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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를 기다리는 믿음
    성서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믿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때가 차서 그 약속이 성취 된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때가 지나서야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 때 까지 삶은 결코 쉽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그 약속들을 지키는 자들이 성서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인물들임을 알게 한다. 믿음은 약속들이 이루어진 사실을 믿고 따른 자들임을 믿게 한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정해진 시간이 지나서야 이루어진 사실임을 믿게 한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이루신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24년의 기다림에서 아들 이삭을 얻었다.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알게 한다. 야곱이 베델에서 받은 하나님의 약속도, 요셉이 어린 나이에도 13년의 고통의 세월동안 13년의 어려움을 보냈지만 환상을 통해 약속을 지켰으며 다윗도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어려운 난관에도 믿음으로 약속을 지켜 냈음에 주목하게 된다. 이 세상에 어떤 어려움도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신뢰를 구축하면 그 때를 이루신 분은 곧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이를 구축해 가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어려움도 약속에 신뢰를 구축하여 믿음으로 다 하면 이를 역사에서 갖는 시간에 ‘때’를 이루어 내신 새 역사를 알게 하신다. 이는 신앙생활이 가져 온 즉 주신 약속에 신뢰를 구축하면 약속들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믿음임을 믿게 된다. ‘하나님의 때’는 간구만이 이니라 기다림이다. 금번에 세계가 주목하는 뉴스는 북한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위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미북 정상회담’에서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북한의 비핵화가 궁극적인데 반하여 이를 경제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로 넌지시 전하여 서로의 상통의 기회가 생겼다. 향후 정부의 대북 지원 방식에도 관심이 집중되어야 함을 알게 한다. 이는 미국 국내법상 대북 제재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트럼프 행정부의 운신의 폭이 좁다는 점에서 한국, 일본. 중국의 정부도 함께 주도해서 ‘북한 재건 펀드도 만들어 북한 경제 개발을 돕는 방법을 제시하려 함에 이를 모두는 그 방법을 공유함에 이의가 없다고 자문하는 지혜를 비추기도 한 점에 이를 예의 주시한다. 미국 국내법상 미국 의회가 국내법상 대북 제재를 풀어 주기 힘들 것이라 이유를 말하기도 하면서 여기에 자상하게도 북한이 IMF회원국이 되지 못해도 소규모 지원은 받을 수 있고 세계은행 같은 일부 국제개발은행은 이사회 승인 등을 통해 지원을 할 수 있다고 귀띔도 알게 함에 예의 주의를 끌기도 한다. 한국 역시 2010년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걸치며 남북 간 교류 협력은 포괄적인 제한을 받고 있는 상태를 거치어서 한동안 “남북 간 교류협력은 “5’24 조치”를 해제하는 결단을 내려야 함에 이른 점을 유의하기도 하지만 여기에 남과 북은 동시에 서로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남과 북이 서로 약속해야 한다. 남북분단은 현대 세계의 정치구조와 이념 체제가 낳은 죄의 열매이다. 세계의 정치구조와 이념 체제가 낳은 죄의 열매이다. 세계 최대 강대국들의 군사적 이념적 대결의 상호분쟁 속에서 우리 민족은 속죄양의 고난을 당하여 왔다. 민족의 분단이 가져 온 결과는 지금까지 장기화 되면서 남과 북은 안보와 이데올로기의 명분하에 인권은 유린되고 언론과 출판,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억압되어 왔다. 우리민족이 갈라서서 있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서로 비방하여 싸우며 증오와 적개심을 품고 서로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서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 죄인으로 서 있음을 알게 한다. 지난 새천년이 되는 2000년이 되던 한 즈믄 해는 2000년 성령강림절 첫 주간에 분단 이후 남과 북의 두 정상이 성사되어 평양에서 만나 둘이 하나 됨의 포옹을 나누었고 환영하는 평양시민들의 미친 듯한 환영하는 모습에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의 큰 성령의 역사이심을 보게 함이었다. 여기서 살피는 믿음은 ‘형제와 화해하지 않는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며 너의 형제와 화목하고 난 제물만 축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화해함’의 은총을 깨닫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6-28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8
    다윗은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셨을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하였다. “나발이 죽었다 함을 다윗이 듣고 이르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다윗의 전령들이 갈멜에 가서 아비가일에게 이르러 그에게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당신을 아내로 삼고자 하여 우리를 당신께 보내더이다 하니 아비가일이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이르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사무엘상> 25:39-42).다윗이 광야의 요새와 십 광야의 산골을 전전하며 동굴에서 잠자던 사울을 해하지 않고 살려준 후의 일이다. 마온에 살던 나발은 갈멜 지역에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 되는 목축업을 하는 부자였다. 그런 나발에게 다윗이 소년 열 명을 보내어 군사들이 먹을 식량을 구하였나 보다. 그러자 나발은 다윗이란 사람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주겠느냐며 거절하였다. 이에 다윗은 사백 명의 용사들을 대기시키고 나발의 종들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들녘에서 일하는 나발의 종들을 지켜 주었는데 세금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에 다윗은 매우 불쾌하였던 모양이다. 이러한 위기를 간파하고 다윗을 설득한 사람이 바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다. 그녀는 서둘러 많은 양의 떡과 포도주와 양고기와 볶은 곡식과 건포도를 준비시켜 다윗을 찾아가서 다윗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말을 하면서 선을 베풀어 달라 한다. 이에 다윗은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나발의 종들이 죽게 될 위기를 벗어난 줄 알라고 한다. 그 사건 후 하나님이 나발을 치자, 다윗은 전령을 보내 정식으로 아비가일에게 청혼하여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이 사건에서 중시되는 것은 바로 다윗과 아비가일이 하나님의 시선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편에서 나발의 괘심한 행동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고, 아비가일도 하나님 편에서 다윗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았다는 것이다. 