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Home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실시간뉴스
실시간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기사
-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은석 김의환 박사(1933-2010)
- 전남 장흥 출신... 군목 제대 후 미국 유학 은석 김의환(恩石 金義煥) 박사는 1933년 11월 19일 전라남도 장흥군 대적읍에서 출생했다. 의환이 고향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어머니와 함께 경남 진주로 이사하여 진주고등학교로 진학해 1951년 졸업하고, 1953년 고려신학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여 1957년에 졸업한 후 육군 군목으로?입대하여 2년 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다. 제대 후 미국 커버넌트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했다가, 1960년에 미국 미시간 주 그랜드레피즈에 있는 칼빈신학교(Calvin Seminary)를 졸업하였다. 그 후 1963년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하고 신학석사(Th.M) 학위를 받고, 1966년에 미국 템플대학교(Temple university)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The Korean Church under Japanese Occupation with Special Reference Movement with Presbyterianism>이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미국개혁장로회(CRC) 필라델피아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OMF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일본 선교사로 가고자 하였으나, 당시 일본 정부가 한국인 선교사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1966년 귀국 후 그의 모교인 부산의 고려신학대학의 교수로 가게 되었는데, 정식 발령이 나기 전에 특강을 하는 중에 한 학생이 "전에는 고신측에서 승동측과 합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다시 환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데, 목사님은 역사신학자로서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을 받고, "분열하는 것이 무슨 하나님의 뜻이냐"고 대답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려신학대학으로 갈 수 없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서을 총신대학교의 명신홍 학장이 그를 초청하여 1967년 3월부터 총신대학교 조교수로 가르치기 시작하여 부교수, 정교수로 봉직하다가 1976년 총신대학교를 사임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총신대 교수직 사임하고 미국서 교회개척 당시 그가 총신대학교를 사임한 배경은 안식년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 LA에 갔을 때, 총신대 이사회에서 외국에 가족이 있는 교수들은 3개월 안에 모두 한국으로 이주시키라는 결의가 있었는데, 이 요구에 응할 수 없었던 그는 교수직을 사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에서 나성한인교회를 개척하여 1995년까지 시무했으며, 그 기간 1982년부터는 미국에 국제신학교(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하여 1995년까지 학장을 역임하였고, 1985년에는 미국 개혁신학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초빙교수가 되기도 했다. 1995년 다시 총신대학교 총장으로 부름 받아 1999년까지 총장직을 역임한 후, 1999년부터 2002년까지는 서울 성북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였고, 2002년에 한국 칼빈대학교 제3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2007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1967년 총신대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54년 간 교수로, 목회자로, 총장으로 한국과 미국에서 교회와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해 지사충성을 다하다가, 2010년 5월 주님의 부름을 받아 영면에 들어갔다. 개혁주의 신학을 복음주의와 접목시킨 칼빈주의자 은석 김의환 박사를 흔히 개혁주의 신학자요, 칼빈주의 학자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가 교회사학자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은석은 1982년에 <기독교회사>(성광문화사)를 저술하고, <복음주의 신학과 한국교회>(2004), ,현대신학과 개혁주의 신앙>(2004) 등 여러 편의 교회사와 관련된 책을 썼다.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이인선 박사는 김의환 박사를 가리켜 복음주의적인 개혁신학자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은석이 개혁주의 신학을 복음주의와 접목시키고자 한 것을 일컬어 지적한 것이다.(한국교회를 빛낸 칼빈주의자들, 2020 p.895). 김의환 박사는 칼빈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 위에 교회사가(敎會史家)의 안목으로 자유주의 신학이나, 민중신학, 또는 WCC신학 등을 비판하였다. 진정한 복음주의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따르면서 알미니안주의를 포함하여 개혁주의와 구분된다. 복음주의는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영적 갱신과 선교적 책임감을 일깨우는데 공헌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의 흐름을 정리한 김의환은 먼저 복음주의의 두 가지 과제로 건전한 정통신학의 보수와 발전, 즉 이단과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기독교 진리를 수호하는 책무를 감당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세계 선교전략을 수립하여 선교지도자들을 양성하여 오늘의 상황에 맞는 가장 효과적인 선교를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복음주의 운동의 결실로 ACTS 설립에 역할 김의환 박사는 미국에 유학하던 시절에 미국 교계를 신복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모습을 보았고, 거기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들 신복음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복음주의의 두 가지 중요한 특성을 한국교회에서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첫째로, 이러한 복음주의의 연합된 복음전파 활동에 영향을 받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를 설립하는데 관심을 갖고 참여하였다. 이는 한국에서 복음주의운동이 전개되어 결실을 맺은 가장 중요한 사례이다. ACTS는 1974년 5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개교하였다. 둘째로, 김 박사는 미국에서 신복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던 복음주의신학회(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를 국내에서도 설립코자 하였다. 한국교회가?1960년대에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의 대립 속에서 분열하면서 교단의 벽에 갇혀 있던 상황에서 김 박사는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교류를 끌어내고자 하였다. 미국에서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의 폐쇄성과 현대주의의 탈교회화 현상을 동시에 비판하고,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려는 목적에 동조하는 신학자들의 교류를 촉진하고자 하였다. 한국에서 이러한 시도를 제일 먼저 했던 사람이 바로 김의환이었다. 그는 귀국하여 미국에서 신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되었던 미국의 복음주의신학회를 본받아 한국복음주의신학회를 1971년에 조직히였다. 기록을 보면, "1971년도에 김의환 한철하 오병세 조종남 제씨는 한국복음주의신학회를 창설하고, 한국 내의 신학정립과 해외 학자들과의 신학운동을 다짐한다. 그후 10여년 간 잠시 침체기에 들어가 있었으나, 해외에서 수학하고 귀국한 젊은 학자들끼리 자주 만나 복음주의신학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됨에 따라 당시 회장직을 맡아 보고 있던 한철하 박사가 발전적 해체를 하고 재출발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의환 박사는 한국교회가 교단적 폐쇄성을 극복하고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건전한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복음주의신학회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김의환은 철저한 개혁주의자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과의 신학논쟁 과정에서 가지게 되었던 소극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이며, 생활과 분리된 신앙생활을 하는 반동적인 신학의 부정주의적인 정신 풍토를 극복하고자 했다. 김의환은 예장합동 교단의 경직된 교단적?분위기 속에서도 분명한 교회연합 활동에 대한 원칙을 가지고 활동하며 기여했다. 교회연합 활동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조직과 연합을 우선시 하는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비판하면서 교회연합과 일치에서는 교리적인 순결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교회의 사회참여도 복음주의적 시각 반영 김박사는 이러한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가지고 복음주의적인 선교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이는 김의환 자신이 일본에 선교사로 가고자 했을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교수 사역을 하면서도 선교활동에는 항상 적극적이었다. 그는 1990년대 이전부터 한국교회의 선교적인 사명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그의 교회사적이고 세계사적인 안목에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김 박사는 한국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하여서도 개혁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시각에서 교회사적이며 선교사적인 면에서의 입장임을 엿볼 수 있게 노력하곤 한다. 그는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하여 두 가지 유형을 언급한다. 첫째 유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따르는 탈세계적인 경건주의를 부르짖는다. 이러한 탈세상적 경건주의는 현실도피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기도원 운동과 일반은총을 무시하는 재세례파적인 부흥운동이 난무하게 된다는 것을 경계한다. 둘째 유형은 교회가 현실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유형이다. 한국교회는 일제하에서 민족주의 영향으로 정치참여의 반열에 직접참여하는 형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의식의 보유자는 될 수 있어도 민족주의자는 될 수 없다. 정교분리의 기본정신을 떠나 교회 이름으로 한 정권에 부질없이 관여하여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킨다고 경고한다. 그는 한국교회의 사회참여는 경건주의적이고 부정주의적인 반응과 정치 현실에 대한 직접 참여의 양극단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은 첫째 말씀의 봉사, 둘째 기도의 봉사, 셋째 구제의 봉사라는 교회 원래의 본질을 말한다. 또 그는 교회는 신앙적 문제에 저촉될 때만이 교회의 이름으로 정치영역에 직접 발언할 수 있다는 개혁주의자였다.
