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지난 칼럼
Home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실시간뉴스

실시간 합동총회장 열전 기사

  • 연재를 끝내면서…
    2015년 1월 11일자에 인사말을 시작으로 2017년 12월 10일자에 이르기까지 장장 만 3년에 걸쳐, 제1회 총회장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로 시작해 제100회 총회장 박무용(朴茂用) 목사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 것은 교회연합신문의 적극적인 지원과 독자 여러분의 따뜻한 성원에 의한 것이었다. 총회장을 역임한 분들 중 3회를 역임한 이자익 목사(李自益 13회, 33회, 34회), 2회씩 역임한 김윤찬 목사(金潤餐 49회, 52회)와 한상동 목사(韓尙東 45회, 46회)가 있어 100회 총회를 맞이 했으나 전체 총회장 수는 97명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해명하고 지나야 할 사안이 있다. 숫자상으로는 정확하게 96명이지만, 총회장에 추가된 분이 한 분이 있는데, 전북 김제 출신의 고성모 목사(高聖模 45회, 3개월간 총회장 역임) 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1959년 제44회 총회가 통합측과 분열한 후, 1960년 9월 22일~24일 사이 서울 승동교회에서 제45회 총회가 모였는데, 총회장이 고성모 목사였다. 그러나 총회가 끝나자마자 당시 예장고신측과의 합동문제가 제기되어 급물살을 타고 합동과 고신 양교단이 합동하게 되어 같은 해 12월 13일~15일 같은 장소인 숭동교회에서 합동총회로 모일 때 고신을 영입하면서 총회장 자리를 한상동 목사에게 주기로 해 이루어진 일이다. 자세한 사항은 필자가 확인하지 못했으나 아마 고신교단을 영입하면서 합동측에서 예우상 총회장 자리를 고신의 한상동 목사에게 준 것으로 파악된다. 필자는 여기 총회장 열전을 기술하면서 장로교 뿐만 아니라 여러 교단들의 내분으로 분리될 때 가장 큰 이유는 교권 때문에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교계 사정의 와중에서 고성모 총회장은 대의(大意)를 위해 교단 수장의 자리를 3개월만에 선뜻 내놓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 가야 할 사항은 인간 고성모 목사의 성직자로서 교단을 위하고 크게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모처럼 선출된 교단 수장의 자리를 선뜻 내놓은 대인(大人)다운, 또 성직자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어 고성모라는 새로운 지도자상을 찾을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기회가 닿으면 인간 고성모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기술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다음의 숙제로 삼고자 다짐해 본다. 모처럼 다가온 자리를 아무리 교단을 위하는 일이라 할찌라도 정말 순전하고 깨끗한 마음과 신앙의 덕목의 소유자가 아니면 3개월만 하고 총회장직을 선뜻 내놓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필자는 총회장 열전을 마감하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 있다면 97명의 총회장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한 인물을 발견한 것이 큰 소득이었다고 자부해 본다. 제100회 총회까지 총회장 숫자는 총 96명이자익 3회·김윤찬 2회·한상동 2회 연임제45회 고성모 총회장 3개월 만에 한상동 목사에게 자리 넘겨원로·은퇴 목회자들 개교회나 지역교회 역사기록 남기길필자가 처음 예장합동 총회장 지도자 열전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된 동기가 있다. 첫째는 예장통합측 한국교회사연구원장으로 있는 교회사가 김수진 박사가 2005년 9월 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 90회 총회장(통합측)까지를 다루어 ‘총회를 섬겨온 일군들’이란 책명으로 간행된 것을 접하고서 자극을 받았고, 둘째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 백수복 목사가 2013년 8월 서울신학대학교출판부를 통해 ‘한국성결교회를 빛낸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성결교회 총회장 열전 간행을 보고 더 늦기 전에 내가 속한 예장합동 총회장들의 역사를 정리해야겠다는 교회역사를 연구 소명감이 불타올라 결심을 하게 되었다. 막상 집필을 하기로 결심을 하기는 했으나 당장 대두되는 문제가 총회장 개개인의 인적사항과 사역의 여정 그리고 교계 및 대사회적으로 역사한 자료수집의 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다. 100여명의 개인사와 경력을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다행이었던 것은 필자가 성결교회 역사와 문학연구회(대표 백수복 목사)의 위촉으로 대구 경북지방의 지도자 17명에 이르는 개인사를 정리해, 제6집부터 17집에 이르기까지 매호에 성결교회 인물전을 집필 발표한 경험이 있어서 약간의 자신감도 있었고, 이미 간행된 김수진 박사의 책 전반부(1회~44회까지)는 김 박사의 양해를 얻어 약간 보충하며 개고(改稿)하는 것으로 기술하게 되었던 것이다. 역대 총회장 집필순서는 1회로부터 계속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 총회 횟수는 순서에 매이지 않고 들쭉날쭉 해야만 했지만, 후일 단행본으로 묶을 때는 순서대로 하기로 하고 자료가 준비되는대로 총회장들의 열전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은 아니었으나 교회연합신문 발행인 강춘오 목사의 제의로 집필 연재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엔 기사가 나갔지만 별반응이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미 작고한 인사들의 기사였으니 조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생존해 있는 인사들의 글이 나가기 시작하고 부터는 여기저기 전국에서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사가 나간 후에 전화제보가 들어왔다. 연대가 틀렸으니 정정해 달라거나, 어디에 그분의 자료가 있으니 참고하라거나, 또 어떤 독자는 노상에서 필자를 만나 당신의 글이 재미있어 버리지 못해 스크랩을 하고 있다는 인사를 받기도 했고, 어떤 분들은 필자를 만날 때마다 그 다양한 자료들과 이야기들을 어떻게 수집하느냐고 격려하는 독자들도 있어 집필하는 동안 큰 힘이 되었고 더욱 소명감을 느끼기도 했다.한 가지 아쉬운 것은 집필대상자의 자녀들이 비협조적인 경우가 있어 난감했다. 전화상으로, 때로는 직접 울먹이며 쓰지 말아달라는 질타를 받을 때였다. 그러나 반면에 전남 광주에 있는 C총회장이나 대전에 거주하고 있는 K목사, 수원에 있는 A목사 같은 분,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J목사, L목사는 필자에게 따뜻한 조언과 격려를 해주어 집필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집필 중에 생긴 에피소드도 없지 않았다. 필자와는 생소한 분이었으나 자기 어른에 대한 글을 아들된 자기보다 더 세밀히 알고 집필해줘 고맙다고 필자를 불러 식사를 한 바도 있고, 자기 장인에 대한 글을 읽고 연락한다며 만나자고 해 융숭한 대접을 하며 생각지도 못한 연구비 명목의 격려금을 받기도 했다. 이 연재물의 인연으로 전혀 안면도 없는 분들이 경영하는 군소교단으로부터 자기들의 교단 신학교인 ‘총회신학연구원’에 한국교회사를 가르쳐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와 지난 9월부터 인천과 서울 두 곳의 교회사 강의까지 하게되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총회장 열전 집필의 연으로 생긴 즐거운 나의 비명이다. 글을 쓰면서 필요한 자료가 모자라면 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으로 있는 역삼동의 김남식 박사와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을 이끌고 있는 장영학 목사에게 도움을 받았다. 이 란을 통해 두 분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또 교단지 ‘기독신문’ 전 사장 이재천 장로와 현 사장 남상훈 장로와 총회 기획실 박영 집사, 출판부 김귀분 팀장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이 열전을 연재하는 중 또 다른 과제가 생겼다. 예장(합동)에서 1979년 대구 동부교회 총회시에 갈라져 나갔던 개혁측이 26년 만에 총회100년을 기해 귀환한(재합동) H목사로부터 전 개혁측 총회장 열전 집필의뢰를 받게 된 것이다. 26명의 구 개혁측 총회장 열전 집필을 위해 자료를 취합 중에 있음을 여기에 밝혀둔다. 또 필자의 총회장열전 탈고 소식을 들은 부산 고신대학교 이상규 박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총회장 열전 탈고 소감을 써달라며 아울러 새해 벽두에 개최되는 부산경남기독교역사학회에 와서 회원들을 대상으로 좌담 겸 발표를 한번 해주면 고맙겠다는 요청이 들어왔다. 이 자리를 빌어 우리 한국교회 은퇴동역자들과 현직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제의하고 싶은 필자의 소망이 있어 권하고 싶다. 원로·은퇴 동역자들의 사역회고록을 남기고 현역 교역자들께는 자신들이 섬기고 혹은 개척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꼭 남겨달라는 점을 역사를 연구하는 한 학도로써 연구자로써 꼭 요청드리고 싶다. 역사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분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교회사를 써보거나 교회가 속한 노회나 연회 혹은 지방회 역사를 정리해보라고 제의를 하면서 필자의 소회를 끝낸다.아울러 독자 여러분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격려와 애독에 다시 한번 감사 드리며, 그동안 악필로(연필) 기록한 원고를 컴퓨터에 입력해 멋있는 모습의 글로 탄생시켜준 교회연합신문 기자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웠다고 인사를 드리며 이 글을 맺는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12-14
  • 97. 제100회 총회장 박무용(朴武用) 목사
    경북 경산 출신박무용(朴武用, 1949. 8. 15~) 목사는 경북 경산시 평산동 437번지에서 박태규 장로와 김정자 권사 사이에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평산동은 대구 도심에서 그리 멀지않은 전형적인 농촌으로서 하늘 높고 물 맑은 개천이 흐르는 산촌이었다. 인근에 있는 대구에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 배위량(Rev. Wn. M. Baird 1862~1931) 목사에 의해 대구선교지부가 설치되어 있었고, 오늘의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교회가 된 대구제일교회를 비롯, 일제 당시에만 해도 대구읍내에는 서문교회, 산격교회, 범어교회, 남산교회에 이어 경산지역에도 사월교회, 경산읍교회, 자인읍교회, 봉화교회 등이 설립되어 있었다. 박무용 소년이 태어난 당시에도 이미 여러 교회들이 설립되었고, 드디어 무용 소년이 살고 있는 평산에도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다. 무용 소년이 태어난 시대는 갑자기 닥친 8.15 광복이 지난지도 10년이 다 되어 혼란한 사회 분위기는 어느 정도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무용은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로부터 자연스럽게 구원의 복음을 접할 수 있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광복 후 국가적으로 체제가 서서히 잡혀가고 있었으나 8.15이후 전개된 좌·우 이념 대립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서인지 사회분위기가 안정적이진 못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무용 소년은 부모들의 손에 이끌리어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배울 때마다 이 세상삶만이 아니라 새롭게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도 모르게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일해야겠구나라는 소명감이 주어졌다.