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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담] 열린 지성 김남준 목사가 말하는 신학과 신앙
    한국교회 대표적인 지성으로 손꼽히는 김남준 목사(열린교회)가 한때 스스로 무신론자였음을 고백했다. 중학교 1학년 즈음 인간으로서의 삶의 이유와 신의 존재에 대해 깊은 방황을 반복하다 결국 무신론의 길을 택했던 김 목사는 지금은 한국교회를 넘어 세계에서 인정받는 신학자이자 목회자, 저술가로서 우뚝섰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떠난 적이 없던 그가 방황해야 했던 이유, 그리고 그를 다시 자신의 품으로 불러들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김남준 목사는 오늘날 방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담아 진심어린 조언을 펼쳤다. 김 목사는 지난 8월 26일 자신이 시무하는 경기도 안양 열린교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 목회와 신학, 저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눴다. 김남준 목사 “나는 무신론자였다” 김남준 목사는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대뜸 스스로 무신론자였음을 밝혔다. 루터와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부터 존 오웬 등의 신학을 연구하는 이 시대의 기독 지성인에게 무신론자라는 과거는 쉽게 상상키 어려운 말이었다. 김 목사는 “갓난 아기시절 기어다닐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늘 마음에 존재하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한 본질적 의문이었다”면서 “나는 그 해답을 교회에서 찾지 못했고, 스스로 무신론자로 살 것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하나님을 떠난 그가 손에 쥔 것을 책이었다. 6년간 미친 듯이 문학에 빠져 지냈다. 김 목사는 “책을 통해 상당한 위로를 받았다. 책 속에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더라”면서 “허나 그 위로가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했다. 문학은 질문만 할 뿐 답을 주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사상과 철학 등도 섭렵했지만 마음의 안식을 얻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던 중 만난 책이 바로 톨스토이의 ‘인생론’과 ‘부활’이었다. 그는 “이 두 권을 읽으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안식을 느꼈다”며 “그렇게 전도하는 사람 없이 스스로 교회에 나가서 예수를 믿게 됐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사실 나는 이렇게 교회를 크게 키우고, 어떠한 비전을 이뤄야겠다는 목표가 없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된 후 스스로의 신학에 커다란 전환점이 생겼을 뿐이다”면서 “하나님은 한 사람의 목회자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환경을 겪게 하신다. 그 경험을 통해 지금도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해결을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고 전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와의 대담 내용이다. Q. 한국교회의 다음세대에 대한 고민이 점점 커지고 있다. 다음세대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가정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모든 인간은 가정에서 양육된다. 가정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두 번째는 회심이다. 지금은 이 단어가 많이 사라졌지만,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는 것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결국 영혼이 변화되지 않으면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성경과 학문을 가르쳐야 한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통치되고 있다는 것을 지식의 습득을 통해 스스로 깨닫게 해줘야 한다. Q. 교회 내 세대 간 갈등도 심각해지고 있는데? 사실 세대간의 간극이 있는 것이 결코 이상한 것은 아니다. 매우 자연스럽다. 우리가 앞세대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듯이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다음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다만 그 격차와 간극을 강조하기 보다, 주님 앞에 함께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 사고방식이 다르더라도 주님을 깊이 만나, 하나님 말씀 안에서 서로가 소통한다면, 이해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Q. 올바른 교회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세상에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하기 위함이다. 허나 잘못된 교회는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 스스로를 잘 보이려 노력하고 있다. 교회가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방법은 빛과 소금으로 비견되는 사상과 윤리다.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이 말해 주고 있다. 그렇게 사상과 윤리를 하나로 묶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세상에 정확하게 그 진리를 전파해야 한다. Q. 목사님이 과거에 ‘답’을 찾지 못해 무신론에 들어섰듯이, 교회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에 교회는 어떠한 답을 줘야 하는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 원인은 이들의 신앙이 마음에서 우러 나온 것이 아닌 주입된 신앙이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신앙적 고백이 온전히 자기 고백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저 주입식 고백이 아닌, 세상을 향한 웅장한 고백이 될 수 있게 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들이 복음의 진수를 깊이 경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지식이 필요한게 아니다. 비록 적은 지식일지라도 마음 깊이 받아들이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다. 구원에 대한 이해도 깊이 필요하다. 구원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눈을 열어 준다. 교회에서는 이를 위해 반드시 교리 교육을 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을 하게 하고, 인간과 신을 이해하게 하는 작업들이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Q. 한국교회 신학적 수준에 대한 이견이 많다. 과연 한국교회는 폭발적 성장 만큼이나 그 수준도 성장했는가? 먼저 그 기준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신학이 복잡하고 세밀한 부분에 대한 얼개라고 한다면 단연 한국 신학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볼 때 현대 신학 자체가 점차 후퇴하고 있다는 측면이 있다. 현대 신학은 과거에 비해 매우 세밀화, 분과화 되고 있는데, 이것이 학제들간의 심각한 괴리를 낳았고, 결국 유기적인 발전을 이루는데 실패하고 있다. 한 마디로 세분화가 심해지다 보니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교회에는 다른 세계 신학들이 따라오기 어려운 독특함이 있다. 비록 한국교회가 쇠퇴하고 있따고 하지만, 기성 기독교 국가 중 이만큼 교회르 사랑하고, 충성스러우며, 기도생활을 충실히 하는 교회 역시 드문 것이 사실이다. 그런면에서 한국은 여전히 신학을 사랑하는 나라다. Q. 목회자(신학생)의 학습관행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쉽게 길러낸 목회자는 그만큼 교회에 큰 부담을 준다. 과거의 목회자는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 될 수 있었다. 그만큼 과정이 까다로웠고, 어려웠다. 결코 아무나 소화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목회자들이 깊은 고민없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20세기 이후다. 만약 설교에 감동은 있지만, 그저 그 감동이 TV 아침 프로그램의 감동과 별반 다를게 없다면 과연 이것은 좋은 설교인가? 설교에는 기독교만이 줄 수 있는 고유의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결국 기본이 탄탄해야 한다. 목회자가 되기 전에 충분히 훈련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목숨을 걸고 목회를 배우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목회는 현저히 다르다. 