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9(월)

칼럼
Home >  칼럼  >  기독시선

실시간뉴스

실시간 기독시선 기사

  • 경현수(책갈피)
    책갈피 임 만 호한여름 모시적삼갈아입고독서 삼매경에 누울 적에책갈피 속가을을 먼저 가져온 검붉은 마른 낙엽 하나아 가을인가봐를 흥얼거린다대청마루 실바람은책을 펴는 내 앞에설악산 영봉 가지 끝 서성이는 푸른하늘 한 조각을 가져다치맛자락에 살며시가을을 내 민다 Untact, 비접촉의 시간들이 우리 앞에 얼마나 더 길게 서 있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름이 참 빨리도 왔다. 시인이 모시적삼 갈아입고 대청마루에 누워 독서삼매경에 들어가 있다. 돗자리 한 장 펴고 누워있는 망중한(忙中閑)은 더 더욱 , 부러운 미소가 절로 나온다. 선조들의 옷의 기능과 아울러 멋과 풍류가 깃든 아름다운 모시적삼은 아련하게 여름날의 향수를 불러온다. 읽고 싶은 책 두어 권 쯤 있다면 굳이 폭염을 뚫고 누구를 만날 일이 있을까, 상상력은 날개를 달고 가을을 예감하고 있다 . 설악산 영봉도 대청마루 끝에 서성대고, 미리 떨어진 조락하는 나뭇잎, 푸른 하늘도 대청마루에 걸터앉는다. 모시적삼 품안으로 바람이 자연과 함께 들어와 나직이 지껄이고 있다.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처자야모시적삼 안섶 안에 연적(硯滴)같은 저 젖 좀 보소 연밥 줄밥 내 따 줄게 담배 씨 만큼 보여 주소경북 칠곡 지방의 전래 민요다. 인간의 보편적 감성이 애로티시즘의 관점을 넘어선 아름다운 시가문학이다. 모시적삼과 연적(硯滴)을 병치 시킨, 모시적삼 입은 여인의 모습은 자연의 일부가 아닐까, 요란스럽지도 않고 소박하고 아리따운 ‘한국의 미’ 로 꼽아본다. 금년 여름은 모시적삼 한 벌 입고 시 한 편 읊조릴 수 있다면
    • 칼럼
    • 기독시선
    2020-07-07
  • (경현수)여기까지 나를 인도한 그가 와서
    여기까지 나를 인도한 그가 와서 김 종 희 어느날 여기까지 나를 인도한 그가 와서풀죽어 있는 나를 보고 말했다네가 무엇이든 희망하면 희망하는 대로 다 줄 것이다네가 희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 에벤에셀, 도움의 돌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다.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운 기념비의 이름이지만, 시 제목 ‘여기까지 나를 인도한 그가 와서’ 라는 주제는 선명하게도 성경의 에벤에셀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 그의 깊은 신앙의 깊이를 보게 된다. 시인의 시력은 깊은 신앙심과도 축을 함께하고 있다. 전문 5행의 짧은 행간에서 묵상하게 하고 있다. 형이상학적 진리 앞에 늘 인간적 물음을 올려드리며 응답을 구하고 있는 시인은 절제된 메타포어가 시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의 비감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방향성을 찾고 있다. 질그릇 같은 인간, 삶의 근원적 허무와 불안감을 하나님의 음성을 통하여 답을 얻고 있다. 질그릇은 시시 때때로 깨어져, 토기장이가 되어 새로운 시를 빚어내고 있다.‘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에레미야 33 : 3>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과 만나는 극적인 은총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회복의 감격이다. 하나님과의 교감을 통하여서만 길이 열리는 것임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을 알게 된다.
