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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16
    2019년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 다가 왔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부활이 믿지 못하는 사람은 기독교인 아니다. 기독교 신자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살리셨다는 것을 믿는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쇠사를 묶여 있던 자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풀려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이야 말로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핵심이고 본질이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부활의 역사성과 부활이 주는 의미는 항상 새롭게 음미하고, 더욱 견고하게 믿고, 항상 부활의 정신과 능력으로 살아야 한다.예수님의 부활은 신화나 사람이 꾸며낸 허탄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훈련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비과학적이고 객관성이 결여된 주장이라고 말하며,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제자들이 죽은 그의 스승을 보고 싶어하는 동경심과 뜨거운 열정에서 우러나온 환상으로 돌리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되고, 예수님 본인이 생전에 말했고, 그의 사후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이미 충분히 확인된 사실이다. 예수님은 기절한 것이 아니라 죽었다. 군병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에 피가 쏟아진 것이 아니라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다(요 20:34). 물이 쏟아졌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미 완전히 목숨이 끊어졌고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로마 군병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묻혔다.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훔쳐갈까 염려하여 로마 사람들은 그의 무덤의 문을 인봉하고, 경비병이 그것을 지키게 하였다. 예수님은 잠깐 기절하신 것이 아니다. 식물인간이 된 것도 아니고 뇌사 상태에 빠진 것도 아니다. 분명 숨이 끊기고 심장이 멈췄다. 그리고 묻혔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직접 자신을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만지고, 함께 말하고, 먹고 마시는 가운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확인했다. 예수님은 또한 일시에 오백여명이 보는 가운데도 나타나셨는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던 당시에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이 꾸면 낸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만지고, 증거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우리 기독교의 대 전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고, 태초에 계신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을(creation out of nothing, creatio ex nihilo) 다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다. 권능의 하나님,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처녀가 어린 아이를 잉태할 수도 있을 것이요,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있을 것이고,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할 수도 있을 것이고, 홍해 바다를 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의 초자연적인 사건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의 신이다. 우리는 이러한 천지창조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부활은 죽음을 전제한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다. 사람은 다 죽는다. 그러나 죽음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사람의 죄 때문이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다(롬 6:23).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것은 하나님께 반역한 아담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다.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아담과 함께 죽음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을 세워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시고 모든 믿는 자를 새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묶어 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죄와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신 것이다. 바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아담을 오실 분의 모형이라고 했다(롬 5:14).하나님께서 새아담을 살리셨다. 죽기까지 순종한 새아담의 피를 아담의 죄 값으로 받으신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아담과 그의 언약적 연대성 가운데 있는 피조물들을 죄의 사슬로 묶어 둘 필요도 없었고, 묶어둘 이유도 없었다. 그들을 붙잡고 있는 죄와 죽음의 세력들로부터 그의 백성을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어야 옳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을 살려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아담을 대신한 새하늘과 새땅의 언약적 우두머리, 곧 새로운 왕이 되셨다. 마치 아담이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피조물의 왕이 되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을 통치하였듯이, 이제는 예수께서 새로운 왕이 되어 아담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왕이 된 것이다. 베드로는 그러한 의미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는 고백을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왕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왕으로 인정하고 고백한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함으로 이제 아담의 백성에서 새아담의 백성이 된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이다.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 안에서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여자의 후손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탄의 무기인 죽음을 파괴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더 이상 예수님과 예수님의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에게 그의 권세와 능력을 부릴 수 없게 죽음이라는 무기를 회수하고 무장해제시켰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우리의 육신을 벗어나 신령한 몸을 입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이제 부활 신앙으로 살아야한다. 우리 인생은 죽음이 결코 그 종착역이 아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가 살아있는 동안의 삶을 즐기려한다. 예수님 말씀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에 일생을 소비하고 동물이나 다름없는 삶을 연장하기 위하여 발버둥 친다.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것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철학이다. 그래서 세상을 마치 바람에 나는 겨처럼 시류를 따라 산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며 살고, 영원한 일을 계획하고 산다.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내일이 있고, 미래가 있고, 비전이 있다. 죽음으로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이 하루가 귀중하고,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며 뜻있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 신자들은 부활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은 결코 악이 승리하는 세상이 아니다. 마치 이 세상은 악이 승리하는 세상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선이 승리한다.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롬 8:28) 만일에 예수께서 나뭇가지를 든 저 악인들의 함성에 묻혀 십자가를 지고 처참한 죽음을 당했는데, 부활하지 못했다면 이 세상은 진정 악이 승리하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선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그가 이 세상을 공의와 정의로 심판하시고,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보여주셨다(히 9:27). 이 무질서한 세상에 도덕과 윤리를 세우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잠시 억울한 꼴을 당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바르게 살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활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기에 세상의 불의와 부정 앞에 비굴하게 타협하며, 눈치 보고 숨죽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와 진리와 사랑을 천명하고,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이라도 내놓으려고 하는 것이다.우리 한국의 신자들은 부활 신앙은 있어도 부활 정신으로 불의한 세상을 도전하는 부활 정신은 흐릿한 것 같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부활신앙과 부활정신으로 살 것을 요구하신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4-2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15
    요한복음 8장에 소개되는 사건은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이다.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유대인들이 죄를 지은 한 여인을 미끼로 데려다 놓고, 이 여인과 예수님을 동시에 죽이려고 손에 돌맹이를 들고 숨을 죽이며 바라보고 있다. 죽음이 온 세상을 짓누르고 있는 숨막히는 장면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저라.”(7)는 예수님의 이 한 마디의 말씀이 이 어둠을 뚫고 모든 사람들의 죽은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빛의 역할을 한다. 설교자들은 요한복음 8장을 설교 본문으로 택하고 설교를 할 때면 대개의 경우 이 사건을 배경으로 이 여자를 중심하여 설교를 많이 한다. 12-59절에 이르는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에 벌이고 있는 논쟁점을 다루는 것은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본문 자체도 길고, 이들이 벌이고 있는 논쟁점도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사건 자체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는 설교부분 (discourse)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한 여인을 살리는 사건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자신이 어둠을 비추는 “생명의 빛”이시오, 죄의 종노릇을 하는 인생들을 구원해주시는 “해방자”이시오, 죽은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한다.예수께서는 여기에 운집해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곧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결코 어두움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이다”(12)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죽이려고 돌을 들고 서 있는 이 장면을 “어두움”으로 표현하신다. 어둠이 덮여 있는 세상으로 보시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세상의 빛” 혹은 ”생명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죄를 짓고 끌려와 죽음을 기다리는 여인, 자신들도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없는 죄인임을 알지 못한 채, 온통 독선에 빠진 인간들이 득세한 세상, 온통 죽음을 부르는 세력들이 가득한 이 세상을, 예수님은 어둠이요, 밤으로 간주하신 것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과의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그가 주신 떡 조각을 받아먹고 그의 선생을 배반하여 팔려고 나갔을 때도 성경은 밤, 곧 어둠이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죽음에 갇혀 있고, 어둠에 묻혀 있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내가 곧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다(12).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서론에는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다. 그 빛이 어둠에 비쳤으나 어둠이 그 빛을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요한 1:4-5). 바로 이 말씀대로 이 세상은 어둠이다. 모든 사람들이 좌와 죽음에 갇혀 있고, 어둠에 묻혀 있다. 어둠 속에 있지만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어두움이다. 이러한 자에게는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날 때 비로서 자신이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죄인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비로소 그의 마비된 양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베드로도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을 뵈올 때 비로소 그가 입술이 부정하여 선지자가 될 수 없는 자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고, 우리 자신의 어두움을 비추시는 생명의 빛이시다.예수께서는 이어서 “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이며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보실 때 이 유대인들은 다 자유롭지 못한 자들, 곧 죄의 종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죄 가운데 죽을 자들이었다 24).