-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은석 김의환 박사(1933-2010)
-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명직 목사(1890-1973)
- 서울 출신... 한학에 능통 동양 사상과 기독교 사상의 조화에 관심 이명직(李明稙) 목사는 1890년 12월 3일, 서울에서 한산 이씨 이승태(李承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산 이씨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을 중시조로 삼는 일파로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신(文臣) 양반 가운데 하나이다. 초기 한국기독교의 유명한 인물인 이상재(李商在)도 한산 이씨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명직의 출생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이는 서울 종로구 중학동이라 하고, 또 어떤 연구자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종암리라고 한다. 고양군 숭인면 종암리는 지금의 성북구 종암동이다. 이명직의 조상들은 이곳에서 대대로 살았던 것 같다. 이명직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서당에 다니며 한학(漢學)을 익혔다. 김기삼은 이명직 연구의 글에서 소시에는 한학을 배워 사서삼경은 물론, 통감을 읽어 동양의 역사와 한학 문장에 능통하였다고 말했다. 이 한학 공부는 이명직의 삶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와 동양 사상, 특히 유교를 배타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서로 조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조선의 운명이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명직은 자신이 한편으로는 정치를 공부하고 출세해서 이름을 펼쳐보려는 야망과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등지고 삼림에 들어가서 도승이 되어 보고자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두 가지 중 하나는 성취하리라 생각하였다. 이명직의 집 뒤에는 절이 하나 있었는데, 새벽과 저녁에 들리는 예불 소리와 종소리가 그의 귀에 인상 깊었고, 승복을 입은?승려들이 삭발을 하고 염주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 그에겐 신비감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그는 15세 때부터 장차 도승이 되어 금수강산을 유람하리라 꿈을 꾸기도 했다. 그는 16세 때 자신이 잠간 불교에 귀의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서 선교사들 통해 기독교 만나 그러나 이명직은 어떤 기회에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서 공부를하게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선교사들이 경성의 젊은이들을 교육시킬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원래 선교사들은 조선사회의 하층민을 대상으로 세운 선교활동의 일환이었지만, 이 가운데 젊고 똑똑한 상류층의 사람들도 선교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양반의 자녀들이었기에 낮은 계층이 다니는 교회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선교사들은 양반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모임을 주선했고, 이런 이유로 인해 생겨난 곳이 황성기독교청년회였던 것이다. 이명직이 18세 되었을 때, 그의 마음 속에는 출세의 욕망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의 표어가 있었는데, "이 시대에 나도 남과 같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권하였고, 이것은 이명직의 꿈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1907년 박갑은과 결혼했다. 이것은 유학 전에 아버지가 계획한 소망이었던 것 같다. 결혼 후 1년이 지난 1908년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서울역을 떠나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주일만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일본 동경에 이명직이 도착한 곳은 동경조선연합교회였다. 한국에선 부모의 반대로 마음대로 교회에 다닐 수 없었으나 동경에 와서는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출세를 꿈꾸고 동경에 왔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자신이 신실한 신앙을 갖게 만들었다는 소명을 의식하게 하였다. 동경YMCA에서 김정식 만나 동경성서학원 입학 이명직은 동경의 한인 YMCA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김정식(金政植)을 만나게 된다. 김정식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이상재 이승만 등과 함께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감옥에서 출옥한 후 연동교회에 출석하며 황성YMCA 부총무 일을 맡고 있었다. 당시 연동교회 담임목사 게일이 경성의 YMCA 회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경성YMCA가 동경에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YMCA를 설립하고 김정식을 총무로 파송한 것이었다. 김정식은 많은 조선유학생들을 지도하며 애국심을 심어주었다. 이 시절 당시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던 조만식과 신앙생활을 함께하며 조선독립의 열의를 일깨우기도 했다. 이곳에서 이명직의 신앙생활은?외형적으로는 출중하였다. 주초(酒草)의 금지는 물론, 민속행사 때처럼 백지에 자신의 과오를 적어 불태워 날리기도 했다. 원래 이명직은 일본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려 했다. 당시 많은 유학생들은 법학을 공부해 양명출세를 꿈꾸었다. 대학에 들어갈려고 1년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경성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라왔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사업이 갑자기 실패로 돌아가고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속히 귀국하라는 내용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에 온 이명직은 그래도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도를 찾던 중?동경의 어느 거리에서 구세군의 '가로전도단'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나팔을 불고 찬송을 하며 열심히 전도하는 구세군인들의 전도 광경을 보고 이명직은 자신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럴 때쯤 김정식이 동경성서학원을 소개해 주어 입학하게 되었다. 이 학원은 동양선교회가 세운 성경학교로 미국 시카고의 무디성경학원과 비슷했다. 이 학원에서는 오전엔 성경공부, 오후에는 전도, 저녁에는 전도한 사람들을 모아 집회를 하였다. 그는 동경성서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1911년 이명직은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는 귀국 후 개성전도관의 교역자로 부임하였다. 개성전도관은 동양선교회가 경성의 무교동과 진남포에 이어 세번째 세운 전도관으로 1909년에 문을 열었다. 먼저 사역하고 있는 주임교역자는 강태온이었다. 1912년에는 후배인 이명헌이 개성에 와서 노방전도를 통해 구도자가 된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사역하였다. 이때로부터 이명직은 성결교회의 전도자로 또 지도자로 성장해 같다고 볼 수 있다. 해방정국에서 성결교단 정비... 성결교회 초기 발전사 기록으로 남겨 일제 시대를 지나 동양선교회의 전도관은 교회 수의 증가로 전도관 체제를 탈피하고, 장로교나 감리교처럼 자연 교단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8.15 광복 이후 혼란기를 겪으며 교단이 안정되기도 전에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큰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서울이 수복되자, 교단을 새로이 정비하고 조직 발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이명직 목사는 자연스럽게 성결교단의 중심에 서서 일하게 되고, 교단장의 일로부터 인재양성의 중심이었던 경성신학교를 복원하는데 그 중심 역할을 했다.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는 <이명직과 한국성결교회>라는 저서에서 "이명직은 성결교회 초대 인물의 일원으로 성결교회와 신학교를 키워 놓은 인물이다. 그는 이 교단의 사부요 교부이다. 이 교단이 이만큼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은 그의 공이 절대적 역할을 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성결교회 총회장을 역임한 오영필 목사는 그의 저서 <성결교회 수난사>에서 이명직을 가리켜 "성결교단을 이룩한 성결의 기수요, 남여 교역자를 양성한 유일한 사부"였다고 말했다. 필자는 그가 남긴 많은 글 중 1929년에 성결교회 초기 발전사를 기록한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략사>에 주목한다. 이 글은 성결교회의 초기 역사를 정리한 귀중한 자료이다. 이 저서는 192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사기>가 나온 바로 이듬해에 발간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장로교단에 비교할 수 없는 소규모 교단역사가 출판물로 공간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책 이름이 좀 긴 것 같지만 성결교회를 지원하고 후원하고 있는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를 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성결교회의 역사와 신조 및 개교회들의 실재를 잘 소개하고 있는 매우 귀중한 교단 역사 사료이다. 그 형태를 보면 판형도 책자다운 국판형으로, 내용은 위에서 아래로 즉 세로 쓰기로 되어 있으며, 고어체 한글과 한자가 병기되어 있는 양장본으로 총 198면에 이른다. 여기에는 동양선교회 계통과 신앙개조 및 성결교회의 연혁과 조직, 성서학원 그리고 각 지방교회의 역사 및 교역자와 선교사들을 소개하는데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기할 것은 총 74매의 교회 및 교역자들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어 역사서로써 역사성을 지닌 저서라 하겠다. 성서학자, 교회행정가, 신학교수로서 '교회사가' 이 책의 서문을 쓴 당시 경성신학교의 곽재근 목사는 조선에 전래된 동양선교회의 성결교회가 한 세대도 덜 된 이 때에 이명직 목사에 의해 저술 출판된 성결교회 략사 출판에 대해 "지나간 역사를 정리 못해 안타깝게 생각해 왔는데, 본 교회의 원로 이명직 형이 몇 년 전부터 이 일에 뜻을 두고 재료 수집 및 기타에 전심 노력한 결과 이에 책 한 권을 제작하니 곧 우리가 기대하던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략사>이다. 그 미묘한 춘추필법은 독자로 하여금 심오한 섭리와 놀라우신 축복과 엄위하신 권위를 일목요연하게 하였다"라고 하면서, 책의 출간을 반기웠다. 무엇보다도 이명직이 친히 쓴 서문을 보면 이 책의 간행 의미와 저술의 가치를 엿볼 수 있다. "옛날에 이스라엘 르비딤에서 아말렉으로 더불어 싸워 승전한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책에 기록하여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출 17:14)라고 하셨고,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행하신 일 곧 그 역사를 기록하여 자손에게 전하라 하셨은즉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를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에 우리의 제1 총리 카우만(Charles E. Cowman)과 길보른(Emest A. Kilbourne)으로 말미암아 일으키셨는데, 22년 후 오늘에 앉아 생각하니 하나님의 축복의 현저하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22년 전에 카우만 부부가 가방을 들고 태평양을 건널 때에 이렇게 성공하리라고 믿었겠는가? 그러나 카우만 부부의 믿음의 안중에는 벌써 이러한 환상이 나타나 있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과연 그 믿음과 같이 이루어졌으니 일본, 조선, 중국에 전도자를 양성하는 성서학원이 4곳이요, 성결교회로는 일본에 200여 곳, 조선에 70곳, 중국에 20여 곳, 동양 전체는 그로 말미암아 '순복음'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이적이 아니며, 큰 축복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짐작할 수 없어 그 능력과 그 축복하심을 만분의 일이라도 증거하기 위하여 감히 붓을 들어 본 약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넓고 크신 능력의 역사를 어찌 졸필로 다 나타낼 수 있겠는가 다 나타내지는 못하였다 해도 거룩한 주의 역사에 이즈러짐과 더럽힘이 없으면 다행이라 하겠다..."(같은 책 서문 p.2). 본 필자가 성서학자요, 교회행정가요, 신학교수요, 한 교단의 사부요, 교부로 추앙받는 이명직 박사를 교회사가(敎會史家)로 칭하는 이유는 장로교와 감리교회가 희년을 맞이해서도 겨우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차재명 1928, 창문사)를 출간했는데, 조선에 후반 선교자로 시작한 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가 30년 한 세대가 되기 전(1907-1929)에 교단사(교회사)를 정리해 친히 저술하여 간행했다는 것은 신학자와 행정가로서만 아니라 먼 미래를 바라 볼 줄 아는 사안(史眼)을 가졌다는 점에서 이명직 목사를 한국교회사가의 반열에 올려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명직 목사의 저서가 간행된 후 40년 만에 서울신학대학의 그의 제자 이천영 교수에 의해 서울신학교로서는 최초로 문교부의 교수 저작지원금으로 <한국성결교회사>(1970)가 간행되었다.
-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명직 목사(1890-1973)
-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상규 박사(1950-)