성경 기록자가 방점을 찍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의에 따라서 행동하였다는 데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와 의에 따라서 행동하는 데 그 윤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의가 세상 도덕과 괴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십계명을 보아도 엄연히 “네 부모를 공경하라”,“살인하지 말라”,“간음하지 말라”,“도둑질하지 말라”,“네 이웃에 대하여 거진 증거하지 말라”,“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등 세상 도덕과 보편적으로 통하는 점도 많이 있다. 아비가일 사건도 그러하다. 남편과 오랫동안 쌓은 정도 있을텐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남편에게 매정하게 대할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보다 공정하여서, 나발의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나님은 곧바로 나무라셨다. “여호와께서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사무엘상> 25:38). 나발의 잘못은 자신의 종과 목축을 보호해 준 다윗에게 서운하게 대한 데에만 있지 않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경솔하게 대한 데 대한 엄정한 심판이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다윗은 한때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성전에 있던 음식을 먹기도 하였으며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깊이 회개하는 일도 있었다. 하나님은 다윗의 여러 시행 착오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다윗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배꼽을 드러내 놓고 춤을 추기도 하였으며, 사울왕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이는 다윗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럼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았다는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주님은 나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심성을 주셨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달란트를 주셨다. 성직자에게는 영성을 주셨고, 작가에게는 영감을 주셨으며, 과학자에게는 사물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이 그 자녀에게 내려주신 달란트를 주님 영광을 위하여 발휘할 때 거기에는 축복이 따르게 될 것이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셨고, 이삭에게는 온유를 심성으로 주셨으며, 야곱에게는 지혜를 주셨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와 의를 알리게 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믿는다. 주님이 주신 영감의 달란트로 독자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글이 많은 이들에게 소개되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알리는 계기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이는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인도하시어 나의 의지를 생동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인도하시는 한 나는 주님이 인정하는 작가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할렐루야.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6-28
  • 특별인터뷰/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 채의숭 장로
    대의그룹 12개 회사 경영, “꿈과 기적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대의그룹 12개 회사를 설립하여 성공한 경영인으로서 39개 국에 무려 100개의 교회를 세우는 등 기적 같은 일을 해낸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 채의숭 장로(80세, 대의그룹 전 회장)를 만나 그의 삶과 신앙에 대해 들어 보았다.--고교 2학년 때 가진 큰 꿈채의숭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군(郡) 내에 하나밖에 없는 대천감리교회를 다니면서 목사님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이때부터 높은 이상을 가지고 큰 꿈을 품게 되었다. “저는요 이때에 세 가지 꿈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박사와 교수가 되는 것, 둘째는 큰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 되는 것, 셋째는 100개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지요. 지금에 와서 보니 하나님께서는 기적같이 그 꿈을 다 이루게 하셨지요.” 놀라운 기적이 채 장로의 생애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채의숭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서 전역한 후에 취직을 하기 위해 삼성그룹, 은행원, 고급공무원 등 세 곳에 응시하여 당시 취직이 어려운 때지만 한꺼번에 모두 합격하는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 회사사장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기 때문에 우선 삼성그룹에 입사하여 6년7개월을 근무했고, 다시 대우그룹이 창립될 때에 스카우트(scout)되어 13년 간을 근무하였다. 이후 그는 1985년 부도가 난 회사를 인수하여 회사를 설립하고 41세에 명실공히 사장이 되었다. 또한 1984년에는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이어서 명예경영학 박사와 선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넘치는 복을 더하여 주신 결과로 오늘의 대의그룹은 12개의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고, 박사학위도 받고 선교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선교에 대한 열정, 100개 교회 설립채의숭 장로는 서울 화양감리교회에서 36세에 장로로 장립 받았으며, 45세부터 선교에 대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2년 스리랑카에 처음 교회를 세웠고, 브루나이, 라오스,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중국 등 공산권과 이슬람권 등 교회를 필요로 하는 나라와 지역과 오지(奧地)에 모든 핍박과 반대에 굴하지 않고 교회를 세웠다.채 장로의 열정은 아무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하고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열정을 도우셨고, 마침내 39개 국에 100개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후에도 9개 교회를 더 세우고 열번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준비 중이다.채 장로는 장로로 시무하면서 선교에 적극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신학공부를 해 장로 은퇴 후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것은 오지 선교지에 세워진 교회는 목사의 신분으로는 비자가 나오지 않고 출입이 어려운 상황에서 채 장로는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그곳 성도들이 갈망하는 세례를 베풀고 축복을 해 줄 수 있는 좋은 방편이 되기 때문에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좀 더 폭을 넓혀 선교재단을 설립하여 체계적인 사역을 위해 일하기로 하고 ‘재단법인 대의미션’을 설립하였다. 자신의 소유 4층 빌딩과 얼마의 금액을 출연하여 설립된 재단은 앞으로 세계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것으로 기대된다.