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육을 받고서 해방 후에 기독교 이념으로 새로 출발한 신설학교인 대구 성광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성광학교는 미션계에서 교과목 중에 성경과목도 있고 일주일에 한 두 차례 예배하는 채플도 있어 무용 학생에게는 신앙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고 학교생활에 만족하였다. 그는 성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신대학교 신학과로 진학해 교단을 위한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는 대신대학교를 마치고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학업을 계속하면서 같은 노회 내에 있는 농촌교회(미자립)인 달성군 다사면에 있는 세천교회에서 전도자로서 영성을 쌓아 갔다. 가옥 이래야 30여호도 채 되지 않는 시골 교회였지만 가족적인 분위기여서인지 외로운 줄 모르고 즐거운 하루하루가 전개되었고 목회가 무엇이며 사람 키우는 일, 제자삼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스스로 터득해갔다. 대구 대신대학교 졸업소련연방 무너진 직후 러시아 선교사 파송기독교방송·한국찬송가공회 이사 역임미국 새들백교회 소그룹 모임 도입“교단탈퇴 목사 재가입시 전소속 노회로만 가능” 결의박무용 목사는 이후 때때로 고된사역을 하면서도 그때를 회상하며 새 힘을 얻곤하였다. 그는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1979년 2월 3일 대구시 상동 498번지 2층 건물(약25평)을 전세로 얻어 도시목회를 처음 시작했다. 1979년 11월 17일 상동(上洞)에서 현재의 황금동 567-6번지로 교회를 이전하여 교회명을 황금교회(黃金敎會)라 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목회하면서도 배움에 갈급하여 총회가 운영하는 목회신학원으로 진학하여 목회석사학위(M.M.)를 취득했고, 대구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교육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그가 황금교회를 개척 선교하기에는 이미 언급한 세천교회 외에 반야월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대구 성도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한 것이 전부이지만, 그의 황금교회 목회에 밑거름이 되었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박무용 목사는 교회 개척 후 40년만에 대형교회를 이루었고 지역에서만 아니라 교단의 수장자리인 총회장이 되지 않았는가? 그는 목회사역을 교회 안에서만 이룬게 아니다. 1992년에는 러시아에 강승규, 박선자 선교사를 파송하여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으며 우리가 전해 받은 복음을 다시 나눈다는 차원에서 앞으로도 지속하겠다고 다짐한다. 그의 활동범위는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에장총회 군선교회장으로 전군신자화 운동에도 앞장섰고, 지역 내에 있는 대구 수성경찰서 경목실장으로 경찰복음화 사역에도 열의를 다하고 있다. 한편 모교인 경산에 있는 대신대학교 재단이사로, 기독교방송(CBS) 교단대표 이사, 한국찬송가공회 파송이사로, 총회 세계선교회(G.M.S) 부이사장으로, 총회(102회) 선거관리위원장으로도 심혈을 기울여 봉사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에겐 항상 젊음과 열정이 넘친다. 그의 생김새가 듬직하고 남성다운 호상이어서 만은 아닌 것 같다. 그에겐 어떠한 어려움이나 역경에서라도 박차고 일어서겠다는 용기와 확신에 믿음의 열정이 그의 모습에 가득차 있다. 그는 황금교회 30년사 가운데 교회개척의 어려움과 이를 극복한 이야기를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황금교회30년사, 같은책 p.157~158).“황금동 가정집 사글세 기한이 다 되어 안이자 사모의 퇴직금 100만원으로 천막 40평짜리를 사서 천막교회를 세웠는데, 수성구청 직원 20~30명이 달려들어 그 천막교회를 부술려고 하는 긴박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내일 주일예배를 드려야 한다), 구청장을 찾아가 사정사정을 해 일주일 간의 말미를 얻었다. 또 전두환 정부가 환경을 정화한다고 하면서 천막교회를 뜯으려고 할 때 길에 주저 앉을 정도로 눈앞이 캄캄했다. 이때 우씨라는 복덕방 주인이 지산동 954~3에 교회부지가 있다고 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40만원을 주고 계약을 했는데 사실 중도금 줄 돈에 대한 대책도 전혀 없었다. 나는 가창 골짜기에 있는 갈멜산기도원에 올라가 하나님께 온 힘을 다해 기도했다. 그리고 돌아왔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동생인 박삼용과 대구노회 여전도회연합회 김숙애 회장, 수산교회 조응대 장로 장모님이 가지고 있는 금패물을 합해 500만원의 거금을 모아 보내주었다. 이 헌금으로 계약한 땅값을 다 치루고 등기까지 완료하는 기적을 체험했다.” “또 교회당 건축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박주열 장로와 김우선 권사님이 집을 담보로 농협에서 500만원을 차용할 수 있어서 건물을 신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키시는 주님께 늘 감사했다.” 그는 다시 읊조린다. “나의 목회철학은 폐결핵으로 사선을 넘은 나를 일사각오 정신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기 위해, 중국선교와 지역 복음화를 위해 전도와 기도하는 것이었다. 교회 분위기는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여 매우 정겹고 가정적이었다. 지금도 피곤하고 고달플땐 그때를 회상하며 새 힘을 얻곤 한다. 박 목사는 계속 전도프로그램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네비게이토선교부에서(대구지회 주관) 6개월 과정, 대학생성경일기회(UBF)에서 6개월 훈련을 받고 시도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다시 미국 L.A에 있는 새들백교회 랄프네이버 목사의 교회성장세미나에 참가 교회에서의 제자 양육훈련의 중요성을 깨닫고 교회에 정착을 위해 소그룹 모임과 교인양육프로그램에 전력을 다한 결과 정착에 성공하게 되었다.오늘까지 그는 자신의 목회철학을 하나님께서 내게주신 ‘목적을 따라 세워져 가는 황금교회’라고 고백한다. 소그룹 활성화 교인의 제자화 운동이 교회성장의 밑거름이란 진리를 터득한 것이다. 그가 재임했던 예장총회 제100회기의 중요 결의안을 보면, ① 총회 감독권 강화를 위해 규칙 제3장 8조 신설을 보완하고 산하기관 정관에 조항을 삽입토록 하다. ② 총회헌법,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은 노회에 수의하기로 하고 정치와 권징조례를 한 해 더 연구하기로 하다. ③ 상설위원회로 총회정책연구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 교단연합교류위원회, 통일준비위원회, 세계교회교류협력위원회를 설치하다. ④ 교단을 탈퇴한 목사나 교회가 재가입할 경우 소속되었던 노회로만 가입할 수 있다(제100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이승희, 김창수편 예장총회 출판부 서울 p.43 참조).박무용 목사는 2015년 9월 14일부터 18일까지 대구 반야월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00회 총회에서 영광스러운 총회장에 선출되었고, 그는 1년간 대과없이 총회장 직임을 완수했다. 박무용 목사는 사모 안이자와 슬하에 2남의 자녀가 그의 뒤를 이어 믿음을 대를 이어가고 있다.<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장 열전은 97. 제100회 총회장을 끝으로 마감한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12-07
  • 96. 제98회 총회장 안명환(安明煥) 목사
    충남 태안 출생안명환(安明煥 1945.9.9~) 목사는 충청남도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 710번지에서 부친 안상각 장로와 모친 정화영 권사 사이 3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부모님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신앙으로 성장했다. 그는 어린 시절을 어촌에서 태어난 덕택으로 앞이 훤히 트인 드넓은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여러 형제들과 함께 어울려 때로는 모래사장에서 청소년들의 푸른 꿈을 꾸며 아무탈 없이 평탄하게 잘 자랐다. 명환 소년은 부친이 염전을 운영한 관계로 유여한 생활 속에서 배고픔을 모르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학교생활과 교회생활을 즐겁게 감내하며 성장한 행운의 소년이었다.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리어 주일마다 예배당엘 다녔고 초등학교를 고향에서 마치고, 아버지께서 아들의 먼 장래를 위하여 일찍부터 기독교에 입신 개명하였기에 아들 명환의 장래를 위하여 아들을 서울에 있는 기독교 명문사학의 하나인 양정중고등학교로 유학을 시켰다. 당시로써는 아버지 안 장로가 염전을 경영하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뒷받침 할 수 있었고, 아버지는 교계뿐만 아니라 소원면 내에서도 유지로(지도자) 통하고 있었다. 명환 군은 집 가까이 있는 무교동성결교회(현 중앙성결교회)에 나가고 있어서 1959년 황성택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고 객지에 나왔어도 교회라는 정신적인 울타리가 있어 외로운 줄 모르고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건국대학교에 진학, 학교에 다니던 중 군소집 영장이 나와 대한민국 공군에 지원하여 3년을 근무한 후 공군 의무하사로 1969년 제대 후 대학에 복학, 1971년 대학을 졸업 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행정학을 전공 석사과정(M.A)을 마쳤다. 그 후 신학을 해야겠다는 소명은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해서인지 주위의 권고와 자신의 결단으로 서울에 있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에서 1984년 39세의 늦깍이로 신학교를 마치고 수원 세류동에서 가족들과 몇 사람의 성도들이 모여 첫 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수원 명성교회가 설립되었다. 대학원서 행정학 전공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교회 개척총회 내 각 기관서 두루 봉사WCC 반대 설교문 작성 전국교회에 배포선교단체 ‘인터콥’과 일체의 교류 단절 결의 졸업하던 1984년 10월 황해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았고, 이듬해 1985년 10월 9일 황해노회에서 목사로 장립을 받았다. 그는 명성교회(明星敎會) 개척 시무 후 한번도 타교회에서 목회 한 적이 없는 오직 명성교회 한 교회만을 위해 목회사역에 심혈을 기울였고, 수원지역 복음화가 곧 대한민국의 복음화요, 통일 이후의 통일된 조국 복음화요, 이것이 세계 복음화로 이어진다는 비젼을 품고 목회에만 전력을 다한 결과에 의하면 교회설립 만 10년만에 전체교세가 총 교인수 1,060명(학생 460명, 장년 600명) 중형교회로 급성장하였다(1995년 예장총회 설립 80주년 기념 사진명감 제4권 p.891 참조). 1995년엔 수원기독교문화원 이사장으로, 1998년엔 사단법인 청소년상담마을 이사를 시작으로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2000년엔 총회 순교자 기념사업부장으로, 2001년엔 황해노회 노회장으로, 2002년엔 총회 세계선교회(GMS) 이사회 서기로 피선되어 2006년까지 봉사했으며, 같은 해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충청도협의회 부회장, 2004년 황해노회의 노회장으로 2차로 피선되었고, 2005년엔 총회 남북한교회 교류협력위원회 실무부회장, 2006년 총회교정 선교위원회 위원장, 2006년 세계선교회 부이사장, 2010년 서북지역노회 협의회 대표회장, 2011년 총회 정치부 부장, 같은해 GMS 미주지역 특수선교위원회 위원장, 2012년 총신대학교 재단이사회 부이사장으로 현재까지 섬기고 있다. 