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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습목회 논쟁
    ◇기독교는 성경에서 제사장 종교 전통이 아닌, 예언자 종교 전통을 이어간다. 그 직이 대를 이어 세습되는 제사장 종교와 달리, 아버지가 목사라고 그 아들이 목사가 되거나, 아버지가 장로라고 하여 교회에서 그 아들이 그 직을 이어가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소명(召命)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영국이나 미국 등 오랜 기독교 전통을 가진 사회에서는 선대(先代)의 목회지를 후대(後代)가 이어가는 세습목회가 하나의 미덕이었다. 할아버지의 목회지를 아버지가 잇고, 또 아버지의 목회지를 아들이 잇는 것은 그 지역의 자랑거리였다. 당시는 교구주위 목회였기에 그 교회 신도들도 안정감을 갖고 대를 잇는 목회자의 지도를 받고 또 존경했다. 아버지 목사의 영적 지도를 받던 신도가 그 아들 목사의 영적 지도를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그런데 현대사회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특히 한국교회에서는 대를 잇는 세습목회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세습되는 교회들이 대부분 대형교회들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대형교회에는 돈이 있고, 명예가 있고, 종교권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교회를 단지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차지한다는 것은 특혜라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회사에서 대형교회의 출현은 그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세기 초까지는 모든 교회가 지역의 교구주의나 구역주의 택했다. 거주지 지역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거주지를 옮겨 이사를 가게 되면 출석교회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한국교회도 이러한 원칙이 지켜졌다. 교인이 이사를 가면 이명증서를 떼어주고 이쪽 교회에서 집사직분을 가진 사람이면 이사간 교회도 같은 직분을 허락했다.◇그러나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지역이 도시화 되고, 자가용 등 교통수단이 발달함에 따라 웬만한 거리는 주일 아침시간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도시에 소위 수천명이 모이는 대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수만명이 한꺼번에 모이는 대형교회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설교를 좀 잘한다는 평가를 듣거나, 신유은사가 나타난다거나 하는 교회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에도 이 시기에 대형교회들이 나타났다. 오늘날 그 대형교회를 이룬 1세대 목회자들이 은퇴하고 후임목회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세습목회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카리스마적 목회자의 교체기에 자칫 빠지기 쉬운 교회의 분열을 막고, 또 교인들이 그 아들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따라서 한국의 대형교회들의 세습목회는 아직 과도기적 단계로서, 그것이 한국교회 전체 공동체 안에서 득인지, 실인지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 일부 교단에서 세습목회 금지법을 통과시킨 것은 너무 서두른 감이 있다. 뿐만 아니라 세습목회 방지법이 자기네 교회 목사를 개교회 공동의회가 결정할 수 있다는 헌법과 차별금지법에 저촉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다만 세습목회가 사적 욕심에서 비롯되었거나, 후임목회자가 노회나 총회에서 자기네 교회의 등치만 믿고 동역자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면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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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18
  • 대중 여론
    ◇중구삭금(衆口金)이란 밀이 있다. “많은 무리의 주둥이가 쇠도 녹인다”는 뜻이다. 대중 여론(大衆輿論)의 위험성을 한 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왕조도, 정권도 여론이 나빠지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요즘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재벌들의 처지가 그렇다. 그 동안에는 관행적으로 인정되어 오던 일도 재벌 2세들이 새삼스럽게 여론의 표적이 돼 범법자처럼 몰려가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의 대표적 기업인 대한항공의 오너 일가에 대한 여론의 뭇매는 세상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예이다. 그리고 여기에다 일반인들은 제 잘난 체 하던 재벌들도 여론 앞에서 쩔쩔 매는 꼴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듯하다. 그러나 자유시장 경제질서를 가진 우리사회에서 기업의 경제활동이 위축되는 반재벌 여론은 경계해야 마땅하다.◇우리사회에서 대중 여론의 또 다른 피해자는 기독교 신앙인들 가운데 이단 시비를 당하는 집단이다. 이단의 문제는 기독교 내부의 문제이다. 기독교는 이단 시비를 통해서 신학과 교리를 발전시켜 왔다. 따라서 기독교 밖에서는 이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에는 이단을 전문으로 감별(鑑別)한다는 ‘이단감별사’라는 자들이 있어서 자신들과 이해 관계가 얽히면 누구나 가차없이 ‘이단’으로 공격한다. 이들의 초기 도전(挑戰)을 제대로 응전(應戰)하지 못하고 ‘내가 이단 아니란 걸 하나님이 알면 되었지 저것들과 싸워서 뭐가 득이 되겠냐’며 무시하다가는 끝내 이단으로 매도되어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전락할 수 있다.◇한번 이단으로 찍히면 어제의 친구나 동료도 모두 외면하고 등을 돌린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마치 전염병 환자 취급을 당해 기독교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사회생활에서도 소외당한다. 또한 교계언론조차도 ‘뜨거운 감자’가 되어 그들을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고, 세속 상업언론은 마치 그들이 사회악을 저지르는 사교집단쯤으로 취급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격한다. 