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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㉚ 사회활동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고 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바울은 우리의 처지에 대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하였다.신학에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두 나라’에 속함을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땅의 나라이다. 이것은 이분법(二分法)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강조한다.문제의 탐색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보다 세상에 함몰되는 경향이 많다.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며 이 사회에 대해 선포와 섬김의 사역을 감당하며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우리는 ‘사회참여’라고 하기도 하고 ‘섬김사역’이라고도 한다. 사례의 탐구하나님 나라와 땅의 나라, 즉 ‘두 나라’에 살고 있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활동 혹은 사회봉사를 어떻게 하여야 할까? 상황과 사안의 특성에 따라 할까? 상황과 사안의 특성에 따라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다. 대사회활동을 활발히 하는 부산 새생명교회 문동현 목사에게서 들어본다.김남식(이하 김): 교회와 지역사회의 가교 역할을 위해 수고가 많은 줄 안다. 우리 교회가 사회 속에 존재하기에 사회를 외면하고 존립할 수 없다. 우리가 건전한 대사회적 활동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문동현(이하 문): 교회는 하나님께 속해 있지만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사회와 등지고 살 수 없기에 바른 소통이 필요하다. 우리 교회들이 이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 스스로 돌아보고 궁극적으로 선교적 차원에서 소통해야 한다.김: 교회가 사회적 활동을 할 때의 기본자세가 어떤 것이라고 보는가?문: 여러 가지 상황이 있으나 먼저 정체성의 정립이다. 교회는 교회이지 사회봉사단체는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으면 교회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또 선교적 자세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복음선교이기에 사회활동은 이를 위해 하나의 통로로 사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섬김의 자세가 필요하다. 이웃을 위해 섬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재정적 투입이 지혜롭게 이루어져야 한다.김: 일부 목회자들이 조직을 만들어 정치적으로 어느 한 편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는 것을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서 보았다. 이것을 어떻게 보는가?문: 옳지 못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누구를 지지할 수 있고 또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목사’의 직책으로 단체 행동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목사들이 무리를 지어 선거캠프에 기웃거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김: 넓게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 문제가 논의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기독교 정당이 시도되었다가 실패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정체성이 없고 대표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앞으로도 재현될 것으로 본다. 어떻게 대응할까?문: 목사들이 기독교 정당 운동에 나서는 것은 반대한다. 어떤 이들은 네덜란드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를 예로 들지만 전연 다른 여건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을 육성하여 이들이 정치영역에서 일하게 해야 한다. 목사가 일반 정치를 하려면 목사직을 내려놓고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교회는 교회이고 목사는 목사이다.’김: 이러한 행동들이 기독교의 신뢰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아닌가 여겨진다. 여기에 대한 바른 대응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바르게 대응하지 못하면 어려움이 올 수 있다.문: 한겨레신문이 제기한 ‘가짜뉴스’ 논란으로 교회가 시끄럽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한국사회의 시선은 냉담하기만 하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2017년 발표한 대국민 신로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기독교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한 사람은 51.2%, ‘신뢰 한다’고 답한 사람이 20.2%로 나타났다.낮은 신뢰도는 기독교 신자 감소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예장 합동측은 2014년 272만 1,427명에서 2017년까지 약 3만 2천 명이 감소했고, 예장 통합측은 2014년 281만 574명에서 2017년까지 약 9만 명이 감소했다. 기장 역시 한해에만 약 6만 명이 감소하는 등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이렇듯 공적 신뢰를 잃고 위기에 직면한 한국교회에 대해 사회로 나아가 소통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10월 15일 열린 성결교회 목회페스티벌에서 정재영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우리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이라기보다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비치고 있다. 교회는 지역 사회와 소통하며 사회구성원으로서 책임있는 공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며, “사회에 복음을 선포하고 정의에 어긋나는 질서를 바로잡으며 고통에 처한 이웃을 돕기 위해서는 교회를 넘어 지역공동체와 발맞추어야 한다고 밝힌 것을 주목해야 한다.김: 교회의 사회적 기능은 교회가 사회에 무언가 줄 수 있을 때 가능하다. 한국교회 역사를 보면 3.1운동 때는 민족의 독립을, 6.25 한국전쟁 때는 생존의 문제를, 80년대에는 민주화 등, 긍정적 삶을 추구하여 교회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고 또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문: 우리는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 사도들이 ‘은과 금은 없어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사역하였듯이 우리는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을 선포하고 섬김의 사역을 해야 한다.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고 섬김 사역으로 이 세상에 소망을 주어야 한다.기본에의 회귀우리 주변에는 사회활동을 하는 수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있다. 각자의 소임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이 기관들은 친정부, 반정부가 목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는 섬김을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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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3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㉙ 주초 문제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술과 담배를 금하는 전통을 세워 나갔다. 이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한국사회의 실정을 돌아보니 술과 담배로 인한 폐해가 너무 컸기에 절제 차원에서 이런 교육을 시켜 한국교회의 전통으로 삼았다. 이 선교사들 거의가 보수적 신앙을 가지고 있고 청교도적 신앙과 생활을 하였기에 그들의 신앙생활을 한국교회에 적용시켜 나갔다.그래서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예수 믿는 사람은 금주 금연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이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문제의 탐색근래에 와서 한국교회의 ‘금주 금연’ 전통이 무너져 가고 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공개적으로 주초(酒草)를 하는 이들이 있고 심지어는 목회자들 가운데도 많이 나타나는 실정이다.이런 경향은 진보적 신학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지고 있으며, 젊은 세대들에 확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사례의 탐구전에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주초는 엄격히 금하였으나 지금은 허용 내지 묵인의 경향들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현상을 그대로 두고 보아야 하는가? 광명에 있는 삼일교회 황용모 목사에게 듣는다.김남식(이하 김): 다루기에 민감한 문제이지만 오늘날 한국교회가 주초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황용모(이하 황): 일괄적으로 규정하기 어렵지만 많이 변하고 있다고 본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금주 금연을 당현한 것으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이런 전통이 무너져 가고 있다. 개인의 신앙적 차이는 있을 것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윤리가 정립되어야 한다고 본다.김: 주초 허용을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주초를 성경이 금한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이 정한 하나의 규범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른바 ‘양심의 자유’를 논하고 있다.황: 주초를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 라는 논란이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죄라고 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이 피해야 할 삶의 윤리로 본다. ‘양심의 자유’ 운운하는 것은 자기 행동의 합리화를 위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김: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을 받고 자유를 얻었으니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주초 문제를 금하는 것은 율법주의라고 한다.황: 율법폐기론자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주초 문제는 율법적 계율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나 그리스도인의 생활 윤리로 보고 실천하는 것이 좋다.