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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50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50.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혜성같이 나타난 침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마 3:2)는 것이었다. 예수님도 똑 같은 말씀을 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이 말씀 가운데서 ‘천국’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 곧 ‘은혜의 왕국’를 가리킨다. 사탄이 우선 지배하고 있는 흑암의 세상에 하나님께서 빛의 왕국을 세우시는 것이다. 나라가 있으면 그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있어야 하는데, 예수께서 이 나라의 왕으로 임하셨다. 통치를 하려면 법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이미 시내산에서 선포되었지만, 예수께서 오셔서 그 법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밝혀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마태복음 5장의 팔복으로 시작되는 산상수훈이다. 그 교훈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은혜의 왕국의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지, 국민들의 자질과 자격을 매우 세부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하나님 백성의 첫째 조건–회개하나님의 왕국에는 죄를 품고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천국의 입구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란 어떤 것인가? ① 진정한 회개를 하려면 하나님의 순결하고 거룩한 말씀에 비추어 자신이 얼마나 추한 죄인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 일이 일어난다. ② 그 다음 단계에서는 그 죄에 대하여 슬퍼해야 한다. 그러한 죄를 품고 살아 온 자신에 모습에 대하여 슬픔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③ 그리고 나서 그 죄를 깊이 통회하고 뉘우치며 회개하는 것이다. ④ 죄를 회개한 다음에는 죄를 미워해야 한다. 죄가 미워지지 않으면 다시 그 죄의 행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⑥ 죄를 미워하면서 죄에서 떠나야 한다.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해서 범하면 안 된다. 혹시 반복되었을지라도 즉시 돌이켜 회개하고 깨끗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⑦ 죄를 회개한 다음에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의 법도를 따라서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 해결책이다.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 반복되고 지속되면서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을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한다. 이렇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온 시민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교만한 자들은 그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성품이 온유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이 깨끗해야 왕이신 하나님을 뵐 수 있다. 옳은 일을 지키기 위하여 핍박을 받을 각오도 돼 있어야 한다.하나님의 임시 정부와 공무원들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우신 ‘은혜의 왕국’은 어떤 의미에서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만들어진 하나님의 임시정부에 비유할 수 있다. 일제의 탄압 하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세운 임시정부의 일꾼들은 수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으며, 때로는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그들은 처절한 투쟁의 현장에서 피흘리며 싸웠다. 마찬가지로, 사탄의 세계에 임시로 세워진 ‘은혜의 왕국’에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공무원들은 이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투사들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임시 정부의 각료들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자들을 내보내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마 10:16~18)고 하셨다. 또 우리의 왕께서는 이 나라의 공무를 수행하는 일꾼들에게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7~39)는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이라도 버릴 각오를 하라고 당부하셨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노심초사 하며 타협하는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결단코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일제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투사들은 이런 각오로 일본에 저항하였는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의 세계에 대하여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방법으로 투쟁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에 맞추어 교회를 개혁하고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력을 다하고 있는가?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긴급동의 교회연합신문에서 기획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집’ 50회를 마감하면서 그 동안 기고한 글들을 요약하여 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1) ‘오직 성경’ 정신의 회복–종교개혁의 정신은 ‘오직 성경’이었다. 현대 교회는 성경과 너무 멀어졌다. 그리고 성경을 너무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한다. 여기에 교회 위기가 있다. (2) 목회자 수준 향상을 위한 공동의 노력–교회와 성도들은 목회자의 영적 수준을 능가하기 어렵다. 성직자의 지적, 영적, 도덕적 수준을 높이는 일에 온 교회가 연합하여 노력해야 한다.(3)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올바른 이해–성령의 핵심 사역은 방언도 아니고 치유도 아니고, 복음전도의 능력을 더하시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령을 올바로 이해하고 구해야 한다. (4) 복음이 상품화 되어가는 문제–복음을 성도들의 욕구에 맞추어 변질시켜 놓은 것이 현대교회의 치명적인 문제이다.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여 성도를 회개케 하고 각성시켜야 한다. (5) 성서적 종말 신앙의 부활-기독교는 종말신앙이다. 예수의 권면은 대체로 종말사상에 근거한다. 항상 깨어서 구원의 날, 재림의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라는 것이 신약의 핵심이다. (6) 교회 세속화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오늘날의 현대교회는 화려함과 물질만능주의와 세속화된 음악과 경건하지 못한 예배 때문에 병들고 있다. 이 세속화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7) 지도자의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다 –성도들은 지도자의 설교를 듣고 변화되기 보다는 그들의 정신과 삶을 보고 배운다. 교회는 철저히 자신을 희생하여 헌신하는 지도자를 찾는다.[결론] 예레미야 선지자가 애타게 탄원하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애 3:40). 호세아 선지자도 호소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인류의 역사는 ‘타락’과 ‘회복’ 사이를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단진자 운동의 연속이다. 타락은 인간의 죄악성 때문에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만, 회복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실 때에만 가능하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과 세속화의 문제는 인간의 죄악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회복은 절대로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강력한 의지가 발동하고 간절하고 열렬한 심령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불타는 열정이 있어야 변화와 개혁이 시작된다.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대한민국의 성도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 18:3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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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9-21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49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49. ‘사랑하라’는 말의 진의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말씀은 교회 입구나 측면에 부착되어 있는 간판이나 현수막에 많이 사용하는 구절이다. 기독교 신앙을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단어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기독교 신앙의 대표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성경 전체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압축하여 하나님이 친수로 기록해 놓은 문서는 십계명이다. 그 십계명의 내용은 열 가지이지만 정신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두 가지다.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피상적이다. ‘내리 사랑’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랑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내려가는 것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자녀가 부모를 사랑할 수는 없다. 부모는 단지 자녀들이 부모의 말에 잘 순종하면 그것에 만족하고 그것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매우 한정적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명백하게 제시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이웃 사랑“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이 말씀을 사람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을 하자면, 사람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지는 못할지라도 미워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거울삼아서 자문자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나는 가족을 포함하여 주변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가?”