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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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 안악 출신
이환수(李煥秀 1909.2.8~1985.6.30) 목사는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안곡면 복삼리에서 이기범과 김의성 사이에서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친이 먼저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가 태어난 안악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지역이어서 그들이 세운 명신중학교(明信中學校)를 다니며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전해받게 되었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에 입문하였다. 이 때가 1924년의 일이었고, 1932년 부터는 광흥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기도 했다.
이환수는 당시 곡창지대였던 대원면에서 쌀을 배에 싣고 진남포까지 왕래하며 사업을 하였다. 후에 안악군 안동면 장월리에 월산소학교(月山小學校)를 설립하고 친히 그 학교에서 몸을 담아 봉사하였다.
이때 성경과 쪽복음을 팔러 다니며 전도하던 어느 권서의 중매로 김익성을 만나 결혼하였으며, 아내와 함께 재령교회 부흥강사로 온 성결교회 이성봉(李聖鳳) 목사 집회에 참석했다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고 자신을 헌신하게 되었다.
이듬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이환수는 주중에는 신학교에서 신학훈련을 받고 주말에는 안악군 대원면에 위치한 원동교회(元洞敎會, 1918.3.3 설립) 전도사로 시무하며 주의 종의 길을 걷고 있었다.
1942년 5월 20일 황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46년 6월 공산당의 박해로 월남하기 전까지 황해도 황주군 흑교면 용현리 용연교회(龍淵敎會 1896 설립)에서 목사로 시무하였다.
이환수 목사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한 성품은 그의 목회 형태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일제하에서 일경의 요시찰인물로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눈총을 받게 되었고, 그는 기독교 사상가로, 신사참배 거부로 그들의 눈을 피해 피신하기도 했다.
월남 후에는 서울 원효로에서 피난온 북한의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친히 덕영학사(德英學舍)를 설립 운영하며 조봉화 목사, 황금천 목사, 박찬목 목사, 허간 장로 등이 동우회 회원으로 함께 운영하였고, 당시 새문안교회를 세운 언더우드 선교사의 도움의 손길도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덕영학사에 몸담고 있던 100여명의 생활을 꾸려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는 구호물자를 지원받았다.
한편 이환수 목사는 서울 도화동에 청소년교육을 위한 소년관(少年館)을 설립 운영하기도 하였다.

평양신학교 졸업
청파동에 청암교회 설립
정통신앙과 개혁주의 신앙 보수
6.25 전쟁으로 제주도서 피난민교회 세워
장로교 분열 당시 NAE 보수진영 사수

이환수 목사는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하여 오늘의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1가 97-32에 청암교회(靑岩敎會)를 설립, 한평생을 한 교회에서 성역을 감당하였다. 광복 후 혼란기에 처해 정국이 어수선하던 1948년 9월 19일 청파동에 한국교회 보수신학의 이정표이자 보수신앙의 산실 역할을 할 청암교회가 이환수 목사에 의해 주춧돌을 놓았다.
청암교회가 설립되게 된 계기는 그 해 6월 3일 서울 남산 마루턱에 장로회신학교가 문을 열고, 이환수 목사가 상무이사로 있다가 김창복 목사의 주도로 천막을 치고 몇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청암교회가 출발하게 된 것이다. 다음해에 같은 청파동 1가 97번지 32호 위치에 예배당 건물을 짓고 비로소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청암교회가 정식 인정된 것은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경기노회 제6회 정기회에 교회설립 청원서를 내고 허락을 받음으로 정식교회로 등록되었다.
청암교회의 설립 취지를 청암교회50년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p.27~28참조).  
첫째 이 교회 저 교회로 방황하는 월남한 교인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며, 둘째 당시 청파동엔 교회가 없었음으로 복음전파를 위하여서였고 셋째는 당시 조선신학교 김재준 교수 등을 위시해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이 몰려와 신앙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통보수신앙 수립의 필요성이 대두한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 청암교회가 설립되는 동인이 되었다.
당시 교계 분위기와 청암교회 설립 목적을 더하고자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고 했다. ① 성경의 유오성을 주장하거나 모세5경을 모세가 기록하지 않았다거나, 사도신경을 불신하는 신자는 본 교회 강단에 세우지 않을 것. ② 여사(如斯)한 신학교와 신학사조와 유사한 단체와 개인에게는 원조를 하지 않기로 하다. ③ 여사(如斯)한 신학지원자에도 본 당회로서는 추천을 하지 않기로 하다.
