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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NCCK는 왜 ‘동성애 반대’를 말하지 못하나?
    "NCCK는 동성애를 찬성한 적이 없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동성애를 반대한다" "NCCK는 동성애자의 형편을 고려하지만 그 자체를 찬성한 적은 없다" NCCK의 제72회 신임회장에 오른 윤창섭 회장과 신임 김종생 총무가 NCCK의 동성애 관련 질문에 답한 내용이다. 현재 NCCK의 동성애 및 포괄적차별금지법 이슈는 NCCK의 최대 회원교단인 기감과 통합측의 탈퇴가 거론될 만큼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사실상 단체의 존립과 맞닿아 있다. 그런 만큼 이번 제72회 총회에서는 이와 관련한 진지한 논의와 해당 이슈에 대한 NCCK의 명확한 입장이 나올 것으로 기대 됐었다. 하지만 이날 NCCK의 주 관계자들은 관련 이슈를 애써 외면하거나 피하는 모습이었다. 오죽 했으면 기감의 한 목회자가 "NCCK가 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이 없다. 동성애와 차별금지법이라는 핵심적 이슈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없다. 연합과 일치를 외치지만 엄청난 장벽이 느껴진다"는 지적을 하기까지 했다. 그나마 신임회장의 기자회견 시간에 해당 이슈가 다시 거론되기는 했지만, 뭔가 석연찮은 답변으로 오히려 찝찝함을 더했다. 다시 한 번 위 내용을 살펴보자. "NCCK는 동성애를 찬성한 적 없고, 성경은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답변인데, 언뜻 NCCK가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느낄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이는 매우 애매한 답으로 질문의 요지를 피해나간 것을 볼 수 있다. 동성애 포괄적차별금지법 이슈의 핵심은 "NCCK는 과연 동성애를 반대하는가? 찬성하는가?"다. 반대와 찬성 아주 간단한 답만 필요할 뿐이다. 허나 "동성애를 찬성한 적이 없다"는 이들의 대답은 굳이 답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언뜻 '반대'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조금 더 생각하면 "NCCK는 동성애를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는 매우 위험한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답변 역시, 매우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어디까지 성경의 입장, 즉 가르침일 뿐, 그것을 NCCK가 그대로 따르고 수용하는지는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NCCK가 동성애를 반대하는가?"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과연 NCCK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아직 기독교 단체로서의 성경적 정체성은 남아 있는가? 우리는 성경이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동성애를 NCCK도 절대 반대하고 있다는 당연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3-11-24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정치지도자들의 말 너무 볼품없다’
    며칠 전 더불어민주당의 대표를 지낸 송영길씨가 자기의 출판기념회에서 현 정부의 모 장관을 지칭하여 ‘이런 건방진 놈이 어디 있나, 어린놈이 국회에 와서...이런 놈을 그냥 둬야 하겠나, 내가 물병이 있으면 물병을 머리에 던져버리고 싶다’고 했다. 여기에 이어서 같은 당의 김용민 의원은 ‘000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금수의 입’이라고 SNS에 올렸다. ‘금수’(禽獸)는 행실이 나쁜 사람을 말하거나 심지어 짐승을 말한다. 그랬더니 같은 당이었던 민형배 의원도 ‘어이없는 00네. 정치를 누가 후지게 만들어?’라고 했다. 또 같은 당의 유정주 의원도 ‘그닥 어린 0도 아닌, 정치를 후지게 만드는 너’라고 거들었다. 우리 정치가 속된 말로 후지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국민의 대표로 뽑힌 정치 지도자들에게서 이렇듯 공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더러운 말들을 대하고 보니, 참 그 인격이 볼품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과민반응일까? 현 정부의 국무위원을 공개적으로 ‘어린놈’이라고 지칭하는 송영길 전 대표는 소위 말하는 86운동권 출신이다. 그런 송 전 대표는 37세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47세에 인천광역시장이 되었고, 50대에 180석의 거대 여당의 대표가 되었다. 그가 문제를 삼고 있는 국무위원은 현재 50살이다. 20년 전, 86운동권 그룹은 ‘60, 70대는 투표하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했었다. 또 ‘50대가 되면 멍청해지니, 60세 넘으면 책임 있는 자리에 있지 말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 임종석은 34세에, 조정식은 41세에, 우상호는 42세에, 윤호중은 41세에, 이인영은 40세에, 정청래는 39세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임종석은 51세에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 이제 86운동권 세대들도 대부분 60세를 바라보거나 넘기고 있다. 20년 전의 다짐을 이들은 어떻게 반추(反芻)하고 있을까? 86세대와 함께 현재 더불어민주당에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 출신이 70여명 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정치에 입문하여 20년 이상을 정치적 특권을 누려 온 사람들이다. 