- 경북 영주 출신... "신실한 개혁주의 역사학자" 이상규(李象奎)는 1952년, 경북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에서 아버지 이창(李昌)과 어머니 박귀돌(朴貴乭) 사이에 태어났다. 그때는 6.25 전쟁 중이라 출생신고를 늦게 해 호적상 생일은 1952년 12월 13일로 되어 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 이창은 전쟁 중인 1952년 2월 24일 40세의 나이로 늑막염으로 돌아가셨다. 경북 예천 용문이 고향인 어머니는 17세 때에 남편과 혼인하여 1930년 장남 재영(在榮)을 비롯 10남매를 두었으나 절반은 죽고 5남매만 살아남았다. 상규는 그 중 막내였다.?장남 재영은 1950년 8월 좌익의 난동을 피해 잠시 집을 나갔는데 그 뒤 행방불명 되어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상규는 1964년 2월, 고향의 안정남부국민학교를 마치고, 그해 경북 경산시 압량면에 있는 메노나이트 중학교로 진학하여 그곳에서 기독교적인 교양과 중등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일 이곳에서 자신의 신앙의 기초가 확립되는 시기였다고 피력한 바 있다. 그는 이때 기독교 학술월간지?기독교사상지와 기독교서회가 펴낸 현대신서 시리즈 중 민경배가 쓴 '한국의 기독교회사'란 문고판을 처음 접하고 기독교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부산에 사는 누님 댁에서 잠시 지낼 때, 1970년 4월에 창간된 함석헌의 '씨알의소리'와 1969년 7월 안병무가 창간한 '현존'을 접하고부터 본격적으로 역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고려신학대학?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학부서 강의 시작 1975년 2월, 부산고려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고려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목회학 과정(M.Div)에 이어 신학석사 과정(Th.M)을 마친 후, 학부에서 교양과목과 이론신학 등을 강의하다가 군대에 갔다. 제대 후 1987년 2월, 호주로 유학 길에 올라 호주신학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1990년 3월부터 고신대학교에서 만 36년간 교수로 사역한 후 2018년 2월말에 정년퇴임하였다.(정년퇴임기념논문집 <한국교회와 개혁신학>, 이상규의 '내가 살아온 날들' 2018, p.53 이하). 아신대학교 대학원 박응규 박사는 '이상규 박사의 학문여정에 관한 소고'란 글에서, 이상규 박사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성실하게 연구한, 교회를 위한 교회사가(敎會史家)일 뿐만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에게 교회의 역사를 진솔하게 가르친 '교회의 교사'였다고 평했다. 그는 이상규 박사의 한국교회사 연구에 대한 고찰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이상규는 교회사 연구에 있어서 주제, 인물, 사상별 접근을 통한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분석하였다. 이상규는 이 책에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통합사적인 안목으로 읽어 내고 있다. 그가 통사적인 차원에서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저술하기 보다는 다양한 주제를 중심으로 엮었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역사적 연속성이 내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초대교회를 비롯하여 종교개혁사와 현대교회사 그리고 한국교회사에 이르는 역사의 강줄기를 따라가며 역사의 긴 폭을 헤아리는 안목을 지니고 있으며, 본류는 지류를 형성하고, 지류는 다시 본류로 통합되는 역사의 연속성을 보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다양한 주제별 접근은 지류일 뿐만?아니라, 동시에 본류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접근방식이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해석하며 서술하는 데에도 여실히 반영되어 나타난다. 둘째, 주제, 인물, 사상별 접근을 통한 <해방전후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정리하고 있다. 이 책은 이상규가 스스로 인정했드시 한국교회사 분야로 볼 때, 그의 대표 작품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특히 2012년을 전후하여 한국에서의 장로회 총회조직(1912) 10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학술모임에서 논문을 발표하거나 토론에 참여하면서 장로교의 역사와 신학 혹은 신학전통과 그 유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에 관한 본서를 출판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도 저자의 저술의 특성인 중요한 주제들을 선별하여 연구한 주옥같은 논문들로 구성되었으며, 또한 중요한 인물들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로서 한국교회사 현황?등에 대한 글들이 담겨있다. 셋째, 이상규 교수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는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신학적 토대에서 연구하고 가르쳤고, 그것이 학자로서 그의 신학적 기초이자 그가 속한 고신대학이 지향하는 신학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해 왔으며, 교수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연구와 교육이기에 다른 욕심없이 본업에 충실하고자 했고, 이 일에만 집중하고 살아왔다. 그는 그의 전공학문을 통해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그 길을 올곧게 걸어왔다. 개혁주의가 그의 학문적 기초이자 토대이기도 했지만, 그가 고신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역점을 두었던 바가 개혁주의 사상에 관한 과목을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모든 강의와 연구활동에 있어서 기독교적 기초 혹은 기독교적 가치를 드러낼 때, 기독교대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동료 교수들과 고신대학이 기독교 이념형성에 기초한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는 훗날 <개혁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저서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처음으로 저술한 책이 <한국에서 칼빈연구>란 자료집 성격의 책이었고, 이는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낸 책이었다. "이상규의 기독교 역사관은 '통합사적' 역사관" 이상규의 기독교 역사관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통합적인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규는 교회역사 전반에 걸친 남다른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지금까지 연구와 교육에 전념해 왔다. 이러한 배후에는 그가 즐겨 인용하곤 하는 필립 샤프(Philip Sharp)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역사는 성경 다음으로 중요하며 지혜의 가장 풍요로운 기초이자 가장 확실한 안내자이다." 그의 연구 분야도 어느 특정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사를 중심으로 연구했지만, 모든 교회역사를 다 포함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단순히 한국의 상황과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교회역사의 시각에서 보려는 자세를 견지했으며, 또한 서양교회의 역사도 한국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융합의 자세도 지니고 있다. 그는 초대교회에서 현대교회 그리고 한국교회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의 흐름을 헤아리는 긴 안목을 갖고 있으며, 역사의 연속성을 잘 인식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어느 한 시대의 역사도 그리고 어느 한 나라의 역사도 역사의 큰 강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 모든 역사의 흐름을 통전적으로 보면서 다양한 시대와 주제들에 관한 연구에 전력해 왔다고 보여진다. 이상규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서양교회사를 한국교회사의 눈으로 인식하고, 한국교회사를 서양교회사적인 전통으로 헤아리는 원근법적인 안목을 갖게 되었다. 또 한 나라 교회의 특수성은 보편교회 안에 있고, 보편성은 개별교회의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근거에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서양교회의 눈으로 읽고, 서양교회의 유산은 한국교회의 눈으로 해독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런 입장을 역사연구에 있어서 '통합적인 접근'(Integrative approach to History)이라고 말해 왔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면서도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헤아리고자 노력해 왔다. 이런 비교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은 이 집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 주었고, 흔히 신학적 보수주의자가 빠지기 쉬운 독선의 성(城)에서 다소나마 자유로워 질 수 있었다."(이상규,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 p.4). 대표작, "해방전후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 한 마디로 하면, 그는 개혁신학에 기초하여 교회사 전반에 대한 교회론적 사관과 통합사적 접근을 일관성 있게 적용하여 그의 역사해석과 서술에 독특한 공헌을 해 왔다. 그는 여전히 오늘 우리들에게는 서양교회의 전통에서 한국교회를 헤아리려는 안목이 있어야 하고,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서양교회의 유산을 수용하는 창의적 자세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상규는 한국교회가 당면한 도전을 네 가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첫번째 도전은 이단 문제이다. 과거에는 이단들이 은밀하게 침투하고 은밀하게 활동하였는데, 현대에 와서는 공개적이고 공격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두번째 도전은 이슬람의 활동 전개이다. 현재 국내의 무슬림 수가 21만여 명이지만, 2050년에 이르면 개신교 신자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세번째는 동성애 문제와 동성혼 문제이다. 정치계에서 이를 법제화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교회가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네번째 도전은 한국교회의 세속화 문제러서 한국교회가 각성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는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하며 가르쳐온 학자의 양심에서 우러난 한국교회를 향한 충정어린 충고라 여겨진다. 이상규 박사의 은퇴기념논문집에 이 박사를 격려하며 남긴 교계 인사들의 말을 들어보자. 예장합신 총회장을 역임한 박병식 목사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한 역사신학자"라고 했고, 고신교단 총회장을 역임한 류윤옥 목사는 "은퇴 후가 더욱 더 기대되는 교수"로 평가했다. 또 선한사마리아인 가족 대표 손상률 목사는 이상규의 사람됨을 "종려나무 같이 백향목 같이" 라고 표현했으며, 또 고신측 총회장을 역임한 김상석 목사는 "좋은 스승" 같은 분이라고 했고, 고신대 석좌교수 손봉호 장로는 "신실한 개혁주의 역사학자"라고 평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을 소개하면 (1) 한국교회의 역사적 흐름(1991), (2) 교회개혁사(1997), (3) 교회의 역사(1999), (4) 부산지방 기독교전래사(2001), (5) 한상동과 그의 시대(2006), (6)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2007), (7) 부산지역 기독교회의 선구자들(2012), (8) 해방전후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2015), (9) 한국장로교사(1988) 등이 있다.
-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상규 박사(1950-)
-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두암 박용규 박사(1956-)
- ‘한국기독교회사’(1.2.3권) 방대한 자료로 정리 출간 교계와 학계에 한국교회사에 대한 역사 인식 지평 넓혀 경기 여주군 가남면 출신... 어머니의 신앙 영향 두암 박용규(頭巖 朴容奎)는 1956년 1월 19일,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삼군리에서 부친 박부석과 모친 유내석 사이에 5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전형적인 농사꾼이었다. 어머니는 고향에 있는 삼군교회 권사로 신앙생활을 하였고, 할머니와 외할머니도 삼군교회를 섬겼지만, 부친은 말년에 이르러서야 교회에 출석했다. 두암은 유년 시절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며 교사들이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에 심취하여, 그 때의 이야기들이 지금도 선하게 기억된다고 술회하고 있다(신학지남 2020 여름호 p.9). 1962년 동리에서 2Km 떨어진 면 소재지에 있는 가남국민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5학년 때 신증후군에 걸려 1년 간 휴학한 후 어렵게 졸업하고, 이천읍에 있는 이천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신증후군이 다시 재발하여 1년을 쉰 뒤 겨우?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신증후군은 성균관대학교에 진학 후에도 그를 괴롭혀 학창 시절을 질병과 함께 지냈으나, 이후 하나님께서 건강을 회복해 주셨고, 출석하고 있던 교회의 담임목사의 지도로 1982년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였다. 그는 총신대 신대원을 이수 한 후, 미국?웨스턴에반제리칼신학교(Western Evangelical Seminary)의 장학금으로 해외?유학의 길에 올라 M.A 과정을 마치고, 다시 신학석사(Th.M) 과정을 밟기 위해 일리노이 주에 있는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대학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으로 옮겨 그곳에서 저명한 마크놀 박사, 데이빗 웰스 박사, 우드브릿지 박사, 스위니 박사 등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배운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총신대 신대원에서 30여년 간 교회사 가르쳐 두암은 10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1991년 2월에 귀국해 그 해 3월 학기부터 자신의 출신학교인 총신대 신대원에서 세계교회사와 한국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제자로서 총신대 신대원 교수로 있는 이영식 박사는 두암의 저술활동을 평가하는 글에서 다음의 7가지 특징을 분석하였다. 첫째, 그는 자신의 연구 활동을 통하여 평소 지론이었던 "교회를 위한 신학"을 구현했다고 규정한다. 목회자 양성소인 신학대학원은 매우 중요하다. 목사후보생 한 사람이 미래의 한국교회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저술과 연구에 있어서 원자료 및 의미있는 사료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사료의 적실한 해석을 통하여 총체적인 역사방법을 모색하며 제시했다. 그는 역사의식의 중요성과 역사방법론을 신학(神學)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셋째, 그의 방대한 <한국기독교회사(1,2,3권)>는 수많은 참고자료에 대한 철저한 사료분석과 성실한 전개를 통해서 출판됨으로 한국 교계와 학계에 획기적인 역사서로 부상했다. 일연의 한국기독교의 통사를 구성하면서 한국교회사 학계에 기념비적인 저술로 자리 잡았다. 넷째, 그의 저술 작품에는 교회사와 일반사가 종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대하(大河)와 같은 역사의 중심에는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있다는 것을 자주 드러낸다. 한국교회 부흥의 역사도 성령 하나님의 주권을 부각시키면서 성도들의 열망을 촉구하고 있다. 다섯째, 그의 작품에는 한국교회의 복음전파의 사명과 복음의 순수성 회복, 그리고 교회가 처한 시대적 문화적 사회적 책임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놓치지 않고 계승해야 할 본질이고 가치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교부들,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초기 한국교회의 선진들은 말씀에 생명을 걸었고, 영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신사참배와 모진 박해에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이단들과 자유주의 신학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복음의 순수성을 계승하고, 조국을 향한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했다. 한국교회는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여 3.1독립운동에 앞장 섰고, 사회를 계몽하고 개혁시켜 나갔으며, 한국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여섯째, 역사 속에 묻혀있을 뻔한 생생한 사료들을 발굴하여 평양대부흥운동과 후속 저술들을 출판하고 언론에 연재함으로써 한국교회에 다시 부흥의 열망을 갖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일곱째, 그는 자신의 작품활동을 통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와 진리수호에 대한 열정으로 이단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이단에 대해 논문 게재와 발표 및 세미나를 개최했고, 한기총의 이단해제를 반박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소를 당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섰다.(같은 책 pp.266-267). ‘한국장로교 연구’에 중요한 공헌 또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이은선 박사는 박용규 박사 은퇴를 기념하는 논문 "박용규 교수와 한국장로교회 연구"에서, 박 교수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한국장로교회의 형성과정에서 선교사들이 전해준 정확무오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구 프린스턴학파의 성경관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였다. 