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1-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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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그 때 한국교회가 하나 됐더라면···
    ◆ 지난 2022년 6월 2일, 그 날은 한국교회 역사를 완전히 바꿀 뻔한 매우 의미있는 결의가 이뤄진다. 한기총이 임시총회를 열고, 한교총과의 통합을 위한 세부합의서를 통과시킨 것인데, 총 135명 중 찬성 70표, 반대 64표, 무효 1표라는 결과가 말해주듯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 있었지만, 이날 한기총은 사사로운 문제를 덮고 한국교회를 위한 대의에 과감히 한 발을 던지게 된다. 한기총의 결단은 한국교회 전체에 파장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교계 연합단체 분열 이후, 단 한 번도 도달한 적 없던 9부 능선의 자리는 얽히고 설킨 교계 정치의 물고 물리는 방해를 고려할 때 사실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분열 이후 제 힘을 잃어 버리고, 대립과 다툼으로 서러운 시절을 보내던 한국교회에 있어 한 치 앞으로 다가온 '대통합'은 이제 한국교회의 새 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단체의 통합은 한교총의 내부 반대로 결국 무산되게 된다. 한국교회는 고지를 바로 코 앞에 두고 통한의 발길을 돌려야 했다. ◆ 복잡하고 치열한 교계의 정치 방해를 극복하고, 두 단체의 통합을 9부 능선에 올려놓은 주인공은 바로 소강석 목사다. 많은 인물이 한국교회 통합을 위해 동조하고 노력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깊은 내막을 살펴보면 사실 소 목사 혼자 이 모든 일을 짊어졌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는 교단 총회장, 한교총 대표회장, 그리고 한교총 통합추진위원장을 역임하며 무려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오직 통합에만 모든 것을 바쳤다. 적극적이다 못해 치열하기까지 했던 그의 통합 추진 야사(野史)는 책 한권으로는 택도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건들을 낳았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성과를 낼수록 이를 깎아 내리려는 일각의 시기와 질투도 함께 증가했다. 그의 진심을 왜곡하는 거짓과 음해는 기본이고, 통합을 방해하기 위한 노골적인 정치 공작들이 횡행했다. 한때 길가다 돌뿌리에 걸려 넘어져도 소강석 탓을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일부 진영으로부터 말도 안되는 '억까'(억지로 까다)를 당해야 했다. 사실 한기총-한교총 통합 논의가 도달한 9부 능선은 실로 엄청난 성과였다. 대부분의 교계 관계자들은 수도 없는 실패를 목도하며, 양 기관 통합에 대해 절대 불가를 예상했는데, 소 목사는 이들의 예측을 모두 뒤집고, 통합을 목전까지 끌고 갔던 것이다. 당시 소 목사가 그토록 통합에 매진했던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분열을 치유하지 못하면 한국교회는 물론 우리사회의 미래 역시 결코 보장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다. ◆ 2025년 새해 정초부터 우리 국민들은 짙은 어둠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겉잡을 수 없이 깊게 패인 이념의 갈등은 국민들은 물론 교회마저도 집어 삼키며, 하나님의 정의보다 빨강과 파랑의 어느 한쪽을 선택케 강요하고 있다.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린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거대 야당의 선을 넘은 횡포는 어느 하나 정상적이지 못한 우리나라가 마주한 저급 정치의 현실임에도, 국민들은 원치 않게 반드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매우 불행한 기로에 서게 됐다. 최선과 차선보다는, 최악과 차악 중에 하나를 택해온 우리나라의 정치가 결국 부정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터져 버린 탓이다. 교회의 대처는 정도(正道)를 잃었다. 우리사회의 빛과 소금을 자처하며, 시대를 선도할 등불이 되겠다던 교회들이 이념의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의 치어리더로 전락했고, 그나마 중립을 추구하던 연합기관은 이도저도 못한 채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국민들이 교회를 보며 품을 희망은 이 시대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이런 상황에 한국교회가 만약 그 때 9부 능선을 넘어, 진정 하나가 됐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궁금증을 품어본다. 그 당시 소 목사가 내건 통합의 구호는 바로 '원 리더십 원 보이스'··· 하나된 한국교회, 하나의 리더십은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우리 정치와 사회의 그릇된 방향을 분명 지적했을 것이고, 아마도 더 큰 화가 터지기 막지 않았을 것이다. 비상계엄과 야당의 횡포는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우리나라의 정치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하나된 목소리는 사회와 정치의 상처가 곪기 전에 이를 발견하고 치유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100만명이 모이는 집회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상시적으로 우리사회를 보듬을 한국교회의 하나된 힘이 먼저다. 그렇기에 만약에 그 때 한국교회가 하나됐더라면, 한국교회가 하나의 목소리로 우리 정치의 변화를 촉구했더라면, 어쩌면 우리의 오늘이 좀 더 밝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클 수 밖에 없다. 반대로 당시 한국교회의 통합을 목전에서 저지한 바로 그들이 그 역사적 과오를 뼈저리게 반성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 소강석 목사는 한국교회 통합에 전력하던 지난 2022년 6월,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남긴다. "어느 시대, 어느 역사를 보아도 분열하면 망하고 연합하면 흥하게 되어 있다" 지금 우리는 또다시 역사적 교훈을 망가한 그 죗값를 톡톡히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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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2025-01-20
  • [연지골] 지족부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