그런 면에서 신학생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강도 높은 목회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Q. 삶의 주요 키워드를 꼽는다면? 매순간 조금씩 달라지지만 지금 내안에는 실존, 진리, 은혜, 타의, 행복라는 말이 가득하다. 실존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의 명제이며, 진리를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해명을 준다. 은혜 없이는 진리를 누릴 수 없으며, 이 모두를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누리고 있다. Q. 열린교회의 양육방식은 어떠한가? 열린교회는 교리 중심의 교육을 한다. 흔히 교리가 어렵다는 인식이 강한데, 사실은 교리를 이해하고 나면 오히려 모든 신앙적 가르침이 매우 쉽게 받아들여진다. 교리를 가르치면 사람들이 어려워 할 것이라는 편견을 갖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다. 우리교회에서는 교리반(12주)을 수료치 않으면 서리집사 외 임직을 할 수 없으며, 구역장, 교사 등도 맡을 수 없다. 교리반 과정은 1시간 30분씩 총 12번을 진행하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치러 85점 이상이 나와야 자격증을 쥐어 준다. 약 300여명이 이상이 매번 본 과정에 참여하며, 이미 자격증을 받았더라도, 공부를 위해 재차 과정에 참여하는 이들도 상당수가 있다. Q. 명성교회로 대표되는 한국교회의 세습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세습에 대해 단 한번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다. 세습이 특권으로 비춰지고 있는 현실에서 굳이 그런 비난을 감수하면서 굳이 그 교회를 자기 자녀에게 물려줘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 역시 아들이 있지만 한 번도 비슷한 생각도 해 본적이 없다.(김 목사의 아들 역시 목사다) 당장 내일이라도 세습에 뜻이 없다는 것을 공표하라면 할 수 있다. 아들은 내가 낳아서 둥지에서 기르기는 했으나, 이제 떠나서 자유롭게 세상을 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나? 혹여 성도들이 아들을 담임으로 원한다 해도 내가 철저히 반대다. 순전히 실력에 의한 청빙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우리교회에 올 필요가 더 없지 않나? 못난 나도 이만큼이나 왔는데 실력이 좋다면 어디 가서든 못하겠나? Q. 앞으로의 계획은? 여태까지 책을 한 80여권 쓴 것 같다. 그저 하나님의 소명이었다고 생각한다. 현재 책을 한 5권 정도 동시에 집필하고 있는데 조만간 2권 정도가 완성될 것 같다. 특히 요즘 ‘마음’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읽으면, 공감이 가는 책을 집필하고 싶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9-08-27
  • 창조문예 임만호 장로 “문학은 시대를 초월한 공유의 산물”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중- 시퍼런 총칼의 억압만이 가득한 암울한 일제 강점기, 별과 바람을 노래하며,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민중들에 약속했던 시인 윤동주. 그의 노래는 희망이었고, 생명이었다. 한 권의 시집은 나라를 잃은 아버지의 애국심이었고, 한 줄의 시는 오늘을 사는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문학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6.25를 지나 근대 민주화를 이루는 동안 문학은 우리 시대가 지었던 기쁨과 슬픔과 아픔과 감격의 표정을 기록했다. 문학은 또 다른 역사의 증거로 그렇게 우리는 문학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감성을 모두와 공유하고 있다. 그런 문학은 기독교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시편과 잠언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문학은 하나님의 복음을 이 땅에 전파하는 가장 위대한 매개체다. 한강의 기적에 비견될 정도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국교회의 대부흥의 이면에도 한국 기독교 문학이 자리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 국민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윤동주로부터 시작된 문학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성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오늘, 시인 윤동주가 뿌린 한국 기독교 문학의 씨앗이 수많은 기독교 작가들에 의해 널리 퍼져, 하나님의 복음이 아로 새겨진 열매로 세상을 촉촉이 적시고 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창조문예’ 한국 기독교 문학의 수준은 가히 전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들의 역량은 물론이고, 그 대대적인 참여도는 일반 문학과 구분되어 한국 기독교 문학이라는 독립적 장르를 구축했다. 한국 기독교 문학의 이러한 발전이 가능했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월간 창조문예’(발행인 임만호 장로)의 등장을 빼놓을 수 없다. 흩어져 있던 기독교 문학을 체계화 시키고, 정제된 검증을 통해 이를 다시 대중들에 소개한 창조문예는 단번에 한국 기독교 문학계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교계의 신뢰와 인정을 바탕으로 기독교 작가들의 공식 등용문으로 자리하며, 기독교 문학의 지경은 엄청난 확대를 이룰 수 있었다. 올해로 22주년을 맞은 창조문예, 여전히 한국 기독교 문학계를 대표하는 창조문예의 성공과 발전 뒤에는 발행인 임만호 장로의 노력과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임 장로 본인 역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하나님의 복음 위에서 기독교 작가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창간했다는 창조문예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 짙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고 있다. 창조문예, IMF로 폐간 위기 겪기도 “오늘도 시리도록/ 차가운 거리에서/ 순례자는 방황하는 어린 양 한 마리/ 어둠으로 고요한 지금/ 당신의 체온을 느끼며/ 영혼의 쉬임은/ 안식의 호흡으로/ 저녁의 커튼을 드리웁니다” -임만호 ‘안식의 호흡’ 중- 창조문예가 지난 22년을 이어오는 동안 배출한 작가는 무려 307명이다. 경제적 위기에 가장 예민한 출판계에서 단 한 번의 결간 없이 266호를 발행한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고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녹녹한 것만은 아니었다. 지난 1997년 한국교회에 제대로 된 문학 정론지가 없던 시절 창조문예의 창간은 그야말로 모험이었다. 모두가 뜯어 말렸고, 그 역시도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은사인 김신철 선생(아동문학가)의 명령(?) 섞인 권유와 박종구 목사(월간목회 발행인)의 적극적인 추천을 물리치지 못한 임 장로는 결국 우려 반, 기대 반으로 창조문예를 창간하게 된다. 그러나 우려가 현실로 변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서가 아니었다. 창간 1년 후 터진 IMF는 생존마저 위협했다. 그나마 운영의 기반이 되어줬던 크리스챤 서적조차 위태한 지경이었고, 결국 창간 1년 만에 폐간을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크리스챤 서적에서 출간했던 ‘반주 주석 성경 세트(35권)’에 대한 대량 구매가 이뤄진 것이다. IMF 위기로 사람들의 문화 지출이 극도로 축소된 상황에서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임 장로는 “이는 정말 기적이자, 하나님의 은혜였다. 주석 성경과 출판에 대한 노하우가 빛을 발하기도 했지만, IMF라는 괴물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면서 “이를 통해 창조문예는 결국 폐간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나님이 창조문예를 주관하셨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사건이었다”고 회상했다.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자리를 잡지는 못했다. 여전히 주변에서는 기독교 문학 잡지에 대한 성공을 의심했다. 창간 초기에는 잡지에 실을 작품 수급조차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발생하는 손해는 어쩌면 당연했다. 사실 임 장로는 예나 지금이나 적자가 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고 전했다. 임 장로는 창조문예를 운영하는데 있어 재정에 연연하지 않았다. 적자를 극복하기 보다는 그저 감내했다. 사업하는 사람에 있어 적자를 감내한다는 것은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한 힘든 일이지만, 임 장로는 이를 사명으로 버텨냈다. 창조문예가 이대로 문을 닫는다면 이제야 자리잡고 있는 기독교 문학계의 후퇴는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렇게 버텨내면 시간이 지나자 창조문예는 그의 바람대로 기독교 작가들의 놀이터가 될 수 있었다.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권위 있는 등용문이 되었다. 