그리고 2012년 9월 17일 예장총회 제97회 부총회장으로 피선되어 2013년 9월 23일부터 27일까지 라비돌 신텍스컨벤션(경기 화성시)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8회 총회에서 영광스러운 교단의 수장의 자리인 총회장에 당선되었다.그의 총회장 취임 일성이 ‘화합하며 교단회복에 앞장 서겠습니다’였다.(기독신문 2013년 9월 25일자 p.3) 그는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날개가 꺽인 새처럼 힘들어 하지만 우리는 이번 회기를 통해 분명히 화합을 이루며 힘있게 전진하는 교단이 되겠습니다.”라고 한대로 총회를 섬기는 1년 동안 어려운 문제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으나 그의 생김새대로 힘차게 뚜벅뚜벅 1년을 앞만 바라보고 교단을 위해 걸어갔다. 또 그 해 총회 임원회는 부산서 개최되는 WCC 반대 설교문을 작성 배포하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해 12월엔 작은교회 찾기운동의 일환으로 전남 고흥에 있는 국립음성나환자촌을 방문 소외되고 외로움을 달래며 연말을 보내고 있는 소록도를 방문하기도 했다. 지금은 양성환자는 없고 음성환자들만 있는 상황이지만 특수하게 격리되어 있는 약자들을 교회가 돌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상징적인 방문이었지만 한 교단의 지도자로서 소외되고 외로운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 보인 것이었다. 필자가 인터뷰차 2017. 8. 18 그의 만남에서도 “총회장 재임시 최선을 다 한다고 했으나 교단내 여러 지도자들에게 염려를 끼친 일들이 있었다며, 이는 자신의 부덕이었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지도자로써의 책임의식을 엿볼 수 있었고 그의 지도력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선친 안상각 장로가 본 교단 사당동 총신대학교 기숙사 건립시 건축자금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소원면 모항리 염전을 저당해 상당액의 건축기금을 대출받아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는 미담을 기억하면서, 교단과 총신을 위해 부자 간의 섬김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다. 그는 총회장의 중임을 감당하면서도 교단의 지분과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독교텔레비젼·CTS> 공동대표로 봉사했고 본교단 유일의 인재양성 기관인 총신대학교 법인이사장으로, 수원명성교회 원로목사로, 사단법인 행복나라 총재로 대 사회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재임했던 제98회 총회 중요결의안을 몇가지 요약하면, ① 신학부 보고 중, 첫째 인터콥신학노선에 대하여 최바울 선교사와 그가 이끄는 선교단체(인터콥)와는 이후로 일체의 교류를 단절하고 산하 지교회와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고지하며 또한 이미 참여한 교회는 탈퇴하도록 하다. 둘째 베리칩과 666에 관하여 요한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666과 베리칩과 동일한 것으로 연관짓는 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임을 확인하고 666과 베리칩을 연관지어 활동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배격하기로 하다. 셋째, 개역개정판 성경번역 오류에 대한 수정 질의 건은 대한성서공회로 통지하여 수정하도록 촉구하기로 하다. ② 군목부 보고 중, 군목후보생에 대한 조기안수 청원건은 국방부에서 실시하는 군목후보생 시험에 합격한 자에 대해 총회소속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해에 강도사고시 응시자격을 부여하기로 하고, 합격후 봄노회시 군목으로 간주하되 축도권은 임관시 부여하기로 하다. ③ 총회에서 모든 부동산 구입시 전문기관에 의뢰하고 자금계획부터 건축까지 종합적인 평가보고 하여 총회에서 사업계획 승인을 받은 후 시행토록 하다. ④ 총회실행위원회의 정책위원을 각 노회 파송 1인으로 하다. ⑤ 외국시민권자 당회장 허락과 관련하여 소급적용은 불가하며 이후 외국시민권자의 경우는 1년이내 한국국적을 취득하는 조건으로 허락하기로 하다. ⑥ 총회 총대가 아닌 노회원이나 관계자 또는 소속된 사람이 총회석상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지교회에 가서 소란을 피우면 해당 노회에 책임을 물어 총회 총대권을 5년 정지키로 하다. ⑦ 총신 운영이사장, 기독신문 이사장, 사장, GMS 이사장 선출을 절충형(제비뽑기+직선제)으로 하기로 하다. 안명환 목사에게는 사모와 슬하에 3형제가 있는데 장남(중훈)은 목사로 아버지가 개척 설립한 명성교회의 바톤을 이어받아 섬기고 있으며, 둘째 중원은 집사로, 셋째 중환 목사는 기관 목사로 본교단 총회 교육국에서 각각 섬기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11-24
  • 95. 제62회 총회장 이기하(李起夏) 목사
    전북 임실 출생이기하(李起夏 1917.~1979) 목사는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임실군 둔남면은 군 중심지역이다. 둔남 북쪽은 임실군청 소재지 임실읍이고, 서쪽으로는 청웅면, 동쪽으로는 지사면과 산서면으로 연결된 평야지대이다. 먹고 살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은 곳이었으나 평민들의 생활상은 일제하 학정에 시달리던 때라 궁핍과 가난의 시절이어서 의식주 전반에 이르러 말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난 시기 또한 3.1독립운동 거사가 있던 전후의 정치·경제·사회 환경 또한 말이 아니었다.부모들은 아들 기하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일제하 모든 국면이 조선인들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이다보니 기하 소년 역시 앞날이 밝을 수 없었다. 마을 서당에 제대로 다닐 형편도 되지 못했고, 군청 소재지인 임실읍에 있는 소학교에도 마음놓고 다닐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면 그럴 수록 기하 소년에겐 배우는 일에 목말라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기하는 천신만고 끝에 이리에 있는 이리농업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의 꿈은 나라의 피폐하고 있는 농업에 투신, 덴마크 같은 신진농업과 낙농의 꿈을 펼쳐 보고픈 꿈을 지니고 있었다.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기하는 이리농업학교를 졸업 한 후 그의 마음 속에 일제하에서도 조선인들의 계몽사업을 통해 근대화를 꿈꾸면서 조선인들의 정신과 신앙계몽을 위해 헌신했던 지도자 최용신(崔容信 1909~1936)과 같은 민족지도자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최용신은 원래 고향이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있는 감리교 계통의 협성여자신학교 농촌과에 재학하면서 농촌계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리농업학교 졸업 후 신진농업의 꿈꿔최용신과 같은 농촌계몽에 관심, 한때 학교 서무과서 일해김제중앙교회 장로 장립 후 총회신학교 입학군산삼일교회서 목회, 군산노회장 등 교정 참여바울신학교·전북신학교 이사장 역임황예스터의 지도로 농촌운동 이론을 터득하면서 한편 황해도 수안에서 동료 김노득과 함께 3개월 동안 실제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31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농촌운동에 전념하기로 결심, 선교사 밀러(Rev. Miller. E. Hughs 密義斗 1877. 7. 18~1966. 6. 6)의 후원으로 파송단체는 YMCA 소속으로 하여 경기도 화성군 샘골에서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했다.처음에는 야학으로 시작했으나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정식 교사(校舍)를 지어 교육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농촌 어린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교육내용은 문맹(文盲)퇴치를 위한 한글 강습뿐 아니라 산술, 보건 및 농촌생활에 필요한 상식과 기술, 애국심과 자립심을 북돋우는 의식계몽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김활란(金活蘭) 등은 샘골에서의 최용신의 노력을 높이 평가해 여러 방면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최용신은 1934년 일본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로 유학하여 공부하던 중 신병(身炳)으로 귀국, 샘골에서 휴양하면서 농촌계몽운동과 농촌교육을 계속하였으나 지병(장충첩증)의 악화로 사망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22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1, p. 359 참조). 이기하 청년 역시 당시 시대적 여건이 앞뒤가 꽉막힌 절망 외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식민지의 조선사회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이와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파악해서인지 자신의 앞날의 꿈을 주님의 사역으로 심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농업학교를 막상 졸업한 기하에게는 전공과는 다른 금융계로 진출이 이루어졌고, 1944년 해방 직전 그의 나이 27세에 김제여고 서무과 직원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 후에는 서무과장으로 진급이 되어 생활이 안정되는 듯했으나 뜻하지 않은 6.25 전쟁을 맞이하게 된다.이러한 시대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이기하는 신앙생활을 게을지 하지 않은 결과로 6.25 전쟁 발발 1개월 전에 김제중앙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게 되자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친히 목격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전쟁 중에 멀리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 지내다가 전세가 반전되고 사회가 점점 자리를 잡아 가던 무렵 1953년 7월 17일 정전의 소식을 듣게된다. 이를 계기로 지난 날의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서울 수복이 이루어지고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고 휴전과 더불어 그동안 문을 닫았던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전신)가 대구 서문교회에서 개교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대구로 가서 총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얼마 안되어 1953년 7월 휴전과 더불어 정부를 따라 서울남산 신궁터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기하 신학생도 학교와 함께 서울로 상경, 학교와는 거리가 좀 떨어진 마석에 가곡교회를 개척 설립해 목회 실습처로 삼으며 신학을 공부하는데 열정을 다하였다. 드디어 1957년 3월 총회신학교를 별과 6회로 졸업하고 고향 김제노회에서 감격적인 목사장립을 받았다.목사가 된 후 첫 목회지가 연정교회(전북 김제시 연정동 587의 2 소재)였다. 