    ▲노자도덕경 제44장은 "지족부욕 지지불태 가이장구"(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라고 한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하지 않다. 그렇게 하면 오래 갈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모든 인생사의 만고의 진리이다.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거나 탐내지 않는다면 그로 인해 욕을 당하는 일이 없고, 또한 그 욕심으로 인해 선을 넘지 않는다면 생명에도 크게 지장 없이 살아 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태적으로 죄성을 가진 존재여서 그 속에 욕심(辱心)이란 것이 있어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욕 따위를 억제하기 어렵다. 일단 그것을 가진 사람은 더 가지고 싶어 하고,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더 높아지고 싶어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실족하고 넘어져 망신을 당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 정치권의 행태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국회 의석 3분의 2에 이르는 거대 야당은 대선에서 자신들이 져 정권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대통령의 국정 운영과 행정부를 무력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직자에 대한 탄핵을 악용하고 있다. 자당 대표의 비리를 수사하는 검사들로부터 장관, 감사원장, 방통위원장, 경찰청장, 국무총리, 대통령대행, 대대행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탄핵을 휘둘러 공권력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끝내 대통령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하고 있다. 자기네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국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수단이 탄핵이다. 그러나 작금의 야당의 탄핵 행태는 다수당의 힘만 믿고 정부를 압박하는 무도한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국정 공백이 따르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 피해는 소로시 국민의 몫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사심이 앞서면 그 욕심을 정당화 하며 다른 공익은 보려 하지 않는 법이다. 특히 정치인은 권력이 눈 앞에 어른거리면 합리적 사고를 하기 어렵다. 지금 야당의 모습이 바로 이런 함정에 빠져 있다. 당장이라도 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른다면 자기네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 권력을 누렸던 때를 생각하며, 아! 옛날을 되뇌이고 국회의 입법권만 믿고 강한 드라이브를 걸며 무리수를 두고 있다. 또 노자는 말한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며"(過猶不及),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속성이고, 연한 것은 삶의 속성이다." 정치란 국민의 이익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정당 간 타협하는 것이다. 한 정당이 독식하는 것은 독재이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가 국민의 삶에 폐해를 끼치고, 국가 외교 안보에 악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과연 '과유불급'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속성이라 한다. 사람도, 동물도, 생물도, 식물도 죽으면 굳어져 딱딱해져 땅에 묻혀 썪는다. 정치도 굳고 강하면 결국 부러져 사라지는 것이다. 지족부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하지 않다 그렇게 하면 오래 갈 것이라"는 노자의 말을 상기하라. 그렇지 않으면 거대 야당도 결국엔 딱딱해져 오래지 않아 부러지는 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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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지골
    2025-01-06
  • [토요시평] 간절히 성탄의 예수님이 생각난다
    유명 정치인 한 사람이 지난 12일 대법원에서 3심의 형을 확정받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그에 대한 재판은 무려 5년여를 끌어왔다. 죄목도 많다. 아들의 학사 입시부정 행위에서, 학생출결관리 업무방해 유죄, 미국 대학 온라인시험 부정행위 유죄, 대학원부정지원 유죄, 법전원 부정 지원에서 위계공무집행방해 유죄를 받았다. 또 딸의 입시 부정행위에서, 의학전문대학원 부정지원에서 위조공문서행사 유죄, 허위작성 공문서행사 유죄, 위조사문서행사 유죄, 업무방해 유죄, 의전원 장학금에서 청탁금지법위반행위가 유죄를 받았다. 그리고 정치적인 측면에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에서, 특별감찰반관계자상대권리행사방해 유죄를 받았다. 그런데 그에 대한 대법원 판결 확정까지 무려 5년이 걸렸다. 1심 결과가 나오는데만 3년 2개월이 걸렸다. 거기에는 판결을 연기해 주려는 한 여자 판사의 숨은 노력(?)까지 있었다. 그리고 보통 유죄가 나올 경우, 일반인 같으면 바로 ‘법정구속’인데, 그는 1심과 2심에서 유죄가 나왔는데도 구속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그는 새로운 당을 만들어 총선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당 대표까지 꿰차게 되었다. 그리고 대법원 판결이 나왔는데도 바로 구속되지 않고 며칠의 말미를 얻었다. 그가 청와대의 민정수석을 거쳐 2019년 8월 법무부장관이 되었을 때, 우리 사회는 그로 인하여 분열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를 장관으로 임명한 당시 대통령은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환상적인 조합에 의해 검찰개혁을 희망한다’고 하였다. 그가 누구인가? 전 00혁신당 대표였던 사람이다. 그가 법의 단죄를 받던 날, 그의 아들에게 허위 인턴 확인서를 발급해 주고서도 이를 인터넷 방송에서 허위 사실을 공표한 전 더불어민주당 모 의원에게도 유죄가 떨어졌다. 그는 이미 허위 인턴 확인서를 발급해 준, 업무방해 행위로 작년 9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의원직을 상실했지만, 재판이 늦어지는 바람에 국회의원 4년 임기 가운데 83%를 채운 뒤였다. 