임 장로는 “나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사실 사업적인 부분만 따진다면 창조문예를 결코 성공했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창조문예는 지금 모든 기독교 문학인들의 사랑을 받는 그리스도의 공간으로 성장해 왔다. 이는 경영학으로 결코 평가할 수 없는 너무도 소중한 가치다”면서 “특히 307명이라는 기독교 작가들을 배출했다는 것은 창조문예에 있어 가장 큰 성과이자, 하나님의 축복이다”고 말했다. 기독교 문학의 저평가 “차이를 무시한 근본적 오류” “흙으로 빚었어도 흙이 아닙니다/ 당신을 닮게 하신 마음입니다/ 꽃처럼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임만호 ‘나의 영혼’- 임만호 장로는 유독 기독교 문학에 대한 강한 긍지와 자존심을 내비쳤다. 기독교 문학이 일반 문학에 비해 한 단계 수준이 낮다는 일부의 비아냥거림에 “한국 문학의 흐름을 모르는 매우 무지한 평가”라며 매우 거세게 반응했다. 임 장로는 “지금까지 한국 현대 문학 속에서 기독교 문학을 평가하는 작업이 거의 없었다. 이는 분명 한국교회가 문학을 등한시한 결과이기에, 한국교회의 잘못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기독교 문학을 저평가 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가 있다”면서 “현대 문학에서 기독교의 기여는 매우 결정적이리만큼 상당한 수준이다”고 정정했다. 이는 130여 년 전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선 이후 의료, 교육, 경제 등 근대 발전에 있어 기독교가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일반적인 상식에 더해 문학 발전에 있어서도 기독교가 근간을 이뤘다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한글 성경의 보급은 우리나라에 한글을 대중화시키는 토대가 됐고, 이는 기독교가 단순한 외래사조나 외래종교가 아닌 우리 민중의 생활 속에 용해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임 장로는 “한국 기독교 문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는 1919년 순 문예지 ‘창조’는 현대 문학 사조의 새 영역인 자연주의·사실주의 문학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 잡지의 주요 동인이었던 김동인, 전영택, 주요한 작가의 작품 속에는 기독교 정신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면서 “기독교 문학에 대한 근거 없는 단순한 편견을 넘어 역사적 측면에서의 연구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어필했다. 결정적으로 기독교 문학과 일반 문학 간의 근본적 차이를 지적했다. 일반 문학이 예술적 기교와 언어적 유희에 상당히 치중하는 반면 기독교 문학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복음에 있다는 점이다. 즉, 기독교 문학의 근본적 목표는 복음의 전달로, 결코 이를 일반 문학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임 장로는 “기독교 문학의 근간이자, 정수라고 평가받는 것은 바로 성경이다. 그 중에서도 잠언과 시편은 감히 평가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본인 역시 성경을 시로 표현하는 여러 연구를 하고 있지만, 잠언이나 시편에는 결코 견주지 못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독교 문학의 예술적 기교가 일반 문학에 비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결코 복음을 핑계로 예술적 한계를 무마하겠다는 꼼수가 아니라, 종교라는 편견으로 작품에 대한 순수한 평가가 이뤄지지 않는 현실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기독교 문학이라는 것이 특별히 일반 문학과 일정 선을 긋고 영역을 나눠 구분할 수 없는 점도 언급했다. 이미 기독교가 우리나라의 최대 종교로 자리하며, 일상의 문화 속에서 자연스레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학의 절대적 특징인 함축과 비유는 굳이 하나님이나 복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 없이도 충분히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게끔 하기에 기독교 문학을 특정 영역에 한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오류가 있다는 설명이다. 이를 두고 임 장로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윤동주의 작품을 기독교 문학과 일반 문학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라며 “그의 작품은 종교를 넘어 모두가 사랑하며, 그 수준 또한 최고로 인정받지만, 그는 분명한 기독교 문학가였다”고 덧붙였다. 달팽이의 꿈 ‘창조문예 문학학교’ “달팽이는 두 뿔로 꿈을 꾼다/ 흙으로 여민 가슴 내밀고/ 축복으로 내려오는 빗살 속에/ 달팽이는 경건한 기도로/ 세미한 음성을 들으며/ 두 뿔로 꿈을 꾼다” -임만호 ‘꿈꾸는 달팽이’ 중- 기독교 문학을 체계화 시킨 임만호 장로의 또 다른 목표는 바로 교육이다.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문학 교육을 통해 기독교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이미 서울 강남에 위치한 창조문예 사옥 지하에 마련한 공부방을 통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임 장로는 추후 ‘창조문예 문학학교(가칭)’를 시작해, 후진 양성 뿐 아니라 기독교 문학의 이론적 정립과 연구를 병행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창조문예 문학학교’라는 임 장로의 도전은 창조문예라는 기반이 있기에 충분한 실현 가능성이 있다. 매년 창조문예를 통해 등단하는 신진 작가들에 정규 교육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임 장로는 “등단이라는 개념은 작가로서 무르익거나 완성됐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 첫발을 내딛었다는 걸음마의 상징이다. 당연히 등단 이후에 체계적인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그동안 한국교회에는 문학 교육에 대한 정규적인 커리큘럼이 없었다. 이를 학교를 통해 정립할 수 있다면 기독교 문학의 상당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고 기대했다. 여기에 현재 한국교회 위기의 결과로 나타난 주일학교의 위축에 있어, 문학을 통해 이를 타개하는 방안도 고민 중이다. 주일학교 어린이나, 중·고등부 청소년들이 문학을 통해 쉽게 성경의 메시지를 접하며, 교회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임 장로는 “문학은 작가 스스로에 만족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더구나 기독교 문학은 복음을 담고 있다. 복음을 널리 퍼져 나갈 때 그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다”면서 “한국교회의 위기 극복에 있어 문학계가 담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면 언제든 최선을 다해 협력할 것이다”고 약속했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9-03-14
  • ‘하나님 사랑의 비밀’을 찬양하는 가수 노영희 선교사
    “다음에는 아픈 환우들의 위한 노래를 하고 싶어요. 내가 아픔 속에서 겪었던 좌절과 고난,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찬양으로 표현하고 싶어요. 제 찬양을 듣고 아픈 친구들이 희망을 찾고 더욱 힘써 기도하길 바랍니다” 찬양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희망을 그리는 찬양사역자 노영희 선교사의 노래가 새해 유난히 싱그럽다. 칠흑같은 어둠속에 남몰래 스미는 새벽의 잔잔한 광명처럼 듣는 이의 가슴에 은혜와 축복의 씨앗을 퍼뜨리는 노 선교사의 찬양은 새해 교회와 국민의 안녕과 축복을 기도하고 있다. 한때 유명 노래강사로 큰 인기를 얻었지만, 지난해 복음성가 1집 ‘하나님 사랑의 비밀’을 내고, 현재는 CCM 가수 활동하고 있는 노영희 선교사는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행복 전도사다. 노래 강사, 웃음 치료사 등 심상치 않은 경력에서 느껴지듯 그녀의 에너지는 언제나 넘쳐 흐른다. 누구보다 건강한 웃음과 노래로 주변을 행복하게 하고 있는 노 선교사를 보며 그녀가 한때 몸을 까닥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심각한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았었다는 사실을 유추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28살에 찾아온 고난, ‘류마티스 관절염’ “내가 찬양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마저 그 분의 계획안에 있음을 알리고 싶어서다. 고난 앞에 감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 그녀에게 처음 류마티스 관절염이 찾아온 것은 젊디젊은 28살이었다. 관절염은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나 겪는 병인 줄 알았건만, 예고도 없이 어느날 그녀가 마주하게 된 관절염은 그녀의 인생을 나락으로 빠뜨렸다. “관절염이 너무 심해 몸 오른쪽이 완전히 변형됐다. 