그래서 그들이 이단으로 지목된 그 교회에 이름 난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 유력한 인사들이 관련하고 있음이 드러나면 사정없이 반사회적 인사로 매도된다. 이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써, 명백한 인권침해이다.◇이런 종교 문제로 인권을 침해당한 인사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사법부에 자신의 인권 보호를 호소해도 법원은 이를 종교 문제라며 ‘비판의 자유’를 내세워 무시해버린다. 우리사회 어디에도 이들의 인권을 보호할 기관이나 장치가 없는 셈이다. 이번에도 ‘미투’다, ‘구원파’다 하여 이단 시비를 당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 ‘사교’ 집단 취급을 한 언론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향력만 믿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무분별하게 공격한 것이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는 아무도 없다.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마 26:52). 여론은 곧 검이다. 그 검을 함부로 휘두르면 자신도 망하고 사회도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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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10
  • 사회적 병리현상
    ◇결혼한지 몇년 안된 어느 30대 후반의 청년이 처가에서 장인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장인이 지금 좌파정부를 비판한 어느 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서, ‘이 정부가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알 수 없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를 옆에서 듣고 있던 사위 왈 “아버님, 지금도 그런 가짜뉴스를 믿습니까?”라고 했다. 그 청년은 언필칭 보수계 언론의 보도는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사회적 병리현상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일부 30~40대 청년들의 의식구조에 큰 병이 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디에서부터 이런 사회적 병리현상이 쌓여왔는지는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진보(進步)는 무슨 짓을 하든지 믿을 수 있고, 보수(保守)는 어떤 말을 해도 믿을 수 없다는 깊은 불신이 이같은 어이없는 사회현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지금 우리사회의 진보를 표방하는 ‘좌파’들은 시민단체라는 이름의 패거리를 만들어, 저들이 그렇게도 불신하는 보수세력이 이루어놓은 사회 정치 경제 질서에 ‘나도 좀 나눠먹자’며 끼어들지 않는 곳이 없다. 참여연대로 대변되는 사회운동가들은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기관 곳곳에 이미 또아리를 틀었고, 무슨 법연구회니 하는 법률가들은 사법부를 장악하고, 전교조는 교육현장에서, 민주노총은 노동현장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주사파들은 정치권에서 단물을 빨며 우리사회에 소위 진보주의(친북 좌파)를 퍼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들은 심지어 김일성이 민족전쟁을 일으켜 150만명에 이르는 생명을 희생시키고 오늘날까지 우리민족에 고통을 안겨준데 대해서는 외면한채, 어린이용 한국사에서조차 김일성은 민족의 영웅이라고 추켜 세우고 있다.◇아예 이들은 ‘양심’ 자체가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가 양심인데, 개인의 양심은 사람에 따라 그 기능이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이는 수정같이 맑은 양심을 가져 작은 먼지에도 반응하지면, 어떤 이는 발바닥같은 양심을 가져 왠만한 모래 정도는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화인’(火印) 맞은 양심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내로남불’을 정당화 하고, 남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자신의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한다. 남에게는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엄격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어떤 경우에도 인정하지 않는다. 대표적 이기주의이다. ◇이번에 ‘드루킹’으로 대변되는 댓글 여론조작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의 양심은 어떤 것인가. 자신들은 더불어 민주당 당원이면서 여론조작을 위한 댓글은 보수단체의 도덕성을 흠집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30~40대라고 한다. 이들이 우리사회의 중추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인데 자신들의 사고에 크다란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가장 건전하고 건강한 사고력을 가져야 할 시기에 세상을 읽는 그들의 정신세계가 병리적 현상을 드러내고 있으니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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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25
  • 불의한 농부 비유