우리 사회에서 주목을 받은 그는 형을 2년 마치고 나서도 5년간 피선거권이 제한되어 그가 꿈꾸던 막강한 권력을 또 잡을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리고 구속을 앞둔 가운데에도 ‘더 탄탄한 사람으로 돌아오겠다’고 하였다.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다. 세상에 이런 권력이 있을까? 그러니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그렇게 욕을 먹어도 권력 언저리에서 기웃거리는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일찌감치 주목을 받던 사람이다. 특히 언론들이 주목했는데, 그가 30대이던 2004년 한겨레신문은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100인’으로 선정하였고, 2006년 경향신문은 ‘한국을 이끌어갈 60인’으로 선정하였고, 동아일보는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 연속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으로 선정하였다. 과연 우리 사회를 빛내는 인물이 되었는가? 자신이 사회주의자라고 했고, 강남 좌파의 아이콘으로 알려진 그가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이용하여, 온갖 죄목으로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권력의 상징인 국회의원직을 잃고 죄수의 몸이 된다는 것이 다행스럽다기보다 서글프다. 입시 비리나 부정은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들을 저질러서 법의 심판을 받았다면, 평생을 반성하며 살겠다고 용서를 구해도 시원치 못한데, 더 맑고 탄탄한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하니, 도대체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신뢰해야 하나? 16일 입감(入監)하던 날도 지지자들 앞에서 ‘국민 여러분...’을 찾으며, 마치 자신이 대단한 애국이나 구국(救國)의 출정식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지지자들과 함께 ‘내가 00이다’라는 구호를 힘차게 여러 차례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도대체 염치(廉恥)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향하여 환호성을 지를까? 서민들은 교통법규 하나만 어겨도 마음이 불안하고 미안한데, 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반칙이나 잘못이나 실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리도 떳떳하고 당당할까? 도대체 우리 사회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교육일까? 인성일까? 성격일까? 진영논리일까? 아니면 지지하는 사람들 때문에 모든 판단과 생각이 흐려진 때문일까? 이런 기현상을 보면서 답답해하는 것은 나만 그런 것인가? 간절히 성탄으로 오신 예수님이 생각난다. 그래, 그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으니,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불가사의(不可思議)할 정도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모든 인간이 아닌가? 그런 죄악되고 연약한 인간들에게 하늘의 긍휼과 은총이 내려지는 2024년 성탄절이 되기를 간구(懇求)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4-12-18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요즘 정치인들 무섭다 또 안됐다’
    지난 2010년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책 가운데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저서가 있다. 이 책은 출간되면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타고, 국내에서만 무려 200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어린이를 위한 책까지 나왔으니 대단하다. 그러나 영미권에서는 10만 부도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관심을 끈 책이다. 샌델 교수는 공동체의 도덕을 개선해 나가는데, 네 가지 관점이 있음을 말한다. 공리주의적 관점, 자유주의적 관점, 공동체주의 관점 등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정의로운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닌가? 최근 유명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 ‘공직 선거 위반’으로 법원에서는 징역형과 집행유예 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자신은 무죄라며, 세상 법정에서의 2심, 3심이 남아있다고 항변한다. 또 민심과 역사의 법정을 들먹인다. 그래서 그가 과거에 타인에 대하여 발언한 것이 비교가 된다. 당시 탄핵을 당하는 대통령에 관한 문제에서 ‘법률 해석은 범죄자가 아니라, 판•검사가 한다’고 했었다. 또 수년 전 자신에게 유리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을 때는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다’고 호기롭게 말하였다. 그리고 지난해 본인과 관련된 판결 문제에서 구속영장이 기각되었을 때에는 ‘사법부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고 높이 칭찬했었다. 그런 정치 지도자가 최근 법원에서 자신에게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자,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의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선동하였다. 그러나 사법부가 그에게 실형을 선고한 이유는 ‘선거제도의 기능과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죄책이 가볍다고 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가 기대하는 사법부의 2심, 3심은 다른 결정을 내릴까? 우리는 흔히 사법부의 결정이 내려지면 빈말이라도 ‘존중한다’고 한다. 즉 사법부의 결정을 일종의 정의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리와 사법적 판단이 자신들의 생각과 합치되지 않아도, 이를 수긍하는 것이다. 사법부의 존재는 자유민주주의 제도하에서 권력의 집중을 막고자 하여 두는 국가기관이다. 그리고 사법부의 역할은 권력자들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권력자들의 막강한 횡포나 전횡을 막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유력 정치인이 사법부의 결정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결국 ‘사법 정의’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정치인이 재판을 받는 곳에 자당 국회의원 70여 명이 대거 몰려가, 희희락락하면서 사법부를 압박하려 한 것을 보아도 도대체 사회 정의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모르겠다. 