그는 연정교회에서 만 7년동안 복음과 양떼를 위한여 젊음을 볼태웠다. 1964년 군산삼일교회로 임지를 옮겨 16년 간을 성실을 다해 그곳에 목회의 뿌리를 내리고 열정을 다해 목회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교정(敎政) 활동으로는 군산노회장을 비롯 총회 전북대회장 총회인준신학교인 바울신학교 이사장 및 교수를 역임했고, 이어 전북신학교 이사장과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1976년 예장 제61회 총회 부회장으로 피선되었고, 이듬해 1979년 9월 22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사당동에 있는 본 총회신학교의 대강당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62회 총회에서 그의 지도력을 인정받아 교단의 수장의 자리인 총회장에 올랐다.그가 재임했던 예장 제62회 총회의 중요결의안을 요약하면, ① 전국주일학교 교사를 위한 통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다. ② 한동노회를 동서울노회로 명칭 변경을 허락하다. ③ 카나다노회를 조직하기로 하다. ④ 총신교수는 타교단 신학교에 강의함을 금하기로 하다. ⑤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호칭함은 부당하다고 가결하다. ⑥ 성경을 성서라고 호칭하지 않기로 가결하다. ⑦ 미국 나성장로회신학교 설립을 인준하도록 가결하다. ⑧ 고시부원은 총회신학원을 졸업하고 목사된지 10년 이상 된 자로 한다. ⑨ 총회 전도부 산하에 부흥전도단을 두기로 하다(제100회 총회(회의결의)요람, 이승희 김창수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0. p. 26 참조). 이기하 총회장이 남긴 총회적인 큰 사역이 하나있다. 그것은 그의 재임시에 발의 오늘날까지 시행 발전하고 있는 주교교사 통신대학과 성경통신대학의 실현이다. 성경통신대학의 원래 시작은 1917년 소안론(Rev. Swallon William, 1865~1954) 선교사에 의해 평안남도에서 시작된 성경통신과를 개편, 1935년 총회교육부에 귀속시켰고, 1989년 제72회 총회 성경통신대학으로 개편 오늘에 이르렀다. 이 과정을 마치면 안수집사 피택시 노회 장로고시 자격이 주어져 인기가 있다. 신구약 문제집과 일반과목 문제집을 직접 작성 제출해 합격하면 된다. 이 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된 데에는 이기하 총회장의 지도력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다(제101회 총회보고서, 이승희 편, 예장총회 기획행정실 2106, p. 225~227). 이 제도는 총회가 교사와 제직을 위한 평신도훈련 교육과정으로 오늘까지 계속 발전되고 있다.이기하 목사는 62세 수를 누리고 주님나라로 영민하였다. 그에게 여한이 있었다면 조선 농촌의 근대화를 위한 꿈이 시대적인 장애로 접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주님께서는 천국사역을 위해 당신의 종으로 불러 사용했으니 전화위복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11-16
  • 94. 제84회 총회장 김도빈(金道彬) 목사
    전남 정읍 출생김도빈(金道彬 1933.9.14~) 목사는 전라남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정읍은 동쪽으로 임실군과 완주군, 서쪽으로는 부안군과 고창군, 남으로는 순창군과 전남 장성군, 북쪽으로는 김제군과 인접해 있다. 정읍도 대부분 구릉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이 지역 출신 인사들에게 풍기는 인삼 또한 푸근하고 도량이 넓어보인다. 정읍 지역은 미국 남장로교 목포지부 관할이어서 비교적 일찍 복음이 전해졌다. 금강 수로(水路)에 접한 구암교회, 만경강 수로의 송지교회가 전파 중심지가 되었고, 서북부 지역은 부위렴(W.F. Bull 1903~1938)과 하위렴(1904~1909, 1913~1928), 어아력(A.M. Earl 1906~1910), 매요한(J. Mac Eachern 1912~1917), 인돈(W.A. Linton 1931~1938) 등의 선교활동으로 남장로교가 확산되었고, 서남쪽으로는 전위렴(1896~1908), 최의역(1910~1916), 이눌서(1903~1909), 배요한(J.B. Vail 1931~1932)의 선교활동으로 김제, 정읍, 금구, 부안, 고창 등지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도빈 소년이 태어난 1930년대는 이들 선교사들의 활동지역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래도 도빈은 부모님들의 관심과 선교사들의 돌봄이 겹쳐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큰 환란없이 잘 지내는 행운을 누렸다. 당시 젊은이들에겐 희망이 되었던 조선대학교 법정대학에 진학해 법학을 공부하였다. 해방 후 혼란했던 사회를 목격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던 그에게 법으로 정의사회를 이루고 신생국이 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큰 꿈을 꾸고 있었으나, 광복이 되었으나 해방공간 3년을 지나며 그가 가야할 길과 방향에 큰 회의를 갖게 되고, 이어 민족의 비극 6.25 전쟁이 발발, 사회는 혼돈과 무질서에 휩쓸리고 만다. 이러한 때에 사회는 이념과 이데올로기 사상과 자유주의의 대립이 극에 달해 정국이 혼란에 혼란을 더하게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앓이를 하다가 신학을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 갓 설립된 오늘의 총신대학교가 된 장로회신학교(현, 총회신학대학원 전신)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대가인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 문하에서 장차 한국교회와 세계복음화를 실현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슴에 품은 채 열정을 다해 신학과정을 은혜 가운데 마치게 된다. 그는 장로회신학교를 마치고 2년 후 강도사를 거쳐 전남노회에서 목회자로 출발하기 위해 목사장립을 받고, 지금의 정읍성광교회에 부임한 것은 1970년 10월 9일이었다. 그는 정읍성광교회에 부임한 후 오늘까지 한 교회에서만 목회에 전념하는 집념을 보여주었다. 그가 부임한 성광교회는 1946년 10월 10일 정읍제일교회에서 분립해 나온 교회이다. 개척할 당시만 해도 사회혼란이 지속되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정읍제일교회에서 나온 이시문의 사가(당시 정주읍 연지리 338)에서 18명의 교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 출발한 것이 시원이 되어 오늘의 대교회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장로회신학교(현 총신대 전신) 졸업전남노회서 목사안수 받고 정읍성광교회 부임평신도 양성 위해 전서고등성경학교 설립전북신학교 교장·총회 MIT 이사장 역임처음엔 정읍제2교회라는 교회간판을 달고 시작해 이시문 목사에 이어 김홍래 목사가 부임 시무하였다. 그후 제3대 담임목사로 김도빈 목사가 위임목사로 청빙받아 오늘까지 30년 넘게 승리로운 목회를 이어오고 있다. 1995년 현재 정읍성광교회 교세는 전체교인 2,577명(학생 957명, 장년 1620명)에 이르고 있으며, 교회의 포어로 “말씀으로 변화받고 성령으로 권능받자”이며, 교회의 목표로는 “새 성전의 꿈을 실현하자”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내적인 성장 선상에 머물지 않고 밝은 세상으로도 눈을 돌리자는 비전을 제시하고 단독선교사 2명 파송에 이어 협력선교로 8개처, 농어촌교회 34개 교회 지원 등 한걸음 더 나가 교회의 인재양성을 목표로 재정형성을 계획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정주시 변두리에 4,780평의 대지를 확보, 그 위에 단층 450, 연건평 2000평의 현대식 새교회를 신축하기 위하여 설계 중에 있다. 김도빈 목사와 함깨 교회를 섬기는 정읍선교회 당회원들로는 김형국 김관옥 노점수 고재만 김형래, 김인황, 이승룡, 이현이, 이영준, 은퇴장로로는 이태규, 임병련, 김재근, 김천은, 김헌일 등이 함께 야긴과 보아스 같이 믿음의 기둥들이 받치고 있다.한편 당회장 김도빈 목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목회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스스로 자기 계발에도 힘쓰고 있다(총회사진명감, 제3권 배태준 편, 총회사진명감편찬위원회 1995, p.972-973 참조).김도빈 목사는 노회 산하에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전서고등성경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 봉사하기도 하였고, 교단 인준 전북신학교 교장, 총회 목회신학원 강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아울러 전북경찰청 경목회장과 총신대학교 운영이사, 총회MIT 이사장과 현재 Biblical 신학원 부설 목회신학원 강사이기도 하다(한국교회목사총람, 강춘오 편, 교회연합신문 2000 서울 초판 p.61참고).그의 이와같은 헌신과 봉사를 어여삐 여기사 그를 1998년 9월 총회에서는 교단의 부총회장으로 당선이 되었고 이듬해 1999년 9월 28일부터 10월 1일까지 그가 섬기고 있는 정읍성광교회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4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자리인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그가 재임했던 예장 제84회 총회 중요 결의안을 요약하면, ① 헌법수정안을 통과하다. ② 동서울노회 분립(동서울노회·성남노회)을 허락하다. ③ 기독신문 사장, 국장은 총회 총대 및 총회적 부서의 위원이 될 수 없다(제76회 총회결의 재확인). ④ 주일예배 외에 임직식·야외예배는 할 수 없음(제41회 제63회 총회결의 재확인). ⑤ 교단(통합) 교류는 총회 허락없이 할 수 없음(제82회 결의대로 개교회 강단교류는 당회장 책임하에 교류). ⑥ 예수전도협회(대표 이유빈)에 대해 본 총회산하 교회는 관계하지 못한다. ⑦ 열린예배는 금지하기로 하다. ⑧ 신 칭호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당하다. ⑨ 기독교장례는 매장을 원칙으로 하되 매장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화장도 가능하다(제100회 총회회의결의 및 요람, 이승희 김찬주 편, 예장총회 2016 p.34 참조).마지막으로 김도빈 목사의 설교 한 편을 통해 그의 목회관과 목회철학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총회 역대총회장의 증언에 실려있는 설교 “겨레여 하나 되자”(겔 37:15-23)와 “오늘의 교회변화”(요한 2:1-11)에 보면, 겨레여 하나 되자에 2006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 공동선언문을 서문에 언급한 후, 첫째 화해시대를 잘 수용하자. 둘째 7000만 민족이 단합하자. 셋째 하나님의 주권으로 통일된다라는 소제들을 나열하고서 우리 모두는 지난 날의 쓰라린 역사를 간직하면서 오늘의 화해물결을 마음 열고 수용하자. 그리고 우리 7000만이 방관자가 되지 말고 손에 손잡고 연합하여 평화통일의 주역이 되고 세계선교에 선두에 서는 민족이 되자고 호소하고 있다.오늘의 교회 변화에서는 한국교회 변화가 어디서 올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첫째, 꿈을 가져라. 노아는 악의 종말을 보며 방주를 지었고, 아브라함은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확신을 가졌고, 바울은 세계복음화를 꿈꾸었다. 둘째, 말씀에 순종하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데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 외에는 없다. 셋째 성결에 힘쓰자. 물이 포도주가 되는데는 깨끗한 한 마디가 필요했듯이 오늘 우리 신자들도 자신을 성결케 해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 기독교는 130년의 역사로 천년의 불교를 앞지르고 200년의 천주교를 앞섰지만 윤리적 도덕적으로 뒤지고 있다. 성도들의 변화와 회개없이는 절대로 교회가 사회의 등불이 될 수 없고, 윤리가 바로 회복되기 전에는 참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개혁주의적이고 성경적이며 복음주의적이며 신적 우위의 목회철학이 배여있는 설교라 생각된다.김도빈 목사는 오정희 사모와 슬하에 2남2녀가 부모들의 신앙을 이어 내일의 한국교회 일꾼으로 세움받아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기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11-03
  • 93. 제66회 총회장 최성원(崔聖園) 목사