연봉 1억원이 훌쩍 넘는 국회의원 예우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200여 가지의 온갖 혜택을 누리고 살아왔다. 그러니 자신들 외에는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또 다른 사람이나, 국민들 조차도 안중에 없는 모양이다. 근자에는 2030세대를 향한 청년비하 현수막도 비판을 받고 있다.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 ‘혼자 살고 싶댔지 혼자 있고 싶댔지’ 등 청년들을 이기적인 집단으로 몰아가는 듯한 표현과 그들을 배제하는 듯한 문구는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청년 세대에 대한 것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소식을 들은 국민들이 이들에 대하여 거세게 비판하고 있다. ‘운동권 전관예우’를 받는 것이냐? ‘86특권 의식’을 누리는 것이냐? 심지어 ‘선민의식’을 가진 것이냐? ‘이조 시대 양반계급을 가진 것이냐?’고 말이다. 이들의 말대로 50대가 되면 멍청해지고, 60대가 되면 아무 것도 맡지 말아야 할 대상이 된 듯하다. 그런데도 86세대 가운데 정치권에서 은퇴를 선언한 사람은 별로 없는 것을 보니, 이들은 아직도 권력 향유에 대한 미련이 남은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꼰대’라고 한다. 꼰대는 단순히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비아냥거리는 표현이 아니다. ‘꼰대’라는 말은 본래 군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상관이나 선임자에게 불만을 표할 때 사용된 용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이 단어는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꼰대의 규정은 뭔가? 회자(膾炙)되는 것으로 살펴보면, 자신의 의견이나 방식은 정답이고, 남이 하는 것은 존중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전통이나 관습에 얽매인 것을 말한다. 지금의 86세대의 모습들에서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들이 있지 않은가? 물론 앞에서도 말한 대로 나이를 먹었다고 다 꼰대는 아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남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위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왜 유독 86세대가 주류를 이루는 정치권에서만 이런 현상들이 두드러지는가? 이들 가운데 일부는 30대 젊은 나이부터 소위 말해서 운동권에 몸담았다고 하여, 우리 사회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고, 20년 이상을 권력에 취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나 지금은 이들의 알량한 민주화운동의 유효기간은 벌써 끝났다고 본다. 약효가 떨어진 것을 가지고 만병통치약처럼 흔들어 댄다면, 가소(可笑)로운 일이다. 생각은 말로 표현되고, 그 말을 따라 행동으로 옮겨질 때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과거에 사로잡혀 현재의 시각장애인과 같은 행동을 보인다면, 사고(思考)의 근원을 점검해 보라.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11-23
  • [기자수첩] 소명 기회도 얻지 못한 ‘인터콥’, 세상 법원도 외면하나
    세계 최대 이슬람 선교단체로 꼽히는 인터콥선교회(본부장 최바울/ 이하 인터콥)가 예장합신측을 상대로 제기한 '총회(이단)결의취소' 소송이 1심에서 결국 기각됐다. 법원이 '종교 단체'의 내부 문제라는 이유로, 사건의 핵심에 대한 판단은 사실상 거부한 것인데, 인터콥측은 불의한 교권에 대한 호소를 세상 법정 마저 들어주지 않는다며, 막막함을 토로하고 있다. 인터콥은 지난해 9월 예장합신측이 제107회 총회에서 자신들을 이단으로 결의하자, 법원에 이를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인터콥은 이전까지 한국교회 일부 교단으로부터 경계, 교류 및 참여 금지 등의 낮은 단계의 제재를 받기는 했으나, '이단 결의'는 합신이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해당 결의가 이례적이었던 것은 그간 이단 연구 및 정죄에 가장 앞장섰던 예장통합측조차 당해년도 총회에서 인터콥에 대해 "신학적인 문제는 없다"는 확인을 했을 만큼, 교계적으로 인터콥에 대한 여론이 다소 누그러지던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합신측은 당 회기 인터콥을 이단으로 정죄하기까지, 필수적으로 거쳤어야 할 당사자에 대한 소환 혹은 의견진술 등의 절차를 생략했기에 인터콥은 강하게 이에 반발했다. 결국 인터콥은 "모든 재판의 기본인 '소명의 권리'조차 무시된 '일방적 정죄'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를 법원에 제소하기에 이른다. 그렇기에 이번 재판의 핵심은 인터콥의 '이단' 여부가 아니라, 합신측의 '절차상 하자' 여부였다. 합신측이 이단 정죄에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할 소명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그것은 명백한 '절차상 하자'일 것이고, 하자가 분명한 결의는 효력이 없다는 결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 있어 관건이 됐어야 할 '절차상 하자' 여부는 애초에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법원은 '절차상 하자'가 아니라, 합신측의 결의에 따른 인터콥의 피해 여부에만 집중한 것인데, 결국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는 결론에 이를 기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합신측과 인터콥이 전혀 연관이 없는 별개의 단체라는 사실에 근거했다. 