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여자는 육신에 매인 자이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에 얽매인 자들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율법의 이름으로 처형하고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는 죄를 짓는 자는 모두 죄의 종이라고 선언하신다(34). 왜 죄 짓는 자를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이 세상에 죄를 짓고 싶어서 죄를 짓는 사람은 없다. 사람 속에 있는 죄가 사람이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충동질을 하는 것이다. 사람 속에서 죄를 짓도록 조종하는 자는 바로 마귀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의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 너희 아비의 욕망을 따라 행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안에 서 있지 않았으니 이는 진리가 그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자기 본성에서 말하는 것인데,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44)라고 가르치신다. 우리 속에서 우리를 조종하는 자가 마귀이며, 마귀는 본성적으로 거짓말쟁이며, 살인자라는 것이다. 아담에게 거짓말을 하고 아담을 죄짓게 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가 바로 마귀였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마귀에게서 낳은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짓고 싶지 않고, 선한 일을 하고 싶어도, 마귀가 조종하는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고, 죽을 수 밖애 없으므로 우리는 “죄의 종”이요 “마귀의 자식”인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비참한 상태를 한탄하며,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주겠는가?”(롬 7:24)하고 부르짖는 것이다.그러나 우리를 이 죄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킬 분이 위로부터 오셨다(23).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기에 그에게는 불가능이 없다(마 28:16).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의 세력하에 종노릇을 하는 자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감히 마귀가 우리 안에 들어와 왕노릇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36).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내 왕이 되시고, 내 안에 앉아 거하시면 마귀가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시는 문지기가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말씀으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다.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이며, 바로 말씀이 계시는 곳에 성령이 함께 거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이며,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롭고 싶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 안에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때에 성령께서 내 마음을 지켜주시고, 죄의 세력을 물리쳐 주실 것이다. 진리를 알아야 모든 얽매인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다음으로 37-59절의 말씀은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 죽음에 대한 논쟁이다. 사람이 죄의 종이 되면 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 기다라고 있다. 죄인의 종말은 죽음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면 그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51).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크게 반발한다. 아브라함도 죽었고, 선지자들도 다 죽었는데 예수께서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니 예수, 당신은 아브라함보다 위대한가? 도대체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묻는다. 예수께서는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의 날 보기를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57)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분명 아브라함보다 위대하며,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는 것이다(58). 아브라함이 그의 날 보기를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는 말은 아브라함도 죽음을 넘어 살아 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의 말이 맞다. 세상 사람들은 다 죽을 것이다.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마귀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 죄와 죽음의 굴레를 쓰고 살다가 결국 다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아담의 죄 값을 치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안에서 그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에 매여 죄를 짓고 끌려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한 여인을 말씀으로 살리시며, 그를 죽이고자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빛이시며, 참 자유를 주시는 해방자이시며,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설교하신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4-1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14
    하나님께서 오직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역사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삼자 모세의 형과 여동생이 모세를 비난하며 하는 말이다. 이들의 비난은 단순한 가족간의 문제가 이상의 깊은 신학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 220여일이 지난 후 비로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백성들이 만나만 먹으니 기력이 약해졌다고 울면서, 이집트에서 값없이 먹던 각종 생선과 채소를 생각하고, 고기를 달라고 울었다. 그들은 400년 동안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된 감격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이 이들에게는 사라졌다. 이들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당장 배가 고파 죽을 지경도 아니고 다만 보양식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다. 과거의 노예생활을 그리워하며 입맛을 다시고 울며 있는 것이다. 이들은 노예의 근성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었지만 그들의 정신상태는 여전히 노예나 다름없었다. 이들이 이대로 가나안에 들어간다면 젖과 꿀에 파묻히고 원수들에게 사로잡혀 다시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적나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일후 바로 가나안 정탐 사건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에게는 철저한 자유민으로서의 정신 교육과 신앙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민 13-14). 그러나 모세는 더 이상 이들을 혼자 지도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지도자로서의 사임을 목숨을 걸고 요청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70인의 장로들에게 모세에게 주셨던 그의 영을 모세에게도 주셔서 선지자로 세워 모세를 돕도록 하셨다. 그리고 모든 그의 백성들이 선지자가 되기를 바라는 소원을 모세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다(민 11:24-30).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선포하며, 해석하고, 가르치며 훈련시키는 자이다. 이스라엘이 60만이며, 이들에게는 이미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이십부장, 그리고 십부장의 조직이 있기 때문에 70명의 천부장을 선지자로 세우면 70만명은 아주 일사분란하게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광야훈련을 위한 조직이 정비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아론과 미리암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들도 선지자적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선지자로서 모세를 책망한 것이다. 영적 위계질서가 붕궤되는 위기를 만난 것이다. 모세는 황당했겠지만 그는 지면의 모든 어떤 사람보다 더 온유하였다고 했다. 이 말을 거꾸로 이해하면 이들이야 말로 지면에 어떤 사람들보다 더 교만한 사람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모세는 이들의 망동을 잘 참았고,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신다.하나님께서는 아론과 미리암을 회막으로 불러 그들이 모세와 어떻게 다른 가를 설명해주셨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모세 이외의 선지자의 존재를 인정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본론을 말씀하시기 전에 이들에게 그의 말씀을 잘 들으라고 주의 말씀을 주신다. 그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이다. “만일에 너희 가운데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으면...”이라는 전제로 말씀하신다. 마치 이스라엘 가운데 선지자가 스스로 나타날 수 있음을 가정하는 말이다. 그러나 자칭 선지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여호와의 선지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여호와께서 세우셔서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선지자는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다. 이 말은 민 11:29의 모세의 말과 맥이 통하는 말씀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에게 환상으로 나를 알리기도 하고, 내가 꿈으로 그에게 말하기도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시의 수단으로 환상, 곧 비전(vision)과 꿈을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계시와 이 선지자에게 주신 환상과 꿈을 비교하시며 모세에게 주신 계시는 “명백하다” “은밀하다”는 어휘를 쓰시는 것을 보면, 선지자들의 환상이나 꿈이라는 것이 명백하지 못하고 모호하여 그 깊은 뜻을 확실하게 알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은밀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히다”()라는 말로 “수수께끼 같은”(riddel) 혹은 “모호하다”(ambigious)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환상과 꿈의 계시로서의한계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다르다는 것이다. 첫째로 모세는 그 성품이 온유할 뿐만 아니라 충성스럽다는 것이다(민 12:3,7). 모세의 충성심은 아론과 미리암처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대적하며 오락가락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온 집에” 충성된 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집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모든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충성스럽다는 말은 “신실하다”(faithful), 혹은 “믿을만하다”(trustworthy)는 의미이다. 모세를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내 종 모세”라고 칭하시는 데, 이는 성경에서 아브라함, 갈렙(민 14:24), 이사야 (사 42-53) 등 극히 제한된, 특별한 자에게 붙여진 영광스러운 명칭이다. 따라서 본성적으로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아론과 미리암과는 근본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입과 입을 마주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입과 입을 마주하여 말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가 얼마나 인격적이고 서로 깊은 마음 속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관계인가를 보여주는 말이다. 전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보여 달라고 간청하는 모세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는 살 자가 없다고 대답하셨다(출 33:20). 그러나 출 33:11에는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여호와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했다. 본문에서는 이 모세를 “여호와의 형상을 보는 자”라고 말씀하신다(민 12:8). 현재형이다. 과거에 하나님의 형상을 봤다가 아니라 현재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 34:10에서는 여호와께서 열굴을 마주하여 그를 아셨다고 했다. 인간들 사이에 가장 가까운 관계를 표현하는 어휘 “안다”(야다, )를 쓰고 있다. 모세와 하나님 사이가 부부 이상의 친밀성이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이러한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입과 입을 마주하여 말씀하신다고 하신다. 셋째는 하나님과 모세와의 관계가 이처럼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명백하게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이다. “은밀하다”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히다”()라는 말은 “수수께끼”(riddle)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여 마치 구름 속을 헤매며 수수께끼를 풀 듯이 의문과 논란의 여지를 남기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따라서 같은 선지자라고 할지라도 모세는 아론과 미리암과 같은 사람들과 그 근본이 다르다. 이들은 모세가 대언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전하고 가르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너희가 왜 내 종 모세 비난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며 이들의 방자함을 책망하시고, 결국은 미리암에게 문둥병을 발하게 하여 진 밖에 가두고 그가 낫기까지 온 회중이 가나안으로의 진군을 멈쳤다. 하나님께서 엄벌을 하신 것이다.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동역자로 70명의 장로들에게 모세에게 주셨던 똑 같은 성령을 주셔서 예언하는 선지자로 세우셔서, 과거도 잊고, 미래의 소망도 버린 채 오로지 고기가 먹고 싶어서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추억하고 흠모하고 울고 있는 이 백성들의 정신 상태를 고치려고 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와 같을 수는 없다. 