    ◇신약성경 마태복음 제21장에는 ‘불의한 농부 비유’가 나온다. 한 집주인이 돈을 많이 들여 포도원을 만들어 짐승의 피해를 막기 위해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는 등 농장을 완전하게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는데,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 세를 받으려고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더니, 농부들이 세를 주기는 커녕 종들을 잡아 심히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해서, 주인은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냈으나 그들도 맞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그래도 자기 아들은 공경할 것이라고 생각해 그 아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자 오히려 ‘이는 상속자니 아예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며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다”고 했다. 참으로 끔직한 일이다.◇포도원 주인으로부터 세를 얻은 농부들은 좋은 포도원을 자신들에게 세로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농사를 잘지어 약속한 정당한 세를 주인에게 낸 후에 자신들의 몫을 차지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만에 하나 그 해에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주인에게 낼 세가 사회통념상 너무 높아 불만이 있다면 주인에게 세를 감면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옳다. 그래도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포도원을 세로 얻어 농사를 지으면 된다. 그런데 정당하게 그 세를 받으러 간 종들을 죽이고, 아예 그 포도원을 빼앗으려고 그 아들까지 죽인 것은 사악한 범죄이다. 이 비유를 보면 자본가를 타도대상으로 삼아 적(敵)으로 규정한 20세기 공산주의자들이 떠오른다. 자신들이 갖지 못한 것은 자본가들이 많이 가졌기 때문이라고 여겨 자본가들의 것을 빼앗아 무산대중에게 나누어줘야 한다는 사상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사회 일부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지금 우리사회에서 자본주의의 모든 혜택을 누리면서도 자본주의를 비난하고, 반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주장이 전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인류사에서 자본주의 이전에는 자본주의만큼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경제적 ‘평등’과 ‘분배’를 통해 국가의 ‘복지’와 ‘정의’를 내세우지만, 실은 남들이 힘들게 이루어놓은 것을 함께 나눠 쓰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우리사회의 재벌이나 자본가들 중에는 ‘내 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반사회적 일탈 행위를 일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자들은 그 부(富)가 단지 자신이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지, 사회로부터 자신에게 온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포도원을 만든 사람도, 재벌기업을 이룬 사람도, 모두 사회를 위해 자신의 돈을 투자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포도원 농부나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같이 오히려 그들을 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주님은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라고 묻는다.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라고 했다. 청중의 이 대답이 그 시대 그 사회의 정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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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11
  • 영혼의 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부활신앙’이다. 예수의 재림 때에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죽은 자가 모두 살아나 선악간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1,52). “주께서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이는 죽은 자가 마지막 때에 새생명으로 부활한다는 것이다.◇그런데 기독교에는 사람이 죽은 후의 상태에 대해 두 가지 설(說)이 있다. 하나는 사람이 죽으면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어 육신은 흙에서 왔으므로 흙으 로 가고, 영혼은 하나님의 영원한 입김에서 왔으므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영혼불멸설’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을 때 육신과 함께 그 영혼도 죽는다는 ‘영혼멸절설’이 그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기독교 신학은 오래동안 영혼불멸설을 정통으로 믿어왔다. 그래서 영혼멸절설을 말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영혼불멸설이 부활신앙과 공존할 수 없는 비성경적 관념이라고 주장한다.◇그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 출신 신학자 오스카 쿨만이다. 그는 “영혼의 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라는 논문을 통해 영혼불멸설의 허구성을 성경적, 철학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죽은 자의 영혼이 육체와 별개로 사후에 존재한다는 설명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성경의 부활신앙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오랜 전통을 가진 영혼불멸설 역시 성경에서 온 것이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1,8).◇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2장은 “인간의 육체는 죽은 후 흙으로 돌아가 썩게 된다. 그러나 그 영혼은 결코 죽거나 잠들지 않고 불멸의 실체로서 조물주이신 하나님께로 즉시 돌아간다. 의인의 영혼은 죽는 순간 거룩하게 되어 완전해져서 지극히 높은 천상의 나라에 들어가 빛과 영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게 된다. 이미 죽은 모든 성도들은 전과 같이 여전한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 두 설 중에 하나는 이단인가. 그 또한 아니다. 두 설은 결국 부활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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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29
  • ‘교회’와 ‘교회당’