프린스턴의 성경관은 스코틀랜드의 상식 실재론의 보편적 인식원리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영감으로 이루어져 성경의 무오(無誤, inerancy)를 보장하는 유기적 완전 축자영감론이다.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전해진 개혁주의는 청교도개혁파 복음주의, 장로교 개혁주의 그리고 화란 개혁주의이며, 청교도 개혁주의에서 교리, 문화, 경건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을 제시한다고 보고 있다. 그 증거로 첫째, 복음전파에서는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 선교사 토마스(Thomas), 권서로 와서 구약 번역에 기여한 유대인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Peters), 복음전파 및 교육과 사회적 책임을 다해 개혁주의 이상을 실현한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를 논하였다. 그리고 마팻(Samuel Moffett)을 중심으로 한 매코믹신학교 출신들은 조선 서북지방의 복음화와 평양 장로회신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장로교의 뿌리가 되었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성경공부 중심의 네비우스(J. Nevius) 선교방식을 채택하여 주일학교의 건실한 성장과 사경회 중심의 한국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둘째, 교육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설립과 독노회 설립, 12신조 채택, 1912년의 총회 설립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 대해 평양 장로회신학교와 그 연속 선상의 총신대학교 100년사와 총회 100년사를 기획히여 대표집필하였다. 12신조에 대하여는 엄격한 칼빈주의에 미치지 못하고 복음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측면과 장로교회를 연합시키는 측면을 고찰하였다. 셋째, 대사회적 책임에 대해 장로교가 105인 사건과 3.1운동에서 담당한 중요한 역할을 규명하였고, 개별교회로서는 주기철 목사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에 저항하는 산정현교회와 강규찬 목사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운동의 보루로서의 산정현교회를 탐구하였다. 그리고 1939년 12월 평양임시노회에서는 주기철 목사를 목사직에서 면직시킨 것이 아니라,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에서 사면시킨 것이란 것을 밝혔고, 주기철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최봉석과 손양원 목사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해방 후에 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WCC에 대한 견해 차이라는 것을 밝혔고, 1950년대 장로교 분열의 주역들인 박형룡, 한경직, 김재준에 대해 박형룡은 정통주의 신학자, 한경직은 온건한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목회자, 김재준은 칼 바르트 신학에 입각한 진보주의자로 평가하였다. 개혁주의 전통 아래서 복음주의 이해 두암이 한국장로교회를 연구하면서 했던 중요한 공헌은 한국교회가 그 시대에 찾아야 할 시대적 과제와 의미를 남보다 먼저 발굴하고 연구했다는 선견의 소유자였다고 하겠다. 두암은 2000년에 이미 <평양대부흥운동>을 저술했고, 연이어 <총신대학교 100년사>와 <총회 100년사>, 그리고<한국교회와 민족을 깨운 평양장대현교회>, <제주교회사>를 저술하여 복음주의 역사관을 나타냈다. (신학지남 2020 여름호, pp.187-189).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도 박용규 박사 은퇴기념논문집에 기고한 '박용규 교수와 개혁파 복음주의'란 글에서 두암의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에 대하여 세 가지로 평가하고 있다. 첫째, 박용규 교수는 자신이 속해 있는 예장합동측의 근본주의적인 모습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960년대를 전후해서 ICCC와 연결됨으로서 근본주의와 정통주의를 혼동하고 있다고 본다. 둘째,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이 사실상의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가르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전천년설은 교회를 사회로부터 도태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현대복음주의의 큰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셋째, 박 교수는 오순절운동에 대해서 그 부흥운동적인 열정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인 신앙이 정통신학의 범주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사실 20세기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큰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그룹이 오순절운동이다. 박 교수는 이런 오순절운동이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WCC 등 진보신학과 타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장로교 보수 신학자의 입장에서 오순절운동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박용규 교수 자신이 속해 있는 장로교 합동측의 신학, 즉 개혁주의 전통 아래에서 복음주의를 이해하고 있으며, 이런 신학적 틀에서 다른 운동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본다. (신학지남 2020 여름호, pp.214-217). 필자는 이제 한국교회에 기여한 그의 학문활동과 교수 사역을 넘어 원로학자로서 더 큰 기여를 기대하면서, 한국교회 1대 교회사가들의 미진했던 부분의 역사를 2000년대까지 취급, 정리연구해 간행한 공로는 한국교회 후학들에게 큰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두암 박용규 박사(1956-)
-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유강 김영재 박사
- 한국교회의 한국역사 책임지는 역사의식 강조 개혁주의와 칼빈주의적 관점에 기반한 세계적 사관 지녀 경남 통영 욕지도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고려신학교 졸업 유강 김영재(柔剛 金永在)는 1935년 5월 22일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도에서 어장을 경영하는 부친 김수옥(金秀玉)과 모친 함복순(咸福順)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강의 증조부의 가업을 이어받은 조부 김상천(金尙天)은 목회자 사택을 짓도록 땅을 희사할 정도로 믿음 좋은 신자였다. 그러나 마산 태생의 어머니가 시집 왔을 때는 조부께서 별세하고, 가산이 기울어 집안이 어려울 때였고, 부친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가솔들을 데리고 처가가 있는 마산으로 이사했다. 그의 모친은 시모(유강의 할머니)를 따라 함께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모친은 유강의 나이 두살 때인 1936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주기철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집사로 봉사하였다. 모친의 믿음은 해방 후 일어난 신사참배 회개운동이 전개될 때 더욱 깊어졌다. 유강은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어머니를 따라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를 비롯, 여러 옥중성도들의 집회에도 참석하였다. 이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일제 때 옥중에서 고난 받은 이들과 신사참배를 지지한 이들과의 싸움을 보고 신앙이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의 흔들리는 신앙을 바로 잡아준 사람이 당시 전도사였던 홍근섭이었다. 홍근섭은 이북에서 피난 나와 고려신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홍 전도사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여러 교회로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한 열심있는 청년 전도사였다. 홍 전도사가 마산 문창교회에서 개척하기로 한 제3문창교회 개척 담당 교역자로 임명받게 되었는데, 유강도 홍 전도사를 따라 집에서 가까운 제3문창교회로 출석하게 되었다. 홍 전도사는 후에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되어서도 꾸준히 유강을 신앙으로 지도해 주었고,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홍근섭은 이북에 있을 때, 주기철 목사의 장남 주영진 전도사로부터 성경을 배웠으며, 주영진 전도사는 6.25 때 월남하지 않고 북한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강은 홍 목사를 통해 요한계시록과 로마서를 두 세번씩 읽어가며 심도있게 배웠다. 젊은 유강은 당시에 이미 변홍규 박사의 신학원론도 읽고, 박윤선의 계시록과 공관복음 주석도 독파하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 좋아해 독서량 많아 그는 고등학교 학창 시절에 부산에서 개최된 S.F.C 겨울수련회에도 참석해 5일 밤을 꼬박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밤을 지새기도 하고, 아침 시간마다 로마서를 통독하는 등 자신의 신앙성장을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유난히 책 읽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일본어로 된 소설과 문학 작품들을 읽기 시작한 것이 6.25 전쟁 중에는 적군의 따발총 소리와 기관총 소리가 오가는 포화 속에서도 책 읽기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책 읽을 욕심으로 영어와 독일어를 독학하기도 했다. 중고등 학생시절에는 돈이 생기면 책방에 가서 책을 구입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1954년 대학에 입학했으나 재정상 어려움과 폐침윤이란 질병으로 휴학을 하고 학도병으로 입대해 1년간 군 복무를 했다. 그리고 제대 후, 거창고등학교에서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치며 7년 만에 대학을 마칠 수 있었다. 1972년 4월 결혼한 후, 고려신학교 강사로 사역하던 중, 후에 중국 연변과학기술대학 총장인 된 김진경 목사의 소개로 영국 브리스톨(Bristol)에 있는 트리니티신학대학에 유학했고, 다시 독일 부퍼달신학대학으로 옮겨 공부하던 중, 자녀들의 학업 문제로 귀국해 다시 고려신학교에서 한동안 강의를 하였다. 그러나 1969년 3월 학내 문제로 교수직을 사퇴하고 서울로 올라와 1972년 5월 예장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72년 독일 친구 유트 목사에 의해 다시 독일로 초청받아 함부르크대학교에 적을 두고 독일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한국교회와 칼빈주의 전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다시 1980년 3월 독일생활을 정리하고, 잠시 미국 미네소타에서 3년간 목회를 하던 중, 서울 사당동 총신대학교로부터 청빙을 받고 귀국하여 1986년까지 교회사 교수로 봉직하면서 신학생들에게 교회사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한국교회사의 연구와 그 중요성과 가치에 대하여 심혈을 기울려 가르쳤다. 미국 아틀란타서 교회개척... 합동신학대학원서 교수생활 유강은 이렇게 자신의 신앙과 신학, 교단과 학교와의 관계가 여의치 않자 고민 끝에 학교를 떠나 미국 조지아주 아틀란타로 가서 교회개척을 하게 된다. 그 해가 1986년이었다. 이곳에서 교회를 개척해 1990년까지 사역을 하며 교회가 안정되어 가던 중에 합동신학대학원 총장 김명혁 박사로부터 교수로 초청 받아 2006년 퇴임하기까지 한국교회사 교수로 의미있고 보람있게 공식적으로 마감했다. 김영재 박사의 은퇴기념논총출판위원회가 헌정한 헌정사를 여기에 인용하므로, 그의 신학적인 사상과 교회를 보는 사안(史眼)을 짐작할 수 있다. "김영재 박사님은 학문의 활동에서만 신학을 신앙의 실제에 연결하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사역에서도 교수사역과 함께 목회사역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헌신을 다하셨습니다. 혼탁한 교회의 현장에서 제자들은 김 교수님의 강의를 통하여 배타적이거나 독선적이 아니면서도 바른 신학의 길을 잃지 않는 교회관을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목회는 단지 신학을 교수하는 교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교인을 사랑하는 실천적인 활동임을 강조하신 교수님의 교훈은 제자들에게 자칫 이상을 쫓는 사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주셨으며, 설교를 비롯한 목회활동의 현장에서 교인들의 음성을 듣게 하였고,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살피게 하셨습니다. 김 교수님께서는 이러한 교훈을 단지 신학적 사유에만 의지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회사역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주셨습니다. 김 교수님은 지력이 부족하여 노력을 게을리 하는 제자들에게 온유하신 태도로 취하셨고, 인내로 거듭거듭 가르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김 박사는 1990년부터 지금까지 화평교회 협동목사로서 교회를 섬겨왔다. 그의 교수의 삶은 그리 길지 않아도 많은 저술로 전하고자 하는 신학과 역사관과 인생관을 펼치고 있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 엄청난 독서량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습득된 글쓰기의 능력과 기교, 정통한 영어와 독일어 실력의 바탕 위에 성경신학적 안목과 고전어(古典語) 해독능력이 함께 어우러져 정확한 논점과 철저한 개혁주의와 칼빈주의적 관점에 기반한 신학이 유난히 돋보인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물로는 <한국교회사>(1992), <한국기독교 재인식>(1994), <교회와 신앙고백>(1989) 등이 있다. 종파적 역사관 배격... 민족의 구원역사 전체를 봐야 유강은 역사참여적인 역사관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개인이 속한 종파를 극대화 하는 종파적 역사관을 배격한다. 종파적 사관에 머물게 되면 교회를 형이상학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수직적인 관계로만 보게 되고, 역사의 수평적 관계를 보지 못하게 된다. 성경에 대한 주관적인 이해를 절대시 하고 역사와 교회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는 우(愚)를 범할 수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역사는 현재의 우리를 존재하도록 해 준 어버이와 선조들의 삶의 현장이요, 업적이며, 유산이기 때문이다. 구원역사에 참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다른 역사의식을 가졌듯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역사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이러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겨레가 살아온 과거의 역사에 대한 존중과 현재 역사에 참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에 대한 존중이란 한국의 역사가 곧 나의 역사이고, 우리의 것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의 역사는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아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가운데서 은총과 축복을 누리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장이며, 성화의 삶을 사는 현장이란 것이다. 한국교회는 한국 국민의 대다수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윤리적인 삶을 살고, 기독교인으로서 한국문화에 참여하며 기여하는 삶을 사는 그야말로 한국문화의 기독교적 변혁을 꿈꾸면서 한국역사를 책임지는 역사의식(Historical Consciusness)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유강의 기독교 사관은 한국교회라는 좁은 시야에만 멈추지 않고, 세계를 응시하는 넓고 멀리 내다보는 세계적인 사관이라 보여진다.(한국교회를 빛낸 칼빈주의자들, 2020, p.959).