다리는 절고 손은 부채꼴 모양으로 틀어졌다. 2년 넘게 한의원을 전전했지만 병의 차도는 전혀 없었다” 나아지지 않는 관절염도 문제였지만, 더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가방조차 들지 못할 정도로, 심각해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니고 있던 직장은 관두고, 친구들은 하나 둘 그녀 곁을 떠나갔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외톨이가 되었다. “사람이 혼자 남게 되다 보니까 의지할 곳이 필요하게 되더라. 그러는 순간 엄마가 말하시던 교회가 생각났다. 예전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교회 나오라는 말이 갑자기 귓가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날로 교회에 찾아갔다” 그렇게 마주한 교회에서 그녀는 “고난이 축복입니다”라는 설교를 듣는다. 충격이었다. 단 한 번도 그녀는 자신이 겪고 있는 저주와도 같은 고난이 축복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고난이 축복이 될 수 있을까? 그날부터 그녀는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에 매달렸다. “정말 매일 같이 왜 고난이 축복인지를 알려달라고 부르짖었다. 주일예배 뿐 아니라, 새벽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빠지지 않고 나가며, 기도에 매진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기도에 쉽게 응답을 주지 않았다. 5년 넘게 기도에 매달렸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 사이 더욱 악화된 관절염에 병원에서는 출산으로 인해 몸이 주저 앉을지도 모른다며 결혼조차 만류했었다. 정말 이제 끝이구나는 생각에 말라붙었던 눈물이 다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에 응답했다. 바로 지금의 남편을 통해 말이다. 소개로 만난 남편은 그녀의 아픔까지도 감싸줬다. 모든 것은 품어줬다. 포기했던 그녀의 인생에 다시 희망을 불어 넣어줬다. “내가 포기한 나를 감싸안는 남자친구를 보며 다시 살고 싶어졌다. 그리고 다시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사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먹던 약까지 끊었기에 희망을 갖는 것 자체가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바로 그 순간 이뤄졌다. 다시 찾아간 병원에서 관절염이 모두 나았다는 의사의 대답을 들었다. 투병생활 8년 만이다. 고난을 통해 깨달은 ‘하나님 사랑의 비밀’ “하나님은 내가 나를 버릴 때 응답을 주시더라. 그 고난을 속에서도 나를 더 버리길 원하셨더라. 나는 고난 속에서 하나라도 더 챙기려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모두 비우고 그 분께 나를 온전히 맡기길 원하셨다” 지난 8년간의 투병생활은 그녀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정말 눈물나는 투병이었지만, 너무도 감사한 고난이었다. 고난을 통해 나를 비우고 하나님께 나를 맡길 수 있게 됐다. 고난을 통해 그녀에게 준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그녀의 1집 타이틀 곡 ‘하나님 사랑의 비밀’은 고난에 맞서는 그리스도인이 삶의 자세를 담고 있다. “파도야 내게로 오라 그 고난의 거센 파도야 마음껏 찬송 하자구나 마음껏 기뻐하자구나···주님 사랑해요 하나님 사랑의 비밀을 찬송합시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난 앞에서도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자는 그녀의 노래는 그녀의 신앙 간증이다. 사실 복음가수가 된 지금 그녀의 상황이 좋다고만은 볼 수 없다. 노래강사로 자리 잡았던 지난 날과 비교했을 때 새롭게 들어선 복음가수의 길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의 고난을 참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시 써주실 것을 믿고, 더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새로운 목표가 있다면 환우들을 위한 찬양을 부르는 것이다. 자신이 투병 중에 겪었던 좌절과 포기, 하나님에 대한 원망 등 누구보다 환우들의 심정을 잘 알기에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간증을 담은 찬양을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다. “특별히 내가 부르는 찬양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게 아니다. 그저 그 분들의 아픔을 공감하며, 그 분들에게 내가 만난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의 참된 의미를 전하고 싶을 뿐이다. 그 분들이 다시 희망을 품고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게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의 전부다” 한편, 노영희 선교사의 앨범 구매나, 찬양집회 문의는 전화(010-8383-1641)를 통해 가능하다. <차진태 기자>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9-01-12
  • 인터뷰/ 신사참배 회개대성회 반대성명서 낸 최흥호 목사(고신)
    한국교회는 현재의 우상 ‘단군상’ 척결운동에 힘 모아야 지난 28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신사참배 80년 회개 및 3.1운동 100주년을 위한 한국교회일천만기도대성회’가 열렸다. 3만 여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인 이날 회개 기도는 뜨거웠으나, 이 기도회의 근본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교계인사들도 있었다. 그 중에 신사참배 80년 회개 기도대성회를 오히려 “회개하고 철회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한 최흥호 목사를 만났다.△최 목사님은 왜 신사참배 80년 회개 기도를 반대하는가?△최흥호 목사: 첫째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지금 대한민국은 국가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한국교회가 국가위기를 바르게 보는 눈을 가지고 교회와 사회를 바로 이끌고 가야 하는데 이 위중한 시기에 국가위기를 위해 기도하기는커녕, 이미 역사가 되고만 신사참배 회개 기도를 또 다시 하는 것은 ‘물타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신앙의 선진들은 일사각오 신앙으로 그 서슬퍼런 일제와 싸웠다. 그런데 그 신앙정신을 이어 받으려고는 하지 않고, 같은 사안을 두고 두번 세번 회개 기도만 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뭐있나. 둘째는 이번 신사참배 회개기도을 추진한 인사들이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를 거론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일제의 악랄한 박해를 규탄하지 않고, 신사참배에 저항하여 신앙을 지켜온 귀한 종들의 일을 외면하고, 한국교회를 싸잡아 “신사참배한 죄인이다”라는 주장은 용인하지 못한다.△신사참배 회개 기도를 ‘또 다시’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는데,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대한 진정한 회개를 언제했는가.△최: 비록 강요에 위해 저지른 짓이라 할지라도 신사참배는 용납할 수 없는 우상숭배의 범죄이다. 공교회가 저지른 이 범죄에 대해 수 차례 회개 기도가 있었다. 1948년 남부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제27회 총회 결의를 무효화 하고, 1954년 제39회 총회는 전 총대들이 회개 기도를 했으며, 2008년 제주컨벤션센터에서 모인 예장 합동, 통합, 합신, 기장 연합총회에서는 대대적 회개 기도회를 하였다. 그러므로 계속되는 회개기도는 속죄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거듭된 회개를 한다면 이는 오히려 신앙의 선진들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앞으로 90년, 100년에도 또 회개 기도를 계속 할 것인가.△기독교 신앙은 ‘회개’가 전제된다. 회개는 할 수록 좋은 것 아닌가.△최: 옳은 말이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회개할 부분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뚤어진 것에 대해 자각이 없다. 한국교회는 역사의 우상보다 오늘의 우상과 싸워야 한다.△오늘의 우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최: 지금 전국의 학교, 공원, 공공장소 등지에 세워진 단군상이 360개가 넘는다. 한국교회는 이 단군상을 20년동안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교회가 힘을 모았으면 벌써 해결될 문제였는데, 이 ‘보이는 우상’과 또 ‘보이지 않는 우상’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이다.△보이지 않는 우상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최: 보이지 않는 우상은 기복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이다. 한국교회는 이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 교계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우상에 얽혀있으면서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고 ‘회개하자’고만 한다. 회개는 언제나 자신이 먼저여야 하는데, 회개의 의미를 모른채 회개만 주장한다. 