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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⑨ 십자가의 복음과 죄의 용서 : 인생의 가장 큰 복, 죄 사함의 은총
    1. 인생의 진정한 복은 어디에 있는가 현대인들은 건강, 재물, 명예를 복이라 부르며 그것을 얻기 위해 평생을 분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의 가장 본질적이고도 중대한 복을 다르게 정의합니다. 로마서 4장 7절과 8절은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언젠가 영원한 심판주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가장 큰 비극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구원은 선택이 아닌, 죽음 이후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만세’를 부를 수 있습니다. 2. 죄의 실체: 관역을 벗어난 삶과 거룩한 권위에 대한 반역 죄를 단순히 도덕적인 실수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첫 번째 의미인 ‘하마르티아’는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과 방향에서 이탈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자체가 죄의 본질입니다. 두 번째 의미인 ‘아노미아’는 하나님의 법과 권위에 대한 ‘반역’을 뜻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라”고 속삭이며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 뿌리에는 창조주를 밀어내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무서운 교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죄의 실체를 직시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구원자의 손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3. 양심의 고발과 하나님의 심판대 죄는 우리 내면에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라는 기능은 우리 안의 검사가 되어 우리가 행한 은밀한 죄들을 끊임없이 고발합니다. 요셉의 형들이 동생을 판 지 22년이 지난 후에도 위기 앞에서 과거의 죄를 떠올리며 괴로워했던 것처럼, 죄는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입니다. 더욱 두려운 사실은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얼굴빛 아래 낱낱이 기록(Recording)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수단과 노력으로는 이 영적인 장부에서 죄의 기록을 단 한 줄도 지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4.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위대한 교환’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기보다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기실 수 없었기에, 죄를 전혀 모르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모든 추악한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정수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전가(Imputation)받으시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의’라는 새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 죄를 장부에서 삭제하시고(Delete), 예수의 보혈로 덮어(Cover)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고 선포하십니다. 5. 회복된 구원의 즐거움과 제자의 삶 죄 사함을 받은 자는 말할 수 없는 해방감과 기쁨을 누립니다. 사망의 권세에서 옮겨져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자는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단순히 과거에 구원받았다는 지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의 세마포를 빠는 거룩한 싸움을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다시 넘어질 때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 1:9)”이라는 약속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때로 좁은 길처럼 보이지만, 그 길 끝에는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목사 강대형)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위치한 신앙 공동체로, ‘오직 복음’과 ‘성령의 임재’를 사역의 핵심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선포:관념적인 종교를 넘어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죄 사함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 안에서 성도들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예배: 성령의 강력한 운행하심을 구하며, 치유와 회복, 돌파가 일어나는 뜨거운 예배를 지향합니다. 특히 매주 금요일 ‘거룩한 불꽃 집회’를 통해 영적 갱신과 기도의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와 교육 사역: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녀들이 말씀 위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체계적인 신앙 교육을 실시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다니엘과 같은 영적 리더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합니다. 치유와 상담 (HMSS):내적 치유와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복음 안에서 온전한 인격적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내며, 지역사회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건강한 선교적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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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1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오해를 풀고 참 소통을 하다.”