. 이 질문은 우리의 생명 혹은 영생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4,15). 살인을 쉽게 할 수 없듯이 사람을 쉽게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말씀이다. 사람을 미워하게 될 때에 즉시로 죽는다면, 우리는 과연 사람을 미워할 수 있을까?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은 죽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웃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사랑하라=대접하라예수께서 계명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였다. 예수님 당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구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사랑하라”는 것임을 깨우쳐 주는 말씀이다. 아무리 구약성경 지식이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구약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사랑’은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이 아니고 생활 전체를 지배하는 ‘원칙’이라는 것이다. 성도의 삶 속에서 어떤 조건이나 환경에서도 흔들림 없이 지속적이고 변함없이 지켜져야 할 원칙은 무엇인가? 그것이 마태복음 7장 12절에 나오는 황금률(Golden Rule)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 마지막 부분에도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이 나온다. 이 표현은 신약성경에 두 번 나오는데 “사랑하라”는 말씀 끝에, 그리고 “대접하라” 말씀 끝에 나온다. 그러니까 구약성경 전체를 요약하면 “사랑하라” 혹은 “대접하라”는 것이고,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배하는 원칙이라면 그 원칙은 황금의 법칙 곧 남을 “대접하라”는 것임을 깨우쳐주고 있는 것이다. 남을 대접한다는 것 내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물론 대접하는 것의 중심에는 사랑의 동기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 (1)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모든 행위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 마음의 동기이다. 그것이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마음속으로 나를 존중해주고 좋아해 주기를 바란다면 내가 먼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이 대접의 출발이다. (2) 말로 다른 사람을 격려해 주고 칭찬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언어이다. 어떤 말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력을 주는 반면에 어떤 말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몸을 병들게 만든다. 즉 생명적 언어와 사망적 언어가 있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을 해 주면 기분이 좋다. 칭찬을 해주면 힘이 난다. 그렇다면 그런 대접을 내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늘 좋은 말을 하고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을 하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인정해 주고 좋아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좋아하는 것은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에너지요 활력소가 된다. (3)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사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생명과 시간과 건강이 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있고 능력이 있다. 개인적으로 차이는 많이 있지만 누구나 재물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소유물을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대접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나눌 때에 사람은 행복감을 느끼고 보람을 느낀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그러한 본성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의 그러한 성품을 사람에게도 주신 것이다. 사랑의 바탕은 희생이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시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을 보고 한없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4) 구원의 복음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도록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영원히 죽을 인생에게 생명의 복음을 나누고 영원히 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대접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딤후 4:2).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전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이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 36). 이에 대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은 언제 자기들이 주님을 대접했느냐고 묻는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그래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황금률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9-14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8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48. 기독교 신앙의 본질-‘하나님의 형상’ 회복 어떤 이슈를 가지고 격렬한 시위를 하는 군중들 가운데는 그 이슈의 핵심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소위 군중심리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교회를 출입하는 수많은 교인들 중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참 뜻을 추구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속성 때문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주여 주여” 하는 자는 많은데,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적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은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마 7:13,14)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말씀’으로 지으셨지만,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셨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창 1:26)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다. 여기에서 복수 1인칭대명사 “우리”는 삼위 하나님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 다음에 나오는 “형상”(히.첼렘)이나 “모양”(히.데무트)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는 신학적 시도가 있기는 하나, 유사한 단어를 연속적으로 사용하여 강조의 효과를 나타내는 히브리인들의 표현 방법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과 속성과 성품을 부여받은 존재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참으로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창조된 피조물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할 때에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외형이나 모습을 연상하게 되지만 사실 더 중요한 핵심적인 의미는 그분의 성품을 부여받았다는 것이고, 그 성품의 본질은 “사랑”이다. 태양이 열과 빛과 에너지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그것이 발산되듯이,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체의 본질이 사랑이시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예수님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오랜 세월동안 배우고 깨달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이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하여 매우 심오한 의미를 깨우쳐 주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인간이 범죄하므로 그 하나님의 형상은 크게 훼손되었고 거의 상실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그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에, 비록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받을 때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악을 행하고 나면 불안하고 불쾌하고 선을 행하고 나면 평안하고 기쁜 것도 아직 사람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신 성품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예수 그리스도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하지만, 그 형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을 최단 거리에서 볼 수 있었던 모세도 그분의 등만 보았을 뿐이다(출 33:23).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내려오심으로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시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에 대하여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삶과 그분의 가르침을 유심히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한 번은 예수의 제자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그러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에 성품에 대하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마 11:29)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성품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시면서 그분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한 헌신과 봉사에 바치셨다. 