이들이 모세를 비난하는 것은 자기들도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모세 앞에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선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보고, 꿈을 구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하지 못하여,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정경론에 대한 해답을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택하여 함께 생활하며, 특별한 훈련을 시키셨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후, 그들을 새 언약의 선지자로 세우시며 그가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오순절에는 성령이 사도들에게만 내리신 것이 아니다. 사도들과 함께 있었던 다른 제자들도 있었다. 이들도 사도들과 같이 예언하며선지자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제자들은 다 선지자이다. 그렇다고 마치 아론과 미리암이 같은 선지자라고 할지라도 모세와는 엄격히 구별이 되듯이,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이 다 사도와 같을 수는 없다. 사도들이 전하는고 남긴 말씀만이 성경아고, 정경이 되어야 할 이유이다. 물론 사도가 아닌 사람도 성경 저자가 있지만 그들도 예수님 생시에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 입과 입을 마주했으며, 예수님의 형상을 본 특별한 자들이다.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도 이스라엘의 70명의 장로들과 같은 선지자적 직분과 사명을 가진 사람들로서 하나님께서 환상이나 꿈으로 보여주신 계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하지도 않고 은밀한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받은 계시는 성경을 통한 간접적인 계시로서 분명히 사도들이 받은 말씀과는 엄격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세나 사도들이 전해준 말씀을 받아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해석해주고, 지키도록 가르치는 일을 하면 된다. 우리는 하나님과 입과 입을 대면한 적도 없고,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며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그의 음성을 들어본 적도 없다. 이러한 자들이 사도들의 권위를 대항하며, 그들이 본 환상과 꿈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고 들은 것을 성경적 계시와 동일시하고, 자신을 사도들과 동등되게 높이는 것은 무지하고 교만한 짓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에게 진노하시고 나병으로 치셨다. 미리암의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에서 죽어 나온 자 같이 되었다고 했다(민 12:12). 비록 모세의 동생이라 할지라고 하나님께서는 엄격하게 다스리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4-05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13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명대로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막을 만들었다. 이스라엘이 만든 하나님의 성막 위에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다. 시내 산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은 언약을 맺으므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어 함께 거하는 놀라운 관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의 노예였던 자들이 해방되어 하늘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하늘 하나님의 신부가 되고, 아들이 되고, 백성이 되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축복받은 자들인가! 이제 당장 죽어도 한이 없을 것 같은 것 같은 은혜와 특권을 받은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자유와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땅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제 내 땅에서, 내손으로 농사짓고, 내 밥을 내가 먹고 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은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하여 그 첫 발걸음을 때였다.이스라엘은 출애굽한지 제 이년 이 월, 이십 일에, 성막에 구름이 떠올랐으므로 가나안 약속의 땅을 향하여 출발한다. 그들은 마치 전쟁을 앞둔 군대처럼 각 지파별로 사람 수를 점호하고, 편대를 짰다. 말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출발 나팔이 울렸다.이스라엘은 출애굽한지 2년이 흘렀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던 만나가 이제 싫증이 났고, 광야의 천막생활도 이제는 지쳤다. 그래서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행복했던 때로 기억하며, 값없이 먹던 생선과 각종과 과일과 양념식이 그리워했다. 이제는 그들의 쇠약해진 기력을 돋울 수 있는 고기와 보양식과 각종 양념식을 달라고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모세도 목자 생활을 못하겠다는 것이다. 자기가 난 자식도 아닌데 이들을 품고 기르며, 이제는 고기까지 내놓으라고 울고 앉아 있는 이들을 자기는 더 이상 이들을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고 불평하며,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애원한다. 하나님의 이들에 대한 응답은 먼저 모세에게 동역자를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장로들 칠십명을 택하여 회막에 따로 세우고, 여호와께서 자신이 직접 내려가서 모세와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있는 영을 구별하여 그들 위에 두어 그들이 모세와 함께 짐을 지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기를 원 없이 주어 고기 냄새가 코에 넘쳐서 싫어할 때까지 한 달을 먹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기가 힘들었다. 보행자만 60만 명이 되는 데 이들에게 소나 염소를 몇 마리를 잡은들 이들의 양이 차며, 얼마나 많은 물고기를 바다에서 잡아 모은들 이것으로 배부르게 하겠느냐고 반문한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하루 이틀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60만명을 두달이나 그것도 배불리 먹고 고기에 질려서 더 싫어할 때까지 먹인다는 것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한계를 정해놓고 어디까지는 가능하나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이제 내 말이 네게 이루어지는지 아닌지 네가 보게 될 것이다.”(23)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손”이나 “여호와의 팔”은 다같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라는 말은 수사적인 표현으로 “짧지 않다”는 반의적인 표현이다.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장로들 가운데 그가 아는 (야다, ), 곧 친분이 있는 자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이들을 불러 회막으로 불렀다. 이때 여호와께서 임하셔서 모세에게 임한 영을 구별하여 장로들에게도 주셨다. 모세에게 있는 영을 구별하여 장로들에게 주셨다는 말씀은 언뜻 이해가지 않는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아찰”() 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말은 “남기다”(reserve), 혹은 사역형으로 “따로 떼어놓다”(set apart) 등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대개의 영역본들은 “그 위에 있는 영을 조금 취하여”(take some of the Spirit that was on him, KJV, ESV, NET) 라고 번역하고 있고, NIV는 “그 위에 있는 성령의 능력을 조금 취하여”(He took some of the power of the Spirit that was on him)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까 여호와께서는 모세 위에 있는 성령을 조금 가져다가 장로들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영들이 그 위에 머물었다고 했다. 성령은 마치 성냥불을 하나 켜서 생일 케익 위에 세워놓은 여러 촛대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이리저리 옮겨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물질이 아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조금씩 떼어서 나눠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모세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역할을 하는 성령을 70인 장로들에게도 주셨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이야기하심으로 백성들에게 그와 모세와 특별한 관계성을 과시하시며 모세를 그의 종으로 인치셨던 그와 똑같은 성령을 이들애게도 주심으로 이들이 모세와 똑 같은 영적 권위와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종이자 모세의 동역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고 계신 것이다. 여호와의 영이 그들 위에 머물 때에 이들은 다같이 예언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이들이 어떻게 예언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은 이들이 예언하는 것을 인지했고, 자신들도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게 예언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명단에 오른 70명 가운데 엘닷과 메닷 두 사람은 회막에 나가지 않았는데도 예언을 했다. 여호수아는 이 사실을 알고, 이들이 예언하는 것을 금하라고 충언을 하지만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모두 선지자 되게 하셨으면 좋겠다.”(29)고 말한다. 이 사실을 바꾸어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의 동역자로 선지자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 원망하는 백성들에게는 고기를 먹이는 조력자를 주셨다기 보다는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을 해석하고, 말씀을 순종하도록 훈련시키는 선지자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동안이나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노예근성이 뼛속 깊이 박힌 자들이다. 종살이에서 해방 되어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신분이 변화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을 상황도 아닌데 만나는 못 먹겠고, 고기를 달라고 울고 원망하며(6), 이집트에서 각가지 보양식과 양념식을 먹고 뛰놀며 죄의 낙을 즐길 때(히 11:23-24)가 행복했다(18)고 말하는 이들을 볼 때, 이들은 자유의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땅에서 자유인으로서 자기 땅에서 자기 손으로 농사지어 자기 밥을 먹고 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들에게는 노예근성을 뿌리 뽑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인생철학을 확립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고 훈련시킬 수 있는 선지자가 필요한 것이었다. 여기서 또한 주목되는 점은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입을 통하여 세상 만민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가르쳐 세상을 구원할 선지자로 쓰시고자 하신 것이다(창 18:18-19). 그리하여 앞으로 광야에서 그의 백성을 가르치고 훈련시킬 선지자를 동역자로 주시는 것이다.둘째는 고기를 먹고 싶어 원망하고 울고 앉아 있는 백성들에게 메추라기를 고기로 주셨다. 바람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휘몰아와 이스라엘의 진영에 떨어트렸다. 지면 사방으로 하룻길 넓이, 그리고 두 규빗 높이로 쌓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메추라기를 잡아 온 사방에 널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을 치셨다. 33절에 “고기가 아직 그들의 잇새에 있어 씹히기도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그 백성을 매우 큰 재앙으로 치셨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과 능력을 믿지 못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이었다. 먹을 것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마치 굶어죽을 것처럼 하나님을 원망하니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현재 내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에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 왜 저 사람에게는 주시고, 나에게는 안 주십니까? 저 사람에게는 이것을 주시고 나에게는 저것을 왜 안 주십니까? 하고 대들면 우선 내 마음에 평안이 없다. 하나님의 진노만 자아내게 하는 짓이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원망하는 것은 재앙을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첫째도 감사, 둘쩨도 감사, 셋째도 감사해야 한다. 감사하지 못하면 망하는 길 밖에 없다. 아무리 감사할 수 없을지라도 감사해야 한다. 감사할 수 없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주신 만나 대신 고기를 달라고 울부짖고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망하게 된 이곳을 “기브롯 하타와”라고 명명했다. 앞에서는 “다베라” (여호와 불이 그들을 태웠다)라고 했는데 이곳에서는 기브롯 핫타와라고 불렀다. 히브리어 “기브롯 핫타와” ()라는 말은 장사지내다는 의미의 “카발”()과 “욕망하다, 바라다”는 의미의 “타아바”()에서 만든 합성어로 “사람들이 (이집트의 고기)를 그리워 하던 사람들의 묘지”(the place that people craved the meat, the longing for the meat of Egypt)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었다. 이제 거룩한 양식을 먹고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집트를 그리워하고, 이집트에서 값없이 먹고 마셨던 이집트의 음식이 그리워 울고 원망하고 있다. 이들의 종말은 멸망이었다. 기브롯 핫다와는 바로 이같이 배은망덕하게 과거의 죄를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타락한 인간들의 종말을 기억하게 하는 공동묘지이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탐욕에 사로잡혀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망한 자들의 무덤이라는 의미이다. 기브롯 핫타와는 “탐욕의 무덤” “욕망의 매장지”라는 뜻이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 탐욕의 무덤을 파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봐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3-2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12