합신측의 결의는 그저 주관적 판단에 따른 내부적인 것으로, 인터콥은 합신측과 관계가 없기에, 그에 따른 영향도, 피해도 있을 수 없다는 해석이었다. 하지만 ‘피해’라는 것은 법적인 부분과 실제적인 부분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더욱이 인터콥은 선교단체로 스스로 이익활동을 벌이거나, 헌금을 걷는 조직이 아닌, 한국교회 성도들의 자발적 후원으로 운영되는데, ‘이단 정죄’는 단체의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리며, 재정적인 심각한 타격을 야기한다. 이 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흩어진 인터콥 선교사들의 안전을 매우 위태롭게 하는 것은 물론, 선교사로서의 명예를 크게 훼손시키며, 그들의 선교 활동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교단 내부의 결의라고는 하나, 이미 한국교회는 주요 교단들의 ‘이단 연구’를 공유한지 오래기에, 현실적으로 결코 교단 내부에만 한정된 영향력을 갖지 않는다. 특히 재판 과정에서 합신측은 자신들이 위원장으로 있는 ‘10개교단 이대위원회’를 통해 해당 문제를 공론화 하며, 자신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국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확대키도 하는 등, 스스로 이를 교계 전체로 확산시키도 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관건이 됐던 ‘절차상 하자’ 여부는 판단조차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인터콥 뿐 아니라, 한국교회 이단 연구의 ‘신뢰’와도 직결되는 문제인데, 이 부분이 생략되며, 판결의 찝찝함을 더했다. 무기화된 일부 ‘교권’에 우려 심각··· 견제마저 불가능 이번 판결에 대해 합신측 이대위 관계자는 “정통신학을 훼손하는 사상으로부터 한국교회를 지켜낼 좋은 발판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이대위가 언급한 '좋은 발판'이 과연 무엇이냐는 부분이다. 이는 이번 재판 과정에서 찾을 수 있는데, 합신측은 재판 내내 종교 단체 내부의 결정을 사회법이 '절차 위반' 등을 이유로 위법성 여부를 따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었다. 종교 단체 내부의 결정은 '위법'이 됐든 '불법'이 됐든 사회법이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인데, '좋은 발판'은 바로 교단 결의의 '절대성'을 보장받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사회법도 침범치 못할 교단 결의의 '절대성'은 말 그대로 절대적 권위를 보장받은 만큼, 주체가 되는 각 교단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환영할만한 '좋은 발판'이 맞다. 하지만 문제는 일부 교단들의 판단이 그에 걸맞는 절대적 신뢰를 갖추지 못한 탓에, 매 사안 마다 내외적으로 논란을 야기하며, 그 과정에 억울한 피해자들도 상당수 양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 교권으로부터 외면받은 피해자들이 유일하게 호소할 곳은 사회법 뿐인데, 세상 법정마저 위법이든 불법이든 이를 관여치 않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상대적으로 '좋은 발판'이 아닌 '허공 위 부러진 발판'이 되어 교권의 일탈을 오히려 부추길 우려가 있다. 더욱이 일부 교단들의 무기화 된 '교권'이 교계 내부적으로도 심각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 이에 대한 ‘견제’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은 교회의 자성적 측면에도 결코 환영할 일만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인터콥 논란, 납득할만한 연구·결론으로 종결해야 인터콥은 한국교회에 있어 오랜 기간 논란의 대상이었다. 허나 중요한 것은 수많은 논란 속에서도 인터콥은 계속해서 성장했고, 이제는 단일 선교단체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할 만큼, 세계 선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는 것은 인터콥은 무조건적인 정죄나 퇴출보다는 이해와 교육을 통해 한국교회 세계 선교의 최고 동력으로 활용해야 할 필요 역시 있다는 현실적 전제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해당 논란에 대한 철저히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연구와 결론이다. 그것이 심지어 ‘이단’으로 결론이 날 지언정, 당사자인 인터콥은 물론 한국교회 모두가 납득할만한 연구 과정과 결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간 일부 교단의 인터콥 연구는 다소 주관적이고 때로는 감정적인 평가까지 있었던게 사실이다. 일부 선교지에서 일어난 특정 사건이나 몇몇 사람들에 대한 일을 놓고, 전체의 문제로 확대 시키는가 하면, 사실과 다르다고 증명된 것조차 여전히 정죄의 도마 위에 올렸다. 특히 지난 2020년 10월 일어난 ‘BTJ 열방센터’의 코로나 확산 사건은 여론에 휩쓸려 과학의 문제를 신학의 문제로 정죄한 한국교회 오류의 가장 대표적인 예다. 당시 ‘BTJ 열방센터’의 확산이 코로나 공포와 맞물려 언론에 대대적으로 문제화 되자, 한국교회 연합단체를 포함한, 주요 교단들은 인터콥에 앞다퉈 선을 그으며, 일부는 ‘경계 대상’으로까지 결의했는데, 이후 당시의 집회가 지자체의 허락을 얻어 공무원의 감독 하에 방역 수칙을 준수해 치러졌던 것이 확인되며, 뒤늦게 사건이 재조명됐었다. 그나마 이를 불법집회로 잘못 보도했던 대다수 언론들은 ‘정정’ 혹은 ‘반론’ 보도로 이를 바로 잡았지만, 여론에 휩쓸린 정죄를 했던 일부 한국교회는 아무런 정정 없이 이에 침묵했었다. 한국교회가 인터콥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따른 ‘논란’을 해소해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하고, 잘못이 있다면 제대로 가르쳐야 하지만 사실을 벗어난 지적과 절차를 무시한 정죄는 이러한 계도의 기회조차 차단한 채 논란만을 가중시키고 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3-11-20