    ◇“○○교회 매매.” 이 말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불쾌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용어이다. 흔히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한국기독교의 타락상을 말할 때 제일 먼저 꺼내는 말이기도 하다. 마치 목사가 하나님 이름 팔아서 사람 좀 모우고 땅도 늘려 돈을 챙기기 위해 교회를 부동산 시장에 내놓고 거래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과연 교회(ʼεκκλησι′α)를 사고 팔 수 있는 것인가? 이는 한국기독교가 제대로 ‘교회’(敎會)와 ‘교회당’(敎會堂) 혹은 ‘예배당’(禮拜堂)을 구분하지 않은 채 그 용어를 혼용해 사용하는 데서 오는 오해스런 현상이다. 한국기독교도 전래 초기에는 ‘교회’와 ‘예배당’으로 구분해 사용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예배당’은 사라지고 모두가 ‘○○교회’라고 불린다. 기독교가 마땅한 용어를 제시하지 않으니 어떤 이들은 ‘교회’와 ‘건물교회’로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한국천주교의 경우는 ‘교회’(敎會)와 ‘성당’(聖堂)을 명확하게 구분해 사용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이고, 성당은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 축성한 거룩한 건물, 신자 공동체가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이다. 중국기독교도 역시 ‘교회’(敎會)와 ‘교당’(敎堂)이 명확히 구분한다. 이를 혼용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한국기독교만이 ‘교회’와 ‘교회당’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교회’로 통칭한다. 그러다보니 ‘교회당 매매’라고 해야 할 것을, ‘교회 매매’로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신자가 흔히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간다”고 한다. 이 경우에도 역시 신자가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당에 가는 것이다. 교회당에서 모인 신자들의 모임이 곧 교회이다. 한국기독교에 교회론이 흔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가 신자 공동체인지, 눈에 보이는 십자가가 달린 건물인지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신학교에서는 교회와 교회당을 구분해 가르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며, 목회자가 섬기는 것은 교회이지, 교회당은 아니다. 그것이 곧 그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즉 교회가 교회당이고, 교회당이 곧 교회라고 해도 틀린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언어가 개념의 표현으로 사물의 가치를 나타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신학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성경은 교회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딤전 3:15), “자기 피로 사신 것”(행 20:28),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고전 1:2), “만세와 만대에 감취었던 비밀”(골 1:26)이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당을 지어 헌당하면서 디모데전서 3장 15절을 인용하여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이 ‘집’은 하우스를 뜻하는 ‘오이코스(‛οικοs)’를 사용하고 있으나,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신자의 공동체를 이르는 말이다. 그것이 곧 교회이다. 한국기독교에는 아직 그 용어가 개발되지 않아 잘못 혼용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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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21
  • 순진한 안보
    ◇구약성경 열왕기하 20장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1년 앗수르에 망한 후, 남왕국 유대의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이 들었는데, 그는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통고를 받자, 면벽하고 여호와께 기도했다. 그는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하며 심히 통곡했다. 사실 히스기야는 성경에서 보기 드문 선한 왕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우상을 철폐하는 등 여호와 신앙을 부흥시키는데 앞장 섰다. 그는 그 기도의 응답으로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받았다. 그 때에 동쪽의 신흥 제국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왕의 친서와 예물을 가진 특사를 보냈다. 이에 감격한 히스기야는 그 특사에게 “자기 보믈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며” 환대해 보냈다.◇이 소문을 들은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을 찾아가서 “저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라고 물었다. 왕은 “내 궁에 있는 것을 저희가 다 보았나니 나의 내탕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이사야는 왕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며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래도 히스기야는 그런 날이 올지라도 “내가 사는 날 동안에는 태평과 진실이 있으면 된다”며 오히려 이사야를 속좁은 위인으로 무시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유대 왕국은 오래지 않아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왕궁과 성전의 모든 금은보화는 늑탈되고, 왕족과 귀족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그리고 70년의 세월을 보냈다. 