거기에다 사법부의 1심 판결이 나오자, 그가 속한 정당(국내 제1당의 막강한 세력)이 함께 나서서 사법부를 심판한다고 압박한다. 게다가 자기들끼리도 당내에서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은 ‘죽여 버리겠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나왔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무섭다. 정말 무섭다. 자신들이 믿는 세력과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 국가나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 뱉고 싶은 말, 하고 싶은 행동, 분(憤)에 사로잡혀 행패를 부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듯하다. 사실 지난 정권하에서 사법부가 잘못을 많이 하였다. 사법부의 공정성이 결여되었다는 평가가 많았다. 명백한 범죄가 있는 의원이 기소된 지 4년 2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로 의원직 상실형이 나왔으나, 이미 의원직을 무사히(?) 마치고 모든 세비를 다 받아먹고 난 다음이었다. 또 자녀 입시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모 의원도 5년이 다 돼 가는데도 최종 판결이 나오지 않고 있다. 위에서 언급된 유명 정치인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도 2년 2개월 만에 겨우 1심 판결이 나온 것이다.(법의 취지는 6개월 이내에 나와야 하는데) 또 지난 정권 당시 광역시장 선거 개입의 불법성을 다루는 문제에서도 1심 선고가 나오는데 3년 10개월이 걸렸다. 이런 사법부의 행태이니,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입법부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을 때만,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고 추켜세우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타도의 대상으로 우습게 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공동체 속에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적극적인 시민의식이 있는가를 묻고 싶다. 값싸고 잘못된 의리 때문에 국가 사회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있지는 않은가? 최근 한국리서치가 ‘주요 사회기관 역할수행 긍정 평가’에서 정당은 8%로 최하위였다. 이런 정당들이지만, 그들이 국민의 삶과 국가의 안위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나라를 걱정하게 된다. 무너진 공의와 정의를 바로 세우는 길은 국민들이 어서 속히 깨어나야 한다. ‘확증 편향’을 버려야 한다. 이번에 실형이 선고된 유명 정치인은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하는데, 그 말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정말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정의(正義)와 공의(公義)에 눈감을 수가 없게 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4-11-23
  • [기자수첩] 한국교회를 초토화시킬 WEA 전쟁, 전리품은 누구의 몫인가?
    WCC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가장 위험한 주제로 꼽히는 WEA의 서울총회가 내년 한국에서 열린다는 소식에 한국교회가 충격에 휩싸였다. 지난 2013년 WCC 부산총회의 처참한 상흔이 아직 한국교회에 오롯이 남아있는 상황에, WEA 서울총회가 그때의 끔찍했던 트라우마를 다시 일깨우는 것 아닌지 벌써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오는 11월 15일, '2025 WEA서울총회 조직위원회'가 공식 출범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교계가 뒤흔들리고 있다. WEA는 대다수의 보수교계가 절대 반대하는 단체로, 일각에서는 WCC보다 훨씬 더 반기독교적이라는 평가까지 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대표 보수교단인 예장합동측은 'WEA 교류 단절'을 놓고, 근래까지 매우 치열한 논의를 벌였을 만큼 그 문제적 이슈에 대한 부분은 교계 내부에서 공론화가 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누가? 대체? 왜? 교계 전체의 반발이 뻔히 예상되는 WEA를 한국교회에 들여 놓으려는 것일까? 아직 조직위원회 구성이 나오지는 않았기에 확답할 수는 없지만, 일단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와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의 주도로 이뤄지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인 명성과 규모를 가진 두 교회가 WEA라는 뜨거운 불덩이를 한국교회에 들여놓은 꼴이다. 조직위 출범 소식이 들리자마자 이미 일부 교계는 극렬한 반대에 나섰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정서영 목사)는 "종교혼합주의, 다원주의의 의혹이 가득한 WEA를 한국교회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주최한다는 것은 한국교회를 기망하는 것"이라고 비난했고, 예장합동측 소속 신학교인 광신대 동문들도 "WEA가 로마카톨릭, 무슬림 등과 밀착하고, 혼합주의 다원주의 신학을 표방한다"며 "합동교단은 WEA와의 교류를 엄중히 단절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 뿐 아니라 15일, 조직위 출범행사장에는 이미 이를 반대키 위한 보수교계 단체들의 집회도 예고된 상태다. 뜬금없는 WEA 소식에 한국교회는 말 그대로 전쟁이라도 벌일 태세다. 더욱이 최근 한국교회에 가장 예민한 이슈로 꼽히는 동성애, 포괄적차별금지법에 대해 반대를 표명치 않는 WEA는 이 시기에 한국에서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단체임이 분명하다. 뻔히 눈 앞에 보이는 반발을 감수하면서, 지독히도 뜨거운 불덩이를 한국교회에 들여와 전쟁을 일으키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혹시나 하는 여지도 없다. WCC를 경험한 한국교회에 있어 WEA가 들어온다면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 확실하다. 그렇기에 우리가 현 시점에 가져야 하는 진짜 질문은 WEA의 건전성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도대체 왜? 라는 물음이다. 