  • [기자수첩] 교단장 배제하는 통합측의 한장총 인선, 문제 없나?
    한국장로교총연합회(대표회장 정서영 목사/ 이하 한장총)가 오는 11월 14일 '제41회 정기총회'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예상치 못한 상임회장 경선에 벌써부터 관심이 뜨겁다. 예장통합측 김순미 장로와 예장합동측 권순웅 목사가 맞붙은 이번 상임회장 경선은 통합과 합동이라는 장자교단 간의 경쟁 외에도, '목사 vs 장로', '남성 vs 여성' 이라는 매우 예민한 문제를 담아내고 있다. 근래 한국교회 연합단체에서 볼 수 없던 단체장 경선이라는 점과 라이벌적 요소가 가득한 두 후보 간의 이력은 점차 쇠락세를 면치 못하는 한장총에 새로운 반전을 가져다 줄 충분한 '흥행 요소'로 보이지만, 어째 이를 바라보는 내부의 시선은 매우 불편한 듯 보인다. 불편함의 중심에는 한장총을 대하는 통합측의 태도에 있다. 통합측은 그간 여타 교단들이 교단의 현직 교단장 혹은 교단장을 지낸 인물을 후보로 낸 것과 달리, 별개의 인물들을 후보로 추천해 왔다. 지난 20여년 간 통합측은 이종윤 목사(2009년), 채영남 목사(2016년), 김수읍 목사(2019년) 등 총 3명의 대표회장을 배출했는데, 이 중 교단장 출신은 채영남 목사 단 한 명 뿐이었다. 법은 아니어도 대표회장은 교단장 출신이 한다는 회원들의 암묵적 불문율을 통합측은 반복적으로 무시해 온 것이다. 소속 교단들이 한장총 상임회장 후보에 교단장 출신을 내미는 것은 한국 장로교를 이끄는 대표 연합단체의 권위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특히 교단장의 역임 여부는 검증된 지도자라는 신뢰와 인지도에 따른 인물의 무게감이 다르기에 단체의 권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다. 이는 한국교회총연합(이하 한교총)가 소속 교단의 현직 총회장들을 당연직으로 임원에 올리며, 교계 내외의 확실한 대표성을 인정받은 것과 일맥상통한다. 가뜩이나 지난 시간 한장총을 만만히(?) 보는 듯한 통합측의 인선에 타 교단들의 불만이 큰 상황에, 이번에 또다시 비교단장 출신의 평신도 후보를 내밀었다는 사실은 이들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기 충분했다. 결정적으로 통합측이 또다른 연합단체인 한교총과 NCCK를 대하는 온도가 한장총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불만도 크다. 통합측이 한교총이나 NCCK에 비해 한장총을 낮게 보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다. 통합측은 실제 한교총의 태동 이후 김태영 목사, 류영모 목사 등 현직 총회장을 앞세워 많은 활동을 해 왔고, NCCK 역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진보의 중심 교단으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면 한장총은 이들에 비하면 통합측의 우선순위에 확실히 멀어져 있는 듯한 모습이다. 주변에서도 느껴지는 이러한 통합측의 분명한 온도차는 장로교 연합운동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케 하고 있다. 현재 상당수의 회원 교단들은 이번 통합측의 인선에 상당한 비판과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밖으로 표출하기를 상당히 조심스러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대두되는 여성, 평신도라는 이슈가 이러한 통합측의 본질적 문제를 오히려 '물타기'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과거 진보 보수의 연합운동을 모두 아우르겠다는 통합측의 정체성이 점차 애매해진 회색빛으로 변해가며, 이에 대한 교계의 비판이 커지는 상황에, 이제는 한장총 내부에서도 그 진정성이 지적되며, 통합측이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3-11-11
  • [사설] 한국교회 교세 감소,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신뢰 추락은 교세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3년간 이어진 코로나 정국에 장로교 주요 교단에서만 약 80여만명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교회 전체를 따진다면 아마도 여기에 배를 더해야 할지도 모른다. 참으로 위기이다. 이런데도 한국교회 대다수 목회자들은 이러한 교세 감소에 위기의식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로 잠깐 빠졌지만 결국은 되돌아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들은 '기독교'를 떠난 사람들이라기 보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로서, 개교회에 적을 두지 않고 기독교인 행세를 하는 노미날리티(일명 가나안 교인)로 남을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90년대 이후 각종 세속 언론 매체들의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보도와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적 일탈, 교인들 간의 갈등과 분열 등이 교회의 정체성 상실로 이어져 사회적 불신을 가져온 데 원인이 있다. 거기에다가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예배를 장려한 영향이 크다. 