-제9대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 취임채 장로는 2016년 12월 제9대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에 취임했다. 대통령을 모시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인 국가조찬기도회는 연례적으로 개최해 온 매우 중요한 한국교회의 대표적 단체이다. 채 장로가 회장에 취임하면서 금년에는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가 제50회로 개최되는 뜻 깊은 행사가 지난 3월 8일 일산 킨텍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40개국 대표를 초청하였고, 이날 5천여 명이 참석하는 성대한 행사를 개최했다.채 장로는 국가조찬기도회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이번 제50주년을 맞아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세계국가조찬기도회'를 만들려고 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대한민국의 디아스포라(Diaspora)가 750만에 이릅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국가조찬기도회를 조직하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3개 도시에 조직이 되어 있고, 독일, 오스트리아, 이스라엘, 스위스, 영국, 스페인, 이태리, 프랑스 파리 등에 국가조찬기도회가 만들어졌다. 앞으로 일본의 동경, 오사카와 타이완, 필리핀, 말레시아 등 동남아시아 6개 국에도 조직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저는 과감하게 선교차원에서 세계 국가자체를 위해 조찬기도회를 조직해 나갈 것입니다.”면서 확고한 포부를 밝혔다.-베스트셀러가 된 저서, 1천 여회 강사로 초청받아채 장로는 지금까지 3권의 책을 출간했다. ‘주께 하듯 하라’ ‘하늘경영’ ‘주와 함께 하라’ 는 저서는 100만부 이상의 판매 실적을 올린 책으로서 채 장로 자신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어릴 때의 꿈을 실현하게 된 간증과 기업경영에 있어서 놀라운 기적을 이루게 된 것과 100개 교회 설립 비전을 담아 엮어 놓은 책이지만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로 판매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2014년 2월 14일에는 ‘주와 함께하라’ 출판감사예배가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려 성황을 이루었다.채 장로는 네 번째 책을 집필 중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으로, 실의에 빠지고 낙심된 자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그의 저서로 인한 유명세는 1천 여회가 넘는 강연, 간증, 설교에 초청받기에 이르렀고, 사회적으로도 각종 모임과 행사에 축사, 격려사에 초청을 받아 분주하게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활력이 넘치는 건강, 남은 계획채 장로는 41세에 사장이 되어 하루 4시간 수면을 하면서 회사경영에 몰두하다보니 건강에 이상이 왔다. 고혈압과 당뇨, 심장수술 두 번에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고, 신장에도 이상이 생겨 과로로 쓰러지게 된 것이다. 결국은 인슐린 주사를 맞으면서 병상에 눕게 되었다.채 장로는 무엇보다 선교를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 안타깝기만 한데 “하나님 선교를 못하게 됐습니다. 병상에서 일어나게 해주세요.”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에 브루나이에 교회 개척예배가 있어 꼭 가야 하는데 의사는 절대 안 된다고 하였지만 그는 지팡이를 잡고 참석했다. 그곳에서도 매우 어려운 형편에서 기도하자!는 일심으로 지난날 어머니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생각났다. “십자가 보혈로 이 환자의 병을 낫게 해 주세요.” 채 장로는 이 기도를 반복해 하였더니 기적같이 치유가 되었다고 고백한다.채 장로는 부인 김효신 권사(78세)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결혼 51년에 이르기까지 부부싸움 한 일 없으며, 운전기사도 45년간 함께하고 있는 것은 사랑과 은혜의 결과라고 했다. 채 장로는 설립된 ‘대의미션재단’에서 앞으로 계획적인 선교를 추진해 나갈 것이며, 또 다시 100개 교회 세우기와 저술활동에 진력하겠다고 말했다. 채의숭 회장 프로필△1939년 6월 22일생△화양감리교회 원로장로△대우 아메리카 사장△건국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제9대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 회장△재단법인 대외미션 이사장 <인터뷰/ 주필 김형원 장로>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06-28
  • 목회는 쉬운 것이다·65
    그래서 명함이 이력서가 되어 명분 있는 메이커를 나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류사회 속에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돼지가 양몰이 개가 된 것처럼 착각하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그런데 중요한 사건은, 유대인은 이상하게 생각할 여유가 있었으나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양심이 말살되어졌다는 것입니다.어떻게 하여 배운 적이 없는 저 사람은 배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신비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너는 무식한 사람이야, 정규 신학을 하지 않는 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라고 무시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있었다면 깜짝 놀랄 사건을 체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지금 우리는 열정적으로 목사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이유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란 표어를 간판으로 내세운 자신이 백마 탄 왕자의 기다림이 결국 행복할 수 있는가. 우리의 이상향인 꿈의 실현의 도래가 과연 행복한 것인가.그러기 위해 진력을 다해 완벽하게 준비하나 자신이 행복할 것인가. 그런데 배운 적이 없는 예수님의 답변이 이해가 되는 것인가.“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고 하신 말에 지금까지의 우리의 노력으로 쌓아놓은 돌무덤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우리를 보내신 분의 이야기라고 하면서 지금 내가 잘난 체하고 주문 외우듯 하는 자신의 것들이 행복할 수 있는가?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듯 하나님의 종말론적 세상을 멸망시키고 양과 염소를 구별하려고 날카로운 검을 가지고 나타나실 것이라고 공포의식을 고조시키는 목사들의 절대적인 그 말대로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가.지금 당하는 고통을 사실 지나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금새라도 해결될 것 같은 해결사가 온다고 한들 행복해질 수가 있는가.예수 믿는 사람들이 우리 하나님이라는 말로 위로받으려고 하는 힘센 빽을 가졌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예수쟁이들의 이야기들이 맞는 것인가?중들이 찾는 말대로 ‘나미아불타불관세음보살’이라는 용어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평안을 주는 것인가 그런 일에 능숙한 예수쟁이들이 말끝마다 우리 하나님을 부른다고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가.결국, 하나님이 인류가 원하는 그런 평안과 행복을 줄 수 있는 분인가 말입니다.돼지가 샴푸와 린스를 뿌려서 샤워했다고 깨끗해지는 것인가.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 속에 왜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가?분명히 헌금이라고 하는 명목으로 걷어서 기업을 경영하는 장사꾼에게 투자하여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방송국에 고발한 일을 예수쟁이들의 이야기라고 그냥 두어야 하는가?최소한 백일하에 드러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는 일이 기독교를 폄하하는 일인가. 