    • 칼럼
    • 기독시선
    2020-06-12
  • (경현수) 아침 해
    아침 해 임 인 진 산과 산 사이두서너 뼘 하늘이 열린 마을산 너머 게으른 아침 해가소올솔 안개를 잦힌다마당가 멍석 위엔통통 살찐 씨감자 눈 뾰족 치켜뜨는데보습쟁기 지게 등에 걸머진허리 굽은 농부어이새끼 소 앞세워가릉가릉 숨찬 비탈길 오른다“어디여 이리, 저리, 쯧쯧”지싯대는 송아지 앞세운 어미소소리 들은 둥 만 둥 심드렁한 발걸음 더디다산문 밖 밝은 세상눈앞에 아른아른 얼비쳐도돌작밭 쟁기질로 다져온 나날들첩첩이 쌓인 애환이 주름살로 얼비치는데머루 다래 주렁주렁곤드레 딱주기 곰취 싱그러운 산이 좋아오르락 가쁜 숨 고른다네산과 산 사이장전막동(長田幕洞)두메마을두서너 뼘 열린 하늘에하느작하느작 아침 해 떠오른다. 수줍고 해맑은 아침 해는 이 땅에서만, 금수강산 수려한 한반도에서나 만나게 되는 해의 이미지가 아닐까, 포스트 코로나를 예견하는 이즈음에 시 ‘아침 해’는 인간의 궁극적 피안은 어디에 있을까, 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시인은 잠시 위안과 우리의 근원적 고향을 찾아 나서고 있다.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절망에서 오히려 소망을 노래하는 혜산 박두진 시인의 ‘해’에서 순수와 희망을, 삶의 근원적 힘의 절정을 이루어 내고 있는 한국의 명시다.임인진 시인은 그의 내재된 본향의 순수한 서정을 맑은 심상으로 이끌고 있다.자연도 인간도 한 번도 오염되지 않은 산간 두메마을, 그들만의 삶의 방식과 인심이 물 흐르듯 흐르며 순리에 순응하는 순수의 사람들, 태초에 우주를 창조하신 분의 뜻이 있는 곳 훼손되지 않은 유토티아다. 산과 골이 깊어 울울한 나무숲을 뚫고 해가 늦개 떠올라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서서히 솟아오르는 해 아래 소의 가족들도 그들의 식솔이다. 사람도 소도함께 돌작밭을 일궈가는 긴 일상이 한 편의 서사시가 되어서 감명을 주고 있다. 자연을 헤치지 않는 그들에겐 머루 다래 곤드래 딱주기 곰취를 선물한다. 강원도 산골 장전막동 마을, 아침 해는 아기 볼 같이 해맑게 솟아오르고 이런 세상으로 회귀하고 싶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피안은 장전막동(長田幕洞)으로 가는 길.
    • 칼럼
    • 기독시선
    2020-05-29
  • (경현수) 바코드
    바코드 전 민 정저녁 무렵이다장을 보러 나갔다나란히 누운 고등어 대열그들에겐 가격표가 없었다검은 비닐봉지에 들어와내 것이 되기까지수없이 뒤적거림 당하며몇 번의 이력서를 썼을까해동으로 풀린 빨간 눈의 생선을 들고해피포인트에 덧셈을 한다지금 이 순간 선택되기까지수 없이 이력서를 쓴 나도어딘가에서 바코드로 찍힐까얼마의 해피포인트로 기록될까집으로 가는 보도블록 위로나의 바코드가 찍힌다2069519저녁 무렵 장바구니를 들고 기웃기웃 시장바닥을 돌고 있는 여인, 풍경은 아름답고 정겹다. 이런 시장 풍경은 얼마 쯤 더 우리와 공존할 수 있을까,4차산업의 물결이 세상 곳곳에 물 밀 듯 밀려오며 삶의 모습도 바꿔가고 있다. 바금 폰에서 알림 톡이 도착했다. QQ mall 셀렘샤 ㅍ 블라우스 내일2시 배송예정. 문자 확인 후 창밖을 내다 본다. 아파트 단지 뜰은 공허한 바람이 지나갈 뿐 아무도 없다. 알 수 없는 바이러스, 코로나가 이끌고 온 복병으로 뒤집힐 듯 세상은 변해가고 있다. Untact, 비대면의 사회가 현실로 다가왔다. 진부한 타령이지만 ‘만나고 있어도 그리운 사랑, 만나지 못해 더욱 그리운 사랑’ 이 통속의 독백이 아이러니하게도 울림이 온다. 되레 우리 삶은 격조 높은 사랑의 풍속도로 전개 될듯 한 예감이, 플라토닉 로맨스가 펼쳐지지 않을까, 바코드 찍은 고등어가 검은 비닐봉지에 들어와 내 것이 되었다. 고등어의 이력은 단숨에 벗겨져 눈알이 빨갛게 충혈되고 두부 호박 고추 식탁에 오를 찬거리는 입국장을 통과하는 여행객 처럼 통관 하고 있다. 아직 시인은 바코드 찍힌 적 없이 잘도 나들이를 했는데 미술관 영화관 경기장, 북적대는 인사동 거리에서도, 이젠 알 수 없다. 장바구니를 들고 보도블럭을 건너는 발목에 체인 같은 바코드가 찍히고 있다. 시인의 정체가 사이버 공간으로 무한 날개를 달고, 바코드 2069519가 찍혔다.