전쟁은 영토를 파괴하고, 사람을 죽이며 사회를 멸망시키는 엄청난 재난을 초래하지만,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전리품'을 선물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대부분 '전리품'을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자들이다. 현 시점에 과연 그 '누구'는 누구인가? 누가 이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전리품을 챙기려 하는가?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는 이를 반드시 설명해야 한다. 이 전쟁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 전리품이 과연 한국교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될 만큼 가치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한국교회 누구나 이 전쟁이 감수할 만하다고 느낄 정도의 엄청난 전리품을 내놓아야 한다. 이미 교계는 WEA서울총회와 관련해 수많은 추측을 내놓고 있다. 한국교회를 초토화 시킬 것이 뻔한 WEA를 이용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추측들은 그 이유는 달라도 결국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이 전쟁의 목적이 결코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4-11-12
  • [기자수첩] 10/27의 성공이 남긴 아쉬움과 숙제
    한국교회 역사의 손꼽히는 초대형 집회로 기록될 '10/27 200만 연합예배'가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애초 현장 100만을 목표로 했던 주최측의 기대에 부응해 이날 당일에는 무려 110만명(주최측 추산, 경찰 추산 30만명)의 기독교인이 거리에 나와 집회에 동참했다. 대한민국 사회에 한국교회가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준 이 역사적인 사건은 기독교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 은혜와 감동을 선사했다. 정치적 구호가 아닌 오직 순수한 기도로 110만명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한국교회의 자부심이 샘솟을 정도였다. 허나 준비단계부터 한국교회 전체를 들썩이게 한 엄청난 관심과 110만명이라는 성공적인 결과는 오히려 더 큰 기대를 품은 이들에 아쉬움을 주기도 했다. 먼저 사회·정치적인 성과, 명시화된 열매가 매우 애매했다. 물론 110만명이라는 숫자만으로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국민들에 한국교회의 목소리와 저력을 알린 중요한 시간이었다고는 하지만 110만의 목소리가 가져온 '열매'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딱히 대답키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의문은 기도회 전 열린 주최측의 기자회견에서 이미 제기됐었다. '10/27 200만 연합예배'의 가장 큰 구호는 바로 '포괄적차별금지법 반대'인데, 정작 이번 국회에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이 아직 상정조차 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 이에 대해 모 일간지 기자는 주최측에 이번 기도회의 ‘시기와 명분’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기자의 지적이 상당히 공감이 가는 것은 만약 한국교회가 '포괄적차별금지법'이 국회에 상정된 상황에서 이번 집회를 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시기적 아쉬움 때문이다. 만약 정치권의 그릇된 방향에 위기를 느낀 100만명의 기독교인들이 기도회를 열고, 국회를 규탄한 결과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완전히 좌절시켰다면, 한국교회가 거둔 확실한 열매는 물론 사회와 정치권에 결코 무시하지 못할 무거운 경고가 됐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한국교회가 110만명이나 모였지만, 사회적으로 별다른 변화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자칫 한국교회의 모습이 다소 초라하게 보일 우려도 생긴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냈다는 교회 스스로의 만족을 넘어 현실적으로 국민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사회정치적 열매를 도모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집회 전부터 논란이 있던 '주일예배 성수'에 대한 홍보 역시 아쉽다. 이날 집회는 말 그대로 전국 각지에서 기독교인들이 물밀듯이 동참한 역사적 결과였다. 문제는 지방에서 참여하는 성도들이 집회에 참석키 위해 이른 오전에 출발해야 했고, 이로인해 보통 9시 혹은 11시에 열리는 주일예배에 참석치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꼭 그 시간에만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예배'라는 개념이 있는 한국교회 정서상 자칫 충분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황, 주최측은 주일예배 성수와 관련해 '새벽예배' '온라인 예배' 등의 대처방안에 대한 적극적인 안내가 필요했었다. 여기에 몇몇 교회들과 협의해 전국에서 올라오는 성도들을 위한 맞춤식 온라인 예배를 송출하고 해당 링크를 미리 공지했다면, 논란 불식은 물론 큰 호응을 얻었을 것이다. 또다른 아쉬움은 일부에서 나타난 편가름이다. '10/27 200만 연합예배'는 이념과 정치를 넘어 한국교회는 물론 사회와 국민 모두를 품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한 연합의 장이었다. 하지만 일부 참여자들의 너무 과도한 열정은 기도회를 향한 우려의 목소리를 용납치 않았고, 일부는 이를 정죄하는 듯한 매우 강압적인 대처를 보이기도 했다. '10/27 200만 연합예배'가 확실히 한국교회 역사에 새로운 족적을 남긴 것은 분명했다. 이런 역사를 또 만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엄청난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만족과 찬양은 스스로에 독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포괄적차별금지법의 위협은 여전히 국회 문턱을 노리고 있고, 동성애를 용인하기 위한 사회적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이번 집회를 끝이 아닌, 또 다른 투쟁의 시작점이라는 인식으로, 더 큰 역사 창출을 위한 냉정한 평가를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4-11-05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국력이 가져온 노벨문학상 수상’