예수님은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마 4:23)는 일, 즉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을 전인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일하셨고, 마침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셨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분의 성품이다. 사람은 원래 그러한 속성과 성품을 가진 피조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예수의 성품을 닮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면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갈 4:19)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권면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자신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하여 끊임없는 투쟁을 하면서 복음전도에 헌신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를 닮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 이러한 말씀들 가운데, “몸을 쳐서 복종하게”한다는 말씀이나, “참된 것을” 한다는 말씀이나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는 말씀들은 모두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 즉 예수의 성품을 닮기 위하여 투쟁하는 사도 바울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사실상 타락한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그러한 의식과 목표를 가지고 전진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말씀하셨다. 진리의 말씀에 순종할 때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 성경적 이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고 하였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는 진리의 말씀,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사도 바울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고 하였다. 예수께서도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요 16:13)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이다. 결국,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창조시에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 즉 그분의 성품을 회복하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9-01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7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47. ‘기득권’과 ‘명예욕’을 극복해야 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Lucifer, 루스벨)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 14:12~15).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성결절은 하늘의 천사장이었던 루스벨(사탄)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어 쫓긴 배경의 핵심을 말하고 있다. 피조물이었던 천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다른 천사들을 포섭하고 미혹하다가 타락하여 죄악의 장본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루스벨의 심리는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의 성직자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때로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추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기독교의 성직은 부르심으로 시작된다예수께서 30세가 되셨을 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셨던 일 중의 하나는 앞으로 그분께서 명하시는 사명을 이루고 성취시킬 제자들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인간의 내면세계와 동기와 기질과 됨됨이를 모두 아시는 주님께서는 현재의 위치나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동기와 미래의 변화될 모습을 보시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비롯한 열 한 사람을 불러내셨다. 그런데 한 사람이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자천하여 나섰다. 그가 바로 가룟 유다였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가룟 유다가 가장 유능하고 쓸 만한 인물로 보였다. 다른 열 한 제자들조차도 유다 같은 사람이 자기들과 함께 예수의 제자가 되어 자기들의 수준이 평가절상(平價切上) 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후일의 결과는, 예수님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성공하였고, 스스로 나서서 제자가 된 유다만 실패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이루실 때에 인간의 안목으로 볼 때에 약하고 미련하게 보이는 자들을 택하여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그 이유를 적절하게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일꾼들을 불러내시는 기본적인 개념이다.하나님의 일꾼이 되고자 스스로 나서는 사람들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시는 이와 같은 원리에 비추어보면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에서 지도자들을 선출하는 과정이나 방법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모습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신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 보겠다고 나서는 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지만, 금전을 사용해 가면서 사람들을 포섭하고 자기를 지지하도록 이끌어내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성직매매와 같은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러한 방법과 절차를 거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일하는 기간 내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욕구와 욕망을 벗어나기 힘든 것이 연약한 인간의 속성이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업이 인간 중심으로 변질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될 것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소위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지면, 자의건 타의건 간에 그것을 놓지 않으려는 인간적 욕심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되었다면, 적절한 시기에 하나님의 또 다른 부르심을 따라 가면 되는데, 출발이 부르심으로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 단계도 부르심을 따라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이 고리가 이어지고 있는 한, 교회의 진정한 부흥과 개혁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이란, 오직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인간 중심으로 일을 할 때에 성령께서 함께 일하실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을 육의 힘으로 이루려고 할 때에 나타나는 결과는, 혹시 외관상 발전하고 부흥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영의 역사가 아니었음이 드러날 것이다(롬 8:7~9). 하나님의 교회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은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인지, 아니면 육적인 본성으로 교회를 지도하고 있는지를 날마다 면밀히 살피면서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살아가는 신령한 종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를 높이고 싶은 자만심, 다른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는 권력을 갖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명예욕, 이러한 본성적인 인간의 욕망들은 성직자 자신과 교회를 약화시키는 독소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신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는 말씀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와 싸워서 이기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초기 교회 제자들의 경험이 부흥의 초석이다예수의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육과 훈련을 받던 3년 반의 기간 동안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형편과 별 차이가 없었다. 예수님이 왕권을 회복하면 최측근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암투를 벌이던 제자들의 모습, 십자가를 앞두고 모두 도망했던 비겁한 제자들, 그의 선생을 심문하는 법정에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수제자 베드로의 모습, 이러한 면면을 보면 한숨이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다음, 전혀 새로운 인물로 태어나게 되었다. 그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는 예수님 승천 후,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모였던 마가의 다락방에서 나타났다. 먼저 그들은 예수님에게 보여진 자신들의 모습에 대하여 한없는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느끼게 되었고, 이전에서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던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이었는지를 통절하게 깨달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하면서 회개하고 한 마음으로 연합되기 시작하였다. 어떤 집단의 구성원들이 교만심과 자고심과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한 연합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자아가 죽고 깨어지고 그 속에 주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실 때에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합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남이 먼저 죽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죽어야 한다. 나는 죽었는데 상대가 안 죽은 것 같다고 다시 살아나면 헛일이다. 상대방에 상관없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살 길이고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길이다. 제자들이 그렇게 서로 회개하면서 자신을 낮추었을 때 연합이 일어났고, 연합하게 되었을 때선교적 사명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깨닫고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그들에게 임하였다. 이제 그들은 담대한 믿음과 용기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여 짧은 기간에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 나라들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하였다. 오늘 한국교회에도 제자들의 경험이 필요하다. 부르심, 십자가 경험, 회개, 연합, 기도, 성령충만, 복음전도, 이것이 부흥과 개혁을 위한 수순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8-27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46