    2018년 추수감사절이다. 농사짓고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드리고 감사하는 날이다. 우리 인생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햇볕과 비를 주시고, 모든 농작물이 자라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농사 안 짓는 사람도 그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감사해야 한다. 아무리 돈이 많고 금은보화를 쌓아 놓아도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내리지 않으시면 이런 보화는 다 무용지물이다. 한국 사람들은 매년 수 없이 많은 농산물을 외국에서 수입해 먹는다. 수입해서라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며, 영혼의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많이 하지만 추수감사절에는 특별히 우리에게 이 몸을 주시고, 이 몸을 위한 육신의 양식을 주시며, 우리의 몸을 항상 돌보시고,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며 살게 하신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하는 축제이다. 오늘 성경 본문은 “여호와께 감사하여라. 그 분은 선하시며 그분의 인애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말하며,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감사하라는 권면의 제창으로 이어진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이스라엘의 구원, 그리고 모든 육체에게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이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악이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 선이라는 것이 일관된 성경의 가르침이다. 또한 인자란 하나님의 변함없는 꾸준한 사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변하고, 배반하고, 뒤돌아서지만 하나님은 그의 사랑이 변함없으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목숨을 내놓고 맹세하고 언약을 맺어도 뒤 돌아서면 마음이 변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 중간에 그만 두는 것이 없다. 한번 사랑하면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굴곡이 없다. 사랑의 강도가 변함이 없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했다가 미워했다가 오락가락하는 사랑이 아니다. 꾸준히 변함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상대방의 상태에 따라 그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좌우되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를 멀리 할수록 더 적극적이고 더 진실되게 다가가는 사랑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해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그들을 기다리시고, 더 가까이 다가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은 “헤세드”라는 말로 표현했다. 잠시 후면 유다가 자신을 배반하여 팔 줄을 줄 뻔히 아시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살을 떼어 그의 입에 넣어주시는 사랑,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바로 “헤세드”이다. 십자가를 지기 전 자기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찾아가 생선을 구워 조반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인애,” 곧 “헤세드”이다. 추수감사절이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감사하는 절기라기보다는 우리 육신의 필요을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보살핌과 사랑을 특별히 감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오늘도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죽음의 지뢰밭이다. 한번 헛발을 디뎠다가는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멸망의 구덩이가 여기저기 수없이 널려 있다. 시편 57:4에 보면 “이 생명이 사자들 가운데 있으며, 사람이 불사르는 자 중에 내가 누웠으니, 그들의 이는 창과 살이고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다.”고 말한다. 우리의 인생은 높이 달린 외줄을 타는 곡예사 같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눈먼 강아지와 같은 것이 인생이다. 날이면 날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비참하게 죽은 인생들을 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도 기적이지만 그가 희생자라는 것도 기적이다. 왜 하필이면 너였냐?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내 생명을 지켜 주시지 않으면 내가 존재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내가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주 되신 하나님께서 나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고, 오늘도 생명을 누리고 살게 해주신 것을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이 생명을 거두지 않으시고 붙여주셔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을 보고 즐기며 살고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한 말처럼 우리를 그의 “생명 보자기”에 싸서 보호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삼상 25:29).둘째로 우리는 먹을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먹어야 산다. 히나님께서는 우리가 먹어야 살도록 만드셨다. 그래서 사람은 먹기 위해서 일하고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사람은 영의 양식도 먹어야 하고, 육의 양식도 먹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분리할 수 없다. 분리하는 날에는 죽는 날이다. 그러나 추수 감사절은 우리에게 육신의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산상 수훈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라”고 가르치시고 어디에 누울 것인가 걱정하디 마라(마 6:25-31)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보다 더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공급해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와 같으신 하나님의 이 사랑을 감사해야 한다. 나와 같은 쓸모없는 인간에게도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잠자리를 주신 하나님을 우리는 매일 기본적으로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할 것이 아니고 이미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계속 주실 것을 바라고 간구해야 한다.셋째는 유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유업은 자식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만드시고 가정을 주셨다.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복을 주셨다. 자식을 낳고 기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보통 자식을 육신의 열매라고 말한다. 사람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한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열매이다. 자식은 이 한 몸이 이 땅에서 살고 간 흔적이고 남길 유산이다. 그래서 자식을 얻는 것이 모든 인생이 이 땅에 와서 사는 도리이다. 자식을 갖더라도 많이 가지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편 127편은 자식들을 전통의 화살에 비유하며, 전통에 화살이 가득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자식들은 여호와의 주신 유업이라고 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유산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이 모든 육신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하는 것이다. 태의 열매는 하나님의 상급이라고 했는데, 상급이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샤칼”이라는 말은 “상급” 이나 “보상”이라는 말도 있지만 “임금”(wage) 혹은 “삯”이라는 말도 있다. 자식은 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생명이다.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태속에 그의 생명의 씨를 심으시고, 그 생명을 자라게 하시며, 그 생명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낳고 기르라고 맡기셨다. 그래서 우리가 자식을 낳고 기르는 가운데 수고하고 땀 흘려 양육한 그 대가로 하나님께서 그 자식을 우리에게 보상, 상급, 혹은 임금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장성했을 때 성문에서 힘있는 목소리를 낼 것이고, 전쟁에 나가서도 용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자식을 용사의 화살통에 담긴 화살로 비유하고 있다. 그 화살은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추수 감사절은 특별히 우리에게 생명과 양식과 자식을 주신 하나님, 다시 말하면 영혼 보다는 육신의 필요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햇볕과 비를 주시어 먹고 마실 것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가정을 세워 자식을 낳아 유업을 남길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이것을 기본적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가 없는 인간은 병든 인간이다. 할 수 있다면 뭐든지 감사합해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께 감사하고, 자식들에게 감사하고, 선생님이나 친구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래서 온통 감사가 넘치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감사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 감사할 수 없는 것을 감사하고, 감사할 수 없을 때 감사하는 것이 감사이다. 우리에게는 감사할 대상이 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인애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3-0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11
    광야에서의 천국잔치가 끝나고 예수께 더 이상 기대할 것을 없음을 알게 된 무리가 다 물러간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가려느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주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알았습니다.”(요 6:68-69)라고 대답한다. 요한복음 6장의 71절이나 되는 긴 성경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한 말씀이 바로 베드로의 예수님께 대한 대답이자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 예수께서 주신 식사를 마친 이들은 이미 자리를 뜬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 예수께서는 힘들게 그를 찾아온 이 무리를 향하여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을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고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26)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이 무리들이 표적을 보고 왔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빵을 먹은 것이 무엇에 대한 표적인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천지 창조의 하나님이시오,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 곧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표적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이 육신의 빵보다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찾아 왔어야 옳다. 그러나 그들은 빵을 먹고 배가 불러서 온 것이다. 말하자면 빵을 기대하고 수고하여 찾아 온 것이다. 예수께서 이들에게 하신 말씀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것이었다. 본문은 바로 영생에 이르는 양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본문에 나타난 예수님 말씀의 Key Word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살리신다는 것이고, 살려서 영원한 생명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40절에 보면 “내 아버지의 뜻이 과연 이것이니,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거꾸로 말하면 현재 모든 인간은 죽어 있고, 또한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33).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살리고, 영생을 주어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겠다는 것이다 (44).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완전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56).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이 지금은 비록 그의 육신은 살아 있지만 영혼은 죽어 있어서 영원한 생명이 없는 존재이나 하나님께서 우리 죽은 인간들을 살려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신비하고 온전한 관계를 살리고 회복하고자 하시는 것이다(15:4-5; 21-22). 그래서 “생명” “영생‘이라는 말이 계속 거듭되고 있다.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이루시는가? 그의 아들을 하나님의 빵, 곧 생명의 빵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이것이니, 그분께서 내게 주신 자 가운데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것이다.”(39)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육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 따라서 사람이 살려면 육신의 양식도 먹어야 하고, 영혼의 양식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죽음의 열매를 따먹었다. 그리하여 그 영혼이 생명을 잃고 하나님을 떠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사탄이 준 죽음의 열매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빵” 곧 생명의 양식을 먹이시려고 그의 야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본문에 예수께서는 이 하나님의 빵을 다양한 언어로 지칭하신다.