    지난 10일 스웨덴 한림원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국의 여류 작가를 발표하였다. 노벨상이 가진 권위와 전통으로 볼 때, 이런 상을 한국 작가가 받게 된 것은 대단한 일이다.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는 총 121명이다. 그중에 아시아인이 받은 것은 이번까지 포함하여 5번에 불과하다(국적은 4개 나라) 그러는 사이 유럽은 96명, 미국에서는 11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반면에 아시아권에서는 인도의 라빈드라이트 타고르가 1913년에, 일본의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1968년에, 역시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가 1994년에, 중국의 모옌이 2012년에, 그리고 한국의 한강이 2024년에 수상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시아권에서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살펴보면, 아시아 국가에서도 국력이 강한 나라들의 작가들이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것은 그만큼 한국의 국력이 세계적인 위상을 갖게 된 것이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국력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인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한국인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K문화’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K팝은 말할 것도 없고, K드라마, K푸드, K방산까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드디어 K문학까지 통했다. 스웨덴의 한림원이 한국의 작가와 작품을 눈여겨본 이유가 되지 않을까? 거기에다 한국 작가의 글을 서구에 알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영국의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의 공로도 지대하다고 본다. 그녀는 영국의 유명한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2010년부터 한국어를 독학으로 공부하여, 우리나라 여류 작가의 대표적인 ‘채식주의자’를 번역하였다. 그리고 이 작품이 2016년 세계에서 3대 문학상이라는 ‘맨부커상’을 수상하게 된다. 스웨덴의 한림원이 2024년 한국 여류 작가를 노벨문학상 작가로 선정한 이유를 보면, ‘역사적 트라우마에 직면하고 인간 삶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쓴 작가’로 보았다. 그런데 작가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쓴 것에서 표현된 것들, 그리고 동족상잔의 6.25에 관한 표현들이 왜곡되거나 편향되었다는 곱지 않은 지적들도 있다. 이 작가의 인식이 지나치게 피해자 중심으로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고 역사를 비튼 부분들이 드러난다. 2017년 그녀가 미국의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미국이 전쟁을 언급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는 글에서, 한국전쟁을 이웃 강대국의 대리전으로 평가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러자 당시 문재인 정부의 강경화 외교부장관 조차도 ‘표현과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었다. 그런 맥락에서 역사적 사건을 작가가 차용하여 표현할 때는 매우 겸손해야 하며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동물농장’이라는 작품으로 소련 공산주의 정권의 독재가 부패하는 과정을 그렸던 조지 오웰은 글을 쓰는 4가지 동기를 밝혔다. 첫째는 순전한 이기심이다. 이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에 의하여 글을 쓰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는 미학적 열정이다.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을 찾아 배열하는 기쁨을 말한다. 세 번째는 역사적 충동이다.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에 전하려는 욕구에 의한 글쓰기를 말한다. 네 번째는 정치적 목적이다.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고,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이며, 정치적 편향성에 의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 유형은 어디에 속할까?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작가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모두 한 마음으로 축하와 찬사만을 보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폭력을 미워하고, 피해자의 트라우마로 자유롭게 표현된 작품이 세계적인 문학상을 받게 된 것도 결국은 우리 한국의 국력이 커진 것에 기반하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인에게 노벨문학상의 영예가 돌아오게 된 것은 지금까지 한국 문학의 길을 개척자처럼 닦아온 문인들이 세운 이정표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작가의 창작과 표현은 자유이다. 역사적 사건도 포함된다. 그러나 기왕이면, 왜곡과 편향의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쪼록 세계가 인정한 한국 문학의 새로운 길은 열렸다. 더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4-10-26
  • [기자수첩] 대문호 '톨스토이'와 한강의 노벨문학상, 그리고 작가 소강석