    저는 방미를 앞두고 너무나 큰 부담을 가졌습니다. 3년 전 참전용사 행사를 하러 갔을 때 정말 3일 밤을 꽉 새웠거든요. 이번에도 그럴까봐 정말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래서 방도 혼자 쓰고 어떻든지 잠을 자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저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되는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섬겼거든요. 3시간이 넘는 행사는 저뿐만 아니라 구순을 훌쩍 넘긴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도 적지 않는 피로감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인가요? 그분들은 시차가 없어서 그런지 끝까지 꼿꼿한 자세로 앉아서 경청하고 박수하며 감탄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튿날 추모의 벽에 가서 헌화식을 한 후 주일에는 워싱턴 한인장로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 행사에 축사를 하기 위하여 동행하신 이언주 의원님은 오후에도 북한 주민의 인권과 한국과 관계되는 분들을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건강을 생각해서 저 대신 박요셉 목사님과 만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과 대화의 요지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다음 날은 공항으로 가는 귀국길에 올라야 했지만 이언주 의원님께서 대한민국과 동아시아 전략가요 담당관인 존 제이 리안(John Jay Ryan) 담당관을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자리는 목사님이 꼭 같이 가야 한다”고 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미 국무부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이언주 의원님과 존 제이 리안 담당관과의 대화만 듣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만히 들어보니까 대화의 요지는 대미 투자, 조선소 설립 문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미국은 조선소를 폐기한 거나 다름이 없대요. 그래서 대한민국이 도와줘야 새로운 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 전문가가 아니니까 듣고만 있었습니다. 이언주 의원님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면서 한국의 입장에서 전략적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한 40여 분을 그런 얘기를 하다가 한국 주무 담당관이 갑자기 저에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소 목사님께서는 한국교회 주요 지도자인 줄로 알고 있는데 왜 정부가 나서서 교회를 박해하고 국회에서는 종교단체 해산법을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가만히 지켜보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여러 가지 극단적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 국장님, 저도 그런 몇몇 사례에 대해서는 굉장히 깊은 유감을 표현하였고 도가 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장님께서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단체 해산법이 교회폐쇄법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누가 그런 정보를 갖다주고 그런 오해를 심어줬는지는 몰라도 그건 완전히 사실과 다릅니다. 종교단체 해산법은 신천지나 통일교의 영업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기성교회, 정통교회를 폐쇄하기 위한 법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자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성교회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국장님, 미국에도 수많은 이단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이단들은 사회적, 문화적 병리현상을 일으키는 컬트 집단이지요. 통일교와 신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컬트 집단을 해산하기 위하여 법을 제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교회와 목회자들이 그걸 교회폐쇄법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서서 그 법을 발의했던 몇몇 의원님께 전화해서 ‘이렇게 한국교회가 많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서로 간에 오해와 충돌 관계를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그 법을 발의하기 위해서는 기존 교회 혹은 정통 교회에 대한 예외조항을 만들어야지,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지고 법을 만들어도 그 법이 정통 교회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랬더니 ‘그럴 수가 있겠네요. 우리는 정통 교회를 보호하고 컬트 집단의 비즈니스를 막기 위해서 발의를 했는데 목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네요. 당장 이 법을 발의하지 않겠습니다. 이 법안은 폐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정통교회가 동의할 만한 법안을 만들겠습니다. 목사님께서 큰일을 하셨군요. 귀한 정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아주 화해로운 분위기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때 제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팩트를 트럼프 대통령께도 잘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그분이 “폴라 화이트 목사를 아십니까?”하는 것입니다. “저는 모릅니다. 국장님께서 소개시켜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립서비스였는지 진정성의 말씀인지는 몰라도 듣기에 어색하지는 않았습니다. 거의 1시간 반 가까이 걸친 대화였지만 거침없는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미국의 조선업보다도 한국교회를 더 염려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염려가 긍정적 염려라기보다는 오해가 섞인 염려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오해와 염려를 풀어주고 왔지만 공항으로 오는 길에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자정능력을 가지고 정화하고 각성하며 부흥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한국교회마저도 이념에 갇혀 대국 사상을 가져야 한단 말입니까? 누군가가 그런 오해를 하도록 잘못된 정보를 가져다 주었을 텐데요. 꼭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요? 조금이나마 대한민국을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을 풀어주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이런 소통과 화해 사역을 잘 해내겠습니다. 방미 일정 동안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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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1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분별되고 참된 은사를 사모함’ (고전 14: 12~25)