    전북 김제 출신최성원(崔聖園 1926.7.21~1985.8.10) 목사는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에서 최기남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모들이 일찍 예수교를 믿었기에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1927년 10월 유아세례를 받았다. 고사리란 곳은 바닷가에 인접한 자그만한 어촌이라 생활이 어려웠다. 제대로 정규교육을 받을 형편이 못되었다. 그는 부모가 신앙인이라 개명된 문명을 일찌기 접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행운이었다. 집에서 부모들을 도우며 살던 성원 소년은 고향에서 꽤나 먼 전주에 있는 선교사들이 운영하고 있는 전주고등성경학교에 입학, 새로운 영적 세계와 새로운 세계에 눈이 띄기 시작하였고, 성경을 배우며 미래를 꿈꾸는 계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한적한 어촌 집 앞에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성장해서인지 마음과 생각은 넓었다. 1945년 8월 15일 갑자기 닥친 광복을 맞이해 혼란한 사회상을 목격하며 한때는 낙심한 때도 있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서울에서 개교된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있는 장로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전신)에 들어가 한국교회와 조국의 미래를 가슴에 품고 열심히 공부하고 1949년 장로회신학교 제2회 졸업생이 되었다. 함께 졸업한 동기들 중에는 눈에 띄는 한국교회 기라성같은 지도자들이 보인다. 김삼대 배수환 원승록 이성헌 조동진 한승직 한완석 김복출 김인실 박병덕 등이다(김제노회 반세기, 김요나 저, 김제노회 역사편찬위원회 2002 p.738~739, 한국기독교사 총람 이찬영 편, 소망사 1994 p.951~952 참조). 최성원은 신학교를 마치고 1953년 9월 17일 휴전 직후 김제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은 후 1년만에 목사안수를 받고 본격적인 목회사역에 진출하게 된다.그는 목회를 하면서 미래의 한국교회 발전을 위해 자신의 부족을 느끼고 자기 계발에 눈을 떴다. 그 일환으로 같은 지방에 있는 국립 전북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진학 이수하였고, 다시 총신대학교 병설 하기대학과 동기대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의 시무교회로는 봉동 서두교회를 비롯, 군산구삼교회와 여수제일교회, 후에 전주서문교회에 부임했다. 최성원 목사가 서문교회에 부임해 목회하던 중 예기치 못한 교회 분규가 생겨 자기를 지지하던 교인들과 함께 서문교회에서 나와 오늘의 전주제일교회를 설립하여 1985년 그가 주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봉직하였다.이와함께 그의 교단 내의 봉사한 이력을 살펴보면 순천노회 노회장을 역임했고, 군산에 있는 영명중·고등학교 이사장과 교장을 역임하였다. 1972년 9월 예장총회 회록서기에, 1975년 8월엔 총회서기에 당선되어 봉사하였고, 전주노회장 및 동전주노회장과 전주에 있는 총회 인준신학교인 바울신학교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봉사를 하던 중, 1981년 9월 24일부터 28일까지 대전중앙교회(이영수 목사 시무)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66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首長)자리인 총회장에 당선되었다(한국기독교대사전, 박용규 편, 성은출판사 1978 p.831참조). 전주고등성경학교와 장로회신학교 졸업김제노회서 강도사 인허와 목사 안수전주서문교회 시무 중 전주제일교회 개척총회 회록서기 및 총회 서기 봉사교단 1만 교회운동 적극 추진그가 총회장이 되던 해 11월 추수감사절 메세지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일별해 보면, 날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여건에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할 막중한 의무와 축복이 있다고 전제하고서, “지난 한 해동안 이 나라를 축복하시고 사회적 안전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특히 총회에 내려주신 은혜를 감사했고, 총회회관 건립에 전심전력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또 전국교회는 이 일에 힘써 줄것을 당부했다. 다음으로는 민족복음화를 위한 일과 1만교회 운동에 전국교회가 협력할 것과 이 일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추수감사절이 선교의 절기가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며 해외에 나가있는 30명이 넘는 선교사들을 적극 기도와 물질로 지원해 줄 것을 강조했다(기독신문 1981년 11월 14일 p.1 감사절 메세지 참조). 최성원 총회장은 그 해 12월 성탄절 메세지에서는 우리는 성탄절을 맞아 자신을 조용히 반성하며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아 보아야겠다고 했으며, 우리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살지 않았는지를 반성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첫째,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아름다운 일들이 있어야겠고, 우리는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형제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고, 서로가 어떤 영문이었던지 비방하고 규탄해 온 것을 회개하고 서로 용서해야겠다. 둘째, 이웃의 형제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는 일들이 있어야겠다. 사랑의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야 하겠다. 셋째, 이러한 신앙의 기초 위에 교회의 성장발판을 놓아야 하겠다. 교회가 성장해야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교회와 함께 성장해 가야 한다.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성장해 가야 한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뜻깊은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교회와 가정 그리고 사회도 그의 뜻에 따라 성장하게 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이 성탄절 메세지 속에 최성원 목사의 신앙관과 목회철학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기독신문 1981년 12월 19일 p.1 참조). 그가 총회장에 당선돼 취임사를 발표한 것을 보면 더욱 그의 목회관과 총회방향에 대해 엿볼 수 있다. 그는 먼저 일하는 총회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전제한 후, 12가지의 총회 지향점을 발표했다. 총회가 6년 전부터 실시해 오고 있는 1만교회운동 지속과 외지선교사업, 총회센터(회관) 완공, 개혁신학의 재확인, 교역자 은급제도 실시 등에 전력을 다할 것을 다짐했으며, 전국교회의 협력을 당부하였다(기독신보 1981년 10월 3일 p.1. 취임사 참조). 그가 재임했던 제66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요약하면, ① 신조 2항 중 ‘자연히’를 ‘스스로’로 수정하기로 하고 각 노회에 수의하기로 하다. ② 총회 서부노회와 미주 서부노회가 경영하는 두 신학교를 통합하여 미주대회(美州大會) 직영 신학교로 운영하기로 하다. ③ 박성만 목사(김천제일교회)를 총회 제5대 총무로 선임하기로 가결하다. ④ 총회산하 전국남전도회 규칙을 인준하다.최성원 목사는 1985년 8월 10일 자택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굴곡 많았던 한국근세사를 살면서도 신앙의 지조를 저버리지 않고 올곧은 삶을 승리롭게 마감하고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10-26
  • 92. 제99회 총회장 백남선(白南善) 목사
    전남 고흥 출신백남선(白南善 1947. 2. 5-) 목사는 전남 고흥군 과역면 효덕리에서 선친 백형만과 정선례 사이에 3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다. 고흥은 서해안에 접한 섬 지방이어서 당시 8.15광복이 된지 오래지 않아 시국은 어수선했으나 북쪽을 제외한 동남서쪽은 바다에 접해 있어 여러 종류의 해산물이 풍부하여 부모 슬하에서 여러 형제들과 함께 먹거리 걱정은 비교적 타지역보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 순탄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었다. 그가 태어난 효덕리는 바다와 가까워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언제 평화로운 세상이 돌아 올지 몰랐지만 그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호남지방은 선교사 공의회 시절(1893-1900)에 선교담당 구역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맡았다. 이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도서(섬) 지역이 많아 선교사들의 활동이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난관을 무릎쓰고 육지에서는 말을 타고 섬 지방에는 배를 타고 수로(水路)를 개척해 들어가 열심으로 선교에 임하였다. 군산과 남원 김제에 이어 고흥 땅에도 선교사들에 의해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기록상으로 고흥땅에 제일 먼저 설립된 교회는 1907년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에 세워진 신흥리교회, 1908년에 같은면 신평리에 세워진 명천교회(오석주), 1915년 고흥군 포두면 진두리에 세워진 길두교회(유천석), 1917년 도양면 관리의 도양중앙교회(이형술), 1921년 같은면 당선리의 도화교회(지익풍), 이듬해(1922) 영암면 남열리 남열교회(보이열 선교사), 1924년 오양읍 봉암리 대봉교회(임찬호), 1925년 도덕면 가야리 가야교회(박병학), 1927년 포두면 송산리 송산교회(황하윤), 1930년 과역면 과역리 과열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남선 소년은 부모를 따라 어린 시절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면소재지에 있는 과덕교회에서 성경을 배우며 지도자들을 통해 동화 이야기도 들으며 교역자들의 설교를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재미있게 들으며 신앙을 키워 나갔다. 학교에 입학할 나이에 이르자 효덕국민학교와 여항중학교, 순성고등학교로 진학 중등교육을 탈없이 이수할 수 있어 해방 후 혼란한 틈바구니 속에서도 이렇게 무난하게 마음놓고 기초실력을 다질 수 있었으니,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였고 다음으론 부모님의 교육열 덕분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부모들을 도와 생업의 전선으로 몰리는 친구들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는 대학을 마치자 바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으로 진학, 3년의 신학교육을 이수하고 1979년 2월 졸업하였다.졸업 후 광주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고 이듬해에 목사장립을 받았다. 1984년 지역사회 복음화란 큰 뜻을 품고 광주 화정3동 159번지에서 미문교회를 개척 오늘의 대교회로 성장시키는데 주역을 감당하고 있고, 그의 목회철학은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칼빈주의의 5대 교리의 기초 위에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을 강조하며 실천강령으로 선교와 교육을 지향하며 교인들을 제자화 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광주 화정동에 미문교회 개척총회 규칙부장과 교육부장 등 두루 거쳐광주경찰청 발전위원 등 경찰선교에 정성 쏟아“한국기독교총연합회 탈퇴” 결의그는 교회를 섬기면서 노회와 총회, 나아가서는 대사회적으로 주어지는 임무도 마다하지 않고 힘 닿는대로 적극 참여 봉사하였다. 