    46. 기독교신앙이 무너지는 이유 기독교신앙의 근본은 성경이다. 그래서 기독교신앙은 성경 말씀에 충실할 수록 든든해지고 성경에서 멀어질 수록 약해진다. 오늘날 기독교신앙이 현저하게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나 성도의 삶이 성경의 말씀 중심에서 이탈해 가고 있거나 말씀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양한 원인들 가운데 우선 일곱 가지 이유를 선별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1. 감성신앙을 선호하는 그리스도인들기독교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집을 지을 때에 땅을 파고 기초를 놓는 것과 같다. 기초 없이 지어진 집은 곧 무너진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요 17:3)라고 하였다. 예수가 어떤 분인지, 구원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통성기도나 어떤 열광적인 집회에서 마음에 뜨거움을 느끼면 그것이 구원을 받은 표시인 줄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신앙에도 감성적인 요소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앙에도 지(知) 정(情) 의(意)단계가 필요하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知)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그 말씀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마음의 감동(情)이 필요하다. 그 다음 단계는 믿음을 가지고 깨달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意)이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신앙이 든든하게 성장하게 된다. 2. 성령에 대한 오해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령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복음의 능력을 더하시기 위함이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그리고 성령께서 하시는 또 다른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이와 같은 말씀에 의지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 그리스도인 삶에 맺히는 열매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23)이다. 3. 가인의 제사를 드리는 습관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제물이었다. 가인의 드린 제물 농산물은 ‘인간의 공로’를 상징하는 것이고 아벨이 드린 피 흘리는 양은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지 않고는 결단코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값진 교훈이다. 더 나아가서 가인처럼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드림으로 외형적으로나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섬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신의 형편이나 사정에 맞춰서 자기 나름대로 신앙의 기준을 정하여, 원래의 말씀과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목회자들은 모든 성도들의 신앙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도록 끊임없이 가르치고 깨우쳐 올바른 길도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4. 표적과 현상을 추구하는 신앙인간의 상식이나 과학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이적(異蹟) 혹은 기적이라고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기적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의 신앙을 유지시켜 주는 도구가 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기적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목격하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의 양식 만나를 40년 동안 매일 먹었고 구름기둥 불기둥의 이적을 보면서 살았지만 그들은 쉽게 배도하였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탄도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하여 이적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그러므로, 목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병을 고쳤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어떤 기적이나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믿음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5. 온전한 헌신의 부족“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이 말씀들의 의미가 무엇인가? 죄된 성향을 가지고 살아가는 연약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려면 전심전력을 다 해도 늘 부족함을 느낄 것이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부업이 아니라 본업이다. 그야말로 올인(all in)해야 한다. 한 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와서 습관적으로 예배드리고 사람들과 친교를 나눈 후에 집으로 돌아가서 일반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살다가 다시 또 교회에 나와서 동일한 일을 반복하고 산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변화되는 삶을 기대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올바른 신앙심으로 하나님께 충성된 삶을 살기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포기하고 순교한 사람들, 참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하여 토굴에서 광야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오직 하늘을 바라고 살았던 사람들의 신앙이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왜 온전한 신앙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피하려고 하는가? 주님을 위하여 온전히 희생하며 헌신하는 신앙의 회복되어야 교회가 살아날 것이다. 6. 가라지 신앙의 보편화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려고 교회 안에 들어왔지만, 자신의 신앙이 자라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신앙생활에도 장애가 되고 시험거리가 되는, 영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가라지’ 혹은 ‘쭉정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인간의 죄된 성향 때문에 교회 안에는 언제나 알곡보다 가라지가 다수를 이룬다. 그래서 목회자는 그 다수를 아우르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가라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편안하고 안일한 설교를 해야 하는 부담을 갖는다. 그래서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설교를 하고 말씀을 가르치다 보면 교회의 전반적인 영적 수준은 점점 떨어지고 ‘가라지’를 기준으로 하는 신앙의 분위기가 보편화되어 간다. 바로 이러한 현상이 한국교회의 기독교신앙을 무너뜨리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다. 7. ‘말씀’에 대한 무지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신앙과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심도 있게 열렬히 연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목회자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질문을 가져오는 ‘성가신 교인’들에 대하여 부담을 갖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전반적으로 교회는 성경 말씀에 대한 무지가 편만하다. 구원과 영생의 원리나 도리도 모르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기준도 점점 모호해진다. 소위 기성교회에서 ‘이단’이라고 하는 교회들이 오히려 성경을 더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가르치는 일을 열심히 조직적으로 한다. 성경을 깊이 알고 싶어하는 많은 지성적인 교인들이 그런 교회들을 찾아 떠난다. 그곳에 가서 잘못된 교리들을 조직적으로 배우면서 이단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요즘 한국 기독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말세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호 4:6)한다고 하신 말씀이 이렇게 성취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다시 힘을 얻어 부흥하고 정상적으로 성장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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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8-09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5