    예언은 미래를 맞히는 기술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이 지금 교회와 성도에게 바르게 전달되도록 하는 사역입니다. “나의 영이 기도하지만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은, 영적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지만, 그 뜻을 이성적으로 깨닫지 못해서 자신과 공동체가 충분히 유익을 얻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말씀의 뜻을 알고, 믿음이 자라나며, 그에 따라 삶의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으로도 기도하고 마음으로도 기도하겠다고 말합니다.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동만 있고 뜻이 없으면 함께 진정한 아멘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예배는 혼자 은혜받는 시간이 아니라, 함께 알아듣고 함께 세워지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은 방언의 은사를 풍성히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 안에서 자신의 은사를 드러내기보다 성도들을 가르치고 세우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많이 가졌느냐보다는 그것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자기 만족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 말씀에 깨어있지 않게 되면 자칫 은사를 받고도 그 능력을 자신과 타인이 ‘혹하는’ 방향으로 이끌려질 수 있습니다. ‘혹한다’라는 의미는 겉으로 좋아 보이는 것에 관심이 쏠리고, 판단이 흐리게 되어 마음이 끌려 흔들리거나 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미혹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문제점 중 하나이며 이러한 상태로 목회를 하거나 목양을 받아 그러한 방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습니다. 이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교회와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자기 자신이 이익을 얻으려는 빗나간 자세와 행실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혹을 받는 것 자체가 그것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며, 사탄과 가까워진 것입니다. 미혹은 사탄이 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창 3:13, 고후 11:14). 이러한 미혹이 사람에게 들어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자기가 처한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일에 사실상 동참할 수 없게 됩니다. 모양은 동참하는 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자기를 미혹한 영으로 그 마음의 본질이 향해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찾기 어려운 부분이어서 많은 가정과 교회가 넘어지거나 시달리고 있습니다. 미혹의 영이 있게 되면 그 가정도, 자녀도, 교회도 부흥하지 못합니다. 미혹의 영이 부르면 언제든지 마음이 거기로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전도받은 사람이 전도인을 따르는 것처럼, 미혹의 영을 가진 사람은 그 영을 뿌리내리게 한 사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25절은 예언 사역의 은혜에 대해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해질 때 사람의 숨은 마음이 드러납니다. 죄가 책망받고, 상처가 만져지며, 교만이 꺾이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예언은 사람을 혹하게 하거나 놀라게 해서 예언한 사람을 경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예언 사역은 성경의 진리에 맞아야 하고, 교회를 세우신 분의 질서 아래 있어야 하며, 사랑과 겸손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의 분별과 질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받은 은혜는 혼란이 아니라 질서를 낳고, 자랑이나 교만함이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고백을 낳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자신을 높이는 도구가 아니라, 교회를 살리고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심을 드러내는 거룩한 통로입니다. 이와 같은 분별을 위해 자신이 바라보는 사람과 자신의 목적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은사를 잘 분별하여 활용케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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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10
  • [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⑧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나 :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부활의 신앙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이신득의의 진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점검해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내가 가진 믿음이 성경이 말하는 진짜 구원 얻는 믿음인가 하는 점입니다. 로마서 4장 3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고 선언합니다. 믿음은 관념이나 지식적 동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삶 속에 실제적으로 작동시키는 강력한 동력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통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원형은 아브라함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75세에 부름받아 자녀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현실은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몸은 이미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 역시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 여기셨으며 그 믿음의 통로를 통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졌던 이 믿음은 결과가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실상으로 붙잡는 역동적인 신뢰였습니다. 진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것은 단순히 생각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던 것처럼 믿음은 삶의 전체적인 방향을 바꿉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수용할 때 그 말씀은 생명의 씨앗이 되어 우리 내면에서 폭발적인 영적 에너지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흥분하시며 네 믿음이 크도다 선포하시며 응답의 근거로 삼으십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을 움직이시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며 성도가 소유한 가장 강력한 자산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역사는 특히 고난과 위기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평안할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가도 문제가 생기면 금세 원망과 불신앙의 늪으로 빠져들곤 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환경을 바라보는 눈을 들어 환경 너머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제가 개척 초기에 설교에 대한 극심한 압박과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리는 고통을 겪었을 때 저를 살린 것은 하나님께 모든 짐을 맡기는 믿음의 작동이었습니다. 내 실력과 노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세우셨으니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확신을 가질 때 비로소 영혼의 자유와 평안이 임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그 믿음의 실체인 부활의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것 같은 자기 몸에서 생명이 태어날 것을 믿었듯이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부활은 인간의 이성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신비이지만 하나님은 이 바랄 수 없는 중의 믿음을 통해 우리 영혼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내 안에 살아 계심을 믿을 때 성령의 강력한 능력이 우리를 통치하기 시작하며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종교적 위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적인 무능함을 깨닫는 철저한 회개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드는 생명 건 결단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마음의 중심에 회개가 결여되어 있고 십자가와 부활의 감격이 희미하다면 그 믿음은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모든 죄를 사하셨고 지금도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반응할 때 우리 인생의 거친 풍랑은 잔잔해지며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승리를 맛보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일상의 작은 선택들 속에서 끊임없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원망과 불평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믿음을 작동시키십시오.