과불급이란 말이 있듯이 지나친 욕심을 억제하며 주어지고 맡겨지는 일에 대하여서는 노회 일이나 총회적인 봉사와 대사회적인 이웃 봉사에도 최선을 다 할려고 노력한다. 그는 자신의 자질을 스스로 갈고 닦고자 1995년 5월엔 미국에 있는 휴스턴(Huston) 신학대학원 M.Div 과정을 마쳤고, 2011년 6월 뉴욕에 있는 비브리칼(Biblical)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과정(D.Min)을 이수하였다. 그리고 2014년에 목회와 교정(敎政)에 이받이했다고 미국 개혁신학원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받기도 했다. 총회적으로는 1992년에 총회 규칙부장으로, 2004년에 총회교육부장, 2012년엔 총회 서기로 선출되어 봉사했고, 2012년엔 총신대학교 재단이사로 봉사했고, 2014년 9월 22일부터 26일까지 광주게자씨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9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대외적 봉사로는 총회장을 역임한 이듬해 2015년 한국장로교총연합회 회장, 2001년엔 호남협의회 회장과 2004년엔 광주서부경찰서 경목부장, 2010년엔 광주시 초교파 교단협의회 회장, 2010년 이후 현재까지 광주광역시 경찰청 발전위원으로 경찰선교에 힘을 쏟고 있다. 2017년 9월 현재 본교단 산하에 있는 <예장출판사> 대표이사로 문화사역에도 봉사하며 미문교회 성장과 부흥에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 있다(백남선 목사 이력서 2017, 8. 30. p.1 참조).그가 재임했던 예장 제99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총회 기구개혁 혁신위원회를 가동하기로 하다. ② 신앙과 직제일치협의회 운동에 대하여는 본교단의 신학사상과 맞지 않음으로 반대입장을 발표하다. ③ 각종 목적 주일을 <…날로 변경하여 사용하기로 하다. ④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탈퇴하기로 가결하다. ⑤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영세(領洗)를 인정하지 않기로 가결하다(제101회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 서현수 김창수 편, 예장총회 2017. p.42).끝으로 백남선 목사의 신앙과 신학 그의 목회관을 엿볼 수 있는 설교 한 편을 살펴보므로 백남선 목사의 속마음을 헤아려 보고자 한다.성경본문 구약성경 사무엘상 26장 1절부터 12절, 설교제목 ‘도우시는 하나님’이란 제하에 1.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도우시는가. 1) 주님과 함께 하는 자를 도우십니다. 6절에 다윗이 아히멜렉과 아비새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울의 진지로 가는데 누가 나와 함께 가겠느냐? 큰 일 날 소리입니다. 삼천명 특공대를 데리고 다윗을 잡겠다고 하는데 그 소굴로 다윗이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함께 가서 죽으면 죽으리라 그런 각오 없었으면 다윗 따라 나서지 못합니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다윗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래서 그 일로 아히멜렉은 영원히 성경에서 없어져 버렸지만 아비새는 계속 성경에 나옵니다. 다윗이 정권을 잡았을 때 이 아비새는 장군이 되고, 다윗의 군대 장관이 되어 복되게 살았습니다. 2) 영적인 줄에 선 자를 도우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십 사람들은 줄을 잘못 섰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려 떠나셨는데 십 사람들은 사울한테 붙어가지고 또 다윗을 고발합니다. 훗날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십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성도도 영적으로 줄을 잘서야 합니다. 망하는 사울 왕에게 십 사람들이 붙듯시, 망하는 고라에게 유명한 250명이 붙듯이, 오늘 교회 안에도 마귀 짓 하는 데도 거기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어떻게 도우시는가. 3절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보고 들어옴을 알고 사울이 뒤따라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깨달음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뒤따라 오는 것을 몰랐다면 다윗은 죽습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음으로 사는 자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9장 39절에 보면 노아 때 홍수가 나서 다 멸망하였는데 그 때까지도 깨닫지 못하다가 다 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오실 때도 바로 그런다 하였습니다. 말세가 되면 깨닫지를 못하는 겁니다. 시 편 49: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깨닫는 게 참 중요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깨닫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복입니다. 설교를 듣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의 자세가 중요하듯이 설교 듣는 사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시편 42:1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그래 세우신 목사님을 통해서 나에게 내 가정에 주신 말씀 한 말씀도 놓지지 않고 들어야 하겠다 그런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배생활, 기도생활, 헌신생활, 봉사생활 더 잘해야지 하는 깨닫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설교는 장로교 후예들의 공동적인 신앙관을 엿볼 수 있는 모점적인 메세지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여겨진다.그의 슬하엔 2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백성철은 ㅁ고사가 되어 목포 사랑의교회에서, 둘째는 선교사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10-13
  • 91. 제72회 총회장 김길현(金吉鉉) 목사
    전남 무안 출신김길현(金吉鉉 1926.1.19~2008.2.6) 목사는 전라남도 무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920년대는 조선이 일제 식민지였다. 무안은 동으로 영산강이 접해 나주와 영광으로 통하고, 서쪽으로는 신안군의 여러 섬과 접해 있으며, 남으로는 목포시, 북쪽으로는 함평에 접해있다. 무안군은 높이 400m 이상의 산지는 없고 야트막한 산과 낮은 구릉지와 평지로 형성된 전형적인 농지로 이루어져 있고 한반도 남서쪽 해안을 끼고 있어서인지 온화한 해양성 기후여서인지 농사짓기에 아주 적합한 지역이다. 김길현 소년 역시 이와같은 자연환경에서 성장해서인지 성품이 매우 온화하고 따뜻한 심성이다. 그가 태어난 조선의 정치와 경제적인 현실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불안이 가득한 시기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인근 나주와 함평 목포와 군산에 미국남장로교 선교부가 설치되었고, 이들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무안에도 이르러 기독교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 소년 길현도 비록 시골 벽지에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선교사들로부터 전해받은 복음진리를 깨닫게 되자 좀더 배워야겠다는 자의식이 싹트게 되었고 교회에서나마 사경회 등을 통하여 기독교의 진수를 깨닫게 되자 주저하지 않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는 일찌기 서당에 다니는 친구들 어깨너머로 듣고 배운 한학의 초보적인 실력은 갖추고 있었고 이를 옆에서 지켜본 교회 지도자들이 길현 소년에게 성경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하게 된다. 그는 전남노회에서 직영하고 있는 성경학교에 입학해 신·구약 성경공부에 전념하게 되었고 성경학교에서 성경을 배우며 전도자의 사명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 있는 총회가 운영하고 있는 장로회신학교(현 총신대신대원 전신)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 사이 조국은 8.15 광복을 거치고 1950년 6.26 전란을 겪기도 했지만, 김길현은 용케도 살아 남았고 신학교를 마치고 강도사를 거쳐 전남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게되었다. 그때가 6.25전쟁의 포성이 멈춘 이듬해 1954년 5월 8일이었다. 성경학교 졸업 후 장로회신학교 입학광주 백운동에 ‘대성교회’ 설립광주 숭일학교 이사장·총회신학교 이사 역임지도자의 언행일치 강조겉모습은 시골 노인 같았으나 말씀엔 위엄 있어그 사이 몇 교회에서 전도사를 거쳐 강도사 인허를 받았으며 1965년 6월 31일 고향이나 다를바 없는 광주시 서구 백운동 380-1번지(이성섭 장로 자택)에서 교우 30여명과 함께 첫 개척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광주 대성교회가 출발하였다. 개척 멤버들의 끊임없는 기도와 물질적인 헌신과 협력으로 드디어 1967년 5월 13일 50평의 신축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고, 1968년 4월 15일 전남노회로부터 교회이름을 ‘대성교회’로 허락받기에 이른다. 교회는 김목사와 온 성도들의 열심있는 충성으로 1978년 1월 17일 광주시 서구 백운1동 380-1번지 현 위치에 연건평 350평의 아담한 새 건물을 마련해 1,600여 교인들이 회집하는 중형교회로 성장하였다.아울러 해외선교에도 눈을 돌려 1969년부터 구 소련방이었던 러시아에 메시야신학교(Messiah Seminary)를 설립하였으며(이사장 김길현 목사), 중국에도 선교사를 파송 선교에 주력하고 있으며, 국내적으로도 미자립교회 및 개척교회 17처를 지원하고 있다.김길현 목사는 대외적인 활동과 봉사에도 소흘히 하지 않았다. 그가 속해있는 전남노회 노회장을 비롯 지역에 있는 광주 숭일학교 이사장으로, 총신대학교 이사를 역임하기도 하고, 총회인준신학교인 광주신학교 교장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부총회장(1986년 9월)을 역임하였으며, 드디어 1987년 9월 22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신림동교회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2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의 자리인 총회장에 선출됨으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목회경력과 원만한 성품으로 교단을 이끌어 갈 지도자로 인정받아 총회뿐만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훌륭한 리더쉽을 발휘, 교단의 위상을 높였다.그가 재임했던 제72회 총회 중요 결의안을 요약하면, ① 총회인준 지방신학교 신학부 3년제를 1988학년도부터 4년제로 학제를 개편하기로 하다. ② 경기도 과천지역은 중·경기노회로 편입하기로 하다. ③ 노회 분립(중부산, 남부산, 동부산)을 허락하다. ④ 전도목사도 임시목사에 준하여 노회임원이 될 수 있다. ⑤ 라틴 아메리카 장로교신학대학과 브라질선교회 설립건은 인준하기로 하다.(제100회총회 회의결의 및 이승희 김창수 편, 예장총회 2016 p.29 참조).광주 대성교회의 1995년말 현재의 교세는 교인 총수 3,200명(학생 670명, 장년 1,530)으로 성장하고 있다. 대성교회는 광주지역 복음화를 뛰어넘어 세계를 품고 선교에 매진하고 있는 교단의 자랑스러운 교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생애 말기에 이르러 교회분쟁에 휘말려 그는 새로 갈라나간 광주하영교회에서 목회를 마감하였다. 그가 재임했던 72회기였던 교단 기관지인 기독신보(1987. 