회개는 죄를 향해 가던 길을 돌이키는 것이다. 자신은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회개만능’만 부르짖는다.△최 목사님은 단군상과 싸우면서 감방도 가고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나.△최: 지금이 한국교회에서 우상 척결운동이 필요한 때이다. 현재 우리 앞에 있는 우상과 싸워야 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에 대해 교회가 기도하고 협력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단과의 싸움에 너무 매몰되어 더 중요한 우상과의 싸움은 외면되고 있다. 이 일이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할찌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한국교회가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있다. 이단으로 인해 나라가 망한 일은 없어도, 우상으로 인해 나라가 망한 예는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지금 우리 앞에 있는 38선도 한국교회가 신사에 90도로 허리 꺾어 절한 범죄에 대한 결과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최: 한국장로교회가 공교회적으로 신사참배 결의를 한 것은 1938년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당시의 천조대신의 화신인 현인신(現人神) 소화 천황의 나이는 38세였고, 그 우상 앞에 허리를 90도로 꺾어 절한 결과 한반도의 허리인 38선이 생겼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 38선은 한국교회가 우상과 싸워 이기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터뷰/ 강춘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11-08
  • 인터뷰/ 한국교회평신도단체협의회 제39회 신임 대표회장 박 서 원 정교
    평신도 정체성 확립, 동성애 반대, 나라 위한 기도 운동 등 추진 계획 한국교회평신도단체협의회(평단협)는 지난 10월 25일 제39회 정기총회를 열고 신임 대표회장에 박서원 정교(77세, 구세군 강동교회 원로)를 선출했다. 구세군의 '정교'는 장로교의 '장로'에 해당하는 평신도 대표이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평단협의 대표회장에 선출된 박서원 정교의 새로운 각오와 소신, 계획을 들어 보았다. -정체성 확립과 연합일치운동평단협은 1980년 10월 한국교회의 교단을 대표하는 평신도들이 모여 연합과 일치를 위해 창립한 단체입니다. 그 창립정신을 살려 함께 모이고 일하는 평신도의 열정을 보여주는 단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평신도운동의 정통성과 연합활동의 기본을 살려 나가는 모범이 되는 단체로 이끌고자 합니다. 각 교단 평신도 단체 역시 그 나름의 계획과 추진하는 일들이 많겠지만, 우리 평단협은 교단의 대표들이 모여서 범교단적이며, 범사회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합을 위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지도자로서 화합과 일치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우려 화합과 일치의 정신으로 일해 보려고 합니다. 저의 나이도 나이지만 이제 생애의 마지막 직책이라고 생각하고 일하겠습니다.-함께 이루어가는 개혁과 갱신의 길로우리 평단협의 회원들이 근래에 이르러 참여도가 많이 낮고, 협력하는데 미온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교파를 초월하여 모였으니 각자 교단의 명예를 걸고 참여하도록 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착안하여 모이고 일하는 사명자의 모습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뜻을 같이하여 이름만 걸고 있는 회원이 아니라 정말 평단협의 목적에 함께 동참하여 연합단체의 면모를 바꾸는데 힘쓰겠습니다.개혁이라고 함은 제도나 기구를 뜯어 고치는 것을 말하고, 갱신이라고 함은 실정에 맞지 않는 낡은 것을 현재 상황이나 환경에 맞도록 바로 잡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자세와 기준으로 변화하고 새로워지는 사회와 교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그 중심에서 작은 일부터 착실하게 추진하고 세워 나갈 것입니다.특히 우리 전임 회장님들의 관심과 지도가 필요하고, 해당 교단이 참여하는데 적극 나서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의 시대적인 사명을 일깨워 나가겠습니다.-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대한 철저한 준수작금 우리 국가와 사회에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동성애 문제와 동성혼 문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섭리를 부정하는 것이고, 가장 큰 죄악이기 때문에 우리는 앞장서서 배격하고 반대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동성애 문제는 우리 교회가 절대적으로 막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보고만 있을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하여 앞으로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처 방안을 연구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반대집회에 참가하는 등 노력을 할 것입니다.-국가를 위한 기도운동오늘까지 대한민국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립니다.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는 원동력은 한국교회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회, 경제, 안보 등에서 어려운 여건들을 극복하고 일어서게 하신 놀라운 은혜는 우리 교회가 눈물 흘려 기도한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오늘날의 어려운 국가적 상황을 바라보면서 기도의 열기가 식어져 가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깨어나서 나라와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평단협도 기도하는 단체로 변모하여 ‘기도 성회’ ‘기도 운동’을 펼쳐 가려고 합니다. 국가의 미래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살아있는 평단협의 목소리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평단협이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세월을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활력 있는 모습으로 사회와 교회를 향해서 적극적으로 다가갈 것이며,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목소리를 외칠 것입니다. 평단협이 늙었고 침체된 감이 있는데 젊은 세대를 영입하고 이들로 하여금 변화하고 새로워지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필요합니다. 그 목소리는 특별 세미나와 집회, 기자회견, 성명서 발표 등으로 표출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 교회 밖으로 나갈 수도 있는 것이지요.-박서원 정교가 살아온 여정저의 선친께서는 구세군 서산 음암교회의 특무정교(목회자인 사관의 부재 중에 목회를 담당할 수 있는 직책)로 계셨고, 모태신자인 저는 주일학교와 찬양대를 봉사하면서 어린 시절을 고향 충남서산에서 보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갑종 장교로 군에 입대하여 중령으로 제대하기까지 대대장으로서 복무했습니다. 25년간 군 참모경력을 마치고 이어서 국방군무원 3급(부이사관)으로 17년간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2002년에 구세군 정교로서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저는 죽는 날까지 군인인 셈입니다. 저는 아내 조윤경 부교(권사)와의 사이에 2남을 두고 걱정할 일 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김형원 주필>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11-08
  • 어떻게 지내십니까 / 김정남 장로