    45. 복음이 상품화 되고 있다스데반 순교 이후, 복음이 이방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초대교회 시절,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고 있었다. 성령 충만한 빌립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그 성에서 유명한 마술쟁이 시몬도 세례(침례)를 받고 빌립을 따라 다녔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전도에 합세하여 침례 받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 광경을 본 초신자 시몬이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행 8:18,19) 라고 요청하였다. 시몬은 ‘성령’을 상업적으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먼저 자신이 약간의 자금을 투자하여 그 ‘성령’이 임하게 하는 능력을 구매하면, 그것으로 많은 돈을 벌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는 ‘성령’을 돈을 벌 수 있는 ‘상품’으로 착각한 것이다. 형태는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오늘날 현대 교회가 ‘복음’을 고객(교인들)의 취향에 맞추어 새로운 상품으로 계발하고 변형시켜 판매(설교)하는 일이 보편화 되고 있다. 그리하여 복음이 능력이 상실되고 고객들의 구미에 따라 다양한 상품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성령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의 궁여지책(窮餘之策)인가“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행 2:42)는 것이 초대교회 성장의 핵심 비결이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늘 함께 거하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행 2:44~47)으면서 생활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님께서는 그 당시 교회에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47절)므로 교회가 성장한 것이다. 교인들의 연합된 모습, 그리고 일반인들과는 구별된 성도들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구제와 봉사의 삶,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 교회 성장의 동력이었다. 시대와 환경이 변하고 사람의 상태는 달라져도 복음이 퍼져나가는 원리는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초대교회의 정신과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채,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와 논리로 교회를 성장시켜 보려는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반드시 성장해야 하고 이익을 남겨야 한다”는 마케팅 정신이 교회 성장 원리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교회 건물을 고객의 다양한 취향에 맞추어 신축하거나 리모델링한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도 현대인의 기호에 맞추어 세속적인 요소를 다분히 첨가시켜야 한다. 물론 설교도, 분주하고 복잡한 일상에 피곤하고 지친 상태로 교회를 찾아온 손님들(?)의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고 편안하고 기분 좋게 들을 수 있도록 구색을 잘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주일에 또 교회에 올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말씀’이 기준인가 ‘사람’이 기준인가성경의 내용은 대체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사건들과 함께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악 간의 투쟁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뚜렷한 현상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타락’과 ‘회복’이다. 인간은 타고난 죄악성 때문에 계속 악으로 기울어져 넘어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일으켜서 세우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타락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율법’ ‘계명’ ‘교훈’ ‘말씀’ 등의 단어로 표현하며, 그것은 어느 시대나 변하지 않고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바로 세우시는 말씀의 원칙은, 하나님이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처럼 불변이다. 그래서 그것을 불변의 진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역사를 통해서 나타난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시대에 따라 사람의 형편이나 환경에 따라 변형, 혹은 변질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세상의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 성장과 교회의 이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너무나 많은 것을 양보해 주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죄인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주거나 교회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는 ‘진리’의 말씀은 가려두고 사람들의 마음에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들을 묘하게 모자이크 하여 원래의 뜻이 왜곡된 사랑과 은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공의’가 없는 사랑, ‘순종’이 무시된 은혜가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오도(誤導)하고 있다. 고객(교인)의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는 교회의 노력은 교회 운영의 여러 측면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설문으로 고객의 필요를 조사한 다음, 교회는 그 욕구를 채우는 일에 아무런 원칙 없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교회 안에 까페를 설치하는 것은 이제 기본이고, 심지어는 흡연실까지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외국의 어느 교회는 대예배실을 레스토랑 분위기로 꾸며서 주일 아침에 교회에 와서 식사를 하면서 웨딩홀 분위기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그러한 편의를 제공하면서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는 것까지는 이해를 한다고 하자. 그러면, 일단 그러한 분위기나 편의시설에 이끌려 모여든 교인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성도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은, 전하는 복음마저도 고객 중심으로 변질되어 사람을 살게 하는 생명력 있는 복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 지식인들의 시각은 매우 냉소적이다. 세상과 구별이 되지 않는 교회, 회사처럼 운영되는 교회, 사장처럼 보이는 목사를 보고 사람들은 무기력한 교회를 비웃거나 경멸한다. 결국 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기초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터전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의 몸”(엡 1:23)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를 … 교회의 머리”(엡 1:22)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죄 용서와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인식하도록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루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여 죄를 용서함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르쳐주고, 그 믿음으로 죄인이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역할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성경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그 말씀에 순종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경건의 연습’(딤전 4:7,8)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불신하고 불순종하면 심판과 멸망이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가르쳐 줄 책임이 교회에게 있다. 이러한 엄연한 진리를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다. 사도 바울은 엄숙하게 경고하였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이제 우리 교회를 책임진 지도자들은 이 질문에 대하여 양심적인 대답을 하여야 한다. “교인들이 만족할 때까지 교회가 변화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교인들의 상태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질 때까지 그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침을 받고 변화되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의 대답은 분명하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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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7-26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4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 44. 방언은 무조건 성령의 은사인가요즘 퍼져나가는 방언의 파급이 심상치 않다. 불교에도 천주교에도 방언과 신유는 있다고 한다. 오순절주의에서는 이 방언을 그리스도인의 필수 요소로 간주할 정도로 방언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그런데 이 오순절/은사주의가 오늘날 매우 급격한 성장을 이루고 있다. 전 세계 약 20억 명의 기독교인 중 오순절/은사주의에 속한 사람들이 대략 6억 명에 이른다고 하니, 기독교인의 약 30%가 이 오순절 성령운동과 관련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1900년 초에 시작된 이 운동이 1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5개의 교회들이 오순절주의 혹은 은사주의에 관련된 교회들이다. 오순절주의의 방언오순절주의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증거로 ‘방언’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어떤 오순절파 교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인도한 새 신자의 입에서 방언이 터졌습니다. … 나는 열심히 교회 다니고 신앙을 해도 방언을 못하는데, 교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초신자가 방언을 하니 은근히 질투가 생기고 다른 교인들 보기에도 부끄럽습니다. 왜 나에게는 방언이 터지지 않을까요?”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걱정일까? 성경에서는 방언이 성령의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들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8~11). 방언은 여러 가지 은사들 중에서도 거의 마지막 위치에 있다. 그 다음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9~31). 