10. 3 토 p.1)에 실린 총회장 취임사를 보면 교단장으로서 총회와 산하교회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돌이켜보면 때로는 어려운 일도 많았습니다. 신신학 문제로 신앙적인 아품이 컸고 세계적으로 몰아닥친 W.C.C 여파로 말미암아 분열의 상처를 입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앙과 신학이 같은 우리끼리도 인맥과 지방색으로 인한 반목때문에 사분오열의 쓰라림을 맛 보았습니다. 이때마다 건전한 신학과 훌륭한 신앙을 지닌 선배님들의 투쟁의 공로는 오늘까지 총회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음을 퍽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부족한 저도 선배들이 지키고 쌓아온 신앙과 신학과 전통에 추호의 흐트림이 없이 일사각오로 전진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임기중에 행정의 지표로 삼을 3가지는 국내외의 선교사업이 박차를 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총회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지상명령인 전도가 중심이 되어져야 합니다. 둘째는 총회산하 전교회와 주의 종들이 하나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도록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의 일환으로 총회의 재정, 사업 현황을 기독신보에 조금도 의문이 없게 하겠습니다. 셋째로 헤어진 형제들을 영입하여 하나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다같이 믿고 참여하여 돕는 풍토를 조성함으로써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라는 의식을 새롭게 하겠습니다.” 뿐만아니라 그의 목회철학과 교단 운영의 원리 원칙을 피력한 설교 한편이 있는데 그 설교는 성경본문을 마 9:35~38절을 가지고 본교단 지도자 양성기관인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식에서 미래의 일꾼들을 향한 메세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서론에서 어떤이가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보화가 아니라 인물이라고 전제하고서 신학을 마치고 주님의 명에 따라 목회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미래의 지도자들을 향해 다섯 가지의 명제를 제시하며 설교로 천명하였다. 어떤 지도자가 되기 전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떠한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갈파하였다. 여기에 그의 메세지를 요약하면, 첫째 언행일치의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의지가 굳어야 합니다. 셋째, 실패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한 가지 이념에 전념할 것입니다. 다섯째, 작은 일에 충성할 것입니다. 작은 일에 성공하는 자라야 큰 일에도 충성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고 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됩니다. 마태 25장을 보면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 보여주는 광경이 나옵니다. 우편에 있는 저들에게 내가 주릴때 먹여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 입혀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며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작은 일에 관심가지고 충성하며 섬기는 인물이 좋은 인물이요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임을 깨닫을 것을 호소하였다(기독신보 1988년 2월 20일 토 p.4참조). 김길현 목사가 총회장으로서 후배들에게 설교한 것이지만 그의 목회철학과 섬김의 도를 피력한 메시지라 생각된다. 그의 겉모습은 시골 노인같았지만 그가 말씀을 증거할 때는 위엄과 사랑이 깃들어온 교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마지막 병석에서 가족들과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로운 모습으로 2008년 2월 6일 82세를 누리고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예장총회는 그의 장례식을 총회의 예를 다해 총회장(葬)으로 모셨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9-29
  • 90. 제81회 총회장 김준규(金俊圭) 목사
    충북 청주 출신김준규(金俊圭, 1936. 5. 5~) 목사는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다. 청주는 충북의 서부중앙에 위치한 도시로 도청 소재지이며, 한반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옛부터 영남과 호남 선비들이 한양에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한반도의 중원(中原) 역할을 감당해 온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도시 역할을 하고 있어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그가 태어난 1930년대는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난 후로 세계적으로도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시기인지라 교육이나 생업이 열악한 처지여서 앞날을 예견할 수 없고, 자라나고 있는 청소년들에겐 정말 희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기인지라 준규 소년 역시 부모님 밑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고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불운한 시대의 아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준규 소년이 태어나 성장한 청원군 지역에도 일찌기 기독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당도하였다. 주후 1904(甲辰年) 합동공의회 시절(회장 王吉志 선교사)에 이곳 청주지역에 벌써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에 보면, “淸州邑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監理派 宣敎師 徐元甫가 當地에 來하야 傳道함으로 千行均과 女人 金나오미가 밋엇고 至是하야 長老派 宣敎師 閔老雅와 長老 金興京이 當地에 來하야 主의 福音을 協力傳道한 結果로 有望한 靑年中 金源培 方興根 李英均 金在晧 李範後 等이 歸主信敎後로 本邑 南門內에 禮拜堂을 設置하니 敎會가 成立되야 漱次興旺하니라”고 했고, 이 교회가 얼마 안되어 “淸州邑敎會가 漸漱發展되야 南女信徒가 五十餘人에 達하고 金源培 臨終時 遺言과 寄附金百圓이 禮拜堂 建築의 動機가 되야 合心出損함으로 同地 舊韓國淸州營將의 官舍基地를 得하야 廣大한 禮拜堂을 奉獻케 되니 該基地란 昔日 大院君 李昰應이 羅馬敎徒를 虐殺時 無事의 寶血을 流케하던 處所니라, 敎育機關으로 男女學校도 設立하니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청주지역의 선교활동이 상당히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朝鮮예수敎長老會 史記 上 1928, 기독교창문사 p.110, 140). 총회신학교 졸업 후 문학석사 받아청주중앙교회 부임 후 은퇴하기까지 시무청주신학교 교수로, 교장으로 임직CTS TV 이사장 역임“목사의 불신결혼 주례 금지” 결의이어서 1907년에 이르러는 당시 청주군 오창면 건지리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淸州郡梧食面 乾地山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勸書 金聖晧와 吳天甫 妻의 傳道로 敎會가 成立하다”(위의 같은 책 p.150~151 참조)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청주에서 유소년 시절과 청년기를 보내면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것은 기독교에 입신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예수를 알게 된 것이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청소년기를 지나며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건국대학교에서 문학사와 문학석사(M.A) 학위를 받고서 총신대학교 본과(현 총신대신학대학원 전신)로 진학,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 밑에서 정통보수신학을 전수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위에 그를 잘 아는 문필가는 그를 가르켜 시인이요 목회자요 설교가로 전형적인 조선선비형이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강단에서도 메모는 가지고 올라갔지만 깔끔하게 복고설교를 잘 했다고 한다. 총회신학교를 졸업한 후엔 고향 청주에 내려와 청주시 주변에 있는 농촌교회를 맡아 사역하던 중 지금의 청주중앙교회의 부름을 받고 목회하기 시작한 날이 1967년 6월 11일 신록이 짙어가는 초여름 본격적인 목회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청주중앙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받고 퇴임하기까지 30년이 넘는 목회사역을 감당하였다. 부임할 당시 청주 중앙교회는 중형교회로 발돋움하기 직전이었다. 70년대에 들어 새마을운동과 산업화 바람으로 인구가 청주시내로 계속 유입되자 교회도 함께 성장해 갈 수 있었다. 부임 이듬해 1968년 4월 23일 위임을 받은 후 그 해 11월 7일 처음으로 신관우 황경우 두 장로 장립과 편봉달 이범철 한정임 민병구 집사 안수식을 필두로 교회의 기초가 다져지기 시작하였고, 1977년 7월 2일 김준규 목사 근속 10주년 기념 및 박창근 장로 근속 20주년, 박용석 장로 근속 13주년 및 최성룡 최영우 조의순 집사 안수식이 있었으며, 교회가 대외적인 사역과 해외선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가 성장함으로 공간이 비좁아 예배당 신축부지로 청주시 사창동 302번지에 919평을 매입, 이듬해 8월 16일 새예배당 신축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1980년 4월 30일 신축예배를 드렸다. 1983년 7월 9일 새성전 입당과 성전봉헌기념임직식을 거행했는데, 조의순 집사 장로장립과 동시에 이봉규 박성길 이영규 김창운 최병락 김형관 손대현 집사 장립식과, 김정순 민광기 권사 취임과, 오학림 국영순 명예권사 추대식을 거행함으로 교회의 구성원들이 점차로 갖추어 가게 되었다. 1987년 7월 13일 비하동 515-16번지의 대지 3731평을 다시 매입, 오늘의 대성전의 꿈을 이루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듬해 10월 10일 온교회가 은혜 가운데 성전기공 감사예배를 드림으로 청주지역 복음화 중앙센터의 꿈을 꾸게 되었고, 노회적으로 지도적인 교회로 우뚝서게 되었다. 그간 담임목사인 김준규 목사는 2005년 7월 2일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대외적으로 총회인준 신학교인 청주신학교 교수로, 교장으로 봉사하며 교단 인재양성에 정성을 기울였다. 김 목사는 꾸준히 자신을 쇄신하며 실력향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 열매로 인도 바라트대학교에서 문학박사(L.D) 학위를 취득해 자기 개발에 힘을 쓰기도 했다. 그를 잘 아는 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성품을 다정다감하면서도 엄격하고 말없는 자기 관리에 철저한 지도자형이라 했다. 총회장 시절엔 기독교 언론기관인 CTS-TV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그의 개인적인 취미생활 중 수석(壽石)과 분재(盆栽)에도 아마추어를 넘어 전문가를 능가할 정도로 식견과 안목을 지니고 있으며, 수중에 지니고 있는 작품 중에는 매우 뛰어난 분재와 수석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이다(2016. 6. 3. 한국교회신문 발행인 여용덕 박사 증언). 김 목사는 남에게 신소리하지 아니하고 자기 일에 충실한 전형적인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춘 지도자이다. 그래서인지 주께서도 그를 어여삐 보셨는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수장(首長)의 자리에 오르게 하셨다. 1996년 9월 17일부터 22일까지 본인이 시무하고 있는 청주중앙교회에서 개최된 예장 제8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된 것이다.그가 재임했던 제81회 총회 주요결의안을 요약해 보면, ① TV 주일예배 방송을 금지키로 하다. ② 미주대회 및 노회와 법적 행정적 관계를 독립키로 하다. ③ 류광수 다락방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관련된 자를 각 노회별로 시벌키로 하다. ④ 개혁합신측과 교직자 연합집회를 허용하기로 하고 신학교 교수 교류도 허용하기로 가결하다. ⑤ 총회주일은 1월 셋째 주일로 지키기로 하다. ⑥ 목사가 불신자 결혼 주례를 할 수 없다(예배모범 12장 2항). ⑦ 지방신학교 이사장과 교장을 겸직할 수 없다.김준규 목사와 사모님의 슬하엔 2남1녀가 있으며, 은퇴 후 청주에서 교단과 교회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일로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9-21