    • 칼럼
    • 기독시선
    2020-05-15
  • (경현수)세계지도를 보며
    세계지도를 보며 김 행 숙어릴 때부터 몇 십년간 눈에 익은 세계지도엔 우리나라가 언제나 중심에 있었다암스테르담에 갔을 때 이상한 세게지도를 보았다유럽이 한 가운데 있고 우리나라는 동쪽 끝에 묻혀있었다 세계에서 오직 하나, 반 토막 나라칠십년이 되도록 헐지 못하는 담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곳반신불수의 몸을 이끌고 불구자로 산다세상의 중심이 되어 씽씽 돌아가게 되지는 못할지라도을 내가 바라는 내 나라 내 조국은다만 착실히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나라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상 받는 나라어우렁 더우렁 무던히 사는 나라그런 나라로 남았으면 좋겠다 여행은 새로움과 경이로운 세상과 만나는 일아이 적, 모습은 자기중심적이라고 하지만 어른이 되어도 누구나 그 형질은 바뀌지 않는다는데, 유럽 암스테르담에서 시인은 나와 내 나라를 새롭게 알게 된다. 세계는 나에게서 시작되는 것을, 오대양육대주의 주인은 누구일까 비로소 인식되는 깨달음이리라,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론에서 시간과 공간이 서로 의존하면서 관측자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공감하게되는 시인의 시각이 새롭다. 암스테르담에서 시작하는 내 조국 대한민국은 세계지도의 동쪽, 반도 끝자락에 묻힐 듯 말듯 서럽고 수줍은 나라인가, 그나마 허리가 잘린 반신불수 70년이 넘도록 철조망의 담이 가로막고 있음은, 이제 다시 어릴 적 생각처럼 이 나라는 세계의 중심의 나라라고.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고 외친다. 시인처럼 우리 모두 소박한 꿈을 꾼다. 내가 바라는 나라는 착실히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나라, 어우렁더우렁 어울려 보듬고 사는 나라, 잘린 허리도 온전하게 되어 한 몸 되어 태극기 휘날리는 나라, 정오의 햇살처럼 지구촌을 밝혀주는 대한민국의 그 날 세계지도를 다시 그린다.
    • 칼럼
    • 기독시선
    2020-04-24
  • 경현수(풍경, 약국은 지금)
    풍경, 약국은 지금 안 재 찬1.여권이 없어도 바람이 봄으로 국경을 넘는구나눈에 들어오지 않는 정체불명의 손님다녀간 길마다 손만 닿아도 공포는 부풀려지고하얘지는 머릿속, 증발하는 언어무슨 수를 부르 길래 자본이 문명이 핵까지도옴싹 달싹 못 하는구나무슨 힘을 가지 길래 동양을 서양을 종교까지도몸을 부르르 떠는구나일상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선전포고도 없는 천하무적 역병의 시대전염병도 아우성으로 노아의 방주 꿈 잠은 이어지지 않는구나2.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골목 모서리에 입술을 깨물며 줄 서 있는코로나19의 전사들핏빛 노을 속, 부역열차에 목숨을 실을 때무탈 귀가를 흰 손 흔들고 있는약국은 지금, 노란 완장을 차고 있구나 시의 주제를 풍경으로 설정한 시인의 의도가, 역설적 암담함과 두려운 현실의 어둠을 ‘풍경’ 으로 변용시켜 마치 낭만주의 화가 렘브란트가 빛과 어둠을 선명하게 대칭시켰듯이 시인은 어둠과 두려움을 선명하게 노란 풍경으로 시화(詩畵)하고 있다. 이 지구촌에 예기치 못한 공포에 가까운 코로나19 라는 바이러스를 어떻게 소멸시켜야 할지, 미세한 놈의 정체도 모른 채,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같이 나약하게 절망 앞에 서 있다니, 여권이 없어도 차표가 없어도 지구촌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금년 봄은 그냥 지나가고 있는지, 한라산 북쪽 산자락 생태 숲에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노란 복수초를 만나지 못했다. 복과 수를 기원하는 꽃이라고도 할 만큼 아기주먹 같이 앙징맞고 귀여운 꽃망울은 봄의 전령사, 봄이 가고 코로나19도 곧 지나가리라고 도시의 암울한 풍경도 곧 지나가게 될 것이라고, 노란 희망의 색채 스펙트럼의 580mm 파장이 노랑 빛으로, 줄 서 있는 이웃을 치유하고 그 보다 더 밝은 흰색 까운의 손길에 하나님의 은총이 더하여 노란 봄날이 화창(和暢)하는 봄, 봄이야__
    • 칼럼
    • 기독시선
    2020-04-10