한국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기 전에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대안은 기도와 설교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기도운동의 열정이 식어 부흥회도, 사경회도, 기도원도 모임이 많이 줄었다. 또한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온 설교가 기복주의로 기울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민족복음화라는 이름 아래 하나님의 은혜로 '복 받고 만사형통'하는 기복(祈福)에 호소하는 설교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기도운동의 활성화와 바른 설교에 있다. 바른 설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없는 설교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종교강화(宗敎講話)일 뿐, 하나님의 말씀은 아닌 것이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 속에 오셔서 인류를 위해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증언하는 것이 바른 설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의 역사는 죄로부터의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희생의 정신이요,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봉사의 정신이다. 이것이 이루어진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한국교회는 이제부터라도 기복 아닌 바른 설교가 요구된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회복과, 교세 감소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
    • 연지골
    • 사설
    2023-11-02
  • [사설] 종교개혁기념 제506주년을 맞아
    1517년 중세의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 비기독교적 교리와 제도에 대한 성경적 개혁운동이었다. 이로 인해 새롭게 탄생한 교회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개신교'라고 불리우는 기독교이다. 현재 한국에는 천주교와 정교회 등의 기독교 교파들도 있지만, 한국에서기독교라고 하면 개신교를 이르는 말이 되고 있다. 그만큼 현재 한국에는 종교개혁에서 파생한 이 개신(改信) 교파들이 득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성공회나 감리교 같은 감독파(에피스코팔 처치)도 있고, 장로회주의와 같은 개혁파(리폼드 처치)도 있으며,침례교나 회중파같은 환원파도 있다. 이들을 모두 통털어 그냥 '개신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세의 종교개혁운동은 신·구교 간의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똘레랑스를 통해 종교개혁이 완성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 않다. 개신교는 '개혁이 완성된 교회'가 아니고, 역사 속에서 '개혁이 계속되는' 진행형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개혁하는 교회'라고 부른다. 따라서 개신교는 오늘날도 개혁운동이 멈춰서는 안된다. 개혁운동이 멈추는 순간에 그 교회는 개혁 이전의 중세교회로 회귀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러한 딜렘마에 빠져들고 있다. 첫째, 대교단들의 이기주의이다. 대교단의 이기주의는 교권주의로 발전하고 있다. 이 교권주의가 남의 신앙 경험을 쉽게 이단으로 규정하기도 하고, 오로지 자리 다툼으로 교계의 연합과 일치를 파괴하기도 한다. 둘째, 대교회 중심의 탐욕이다. 사람도, 헌금도 모두 대교회가 쓸어간다. 그런데도 교단 차원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같은 노회, 같은 지방회의 어려운 지체들마저 외면한다. 이렇게 되면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 자매'가 아니다. 셋째, 종교개혁 기념 행사조차 줄어들고 있다. 10월이 되면 종교개혁 기념 축제가 교회마다, 교단마다, 신학교마다 떠들썩하게 준비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기념 행사를 쉽게 만나기 어렵다. 종교개혁기념 예배와 학술대회나 세미나, 또는 음악회, 연극, 영화, 바자회, 독서토론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여기에 안 믿는 친척이나 친구 등을 초청해 전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종교개혁운동에 대한 기념 행사가 시들해지면 우리의 신앙도, 열심도 시들해 질 것이다. 종교개혁 기념 행사가 곳곳에서 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연지골
    • 사설
    2023-11-02
  • [연지골] 설교-하나님의 말씀