김: 옛날 한국교회는 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찬송가에도 ‘금주가’가 있었다. ‘아 보지도 마라 그 술’이라는 가사였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금주 금연과 관련해서 이런 절제운동이 사라지고 있다.황: 그리스도인의 생활 윤리로서 절제가 있었고, 이웃을 구제하고 선교사업을 후원하였다. 지금은 번영신학과 천민자본주의로 인해 이런 원리는 사라지고 거론조차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김: 병원 의사 가운데 ‘금연운동’을 펴고 있는 분을 보았다. 담배가 주는 피해를 강조하고 금연을 권하고 있다. 사실 흡연으로 인한 폐해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심각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듯하다.황: 술과 담배의 폐해는 신앙적 측면을 떠나서도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건강의 문제이다. 판매되는 담배갑에 흡연으로 인해 생기는 질병의 사진을 실어 경고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술이 사람의 건강에 주는 피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또 다른 하나는 술과 담배로 인한 경제적 피해 또한 심각하다. 흔히들 술로 인해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또 다른 하나의 문제는 청소년들의 교육문제이다. 주초를 하는 연령이 낮아지고, 남녀의 구분이 없어져 가고 있어 당황스러운 현실이다.김: 그러면 우리 교회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시하고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황: 뚜렷한 방안을 세우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을 찾아보자. 첫째, 교회와 가정에서 부모가 금주 금연의 본을 보이고, 그 자녀들을 바로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윤리로서 교훈해야 한다. 목회자들이 이 문제를 설교에서 거론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것을 외면 혹은 회피하고 있다. 둘째, 절제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풍요로운 시대에 살기에 절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절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미덕이다. 우리 교회와 가정이 실천해야 한다. 셋째, 미디어의 순화가 필요하다. 영화나 TV 또 광고 등에 술이나 담배를 미화시키는 장면들을 본다. 이것이 시청자 특히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모아 이것을 막고 정부의 정책에 반영하게 해야 한다.김: 주초 문제의 담을 헐러버린 것은 교회의 세속화의 한 양상으로 본다. 우리는 이것을 극복하고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해야 한다.황: 교회들에 스며온 세속주의는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파괴시키고 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그러기에 성경의 가르침대로 가르치고, 믿고, 살아야 한다.김: 주초를 반대하면 ‘율법주의자’로 매도 당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한다. 술과 담배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가?황: 세속주의가 만연해도 우리는 성경의 원리대로 믿고 이것을 우리의 삶에 실천해야 한다. 술과 담배 문제도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 모두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기본에의 회귀어느 신학대학의 총장 취임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행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는데 ‘목사로 보이는 사람’ 6~7명이 둥근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이 당황해졌다. 율법주의자의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그 학교에서 비판하는 ‘보수 꼴통’ 때문일까?주초 문제는 개인의 양심 문제를 넘어 사회윤리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한다. 개인의 양심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이것에는 사회적 책임이 수반된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의 전인데 그 몸을 정결하고 깨끗하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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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21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㉘ 장례 예식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전도서에 보면 ‘천하 모든 것에 때와 기한이 있고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고 하였다. 성경은 ‘사람이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했는데 매련한 인간들은 천년만년 살 것같이 행동한다.진시황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더 오래 살기를 꿈꾸어 ‘100세 시대’가 보편화되었고, 지금은 ‘120세’를 노래한다. 그래도 인간은 죽게 마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문제의 탐색사람이 죽으면 장례 예식이 뒤따른다. 그 사람의 배경과 경제적 여건에 따라 그 양상은 다르지만 모두가 이 과정을 거친다.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죽음 후의 장례 예식이다. 이른바 ‘기독교식 장례’를 한다고 하면서 기독교식이 아닌 용어나 절차를 따르는 경우가 많다.예배 인도는 목사가 하지만 실제로는 장의사 직원이 주도하는 경우를 쉽게 본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사례의 탐구‘기독교식’이라는 정해진 규범이 없고 전통적 방법에 예배라는 형식을 덧입히는 것이 오늘의 기독교장례 모습이다. 한 목회자를 만나 그의 생각을 들어보자. 상계청암교회의 이영욱 목사의 생각이다.김남식(이하 김): 나이가 드니 주변에서 별세의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한 번은 죽게 마련이지만 장례 예식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특히 기독교 가정에 초상이 나면 부고를 전할 때에 “아무개가 소천하셨다”라고 알리는 경우가 많다. 거의 전부그 그렇게 하는 것같다. 조문인사차 장례식장에 가보면 각처에서 보내온 조화에도 달려있는 문구는 거의 모두 ‘소천’(召天)이라는 문구를 넣어서 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른 표현일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이: 상가에 조문인사차 모여든 사람들의 대화 중에도 거의 모두 별세를 소천이라고 하며 얘기를 한다. “그 건강하던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소천하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별세라고 말하는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는 어떤가? 목사들도 대부분 별세를 소천이라고 말하면서 설교를 하고 기도를 인도한다. 별세라는 말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김: 국어대사전을 보면 ‘소천’이라는 말이 없다. ‘소천’이라는 말은 성경에도 없다. 성경에는 ‘별세’라고 말한다. 누가 복음 9장 31절에 보면 변화산 위에서 예수께서 용모가 변화되었을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같이 성경에도 세상을 떠나는 것을 ‘소천’이라고 하지 않고 ‘별세’라고 했다.이: 소천(召天)이 뭔가? 부를 소, 하늘 천이다. 이 말은 ‘하늘이 부른다’는 뜻이 아니고, ‘하늘을 부른다’는 뜻이다. 성경에 죽음에 관한 말씀이 허다하지만 죽음을 소천이라고 말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소천’이라는 말을 ‘하늘이 부른다’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다. ‘소천’이라는 말을 꼭 사용하고 싶으면 ‘소천 되셨다’라고 하면 되기는 되나 굳이 궁색하게 이렇게까지 하면서 소천이라고 해야 하겠는가. ‘별세’라고 하면 성경적이고 사리에도 맞고 듣기도 좋은데 굳이 소천이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김: 이와 못지않게 문제 되는 것은 추도예배 혹은 추모예배이다. 한국교회는 ‘추도(추모)예배’를 어떻게 드리게 됐을까? 한국교회와 문화를 50년 넘게 연구한 제임스 그레이슨 교수(영국 셰필드대학교)는 ‘추도(추모)예배’는 세계 그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가 어렵지만 ‘제사를 중심으로 가족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나라에서는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바로 한국이 그 모델이다.이: 사람에게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고, 누구나 피해갈 수 없고 또 언젠가 한 번은 꼭 겪어야 하는 일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두려움, 무서움, 슬픔, 아쉬움 등이다. 왜? 그럴까? 한 번도 가보지 않는 길이고, 영원히 헤어진다고 생각해서 아쉬움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제사를 통해 죽은 사람을 사모하는 예식을 가진다. 성도들도 죽은 사람을 사모하기에 추도(추모)얘배로 모인다. 하지만 성경은 죽은 사람을 생각하고 사모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한자어인 ‘추도’(追悼)는 죽은 사람을 생각해서 슬퍼하는 것이고, 초점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데에 있다. 반면에 ‘추모’(追慕)는 ‘추도’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하고, 기억하는데 있다. 여기에 ‘예배’를 붙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을 ‘추도(추모)예배’는 모두 다 죽은 사람을 기리고 애도하는 형태이다. 그래서 여기에 예배라는 단어는 붙이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용되기 때문이다.김: 역사적 흐름을 살필 필요가 있다. 초기 한국교회에서는 ‘추도(추모)예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조선 기독교인들이 추도(추모)예배를 제사 대신으로 여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15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4회 회의록’에 추도(추모)예배를 다룬 내용이 기록돼 있다. 당시 ‘부모 기일에 기독교인이 음식을 장만하고, 이웃을 불러 함께 예배하는 것을 어떻게 조치해야 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헌의안이 올라왔다. 총회는 형식은 예배와 같으나 제사와 다르지 않기에 금지해야 한다고 결의했다.이: 1920년대까지 한국교회는 추도(추모)예배를 죄로 규정해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추도예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성경은 성도가 죽은 자를 위해 하지 말아야 하는 행위들을 말하고 있다.김: 기독교 전체의 의견을 모아 하나의 규범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주목할 문서가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측에서 죽음과 관련해서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① 죽은 자를 위해 이교도처럼 슬퍼함을 금한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신 14:1). ② 죽은 자에 대한 예물 헌납도 금한다.