  • (경현수) 못밥
    못밥 이 오 장어이 싸게싸게 나오소아무리 바삐도 밥을 먹어야지 아따 사돈집에 왔는가 상각을 갔는가 아무렇게나 편히 주저앉아 옷벌이면 어쩐당가 어차피 젖은 옷인디 두 다리 쭉 펴고 앉어역시나 일꾼은 밥이여 많이 있응께 걱정 말고 먹더라고 막걸리도 한 잔씩 혀야지 아따 거 쌩지도 맛있지만 갈치지짐이 좋네그랴 들밥은 아무렇게나 먹어도 꿀맛이랑게 숭이네는 어찌 냉기는가 속이 안 좋아 저쪽 밭고랑에 얼른 댕겨오소 풀밭에 앉을 때는 뱀 조심허소 학기네는 왜 밥을 싸두는가 식구들 걱정 말고 많이 먹어둬 이따 집에 가서 한 바가지 싸갔고 가 모심는디 먹을 것 애끼것는가 논두렁 인심이 풍년 부르는 거여 저기 호락질 허는 상근이도 불러와 안 불러도 오지 않고 어찌 눈치본다냐 오늘 모심는 거 본게 밥 안먹어도 배부르네 가믐 끝에 이렇게라도 심는 모가 동네 잔치랑게 가을에 환갑잔치 한 번 더 혀야지 지나간 우리들 고향과 농촌풍경이 흑백영화 필름이 흐르듯 돌아가고 있다. 전북 김제가 고향인 이오장 시인의 유니크한 시세계다. 독백의 독특한 대화체는 인용부호가 없어도, 화자와 청자가 없어도 소동의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본다. 이는 劇詩이며 언어예술의 본류를 이끄는 시를 다시금 무대예술로 연출되는 듯, 놀랍게도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고 있다. 더군다나 문학과 언어를 결합하여 사라져가는 농경문화와 방언까지 살아 생동하는 삶으로, 문화와 역사를 아울러 관동하며 독자로 하여금 정감의 세계와 우리 삶의 궤적과 정체성까지 돌아보게 된다. 한 폭의 소박한 민화 한 점을 감상하게 된다. ‘모심는 날은 동네 잔치랑게’ 일도 잔치고 축제다. 농경문화의 축제날이다. 품앗이로 서로 돕고 살았던 농촌의 모습 오랜 우리민족의 삶이었다. 퇴색하고 잊혀진 문화와 언어가 우리 곁을 지켜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 이지만, 이오장 시인은 그의 시집 ‘고라실의 안과 밖’에서 어릴 적 경험한 농촌의 문화와 민속어와 방언을 이야기하듯 노래하고 있다. 사라져가는 것들의 그리움과 애틋함을 시를 통하여 다시 만나게 되어 큰 기쁨이 되고 있다.
    • 칼럼
    • 기독시선
    2020-03-27
  • (경현수)나비가 되어
    나비가 되어 김 영 희 언젠가 내가 나비였던 그 곳, 함평으로 갔다어머니를 찾아가는 그리운 고향지친 날개 접고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은빛 물결의 억새꽃은 마을 어귀에서 손짓하고어릴 적 뛰놀던 집들은 꼬막만 한데고향집은 등을 켜고 점점 또렷이 다가온다텅 빈 마당에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고맨발로 반겨 주시던 어머니는 어디에도 없다사진이 걸려있던 그 자리, 벽이다( 너는 커서 뭐가 될래--- )아픈 배 문질러 주시던 어머니의 목소리자장가 처럼 들으며 잠들던 오후마당에는 어디서일까 휩쓸려온 가을이 나비날개를 접고 있다어머니의 빈 뜰에 고향과 어머니는 동질성의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들의 유년은 알록달록 구김 없는 오방색의 꽃밭이다. 호랑나비 노랑나비, 흰나비가 꽃밭에 훨훨 날아든다. 어린 소녀는 나비를 쫓아 뛰어다니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달려와 덥썩 그 품에 안겨든다. 시인은 그 무지개빛 같은 기억만으로도 벅차다. 문득 달려간 고향집, 시간은 모든 것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은 꼬막만하다. 벽에 걸렸던 사진도 이미 그 자리엔 없다. 누렇게 바랜 벽지는 얼룩져 있고 不在에서 오는 공허함과 슬픔의 무게는 늪과 같지 않을까, 훨훨 나비와 함께 떠나간 시간에도 고향은 향기와 소리와 빛 온갖 기억들을 갈무리 해 두고 있다. 하릴없이 동구 밖을 향해 짖어대던 강아지, 아픈 배 문질러 주시던 어머니의 따뜻한 손, 모든 것이 보이지 않고 사라진 듯해도 고향은 살아서 우리들 곁에 남아 있다 저기- 가을의 낙엽들도 날개를 접고 있다. 어린 날의 나비처럼, 시인은 아린 不在의 공간을 노랑나비로 채우고 있다. 한 편의 환상곡 인 듯 찬란하게 시를 빚어내고 있다
    • 칼럼
    • 기독시선
    2020-03-02
  • 탱자나무 울타리