그 “더욱 큰 은사”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이 말씀 후에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가장 큰 은사로 ‘사랑의 은사’를 강조하고 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고전 13:1)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이 권면에 의하면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여러 은사 중에서 극히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은사를 성도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성령의 은사로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말씀과는 조화가 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첫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성령의 임하심과 함께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이제 막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려는 시기에 오순절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모여든,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5개 국 이상의 다른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각기 자기들의 언어로 제자들의 설교를 듣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복음은 신속하게 넓은 지역으로 멀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분명히 언어의 은사였다. 그런데, 이 방언이 시작된 지 약 20년 이상이 지난 다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행전의 방언과는 변질된 다른 방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 방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단정하여 말하지는 않았지만,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전체의 흐름을 보면 부정적인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아마 그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다른 은사와 비교하여 외적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가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 방언에 대하여 긴 권면을 하고 있는 듯하다. “방언보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방언을 하면 알아듣는 자가 없으니, 방언 보다는 예언(대언)을 하려고 힘쓰라.” “통역 없는 방언은 예언보다 못하다.” “혀를 가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다.” “뜻을 알지 못하는 말을 하면 말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야만이 된다.” “방언으로 말하면 마음의 열매가 없다.”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 “방언 통역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라.” 사도 바울의 이러한 권면들을 깊이 숙고해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혼란스럽게 방언을 하는 것은 교회에 덕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이러한 방언을, 성령의 은사를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처럼 가르치고 그것을 받으려고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현대 방언의 문제는 무엇인가어떤 의미에서 오늘날의 방언은 사도행전의 방언도 아니고 고린도교회의 방언도 아닌 제3의 방언에 해당된다. 우선 오늘날의 방언은 정상적인 통역이 불가능하다. 여러 해 전 미국에서 방언통역에 대한 실험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통역의 신뢰도를 확인하기 위해서 방언을 녹음한 후 통역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7명에게 각각 녹음을 틀어 주고 통역을 요청했다. 그 일곱 가지 통역 중 비슷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 아프리카어에 능통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방언 집회에서 그는 아프리카어로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러자 갑자기 근처에 있던 통역은사를 받은 사람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지금 이 형제가 방언으로 곧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John P. Kidahl, The Psychology of Speaking in Tongue, Harper & Row, 1972, p. 63). 그리고 방언과 신유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삶이나 신앙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미국의 한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십 여 년동안 매주 출연하여 방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목사가 있었다. 한 신문에서, 그 목사가 방송을 하는 기간동안 다른 여인과 부정한 관계를 해 왔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대단히 큰 화제거리가 되었던 일이 있었다. 이것이 그 목사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2, 23). 성령 은사의 가장 확실한 증거예수님 승천 후에 그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은 매우 분명하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령의 최초 은사는 복음이 전파되는 초기 시대에 큰 능력을 더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필요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고 그것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켜 주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성령의 가장 현저한 역할 중의 하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회심시키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 시대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을 것이 예언되어 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욜 2:23). 복음의 파종기에 이른 비 성령의 역사가 넉넉히 임하였듯이, 예수께서 알곡을 추수하러 오시기 직전에 다시 한번 늦은 비 성령의 역사가 충만히 임할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7-13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3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43. 영적치유인가 심리치료인가 교회와 성도들을 지도하는 목사의 직무 중 하나는 ‘상담’이다.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이 인간의 삶의 제반 분야에서 발생되는 문제들을 목사에게 가져와서 해결해 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목회 사역 중에서 상담 분야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상담자로서의 목사는 피상담자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다룰 때에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나 학문적 이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영적으로 치유하는 것이 기본적인 자세이다. 그런데 요즘 목회자들이 교인들과의 상담을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해결해 보려고 하는 시도가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기독교상담을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다 보면 기독교의 신본주의 신앙이 인본주의 신앙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 상담이 심리학적인 측면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이러한 경향을 간과하거나 방치할 경우, 조만간 기독교영성은 시들어가고 인간 중심의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든다. 심리학과 기독교신앙사전에서는 심리학을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적인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에서 문제를 삼을 수 있는 단어는 ‘과학’이라는 말이다. 목회자들이 이 ‘과학’을 신앙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이 과연 과학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과학이란, 어떤 가설에 대하여 동일한 실험을 할 경우 항상 동일한 결과가 나와야 한다. 일정한 법칙이 성립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언제나 수많은 변수와 다양한 상황에 의해서 변화무상한 인간의 심리는 과학적인 데이터로는 결코 정리될 수 없는 분야이기 때문에 심리학을 과학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한 감이 있다. 그리고 심리학의 모든 중심은 ‘인간’이다. 인간으로 시작하여 인간으로 끝나는 학문이 심리학이다. 반면에 기독교신앙의 근간이 되는 성경은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심리학과 기독교신앙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으며, 만약에 이 둘을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할 경우 수많은 부작용과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심리학’이라는 위장된 이름으로 심리학이 교회 안으로 깊이 스며들고 있어 기독교영성과 신앙에 혼란을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독교심리학의 두 얼굴심리학을 기독교신앙에 접목시킨 대표적인 인물들 중에서 한국에 잘 알려진 목사로는 이미 고인이 된 미국 크리스탈 교회 로버트 슐러 목사와 ‘긍정의 힘’의 저자인 레이크우드 교회 조엘 오스틴 목사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가르치는 신앙 철학은, 하나님의 의지도 인간 자신의 긍정 사고에 따라 움직이며 따라갈 정도로 ‘긍정의 힘’이 강하다고 가르치는 인간 중심의 논리로 발전되었고, 결국 정통신앙의 기준으로는 기독교신앙에 부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우선 듣기에 공감할 수 있는 ‘긍정적 사고’라고 하는 것은 뉴에이지의 심리기법이나 자기최면과도 그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비성서적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심리학과 관련된 이러한 논리들을 기독교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신앙에 접목시키는 것은 매우 우려할만한 일이다. 긍정적 사고 자체는 좋은 것이나, 그것이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도구로 생각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또 다른 신(神)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위 기독교심리학에서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서 강조하는 세 가지 항목은 ‘자기 사랑’(자존감 회복), ‘긍정적 사고’ ‘성공의 법칙’이다. 이 세 가지 모두가, 인간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무의식 세계를 자극하여 새로운 삶을 창조해 내도록 유도하는 방법이다. 