이렇게 처음부터 청암교회는 정통신앙과 개혁주의신앙을 고수하면서 진리를 보수하는 교회로서 예배와 신앙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초창기부터 갖은 어려움을 감수할 각오로 남다른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와같은 최전선에 북한에서 월남한 이환수 목사가 선두에 서 있었고 배후에는 당시 장로회신학교를 이끌어 가고 있던 박형룡(朴亨龍) 박사가 청암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박형룡 박사와 이환수 목사는 동향이기도 하였다.
어렵게 자리를 잡아가던 청암교회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본의 아니게 문을 닫고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이환수 목사도 부산을 거쳐 제주도로 건너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피난민들은 처음엔 서북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제주의 삼도리에 피난민교회를 세워 대한예수교장로회 피난민제주읍교회라 이름을 정했다.
한편 피난민 가족들의 자녀교육을 위하여 성경구락부(Bible Class)를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엔 성경구락부를 개편하여 제주피난민국민학교를 설립했다. 1953년 9.28 수복으로 서울로 귀향하게 되어 허물어진 교회를 복구하고 흩어졌던 교인들로 한 둘 모이게 되고 수도탈환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게 되자 이환수 목사는 서울과 제주를 오르내리며 두 곳의 청암교회를 이끌어 가느라 수고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환수 목사의 청암교회 설교는 주일설교 때마다 눈물로 표현되는 메세지가 늘 감동적으로 교인들 가슴을 움직였다. 이는 마치 1930년대 눈물의 사자로 통했던 감리교회의 이용도(李龍道)가 겨레의 비운과 참담한 시련 속에 가슴이 메이면서 요양차 갔던 고향 교회에서 설교를 부탁받고 말없이 흐느끼고 눈물로 설교를 대신했던 심정과도 같이, 달리 언어의 분석이 없어도 통할 수 있었던 백의민족의 설음을 눈물의 통로로써 가능케 했던 것처럼, 이환수 목사의 메세지가 그래서 감동적이므로 청암교회 교인들의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교향산천과 가족들을 북에 두고 온 이산의 슬픔을 안고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피난민들의 서글픔과 육체적인 고통을 치유하는 위로와 치유의 역할을 그의 설교가 큰 감동을 준 것이었고, 또 한 가지 이환수 목사의 목회철학 가운데 하나는 복음전도자 그 중에도 교회안의 여성지도자 양성이었다. 그는 월남직후부터 청암교회 안에 한국여자신학교를 설립해 여성지도자를 계속 양성한 것이다.
1959년 5월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인 제44회 총회에서 분열의 고통 속에서도 이환수 목사는 W.C.C 에큐메니칼 진영에 서지 아니하고 박형룡 박사와 함께 N.A.E 보수진영쪽에서 교회를 지켜냈다.
이환수 목사는 1948년 9월 교회설립에서 부터 1982년 8월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오직 목양일념(牧羊一念)으로 숨가쁜 목회자의 길을 달려 왔다. 청암교회가 경기노회와 총회 안에서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하기까지는 청암교회 역사의 뒤안길에 이환수 목사라는 거목이 버팀목이 되어 왔음을 청암교회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는 교정(敎政)에도 크게 기여했다. 1957년 황해노회 교직자회 회장을 비롯해, 1958년 3월 경기노회장, 1959년 한국 복음주의연합회 회장, 1948년 3월 총회신학교 설립과 운영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1961년 9월 총회에서 교단 부총회장에 피선되고, 이듬해 1962년 9월 20일~24일 까지 서울 승동교회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7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당선되어  교단 수장(首長)의 자리에 올랐다.
이환수 목사가 재임했던 총회 중요 결의사항을 살펴보면, ① 총회 설립 5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다. ② 경북노회를 분립하기로 하다(경북노회와 경청노회). ③ 파숫군 잡지를 신학교 기관지로 하여 간행하기로 하다. ④ 신학교 교장은 1년씩 윤번제로 행하기로 가결하다. ⑤ 미조직 교회에서 강도사를 임시목사로 청빙할 때 안수하여 허락할 수 있다. ⑥ 1962년 10월 말경 고신측이 환원해 나가다. ⑦  예배시간 중 기도와 설교시 사진촬영과 강단에 등단하여 촬영하는 것은 금하기로 가결하다.
이환수 목사는 슬하에 2남2녀의 자녀를 두었으며, 노년에 이러르러서는 자녀들 가정에서 기거하다가 1985년 6월 30일 주님의 품에 안기었고, 그의 장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總會葬)으로 치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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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제47회 총회장 이환수(李煥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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