    손 연 옥 무너진 고향집마음 놓아버린 탱자나무 울타리목발 짚고 서 있다 한 가시 틈새에 젖꼭지 꽃망울, 틔우던 탱자나무 파란 이파리 갉아 먹던 애벌레는호랑나비 되어 날아갔다제 몸에 가시 세워 꽃과 애벌레 키우며울창했던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허리 굽은 아버지가 지나간다열두 남매 울타리가 되느라앙상하게 말라 가시던 아버지노랗게 마른 탱자 알 몇 개 빈 마당에뒹굴고 있다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에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이사야40:8).모든 생명체는 풀과 같이 시들고 사라지는 존재지만, 하나님과 말씀(Logos)만은 영존 하신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게도 끊임없이 존재의 물음을 묻고 있다.시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읽혀지는 고향집, 허물어진 벽, 이미 사람이 떠나간 엉성한 울타리는 기울어지고 퇴락한 모습으로 남아 있지만 시인에게는 영존(永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같다. 아버지의 그림자는 가슴에 아로새겨져있다. 탱자나무울타리와 아버지는 닮아있다. 탱자나무의 가시는 엄격하던 아버지의 사랑, 시들지 않는 사랑은 가시 틈새에 쉼 없이 꽃망울을 틔우던 아버지다. 아가페적 사랑이고 헌신이다.열둘의 자녀는 탱자나무에 기생하는 호랑나비 애벌레였겠지, 무성한 탱자나무 이파리를 갉아먹으며 성장한 자녀들은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고 없다. 아버지와 탱자나무의 절묘한 은유(隱喩)가 독자의 감명을 불러준다.더군다나 노란 향기로운 열매와 가시울타리는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정서의 울타리가 되고 있지 않을까, 가끔 시골 농가를 지날 때 만나게 되는 탱자나무 울타리는 뭉클한 한가닥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지금은 페가가 된 아버지의 집, 노란 향기를 끄러안고 마른 탱자가 빈 마당에 바람에 휩쓸려 굴러가고 있다면, 이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닐까,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한 구절도 떠올리게 된다.
    • 칼럼
    • 기독시선
    2020-02-14
  • (경현수) 소리 속의 나는
    소리 속의 나는 이 복 자돌은 물을 만나면 물소리를 내준다 물소리에는 돌의 무게가 있고나무가 바람을 만나면 바람소리를 낸다바람소리에는 나무 무게가 있고파도가 모래밭을 거니는 소리도 좋고피아노가 노래를 돕는 소리도 좋고사람과 사람 사이 말소리를 내는 소리 속의 나, 무게는좋은 사람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만난 누군가가됨됨이가 좋다고 겨냥이나 하고 있는지엊그제 무심코 뱉은 싫은 소리 하나무게 밀어낸다, 가볍게 저만큼 우주 만물, 창조주가 만든 萬像은 서로 어우르며 함께 살아가며 동화 되고 혹은 스며들기도 하고 일체가 되는 조화로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시인은 사람과 사람 자연과 자연이 서로 교감하는 것을 오감을 통해 느끼며 감명과 시적 영감을 얻는다. 돌은 물을 만나면 물이 되고, 돌을 만나면 돌의 무게를 알게 되고, 나무를 보면 나무 속에 들어가고, 무게도 실체도 보이지 않는 바람을 만나면 나무도 나도 바람이 된다. 과학에서 상호의 존성의 맥락을 염두에 두게 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는 대칭적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과 같이 인간은 물론이지만 한 마리의 새, 한 송이의 꽃 그 주위의 모든 것과 분리돼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의 근거도 여기에 두고 있지 않을까, 시인의 시에서는 현학적이거나 철학적 논리를, 오히려 심미적 아름다움의 감성으로 호소되는 시 한 편을 내어놓았다. 절창이다 사람과 돌도 바람도, 꽃도 새도 거대한 공동체의 일부가 아닐까, 곧 상호의존이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은 주제 ‘소리 속의 나’ 에서 싫은 소리는 가볍게 밀어내고... 감탄의 경이로운 시 한 편을 격조 높게 빚어냈다
    • 칼럼
    • 기독시선
    2020-01-1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