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우리는 어떤 시험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죽어서 가는 천국 입장권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는 실재입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매 순간 그분의 인도하심에 나를 내어드릴 때 우리는 비로소 종교인의 굴레를 벗고 참된 제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관념의 종교를 넘어 실제적인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는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믿음의 완성입니다. 아브라함이 별을 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했듯이 우리도 기록된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신뢰해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서서 우리 가족과 이웃에게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서서 영원한 소망을 향해 나아가는 복된 신앙의 여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 강대형 목사)는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제자 삼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의 실제적인 능력으로 선포하며,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예배를 통해 영적 회복과 돌파를 돕고 있습니다. 특히 다음 세대를 말씀으로 세우는 교육과 체계적인 선교 훈련에 집중하며,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건강하고 역동적인 신앙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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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0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의 섭리’(마 10:29-31)
    섭리는 사전 결정이나 운명과는 아무 상관없고, 앞을 보고, 앞서 살피며, 일찍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닥칠 재난을 미리 내다보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울 수도 있겠지만, 예언자들은 실제를 점쳐보거나 해답을 손에 쥐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언자들은 실제를 미리 엿본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미리 맛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섭리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고, 모든 개별적인 사건에도 적용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주밀하게 인도해주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준비해 놓으시고 최선의 때에 공급해 주시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해야 합니다. “누가 나처럼 선언할 수 있으며, 미래를 예고할 수 있느냐? 나를 누구와 견줄 수 있느냐? 만일 있다면, 내가 옛날 사람들에게 미래를 예고했듯이, 그들에게 다가올 일들을 미리 말하여 보라고 하여라.”(사 44: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섭리 방식을 보존, 동행, 통치로 구분하였는데, 동행을 세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가시면서 악한 세력들과 싸워주십니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신 1: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안고 다니셨고, 품고 다니시면서 함께 가십니다. “야곱의 집안아, 이스라엘 집안의 모든 남은 자들아,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희를 안고 다녔고, 너희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내가 너희를 품고 다녔다.”(사 46: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우리 뒤따라가시면서 보호해주십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출 14:19-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동행해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만물을 먹여주십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시 145: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주시고, 비를 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 5:45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를 잊고 사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앞길을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따라가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행 14:19)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바울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딤후 3:1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은 그때마다 바울을 건져 주심으로써 그와 함께하시는 것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했기에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근심하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크신 사랑과 긍휼로 인도해주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보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죄가 극성을 부리지 못하게 막지 않으시며, 피조물의 불행도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막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사람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가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와 동행하시며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함으로 근심을 내려놓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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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01