나를 구하려고 오는 백마 탄 왕자가 오면 백설공주의 한 맺힌 한을 풀어주는 것인가?그래서 목이 터지라고 통성기도하고 이름 붙여서 두 손들어 목청을 돋우어 악을 써야 하는 제 꼴도 엇갈린 몰골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댄다고 되는 것인가.“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롬 10:4).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진정한 모습이 없기 때문에 열심이라는 뱀이 내어놓은 조건에 휘말림이란 이유가 마약 중독자와 같은 혈안이 된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하나님은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는데 어떻게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허망한 열심을 가지고 있는가?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6-28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2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42. 교회 지도자들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이 말씀은,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큰 복을 받기를 기대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설적인 도전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은 만사형통의 길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고난의 길, 희생의 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 14).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통해서 얻는 축복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이나 세상의 명예나 안락한 삶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할 줄 알고 긍정적으로 대처하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안정된 심령과 평안한 마음이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값진 보물이다. 그리고 그 보물은 자기희생과 헌신적인 삶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이기 때문에 세상의 상식과 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원리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이 희생과 헌신의 정신은, 교회를 지도하는 목회자들이 가장 먼저 실천하고 보여주어야 하는 참 목자의 모습이다. 우리의 목자장이신 예수께서 그렇게 사시면서 먼저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과 목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목사를 잘 대접해야 복을 받는다”는 말이 유행어처럼 되어 있는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공산주의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1917년 11월 7일 레닌이 주도하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시작된 구소련의 공산화는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을 통해 짧은 시간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20세기 지구의 거의 절반을 지배하는 세계적인 힘으로 급성장하였으나, 20세기가 끝날 무렵 1991년 12월 고르바초프의 사임과 함께 그 해 12월 31일 구소련이 해체됨으로 공산주의는 그 종지부를 찍었다. 공산주의가 그렇게 급속도로 성장한 이유 중의 하나는 유물론 사상으로 무장한 극도로 충성스러운 당원들의 희생정신이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할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핵심 희생자 계층이 있습니다. 우리는 총살형과 교수형을 당하고, 치욕을 당하며, 직장에서 해고되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가능한 모든 거친 대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중에 상당한 비율의 사람들은 피살되거나 투옥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실상 극심한 빈곤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가 얻은 수입 중에서 생존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을 제외한 모든 돈은 한 푼도 남김없이 당으로 돌립니다. …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광신자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광신자들입니다. 우리의 생애를 지배하는 위대한 동기는 세계의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 그것뿐입니다. … 그것(공산주의)은 나의 인생이요, 나의 생업이며, 나의 신앙이며, 나의 취미 생활이요, 나의 애인이요, 나의 양식이며, 내 삶의 전부입니다. … 나는 나의 이상 때문에 이미 투옥되었으며, 필요하다면 더 처참한 곳이라도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정신을 가진 특수한 계층의 헌신 때문에 공산주의는 성공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공산주의 사회에도 특권층이 증가하게 되었고, 계급이 만들어졌고, 무사 안일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자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이 작동하게 되었을 때 공산주의는 힘을 잃었고 쉽게 무너졌다. 물론 패망의 다른 이유들도 있었으나, 핵심문제는 사람에게 있었다. 오늘 교회 지도자들의 정신은 어떠한가목사가 교회를 처음 개척할 당시의 그 열정과 그 희생과 헌신의 정신을, 교회가 크게 성장한 후에도 유지할 수 있다면, 참으로 충성스러운 목자일 것이다. 인간에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목자는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목사들에게 희생과 헌신의 정신은 사라지고 오히려 성도들에게 대접을 받으려 하고 군림하려고 하고 물질이나 명예를 탐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분란과 분쟁에 중심에 목회자가 자리하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수의 정신으로 성도들과 교회를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정신으로 목양하는 목회자는 교회에서 재정문제로 분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성도들을 섬기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지도하는 목회자는 성폭행 성추행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다. 목사를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는 말은 평생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국가나 사회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수준이 낮은 집단으로 전락해가는 중대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일차적으로 목회자의 처신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목사들이 올바른 본을 보이면 성도들은 그 모본을 따라 배울 것이고, 그러한 목사들의 영향력은 사회전반에 걸쳐서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초기에 예수의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은 그야말로 철저하고 완전한 희생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었다. 야고보와 마태는 칼에 목베임을 당해 죽었고 빌립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마가는 사지를 묶인 채 밤새도록 끌려 다니면서 피투성이가 된 채 불태워 죽임을 당했다. 