    전국원로장로회, 바이블아카데미, 평지협 등 여러 단체 참석 김 정남 장로(77세, 예장합동 장위제일교회 원로)는 새벽4시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후에 60여명에게 ‘카톡전도’를 전하고 이미 성경을 100독을 했지만 성경을 읽고, 남은 시간에 간단한 실내운동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교계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 장로는 은퇴하였지만 매일같이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김 장로는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군(軍) 입대하기 전 대구 성덕교회(당시 배순조 목사 시무)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총회가 운영하는 성경학교에서 공부하며 앞으로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전역 후 69년에 서울로 와 꿈꾸고 계획했던 신학은 포기하게 되었고 사회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의류생산업체인 성은상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김 장로는 사업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10여 년 동안 승승장구함으로 빠르게 경제적인 기반을 닦게 되었다.김 장로가 사업을 하는 동안 부도와 여러 어려움도 많았지만 다시 재기하여 62세가 되까지 성공적인 사업을 토대로 자녀교육과 노후대책을 든든히 세우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동대문시장에서 사업을 하면서 ‘동대문선교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역임하며 여러 선교사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지금은 점포를 임대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다.김 장로는 서울에서 장위제일교회 개척당시부터 섬기면서 35세 이른 나이에 장로로 장립 받아 본 교회에서 담임목회자를 3대에 걸쳐 모셔왔다고 한다. 교회를 섬기면서 “항상 감사하고, 또한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장로로서 교회를 섬기게 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고 있습니다.”김 장로는 총회 총대로 나가면서 교단의 정체성과 목표를 잘 알게 되었고, 경기노회에서는 일찍 부노회장을 역임하였다. 교단적인 연합활동에도 앞장서온 관계로 서울지구 장로회연합회, 전국장로회연합회, 전국남전도회연합회의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은퇴 후에는 전국원로장로회연합회 부회장과 초교파연합회인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공동회장을 맡아 열정을 다하고 있다.김 장로는 지금까지 말씀과 기도, 찬양 중심으로 살아왔으며,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로 충현교회를 담임했던 고 김창인 목사님이라면서 “나의 흥망이 하나님께 매여 있다는 분명한 소신으로 성경에 기초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살아왔다”고 말한다.김 장로는 부인 이호순 권사(75세)와의 사이에 3남을 둔 행복한 신앙가정을 이루어 살면서 진실, 성실, 성결을 가훈으로 자녀들을 키웠다고 한다. 지난날 자신이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이어 장남이 신학을 하도록 하였으나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에 자신이 없다고 다시 경영학을 전공하여 사업에 열중하고 있으며, 차남은 직장에 3남은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김 장로는 3남 모두가 결혼한 후에 각 각 주택을 마련해 준 것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너희들은 이제부터 부모를 의지할 생각을 하지 말고 각기 자기 생활에 충실해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김 장로는 한국교회에 대하여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바로 하지 못하여 안타깝고, 진실로 구원의 등대와 방주가 되어야 한다”라면서 안타까움을 말하고 있다.연합사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순수하게 복음을 어떻게 잘 전하겠다는 계획보다는 자리다툼으로 서로가 고소고발로 얼룩진 것을 보면서 한탄스럽다면서 진리 안에서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김 장로는 “저는 노후대책도 되어 있고, 우리 부부가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저의 남은 생애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신앙의 계대(繼代)를 이어 선교의 가문을 이루는 것이 남은 생의 소원입니다”라고 했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07-12
  • 특별인터뷰/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 채의숭 장로
    대의그룹 12개 회사 경영, “꿈과 기적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대의그룹 12개 회사를 설립하여 성공한 경영인으로서 39개 국에 무려 100개의 교회를 세우는 등 기적 같은 일을 해낸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 채의숭 장로(80세, 대의그룹 전 회장)를 만나 그의 삶과 신앙에 대해 들어 보았다.--고교 2학년 때 가진 큰 꿈채의숭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군(郡) 내에 하나밖에 없는 대천감리교회를 다니면서 목사님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이때부터 높은 이상을 가지고 큰 꿈을 품게 되었다. “저는요 이때에 세 가지 꿈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박사와 교수가 되는 것, 둘째는 큰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 되는 것, 셋째는 100개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지요. 지금에 와서 보니 하나님께서는 기적같이 그 꿈을 다 이루게 하셨지요.” 놀라운 기적이 채 장로의 생애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채의숭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서 전역한 후에 취직을 하기 위해 삼성그룹, 은행원, 고급공무원 등 세 곳에 응시하여 당시 취직이 어려운 때지만 한꺼번에 모두 합격하는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 회사사장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기 때문에 우선 삼성그룹에 입사하여 6년7개월을 근무했고, 다시 대우그룹이 창립될 때에 스카우트(scout)되어 13년 간을 근무하였다. 이후 그는 1985년 부도가 난 회사를 인수하여 회사를 설립하고 41세에 명실공히 사장이 되었다. 또한 1984년에는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이어서 명예경영학 박사와 선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넘치는 복을 더하여 주신 결과로 오늘의 대의그룹은 12개의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고, 박사학위도 받고 선교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선교에 대한 열정, 100개 교회 설립채의숭 장로는 서울 화양감리교회에서 36세에 장로로 장립 받았으며, 45세부터 선교에 대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2년 스리랑카에 처음 교회를 세웠고, 브루나이, 라오스,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중국 등 공산권과 이슬람권 등 교회를 필요로 하는 나라와 지역과 오지(奧地)에 모든 핍박과 반대에 굴하지 않고 교회를 세웠다.채 장로의 열정은 아무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하고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열정을 도우셨고, 마침내 39개 국에 100개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후에도 9개 교회를 더 세우고 열번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준비 중이다.채 장로는 장로로 시무하면서 선교에 적극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신학공부를 해 장로 은퇴 후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것은 오지 선교지에 세워진 교회는 목사의 신분으로는 비자가 나오지 않고 출입이 어려운 상황에서 채 장로는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그곳 성도들이 갈망하는 세례를 베풀고 축복을 해 줄 수 있는 좋은 방편이 되기 때문에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좀 더 폭을 넓혀 선교재단을 설립하여 체계적인 사역을 위해 일하기로 하고 ‘재단법인 대의미션’을 설립하였다. 자신의 소유 4층 빌딩과 얼마의 금액을 출연하여 설립된 재단은 앞으로 세계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것으로 기대된다.-제9대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 취임채 장로는 2016년 12월 제9대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에 취임했다. 대통령을 모시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인 국가조찬기도회는 연례적으로 개최해 온 매우 중요한 한국교회의 대표적 단체이다. 채 장로가 회장에 취임하면서 금년에는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가 제50회로 개최되는 뜻 깊은 행사가 지난 3월 8일 일산 킨텍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40개국 대표를 초청하였고, 이날 5천여 명이 참석하는 성대한 행사를 개최했다.