  • [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⑦ 무엇이 구원을 주는 믿음인가 : 관념을 넘어 능력으로 역사하는 믿음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진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명백한 진리 앞에서 한 가지 중대한 오해를 하곤 합니다. 바로 머리로 동의하는 지식적 동의를 구원 얻는 믿음의 전부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서 27절 말씀은 우리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고 위기 속에서 힘을 발휘하는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 명확히 제시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생명력 있는 유정란인지 아니면 겉모양만 살아있는 무정란인지 정직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결코 수동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이 지금 나의 현실 속에서 실재가 되게 하는 강력한 엔진과 같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발걸음을 옮겼고 백 세에 얻은 아들을 바치라는 시험 앞에서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을 믿으며 순종했습니다. 진짜 믿음은 내 안의 두려움과 이성을 뚫고 하나님의 언약이 내 안에서 작동되게 만드는 영적인 열쇠입니다. 만약 고난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삶의 변화가 전혀 없다면 그것은 성경이 보증하는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닐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본문 25절은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며 그 피를 믿을 때 구원의 역사가 유효하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께서는 우리 영혼에 인을 치십니다. 죽었던 영이 부활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나는 거듭남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깊은 회개를 이끌어내시고 예수의 피가 나의 모든 죄를 씻었음을 확신하게 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단순히 죄 사함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던 정죄의 장벽이 무너지며 비로소 영적인 자유와 해방을 맛보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역사는 우리의 감정이나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절대적인 신뢰를 기초로 합니다. 많은 사람이 상황이 좋아지면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문제가 생기면 금세 불신앙의 늪으로 빠져들곤 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환경을 바라보는 눈을 들어 환경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보이는 분처럼 신뢰하며 나아갈 때 우리 삶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평안과 담대함이 임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소유한 세상 이김의 비밀이며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찬송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내 힘으로 의로워지려 했던 행위의 법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의 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27절 말씀처럼 믿음의 법 앞에서는 인간이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는 그저 그 통로인 믿음을 사용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일상의 모든 순간에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그분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내가 약할 때 주님이 강함 되시며 내가 무능할 때 주님이 나의 전부가 되심을 선포할 때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이 믿음의 작동 원리를 깨달을 때 신앙은 지루한 종교 활동이 아닌 역동적인 기적의 현장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일상의 작은 선택들 속에서 증명됩니다. 직장에서 정직을 선택하고 가정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믿음의 발현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는 입장권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는 통치 원리입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매 순간 그분의 인도하심에 나를 내어드릴 때 우리는 비로소 종교인의 굴레를 벗고 참된 제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나의 어떠함이 아닌 주님의 신실하심에 인생의 닻을 내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험난한 세상 속에서 풍랑 위를 걷는 기적을 맛보고 싶다면 다시금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환경이 변하지 않아도 육신의 질병이 찾아와도 인생의 결핍이 우리를 위협해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약속을 붙잡으십시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나아가는 자에게 성령께서는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관념의 종교를 넘어 능력의 믿음으로 승리하는 리얼 크리스천의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구원의 모습입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 강대형 목사)는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제자 삼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의 실제적인 능력으로 선포하며,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예배를 통해 영적 회복과 돌파를 돕고 있습니다. 특히 다음 세대를 말씀으로 세우는 교육과 체계적인 선교 훈련에 집중하며,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건강하고 역동적인 신앙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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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3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목회 사역의 현장과 분별’(고전 9: 1~10)
    바울서신을 접하게 되면, 당시 초대교회에서 성도들 앞에 그가 얼마나 심사숙고하였으며, 온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뼈아픈 시절을 보냈는지 알게 됩니다. 본문은 사역자의 권리와 함께 복음의 질서와 교회의 바른 분별을 세우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한때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연보를 부탁하면서, 억지가 아니라 자원하는 은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고후 8:1-5, 9:7). 또한, 사도로서 생활비를 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복음이 장사처럼 오해될까 하여 그 권리를 절제했습니다(고전 9:12, 15). 이를 위해 손수 일하여 자신의 필요와 동역자의 필요를 감당했고(행 20:34, 살전 2:9), 궁핍과 부족 속에서도 교회의 신뢰와 복음의 순수성을 먼저 세우려 했습니다(고후 11:8-9, 빌 4:12-16). 바울이 이 글을 기록한 목적은 교회가 복음의 일꾼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바울은 뭇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같은 권위가 없다거나, 또는 스스로 일을 하니 일반적인 사역자가 아니라는 식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과 게바는 믿음의 아내를 동반하고, 교회의 충분한 공급을 받으면서 사역에 임했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그런 권리조차 없는 사람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대해 감정적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 군인이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지 않듯이, 복음의 일꾼도 사역을 감당하면서 정당한 공급을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포도를 심은 사람이 그 열매를 먹는 것처럼, 교회를 세우고 양육한 사역자도 그 수고의 열매를 함께 누릴 권리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양 떼를 기르는 사람이 그 젖을 먹는 것처럼, 목양의 수고에는 마땅한 돌봄과 지원이 따른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단지 인간의 사회적인 관례로만 말하지 않았고,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율법까지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하는 자의 수고와 소망을 귀하게 보신다는 내용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입니다. 복음의 일꾼을 인간적인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그 사역의 열매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은혜를 받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이들을 말씀 안에서 존중하고 책임 있게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겪은 현실적인 어려움은 컸습니다. 