베드로와 다대오와 시몬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다대오는 창으로 찔려 죽었다. 요한은 끓는 기름가마솥에 들어갔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나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사도 바울은 네로에 의해 칼로 목베임을 당해 죽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을 때 그 십자가의 결말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4)는 말씀 안에 목회자가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함축되어 있다. 죽음은 희생의 극치를 말하는 것이다. 교회를 지도하고 목양하는 목회자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공산주의 사상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쳐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에게 희생정신과 헌신적인 열성이 없다면 교회는 결국 그 생명력을 잃게 될 것이다. 목자장 예수의 정신과 품성이 땅에서 교회를 섬기는 모든 목사들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다.예수님은 철저한 희생과 헌신의 산 표본으로 참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주님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주님이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희생과 헌신의 정신으로 성도들을 인도한 목사들에게 위대한 약속이 보장되어 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3,4). 힘을 잃어가고 있는 한국 기독교회가 다시 회생할 수 있는 첫 단계는 교회 지도자들이 먼저 회개하고 예수의 정신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목숨 바쳐 헌신하는 일이 아닐까? ‘자기희생의 법칙이 자기보존의 법칙’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6-21
  • 삶은 순종하는 말씀의 믿음이다
    믿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 모든 실상을 믿음의 눈으로 배우고 깨우친다는 것이다. 성서의 히브리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이 없이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예수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믿음은 다 가지고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자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기에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의미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한다. 이 삶에 믿음은 크고 작음에는 차이는 있으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다. 이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간관계의 신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앙하는 믿음인 것이다. 여기서 믿음과 신념은 구별된다. 흔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내가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고 하는 자기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자기의 생각으로,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을 흔히 믿음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신념은 “내가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하여 기적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신념에는 보장이 없다. 과거에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다면 예수의 말씀대로 믿는 그 시간부터는 신념을 초월한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헌신하기에 자기 몸을 드려 순교까지 각오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신이고, 생각이며, 의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를 소유하여 지속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객관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신앙이란 “계시에 순종하고 그 순종을 계속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하신 믿음을 소유하고 이에 순종하기를 계속바라는 것이다. 이 믿음은 신념의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성서는 자기 마음속에서 나오는 자기 확신을 가지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계시를 통하여 이를 성사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자기 확신을 신앙인 줄 착각하고 있다. 즉 어떤 한 가지 문제를 놓고서도 “믿습니다”를 수십 번씩이나 강조하고 고백한다. 이것은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생각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같이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서에 기록된 신앙 좋고 능력 있었던 종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기 생각대로 이루어지길 바라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이루어지길 바란다.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같은 이들은 자기 확신을 구하지 않았다. 성서에 기록된 신앙의 영웅들, 능력을 행한 사람들은 “믿습니다.”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굉장한 능력을 역사했다. 인간관계의 신념에는 절대적인 약속과 보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신념이란 어디까지나 자기의 믿음, 의지, 확신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인간의지는 사욕으로 인간중심임을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신념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것이 믿음이요 이를 소유하고 지속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이요, 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는 약속과 보장이 반드시 깃들인다. 신념은 결코 죄를 없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결단코 멸망하지 않는다. 멸망하지 않는 구원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약속이요 신, 구약성서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신념이 아니라 약속의 실현이 이루어지도록 몸과 마음을 다하여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믿음은 사람과의 관계의 신념이 아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신앙이다. 말씀의 약속이 삶의 의지가 된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 하는 것은 사람의 삶은 자기가 요구하는 바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스스로의 마음에 끌리는 작용이 있다. 이는 사람이 갖는 의지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6-20
  • 어떻게 지내십니까 /