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신 26:14). ③ 죽은 자에게 제사함을 브올의 바알을 숭배하는 죄라고 단언한다. “그들이 또 브올의 바알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시 106:28) ④ 죽은 자를 기념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잊어버린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시 31:12) ⑤ 우상과 관계되는 모든 종교행위를 저주하고 심판하실 것을 단언한다 “너는 무당을 살려 두지 말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출 22:18. 20). ⑥ 우상 숭배적 종교기념일을 폐하라고 선언한다. 사람의 유전(유전), 절기, 월삭, 안식일, 천사숭배 따위는 조상이 전한 망령된 행실로서(벧전 1:18) 금지된 신앙의 기독교윤리이다.이: 제임스 그레이슨 교수는 한국사회가 제사를 중심으로 한 가족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음은 인정했다. 더 나아가 한국교회 성도들이 추도(추모)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도 심정적으로 이해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성경말씀에 근거해 볼 때에 죽은 사람을 추도(추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직 하나님만 받아야 하는 예배가 죽은 사람과 관련된 예배용어로 사용하나는 것은 신앙적 큰 문제이다. 기본에의 회귀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장례 예식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연구하고 뜻을 모아야 한다. 특히 ‘추모’ 또는 ‘추도’예배가 더욱 그러하다.따라서 앞으로는 ‘추도(추모)예배’를 사용하기보다 예배와 추도(추모)를 분리해서 상용할 것을 제안한다. ‘추도(추모)날’에 온 가족이 모여 ‘가족(가정, 위로, 기념)예배’를 드린 후에 그 다음에 죽은 고인을 생각하고 신앙적으로 그리워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가족예배’를 드릴 때에는 죽은 고인들 언급하기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은혜 그리고 앞으로의 신앙생활을 나눈 후 잠시 고인을 추도(추모)하는 것으로 진행하면 정서상 큰 문제없이 아름다운 기독교 문화를 정립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추도(추모)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개념이 정립되고 정착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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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4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㉗ 기독교 가정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하나님이 창조사역에서 처음으로 만드신 신적 기구가 가정이다. 가정은 축복의 처소요 하나님의 언약을 전파하는 기구이다. 그래서 가정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가정의 소중함은 동서양 어디에서나 공통된다. 그것은 우리의 뿌리요 삶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어느 집을 방문하면「가화만사성」이라는 액자를 쉽게 볼 수 있다. 이것이 삶의 원리이다.문제의 탐색오늘날 이렇게 소중한 가정의 중요성이 퇴색되고 있다. 이른바 이혼이 일상화되고 가정 해체로 인해 생기는 사회적 문제가 심각하다. 가정의 위기 상황은 교회 안에까지 침투되어 목회자가 가르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심각한 문제이다.사례의 탐구가정에 대해서는 누구나 할 말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만 논의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원리는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적 가정사역의 원리를 정립하고 가르치고 있는 정정숙 박사(총신대 명예교수)에게 듣는다.김남식(이하 김): 가정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 무엇인가?정정숙(이하 정): 하나님이 세우신 최초의 기관은 가정이다. 가정과 교회는 본질적인 면에서 유사성이 있다. 가정과 교회는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사랑의 가족 관계는 교회의 회중에게도 해당된다.신약교회의 특성을 가정과 연결시켜 표현한 곳이 많다. 성경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집’이 ‘가정’이라는 뜻이라고 반드시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빌레몬서 1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집’(household of God, 교회)에서는 모두가 형제자매라는 것과 또 가정이라는 주체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김: 가정의 여러 가지 요소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정: 사랑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가정 안에서의 사랑은 질서보다 훨씬 더 강조되고 있다. 에베소서 5장을 깊이 들여다보면 가정에서의 사랑과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교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다(엡 5:25-26).사도 요한은 가정적 사랑이 교회생활의 특성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서로에 대한 사랑은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의 반영이다(요일 3:15-18, 5:1-2). 교회 안에서의 형제 개념은 가정에서의 형제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김: 현대 가정들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그 문제를 무엇으로 볼까?정: 과거의 전통적 기독교 가정은 질서와 평화, 사랑과 섬김, 날마다 드리는 가정예배, 사랑하는 부모와 순종하는 자녀라는 기독교 가정의 이상적 모델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전통들이 근래에 와서 붕괴되고 말았다.현대 가정들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비극들에 대하여 많은 연구가들은 가정의 붕괴와 분열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오늘의 시대가 안고 있는 비극적 양상이며, 또 기독교 가정이 극복하여야 할 주제들이다.김: 가정해체의 가장 큰 요인이 이혼의 증가라고 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정: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첫째, 이혼관의 변화이다. 과거에는 일부종사(一夫從事)하여야 한다는 윤리관, 그리고 축첩하더라도 가정을 깨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혼하는 것을 금기시(禁忌視)하여 왔고, 그 결과 이혼한 당사자를 따가운 시선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점차 혼인이나 이혼에 관한 사회학적 개념이 달라지면서 이혼을 불허하거나 금지하는 의식이 이혼을 관용하는 쪽으로 전환되어감에 따라 이혼율의 증가를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된다.둘째, 여성의 지위 향상이 이혼율의 상승을 가져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여성해방운동은 남편에 대한 종속 또는 굴종의 관계에서 벗어나 여성도 남성과 대등한 인격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요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여기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경우 이혼을 청구하게 되었다. 더욱이 취업으로 경제적 능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면서 종래에 생존을 위하여 할 수 없이 혼인생활을 계속했던 것과는 달리, 경제적 자립에 힘입어 이혼을 청구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셋째, 산업화나 도시화에 따른 인구의 이동, 핵가족화, 소득의 증대, 교육의 발달 등이 이혼율 상승에 작용하는 요인들이 된다. 특히 여성의 가정 밖 취업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함께 남편 이외의 남성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이혼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이와 같은 이혼의 문제는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결혼을 영원한 결속으로 보는 성경적 결혼관이 무시되기 때문에 이혼을 하는 현상들이 확산되고 있다. 불안정한 결혼생활 문제가 현대교회에 큰 도전으로 등장하는 현실 속에서 결혼에 대한 성경적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김: 독신자 문제와 노인문제도 심각하다. 이것을 어떻게 볼까?정: 현대 가정에서 독신자와 노인 문제는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독신자들(single-adults)이란 배우자와 사별(死別)한 사람들(widowed), 이혼한 사람들, 그리고 미혼자들(the never married)을 포함한다. 이들이 성인 연령층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크지만 교회가 이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여기에는 문화적 영향도 많다. 즉 결혼만이 의미있는 유일한 생활방식이며, 독신이란 결혼 전이나 혹은 결혼과 재혼 사이에서만 정당화 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라는 인식들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독신자들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교훈하는 독신에 대한 관점을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짤막한 가르침을 제외하고는 독신자들, 특히 미혼자들에 대한 직설적 교훈이 없다.현대가정의 문제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노인문제이다. 세계의 인구증가율 가운데 노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커가고 있다. 많은 나라들이 노령국으로 바뀌고 있는데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65세 이상의 고령인구가 전체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960년대의 3.3%에서 1975년에는 3.5%, 1984년에는 4.0%, 2000년에는 7%로서 고령화 사회가 되었고, 근래에 와서 ‘고령사회’가 되었고, 평균 수명도 놀라운 증가를 보이고 있다.노인 인구의 증가는 사회복지 차원만이 아니라 현대가정에서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 노인문제는 노화(老化, Aging)라는 신체적 특성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나아가서 교회와 사회에서도 큰 문제가 된다.