    ◇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고 한다. 여기에 이 '말씀'(Word)은 그냥 '말, 낱말, 단어'를 뜻하는 word가 아니고, 헬라어 '로고스'(Logos)를 번역한 것으로 어떤 신적 존재에 대한 고유명사이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한다. ◇ 만물을 지은 창조주로 표현되는 이 어떤 존재에 대해, 본문은 "아버지의 독생자"(14절), 또는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18절)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우리 한글성경에서는 이 독생자를 칭하는 고유명사 '말씀'(Word)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say 또는 speak)고 할 때, 보통명사 '말씀'이 구분되지 않아 혼돈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 구원사에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기록된 말씀'으로 성경이다. 이 성경에는 독생자에 대한 계시가 나타나 있기 때문에 말씀이다. 둘째는 '보이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독생자가 성육신(Incarnation) 하여 세상에 오사 행하신 것을 오늘날 기념하는 것이 성찬이다. 셋째는 '들리는 말씀'으로 설교이다. 설교는 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서 말씀이다. ◇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는 이 '말씀'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속 사역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증언되지 않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목사가 설교란 이름으로 성경 본문 한 절 읽어 놓고 아침 신문에서 본?이야기나, 또는 자신의 신변 잡기를 코미디언처럼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애국심을 부추기며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또한 종교적 강화(講話)나 기복적 축복(祝福) 역시 마찬가지이다. 설교는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행한 구속 사역을 이 시대에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 하고,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사역이 증언되지 않는다면, 그 설교가 아무리 훌륭한 종교적, 윤리 도덕적 가르침을 설파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 설교는 대체로 기복적(祈福的)이어서 소시민들의 기복주의에 경도(傾倒)되어 있다. 따라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으로서의 힘을 잃고 있다. 교회가 세상을 바꾸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사역에 대한 바른 설교에서 나온다.
    • 연지골
    • 연지골
    2023-11-02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국가 부채, 누구에게 갚으라는 것인가’
    빚을 지고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무조건 남의 돈으로라도 잘 먹고 잘살아보겠다는 심보는 도둑의 마음으로서 잘못된 것이다. 물론 사업이나 기업하는 분들에게는 채무 없이는 기업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또 국가의 여러 금융 기관들의 활동도 이런 금융 서비스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개인이나 국가가 지나치게 빚에 의존하고 그것을 갚을 능력이 없으면 결국은 망하게 된다. 어느 정도가 되어야 나라가 위험해지는가? 과거에 우리 정치권에서는 야당에서 정부에게 국가 채무가 GDP(국내총생산)의 40%를 넘으면 안 된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나서는 자신들이 말한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그것도 내로남불인가? 참고적으로 ‘국가 채무’와 ‘국가 부채’는 다른데, 국가 채무는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상환의무가 있고, 지급 일정이 정해진 채무를 말하는 것이다. 가령, 공무원 급여, 국채, 지방채 등을 말한다. 그리고 국가 부채는 미래에 지출할 재정부담까지 추계해서 산출하는데, 이를테면,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등을 포함한다. 우리나라가 1948년 건국과 같은 정부 수립 이후 약 70년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국가 채무는 660조 원이었다. 그런데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5년간 늘어난 부채는 무려 408조 1,000억 원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의 모든 정권에서 졌던 부채보다 약 61%가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문재인 정권 들어서기 전까지 국가 채무는 GDP 대비 40.1%였는데, 문재인 정권이 끝난 시점인 2022년에는 54.3%로 14% 이상 상승하였다. 과거 문재인 대통령이 속했던 정당이 주장한 것에서 상당히 지나친 상태이다. 물론 국가 채무비율이 높다고 나라가 곧 망하는 것도 아니고, 채무비율이 낮다고 국가가 안정된 것도 아니다. 다만 국가 부채율이 높아도 신용도가 높고, 다른 방법(다른 나라에 대하여 채권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지하자원, 원유 같은 것을 다량 보유함)으로 그 채무를 갚을 능력이 있다면 이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우리 한국은 과연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그럴 능력이 되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역대 정권하에서 국가 채무의 증가액을 보면, 김대중 정부에서 85.4조 원, 노무현 정부에서 143.2조 원, 이명박 정부에서 180.8조 원, 박근혜 정부에서 170.4조 원인 것에 비하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408.1조 원으로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쉽게 말해서 빚으로 나라를 운영한 것이다. 