지자로서 살으셨던 예수께서 부활 후 그의 제자들에게 선지자적 대사명을 주시고 인류 구원 사역을 맡기실 때도 같은 절차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족속에게 세례를 주고 그의 말씀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명령을 살펴보면 세례와 선지자적 직분을 연관시키신다(마 28:16-20; 행 1:5, 8; 2:3). 땅 끝까지 이르러 세상 끝 날까지 그의 말씀을 가르치려면 사도들을 이어 대대로 선지자를 세워야 한다. 따라서 세례를 주라는 말씀은 구원의 복음이 계속 전파되어야 한다는 점과 더불어 이 일을 위하여 선지자들이 계속 세워져야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명령임을 알 수 있다. 오순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불같이 갈라진 혀들이 제자들 위에 임하여 그들의 혀를 움직여 제자들은 성령이 그들에게 말하게 하시는 대로 각 나라 언어로 말을 했다.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중생한 신자들이다. 이들은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된 자들이요(요 15:3), 예수님의 친구들이다(요 15:15). 이들에게 더 이상 중생이 필요한 자들이 아니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중생과는 다르다.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입, 곧 새 언약의 선지자로 세우시는 위임식이다. 이 성령세례는 바로 물세례와 병행되는 것이다.이상을 정리해보면 물세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 세례의 가시적인 표현이다. 우리는 물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새 아담의 나라, 새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새언약의 선지자가 되어 구약성경의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하나님의 입”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세례를 받는 자는 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다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 연지골
    2019-05-1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