김: 그러면 이런 현상에 대해 우리 교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정: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교회 중심으로 편성되고 심지어는 가정생활을 소홀히 하게 하거나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신앙적 특성이 ‘교회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정생활에 대한 관심을 ‘세속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가정 사역은 매우 중요하며, 가정과 교회의 협력적 방향모색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서의 가정과 교회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김: ‘가정 사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정: 가정 사역(家庭使役 Family Ministry)이란 단어가 우리 주변에 정착되고, 여기에 대한 연구가 구체화 되고 있는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들은 가정문제에 대한 단편적 관심에서 벗어나서 이것을 체계화 하고 이론화 하며, 나아가서 우리들의 교회와 가정에 정착시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가정문제를 주제로 한 각종 세미나들이 개최되어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 왔지만 가정 사역을 이론적으로 체계화 하지 못한 약점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기본에의 회귀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신성을 지켜야 한다. 세상의 풍조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기독교 가정”이 되어지도록 교회들이 바로 가르쳐야 한다.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사회가 산다.”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11-30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㉖ 학원선교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우리나라에 온 초대 선교사들은 교회와 학교 그리고 병원을 세워 입체적 사역을 하였다. 그래서 지역마다 미션스쿨(Mission School)이라 불리는 각급 학교를 세웠고, 이 학교들이 한국 교육의 현대화를 이끌어 나갔다.지금도 전국 각지에 기독교 계통 학교들이 있으나 지금의 교육 환경은 옛날과 달라졌다. 문제의 탐색오늘의 기독교 계통의 학교들이 그 설립 이념에 따라 바른 교육을 할 수 있느냐? 란 문제가 제기된다.교육 환경의 변화와 정부의 교육정책 등이 기독교 학교들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위한 사역 즉 학원선교를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문제에 우리의 관심을 모을 필요가 있다. 사례의 탐구많은 학교중 한 학교를 찾는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설립한 전통있는 전주 신흥고등학교의 교목실장 박용화 목사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김남식(이하 김):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학원선교 사역을 하느라고 수고한다. 오늘날 학생들이 일반적 경향이 어떠한가?박용화(이하 박): 우리는 종종 한 나라의 미래는 그 나라 청소년들에게 달려 있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비행이나 폭력성 경향은 결코 간과할 수준이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청소년문제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지표는 이들의 흡연과 음주실태다. 그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청소년들의 음주나 흡연이 다른 비행의 시작이 되는 소위 ‘게이트웨이(Gateway)’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 최고 수준의 청소년 흡연율을 비롯해서 술집이나 윤락가에까지 드나드는 나이 어린 청소년들, 그리고 날로 증가하는 청소년들의 성범죄와 소비와 향락을 위한 각종 범죄 행위, 또한 학폭은 물론이고 따돌림과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음란·폭력으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우리 사회는 중병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거기에다 세계 제1의 청소년 자살률에, 인터넷과 스마트폰 중독, 게임중독 실태는 참으로 심각한 수준이다. 김: 이런 상황 속에서 학원선교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의 현실이 어떠한가?박: 오늘의 상황을 초래한 원인에 대해서 학자나 전문가 마다 여러 가지로 진단하고 있으나 대체로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는 정부정책의 일관성 결여이고, 둘째는 청소년들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치는 각종 유해환경이며, 셋째는 입시위주의 학교교육의 문제다.먼저, 입시위주의 학교교육 문화는 기독교학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사실, ‘기독교학교’는 ‘기독교’와 ‘학교’라는 두 명사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기독교’를 앞세우면 자율성에, ‘학교’를 강조하면 공공성을 강조하는 면이 강하다. 즉 기독교학교는 복음을 전수하고 성서적 세계관에 근거한 복음을 전파하며 선교적 사명을 실천해야할 자율성과 학교로서의 학문과 지식을 전수하고 가르쳐야 하는 공적인 책임성을 가진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의 기독교학교는 ‘자율성의 상실’과 ‘공공성의 약화’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며 신음하고 있다.거기다가 기독교학교의 가장 큰 버팀목이자 지지대인 한국교회도 선교적 관심이 ‘삶의 발아시기’로 선교의 황금어장인 중고등학교보다는 ‘장병 몇 명에게 세례 주었다’는 성과주의와 맞아떨어지면서 교단마다 군선교에 치중하고 있는 실정이다. 젊은 장병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군선교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것이다. 군선교에 앞서 가정과 교회가 아닌 처음으로 복음을 접하는 청소년들이 있는 기독교학교에 좀 더 관심을 가진다면 한국교회는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의 활기찬 발걸음으로 넘쳐 날 것이다.신자본주의는 학교를 무한경쟁으로 몰아가고 있는 거대한 공룡이다. 공립학교는 국가적 지원을 받지만,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기독교학교들은 이 경쟁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 재정적 위기는 기독교학교의 생존과 교육의 ‘질’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기독교학교는 이념적으로, 재정적 구조면에서도 사회의 흐름을 모방하면서 예배, 성경 수업, 신앙 활동을 장애물로 여기거나 축소시키고 오직 ‘좋은 대학 진학률’에 목을 매고 있는 현실이다. 전인교육과 신앙교육을 추구한다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실 기독교학교가 추구하는 바도 대단히 세속적이다. 명문대학을 진학을 통해 학생들이 정치계, 법조계, 의료계, 금융계로 진출하여 사회에 영향력을 과시하게 하고, 이를 통해 다시 학교의 명성을 더욱 드높이자는 논리이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펴며 기독교학교도 사실상 이 길을 선택하고 있지만, 기독교학교마저 이렇게 세속화되고 나면 ‘누가 이 세속 문화를 수정해 갈 수 있는 영적인, 정신적인, 도덕문화를 창출해 낼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따라서 기독교학교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교회가 울타리가 되어주고, 교육과정에 관해서 정부와의 협상은 물론이고 재정적 지원도 충분히 해야 하는 시점이다. 김: 교육부의 교육정책이 기독교계 학교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현장 실무자로서 보고 있는 상황은 어떠한가?박: ‘기독교 종립학교라 할지라도 어떤 특정 종교만을 강조하거나 강요하지 말라’는 정부 교육당국자들의 교육행정 방침이다. 이러한 지침은 갑자기 뛰쳐나온 것이 아니라 역사적 흐름이 있다. 중학교 무시험제 실시(1969년)와 고교평준화(1973년) 이후 끊임없이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의 채플과 성경수업에 대한 문제가 부각되어 왔다. 정부와 교육당국은 기독교학교의 정관을 무시한 채 일체의 신앙교육 행위를 비정규 과목으로 전환하도록 강요하고, 통제의 수단으로 ‘예산’이라는 칼자루를 사용하며, 최근에는 반기독교 연대로 뭉친 일부 시민단체들을 등에 업고 ‘학생인권조례’까지 들이대고 있는 실정이다. 제7차 교육과정이든 2015 개정교육과정이든 간에 정부의 미션스쿨에 대한 통제 정책은 결국 기독교학교의 존재 이유와 존재 양식에 심각한 훼손을 주며 기독교학교의 정체성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헌법에도 위배되는 국가 정책인 것이다. 그러면서 자유로운 선교활동은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이다. 심하게 표현하면, 기독교학교라는 명칭만 달고 겨우 ‘연명’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현실이다.김: 어려운 여건 속에서 기독교 학교들과 학원선교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란 심각한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현장에서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나?박: 이러한 시대적 정황과 현실 앞에 놓여 있는 기독교 학교는 ‘기독교학교만이 수행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를 정립하고 설립목적에 맞게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고 선교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해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학교 행사 때마다 예배를 드리고, 매주 채플이 있으며, 수업에 성경과목이 있고, 기독교적 교훈이 있으며, 교직원이 기독교인이라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답이 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자기 정체성의 문제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기독교학교의 건학 이념에서 핵심 중에 핵심은 바로 ‘성경적 세계관’에 부합하는 인물을 배출하는 데 있다. 즉, 기독교학교의 존재 이유는 세상이 요구하는 무한 경쟁자들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실체를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과 함께 하는, 그리고 생명존중과 인간사랑, 이타심과 자기 긍정을 가지고 학문과 신앙을 통합한 성품과 인격을 갖추고 세상을 보다 아름답도록 돌보고 가꾸는 청지기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다. 세상적인 성공(sucess)이 아니라 섬김(service)의 종(servant)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는데 있는 것이다. 점차 비인간화가 속도를 더하고, 세계는 기계화되어 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 그분의 섭리, 그리고 역사와 진리를 지켜야 할 지성과 신앙양심의 보루가 되는 일꾼을 세우는데 기독교학교의 선교적 사명과 방향성이 있는 것이다. 기본에의 회귀세속화의 물결이 학원선교의 터전을 흔들고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신 지상명령을 감당하기 위해 청소년들의 가슴에 복음 씨앗을 뿌리는 일에 우리 모두 힘을 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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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16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㉕ 찬송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찬송이 가지는 위력은 대단하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요 삶의 표현이며, 영광의 선포가 된다. 