국가 지도자의 순진한 안보정신이 어떤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평창올릭픽에 북한이 참여하자 청와대는 한반도에 ‘평화’가 이루어진다며 북한이 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원하지 않은 것까지도 다 해주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우리가 저들에게 이렇게 잘해 주면 저들도 우리의 진심을 알고 대화와 교류로 나울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는 순진한 히스기야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적장을 환대하고, 한미 연합훈련도 연기하고, 정상회담도 추진하면 과연 그들로부터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안보를 위협하는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저들은 적화통일의 야욕을 이제까지 한 번도 바꾼 일이 없는데,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민다고 저들도 진심에서 그 손을 잡으리라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 아닌가. 천암함과 연평도는 누구 짓인가. 솔직히 김대중도, 노무현도 저들에게 줄 것 다주고 결국 빰 맞았다.◇세계사에서 민족 간에 전면전을 치룬 나라가 대화와 교류로 평화통일을 이룬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남북은 이미 한 차례 비참한 민족전쟁을 치루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역사의 아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제력이든, 군사력이든 힘이 강한 쪽이 살아남을 수 밖에 없다. 국가 지도자의 순진한 안보정신은 나라를 위험에 빠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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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07
  • 성찬 성례
    ◇성찬 성례전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려는 언약의 표로 세우신 성례이다.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9,20).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이다. 주님은 당시에 떡과 잔을 나누어주면서 떡은 주님의 몸이라 하셨고, 잔은 주님의 피라 하셨다. 그 떡과 잔은 예수의 찢긴 살과 그가 흘린 피를 상징적으로 먹고 마시므로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하며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성찬 성례전을 행할 때마다 십자가에서 찢긴 주님의 살과 흘리신 주님의 피를 기념하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행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성찬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세 가지로 온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고, 설교는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찬은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성찬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는 증표이다. 성찬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과 믿음과 은혜에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과 재림의 약속을 기억하고 , 성령의 임재를 기원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기쁨을 맛보는 예전(禮典)이다. 그러므로 성찬 성례전은 그리스도가 정하신 대로 정당하게 집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자에게 떡만 주고 잔을 주지 않거나, 성찬의 떡과 포두주에 절을 하거나, 높이 들어올리거나, 어떤 신물(神物)처럼 동경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정하신 뜻에 모순되는 것이다.◇교회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可視的) 교회와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不可視的) 교회로 존재한다. 보이는 교회는 현재 여기에서 눈에 보이는 교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현실 교회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온세계와 우주에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무리들이다. 이 가운데는 하나님으로부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이 모두 포함된다. 그런데 보이는 교회나 보이지 않는 교회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되고, 주님의 지체가 되고, 형제가 되는 비결이 곧 성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찬의 비밀이 크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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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2
  • 세례 성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두 가지 성례(聖禮)가 있다. 첫째는 세례이고, 둘째는 성찬이다. 이 두 가지 성례전은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것으로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공동체가 기념으로 지키라는 부탁의 말씀을 남긴 매우 의미있는 행사이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일곱 가지 성례전을 기념하고 있었으나, 개혁교회는 주님이 직접 기념하라고 가르친 세례와 성찬 두 가지만을 성례로 본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성례 중의 세례는 중생과 죄씻음을 의미하며, 지상에 있는 가시적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성도로서 가입하는 필수적인 절차이다. 성도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개체 교회에 속할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체 보편적 교회에 속하게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언약의 그릇이다. 성도가 세례를 받아 그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새 생명의 은혜언약을 누리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세례는 세상 끝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가운데서 항상 지속되어야 할 예전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6:4).◇세례는 봉헌의 표시이다. 