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는 양식”(27), “참 빵”(32), “하나님의 빵”(33, 48), “생명의 빵(36), ”하늘에서 내려온 빵“(41, 50, 58) 등으로 일컬으신다. 이 하나님의 양식은 사람이 영생에 이르도록 남게 할 것이다(27). 세상에 생명을 줄 것이다(33). 굶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게 할 것이다(35). 먹는 자는 죽지 않는다(40). 영원히 살 것이다(51, 58). 먹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 것이다(54) 등으로 칭한다.그렇다면 이 하늘의 빵을 어떻게 사람들은 구할 수 있을까? 유대인들의 생각은 간단하다. 그들은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하던 때에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여주었던 모세를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만일에 예수께서 그들의 왕이 된다면 그들에게 유익되는 일에 대한 갖가지 상상을 했을 것이다. 우선 그들이 이미 체험한 바와 같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일하지 않고도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숨바꼭질을 하듯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다. 이러한 무리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여라.”(27)고 말씀하신다. 헬라어 성경에는 “썩는 양식”이라는 표현보다는 “την βρω~σιν τη`ν α’πολλυμε、νην”이라는 말은 다음에 이어지는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있는 양식”이라는 대구로서 “없어지다”(perish) 혹은 “사라지다”(disappear)는 의미로 “없어질 양식” 곧 영생하지 못하고 잠간 있다가 사라지게 하는 양식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말씀을 음미해보면 분명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양식이 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의 양식이 있고, 영생하도록 남아 있을 영혼의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를 잡아 왕을 삼으려는 이 무리들은 분명 썩을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구하기 위하여 이렇게 머리를 쓰고 뛰어다니며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육신의 양식 이외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영생하게 하는 양식을 구하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40년 동안이나 만나를 먹이신 목적에 대하여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신 8:3)고 말씀하신다. 예수님도 그가 복음사역을 시작하실 때, 40일간을 금식하신 그에게 돌덩이로 빵을 만들라고 유혹했을 때, 바로 이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마 4:4). 성경은 육신의 양식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영생의 양식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추구하며 일하는 목적이 오로지 육신의 양식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영생에 이르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유대인들의 대답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28)라고 묻는다. 영혼의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고 대답하셨다. 계속하여 무리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모세는 자기 조상들에게 빵을 주어 먹게 하였으니 예수님도 모세처럼 자기들에게 빵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그의 조상들에게 빵을 주신 분이 모세가 아니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 빵을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32)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계속하여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33)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조상들이 먹었던 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가 주시고자 하는 빵은 땅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며, 먹고 없어질 것이 아니고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무리들은 “주님, 이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소서”라고 청하게 되었다.예수께서는 바로 이때에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며, 또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또한 예수님이 자신이 하늘로부터 왔다고 밀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하여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이 유대인들은 이해가 안 되는 어쩌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불경스러운 말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내가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니,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다.”(51)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 데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다”(53)고 선언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살이 참된 양식이며, 그의 피가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신다. 나아가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56)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다 떠나버렸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 정말 그의 살과 피를 먹으라는 말씀으로 생각한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1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엇고,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그가 하나님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늘의 빵을 달라고 하는 자들에게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예수님의 육신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먹으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인해서 사는 것 같이 나를 믿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해서 살 것이다.”(57)고 말씀하신다. 결국 생명의 빵, 하나님의 빵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육신의 빵을 먹기 위해서 땀 흘려 일하는 것처럼, 영혼의 양식을 위하여 땀 흘리고 일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일에 땀을 흘려야 한다. 생명의 양식을 먹고, 마실 때 우리 신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고 영생하는 것이다. 말씀만이 썩지 않을 참 양식이요 사람을 살리는 영생의 양식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하신다.“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고 생명이다.”(63). 베드로는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시는 일에 동참하여 예수님의 일을 같이 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병이어나 조상들이 먹었던 광야의 만나가 결코 영생의 양식이 아님을 알았다.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이 영생의 양식임을 알았으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알았다고 했다. 알고 믿은 것이 아니라 믿고 알았다고 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믿기에는 예수께서 너무 크고 깊고 높고 넓으신 분이라 우리 일생을 다 쏟아 부어도 예수님을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먼저 믿으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예수께서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2-2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10
    예수께서는 이 땅에 여자의 후손으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그리고 왕으로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우리 모든 피조물들의 왕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고 다스리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도록 지도하는 일을 맡기신 것이다. 특별히 아담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의 질서를 잘 지키고, 또한 피조물들이 창조의 질서를 잘 지키도록 감독해야 할 사명을 받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했다. 오히려 대왕이신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기와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반역자로 몰아넣었다. 아담은 타락한 왕이 되었다.아담의 타락의 원인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분봉왕이다. 창조의 질서 가운데 아담 위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대왕으로 계신다. 그 대왕이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마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을 통하여 자신의 하나님 되심, 창조주 되심, 대왕이 되심, 그리고 언약의 주 되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권위와 능력을 동반한 그의 위대하심과 그의 존엄성을 선언하신 것이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아담이 절대 넘어서는 안 될 죽음의 선이었다.그러나 아담은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충동을 자제하지 못하고 그 실과를 따먹었다. 결과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권위와 존엄성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반역자의 죄목으로 죽음을 선고했다. 아담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와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도 죽음을 선고하셨다. 아담의 교만이 그를 타락과 파멸의 낭떠러지로 내몰았다. 하나님께 대한 교만심이 그를 망하게 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신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교만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대왕으로 원치 않은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동등하게 되기를 원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불복종하였지만 결국 반역자가 되고, 반역의 괴수가 되고 말았다. 인간의 비극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고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교만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이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도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의식하지 않은 체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모른 체하며,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외면하며,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갈 모든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아담에게 심판과 죽음의 저주를 내리시고, 아담을 대신한 새로운 아담을 세울 계획을 세우신다.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을 세워, 새로운 그의 대리통치자, 새로운 왕이 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새 아담이 새로운 왕이 되려면 아담이 실패한 끝이 없는 겸손과 철저한 복종을 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겸손이라 함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어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그의 낮아지심(humiliation)을 말하는 것이고, 복종이라 함은 아담의 속죄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놓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의 겸손과 복종에 대하여 빌립보서 2:6-8에서 잘 가르쳐 준다.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님의 겸손은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취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여기서 “형상”이라는 말은 “왕”이라는 의미이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왕을 신의 형상이라고 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왕이지만 왕의 형상을 취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도리어 그는 자기 자신을 비워 종의 형상을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 왕이 되기를 원하고, 자기를 높여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하지만 예수께서는 오히려 자신을 비워 사람의 모양으로, 종의 형의 형상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었지만 종의 형상으로,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으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종이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담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갚으라고 하시기 때문에 새 아담 예수께서는 “예”하고 순종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께 이 순종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시여, 원하신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눅 22:42) 라고 기도하셨으며, 그 기도하는 동안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지기까지 했다고 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으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질 만큼 되었을까? 