특히 예배에서 찬송은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예배의 핵심인 찬송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최고의 고백이다. 문제의 탐색예배가 언약 갱신의 현장이라면 여기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부분과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이 드리는 부분으로 나뉜다. 교회가 삼위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역동적인 것 중 하나는 찬송이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백성의 읊조림이요 높임이며 기도이고 고백이다.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예배 찬송은 하나님을 찬미하기보다 인간의 음악적 기교를 나타내는데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찬송이 어떠해야 할까? 전문적 음악가가 아닌 일선 목회자와 성도들의 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성경적 찬송’을 실천하는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다.사례의 탐구날마다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일선 목회자의 소리를 듣는다. 광주 동산교회 이한석 목사를 만났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목회자로 헌신하고 있으니 평생을 예배 속에서 살아온 셈이다.김남식(이하 김): 목사로서 늘 예배를 인도하며 찬송의 중요성과 오늘의 문제점들을 느꼈을 것이다. 찬송의 성경적 배경이 무엇인가?이한석(이하 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다니 앞에서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승천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늘 하나님을 찬송했다(눅 24:50-53). 여기 예수님의 축복과 제자들의 ‘찬송’은 같은 단어이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베푸신 복을 기억하며 회상하여 올려드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축복하신 그것을 제자들이 다시 시를 읊듯이 읊조리는 것이 찬송이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고 찬송했다. 이렇듯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 드림이다.김: 성경은 바른 찬송을 교훈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볼까?이: 그래서 성경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라고 명령한다(엡 5:19, 골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된다. 신약교회가 칠십인역 성경을 주로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시편을 시, 찬미, 신령한 노래로 분류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모두 시편이 된다. 다른 견해는 시는 시편을, 찬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을 노래하는 것을, 신령한 노래는 성령의 감동으로 지은 찬송이라는 것이다. 어떤 해석을 선택하든지 공통적인 면은 시편을 찬송함이다.김: ‘시편 찬송’은 개혁주의 교회들의 예배적 특성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시편 찬송을 부르기보다 ‘부흥성가’ ‘복음송’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한계가 무엇인가?이: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교회 성도들은 시편이 주는 유익을 누리고 있다. 물론 시편만 예배용 찬송으로 사용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시편이 주는 유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다. 우리에게 시편이 얼마나 자주 불려 지는가?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이 부분에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1930년대 이전까지 한국에 들어온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온 분들이다. 이 분들의 수고로 한국에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러나 이 분들 대부분의 신학적 배경은 미국 부흥운동이었다. 그러니 대륙의 개혁주의 유산을 이어가는 데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신앙고백과 예배에서 더욱 그러하다.김: 오늘의 예배 음악이 예배의 핵심에서 벗어난 듯하다. 가사나 곡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이: 종교개혁자 루터는 직접 찬송을 만들어 예배에 사용했다. 칼빈 선생은 제네바 시편 찬송을 만들어 성도들의 신앙을 도왔다. 실제 교회생활에서 시편이 찬송되는 교회를 찾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세속 음악의 장르에 개혁주의 신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가사를 붙인 노래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눈을 감고 음률만 들으면 예배음악인지 세속음악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곡들도 더러 있다.김: 나의 경험으로 보면 몇 해전 예장합동총회의 ‘시편찬송가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여 시편찬송가 만들기에 노력한 바 있다. 교회들의 무관심과 추진하는 사람들의 역량 부족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의 예배음악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이: 종교개혁은 교회의 예배를 바꿨다.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예배 음악이었다. 뛰어난 가창력과 예술성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게 맡겨진 찬송을 모든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으로 옮겨왔다. 종교개혁 전에는 전문 찬양대원을 양성하는 학교들이 있었고 심지어 이 학교에서 성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찬송은 이들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다. 종교개혁은 비성경적인 찬송 문화를 완전히 개혁했다. 우리는 이 전통과 원리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김: 우리의 예배 음악이 어떻게 회복되어야 할까?이: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을 다시 읊조림이다(시 145:5). 이러한 예배 찬송은 반드시 성경적 기준을 가져야 한다. 예배에서의 찬송은 보편성과 경건성(혹은 거룩성)이 담보돼야 한다. 보편성은 모든 성도가 공감하며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특정한 일부의 사람들만이 부르는 찬송은 예배 찬송으로 합당치 않다. 가사의 내용이 공감할 수 없는 것이라든지 음악적 기교가 젊은이들에게 적합해 어린이나 노인들이 따라 부를 수 없으면 안 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이나 미국의 그리스도인이나 국적을 초월해 함께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나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등은 보편성이 결여된 찬송이다. 시편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속역사와 그리스도의 사역을 내용으로 하는 가사에 곡을 붙인 찬송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보편성을 갖춘 찬송이다.김: 교회에서의 음악이 세속적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 너무 많다. 세속음악과 장르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이다.이: 리듬과 가락에서 찬송가와 세속음악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특별히 복음송은 더욱 그렇다. 복음송과 예배용 찬송의 구별이 없으니 어느덧 우리 가운데 복음송이 예배 찬송을 대신하고 있다. 복음송에는 포크, 팝, 발라드, 트로트, 재즈, 랩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이 혼재돼 있다. 바로 이러한 복음송을 통해 온갖 장르의 음악이 예배 속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예배 음악과 복음송은 구분돼야 한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된 예배 음악은 반드시 중생돼야 한다. 젊은이들과 초신자 또는 구도자들을 배려한다 할지라도 예배음악과 복음송의 균형이 필요하다.김: 음악의 영향력은 누구나 인정한다. 우리의 교회음악은 어떠해야 할까?이: 음악은 사람을 압도하는 힘을 지녔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감정이라는 좋은 선물을 주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흥분하기도 하며 차분하게 되며, 분노하고 슬퍼하며, 사랑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감정은 불과 같아서 반드시 신중히 관리하며 제어해야 한다. 신앙의 깊이가 부족한 성도가 자칫 교회 음악을 감정에 치우쳐 사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도 감정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예배 음악이 되지 않도록 감독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것이지 사람의 만족을 최고로 여기지 않는다. 리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로운 구원 역사가 울려 퍼질 때 성도들의 감정은 최고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기본에의 회귀바른 찬송 즉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자.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편찬송’이 우리의 찬송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최고의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여 합당한 찬송을 드리자.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11-08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㉔ 기도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특성이고 기본이다. 한국교회의 특성 중 하나는 ‘기도하는 교회’이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새벽기도회가 한국교회의 특성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우리는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 전도하자’를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표어로 삼았다. 문제의 탐색한국교회의 기도생활은 세계교회가 부러워하는 일이지만 근래에 와서 기도의 열기기 식어지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그 대표적 사례로 일부 교회에서는 새벽기도회를 폐지하고 이른바 ‘개인기도’라는 명목으로 바꾸는 일들을 하고 있다. 