    ▲ 전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관념과 표현, 시대적 관점으로 인류에 보물과도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전쟁과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 문학을 하는 모든 이들의 교본이 되어, 인류 문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에 대해 <죄와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쓴 도스토옙스키는 동료임에도 엄청난 경의를 표했으며, 영국의 모더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모든 소설가 중 가장 위대하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 러시아 제국 혁명이라는 혼란과 격동의 시대를 겪은 톨스토이의 작품 속에는 대표적인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나는데 바로 '기독교'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다. 그는 1885년에 출판한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코자하는 의지를 담았고, 1894년에 쓴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 속에서는 믿음과 신앙에 대한 자신만의 깨달음을 고백했다. 반면 <국가는 폭력이다>라는 작품에서는 교회와 국가,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군국주의와 애국주의 등 국가 권력으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비판을 서슴없이 가하고 있다. 매우 자유로우면서도 비현실적인 톨스토이의 삶과 사상을 오늘날 우리 사회, 혹은 한국교회적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어쩌면 결코 용납하지 못할 매우 불순함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인류는, 그의 사상을 굳이 기억하지 않으며, 그의 이념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을 하지 않는다. 그를 표현하는 인류의 단어는 여전히 '대문호'이며, 비교불가의 작품을 써낸 역사상 최고의 작가로 그를 기억할 뿐이다. ▲ 최근 한국 문학사에 역사적인 경사가 일어났으니, 바로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이다. 'K-컬쳐'로 불리는 한국의 문화는 근래 엄청난 세계화를 이뤘지만, 이는 음악, 영화, 예능에 한정됐을 뿐, 유독 '문학'은 이를 따르지 못했다. 그런 찰나에 등장한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한국 문학계의 수준을 세계로 끌어올린 동시에, 국내 작가들의 자부심을 심히 고취시킨 사건이 됐다. 하지만 국내 일각에서는 한강의 이념과 작품 속에 드러난 그녀의 사상을 문제 삼아, 노벨문학상의 권위마저 깎아내리는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전 세계를 의아케 했다. 최근 10년 새 그야말로 정점을 찍고 있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이념 전쟁이 결국 ‘문학을 문학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노벨문학상' 마저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문학을 문학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가슴아픈 행태에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는 소강석 목사도 낯선 공격을 받아야 했다. 소 목사가 동료 작가로서 그의 수상을 축하하는 글을 게재하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소 목사를 공격한 것이다. 결국 소 목사는 "한국문학의 위상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준 경사를 축하한 것일 뿐, 그의 사상이나 이념에는 동조치 않는다"는 내용의 입장문으로 자신의 글을 해명까지 해야 했다. 대문호 '톨스토이'가 위대한 것은 그의 사상이나 이념이 아닌 비교불가의 ‘작품’ 때문이다. 비록 한강 작가의 사상이나 이념을 동의하지 않더라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녀의 작품이 결코 폄훼되어서도, 그녀의 작품을 평가하는 작가의 시선을 왜곡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성을 잃은 이념의 분노가 결국 대한민국 문학사 최고의 업적마저 불태우고 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4-10-16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동물, 식물, 괴물, 독재, 망국, 증오국회’
    지난 5일 여당의 원내 대표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하였다. 그런데 제22대 국회가 시작된 지 100여일 만에 야당이 탄핵(彈劾-소추가 곤란한 대통령, 국무 위원, 법관 등의 고위 공무원이 저지른 위법 행위에 대하여 국회에서 소추하여 처벌하거나 파면함) 7건, 특검(特檢-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의 비리 및 잘못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기소하기까지의 독자적인 수사를 할 수 있는 독립 수사 기구) 12건, 청문회 13번(인사청문회를 빼고)을 했다고 하여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가 탄핵과 특검을 이 정도로 해야 할 정도로 국정(國情)이 문란한가?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래도 정치 민주화가 되고 선진국 반열에 들어가는, 우리나라 국회처럼 포용과 협치와 협상과 상생을 못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제21대 국회에서도 익히 보아왔던 장면이다. 제21대 국회에서 180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 개원하자마자 18개 상임위원장 자리를 모두 차지하여, 의석 비율에 따른 관례를 깨기 시작한 것을 필두로 주요 쟁점 법안에 대하여 여·야간에 긴밀한 협조를 하지 않고, 인사 관련 탄핵안은 힘으로 밀어붙여 결국 국민들 간에 심각한 불안과 갈등을 조장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제22대 국회에서도 범야권의 192명 국회의원은 밤중에 11개의 주요 상임위원장 자리를 야당 단독으로 처리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보통 여당에게 배분하는 것이 관례인 운영위원장, 법제사법위원장도 야당이 막바로 차지하였다. 더군다나 전혀 전문가가 아닌 사람을 강성이라는 이유로 요직에 임명하는 악수(惡手)를 두었다. 전문가들은 제21대 국회에서 특정 다수당의 폐해를 네 가지로 지적한다. 하나는 민주화 이후 협치 규범과 관행을 파괴했다. 상임위원장을 독식하고, 국회를 극단의 대결 구도로 몰아갔다. 또 하나는 국민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안들을 국회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처리하였다. 심지어 ‘위장 탈당’을 통해서 처리하면서도 부끄러움이 없었고, 삼권분립의 헌법 정신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생살리기 법안보다는 특정 세력의 표를 얻으려고 포퓰리즘도 서슴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국가 재정에도 엄청난 부담을 주었다. 또한 당 대표의 사법리스크를 막기 위한 방탄의 수단으로 민의의 전당을 방패막이로 삼은 것을 지적한다. 그런데 제22대 국회도 21대 국회의 폐해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지금 국회는 ‘특검’과 ‘탄핵’ 무드에 사로잡혔다. 물론 특검과 탄핵이 국회가 가진 권리라지만, 지금의 모습은 그 권리를 넘어서고 있다. 