국가 부채도 문재인 정부 들어서기 전까지 70년간 1,433조 원이었는데, 문재인 정부 5년간 무려 770조 4,000억 원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국가 부채는 2021년에 사상 최초로 2,000조 원을 넘게 된다. 문재인 정부가 있었던 2022년까지 우리나라의 국가 채무는 1,068조 4,000억 원이었다. 이것은 국민 1인당 2,200만 원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 빚은 우리 후손들에게 미리 가불하여 쓰게 되므로, 그들에게 빚을 떠넘긴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1년 반이 지난 시점에서, 2023년 말까지 국가 부채 예상은 문재인 정부가 넘겨준 부채 금액에서 더 증가하지 않고 있다. 그동안 윤석열 대통령은 부지런히 구미(歐美)와 중동 등에서 ‘세일즈맨 외교’를 통하여 국가 수출과 국가 신용도를 높이고 있다. 분야별로 보면, 원전, 수소, 친환경 에너지, 미래 차, 금융, 관광, 방산 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해외 수출을 독려•신장시키고 있다. 이를 통하여 국가 경제력을 튼튼히 하고, 국가 기반을 굳건하게 세우기 바란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에도 수십조 원의 성과를 내었고, 최근에도 중동지역을 방문하여 100조 원대가 넘는 경제 분야 수출 약속을 받아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수출 주도 국가이기 때문에,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지도자들이 이런 활동들을 활발하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정치 지도자들의 잘못된 선택과 그들의 그릇된 정책으로 국가 채무와 부채가 늘어나고 결국 나라가 망한 국제적인 사례들을 잘 알고 있다. 벌지는 않고 쓰기만 하고, 막대한 빚을 내서라도 잠시의 호사스러움과 인기를 누리려는 지도자는 국가 발전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엄청난 국가 부채를 만들어 후대들에게 짐을 져 주는 것은, 일종의 범죄가 아닌가? 우리는 내로남불 정권의 빚더미 잔치 국가를 경험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내로남로(내게 사랑이면 남에게도 사랑이어야)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10-27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독립운동가들을 더 욕되게 하지 말라’
    최근 우리 사회에서 거론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 인물들이 있다. 홍범도, 김원봉, 정율성이다. 홍범도는 문재인 대통령 시절 그의 유해(遺骸)가 구 소련 지역에서 운구되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고, 국가에서 제1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 이 건국훈장을 받은 분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한데, 홍범도도 받은 것이다. 홍범도는 이미 1962년 윤보선 대통령 시절에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는데, 그를 더욱 크게 격상시킨 것이다. 그러나 1962년 당시에는 홍범도에 대한 구 소련측 정보가 없었기에, 그의 독립군 당시의 기록만으로 포상하지 않았나 싶다. 홍범도가 독립군 활동을 한 것은 맞지만, 1921년 이후 구 소련의 자유시에서 일어난 참변과 그 이후의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의아한 측면이 강하다. 일본군에 쫓겨 독립군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자유시에 모였을 때, 소련의 적군(赤軍) 참여 여부에 따라 대대적 학살을 당한 비극은 두고두고 애통한 일이다. 그러나 홍범도는 당시 해를 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부대는 적군에 들어갔으며, 그는 모스크바에 들어가 당시 소련의 최고 지도자인 레닌과 트로츠키로부터 상금과 권총, 군복 등을 받았고, 소련군 대위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소련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런 홍범도를 역시 문재인 대통령 시절, 독립군 여러 명의 흉상을 육사 교정에 세울 때에 함께 세운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가 과연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장교를 육성하는 육군사관학교에 귀감(龜鑑)이 되느냐는 것이다. 홍범도는 우리나라가 지난(至難)한 어려움이 있을 때, 독립군으로 활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에는 별다른 보탬이 되지 못했다. 그가 소련 사람으로 살았기에 오히려 북한에게는 관련이 될지 모르겠다. 두 번째 인물은 김원봉이다. 공산주의자 김원봉을 전 문재인 대통령은 ‘국군의 뿌리’라고 추켜세우고, 그에게 훈장을 추서하려 했다. 김원봉은 처음부터 사회주의•공산주의 색채를 띤 단체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그가 의열단과 광복군에서 활동했다고 하나, 언제나 그는 공산주의 계열에 섰다. 그는 1948년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나섰다가 그대로 북한에 남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에 국가검열상, 중앙위원회 위원장,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6.25전쟁 중에는 북한군의 후방에서 물자를 공급하여 전쟁을 독려하므로 김일성으로부터 노력훈장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나중에 김일성과의 권력 암투에서 밀려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역시 김원봉은 영원한 공산주의자로, 국군의 뿌리는커녕, 이 나라를 비극으로 몰아넣고 공산화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임에 틀림 없다. 