-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유강 김영재 박사
-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박명수 박사(1953- )
- 한국성결교회 및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 연구 조명 '초기성결교회사' 등 성결교회 역사와 신학 확립에 큰 공헌 전북 완주 출신.. 성결교신학교 서울신학대학원서 공부 박명수(朴明洙) 박사는 1953년 10월 9일(음력), 전북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그 시기는 동족상잔의 이념 투쟁의 결과로 발발한 6.25 전쟁이 한창 전개되던 때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숨겨진 섭리라 할까. 그 산골 마을에 교회가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다. 이것이 그에겐 축복의 근원이었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였다. 이후 그의 전도로 부모님들도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는 인도의 영성가로 알려진 썬다싱(1893-1929)의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위대한 결단을 읽고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선교사나 목사가 되기 위해서 1972년 봄에 성결교신학교(현 성결대학교)에 진학해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이왕이면 학업을 폭넓게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1학년 때부터 종교학을 비롯한 불교학 개론 및 유교학에 관한 저서 등 타종교 서적도 탐독하였다. 4학년 때는 하인리히 오토의 <신학 해제>를 읽고 감동해 각 주제를 암송할 정도로 심취했다고 한다. 그는 성결대학교를 졸업한 후, 1976년 3월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신학을 새롭게 배웠다고 한다. 이른바 신학적 회심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성결교신학교 시절에 배웠던 보수신앙과 진보신학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서울신대에서 건전한 복음주의를 배우며 깨달았다. 그때 웨슬리 신학을 가르치던 조종남 학장의 학문적 영향이 컸다고 후일 말했다. 미국 보스톤대학교에서 19세기 성결운동 연구 그는 이곳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박사과정으로 진학하였는데, 당시 박사학위 과정 학제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장로회신학대학, 감리교신학대학, 한신대학교와 서울신대가 연합해 운영하는 5개 대학 '공동박사학위 과정'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조직신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학위는 받지 않은 채로 미국 보스톤대학교로 가서 교회사로 전공을 바꾸어 새로이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한국의 성결교회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웨슬리의 후예인가? 아니면 자생교단인가? 하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그러한 논쟁이 19세기 성결운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9세기 성결운동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1992년에 <19세기 미국성결운동의 성결 개념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명수 박사는 1992년 여름에 귀국하여 그 해 가을 학기부터 서울신학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해, 교수가 된 것은 1994년 봄 학기부터였다. 박명수의 학자로서의 학문여정을 그의 제자 허명섭 박사는 3단계로 나누어 이야기 한 바 있다.(퇴임기념논문집 2020, p.56 이하). 제1기는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와 신학의 정립을 위해 땀을 쏟았던 시기이다. 당시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이에 박명수 교수는 한국성결교회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성결운동에 대해 연구 발표하였고, 이를 묶어 <근대 복음주의의 중요 흐름>(1998)이란 책을 출판했다. 이후에 출판된 <초기성결교회사>(2001),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와 신학>(2004), <한국성결교회100년사>(2007), <이명직과 한국성결교회>(2008) 등이 츨판되었다. 이것은 성결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확립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제2기는 한국교회와 복음주의 신앙을 위해 활동했던 시기이다. 이때부터 박명수 교수는 성결교회를 뛰어넘어 한국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연구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시발점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국제신학연구소의 초청으로 참여하게 된 오순절신학에 대한 연구였으며, 1907년 대부흥운동에 대한 연구는 그 지평을 한국교회의 주류 속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넓혀 주었다. 전자의 결과는 <급하고 강한 바람>(2012)이란 책으로 출판되었고, 후자는 <한국교회 부흥운동>(2003)으로 나타났다. <근대사회와 복음주의>(2008)도 한국교회에 복음주의를 전하고자 애썼던 땀의 결실이었다. 이 외에도 2007년을 전후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여러 기관들과 함께 일하며 한국교회 복음주의 기독교를 대표하여 활동하였다. 한국기독교 역사와 한국사는 '불가불리' 또 한 가지 그의 활동 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한국교회 역사 바로 세우기운동"이라 하겠다. 이 운동은 그가 우연한 기회에 한국사(韓國史) 교과서에 서술된 기독교 관련 내용이 왜곡 축소 폄하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한국사 교과서에 "한국기독교가 지나치게 복음주의적이어서 제국주의와 일제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다"라고 서술되어 있었던 것이다. 박명수 교수는 이 서술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고 한국사회에 끼친 한국교회의 역할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와중에 그는 종교편향문제, 즉 정부 당국이 불교와 유교는 물론 무속종교에까지 전통종교니, 전통문화니, 또는 민속문화라는 이름으로 각종 혜택과 지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것은 종교편향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독교 공공정책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를 만들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 기독교의 현안을 제시하여 답변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이에 공감하는 여러 동료 학자들과 함께 <역사교과서와 기독교, 공정하게 서술되었는가?>(2010), ,한국근대화와 기독교의 역활>(2011), <한국정치와 기독교 공공정책>(2012) 등은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제3기는 2010년도 전후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그동안의 연구 영역 및 활동을 넘어 한국기독교와 대한민국의 발전 과정을 연구하는 영역으로 그 지평을 확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한국사 교과서가 기독교 역사만을 축소 왜곡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 자체를 공정하게 서술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해방 후 한국사 연구는 남북 분단 역사의 관점이 대한민국의 출현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기독교가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일제하 민족운동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운동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해방 후의 한국사가 공정하게 평가를 받을 수 없다면 한국기독교 또한 왜곡 폄하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회 역사학자로서 박명수 교수의 역사인식은 무엇보다 소중한 역사적 문화 유산에 대한 관심에서 촉발되었다. 한국기독교 안의 냉소적 비판주의와 한국사회의 반기독교적 정서에 대한 반동적인 자각이 그의 역사인식 저변에 흐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그런 것들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그 저변에 깊이 배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계속 제기하는 문제이고, 그의 역사연구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성결교회의 정체성 확립 및 전파에 애정을 기울인 것도 복음신학과 신앙에 대하여 자긍심을 갖도록 격려하고 도전하는 것도, 한국기독교의 역할에 대하여 긍정적인 비젼을 제시하는 것도, 나아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국기독교가 한국역사에 끼친 영향 과소 평가" 박명수 교수의 역사인식과 연구는 정당한 주체성의 자각과 그것을 고무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한국기독교가 한국역사에 끼친 영향에 비해 우리 역사 속에서 지니치게 과소 평가받고 있다는 인식이다. 한국기독교는 불교나 유교가 미친 영향만큼 근.현대사에서 한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사 교과서에서 이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인색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상당부분은 왜곡되거나 많은 경우 과소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박명수 박사는 역사연구 및 해석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를 강조한다. (1) 사실(Fact)에 근거한 역사 서술이어야 한다. 완전한 객관을 견지하긴 어렵지만 역사는 사료가 알려 주는 대로 가능한 객관적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역사가의 일차적인 임무는 과거의 역사를 사실에 입각하여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관 중심의 역사연구를 경계한다. 종종 사관(史觀)을 강조한 나머지 역사를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역사를 사실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선입된 사관에 입각해서 보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곧 사관 중심의 역사연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푸로크루테스'의 침대의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푸로크루테스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안으로 불러들여 침대에 눕게 한 후,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길면 잘라서, 짧으면 늘려서 죽였다. 사관이 중요하지만 사관에 맞추어 역사를 연구하게 되면 역사를 왜곡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명수는 자신의 역사연구 방법을 설명하면서 종종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사자성어를 사용한다. "서술하는 것이 창작보다 중요한 것"이란 의미로 일찍이 공자가 사용한 말이다. (2) 역사연구와 해석은 국제적인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딴 섬처럼 완전히 고립되거나 독립된 역사는 없다고 본다. 거의 모든 역사는 교류를 통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연구 및 해석은 국제적인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한국성결교회는 세계기독교의 흐름 속에 있고, 특별히 동양선교회(O.M.S)로 대표되는 19세기 웨슬리안 성결운동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발전되어 왔다. 이는 한국교회의 역사에도 비슷하다. 한국교회는 19세기 미국복음주의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교회가 크게 신학적 자유주의와 교리적 정통주의로 나뉘어 있지만 한국교회 저변에 흐르고 있는 것은 체험적인 복음주의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세계기독교의 흐름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으며, 고등학교 교과서에 기독교에 대한 제대로 된 서술이 없는 것도 한국사를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못 보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성결교단과 한국교회의 역사적 혜안의 소유자 (3) 박명수 교수는 교회사 연구 및 해석에 있어서도 일반역사의 흐름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와 종교는 사회적 환경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정교분리와 종교적 사사화(私事化) 현상 등으로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그렇다고 종교의 영향이 무시되어도 좋은 정도는 아니다. 구한말의 일제 강점기 그리고 무엇보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는 한국역사 속에 묵직한 비중으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일반사회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복음주의를 근대사회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시도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연구를 통해서 그는 근대의 중요한 사상가들이 근대사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으며, 여기에 기독교가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 지를 설명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전통신학에 익숙한 신학자들은 변화하는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반면, 근대 사상가들 중에는 변화하는 사회를 인식하고 있었다면서, 예를 들면 로크(John Locke, 1632-1704)나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토그빌(Alexis de tocgueville, 1805-1859) 등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성결교회의 교회사가로써만 아니라 이미 한국과 아시아 및 세계교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혜안(慧眼)을 가진 학자이다. 그가 성결교단과 한국기독교를 위한 넓은 역사적인 혜안의 소유자임을 증명하는 것은 유학에서 돌아오지마자 서울신학대학교 안에 성결교회역사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국성결교회 및 오순절계 신힉과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를 연구 조명하고 정리한 과정은 한국교회를 향한 큰 공헌이라 생각된다.