반대로 어떤 교회는 새벽기도운동으로 크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한국교회에 기도의 불꽃을 다시금 지펴야 하는데 우리들이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례의 탐구기도에 대한 문제라고 하면 초신자부터 목회자까지 모두들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신앙생활의 기본인 기도에 대하여 서울 세광교회 권영만 목사에게 들어본다.김남식(이하 김): 모두가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 실천하기 어려운 기도에 대해 대담하려고 한다. 먼저 기도의 의미부터 정리해 보자.권영만(이하 권):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고백이며 영적 호흡이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가장 필요하면서도 이것이 생활에 실천되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말았다.김: 우리의 삶에서 기도가 왜 필요 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현대사회가 발전하고 경제적 풍요를 누리다 보니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풍토가 되었다. 우리에게 왜 기도가 필요한가?권: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즉, 커뮤니케이션이 필수이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할 첫 번째 이유이다. 인간은 자립적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 존재이기에 하나님과의 소통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또 다른 이유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생기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기본적 방안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길이 기도이기 때문이다.김: 현대 교회들이 성장하고 발전하여 기도운동이 쇠퇴되어 가고 있는 것을 절감한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권: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자. 목사가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 밤낮으로 엎드려 기도한다. 교회가 성장하고 자리잡게 되면 기도보다 다른 일에 시간을 소모하는 경험을 우리 모두가 하였을 것이다. 현대 교회의 기도의 쇠퇴 이유는 여러 가지로 들 수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안락함’이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일부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폐지하고 각자 개인 기도를 하라고 하고 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새벽기도회가 없다면 목회자부터 새벽 5시에 교회당에 가서 기도하겠는가? 이것은 편의주의의 발상이요 세속주의에 물들어 가는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김: 우리가 교회 공예배 시간에 대표 기도를 하는 분들이 미사여구를 남발하고, 예배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기도를 하는 경우들을 쉽게 본다. 기도훈련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권: 대표 기도자의 기도 중에 문제들이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기도는 설교도 아니고 웅변도 아니며 규탄이나 고발도 아니다. 온 교인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기에 설교 못지 않는 주의가 필요하다.많은 기도자들이 기도문을 써 와서 그대로 ‘낭독’하는데 말의 실수나 시간의 절약 등 이점이 있을지도 모르나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하듯이 기도자도 기도를 준비하여 낭독보다 진정성 있는 기도를 하였으면 한다.또 하나 경계하여야 할 것은 이른바 ‘폭로성 기도’이다. 교회의 문제나 직분자의 사생활 폭로 등이 기도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이것으로 인해 교회가 분쟁을 겪는 일을 보았다. 이것은 우리들이 피해야 할 일이다.김: 내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하자. ‘기도많이 하는’ 한국교회 소속자가 미국 유학을 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기도많이 하고 미국 교인들은 기도많이 하지 않는다’는 선입관이 있었다. 그런데 강의 과목 가운데 ‘기도학’이 있었고 신약 전공 교수가 강의했다. 나도 이 과목을 수강했다. 한번은 어느 교수실을 방문하여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교수 두 분이 연구실 카펫트에 꿇어앉자 손잡고 기도하고 있었다. 나의 선입관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기도의 일상화 도는 생활 속의 기도를 생각한다.권: 성경은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했다. 우리는 생활 속의 기도를 통해 기도의 일상화를 해야 한다. 교회당이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기도의 일상화를 훈련시켜야 한다. 우리가 음식을 대할 때 자연스럽게 기도하듯이 일상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이런 훈련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우리의 신앙생활은 단순하다. 기도하고, 성경 읽고, 전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삶을 주도해 나갈 때 성공적 신앙인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김: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기도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옛날에는 부흥회도 많이 하고 산기도도 많이 갔는데 지금은 이런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기도운동의 시급성을 어떻게 보는가?권: 목회 경험에 의하면 기도많이 한 설교와 그렇지 못한 설교의 결과를 스스로 느길 수 있었다. 목회는 지식이나 자신의 카리스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다. 그러기에 기도가 필요하다.제일 먼저 목회자부터 기도해야 온 교인이 함께 기도하게 된다. 목회자들이 바깥일을 줄이고 기도에 집중하면 그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가 되고 성장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다른 누구를 말하기 전에 목회자가 기도의 제단에 엎드리고 이것이 번져 나가면 하나의 물결이 되어 한국교회를 살리고 한국과 세계를 살릴 것이다.기본에의 회귀빌리 그래함 목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현대 마귀는 목회자로 하여금 중요하지 않는 일에 바쁘게 한다”. 목회자에게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기도와 전도이다. 사도들은 여기에 전적으로 매달리려고 했다.오늘의 우리는 어떠한가? 기도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등잔에 기름을 붓자. 바른 기도를 통해 바른 교회를 세워나가자.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10-26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㉓ 주일학교 교육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교회가 설립되면 의례히 주일학교가 개교된다. 주일학교 어린이 교육의 바탕이 되고 교회성장의 지표가 된다. 어린이를 위한 주일학교는 교육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모자람이 없다. 어린이 교육은 천국 일군을 양육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문제의 탐색오늘날 한국교회의 주일학교는 고사 상태이다. 저출산으로 인한 어린이의 감소, 사교육의 발달에서 오는 교회교육의 쇠퇴 등이 심각한 요인이 되고 있다.이런 주일학교를 되살릴 수 없을까? 1970년대의 ‘부산서부교회의 주일학교 부흥’을 시대에 재현할 수 없을까? 어린이 교육을 생각하는 이들의 소망이고 목표이다.사례의 탐구경남 거창지방의 한 교회가 주일학교 어린이가 1,000명이 되었다고 연일 보도되었다.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이 사역에서 주일학교 부장으로 헌신했던 이가 목사가 되었다. 그가 거창 우리교회 박태안 목사<큰사진>이다. 그에게서 주일학교 교육에 대해 들어본다.김남식(이하 김): 사역하고 있는 지역의 특성을 소개하라.박태안(이하 박): 130여 년 전 조선을 선교한 서양의 선교사들의 눈에는 조선이 “은둔의 나라”(Hermit Nation)로 보였다면, 거창을 선교한 미 북장로회 선교사와 호주장로회 선교사들의 눈에는 “복음의 오지”로 불릴 정도로 오지 중의 오지이다. 경남 합천과 경계를 같이 하는 지역이라 합천 해인사의 영향이 크게 미치는 지역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조건들은 거창을 잘 설명하듯 기독교가 뿌리내리기에 아주 불리한 조건들이다. 거창에 복음이 전해지고 올해로 115년이 되어 간다. 10%도 되지 않던 복음화율이 20%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김: 주일학교에 헌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박: 농촌교회에서 주일학교를 섬길 때의 일이다. 현재 농촌지역의 학교들이 인구 감소로 인해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제가 사역을 할 당시는 그래도 현재보다 나은 실정이었다. 면단위의 학교에 어린이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제법 어린이들이 있었다. 어느 여름! 성경학교가 열려 많은 친구들이 몰려왔다. 그런데 학교 앞 전도에서 만난 두 명의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두 명의 어린이는 조그만 암자(절)에 산다는 것이다. 사정을 들어보니 이 친구들은 고아인데 절에서 데려다가 키운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어찌나 아픈지 그 친구들이 너무나 불쌍해 보였다. 하나님은 이때 저에게 한 마음을 주셨는데 이 친구들이 절에 살지 않았으면 교회로 인도하고 구원을 얻게 할 수 있는데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그 후 다음 성경학교에는 출석을 하게하고 구원론을 통해서 이 친구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도와주었다. 이러한 일로 인해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되어진 것이 계기가 된 것 같다.김: 주일학교 발전의 과정을 소개하라.박: 거창의 아주 조그마한 면단위의 마을로 삶을 옮겨가게 하시고 교회를 출석하게 하셨다. 그리고 바로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며 어린이전도협회의 교사대학을 수료하고 전도에 열심을 내며 섬겼다. 섬기는 교회의 주변에 있는 초등학교 어린이 전체의 수는 82명, 유치부까지 합하면 102명이었다. 교사들과 함께 모여 기도하고, 토요일 오후에 학교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탈 인형을 쓰기도 하고, 축구도 하고, 선물도 나누어 주고, 같이 놀아 주기도 하고, 마을로 산길을 돌아가며 데려다 주기도 하였다. 그해 여름성경학교를 하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근처에 있는 다른 교회의 목사님 아들들까지 성경학교에 참여를 한 것이다. 그래서 참여한 학생이 100명을 넘어간 것이다. 교사들은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하며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쁨의 단계를 넘어 더욱 한 단계 높은 일들을 준비케 하셨다.