지금 밀양에는 그의 의열기념관이 있다. 세 번째 인물은 정율성이다. 그는 현재 중국인민해방군가인 ‘팔로군행진가’를 작곡하여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군대가 싸울 때, 중공군을 크게 고무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북한에도 ‘조선인민군행진곡’을 만들어 준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중국 공산당에 들어갔고, 6.25전쟁 때에는 중공군과 함께 서울에 내려와 우리의 소중한 궁중악보를 가져갔다고 한다. 그는 1976년 중국에서 죽었고, 중국 공산당이 만든 혁명투사 묘지에 묻혀 있다. 그는 한국 사람이 아니라, 중국 사람이다. 그런 그를 위해서 현재 광주광역시에서는 기념관을 만들고, 거리를 조성하고, 조형물을 만들고, 기념음악대회를 하는 등 한껏 기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다고 모두, 기릴만한 업적이 되는가? 한때 일제와 맞서 독립 혹은 광복군 활동을 했다 할지라도, 우리 자유대한민국을 세우는데 공훈이 없거나, 반대로 공산주의 활동을 함으로 우리 자유대한민국을 위태롭게 한 사람들을 우리 자유대한민국에서 추앙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본다. 그분들이 살았던 시대는 나라 잃고, 국가의 주권이 없고,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며, 인고(忍苦)의 나날을 보낸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나라의 정체성은 자유대한민국이다. 이것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고, 부인한다면 국가 정체성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들이 그 당시에 그렇게 살았고, 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을 탓하기에는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 평가하기에는 일정 부분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그분들은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본다. 괜히 그분들을 높인다고 들먹거리다가, 과거의 모든 행적이 들춰져 전 국민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민망하고 볼썽사납다. 그분들에게 ‘독립운동’을 넘어 ‘건국’이라는 좋은 옷을 입혀 드리려다 오히려 욕이 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엄연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자꾸 변명하고, 항변하고, 두둔하고, 덮으려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역사는 편향된 사람들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9-19
  • [기자수첩] 부처에게 귀의하겠다는 기독교의 목회자들
    종교 혼합주의, 다원주의를 염려하는 말은 단순히 WCC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미 우리 한국교회 저변에는 혼합주의가 매우 뿌리깊게 자리 잡았고, 이제는 더이상 기독교의 절대적 유일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위기가 도래했다. 진보 기독교계가 이번에는 제대로 사고를 친 모양새다. 이들은 오는 8월 22일부터 24일까지 '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 및 300일 추모 대회'를 가질 것이라고 예고했는데, 문제는 '삼보일배'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삼보일배(三步一拜)는 세 걸음 걷고 한번 절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으로,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법이다. 그것도 단순한 수행법이 아니라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의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뜻으로, 1보에 부처님께 귀의하고, 2보에 법(가르침·진리)에 귀의하며, 3보에 스님들께 귀의한다는 매우 절대적인 불교적 의미를 담고 있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이 '삼보일배'를 무려 기독교 목회자들이 한다는 것이다. '10.29 할로윈 참사'는 전 국민 모두가 슬퍼했고, 또 안타까워 한 불의의 사고였다. 물론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서로 엇갈리는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교회가 사망자를 추모하고, 또 유족을 위로하고자 하는 꾸준한 노력은 분명한 의가 있다. 하지만 왜 그 방법을 굳이 '불교'의 수행법으로 해야 하는가? 아무리 '추모'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목회자들이 삼보일배를 하는 것을 과연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기독교'는 단순한 사상이나 문화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은 아무 종교와 혼합해도 되는 그런 타협의 가치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절대적 구원을 믿는다면, 적어도 부처에게 귀의하겠다는 '삼보일배'는 입에 담아서도 안될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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