-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박명수 박사(1953- )
-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남양 김명혁 박사(1937- )
-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한 영원과의 만남 그리스도인은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가질 때 고난도 소망이 될 수 있어 순교자 김관주 목사의 아들로,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남양 김명혁(南陽 金明赫) 박사는 1937년 6월 4일, 순교자 김관주(金冠柱, 1905-1950) 목사의 아들로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후 1~9세까지는 평북 의주에서 살았고, 9~11세까지는 평양에서 살았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횡포로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 없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단신 월남하여 서울에서 방산국민학교를 마치고, 서울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6.25 동란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했다. 이때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고 부모님들의 대를 이어 목사로서 헌신하기로 다짐하였다. 그는 대구제일교회에 출석하면서 당시 어린이 사역의 대가로 알려진 안성진 목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신앙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피난지에서 이성봉 목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해 수 차례 안수기도를 받았는데, 그 목적은 좋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휴전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서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다니면서 교회는 창동교회와 대창교회에 다니며 김치선 목사 밑에서 철저한 신앙훈련을 받았다. 그는 그때 새벽기도회의 중요성과 전도와 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김치선 목사는 새벽마다 한국의 28,000여 동네마다 신앙의 우물을 파게 해 달라고 역설했다. 남양은 1961년 대학을 마친 후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의 교수진은 박형용 명신홍 한철하 최의원 오병세 강태국 등이었다. 그는 특히 한철하 교수에게 많은 도전과 감화를 받았다. 한철하 교수는 교회사를 사건 위주가 아닌 주제와 사상의 흐름 위주로 강의했다. 어거스틴 연구 강의 시간에는 그의 초기 작품들을 영어로 읽으며 그의 신학방법론과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을 다루었는데, 그 당시 그에게 많은 감동과 학문에 대한 정열을 불어넣어 주었다. 남양은 이를 계기로 어거스틴을 전공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되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 역사학 공부 그는 총신에서 1년을 마친 후, 1962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훼이스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로 유학을 가 그곳에서 교장 맥클레이(A. Alexander Macleay) 박사의 교회사 강의에 큰 감명을 받았다. 다시 1966년 웨스터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로 가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친 후, 뉴 헤븐에 있는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 신학부로 가서 다시 석사과정에서 유명한 역사신학 교수 자로슬라브 펠라칸(J. Pelican) 교수의 지도하에 교부들에 나타난 이사야서의 메시야적 해석이란 논문을 썼다. 그의 신학과 사상은 그가 쓴 저술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신학의 원천은 그의 역사관에서 출발한다. 그는 서울대에서 서양사학을 배우면서도 역사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했다. 그 후에 목회자의 삶에 있어서 역사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하였다. 사람이 참된 삶을 위하여서 하나님의 참 뜻을 분별하기 위하여서는 성경의 계시와 성령의 조명과 함께 필요한 것이 나 자신의 역사적 안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 자신과 이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분별하고 습득하는 세 가지 척도와 자원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의 조명과 역사적 안목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역사의 중요성을 바로 인식한 펠리칸(Jaroslav Jan Pelican), 라토렛(K.S.Latourette), 베인톤(Roland H. Bainton), 존 스타트(John R.W. Stott) 박사 등의 역사관을 따라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책 제1권이며, 교회사를 하나님의 책 제2권이라고 하였다. 이들로부터 기독교 역사관을 배웠다. 남양에게 역사란 무엇이냐? 라고 한다면, 그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 영원과의 만남이라고 한다. 시간의 통합적 연속 속에서 역사의 의미를 찾고 있다.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세 가지 견해를 소개한다. 1)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Facts)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Lanke의 입장), 따라서 역사가의 과업은 단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를 보여주는데 있다. 2)역사란 과거 사건들을 해석(Interpretation)하는 것이란 견해가 있다(R.G. Collingwood), 즉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본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역사가의 과업은 그의 마음 속에 과거의 역사를 재연하는 것이라고 본다. 3) 역사란 과거의 사건을 정확히 기술함과 아울러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라는 견해(Edward Hallett Carr)이다. 즉 역사는 사건과 해석을 포함하며,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를 포함한다는 견해로서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붙잡는 것이라는 입장이 있다. 그런데 남양은 세번째의 견해에 따라서 역사를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데 동의하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만남과 대화가 역사요, 역사적 안목이라고 한다. 과거의 역사는 나와 상관없는 역사가 아니다. 오늘 내가 당면하는 문제들을 이미 과거의 역사가 먼저 경험을 했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사를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오늘의 나의 문제와 나의 이야기를 읽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과거의 역사를 읽을 때 오늘 나의 위치와 문제를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하게 되고, 오늘의 현실을 바로 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되며 내일을 향한 보다 풍부한 통찰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를 남양의 종말론적 역사관이라 할 것이다. 남양의 역사관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양은 종말론적 초연을 강조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나 밖에서 그리고 종말론적 완성의 점에 서서 내려다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사후 체험을 한 사람이 자기 밖에서, 자기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위치를 멀리 종말론적 오메가 포인트에 둘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가지게 될 때,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어 나아가는 구속사의 과정과 방편들이라는 인식을 가질 때, 그 사건들의 의미는 크고 분명해진다. 특히 오늘의 내가 구속사의 한 점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인식하게 될 때,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삶의 의미와 용기와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가지게 될 때, 나에게 가해지는 오해와 멸시와 박해도 나를 도무지 불쾌하게도, 낙심하게도 만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보람과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역사 창조의 대열에 나서서 주어진 사명을 묵묵히 수행해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안목을 지닌 신앙의 사람들을 성경은 일컬어 "세상이 능히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히 11: 37)이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 양면성의 종말론적 역사신학을 추구한다. 이것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용과도 다른 양극을 붙잡는 역동적인 통일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의 이런 신학사상은 어거스틴(Augustine) 전공자로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 사상에 기인한다고 보여진다. 삶의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계시와 성령의 조명이 절대 필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절대로 필요한 것이 역사적인 안목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역사적인 안목은 현재와 과거와 영원과의 만남으로 주어지며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지니므로 주어진다고 말한다. 역사적인 안목과 양면성의 사고를 지닐 때, 우리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관점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지역주의나 민족주의나 인종주의를 넘어서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이고 세계적인 관점이며, 하나님이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시는 눈으로 나 또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고 본다. 남양은 이런 세계관을 지닐 때 우리는 고난과 죽음과 종말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와 자세를 지닐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고난은 일반적으로 범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형벌이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훈련의 한 도구임을 알게 된다. 고난을 통해 사람은 자신을 바로 알게 되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이웃을 바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남양은 실천적 신학자요, 원수도 사랑으로 품는 사랑의 목회자" 남양은 먼저 개혁주의를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1) 하나님 중심 사상 (2) 성경 중심적 사상 (3) 교회 중심적 사상 (4) 기도와 경건 중심 사상 (5) 문화변혁 중심 사상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신학이나 역사관 또한 그 뿌리가 개혁주의 신학사상과 칼빈주의 교회관에 입각한 학자라 보여진다. 남양은 복음주의 신학의 약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즉 개인주의적 영향이나 감정주의와 주관주의적 성향, 교회관의 약점이나 교리의 약화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양은 개혁주의 신학 전통과 더불어 복음주의 신학 전통을 함께 붙잡으려 한다. 마지막으로 남양 김명혁의 삶과 신학은 학자로서 상아탑 안에서 사색적인 이론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는 성도의 교제와 봉사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영역을 넓혀간다. 그의 실천적인 신학의 삶은 목회와 신학에 이어 선교와 역사적인 영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른바 선교와 통일을 향한 실천적인 활동이다. 남양은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강의하며 그 분야의 많은 글과 저서를 남기기도 하고, 현장 선교사들을 돌보는 일에 정성을 쏟기도 한다. 은퇴 후에도 미자립농어촌교회를 방문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멘토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스스로 착한 스승이 되고 교계의 지도자가 되어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를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기획출판한 <복음주의와 한국교회>(2004) 논문집에서 정진경 목사는 남양을 가리켜 "내 마음을 열어 보이고 싶고, 또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허용할 수 있는 친구 가운데 한 분"(p.42)이라고 하였다. 남양은 순교자의 아들로서 북한 공산당의 핍박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북한 동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고 그들을 위해 기도와 사랑으로 실천적 사역을 감당하는 모습은 진정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연상케 한다. 백석대학교 주도홍 박사는 남양을 가리켜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사랑과 온유, 겸손과 지혜, 거기다 리더십을 갖춘 목회자요 학자요 기독시만운동가로 사는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북한 공산당을 한때 원수로 여겼으나 그는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자로 북한을 안타깝게 여기며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순전한 사랑으로 물심양면으로 사랑하신다. 그의 모습에서 종종 사랑의 사도 요한의 모습을 본다"라고 했다.(한국교회를 빛낸 칼빈주의자들, 2020, p.1121)
-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남양 김명혁 박사(1937- )
-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김광수 박사 (1926-2016)