하나님은 거창읍에 있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부장으로 섬기게 하셨다. 첫 주일 예배는 어린이 12명, 교사 5명, 저까지 모두 18명이 드렸다. 너무나 부끄럽고 안타까운 예배였다.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할까 하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는데 거창읍에 어린이가 몇 명일까? 교회 바로 근처에 있는 초등학생의 숫자를 알아보니 약 3,000명 그리고 다른 4개 초등학교를 모두 합치면 약 3,000명 그래서 거창에 모든 어린이 숫자가 약 6,000명이었다. 그중에 일천 명은 적은 숫자가 아닌가 하고 일년 전을 되돌아보며 믿음을 갖게 하셨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쉽게 될 것 같은 일들이 쉽지 않았다. 교사들과 함께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였지만 80명!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밖에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어린이전도협회에서 삼일클럽 장소를 섭외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연락하여 우리 교회에서, 열 수 있게 되어 훈련된 교사들은 ‘교사들의 자신감과 나 자신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어린이들을 만나면서 전도하는 방식이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8월 말쯤 120명을 넘어 가고 있을 때 ‘10월말까지 1,000명 전도하자’ 하면서 열심을 강조하였다. 그러자 교사들은 한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나아갔지만 육체적으로는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10월 마지막 주일을 두 주일 앞두고, 17일 주일에 186명이 모자라는 1,000명을 이룰 수 있게 하셨다. 교사들의 열심히 또 나타나는 것을 바라보게 하셨는데 교사들이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 어린 목자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교사들의 후원을 받은 목자들은 열심히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면서 교회는 나날이 부흥되어갔다. 1,500명을 넘어가고 계속 주일마다 새로운 친구가 20~30명씩 등록되곤 하였는데, 주님은 저희들을 통하여 교회의 부흥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지평도 넓혀주셨다. 김: 한국교회 주일학교 교육이 무너져 가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박: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한다. 기독교 교육 또한 미래의 기독교를 짊어질 일꾼을 만드는 일이 된다. 그러나 지금 흔들리는 주일학교의 부재는 심각한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을 줄로 믿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본인의 생각을 정리하면 먼저는 교역자의 사역 부분과 둘째는 성도의 역할 부분으로 나눈다.먼저 교역자의 사역 부분으로는 담임 목사 중심의 주일학교 사역이 되어야 한다. 많은 목사님들은 유년주일학교를 생산성이 없는 소모 기관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주일학교에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주일학교에만 집중해도 그 부모님들이 있고 주위에 많은 새로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는 그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그들은 교회의 새로운 전도 대상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성도의 역할에서 볼 때 성도들이 직접 교사가 되어 성도의 자녀들로 하여금 주일학교에 출석하게 하는 것이 주일학교를 살리는 우선 과제가 될 것이다. 주일에 공부한다고 하거나 바쁘다는 핑계로 주일학교에 출석하지 않게 하는 것이 정말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성도의 자녀들이 주일학교에 출석하게 됨으로 관계되는 친구들을 전도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자녀들이 앞으로 한국 기독교의 주인공들이라는 생각에 교회 주일학교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교사화’ 하는 것이다. 교사는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각자가 잘하는 부분에서 봉사하면 된다. 즉 차량 교사, 간식교사, 교통질서 교사, 아이들 돌봄 교사 등 보조로 할 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다. 그런 중 제일 중요한 것은 교사로서 ‘같은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부터 되어야 부족하고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의 교사화는 부족한 자원에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 기본에의 회귀한 시골교회의 사례를 보았다. 아무리 세속 교육이 발전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교육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말씀을 바로 가르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가르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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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획
    2018-10-19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㉒ 원로목사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목회자의 길은 헌신의 길이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역경과 고통을 이기는 인내의 삶을 산다. 젊음의 열정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하나의 열매가 되어 교단이 정한 법에 따라 은퇴하게 된다. 일정한 자격과 절차에 따라 ‘원로목사’로 추대된다. 목회자에게 큰 영광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만 않다.문제의 탐색존경과 감사로 시작된 ‘원로목사’제도가 갈등과 권력 다툼으로 오해받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사이의 리더십 승계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들이 심하면 교회분열로까지 치닫는 경우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그 여파로 원로목사 제도 폐지론이 공공연히 운위될 정도이다. 존경과 감사보다 경제적 계산이 앞서는 오늘의 세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사례의 탐구원로목사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현재 원로목사로 있는 분을 만났다. 예장고신측 소속의 경주 경일교회 배기웅 원로목사에게 이야기를 듣는다.배 목사는 나이 20에 전도사로 시작하여 70에 은퇴하였으니 꽉찬 50년을 목회하였다. 그러면서 계속 공부하여 신학교 강의도 하고 책도 여러 권 저술하였다.김남식(이하 김): 평생을 목회하다가 은퇴하여 원로목사가 되었는데 보기에는 아직도 팔팔해 보인다. 원로목사에 대한 규정이 어떤 것인가?배기웅(이하 배): 은퇴한 지 5년이 되었으나 아직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원로목사에 대한 규정은 각 교단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정년제를 실시하는 교단에서는 만70세에 은퇴한다. 원로목사는 보통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한 목사 중 교회 공동의회의 결의를 거쳐 추대한다.김: 한국교회에는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만70세가 정년이 많다. 배 목사의 사역에 대해서 말해 달라.배: 나는 일찍부터 목회자로 사역하였다. 20세에 전도사로 첫 사역을 하여 70세에 정년퇴임하였으니 50년을 사역하였다. 그러니 내 인생의 전부가 교회였다.김: 지금 원로목사로 추대된 교회는 배 목사가 개척한 교회인가?배: 부산, 대구 등지에서 목회하다가 경주에 경일교회를 개척하여 30년간 섬기다가 은퇴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교우들의 사랑으로 대과없이 지난 것을 감사한다. 김: 원론적인 질문을 하겠다. 원로목사에 대한 교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배: 원로목사의 입장에서 말하기 조심스럽다. 나도 원론적인 답을 하겠다. 교회는 원로목사에 대해 존경과 사랑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헌신한 주의 종에 대한 예우이다. 이것은 물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 안에서 존경과 사랑이 우러나야 한다는 말이다.김: 그러면 원로목사가 교회에 대해 어떤 태도여야 하는가?배: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의 자세이다. 오랜 세월 같이 신앙생활을 하였기에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예우관계만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떠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흔히 말하는 ‘내려놓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없으면 갈등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말은 이렇게 쉽게 할 수 있지만 실천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김: 한국교회에서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교회가 많다.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떻게 하면 이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배: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에 원로목사나 담임목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원로목사의 태도는 앞에서 말한 ‘내려놓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고생하며 개척한 교회가 이만큼 성장했고 아직도 목회할 힘이 있는데 교회법에 따라 은퇴하게 되니 아쉬움 또는 억울함(?)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교회 일에 관여하게 되고 이것이 간섭이 될 수 있다. 은퇴했으면 그 교회와 연을 끊고 가지 말아야 함이 하나의 방법이다. 담임목사의 관점에서 보면 원로목사의 목회 방법이 시대에 맞지 않는 것 같이 보이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뜯어 고치고 심지어는 주보 내용부터 바꾸고 있다. 이것이 갈등의 출발점이 된다. 교인들 가운데는 원로목사에게서 훈련받은 사람이 더 많음을 기억해야 한다.김: 아름다운 리더십의 승계를 위해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일까?배: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으나 두 가지로 정리하자. 첫째, 원로목사의 내려놓음이고, 둘째, 담임목사의 계승과 보완이다.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계승과 보완을 통해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 원로목사가 되고나니 어려운 점이 많을 것인데 중요한 것만 말하라.배: 교회마다 사람마다 형편이 다를 것이다. 주변의 형편을 모아서 대답하겠다. 