아마도 온 몸을 다 쥐어짜서 기도를 하신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대로 복종하겠다는 것이다. 새 아담으로서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은 아담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달래기에 충분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이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을 여전히 죄와 죽음의 사슬에 메어 두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살리시고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셨다. 이 말은 예수님을 새로운 왕으로 높이 올려놓으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복종이 그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새 아담, 곧 새로운 왕으로 높이 오르게 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새 아담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은 시편 2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선지서는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아들에 대하여 그가 다윗의 가문에서 낳게 될 것이고 신적 존재임을 고지하고 있다. 이사야 9:6-7에서는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게 될 한 아기는 “그 어깨 위에 통치권이 있으며, 그 이름은 위대한 섭리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고,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신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위대한 섭리자, 영존하시는 아버지 등은 그가 하나님을 지칭하고, 그의 신적 속성을 의미하는 말이고, 평강의 왕이라는 말은 그의 인간적인 본성과 그의 사역의 성격을 의미하는 말이다. 여기서 그를 가리켜 “위대한 상담자”라고 하는 말은 사전적 번역이고, 문맥을 살펴보면 “위대한 섭리자” 혹은 “위대한 전략가”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그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진 인간 왕들과는 구별된 특별한 왕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사 11:1-5).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고 반역한 아담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함을 즐거움으로 삼는 왕, 쉽게 말하면 즐겁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왕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오게 될 새 아담은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하시는 정의로운 재판장,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이 반역의 세상을 판결하는 심판의 주로 오신다는 것이다.때가 되어 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왕이 이 땅에 오셨다. 새 아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는 왕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는 유대 땅 베들레헴의 축사에서 태어나셨다. 사람이 사는 집안의 방이나 모텔이 아니라 양들이 먹고 싸는 축사에서 태어나 요람 대신 구유, 여물통에 뉘었다. 유대인들은 몰랐지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대 땅에 새로운 왕이 태어난 것을 별의 징조로 깨닫고 찾아와서 경배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를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영접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그는 나귀를 타셨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이다.” 스가랴서 9:9의 말씀대로 자신이 왕이심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여기서 왕이라고 칭하고 있는 예수님은 당시의 왕들처럼 말을 타지 않고,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다. 왜냐하면 그는 겸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비록 나귀를 타셨지만 백성들은 그들의 옷을 벗어 길에 깔아 양탄자를 대신했고, 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깔았다. 무리들은 나귀를 탄 예수님을 뒤 따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 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마 21:9)하며 외쳤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웠더니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다. 그러나 새 아담, 예수님은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다. 전쟁 영웅이나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왕처럼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고, 내일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백성들이지만 그에게 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연호했다. 그리고 빌라도는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머리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를 달았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표지였지만 그것은 사실로 들어났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고 선언하셨다(마 28:16). 그는 온 우주의 왕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신 분이었다.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 만물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여 대왕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말씀을 거역했다. 그리하여 타락한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은 겸손하여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온 우주의 왕, 곧 새 아담이 되셨다. 자기의 몸을 대속 제물로 내어 주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참된 왕도를 보여주셨다(막 10:45). 이방의 현자들, 동방박사들이 축사의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께 경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섬기는 왕이었다. 왕은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다. 섬기는 자이다. 하나님 앞에게 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 새 아담의 왕도이다. 높은 자리에 올라 갈수록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 예수님의 왕도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신분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새 아담, 예수님과 같은 왕들이 된 것이다. 우리는 왕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고 죽기까지 복종해야 할 왕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과 복종을 배우고, 왕도를 따라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나귀를 탄 왕들이 되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2-15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09
    예수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예수께서는 선지자로 오셨다. 그리고 새 아담, 예수님은 제사장과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그를 대신하여 그가 지으신 만물을 돌보고 다스리는 일을 하게 할 뿐 아니라 그와 교제를 나누기 위하여 창조하셨다. 그러나 아담이 사탄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반역하여 하나님의 곁을 떠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는 끊기고 아담은 그와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죄와 죽음의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만물을 사랑하시고 끊어진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한번 끊긴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면 아담은 죄 값을 치루고 그의 죄를 씻어 정결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죄인이 죄 값을 치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 값을 하나님 자신이 치르기 위하여 그의 외아들을 육신의 몸을 입고 인간 세상에 보내시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외아들이 해야 할 일은 첫째로 사람의 몸을 입고 찾아 와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아담의 범죄에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죄 값으로 내놓아야 하는 것이고, 셋째는 그의 죄 값이 충분히 치러졌다는 표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시고, 아담과 그의 연대생 안에 있는 자들도 죄와 죽음의 사슬로부터 풀려나서 타락 이전에 하나님과 누렸던 관계성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니 인생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오셔서 그의 목숨을 죄 값으로 바친다는 개념 자체가 400년 동안이나 타국에서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시청각적인 모형을 통하여 미리서 가르치시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제사제도이다. 이 제사제도가 본격적으로 제도로서 정착한 것은 모세 때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식을 이 제도를 통하여 예습을 시키신 것이다. 제사에는 제단과 제물과 제사장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제사제도를 친히 게시하여 주시고, 법으로 정하여 엄격하게 시행하도록 하셨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열거한 내용이 바로 제사제도에 대한 것이다.첫째로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는 성소에서 이루어졌다. 성소, “믹다쉬”라는 말은 “카다쉬”, 곧 “거룩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거룩한 곳, 성소로 번역하고 있다. 장막이라고도 한다. 제사는 아무 곳에서 드려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에서 드려야 했다. 성소는 놋받침 위에 세운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따라 포장 울타리를 쳐서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출 38: 9-20). 성막 뜰에는 물두멍과 번제단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성막이 지어졌다. 성막은 은으로 만든 밑받침 위에 아카시아 나무로 널빤지를 만들어 밑바닥을 깔았다. 그리고 널빤지 위에 성소와 지성소를 만들었다. 성소에는 등대와 향단과 진설병을 올려놓은 상이 있었다.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으로 막을 쳐서 서로 오갈 수 없게 만들었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두었는데 그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개의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싹인 났던 아론의 지팡이를 넣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성소와 지성소를 휘장으로 분리시켜 놓았는데 이는 하늘과 땅,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과 죄인들이 거하는 곳이 죄로 말미암아 분리되고 막혀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오로지 일년에 대 속죄일에 단 한 번 속죄 양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다. 요한은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요 1:14). “계신다”는 말은 “장막을 펴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첫 기적을 행하신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성전을 청소하시며, 그 성전이 바로 자기의 몸이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다 죄인이라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접근할 수 없다. 인간들 스스로가 죄를 짓고 하나님의 존전을 피했다.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이 휘장이 거두어지고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성전의 이 휘장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 후 성전 자체가 다 파괴되고 진멸되었다. 실형 인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모형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둘째로 제사에는 재물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흠 없고 점 없는 깨끗한 어린 양이나 염소를 속죄 제물로 바치도록 하셨다. 죄인들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여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했다 (transfer). 전가라는 말은 옮기다, 덮어 씌우다는 의미이다. 나의 죄를 그 양에게 덮어씌우고 양을 잡았다. 그리하여 나의 죄를 뒤집어 쓴 그의 양이 나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나의 죄 값을 치르게 한 것이다. 속죄가 이루어 진 것이다. 재물은 양과 염소를 드렸고, 곡식도 드렸다. 죄와 관련된 제사에는 반드시 짐승의 피가 필요했고, 곡식 제사는 화목제나 감사제에 쓰였습니다.이사야서 53장은 새 아담, 그리스도로 지칭하는 하나님의 종이 우리 죄인들을 위한 속죄물로 자신을 드리는 대속 사역과 그 의미를 적나나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이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왔다.”(막 10:45)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께서는 식사 후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마시라고 권하셨다. “또 잔을 들고 감사기도 하신 후에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너희 모두 이것을 마셔라. 이것은 죄 용서를 얻도록 많을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마 26:27-28; 막 14:2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주시는 포도주가 “언약의 피”라는 것이니다. 