온통 특검과 탄핵을 일삼다 보니, 국가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맞추는 삼권분립의 원칙에도 위배 된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다 보니 윤석열 정부는 국회에서 일방적으로 통과된 법률 여러 건에 대하여 대통령의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대통령의 거부권은 단원제(상·하원이 없음) 국회에서의 경솔과 횡포를 막는 수단이다. 미국의 경우에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사용한 경우가 있는데, 루스벨트 대통령이 635회, 트루먼 대통령이 250회,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81건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국회에서 법률을 제정함에 여·야 간에 충분히 협치하지 못하고, 국가의 재정이나 국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숙의하지 못한 가운데, 거대 야당은 반복하여 ‘탄핵’ ‘특검’ ‘법률 제정’을 하고, 이에 대통령은 계속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이것도 독단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양극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통계 전문가들에 의하면, 현직 대통령을 지지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세력과의 진영 간에 간극이 점점 벌어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는 평균 72%포인트였고, 현 윤석열 대통령도 60%포인트를 넘나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34%포인트, 탄핵을 당했던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는 59%포인트였다. 이렇듯 모든 국민들 간의 갈등 조장은 상당 부분 정치인들이 하고 있다. 그들은 국민의 화합과 화평보다는 국민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의 골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와 권력 연장에 사용하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이웃 나라 난장판 국회를 가리켜 동물국회, 식물국회, 괴물국회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한국의 국회를 보면 여기에 더하여 ‘독재국회’ ‘망국국회’ ‘한풀이국회’ ‘증오국회’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스스로 법을 무시하고, 법 위에 군림하려는 자세는 결국 국민 무시라고 봐야 한다. 우리 국민들도 더 이상 수준 이하의 ‘막가파식 정치인’들을 무조건 두둔하지 말고,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교훈하여, 바르고 공정한 정치를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국민의 수준이 정치인을 만들고, 정치인의 수준이 그 국가의 미래를 가늠한다는 명제(命題)를 잊지 않게 되기 바란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4-09-11
  • [기자수첩] 평강에 부는 ‘적벽(赤壁)의 동남풍’
    후임 당회장 자리를 둘러싼 두 세력의 다툼이 한창인 평강제일교회가 최근 잇단 법원의 판결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이승현 목사측이 '교인출입방해' '교역자 징계' 등 분쟁의 쟁점이 되는 주요 다툼에 이어 최근 '법제인사위원회 불법 임명' 관련 본안까지 연이어 승소한 것인데, 한때 유종훈 목사측에 살짝 유리한 듯 보였던 교회 분쟁의 저울추가 역으로 기울고 있다. 서울남부지방법원은 지난 8월 22일, 이승현 목사측이 유종훈 목사측을 상대로 제기한 '법제인사위원회 위원 지위부존재확인의 소'에서 이 목사측의 손을 들어 유 목사측이 임명한 5인의 법제인사위원의 선출을 무효로 판결했다. 7인으로 구성된 법제인사위원회는 당회 소집, 안건 선정, 교회 규정 제정 및 발의, 교회 인사, 치리 등을 관장하는 평강제일교회 내 존재하는 최고기구로 사실상 당회 그 이상의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실제 이번 분쟁 상황에서 유 목사측은 법제인사위의 권한을 백번 발휘해 이 목사측 주요 교역자와 평신도들을 대거 제명 출교하기도 했다. 그런만큼 법제인사위의 구성은 이번 분쟁에 매우 예민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인데, 법원은 유 목사측이 대리회장의 권한을 앞세워, 위원회를 불법으로 구성했고, 불법 위원회를 통해 교회 구성원들을 치리한 것으로 판단했다. 평강제일교회는 정관상 법제인사위원 후보를 장로회, 남선교회, 여선교회 등의 교회 내부기관이 추천해야 하며, 임명에 있어서도 당회의 동의 뿐 아니라, 운영위원회 인준도 거쳐야 한다. 허나 유 목사측은 해당 과정을 생략한 채 직접 후보자를 추천해 이를 위원으로 선출했다. 이번 판결은 일방적 치리로 치닫던 평강제일교회 사태에 확실한 전환점을 준 것으로 파악된다. 그간 유 목사측이 이 목사측의 교역자와 교인을 치리한 중심에 바로 법제인사위가 있었는데, 이번 판결로 위원 임명 자체가 원천 무효가 되며, 향후 법제인사위가 승인한 당회 및 임시당회에서의 주요 결의들도 무효로 돌아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실제 법제인사위가 개입한 이 목사측 관련 주요 결의들이 무효로 돌아간다면, 평강제일교회 사태는 역으로 이 목사측에 기울 가능성이 큰 상태다. 여기에 이번 재판부는 이 사건의 효력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며, 판단을 보류했지만, 유 목사의 법제인사위원장 임명 역시 향후 논란의 여지가 충분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교인출입및사용방해금지가처분'을 결정한 재판부는 공동의회를 통해 선출되는 '담임목사'와 당회 결의로 선임되는 '대리회장'의 권한을 분명히 구분했었다. 즉 대리회장과 담임목사는 다르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유 목사는 교회정관 제2절 제18조 '담임목사는 법제인사위의 당연직 위원이 되며, 위원장을 맡게된다'는 조항을 근거로 법제인사위원장에 올랐었다. 당시 유 목사측은 대리회장과 담임목사를 전혀 구분치 않았던 것인데, 근래 대리회장은 담임목사와 다르며, 그 권한을 모두 발휘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나온 이상 이번에 무효가 된 5인 위원 뿐 아니라 유 목사측의 법제인사위원장 지위도 충분히 다툼의 대상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정직, 면직, 제명, 출교 등 교역자와 평신도를 가리지 않고 쏘아댄 화살로 한때 승리의 9부 능선을 넘었다고 자부하던 평강제일교회 사태에 이번 ‘법제인사위’ 판결이 전쟁의 판세를 뒤집을 '적벽(赤壁)의 동남풍'이 될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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