  • 89. 제45회 총회장 고성모(高聖模) 목사
    전북 군산 출신고성모(高聖模, 1887~1972) 목사는 전라북도 군산에서 출생하여 그 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군산은 전라북도 서북부 금강하구에 위치한 우리나라 굴지의 항구도시로 해외로 나가고 드는 서해안의 관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항구이며, 동(東)으로는 옥구군, 서남쪽으로는 미성읍과 옥산면, 북쪽으로는 금강하구를 건너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과 접하고 있다. 장항과 군산 사이에는 현재의 대교가 설립되기 전까지는 배로만 다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전래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일찍이 들어와 여기저기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군산보다 선교사들은 목포와 전주에 이어 광주 순천에도 이미 래한하였고, 군산에 와서 사역한 선교사들은 하위렴(Rev. William B. Harrison) 부부를 비롯, Dysart Julia(1907), J-Dupuy (1938), Earle Plexandia M(1904) 등이 상주했다. 고성모가 태어난 1887년 당시의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상황은 이조 말엽으로 백성들의 교육상황 또한 겨우 서원(書院)이나 향교(鄕校)같은 유림들이 세운 교육기관 밖엔 없어 서민들 자녀가 정상적인 교육혜택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의식주같은 기본적인 문제만 아니라 개인의 호구지책도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 환경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것도 생활에 좀 여유가 있는 집이라야 훈장을 초빙하여 개인교습을 받을 수 있었을뿐, 일반 서민이나 천민들 자녀들에겐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새시대의 물결을 타고 1882년 조미(朝美) 수호조약 이후 조선사회가 개방되기에 이르자 이곳 군산에도 소위 양코배기로 알려진 서구인(선교사)들의 모습을 쉽게 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성모도 조선 외에도 또 다른 대륙이 있고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예수교에 관한 복음의 소식이 군산에도 전해진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연히 서양 선교사들이 전하는 기독교 복음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1928년 총회에서 간행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上 p.72, p.103)에 보면, <沃溝郡 地境里敎會가 設立하다. 先是에 宣敎師 全緯廉과 堂地人 崔興瑞가 協力傳道하야 信者가 稍進함으로 禮拜堂을 新築하얏고 其後 崔興瑞를 長老로 將立하야 堂會를 組職하얏고 金玉汝 高聖模가 長老로 繼續視務하니라>에 이어 <沃溝郡 地境敎會가 최흥서를 장노로 장립하야 당회를 조직하였고 그후 김옥녀씨와 고성모씨가 계속시무하고 있다>고 반복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성모가 일찌기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을 전수받아 선교사들이 그들의 신앙을 인정해 초기 고향 옥구 지경리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것이 틀림없다. 군산 지경리교회 장로 시무 중 장로회신학교 졸업자유주의 신학사조 방어에 앞장선 목사제44회 총회 분열 당시 합동측 합동추진위원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총회에서 총회장 당선전주북문교회 두번 취임 후 목회 은퇴고성모는 전통 양반유교사회에서 탈피 기독교를 통해 신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인 것 같다. 그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평양에 있는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여 제27회 졸업생이 되었다. 이듬해 군산노회에서 목사 장립을 받고 군산노회장을 역임하였고, 전북노회 노회장은 6회나 연임한 교계지도자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1959년 소위 대전중앙교회 제44회 총회에서 예장합동과 예장통합으로 분리될 당시 합동측의 합동추진위원에 선출되어 교단분열의 아픔을 치료하고자 무던히 힘을 썼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선교사를 위시해 한경직, 강신명 목사쪽의 총대들이 연동교회에서 통합총회를 조직해 나가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안타깝게 바라보며 분열의 현장에서 눈물을 삼켜야 했다(총회사진명감 제3권, 총회80주년기념사진명감출판위원회 배태준편 1995, 초판 p.1008~ 1009 참조).이때 고성모 목사는 1960년 9월 22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승동교회에서 모인 속회 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수장의 자리인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당시 총회 총대로는 고신측에서 131명의 총대, 승동측에서 233명의 총대가 참석함으로 승동측이 당연우세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괴롭고 편치 못하였다. 그가 이끌었던 제45회 총회에서 부산과 경남지역을 배경으로 한 고신(高神)측과의 합동문제가 대두되어 잠시나마 통합측의 이탈사태를 위로삼는 격이되어 고성모 목사는 노구를 이끌고 합동에 앞장서서 대업을 성취하고 같은 해(1960년) 12월 13일부터 15일까지 그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던 총회 의장권을 영입한 고신측 지도자 한상동(韓尙東) 목사에게 넘겨주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역사상 가장 짧은 단명의 총회장 역사를 썼다. 그러나 아쉬움은 없었다. 예장통합측이 분리해 나간 상실함을 고신교단을 영입함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합동한지 오래지 않아 고신측 한상동 목사 중심으로 옛 고신측으로 환원함으로 양교단 합동의 명분이 오래가지 못한 것이다. 총회 회의록에 나타나 있는 기록으로 고성모 목사는 1934년 제23회 총회에서 만국주일학교 장년부공과 53면 8행 이하의 기사 중 창세기 저자가 확실치 못하다는 문구(文句)가 확실치 못하다는 사실을 총회에 제의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하는데 지장이 없게 해 달라고 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당시 함경북도 성진중앙교회 김춘배 목사가 기독신보 제977호에 <장로의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란 글에 자유주의신학사상이 나타남을 언급, 바울이 “여자는 조용히 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한 것은 2천년 전에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고 진술한 것이 문제가 되어 총회에서는 연구위원으로 라부열 선교사(1901년), 부위령 선교사(1898년), 염봉남 목사, 윤하영 목사, 박형용 목사에게 1년간 연구케 하고 오늘 총회에 보고토록 하였는데 그 내용(1935년 24회 총회보고)을 요약하면 첫째, 창세기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교역자는 장로회 신조 제1조를 위반되는 자임으로 우리교회의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하다. 둘째,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를 옛날 한 지방교회의 풍속도로 비하하고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임을 지적하고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추어 곡해(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고성모 목사는 총회 총대로써 총회에 침투하고 있는 자유주의신학사조를 방어하는데 처음 공을 세운 총대였고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게 된다.고성모 목사는 군산과 옥구 고향에서 목회하던 중 그의 생애 후반부는 전주북문교회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1955년 1월 1일 부로 전주북문교회 제2대 당회장으로 부임 사역했다. 그가 시무 중 1954년 1월 8일 정읍제일교회에서 김신일 장로가 이명하여 왔고, 그후 타처로 이임하였다가 1960년 10월 1일 다시 청빙되어 북문교회를 섬기었다. 전주북문교회는 고성모 목사(제45회 총회장)에 이어 현 시무목사인 이기창 목사가 제96회 총회장(2011년 9월)이 됨으로 한 교회에서 두 명의 총회장을 배출한 교회가 되었다. 고성모 목사가 두 차례나 청빙받아 목회한 전주북문교회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북문교회가 설립된 계기는 6.25전쟁이 발발 3년이 지나고 있던 1953년 1월 2일 전주시 금암로 195번지 최경천씨 자택에서 기장과 막 분열된 직후 박진서 장로를 중심으로 33인의 성도들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 출발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물든 금암교회로부터 아무런 조건없이 탈퇴하여 순수한 성도들의 헌금으로 당시 싯가 4,000원으로 전북동 소재(현, 한진고속터미널 건너편 팔달로변) 가택 한 동을 매입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전주북문교회>란 간판을 달고 시작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역대 교역자로는 장학산 전도사, 정기한 목사, 고성모 목사, 서기선 전도사, 성갑식 목사, 이시문 목사, 강기홍 목사에 이어, 다시 고성모 목사, 김상업 목사 이기창 목사(10대)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교세는 (1995년) 연 예산은 7억, 신도수 2,300명에 이르는 중형교회로 성장하고 있다(총회사진명감 제4권, 예장총회사진연감 편찬위원회편 1995, 서울 초판 p.891참조).고성모 목사가 재임했던 예장 제45회 총회 중요결의안을 보면, ① 신앙노선이 같은 고려파와 합동하기로 하다. ② 예배 끝의 축도는 “있을찌어다”로 일치하게 실시하기로 하다. ③ 고려파와 합동원칙 방안 등을 결의하다. 고성모 목사는 1972년 짧지않은 85세를 일기로 후손들과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9-1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