이 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언약적 연대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속죄의 원리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는 언약의 피가 되는 것이며, 이 최후의 만찬은 새 언약의 언약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담과 그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대속 제물이었던 것ㅇ다.셋째는 제사장이 필요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아무나 나갈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선택한 자를 일정한 의식 절차를 통하여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그가 드리는 제사를 받으시고, 그와 교통하셨다. 제사장은 모세의 형, 아론과 그의 자식들이 맡았다. 그러나 아무리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지성소나 언약궤를 다루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씩 속죄양을 선택하여 그 머리에 백성의 죄를 고백하여 그들의 죄를 양에게 전가시키고, 그 양을 잡아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의 죄를 대신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같은 대제사장의 제사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짓지 않은, 곧 창조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완전한 장막에 들어가셨다. 그분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 9:11-12)그리하여 새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이 성전이시고, 속죄물이시고, 또한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구약시대의 제사제도에는 한 사람이 이러한 성전과 제물과 제사장이라는 세 역할을 다 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새 아담, 그리스도는 이 세 가지 역할을 다 완벽하게 행하신 것이다. 새 아담은 제사장 레위 가문에 속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새 아담, 그리스도를 영원한 멜기세댁의 계얄을 따른 제사장이라고 가르친다(히 5:5-6). 여기서 멜기세댁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원한 제사장이고 가르친다.“이 멜기세댁은 살렘 왕이며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왕들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축복한 자이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렸으니, 그의 이름을 해석하면, 첫째로 의의 왕이고, 다음으로 살렘 왕, 즉 평강의 왕이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으며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히 7:1-3)새 아담, 그리스도의 제사장 되심은 아담의 모든 죄 값을 치러 영원한 속죄를 이루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평안한 관계, 곧 영원하고 거룩한 교제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우리 성도들은 옛 아담, 옛 언약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제 새 아담, 새 언약에 속한 사람이다.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사람들이 되었다. 새 아담, 그리스도 예수님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또한 우리는 성령이신 예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4:16). 성전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시며,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는데 예수께서는 우리 안에 그의 성전을 지으시고 우리에 안에 거하시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 특히 요한은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거하라는 명령을 계속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릴 합당한 예배라고 하였다(롬 12:1). 베드로는 “너희고 산돌같이 영적인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인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라”(벧전 2:5). 또한 2:8 절에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고 왕같은 제사징들이고, 거룩한 나라이고,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움에서 그 분의 놀라운 빛에 들어게 하신 분의 덕을 선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바로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제사장이고, 제물이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2-0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08
    2019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새로운 비전 가운데,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며 새 출발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연말이 되면 우리는 모든 일이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아 좌절하고 주저앉아 자책할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일이 해마다 반복되면 우리는 연말연시가 두렵기까지 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파요 오메가라고 하신 말씀을 한번 되새겨 보면 마음이 놓인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시작과 끝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시작하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며 역사의 끝을 맺는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섭리하시고 주관하신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잠언 기자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하나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다.”(16:9) 라고 말하고, “사람이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결국 성취되는 것은 여호와의 뜻이다.” (19:21)라고 가르친다. 시편기자도 “여호와께서 사람의 발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즐거워하신다. 비록 그가 넘어져도 엎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를 붙드시기 때문이다.”(시 37: 23-24)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일을 계획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하던 일을 계속 하나님께 맡기며 사는 믿음과 지혜가 더 필요하다. 무슨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 눈에 띄는 결과를 얻고자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속사람이 성숙하도록 힘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점에서 우리의 스승이다.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것을 그의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하여 자기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버렸다고 했다. 빌립보서 3:8의 “내 주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서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지식”이라고 읽고 있다. 대개의 영역본들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것”(knowing Christ Jesus my Lord)라고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한글 역본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명사, “그노시스”와 그의 동사형 “기노스코”(알다)를 이중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의 지식”이라고 하거나 영역본에서 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대한 지식이란 의미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 탄생,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과 같은 사실에 대하여 아는 바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여기서 헬라어로 “기노스코” 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알다”(know)라는 의미이다.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이성적이고 지적인 이해(intelligent comprehension)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서로 친하다” (be acquaintance with), “동침하다”(have sexual relation)는 의미이다. 히브리어로는 “야다”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헬라어와 같은 의미이다. 창세기 3:1에 아담과 하와가 동침했다고 했을 때 “알다”는 의미의 “야다”라는 말을 쓰고 있으며, 마태복음 1:25에 요셉이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 여자와 동침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도 “동침하다”는 말로“기노스코”라는 말을 쓰고 있다. 말하자면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다같이 “안다”는 말을 쓰고 있는 데 이들은 관계어이다. 사람 사이의 가장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부부 간의 성관계를 두고 사용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지식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바울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관계성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러한 관계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값있는, 고상한 일이라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것을 위하여 힘써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과연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견고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첫째,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그에게 유익한 것을 버렸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내민 손을 붙잡기 위하여 다른 것은 다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 것이다. 그의 가치관이 분명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그의 전 생애를 다 바쳐 따르고, 배우고, 추구해야 할 최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밭일을 하다가 보화를 발견한 어느 품팔이군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일이 있다. 밭갈이를 하다가 보화를 발견한 그 사람은 그것을 흙으로 덮어놓고 가서 자기 집을 팔아 그 밭을 통째로 사서, 결국 그 밭에 감춰진 보화를 자기 소유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사실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바울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내민 손을 놓지 않고 붙잡는 것을 그는 가장 고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만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항상 관계성 문제를 강조하시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안에, 나는 너희 안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안에” 있으라는 말씀은 (요한 15:7; 17:21) 예수님과의 뗄려야 뗄 수 없는 성령을 통한 밀접한 연합관계를 나타내는 신비의 말씀이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언약적 관계성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두 진영으로 나뉜다.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옛 사람과 새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새 사람이다. 새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사람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새아담과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로 아담의 죄 값을 치르고, 새로 지으신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을 말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아담에게 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 아담에 붙은 사람이 있다. 우리 신자들은 믿음으로 새 아담, 그리스도에게 붙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새 왕국의 백성이 된 자이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백성이 되었다. 따라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죄와 죽음에 이르는 역사의 열차를 탄 사람이나 새 아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이르는 생명 열차를 탄 사람이다. 내가 어느 열차에 몸을 실려 있는가 하는 문제는 바로 정체성 문제이다. 소속이 불분명한 사람은 예수께 속한 사람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립이란 없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로마 시민권을 버렸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서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의 동족과 더불어 “노예”의 길을 택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기를 바란 것이다. 셋째, 바을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산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닮아 가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면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해보려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간 것이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셨으니 자기도 죽고 부활해 보고 싶다는 욕심과 목표를 가지고 산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 따라서 바울은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도 죽고 부활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 (Imitator of Christ)을 살기 위해서 발버둥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면 자기도 해보고 싶었다. 이것이 그의 인생철학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가르치셨으니 자기도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고, 죄인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으니 자기도 십자가를 지고 그의 고난의 길을 걸어보겠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온 세계를 떠돌며 굶주리고, 병마에 시달리며,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죄수가 되어 순교했다. 그리스도의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그는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다. 자기의 생명을 바쳐 죄인들의 생명을 살리셨다. 바울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선이라고 하셨다. 바울도 예수님을 본받아 선을 행하려고 했다는 것이다(막 3:4).결론적으로 우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알기 위하여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지식,” 곧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더 견고히 하고, 그리스도를 더 알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그것이 가장 고상하고,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예수께서 생명을 살리는 선한 일을 하셨다. 우리도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힘쓰고,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지식은 바로 생명을 살리는 지식이다. 어떤 업적을 이루는 것보다 생명을 바쳐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님을 더 넓고 더 깊이 알기 위해 힘쓰는 한해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1-1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07