그는 교회를 세웠지만 때로는 여러 의혹을 받았고, 성도들을 사랑했지만 비판을 들었으며, 복음을 전하고 주의 사역을 했지만 마땅히 누려야 할 자기의 권리조차 일일이 설명해야 했습니다. 사역자는 영적인 일을 하면서도 생활의 필요를 피할 수 없는데 비해, 교회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때로는 사역자의 수고를 쉽게 넘기거나 가볍게 여기곤 합니다. 바울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되 말씀과 복음의 질서 안에서 말하고,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과 사역의 열매로 자신을 증명했습니다. 교회는 비판보다 분별을 앞세우고, 의심보다 감사와 책임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이 오늘 교회와 성도들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교훈입니다. 성도는 만인제사장적인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성도이면서도 교회의 사역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를 단순한 평가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복음 안에서 함께 책임을 나누는 동역자로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이 겪었던 일이 곧 나의 일이 될 수 있고, 바울의 아픔도 자신의 아픔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로서,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직분 맡은 자로서 말씀에 근거한 분별력과 사역의 수고를 알아보는 마음, 교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겸손, 그리고 비판보다 기도로 모든 관계와 책임을 세워가는 성숙함이 한국 교회에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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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27
  • [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⑥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 절망의 끝에서 만나는 유일한 소망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시급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 구원받았는가? 오늘 밤 이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갈 확신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질문을 기독교의 초보적인 내용으로 치부하며 가볍게 여기곤 하지만, 구원의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이 구원의 확신이 진리 위에 촘촘하게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기쁨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영적인 빨간불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3장 23절과 24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 영혼의 현주소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인류를 향해 충격적인 사망 진단서를 내놓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죄란 단순히 도덕적인 실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아가려는 본성적인 완고함을 뜻합니다. 우리는 환경만 조성되면 언제든 부패한 본성을 드러내는 존재들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망가졌는지를 비추는 거울일 뿐, 우리를 스스로 치료할 능력은 없습니다. 마치 파열된 근육으로는 아령을 들 수 없듯이,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버린 우리는 스스로의 선행이나 의지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 거룩한 절망을 인정하는 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우리에게 새로운 솔루션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24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속량이라는 단어는 노예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여 자유케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죄라는 엄청난 빚을 대신 갚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 깊이 믿고 그 피를 붙잡을 때, 우리 영혼을 가로막았던 죄의 벽이 허물어지고 성령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순히 죄 없는 상태로 사면해주시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며 당신의 자녀로 입양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자격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신분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과거 구약 시대 대제사장조차 두려움 속에 일 년에 한 번 겨우 나아갔던 그 하나님께, 우리는 이제 언제든 달려가 품에 안길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가진 구원의 능력입니다. 만약 지금 당신의 마음에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거나 종교적인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면, 다시금 믿음의 주이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동력은 나의 열심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고백이 매일의 삶에서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믿음만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승리하게 하고, 영원한 하늘 소망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 강대형 목사)는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제자 삼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의 실제적인 능력으로 선포하며,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예배를 통해 영적 회복과 돌파를 돕고 있습니다. 특히 다음 세대를 말씀으로 세우는 교육과 체계적인 선교 훈련에 집중하며,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건강하고 역동적인 신앙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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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2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바울의 가르침’(딤전 4:11-16)
    바울은 예수님을 닮은 스승입니다. 바울은 약한 자들에게 스스로 약한 자가 됨으로써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약한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고전 9:22) 바울은 자신의 삶을 통해 보고 배우도록 가르쳐주었습니다. 바울은 말씀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의 존재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방해와 핍박이 와도 말씀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대상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에게 최선을 다해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영적인 스승의 모습이지요. 