첫째, 경제적 어려움이다. 교회에서 예우가 있기는 하지만 은퇴 후의 경제적 고통은 모든 원로나 은퇴목사들이 겪는 문제이다.둘째, 건강 문제이다.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 은퇴 후에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는 것을 보는데 평소의 건강관리도 중요하고, 은퇴 후에도 꾸준히 건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경제적 여건과 맞물리면 어려움을 겪게 된다.셋째, 처신 문제이다. 은퇴자들의 한결 같은 고민은 주일에 갈 교회가 없다는 점이다. 처음 가면 반겨주지만 두세 번 가면 눈치를 받는다. 나도 경주에 살면서 대구의 은목교회(은퇴목사들의 교회)에 주일마다 가서 피아노 반주자 노릇을 한 경험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정이다.김: 그러면 요사이는 어떤 사역을 하고 있는가?배: 대구의 은목교회 피아노 반주자를 하다가, 한동안 경주의 목회자 없는 교회에서 설교자로 섬겼다. 그러다가 한 그룹의 성도들이 모여 교회를 개척하고 나를 그들의 목회자로 정하였다. 지금은 은퇴 후의 제2 사역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언제까지 할지 모르나 주일마다 말씀선포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기본에의 회귀‘원로목사’,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골치 아픈’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 원로목사 제도 폐지가 논의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몇몇 원로목사로 인해 교회가 소란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제도의 소중함을 지켜 나가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 쌍방의 노력이 필요하다. 원로목사의 ‘내려놓음’과 담임목사의 ‘계승과 보완’이 있어야 한다. 원로목사의 문제는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교회 윤리의 문제이다. 원로들의 남은 세월이 아름다워지기를 기도하자.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10-05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㉑ 교회연합운동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혼자하기 보다 힘을 합하면 여러 가지로 유익하다. 교회 역시 교단이 다르고 주장하는 바가 다를지라도 복음 안에서 힘을 합하면 그 열매가 증식된다.문제의 탐색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은 어떠한가? 협력의 아름다운 전통은 사라지고 파벌과 분열로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이것을 어이해야 할까?사례의 탐구연합운동에 대해서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말들을 할 수 있다. 총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정일웅 박사와 이야기를 나눈다.김남식(이하 김): 현재 한국교회연합운동은 어떤 상태에 있다고 보는가? 정일웅(이하 정):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은 진보교회와 보수교회로 분리되어 각각 따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이다. 진보교회의 연합운동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통하여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그간 산업화시대에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화를 이루는 일에 역할이 참으로 컸다. 그리고 인권보호운동에 앞장서는 일은 진보교회 연합운동의 특징이었으며,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한국교회다수인 보수교회와의 교제는 외면한 채, 타종교와 어울리며, 종교다원주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KNCC의 신학정체성을 의심하게 하였다.그렇지만, 보수교회의 연합기관으로 알려진, ‘한국기독교총연합회’도 역시 현재, 정체성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유는 지난 10년 이래로, 한기총은 보수교회로부터 그 대표성이 불신 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단성을 의심받는 단체들을 회원교단으로 영입한 일로 인하여, 기존 회원교단들이 대거 탈퇴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합동교단을 비롯하여 통합, 고신, 합신, 성결교, 침례회 등은 모두 회원자격을 스스로 유보해 놓은 상태에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회원은 여의도순복음교단을 비롯하여 약 200여개의 군소교단과 각종 선교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보수교회의 연합기관으로서 명칭만 유지할 뿐, 그 참된 역할은 거의 정지된 상태에 있는 모습이다.김: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연합운동은 어떤 장점이 있었는가? 정: 되돌아보면, 한창 조선 땅에 복음 선교가 진행될 때, 선교사들은 선교사역의 협력관계를 위하여 1905년에 개신교선교부통합공의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다가 1918년 한국교회의 연합기관인 조선예수교 장·감연합협의회가 창립되었다가, 1923년에 해체된다. 그리고 1924년 조선선교부연합공의회와 장감연합협의회가 통합하여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로 설립되었고, 교파를 뛰어넘어 복음선교사역을 도왔던 것이다(선교지역 분활). 그리고 초기의 한국교회연합운동은 일제식민통치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에도 힘을 모았고, 특히 독립선언문발표에서도 교파를 초월하여 기독교지도자 16인이 참여하게 된다. 비록 8.15해방과 더불어 1946년 ‘한국기독교연합회’가 새 출발을 했지만, 역사를 정확히 들여다보면, 그 당시 첫 대표회장을 비롯하여 연합회를 주도한 인물들이 친일파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교회역사연구가 밝혀주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 선교사들에 의한 연합운동은 한국교회를 위한 복음전파와 선교사역에 집중했던 것 분명하다. 김: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필요성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 무엇보다 먼저, 한국교회연합은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원하시는 일이라는 점이다. 성경은 이러한 관점에 대하여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있다(요 17:22-23, 엡 4:1-6, 고전 1:10-13). 되돌아보면, 한국교회는 지금 교회끼리 서로 교파끼리 경쟁하느라고 지쳐있다. 교회가 연합해야 한다는 주님의 명령을 잊고 있는 모습이다. 비록 세상의 인간적인 삶은 경쟁과 불가피한 관계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경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경쟁을 뛰어넘어 서로 돕고 협력하는 형제자매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김: 앞으로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참된 방법론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정: 교회연합의 방법론은 오늘날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삶의 태도로는 불가능하다. 지나친 소유욕과 경쟁심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적인 사고와 태도에 익숙한, 참으로 성숙한 신앙적 사고가 요망된다. 지금까지 신학적인 명분 없이 분열된 교단들은 겸손하게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기존 교단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다(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 하에 나누어진 200여개의 군소교단들).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기존 교단들의 신앙역사와 전통을 존중하여 이 시대에 요구되는 더 큰 복음 사역의 대의를 위하여 양보하며, 연대(연합)하여 큰 힘을 발휘하도록 협력하는 일이다. 그간 한국교회가 분열하면서, 항상 내세운 명분은 신앙교리의 신학적인 이해의 차이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그간 좁아진 신학적인 사고의 지평을 활짝 넓히는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고후 6:13). 보수신학도, 진보신학도, 보수교회도, 진보교회도, 양 연합회를 주도하고 있는 지도자들도 각자의 기득권 지키기 논리를 중지하고, 복음적인 시각에서 주님의 말씀을 성찰하고, 순종을 실천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의 한국교회연합에 대한 대응과 방법을 거기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김: 한국교회연합운동의 대 사회적인 역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정: 한국교회의 대사회적인 역할은 참으로 중요한 과제이다. 그것은 교회가 이민족과 국가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주된 역할이며, 하나님의 통치 실현을 가시화하는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모든 인간의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섬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지금까지 한국교회연합운동이 보여준 대사회적인 역할은 그간 한국정부들(보수와 진보정부)의 대변인 역할에 준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교회의 분열은 한국사회의 정치를 혼란하게 하고, 사회여론을 분열시키는 일에 공헌한 것뿐인 셈이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 역할은 언제나 사회적 가치관(이념)의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성경적이며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사회적인 이념들을 바르게 통찰하여, 진리로 섬기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실현을 중심으로 사회와 정치와 인간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올바른 지혜와 진리를 제시하는 역할이어야 한다.김: 이번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가 주최한 제3회 목회자컨퍼런스의 취지와 목적은 무엇이며,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정: 저희 목회자컨퍼런스는 “한국교회의 공동체성과 공공성을 회복하자”란 주제로 준비되었다. 취지와 목적은 현재 경험되는 한국교회의 공동체성과 공공성의 위기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답과 지혜를 찾으려는 교회개혁운동이다. 지금 흔들리는 한국교회의 공동체성과 불신받는 한국교회의 공공성 회복방안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한다.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회개운동의 불씨가 되기를 원한다. 또한 한국교회의 진보와 보수가 만나는 연합운동의 새로운 시작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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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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