세례를 통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어 진정한 교회의 일원으로 영접 받게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된다. 대부분의 교회는 세례 받음으로 교회의 직분을 받을 자격을 갖는다. 또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확연히 나타낼 수 있다. 세례는 우리가 주님 앞에서 정결하게 된다는 징표이다. 세례를 통해서 죄를 사함받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확증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가진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도록 하는 인식의 표시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새로운 삶에 연합하는 징표를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져야 한다. 따라서 세례는 진심과 성심으로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한 지만이 받을 수 있는 성례이다.◇그러나 세례가 구원에 있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8장 제5항은 세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례를 멸시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것은 큰 죄악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는 데 있어서 세례가 절대불가결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례를 받지 않고도 중생하여 구원받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세례를 받았음에도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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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09
  • 성례에 대한 논쟁
    ◇성례에 대한 견해는 각 교파의 전통에 따라 각기 조금씩 다르다. 그로 인해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는 세례와 성찬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종교개혁자들 중에도 루터와 쯔빙글리와 칼빈이 그 견해를 각기 달리했다. 그리고 또 이들의 견해와 전혀 다른 입장을 고수한 재세례 파도 있었다. 루터는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진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든, 어른이든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역사로 보았다. “세례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선언하는 바와 같이 죄의 용서를 가져오며 죽음과 악마로부터 건져내주며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준다”(루터 파 소교리문답). ◇그러나 칼빈은 세례를 교육적 의미에서의 은총의 수단으로 보았다. “세례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시고 그것을 보지도 기억하지도 우리에게 돌리지도 아니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해주는 율법적 방편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주의 죽으심에 접붙임이 될뿐 아니라 그와 연합하여 그의 모든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확실한 증거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에서 이러한 신생(新生)의 보증을 받는다”(기독교강요 제15장 세례의 예전에 관하여).◇세례에 관한 특이한 논쟁은 “믿는 자의 세례”를 주장한 재세례 파에서 제기됐다. 제세례 파는 영적 재생의 상징인 세례는 인격의 변화에 일치되어야 하므로, 신앙의 인격적 결단과 유리된 세례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유아 세례는 효력이 없으며, 신자가 된 사람은 자신의 판단과 책임아래 중생 및 신앙의 상징으로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유아 세례를 부정하고 믿는 자의 세례를 주장하는 침례 파들의 세례의식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집례자의 기도 후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신앙은 초대 교부 다메섹의 요한 때부터 막연하게 내려온 설(說)이다. 그러다가 12세기에 이르러 ‘화체’(化體)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때 찬반 논란이 많았으나 1215년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의로 결정되었다. 이 때부터 성찬식에서 배찬자에게 떡만 주고 잔을 주지 않는 풍속이 생겼다. 그럼에도 가톨릭교회 안에서 논쟁이 계속되다가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인정되어 오늘날까지 그대로 행하고 있다. 15세기 체코 보헤미야의 후스 파의 칼릭스 파와 타보르 파 간의 ‘리판의 전투’는 성찬식의 떡과 잔(이종배찬)을 놓고 벌어진 전쟁이다. ◇그 후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도 가장 뜨거운 논쟁은 역시 성찬 문제였다. 루터는 축도 후에 성만찬 물질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는 화체설은 거부하였으나, 성찬식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와 함께 있다(실재설)고 했고, 쯔빙글리는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그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며 성만찬은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것(상징설)이라고 했다. 그리고 칼빈은 성만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격적 임재를 주장하며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임재설)으로 보았다. 이 성례전 논쟁은 신학에서 ‘다른 것’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라는 대표적 사례이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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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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