    우리는 이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기 전에 “선자자”가 뭐하는 사람인지 그 정의부터 알아야 할 것 같다. 선지자의 히브리어 “나비”라는 말은 사전에 여러 가지로 정의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가장 적절한 의미는 “하나님의 대언자”(The Spokesman of God)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대신 전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선택하여 그의 말씀을 선지자의 입에 넣어주어 그것을 그의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신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선지자를 “여호와의 입”()이라고 부른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획이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재판하는 일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입으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특별한 행동으로 나타내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선지자가 하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 가운데 적용하고, 순종하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한다고 하니까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미래 일만 말씀하시고 전하라고 하시지 않는다. 현제 일어난 일도 말씀하시고, 과거에 있었던 일도 말씀하신다. 따라서 선지자를 단순하게 예언자라고 말하는 것은 선지자의 하는 일을 너무 축소시키고 제한하여 본래의 의미와 맞지도 않다. 그러나 적절한 번역이 없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쓰고 있는 “선지자”라고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예언자”라는 말은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시 아담을 그의 선지자로 세우셨다. 아담을 그의 대리 통치자로 세우시고 그의 창조물을 다스리도록 임무를 주셨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과 서로 교통하고, 이것을 그의 피조물에게 전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심으로 그가 만든 세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창조의 질서를 계시하고 알려 주셨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입의 역할만 해야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거나 자기의 생각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그러나 아담이 뱀이 찾아와서 그를 유혹할 때, 그를 꾸짖었야 할 자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뱀의 수사적인 말에 말려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결국은 따 먹었다. 잘못된 적용을 한 것이다. 아담은 여기서 선지자로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잘못된 선지 활동을 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타락하게 된 것이다. 아담의 타락과 더뷸어 그는 선지자로서의 말씀의 대언, 말씀의 해석, 말씀의 적용과 교육 등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더 이상 바르게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타락한 선지자가 된 것이다. 결국 그와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죄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대리통치자의 일을 온전하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인간은 아담과 더불어 타락한 선지자가 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대언해야 할 사명과 특권을 받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길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고 불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고 대언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선지자, 아담에게 죽음의 저주와 심판을 내리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본래 사량하셨기 때문에 살리기 위한 계획을 세우신다. 아담을 대신하여 새 아담을 세우시고, 그 새 아담을 새로운 선지자로 사용하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고, 말씀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려고 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고, 그로 말미암아 타락이 들어왔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말씀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고자 한 것이다.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상을 만들고 그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함께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다(사 11:9). 이것이 하나님의 종말의 꿈이고 비전이다. 말씀이 넘치는 세상을 만드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가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노아를 선지자로 쓰셨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그들을 유혹했던 마귀를 짓밟을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고, 노아에게는 구원의 방주와 더불어 셈의 후손 가운데 그가 거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을 최초로 선지자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를 빼앗은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이니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면 네가 살 것이나, 만일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들은 모두 반드시 죽을 줄 알아라.”(창 20;7) 고 경고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 그를 통하여 세상 만민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창세기 18:18-19에서는 그를 선택하신 목적을 말씀하시는 데, 아브라함이 그의 후손들에게 여호와의 도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도록 하고, 이 땅에 공의와 정의가 있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도를 가르치는 일이 바로 선지자의 할 일이다.민수기 11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2년여 세월이 지나, 약속의 땅에 가나안을 향하여 갈 때, 이집트에서 먹던 고기와 보양식과 양념식을 먹고 싶다고 울고, 이들을 보고 있던 지도자, 곧 선지자로서 절망과 좌절을 느낀 모세는 더 이상 이 백성을 책임질 수 없다고 선지자요 지도자로서의 책임과 직무에 대한 사임을 청하고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청하는 일이 생겼다. 이들은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그리워하고 그때가 행복했었다고 말한다. 과거의 피눈물을 흘리던 노예생활을 미화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자기 땅에서, 자기 손으로 농사짓고, 자기 양식을 먹을 수 있는 꿈을 버린 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그들은 400년 동안의 노예근성이 뼛속까지 찌든 백성이 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강란 훈련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장로 70명을 불러 모세에게 주셨던 똑같은 영을 주셔서 예언을 하게 하신다. 이들을 선지자로 세워 모세의 동역자로 주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 18:18에서는 모세가 그의 후계자를 세워달라고 청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데, 이는 선지자인 메시야, 그리고 계속 백성들을 지도할 하나님의 입, 선지자를 세울 선지자 제도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요엘서에는 아예 종말에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선지자로 세우실 것임을 약속하신다.신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선지자를 보내신다. 말씀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자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신 것이다. 그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을 때 위로부터 성령도 받았다.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인증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복음 사업을 시작하시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들에게 자유를, 맹인들에게 다시 보게 됨을 선포하고, 억눌린 자들을 자유롭게 하며,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눅 4:18-19)예수께서는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이심을 사람들에게 밝히셨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고(눅4:31-32),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눅 4:31-37), 각색의 병을 고치셨다(38-41).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에 대한 권위에 놀랐으며, 심지어 악령들을 꾸짖으시자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고 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예수께서 안식일에 곧바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다.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 에 놀랐으니 이는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를 가지신 분답게 그들을 가르치셨 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막 1:21-22)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말씀의 권위, 영적 능력에 압도되고 놀랐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이를 살리셨을 때,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하기를 ‘우리 가운데 위대한 선지자가 나타나셨다.’하며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아보셨다.”라고 말하고, 이 일이 온 유대와 그 모든 주변에 퍼져 나갔다고 했다.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위대한 선지자로 인식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선지자로 오셔서 우선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사람으로부터 말씀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해석해주고, 또한 가르치고 훈련시키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사역은 선지자로서의 사역이고, 선지자를 훈련시키고 양육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알의 밀알이 되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선지자로 임명하시고, 오순절에 하나님의 성령세례를 통하여 새언약의 선지자로 세우셨다. 우리는 물세례를 통하여 성령 세례를 받으며, 성령세례를 통하여 선지자의 직분을 위임받았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온 세상에 다니며 예수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사명을 받는 것이다. 만일에 예수님의 선지자적 사명이 없었다면 우리 죄인들은 자신들이 왜 죄인인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구원에 이르는 길도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말의 비전,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상은 예수께서 세우신 제자들의 선지 활동을 통하여 이루실 일이다. 성탄절을 맞으며 우리는 선지자적 사명을 새롭게 다짐하고 행해야 한다. 선지자로 오신 새 아담, 예수님의 동역자로서 선지자적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고, 이 세상을 선지자로 살아야 할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과거도 잊고, 미래도 볼 줄을 모르는 소경이 되어 죄악의 낙을 사모하고 사는 어리석은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가 성탄절을 맞으며 이 시대를 깨우는 선지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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