첫째로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하여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필요하고 권장할만한 이론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존감이 강해지고 자아가 굳게 확립될수록 하나님의 존재와 멀어지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에 관심이 옅어진다는 것이다. 신앙과 영성이 자아에 밀려나고 결국에 가서는 기독교정신과 신앙을 상실하게 되어 몸은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만, 마음은 기독교인이 아닌 상태로 변질되고 만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내용은 ‘긍정적 사고’가 자신을 지배하게 되면 자신의 원하는 모든 일들을 성취할 수 있고 마침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긍정 사고가 성경의 사상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매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라는 말씀과는 다른 성격의 메시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음에 죄악을 품고 있어도 긍정적인 사고만 가지고 있으면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수 있다는 말일 수 있다. 결국 ‘긍정의 힘’이란 인간의 무의식에 긍정적인 암시를 주어 그 긍정을 현실로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이 기독교심리학은 이러한 긍정 암시를 ‘믿음’으로 착각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성취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 기독교심리학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옥성호 씨가 저술한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부흥과개혁사 간)에 매우 예리하고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기독교상담을 통한 영적 치유성경에는 사람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여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 다양한 방법과 원리들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복잡한 기계가 고장이 났을 때 그것을 가장 쉽게 확실히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기계를 만든 기술자다. 사람을 치유하는 원리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을 제대로 고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상담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원리는, 인간 ‘사용설명서’라고 할 수 있는 성경에 가장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상담을 통해서 성도들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목사는, 그 치유하는 방법을 심리학적 기법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서 찾아야 하며, ‘긍정의 힘’으로 치료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담을 통한 치유 사역에 있어서, 심리학적 기법과 성경의 원리와의 근본적인 차이는 인간의 소유권 개념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너는 내 것이라”(사 43:1)고 말씀하시는데, 심리학에서는 “너는 네 것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에 기록된 치유 원리의 기본은 마태복음 11:28,29절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 말씀 중에 ‘쉼을 얻으리라’는 구절이 바로 치유된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자신의 어떤 문제를 자력(自力)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타력(他力)에 의지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암시를 주고 긍정적 사고를 만들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나아와 치유함을 받으므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진심으로 치유받기를 원하면 ‘자존감’을 세우려 하지 말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천국시민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선언한다. 비워진 마음에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이 기독교상담의 기본원리이다. 사도 바울도 그 사실을 이렇게 인정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성도들을 올바른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하는 목회자들은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할 때에, 자칫 잘못하면 최면술로 진입할 수도 있는 심리학적 기법을 사용하지 말고 치유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채워주는 방법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6-30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2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42. 교회 지도자들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이 말씀은,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큰 복을 받기를 기대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설적인 도전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은 만사형통의 길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고난의 길, 희생의 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 14).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통해서 얻는 축복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이나 세상의 명예나 안락한 삶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할 줄 알고 긍정적으로 대처하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안정된 심령과 평안한 마음이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값진 보물이다. 그리고 그 보물은 자기희생과 헌신적인 삶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이기 때문에 세상의 상식과 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원리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이 희생과 헌신의 정신은, 교회를 지도하는 목회자들이 가장 먼저 실천하고 보여주어야 하는 참 목자의 모습이다. 우리의 목자장이신 예수께서 그렇게 사시면서 먼저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과 목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목사를 잘 대접해야 복을 받는다”는 말이 유행어처럼 되어 있는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공산주의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1917년 11월 7일 레닌이 주도하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시작된 구소련의 공산화는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을 통해 짧은 시간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20세기 지구의 거의 절반을 지배하는 세계적인 힘으로 급성장하였으나, 20세기가 끝날 무렵 1991년 12월 고르바초프의 사임과 함께 그 해 12월 31일 구소련이 해체됨으로 공산주의는 그 종지부를 찍었다. 공산주의가 그렇게 급속도로 성장한 이유 중의 하나는 유물론 사상으로 무장한 극도로 충성스러운 당원들의 희생정신이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할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핵심 희생자 계층이 있습니다. 우리는 총살형과 교수형을 당하고, 치욕을 당하며, 직장에서 해고되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가능한 모든 거친 대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중에 상당한 비율의 사람들은 피살되거나 투옥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실상 극심한 빈곤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가 얻은 수입 중에서 생존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을 제외한 모든 돈은 한 푼도 남김없이 당으로 돌립니다. …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광신자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광신자들입니다. 우리의 생애를 지배하는 위대한 동기는 세계의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 그것뿐입니다. … 그것(공산주의)은 나의 인생이요, 나의 생업이며, 나의 신앙이며, 나의 취미 생활이요, 나의 애인이요, 나의 양식이며, 내 삶의 전부입니다. … 나는 나의 이상 때문에 이미 투옥되었으며, 필요하다면 더 처참한 곳이라도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정신을 가진 특수한 계층의 헌신 때문에 공산주의는 성공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공산주의 사회에도 특권층이 증가하게 되었고, 계급이 만들어졌고, 무사 안일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자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이 작동하게 되었을 때 공산주의는 힘을 잃었고 쉽게 무너졌다. 물론 패망의 다른 이유들도 있었으나, 핵심문제는 사람에게 있었다. 오늘 교회 지도자들의 정신은 어떠한가목사가 교회를 처음 개척할 당시의 그 열정과 그 희생과 헌신의 정신을, 교회가 크게 성장한 후에도 유지할 수 있다면, 참으로 충성스러운 목자일 것이다. 인간에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목자는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목사들에게 희생과 헌신의 정신은 사라지고 오히려 성도들에게 대접을 받으려 하고 군림하려고 하고 물질이나 명예를 탐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분란과 분쟁에 중심에 목회자가 자리하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수의 정신으로 성도들과 교회를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정신으로 목양하는 목회자는 교회에서 재정문제로 분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성도들을 섬기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지도하는 목회자는 성폭행 성추행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다. 