    “사무실에 출근, 독서하고 친구 만나 환담하며 좋은 시간 가져”원로장로회, 영남교직자회, 나라사랑동지회 등 모임에 참석하여 교제 김수덕 장로(78세, 예장합동 새샘교회 원로)는 본인 소유의 사무실에 출근하여 성경읽기와 독서로 시간을 보내면서 찾아오는 친구들을 만나 환담하면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저는 목과 허리 디스크로 인하여 불편한 몸이지만 사무실까지 약 2km 가량의 거리를 매일 걸어서 출근하는 것이 운동이라면 전부이지만 다른 이상이 없이 건강하고 즐겁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고 말한다. 매주 2~3회 정도는 원로장로회와 나라사랑동지회, 기독시민운동, 재경영남교직자회 등에 참석하여 식사하고 친교하면서 신앙에 대환 환담을 나눈다고 한다. 김 장로는 1960년도에 경북 문경에서 상경하여 서울에 정착하기까지 어릴 적 고향 ‘과곡교회’에서 집안의 친척들의 반대와 핍박에도 잘 인내하였고, 서울에서는 예장합동 소속 ‘동원교회’에서 열정적으로 일하면서 섬기게 되었다. 항상 앞서고 헌신적으로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긴 김 장로는 84년에 장로장립을 받았다. 김 장로는 교회를 섬기면서 모든 일에 중심역할을 하였고, 과묵한 그의 성격대로 노회에서도 회계를 맡아 헌신하면서 장로회와 남전도회 그리고 영남교직자회 등에서 임원으로 앞장서 일했다. 그러나 교회의 여러 복잡한 사정으로 인하여 장로 다섯 명이 뜻을 같이하여 ‘새샘교회’를 개척하여 떠나게 되었고, 오늘까지 이 교회를 섬기고 있다. 김 장로가 교회를 섬기면서 가지고 있는 철학적인 결심은 “저는 교회에서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히 드리고, 무엇보다 교회예산의 5~10%를 저 자신이 부담하기로 다짐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해보니까 하나님께서는 축복해 주셔서 되도록 인도해 주셨다고 한다. 김 장로는 70년대 초 처음 시작한 신약 도매업(삼성약품)으로 상당한 재정적인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제약회사가 열악한 가운데 약품도매업이 잘 운영이 되었지요.” 이후 몇 년이 지나서 제약회사들이 자립하고 도매업이 재미가 없을 때에 김 장로는 과감하게 도매업을 정리하고 소폭직물회사인 삼선직물회사를 설립하여 회사가 잘 운영되었다. ”저는 사업에 성공하려면 사람을 잘 만나야 하고, 연고를 잘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면서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좋은 만남을 통해 사업을 성공하게 해 주셨다고 회고한다. 김 장로는 성공한 기업가로서 교회를 잘 섬기면서 많은 존경과 격려를 받게 되었고, 지금의 ‘ㅅㅇ빌딩’을 매입하여 노후를 위한 좋은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89년에 소유한 ㅅㅇ빌딩은 30여 년 전에는 변두리의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도시계획으로 인하여 건물 값이 크게 상승하였고 임대수익도 배가되는 복을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 임차인들이 좋은 사람들이 들어와 아무런 염려와 불편함이 없이 빌딩을 운영하면서 행복한 노후를 보내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건강식품회사와 삼성지정정비회사, 노인케어전문회사 등 좋은 업체가 입주하여 건물주인 김 장로는 흔히 보는 임대료 때문에 골치 아프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 것이다. “저는 내가 잘해서 된 것은 없고요 오직 하나님께서 좋은 길로 인도해 주셔서 물질에 어려움 없이 지금까지 교회를 섬기면서 살게 되어 감사합니다.”김 장로는 부인 윤이매 권사(72세)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고, 자녀들 모두가 신앙생활을 잘하며 자랐고 성장하여 결혼하여 사회인으로 당당하게 살고 있다. 장남은 패션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차남은 학원을 운영하고 있고 장녀는 결혼 후에도 회사에 재직 중이라고 한다. “우리 부부가 노년까지 건강하게 살게 된 것이 감사하고 아이들이 믿음의 바탕아래 성실하게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감사합니다.” 김 장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물질적인 복을 누리고 살게 되었고, 사업에서도 성공하게 된 것은 물질적인 관념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깨끗함과 분명함에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 대하여서도 “교회가 물질만능 사상에 사로잡혀서 본질을 떠나 하나님의 사역에 등한히 하여 인본주의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입니다.”라고 개탄했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06-20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7
    한국 사회에 기독교가 뿌리내림으로써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주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그 신념으로 인하여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오늘날 세계 10위 안에 드는 무역 대국으로 발전하였다. 교계에서도 대형 예배당이 수없이 많이 늘어났다. 서울 뿐만 아니라 지방에 가서 보아도 대형 예배당들이 눈에 확 들어 올 정도로 많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목회자들은 “장막터를 넓히자”며 예배당 확장을 위하여 건축 헌금을 하자고 제의하는 경우가 많았고, 교인들도 이에 잘 호응하였다. 주님의 뜻이면 이루어진다는 기도는 교회의 대형화를 가능하게 하였다.해외 선교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는 말씀은 교인들의 마음에 각인되었고, 해외 선교를 위한 기도와 헌금도 잘 이루어졌다. 고통받으면서도 유럽 곳곳에 교회를 세워 가는 바울의 선교는 교인들에게 매우 인상깊게 다가와서, 한국은 해외 선교에 대한 지원을 잘 하여 3만 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양상이 달라졌다. 1997년 IMF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해외 선교를 위한 퍼주기식 선교가 한계에 다달았다. 몽골의 경우를 보자. 교단별로 세웠던 신학대학이 국내에서의 지원이 줄어들어 어려움을 겪자 모 교단에서 세운 신학교는 폐쇄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의 대형 교회에서 울란바토르 지역에 지원하여 세웠던 대형 예배당에서는 신자 수가 많지 않아, 겨울이면 석탄 연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좁은 유치부실에서 예배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몽골의 종교 정책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세운 교회에서는 무거운 세금 폭탄으로 인하여 교회 문을 닫아야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교인들에게 꾸준히 성경 공부를 체계적으로 시킨 교회는 성장하여 갔고, 제대로 신학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몽골 변방으로 간 몇몇 몽골 성직자는 예배당 건물을 팔아 자취를 감춘 경우도 있었다. 선교사들이 여러 시행 착오를 겪는 와중에, 국내에 있는 대형 교회에서는 처음에는 많은 지원을 하다가 해가 거듭될수록 지원을 줄여 어려움을 겪는 선교사들도 많다.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반면에, 사탄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는데, 몇몇 교회에서는 몸에 맞지 않는 예배당 대형화를 모색하다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부도를 맞는 경우도 있었다. 조그만 개척 교회는 대형 교회에 밀려 성직자의 지인들만이 예배 시간에 자리를 채우는 경우가 많다. 개척 교회가 부흥하여 대형 교회가 되었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교계 지도자들은 미래에 물신주의의 범람으로 인하여 한국 교회도 유럽의 교회들처럼 교인이 없는 예배당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한다. 왜 이런 염려가 생기는 것일까. 이는 교계 지도자들이 한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물질적 축복만을 강조하다 보니 일어난 일일 수 있다.이제 대한민국도 복지 국가 대열에 들어선 만큼 ‘보릿고개’라는 말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대중은 배고픔을 면하는 문제보다 얼마나 멋있게 인생을 사는가에 관심이 더 많다. 