- 민족교회론에 기초한 ‘민족교회사관’ 주창 <한국기독교회사, 교회와 민족, 한국민족교회> 형성사론 등 저술 황해도 장연군 솔래 출신... 한국 기독교 역사학계 거목 솔래 민경배(松川 閔庚培)는 1934년 6월 22일,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장연읍은 뒷동산엔 무성한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앞으로는 황해(黃海)로 흘러 들어가는 큰 내(川)가 있는데, 그 내를 이름하여 송천(松川, 솔래)이라고 한다. 이곳은 일찌기 기독교가 전래되어 조선 최초의 토착민에 의해 세워진 소래교회(松川敎會)가 있었다. 이 교회는 1885년 미국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 전에 서경조 형제와 여러 조선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세운 교회로, 이후 서울의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와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한 바로 그곳이다. 그곳에서 민경배가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의 선교역사를 널리 광포하기 위해 예비한 큰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되어진다. 민경배는 서울로 와 1952년 3월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진학하여 대학원을 마친 후, 1956년에 모교에 강사로 임용되어 명예교수가 되기까지 신촌의 연세대학교 캠퍼스를 떠나지 않고, 교회사 학자로서 자리한 기독교계의 거목이라 하겟다. 1994년 9월에 그의 회갑을 기념하여 간행된 <한국교회사론총>에 간행위원장 김인수와 편집위원장 박효생이 공동으로 기술한 간행사를 보면, 솔래의 공적을 읽을 수 있다. 한국교회사연구는 용재 백낙준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지만, 학문적인 체계로 정립한 것은 솔래이다. 그의 학문은 위당 정인보를 비롯하여 백낙준, 홍이섭으로 이어지는 연세의 국학연구 전통에서 이룩된 것으로서, 솔래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는 하나의 금자탑을 일구어냈다. 그가 이룬 학문은 후학들에 의해서 계승 발전되기는 하겠지만 그를 능가하는 학자는 오랫동안 나타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가 보여준 학문적인 자세는 제자들에게 공감이 되고도 남는다. 명쾌한 논리로 세운 사관(史觀), 수려한 문장 구사, 파 헤쳐지지 않은 사료가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문헌의 섭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한다. 그는 학자로서 행운도 타고나 일찍부터 연세대학교 강단에서 교수하기 시작하여 평생을 연세의 울타리 밖을 나가지 않은 연세의 거목으로 자리하고 있다.(회갑기념론총 p.5). 민족교회론에 기초한 '민족교회사관' 정립 솔래 민경배의 교회사연구 시각은 은사 용재의 교회사관인 선교사관(宣敎史觀)을 뛰어넘어 소위 '민족교회사관'을 주창하였다. 그의 민족교회론은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독특한 교회사관이다. 그는 이 사관에 입각하여 한국교회의 역사를 전개한다. 이 민족교회론에 기초한 민족교회사관은 앞으로 100년 정도는 더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중심적인 사관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한국교회사의 정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골격으로 한국교회의 올바른 신앙을 척도하는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솔래의 민족교회사관에는 교회와 민족의 조화뿐만 아니라, 신앙과 신학의 조화,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는 지상과제인 민족통일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솔래의 민족교회론에 대하여 장로회신학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였던 이영헌 목사는 1977년에 "교회사를 일종의 예술품으로 만든 놀라운 솜씨"라고 평했다. 그는 이 민족교회론을 "주체성 있는 민족교회 형성이란 강한 주견을 가지고 종래에 빠지기 쉬웠던 선교사들의 식민지적인 선교교회의 탈피를 그 과제로 하고 있다"며,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민족교회론이 가지는 그 위치의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이영헌, 한국교회사의 최근 동향, 신학사상 1977년 봄호, p.35). 솔래가 주장하는 민족교회론의 구조를 살펴보면, 그의 민족교회론은 내연(內燃)과 외연(外燃)이라는 구조를 가진다. 그가 내연-외연이란 구조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1981년에 간행한 그의 저서 <교회와 민족>(1981)에서 이다. 그는 이 내연-외연 구조의 원형을 1905년 원산에서 시작하여 1907년 평양에서 있었던 '대부흥회'에서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부흥회가 비신자들을 상대한 전도운동이 아니고, 신자들에 대한 정화운동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당시의 국가 사정에 상심했던 사람들이 마음을 돌이켜서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되돌아오게 하려는 노력이 몰역사성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부흥운동은 민족교회 구형(構形) 과정에서 중요한 특장(特長) 하나를 교회가 구유(具有)케 하는 결정적인 공헌을 남겼다. 그것은 내연의 신앙이 있고 나서 그것이 뿜어내는 외연력에 의하여 확장되고, 역사 속에 참여하는 절차논리의 확립이었다. 그래서 결국 종교와 윤리에 우선 귀착해서 거기서부터 새로운 가치체계를 이루고, 이 내적 변화에 의해 구 질서와의 차질을 경험하면 그 차이점에서 생성되는 에너지가 외연되어 마침내 상황 돌파의 이데올로기가 된다는 그러한 고귀한 체질의 형성이었다. 그의 민족교회론은 신앙의 내연화를 통한 민족운동으로 승화 그의 내연-외연의 구조를 간단명료하게 다시 설명해보면, 1905년에서 1907년에 이 신앙 내연의 구조가 잡히고, 1919년에 그것이 거대한 민족운동으로 외연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김익두(金益斗)나 이용도(李龍道)의 신앙부흥운동을 통하여 내연화 하고, 1935년 일제의 가혹한 군국파쇼전시체제로의 동원으로 신사참배가 강요될 때 그 마지막 저항으로 외연화 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내연된 신앙은 외연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외연 형태는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다양하지만,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나타난 외연 형태는 사상적 측면에서의 평등사상과 경제적 저항, 민족산업형성의 측면을 말할 수 있고, 사회적 측면으로 신분제 철폐와 같은 사회개혁을 들 수 있다. 또한 정치적 형태로 표출된 것은 충군애국으로, 일제에 의한 조선합병 후에는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투쟁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 솔래의 역사방법론을 연구한 순복음신학교의 한정열 교수는, 민경배의 역사방법론은 성서 이해에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교회사 탐구의 대상이 신앙인이고 교회임으로 성경에 대한 지식과 이해 없이는 교회사 서술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반 역사는 인과법칙의 논리구조로 실증적이며 인본주의적 자료해석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교회사는 역사의 구조와 신앙의 형질은 본질상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서를 중요시 하는 이유는 성경이 가장 역사적이고 역사에 대해 구원적인 문제를 밝혀주기 때문이다. "민경배의 내연과 외연의 역사방법론의 중요한 가치는 그 방법이 개념적이고 주체적이며 체계적인 점에 있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찰할 때 청진기를 사용하는 것과 X-ray로 환자의 내면을 살펴보는 것과의 차이라 하겠다. 이 신앙의 내연이 외연화 되는 현상학의 방법론은 역사에 나타난 사건을 평면적으로 사료(史料)에 의존하는 인문학적 해석으로 끝내지 않고, 심층적인 내부의 신앙과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까지 관통하는 연구방법으로 다양하게 연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분석하였다(한국교회사학연구원 2013. 2 .7, 정기세미나 발표 p.24). 고신대 명예교수 이상규 박사는 솔래의 산수를 기념해 발표한 논문 '민경배 박사의 한국교회사 연구'에서 솔래의 <한국기독교회사>(1962)에 대하여 영어권에서 세계교회사를 연구하는 자들이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1893)의 교회사를 인용하지 않을 학자가 없을 만큼 솔래 선생의 '한국기독교회사'는 한국교회사 연구의 토라이자 카논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기술하였다. 첫째, 이 책은 1968년 이후 40여년 간 그 구조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고, 긴 기간동안 700쪽에 달하는 대작으로 발전한 점이고, 둘째, 1972년판 <한국기독교회사>로부터 '한국민족교회 형성과정사'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 점은 저자가 한국교회의 역사를 종래의 선교사들의 주도로 파악했던 선교의 역사로 혹은 선교확장사로 보지 않고, 한국교회를 한국민족의 현실에서 읽는 새로운 사안(史眼)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솔래의 역사서술에 있어서 독특한 레토릭 곧 예술적 기술이다. 그의 역사 기술에는 서양적 학리이론과 동양적 재예(才藝)가 조립되어 있다. 이 점은 민경배 교수의 수사학적 묘미라고 할 수 있고 동시에 그의 책의 가독성을 높여준다. 그의 기술적 능력은 다른 역사가들과의 분명한 차이점이라 생각한다. 한문 혹은 한자어에 대한 그의 수사학적 표현은 감성의 여백을 자극하고 심미적인 힘이 있고, 한문을 공부한 이들에겐 상당한 호소력이 있다.
-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김광수 박사 (1926-2016)
-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김광수 박사 (1926-2016)
- 한국기독교 100년사 속에 역사의 족적을 남긴 증인 한국교회 5부작 등 다수 저술 발간… “살아있는 한국교회사”란 애칭 들어 평안북도 한국교회 초기 신앙가문 출신 김광수(金光洙)는 1926년 7월 20일, 평안북도 의주군 피현면에서 한국교회 초기 신앙 가문에서 태어나 기독교 가정에서 고이 자랐다. 조부는 김광호 목사요, 부친은 김희선 목사이다. 어릴 때부터 정의유치원엘 다녔고, 초등교육도 장로교 계통의 숭덕학교(崇德學敎)를 다녔다. 숭덕학교는 사무엘 마펫이 세운 미숀스쿨이다. 그의 유년 시절의 놀이터는 숭실학교 운동장과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정이었다. 사는 집 뒷문을 열면 바로 숭실학교 운동장이었고, 10분 거리에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통치하에서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의 기독교교육으로 민족주의 배양을 목적한 사립학교 운영은 그리 용이하지 못하였다. 학교에서 일본 민속신앙을 숭배하는 신사참배 강요가 시작된 것이다. 신사참배의 명분은 국민의례라고 하면서 전 국민을 상대로 강요하였는데, 유일신 하나님만을 섬기며 예배하는 기독교인들에겐 큰 환란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꿈에도 생각 못한 8.15 광복이 도래하였으나, 얼마 안가 북한은 소련군을 앞세운 공산당이 모든 행정과 정치를 장악해 일반 인민들은 말없이 이에 순응했으나 교회는 핍박의 시작이었다.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신앙의 자유를 원하는 교인들은 공산당의 눈을 피해 하나 둘 남쪽을 향해 3.8선을 넘기 시작하였다. 김 목사의 가족들도 다른 피난민 대열에 끼여 내려오던 중 외삼촌 가족을 만나 황해도 장연(長連)으로 피신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해주(海州)에 이르렀을 즈음에 전쟁이 곧 끝난다며 해주로 가자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김 목사 가족은 그들이 공산당 선전원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청단(靑丹)을 향해 가다가 샛길로 빠져 3.8선을 넘어 무사히 개성(開城)까지 올 수 있었다.(나의 반평생과 한국교회사, p.273 이하, 2010). 호남지방교회사를 기록한 한인수(韓仁洙) 목사는 스승인 김광수 목사를 "걸어다니는 교회사"라고 말한 바 있고, 장신대 총장을 역임한 장영일 박사는 김 목사를 일컬어 "살아있는 한국교회사"라고 말한 바 있지만, 김광수 목사는 가문이 이루어낸, 자연스런 몸으로 터득한 한국교화사가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외숙부가 김양선 목사요, 김양선 목사의 외할아버지가 초기 조선교회 7인 가운데 한 분인 백홍준이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100년사 속에서 3대를 거쳐 한국교회 역사를 살아낸 몇 안되는 기독교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 한국교회 역사의 족적을 남긴 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월남 후 대구에서 교회개척 그가 피난 내려와 대구에서 이상근 목사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축복이었다. 그가 당시 이상근 목사가 시무하던 대구 대봉교회에 출석하므로 이상근 목사사와 인연이 맺어졌지만, 실은 이상근 목사가 대구에 정착하기 전, 평양 능라도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부터 이 목사는 김광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이상근 목사는 미국 유학 후 대구제일교회에서 시무함.) 이 목사는 대봉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봉덕동에 봉덕교회를 개척하는데 김광수를 전도사로 파송해 사역을 맡겼다. 대봉교회가 봉덕동에 교회를 개척하게 된 동기는 당시 한국의 무디로 불리던 성결교회 이성봉 목사를 강사로 초청해 부흥회를 하였는데, 그때 봉덕동에 60여평의 땅이 생겨 교회를 개척해 보라고 했다. 그는 친구 홍화성과 함께 흙벽돌로 담을 쌓고 깡통을 연결해 지붕을 덮고 비닐로 문을 달고 바닥엔 가마니를 깔고 확장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김 목사는 후에 그때 광경을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베들레험의 마굿간이 연상되었다고 했다. 이런 모습으로 15평 짜리 개척교회가 시작되었고, 주위엔 피난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당시 무산 아동교육의 선구자였던 권세열 선교사를 찾아가 '성경구락부'를 개설해 달라고 요청하여 전도와 교육을 겸한 사역을 시작했다. 1년 여가 지나자 교인이 50여명으로 늘었다. 아이들 부모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1954년 초 새벽제단에 엎드려 새교회당을 건축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약하였다. 건축기금이 문제였다. 김 목사는 시내에 있는 여러 재력가들과 아는 교인들을 찾아 가 모금을 요청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상당액의 모금이 진척되었고, 대구 약전골목 입구에 한약방을 경영하는 정규만 장로는 거금을 헌금해 주었는데, 혼자 모금액의 절반이 되었다. 그 돈으로 250평의 대지를 구입했는데 건축비가 없었다. 주위에선 땅을 너무 넓게 샀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 대봉교회 당회에서도 무리한 계획이라고 걱정을 했다. 이런 와중에 이학우(李學祐)라는 교우가 미8군 사령부에 통역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6.25 전쟁 피해 복구사업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교회당 건축 자원 물자 신청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타진해 본 결과 'NO'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교회는 구제나 전도를 위해 남을 도와야지 피원조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우리는 성경구락부 교육을 하고 있지 않는가?' 전쟁 와중에 난민들의 자녀들을 모아 무산아동교육을 위한 교육용 건물이 필요하니 도와 달라는 취지로 다시 신청을 하게 되었다. 대표자 명함을 영문으로 박아 물자 공급 책임자와 군목과 사병으로부터 고위직에 이르기까지 수십명을 면담한 끝에 'OK' 싸인을 받을 수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어마어마한 건축자재를 지원받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서 '경교 연구'로 박사학위 받아 당시 김 목사는 영남대학교 철학과에 편입하여 학사학위를 받았고, 후에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즈음에 계성학교 교장으로 있던 신태식 박사로부터 계성학교 교목 겸 교사로 초빙을 받고 부임했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으로 유학의 길이 열렸다.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은 중국의 기독교 경교 '네스토리안 기념비문 연구'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본격적으로 한국교회사 연구에 천착해 외숙부 김양선 목사가 다 이루지 못한 한국기독교 역사 연구와 자료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한국교회 5부작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첫 권이 <한국기독교전래사>(1974), 둘째 권이 <한국기독교성장사>(1976)와 <한국기독교수난사>(1978), 셋째 권이 <한국기독교100년사>(1978), 넷째 권이 <한국기독교재건사>(1981), 다섯째 권이 <북한기독교탐구사>(1994)이다. 이외에도 <세계장로교회역사>(1981), <동방기독교사>(1973) 등을 낸 바 있고, 미 간행본으로 '한국기독교발달사' 유고가 있다. 김광수 박사는 그의 제자 한인수 목사가 발행하는 '호남교회사 연구' 지상에 <나의 반평생과 한국교회사>란 글을 쓰면서 서언에 자신의 역사관을 피력한 바가 있다. "역사는 과거 사실을 그대로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한다. 역사가의 최우선 입장은 19세기 초 랑케(Leopold von Ranke)가 말 했듯이 자신의 현재 관념과 사고 형식에 따라 과거를 평가해서는 안되며, 현재의 이해 관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인간 인식의 한계성 때문에 각자 자신의 의식구조가 있어 객관성의 고수가 이미 고상한 꿈이 되어버린 것이 오래이다. 역사가에게 또 하나의 사명은 사건들의 복합적 관계성을 잘 관찰하여 그 진행을 역사 발전의 연속성 속에서 파악하고 절대보편주의적으로 서술해야 옳은 것이다. 사건들을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여 한 시대의, 한 역사의, 한 영역의, 한 사고,의 한 이념의 편향적 대변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각자의 당파적 의식구조의 소유로 인해 공정을 기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2010 도서출판 경건 p.18). 숙부 김양선 목사가 다 이루지 못한 '한국교회 역사' 완성 "교회역사가에게는 더 큰 난점이 있다. 역사는 과거와 함께 역사에 포함되어 있는 현재를 말해야 한다. 그렇지만 현재는 전개되고 있는 진행 중에 있어 전체적 파악이 과거의 경우보다 어렵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인물의 평가는 신변의 위험마저 각오해야 한다. 교단마다 지배권력과 교파적 영향이 막대하여 상대방의 타도를 위해서는 과거 마틴 루터에게와 같이 파문선고로 귀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의 숙부 김양선 목사가 한 말이 있다. 저자는 사가(史家)의 입장에서 냉정하고 공정하게 글을 취급하였다. 우리 교단 분열이 일부 교권주의자의 지나친 교권적 행동에 기인하였음을 결코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또 김광수 박사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처음 한국교회사 강의를 시작하자 신학생들은 나에게 "살아있는 한국교회사"라는 애칭을 붙여주더니만, 나의 위치가 중반쯤으로 원숙해 지니까 "움직이는 교회사"로 바뀌더니, 근래에 동료들은 "죽어가는 한국교회사"라고 빈정댄다고 말했다.