본문을 보면,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사역자는 연령의 많고 적음으로 존경을 받거나 가볍게 여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역자의 권위는 주님께서 부여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쳐 이끌어 가는 사람은 말과 행실에 항상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항상 배우고 경건 훈련을 해야 하며, 성도를 옳은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지도자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8)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4:16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삶의 태도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고난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고전 1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4차에 걸쳐 전도여행을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지역에 복음을 증거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많은 환난을 받았지만 인내하며 로마를 넘어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는 말씀을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비전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비전을 위해 순교할 때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제자이자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으로서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의 제자 디모데를 보면, 모친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는 모두 경건한 신자로 디모데를 어릴 때부터 성경으로 잘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자란 디모데는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모범 청년이 되었습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 중 루스드라에 갔을 때 로이스와 유니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되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사랑한 제자로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딤후 3:11) 디모데는 ‘바울의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고전 4:17)로 불렸습니다. 바울의 삶을 보고 배운 디모데는 자신도 본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디모데는 스승인 바울과 함께 소아시아, 그리스, 마케도니아, 로마 등에서 순회 전도하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좋은 동역자요, 위로자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디모데의 인품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봉사하였습니다.”(빌 2:22)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우리도 서로 힘이 되는 동역자로서 복음을 위해 함께 전진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항상 크게 기뻐했습니다. 늘 자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지혜와 힘의 원천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하고 이길 수 있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바울은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살았습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빌 4:10-14) 그래서 바울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 영적인 스승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스승을 만나 그분의 삶을 닮아가고 있는지요? 그래서 여러분도 참된 스승이 되기 위해 말씀 앞에서 날마다 자신을 살피며 준비하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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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18
  • [강대형 목사의 로마서 칼럼] ⑤ 성경을 알아도 진정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 종교의 형식을 넘어 생명의 실재로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죄를 진단했다면, 이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 오늘날로 치면 모태 신앙인들과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이들에게 정밀한 진단서를 내밉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성경을 암송하고 율법을 토론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충격적인 선포를 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타인을 정죄하지만, 실상은 그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본질을 세밀하게 파헤치며 종교적 열심 이면에 숨겨진 두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첫째는 자기 의의 함정입니다. 율법을 알고 가르치는 자들은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의감이 높을수록 내면의 분노와 정죄는 커져만 갑니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은 표면적인 지식이나 직분이 아니라,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이스한 인격으로 포장해도, 그 깊은 내면의 썩은 뿌리는 인간의 노력으로 가릴 수 없습니다. 둘째는 형식적인 신앙의 한계입니다. 유대인에게 할례가 자부심이었듯, 오늘날 우리에게는 세례나 직분이 영적 면죄부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종교적 행위나 혈통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본거지인 마음 중심이 안에서부터 획기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답은 오직 거듭남의 기적에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살릴 능력이 없습니다. 죽은 개미 한 마리도 살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인데, 하물며 죄와 허물로 죽은 영을 어떻게 스스로 살리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구원은 단순히 개과천선하는 수준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 영이 다시 태어나는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이 기적은 내가 전적인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고 절망하는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아, 나에게는 소망이 없구나.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라는 처절한 자각이 있을 때, 비로소 구원자의 손을 붙잡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어 정죄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 중에 있는 우리에게 "나의 아들 예수의 피가 너의 죄를 씻었으니, 그가 내민 손을 붙잡으라"고 초청하십니다. 오늘, 종교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복음의 실재 앞에 서십시오. 지식으로만 알던 예수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실 때, 억지로 지키려 애쓰던 율법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생명의 법이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거듭남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오늘 실제적으로 누리며, 심판 앞에서도 당당히 승리하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는? 수지선한목자교회(담임 강대형 목사)는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제자 삼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의 실제적인 능력으로 선포하며,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예배를 통해 영적 회복과 돌파를 돕고 있습니다. 특히 다음 세대를 말씀으로 세우는 교육과 체계적인 선교 훈련에 집중하며,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건강하고 역동적인 신앙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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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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