대중이 K-Pop이나 웹툰, 게임, 영화 등으로 즐길 일이 많아졌고, 서민들도 웬만하면 해외 여행을 가고 맛있는 먹거리를 찾아다닐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이들에게 하나님이 물질적 축복을 주실 것이니 교회에 오라고 하면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성직자들이 생각해 낸 것이 기독교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그것이다.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와 천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에만 얽매여 있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파들보다 소외되어 있던 서민들에게 관심을 더 가지셨다. 그는 하나님이 아주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시고, 당신의 십자가 부활 후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함을 알게 하셨다. 또한 권력자나 부자에게 보이는 행복의 허상을 보지 말고 개인에게 임한 행복을 추구하게 하셨다. 그 행복은 죄의 굴레를 벗어나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앎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며,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함께 함으로써 체현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주님이 동행하고 계심을 확인하고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다. 주님이 십자가 보혈로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신 사랑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 위대한 인간미였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몸으로 체현하자.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알 때, 인간미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음을 상기하자.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당신은 행복한 자이니, 기도로 영적 호흡을 하며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자. 할렐루야.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6-20
  • 목회는 쉬운 것이다·64
    하나님 중심이라고 하는 사람은 행복한가?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위한 절대 신으로 섬기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가?우리가 바라는 인간의 꿈을 이루면 행복한 삶이 되는 것인가?사람들의 동경하는 백설공주는 과연 행복한가?영국의 황태자의 아내로 간 여자들은 행복했을까?돈 많은 집 아들과의 만남은 행복한 것인가?디트리히 본훼퍼의 말대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1945년 4월 9일 교수형에 처해져 39세의 삶을 마감한 독일의 신학자이며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악을 보고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라고 했답니다.종교가 아닌 이유가 오늘 우리들의 불행한 나날을 보내고 있음에 대한 것입니다. 백설공주의 행복이 백마 탄 왕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백설공주가 만난 백마 탄 왕자를 동경하는 수없는 허탄한 꿈이 망가지는데도 불구하고 반복하는 헛수고의 일일 수 있습니다.기독교는 분명히 세상적 종교가 아닙니다. 소위 세상은 백설공주의 콤플렉스, 로또의 콤플렉스, 대박의 콤플렉스와 같이 기독교는 하나님 콤플렉스에 쫓기고 있습니다. 백마 탄 왕자만 오면 꿈을 실현한다는 기복적 신앙이 기독교의 본질을 망가뜨리게 하고 있습니다.그는 기독교의 본질은 종교적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인물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죽은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욕구를 만족하게 하는 우상적 가치가 아니라 그분 자신이 생생히 자리하고 있는 우리는 그를 대면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요한복음 7장 15절에서, 유대인이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배운 것도 없는 무식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글을 읽을 수 있는가.지금 우리는 이런 질문을 능숙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배워서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학문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어디에서 얼마만큼 했느냐에 기준을 두다 보니까 계속 두터운 시날산 외투를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없이 끼어 입는데 능숙해 있습니다.명품 핸드백인가를 아는 방법은 비 올 때 알아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짜 명품 가방은 비가 오면 가슴에 껴안고 손과 발로 비를 맞지 않게 하지만, 짝퉁은 머리 위에 올려 비를 가리는 도구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질문처럼 배운 사람은 배운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기 위해 백일하에 드러내는데 능숙합니다. “어떻게 배운 적이 없는데….” 못 배운 사람이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는가에서 신학교 4년에 목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서구문명이 유대인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M. Div.라는 3년 과정을 또 만들어 놓아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들에게 복잡한 학문 속에 깊이 파묻었던 것입니다.그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을 바로 말하려면 정통 학문을 해야 한다”라고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받은 것으로 교인을 내 눈 밑에 두기 위해 강단을 높이고 그들을 무시하는 극단적 용어가 설교로 둔갑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밟고 무시하고 있는가 이것이 목회자가 제사장 된 권위로 생각하게 되었고 주일 설교 때마다 박사학위 가운을 입고 학문성에 대한 과시가 이제 어떻게 조절할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헬라어, 히브리어, 원문번역, 영문성경 등 유명하다고 하는 똑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가 바로 유대인의 질문이었습니다.“네까짓 것들이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느냐?”“네가 배운 학문성도 없는 무식한 사람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느냐?”그래서 목사들은 무엇을 하는가?이 질문에 대처하기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6-20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1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 41. 기독교 구원관의 재정립이 시급하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구원’이다. 