채 장로는 국가조찬기도회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이번 제50주년을 맞아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세계국가조찬기도회'를 만들려고 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대한민국의 디아스포라(Diaspora)가 750만에 이릅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국가조찬기도회를 조직하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3개 도시에 조직이 되어 있고, 독일, 오스트리아, 이스라엘, 스위스, 영국, 스페인, 이태리, 프랑스 파리 등에 국가조찬기도회가 만들어졌다. 앞으로 일본의 동경, 오사카와 타이완, 필리핀, 말레시아 등 동남아시아 6개 국에도 조직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저는 과감하게 선교차원에서 세계 국가자체를 위해 조찬기도회를 조직해 나갈 것입니다.”면서 확고한 포부를 밝혔다.-베스트셀러가 된 저서, 1천 여회 강사로 초청받아채 장로는 지금까지 3권의 책을 출간했다. ‘주께 하듯 하라’ ‘하늘경영’ ‘주와 함께 하라’ 는 저서는 100만부 이상의 판매 실적을 올린 책으로서 채 장로 자신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어릴 때의 꿈을 실현하게 된 간증과 기업경영에 있어서 놀라운 기적을 이루게 된 것과 100개 교회 설립 비전을 담아 엮어 놓은 책이지만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로 판매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2014년 2월 14일에는 ‘주와 함께하라’ 출판감사예배가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려 성황을 이루었다.채 장로는 네 번째 책을 집필 중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으로, 실의에 빠지고 낙심된 자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그의 저서로 인한 유명세는 1천 여회가 넘는 강연, 간증, 설교에 초청받기에 이르렀고, 사회적으로도 각종 모임과 행사에 축사, 격려사에 초청을 받아 분주하게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활력이 넘치는 건강, 남은 계획채 장로는 41세에 사장이 되어 하루 4시간 수면을 하면서 회사경영에 몰두하다보니 건강에 이상이 왔다. 고혈압과 당뇨, 심장수술 두 번에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고, 신장에도 이상이 생겨 과로로 쓰러지게 된 것이다. 결국은 인슐린 주사를 맞으면서 병상에 눕게 되었다.채 장로는 무엇보다 선교를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 안타깝기만 한데 “하나님 선교를 못하게 됐습니다. 병상에서 일어나게 해주세요.”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에 브루나이에 교회 개척예배가 있어 꼭 가야 하는데 의사는 절대 안 된다고 하였지만 그는 지팡이를 잡고 참석했다. 그곳에서도 매우 어려운 형편에서 기도하자!는 일심으로 지난날 어머니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생각났다. “십자가 보혈로 이 환자의 병을 낫게 해 주세요.” 채 장로는 이 기도를 반복해 하였더니 기적같이 치유가 되었다고 고백한다.채 장로는 부인 김효신 권사(78세)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결혼 51년에 이르기까지 부부싸움 한 일 없으며, 운전기사도 45년간 함께하고 있는 것은 사랑과 은혜의 결과라고 했다. 채 장로는 설립된 ‘대의미션재단’에서 앞으로 계획적인 선교를 추진해 나갈 것이며, 또 다시 100개 교회 세우기와 저술활동에 진력하겠다고 말했다. 채의숭 회장 프로필△1939년 6월 22일생△화양감리교회 원로장로△대우 아메리카 사장△건국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제9대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 회장△재단법인 대외미션 이사장 <인터뷰/ 주필 김형원 장로>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06-28
  • 어떻게 지내십니까 /
    “사무실에 출근, 독서하고 친구 만나 환담하며 좋은 시간 가져”원로장로회, 영남교직자회, 나라사랑동지회 등 모임에 참석하여 교제 김수덕 장로(78세, 예장합동 새샘교회 원로)는 본인 소유의 사무실에 출근하여 성경읽기와 독서로 시간을 보내면서 찾아오는 친구들을 만나 환담하면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저는 목과 허리 디스크로 인하여 불편한 몸이지만 사무실까지 약 2km 가량의 거리를 매일 걸어서 출근하는 것이 운동이라면 전부이지만 다른 이상이 없이 건강하고 즐겁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고 말한다. 매주 2~3회 정도는 원로장로회와 나라사랑동지회, 기독시민운동, 재경영남교직자회 등에 참석하여 식사하고 친교하면서 신앙에 대환 환담을 나눈다고 한다. 김 장로는 1960년도에 경북 문경에서 상경하여 서울에 정착하기까지 어릴 적 고향 ‘과곡교회’에서 집안의 친척들의 반대와 핍박에도 잘 인내하였고, 서울에서는 예장합동 소속 ‘동원교회’에서 열정적으로 일하면서 섬기게 되었다. 항상 앞서고 헌신적으로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긴 김 장로는 84년에 장로장립을 받았다. 김 장로는 교회를 섬기면서 모든 일에 중심역할을 하였고, 과묵한 그의 성격대로 노회에서도 회계를 맡아 헌신하면서 장로회와 남전도회 그리고 영남교직자회 등에서 임원으로 앞장서 일했다. 그러나 교회의 여러 복잡한 사정으로 인하여 장로 다섯 명이 뜻을 같이하여 ‘새샘교회’를 개척하여 떠나게 되었고, 오늘까지 이 교회를 섬기고 있다. 김 장로가 교회를 섬기면서 가지고 있는 철학적인 결심은 “저는 교회에서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히 드리고, 무엇보다 교회예산의 5~10%를 저 자신이 부담하기로 다짐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해보니까 하나님께서는 축복해 주셔서 되도록 인도해 주셨다고 한다. 김 장로는 70년대 초 처음 시작한 신약 도매업(삼성약품)으로 상당한 재정적인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제약회사가 열악한 가운데 약품도매업이 잘 운영이 되었지요.” 이후 몇 년이 지나서 제약회사들이 자립하고 도매업이 재미가 없을 때에 김 장로는 과감하게 도매업을 정리하고 소폭직물회사인 삼선직물회사를 설립하여 회사가 잘 운영되었다. ”저는 사업에 성공하려면 사람을 잘 만나야 하고, 연고를 잘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면서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좋은 만남을 통해 사업을 성공하게 해 주셨다고 회고한다. 김 장로는 성공한 기업가로서 교회를 잘 섬기면서 많은 존경과 격려를 받게 되었고, 지금의 ‘ㅅㅇ빌딩’을 매입하여 노후를 위한 좋은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89년에 소유한 ㅅㅇ빌딩은 30여 년 전에는 변두리의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도시계획으로 인하여 건물 값이 크게 상승하였고 임대수익도 배가되는 복을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 임차인들이 좋은 사람들이 들어와 아무런 염려와 불편함이 없이 빌딩을 운영하면서 행복한 노후를 보내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건강식품회사와 삼성지정정비회사, 노인케어전문회사 등 좋은 업체가 입주하여 건물주인 김 장로는 흔히 보는 임대료 때문에 골치 아프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 것이다. “저는 내가 잘해서 된 것은 없고요 오직 하나님께서 좋은 길로 인도해 주셔서 물질에 어려움 없이 지금까지 교회를 섬기면서 살게 되어 감사합니다.”김 장로는 부인 윤이매 권사(72세)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고, 자녀들 모두가 신앙생활을 잘하며 자랐고 성장하여 결혼하여 사회인으로 당당하게 살고 있다. 장남은 패션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차남은 학원을 운영하고 있고 장녀는 결혼 후에도 회사에 재직 중이라고 한다. “우리 부부가 노년까지 건강하게 살게 된 것이 감사하고 아이들이 믿음의 바탕아래 성실하게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감사합니다.” 김 장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물질적인 복을 누리고 살게 되었고, 사업에서도 성공하게 된 것은 물질적인 관념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깨끗함과 분명함에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 대하여서도 “교회가 물질만능 사상에 사로잡혀서 본질을 떠나 하나님의 사역에 등한히 하여 인본주의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입니다.”라고 개탄했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06-20
  • 임석환 장로