-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김광수 박사 (1926-2016)
-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혜암 이장식 박사(1921-2021)
- 통전적, 통섭적 이해로 조화와 일치의 미 추구 지성 감성 덕성을 조화시키고 온전케 하는 영성 지향 한국교회서 100세를 넘기까지 활동한 교회사학자 2020년 8월, 그가 친히 설립 운영해온 '혜암 신학연구소'는 정기 학술연구지<신학과 교회> 제13집은 혜암 이장식(惠岩 李章植) 박사의 동료와 후학들이 그의 100세 기념집으로 출간했다. 필자가 알기로는 한국교회 역사상 한국교회사와 세계교회 역사를 강단에서 가르쳐온 학자로서 여생을 100세를 넘긴 이는 이장식 박사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100세를 맞이한 회고담 속에 이런 말을 남겼다. "어렸을 때 철없는 생각 같았지만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는데, 목사는 되었으나 설교하는 목사가 되지 못하고 가르치는 목사로 한평생을 보낸 것은 나의 뜻으로 된 것은 아니었다"(신학과 교회, 제13집 p.25). 혜암은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였던 1921년 4월 17일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그의 신앙은 돈독하기로 유명한 어머니로부터 였음을 고백한 바 있다. 그는 고향 마을교회였던 경화교회 주일학교를 ㅤㅇㅏㅈ지 못한다. 당시 담임목사였던 강상은 목사로부터 받은 감화는 오래도록 그의 신앙생활 한 모퉁이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어려웠던 경제 사정 속에서 호주선교회 선교부 장학금을 받아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더우기 계성학교 설립정신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 1장) 아래 예배와 성경공부를 할 수 있었고, 기독교적인 인격도야를 받은 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는 다시 계성학교를 마치고 장차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갔으나, 일본에서 쉽게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 1943년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45년 대한민국은 8.15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조국은 좌익과 우익으로 분열되고 대립하면서 끝내 남북이 분단되고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을 때, 모교인 계성학교 신태식 선생을 만나 스승의 추천으로 1946년 9월부터 계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신학교 시절부터 교수생활 그러나 얼마 후 혜암은 목사가 되기 위하여 계성학교 교사를 사임하고 서울의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에 입학했다. 혜암은 여기에서 자신이 신학교육자로서, 역사학자로서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신학교 학부를 마칠 즈음, 교수회의 결정으로 전임강사로 학교에 남게 된다. 혜암이 조선신학교를 졸업할 당시의 학교는 시설면에서는 빈약하였으나, 학장이었던 만우 송창근 박사의 목회학적 열정에 감동하였고, 정통주의라는 보수주의 신학의 오류와 약점을 시정하려는 장공 김재준 목사의 신학 열정에 깊이 감동하였다.(이장식, 나의 신학 순례). 그는 조선신학교 재직시 교회와 교단의 문제를 다루는 일에서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함태영 등의 역사를 곁에서 지켜보며 배울 수 있었다. 혜암이 세계교회사와 한국교회사, 나아가 아시아교회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토대를 조선신학교에서 터득했다고 보여진다. 혜암은 한신대학교에서 교수로 참여하고 가르치고 있었지만, 그는 항상 자신의 학문적인 향상을 위하여 유학의 기회를 노리고 었었다. 그러던 차에 카나다 퀸즈대학교로 유학의 길이 열려 퀸즈를 거쳐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교회사와 역사학에 심취하여 학문의 넓이와 깊이를 파고 들었다. 고신대학교에서 한국교회사 교수로 평생을 보내고 최근 은퇴한 이상규 박사는 혜암 100세 기념 학술지 <신학과 교회>(제13집)에 기고한 '교회사학사에서 본 이장식 박사의 학문의 여정- 이장식 박사의 저술과 신학'에서, 그의 대표적인 저서 <기독교사상사 1,2>(1963,1966), <기독교신조사 1,2>(1980, 1981), <현대교회학>(1969), <교부 오리게네스>(1977), 기독교와 국가>(1981), <한국교회 백년>(1987), <아시아 고대기독교사>(1990), <세계교회사 이야기>(2011)를 열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1) 기독교사상사 제1권에서는 초 .중세 이야기, 제2권에서는 16세기 이후 18세기까지 기술하되 주제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2) 아시아 고대기독교사는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한 저술이다. 시리아와 페르시아, 아라비아, 아르메니아 지역의 기독교 연원을 추적한 연구이다. 여기에 곁들여 동방기독교, 특히 경교(景敎)에 대한 연구가 흥미롭다. (3) 기독교신조사 1,2(1980)는 사도신경을 비롯하여 기독교가 선포해온 각종 신앙고백 문서를 편집하고 번역 해설한 문서이다. 1권에서는 사도신경으로부터 16세기까지의 문서, 2권에서는 16세기 이후의 문서들, 즉 아르메니우스 신조, 도르트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조, 스위스 일치 신조, 19세기 이후의 미국, 영국, 한국에서 제정된 장로교 신조들, 회중교회, 침례교회, 웨슬레주의, 퀘이커, 구세군 신조에 이어 1975년 WCC 제5차 총회 폐회사까지 해설하고 있다. (4)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1977), 한국교회 백년(1987). 혜암은 생애 전반을 서구 기독교 역사에 천착하였으나 그의 후기엔 한국교회사 연구에도 저서와 글을 많이 썼다. 1958년부터 한신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며 한국교회 역사연구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 증거가 바로 이들 두 가지 저서로 남았고, 이외에도 기독교사상 잡지와 다른 학술지 등에 꾸준하게 발표하였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모친과 만우 송창근 혜암의 교회사학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제자로서 한신대 명예교수인 김경재 박사는 그의 사관을 '통전적 특징을 지닌 역사관'이라고 하였다. 김 박사는 혜암의 사관 형성 배경을 언급하면서 먼저 혜암의 신앙과 신학 체질 형성에서 모친과 만우 송창근의 영향을 언급한다. 혜암의 교회사학에서 통전적인 혹은 통섭적 특징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서 모친의 경건 신앙과 그의 영원한 멘토요 스승이었던 만우 송창근 목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보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혜암은 경남 진해 동쪽 해안에 있는 한 작은 어촌 덕산에서 태어났는데, 혜암이 태어난 가정은 기독교 가정이 아니었다. 경남지역의 선교를 분담했던 호주장로교선교회가 1900년 초, 경남의 진해와 웅천에 두 교회를 세웠는데, 하나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배출한 웅천교회요, 다른 하나는 혜암 이장식 목사를 배출한 경화교회이다. 혜암의 어머니가 덕산으로 시집 오기 전 이미 기독교 신앙을 가졌고, 시집 올 때 성경과 찬송가를 간직해 가지고 와 어린 아들에게 신앙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이 가정을 기독교 가정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혜암의 어머니는 남편이 병으로 일찍 타계하자 행상을 하면서 가정을 이끌었다. 혜암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어머나의 신앙은 철저한 성수주일 신앙과 삼일기도회와 새벽기도회 참석, 사경회 때 강사 대접, 성미를 모아 드리는 경건, 목돈이 없어 교회 건축 헌금을 빚내어 드리고 다달이 갚는 분납의 생활을 하면서도, 이웃집에서 제사 음식을 가져오면 마다하지 않고 받으면서 감사하는 열린 신앙의 소유자였다고 했다. 혜암의 신앙과 신학적 특성을 강조하는 이유를 김경재 박사는 그의 학창 시절을 보낸 대구 계성학교에서 5년동안의 신앙훈련과 어머니로부터 전해 받은 신앙의 영향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그의 계성학교 재학시 학교는 1년에 한번씩 저명한 인사들을 청해 신앙수련회를 개최하는데, 당대의 지성적이고 신앙적인 인격의 소유자들인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윤인구 채필근 등의 유명인사들의 명설교와 강의를 들으며 신앙집회를 경험했던 바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에도 송창근 박사와의 만남을 특기하고 있다. 혜암은 만우 송창근 박사가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끼친 공헌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첫째, 만우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정신을 살리려고 고난도 겪였지만, 소위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 둘째, 신도들의 신앙각성과 교회개척과 북한전도를 열망하여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였으나, 교권주의자는 아니었다. 셋째, 기독교 신앙의 정통을 지킬 것을 강조했으나, 소위 정통주의 교리주의자는 아니었다. 넷째, 신학교육의 질적 향상을 부르짖었으나, 소위 신신학자는 아니었다. 다섯째, 새로운 신학사상을 논했지만, 서양신학의 직수입이 아니라 기독교의 토착화를 생각했다. 여섯째, 교회의 목회자 권위와 예배와 신앙생활에서 경건을 강조했지만, 소위 경건주의자연 하지는 않았다. 일곱번째, 빈민과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헌신했고 사회개혁을 강조했으나,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만우는 조화와 일치의 미를 추구하셨는데 애국심과 신앙생활의 조화, 신학과 설교, 문학과 신학, 교회와 사회, 전통과 개혁, 보수와 진보 등등의 조화를 희구하였다. 혜암은 2021년 9월 17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01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혜암 이장식 박사(192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