죄로 인해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원리는 어쩌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구원론이 잘못되면 기독교 신앙 자체에 모순이 발생하여 나머지 모든 신조나 교리에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기독교의 올바른 구원관을 성경에 입각하여 바르게 이해하고 참된 믿음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교파들 가운데 왜곡된 구원관으로 성도들을 가르친 결과 성도들의 신앙관 자체가 정도(正道)에서 이탈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한 구원관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도들을 참 신앙인으로 성숙시킬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구원관을 가지고 교회를 출입하는 교인들은 그 행실이나 삶이 비신앙인들과 별로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비난하는 원인을 제공함과 동시에 교회성장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예정론 구원관이란 무엇인가예정론 구원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아마도 아우구스티누스일 것이다. 그의 구원론에 의하면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형벌 받도록 예정되었다. … 예정된 자의 수는 고정되어 있고 변경시킬 수 없고 또한 교체시킬 수도 없다. … 이들은 넘어지거나 타락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아주 넘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은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대한기독교서회, 그리스도교 대사전, p757). 종교개혁자이자 장로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칼빈도 거의 같은 주장을 하였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하나님은 각자의 장래를 정해 놓았다. 인간은 같은 운명으로 창조되지는 않았다.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상동, p758). 이러한 칼빈의 주장에 대해 당시 종교개혁 관련 신학자로 활동하던 챤지(Girolamo Zanchi)는 더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여서 “선택된 자는 영을 상실할 수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갈 수도 없다”(상동, p.759)고 주장하였다. 예정론과 관련된 이러한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① 인간의 구원은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구원의 여부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결정된다. ②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구원을 받을 것인지 멸망을 받은 것인지가 정해져 있다. ③ 구원을 받기로 결정된 자는 그의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결국 구원을 받게 될 것이고, 멸망으로 정해진 자들은 혹시 신앙을 시작해도 언젠가 타락하여 멸망 받게 된다. 예정론 구원관이 성서적인가아우구스티누스나 칼빈이 이러한 예정된 구원론을 주장할 때에는 성경을 근거로 설명했을 것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5,11).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이러한 성경절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을 미리 선택하셔서 정해 놓으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에 매우 주의하고 신중히 해야 할 것은 그 해석이 다른 모든 성경절들과 조화를 이루고 상호간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성경절들도 많이 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 33:11).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누구든지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돌이켜 나에게로 돌아오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시고, 내막적으로는 구원받을 자들을 이미 정해 놓으셨다면, 그것은 그분의 존재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공의’의 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이중적 속성을 가진 분으로 오해할 여지도 남게 된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공정하게 대하시는 것은 숨길 수 없고 돌이킬 수 없이 불변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당위성과 능력과 권세가 있다는 말이지, 그 주권으로 구원받을 자를 스스로 정하신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 부여하신 ‘자유의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든 인간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굳이 문자적으로 적용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그가 장차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것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의 구원받을 백성으로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 더 성서적인 표현일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롬 8:29,30)다는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구원은 삶의 열매로 확인되는 것이다예정 구원론에 관련된 성경절들은 대개 바울의 서신에서 인용된다. 그러나 바울의 다른 글들을 보면 그의 구원관은 오늘날 교회가 가르치는 예정론과는 상관이 없음 깨닫게 된다. 바울이 회심한 후의 자신의 삶에 대하여 기록한 내용을 살며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이 성경절은 의심의 여지없이, 바울이 자신의 얻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얻은 바울도, 끊임없이 전도 생활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매우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경건을 연습하라”(딤전 4:7)고 하였고, 자신도 날마다 죽는 연습을 한다고 고백하였다(고전 15:31). 베드로도 얻은 구원을 놓치고 옛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을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벧후 2:22)고 표현하였다. 예정 구원론은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의 삶에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하였다. 이미 구원이 예정된 자들은 현재를 어떻게 살아도 결국에 가서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 때문에, 대부분의 신자들이 현재의 경건하고 의로운 삶에 대하여 깊은 관심도 없고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열매나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활이 비신자와 구별되지 않는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이나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이 실제 생활에 적용되지 않는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는 말씀이 실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구현되지 않으므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비평거리가 되고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게 된다. 옥토에 뿌려진 좋은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이 성경의 이치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후의 모든 삶이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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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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