    참전유공자 사무실 출근, 서울에 원로장로회 등 각종 모임 참석 임석환 장로(86세, 예장합동 포천 송우교회 원로)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회에 참석하고, 자신의 농장과 골프장 주변의 청소와 풀과 나무 등 조경을 가꾸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임 장로는 건강을 위해서 별다른 운동을 하지는 않지만 “워낙 활동을 많이 하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건강을 덤으로 주시는 것 같다”면서, 서울에 나갈 일이 없으면 포천의 참전유공자 사무실에 출근 한다고 한다. 6.25 참전유공자로서 포천지역 회장을 역임했다. 포천을 벗어나서는 주로 서울로 외출을 하는데 전국원로장로회연합회, 한국기독교원로장로회연합회 그리고 잃은양찾기운동본부 등의 모임에 매주 3회 정도 참석하여 교제하며 좋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임 장로는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1950년 6.25 전쟁 당시 피난하여 바로 육군에 입대하고 전쟁에 참전하였다. 고향 북한 땅에는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을 남겨두고 아버지와 피난 나오는 중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고, 형과 함께 남쪽으로 넘어 왔다. 이들 형제는 함께 군에 입대하여 전쟁 중에 형은 전사했고, 임 장로는 혈혈단신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저는 제대 후에 연고지가 없어 군 생활을 하던 가까운 포천에 정착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를 반겨 주는 사람이 없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구걸을 하는 거지생활로 사회생활을 시작 했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기에 23세의 나이로 밥이라도 먹고 지낼 수 있는 길을 찾다가 남의 집 머슴으로 들어갔으나 고된 일을 감당할 수 없어 그만 두었어요.”어느 날 자신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노인 엿장수를 만나 그의 권유로 엿장수 생활을 3년여동안 하였다고 한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살라’는 말을 듣고 그래도 엿장수는 자유로워 맘대로 일하고 자유롭게 교회에 갈 수 있었기에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연유로 고물상을 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일하던 중 고물상 주인은 신실한 그를 보고 그곳 ‘만세교’ 다리 근처에 고물상을 차려주었다. 고물상은 점점 더 번창해 갔다.임 장로는 그 후 4.19 혁명 때에 고물상을 그만두고 인근 군부대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고 제법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포천에서 의정부 사이에 한 교회가 종각을 세우고 있는 것을 보고 그분에게 “일을 좀 할 수 있는 자리가 없느냐”고 하니까 마침 그분은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었다. 그 인연으로 지금의 포천의 송우교회 쪽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잘 풀려 나갔습니다.”라는 임 장로는 그동안의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다시 축산업을 시작하게 되어, 양계, 돼지, 젖소 등을 기르는 ‘청림목장’을 운영하면서 파격적인 수익을 얻게 되었다.임 장로는 앞서 교회당 건축에도 빚을 얻어 헌금하여 대지구입과 건축에 힘을 합하였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니까 감당할 수 없도록 목장이 늘어났고, 사업이 번창하여 넉넉한 생활을 넘어 포천 지역의 당당한 유지로 나서게 되었지요. 정말 잘 풀렸지요.”임 장로는 그로부터 교회 일은 물론이며, 포천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 인물이 되어 지역 활동을 하게 되었고, 교단과 연합사역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가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여 이렇게 큰 복을 받아 누리게 된 것은 3대에 걸친 신앙가정에서 태어나 어떠한 어려움과 난관에서도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결과일 것이다.임 장로는 윤선애 권사(80세)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어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2남은 목회자로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으며, 자녀들 모두가 신앙으로 바로 자라서 사회생활을 잘 하고 있다. 임 장로는 가장 보람 있고 감사한 것은 자녀들이 모두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자란 것이라고 말했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05-31
  • 김부흠 장로
    원로장로회, 나라사랑본부, 노회장로회 등 조찬기도회 열심 김부흠 장로(88세, 대신총회 남서울노회 평화교회)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여 여러 단체 조찬기도회에 참석하면서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한국원로장로회연합회, 교단 남서울노회장로회, 대한민국사랑운동본부 등에 매주 조찬기도회에 참석한다. 그동안 함께했던 라이온스클럽에도 매주 모임에 참석하여 교류하면서 분주한 시간을 보내며 매우 건강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다.“저는 건강을 위해 별다른 운동은 하지 않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병원에 한번 입원한 일이 없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김 장로는 명문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자퇴하고 군에 입대하여 헌병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육군 2사단에서 근무했다. 6.25 전쟁 중에 군부대에서 군목을 통해 전도받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오늘까지 신앙으로 살아오고 있다.김 장로의 집안은 철저한 불교 집안이었으나 예수님을 영접한 후 변함없이 믿음을 지켰다고 한다. 그리고 "제가 군 헌병대에 근무할 때에 당시에는 같은 사병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근무했지요."라며 자랑스럽게 말한다.김 장로는 전역 후에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경제인연합회에 입사하여 사무총장을 맡아 일하면서 많은 사업을 주도하고 참여했다. 1969년 당시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에 일본을 시찰하여 우리나라에 필요한 경제 문제를 배우고 산업화에 대한 소신을 가지고 경제개발에 필요한 일들을 열정적으로 맡아 일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영등포기계공업단지, 구로공업공단지, 반월공업단지, 충주공업단지 등등의 설립과 사업추진에 참여해 날밤을 새울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이는 김 장로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고 큰일을 해 낸 것으로 자신은 평가하고 있다.김 장로가 장로 장립을 받은 것은 예장합동교단 충현교회에서 1975년이었고, 현역으로 있으면서 노회와 총회에 많은 헌신을 하였다. 은퇴한 후에는 예장대신교단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면서 연합운동에 참여하여 헌신하고 있다."저는 연합활동을 그저 앉아서 하는 것보다 찾아가는 연합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각 지회로 돌아가며 모이면서 회전하는 연합활동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활력이 생겨 납니다."최근에는 한국원로장로회연합회에 참여하면서 대표회장에 취임했으나 김 장로의 강력한 개혁성향 주장에 회원들의 반대로 협조가 어려워 사퇴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참여를 통해 열정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함께 일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김 장로는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대하여 말하면서 "무엇보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목사님들의 기득권 주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서로 양보하고 밀어 주면서 교회를 위한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집행부가 결정하여 추진하는 일에 따르며 협력하면서 사랑으로 하나 되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김 장로는 부인 임순자 권사와의 사이에 3남을 두었으나 임 권사는 97년에 소천했다. "저는 우리 집사람이 떠나고 나서는 정말 너무 허전하고 외로워서 못 살 것 같은 심정이었다."며 부인 임 권사가 살아 있을 때에는 김 장로의 사회활동에 많은 기도로 후원을 했다고 회고한다.김 장로는 임 권사와의 사이에 3남이 있다. 장남은 목사로 사역하고 있으며, 차남은 사업에 종사하고 있고, 삼남은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 극진히 아버지를 잘 섬기고 있다고 한다.김 장로는 매일 새벽기도로 시작하여 반드시 성경을 몇 장 읽고 난 후에 다른 일을 시작한다고 했다. 김 장로가 즐겨부르는 찬송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이고, 또 좋아하는 성경은 시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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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으로 초대
    201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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