목사를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는 말은 평생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국가나 사회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수준이 낮은 집단으로 전락해가는 중대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일차적으로 목회자의 처신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목사들이 올바른 본을 보이면 성도들은 그 모본을 따라 배울 것이고, 그러한 목사들의 영향력은 사회전반에 걸쳐서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초기에 예수의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은 그야말로 철저하고 완전한 희생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었다. 야고보와 마태는 칼에 목베임을 당해 죽었고 빌립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마가는 사지를 묶인 채 밤새도록 끌려 다니면서 피투성이가 된 채 불태워 죽임을 당했다. 베드로와 다대오와 시몬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다대오는 창으로 찔려 죽었다. 요한은 끓는 기름가마솥에 들어갔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나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사도 바울은 네로에 의해 칼로 목베임을 당해 죽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을 때 그 십자가의 결말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4)는 말씀 안에 목회자가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함축되어 있다. 죽음은 희생의 극치를 말하는 것이다. 교회를 지도하고 목양하는 목회자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공산주의 사상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쳐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에게 희생정신과 헌신적인 열성이 없다면 교회는 결국 그 생명력을 잃게 될 것이다. 목자장 예수의 정신과 품성이 땅에서 교회를 섬기는 모든 목사들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다.예수님은 철저한 희생과 헌신의 산 표본으로 참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주님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주님이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희생과 헌신의 정신으로 성도들을 인도한 목사들에게 위대한 약속이 보장되어 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3,4). 힘을 잃어가고 있는 한국 기독교회가 다시 회생할 수 있는 첫 단계는 교회 지도자들이 먼저 회개하고 예수의 정신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목숨 바쳐 헌신하는 일이 아닐까? ‘자기희생의 법칙이 자기보존의 법칙’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6-21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1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 41. 기독교 구원관의 재정립이 시급하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구원’이다. 죄로 인해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원리는 어쩌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구원론이 잘못되면 기독교 신앙 자체에 모순이 발생하여 나머지 모든 신조나 교리에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기독교의 올바른 구원관을 성경에 입각하여 바르게 이해하고 참된 믿음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교파들 가운데 왜곡된 구원관으로 성도들을 가르친 결과 성도들의 신앙관 자체가 정도(正道)에서 이탈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한 구원관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도들을 참 신앙인으로 성숙시킬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구원관을 가지고 교회를 출입하는 교인들은 그 행실이나 삶이 비신앙인들과 별로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비난하는 원인을 제공함과 동시에 교회성장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예정론 구원관이란 무엇인가예정론 구원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아마도 아우구스티누스일 것이다. 그의 구원론에 의하면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형벌 받도록 예정되었다. … 예정된 자의 수는 고정되어 있고 변경시킬 수 없고 또한 교체시킬 수도 없다. … 이들은 넘어지거나 타락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아주 넘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은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대한기독교서회, 그리스도교 대사전, p757). 종교개혁자이자 장로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칼빈도 거의 같은 주장을 하였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하나님은 각자의 장래를 정해 놓았다. 인간은 같은 운명으로 창조되지는 않았다.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상동, p758). 이러한 칼빈의 주장에 대해 당시 종교개혁 관련 신학자로 활동하던 챤지(Girolamo Zanchi)는 더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여서 “선택된 자는 영을 상실할 수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갈 수도 없다”(상동, p.759)고 주장하였다. 예정론과 관련된 이러한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① 인간의 구원은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구원의 여부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결정된다. ②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구원을 받을 것인지 멸망을 받은 것인지가 정해져 있다. ③ 구원을 받기로 결정된 자는 그의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결국 구원을 받게 될 것이고, 멸망으로 정해진 자들은 혹시 신앙을 시작해도 언젠가 타락하여 멸망 받게 된다. 예정론 구원관이 성서적인가아우구스티누스나 칼빈이 이러한 예정된 구원론을 주장할 때에는 성경을 근거로 설명했을 것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5,11).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이러한 성경절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을 미리 선택하셔서 정해 놓으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에 매우 주의하고 신중히 해야 할 것은 그 해석이 다른 모든 성경절들과 조화를 이루고 상호간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성경절들도 많이 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 33:11).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누구든지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돌이켜 나에게로 돌아오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시고, 내막적으로는 구원받을 자들을 이미 정해 놓으셨다면, 그것은 그분의 존재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공의’의 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이중적 속성을 가진 분으로 오해할 여지도 남게 된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공정하게 대하시는 것은 숨길 수 없고 돌이킬 수 없이 불변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당위성과 능력과 권세가 있다는 말이지, 그 주권으로 구원받을 자를 스스로 정하신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 부여하신 ‘자유의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든 인간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굳이 문자적으로 적용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그가 장차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것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의 구원받을 백성으로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 더 성서적인 표현일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롬 8:29,30)다는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구원은 삶의 열매로 확인되는 것이다예정 구원론에 관련된 성경절들은 대개 바울의 서신에서 인용된다. 그러나 바울의 다른 글들을 보면 그의 구원관은 오늘날 교회가 가르치는 예정론과는 상관이 없음 깨닫게 된다. 바울이 회심한 후의 자신의 삶에 대하여 기록한 내용을 살며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이 성경절은 의심의 여지없이, 바울이 자신의 얻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얻은 바울도, 끊임없이 전도 생활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매우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경건을 연습하라”(딤전 4:7)고 하였고, 자신도 날마다 죽는 연습을 한다고 고백하였다(고전 15:31). 베드로도 얻은 구원을 놓치고 옛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을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벧후 2:22)고 표현하였다. 예정 구원론은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의 삶에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하였다. 이미 구원이 예정된 자들은 현재를 어떻게 살아도 결국에 가서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 때문에, 대부분의 신자들이 현재의 경건하고 의로운 삶에 대하여 깊은 관심도 없고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열매나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활이 비신자와 구별되지 않는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이나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이 실제 생활에 적용되지 않는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는 말씀이 실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구현되지 않으므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비평거리가 되고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게 된다. 옥토에 뿌려진 좋은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이 성경의 이치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후의 모든 삶이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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