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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침묵과 중립… 김정석 목사의 ‘위태로운 리더십’
- 지난 16일 올림픽공원, 불법과 부정으로 얼룩진 6.3 지방선거를 규탄하는 감리교 목회자들의 시국선언 현장은 뜨거웠다. 거리에 나선 청년들과 신학생들의 분노에 응답하듯 발 벗고 나선 목회자들의 외침은 엄숙했다. 그러나 이날 현장에서 터져 나온 가장 날카로운 화살은 뜻밖에도 교단의 수장, 기독교대한감리회 김정석 목사를 향하고 있었다. 시국선언에 참여한 목회자들의 성토는 거침없었다. 이들은 김정석 목사의 철저한 침묵을 두고 “지난 2024년 12.3 비상계엄 선포 당시에는 교단 수장으로서 누구보다 발 빠르게 계엄 비난 성명을 냈던 인물”이라며 꼬집었다. 전 국민적인 부정선거 분노 앞에서는 철저히 입을 닫고 있는 그의 행보를 향해 “공인으로서 지극히 편향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는 멸칭과 함께 “120만 감리회 공동체는 깊은 유감과 분노를 표명한다”는 직격탄이 날아들었다. 김정석 목사의 리더십을 향한 이 같은 질타는 비단 이번 선거 정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감리교 보수권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교단 내 퀴어(동성애) 문제에 대한 그의 소극적인 태도를 강하게 비판해 왔다. 모 목회자가 퀴어축제에서 축복식을 거행하고, 이것이 추후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연속 축복식 사태로 번졌을 때, 감리교 목회자들은 자발적으로 모금까지 해가며 이들을 치리하기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감리교 재판 과정을 감수하며 ‘교리와 장정’이라는 교단 헌법과 성경적 가치를 지키려 했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총회 재판국은 이들의 노력을 보지 못한 듯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했다. 최고 지도자가 적극적으로 발본색원하기는커녕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는 비판과 함께, 교계와 사회에 마치 감리교가 동성애를 용인하는 듯한 잘못된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해묵은 불만이 쌓인 상황에서, 6.3 지방선거 사태에 대한 또 한 번의 ‘선택적 침묵’은 결국 시국선언문 한복판에 그의 이름이 비판적으로 박히는 도화선이 됐다. 문제는 이러한 잡음이 감리교 내부를 넘어 한국 교계 전체로 확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석 목사는 현재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의 대표회장직을 겸임하고 있다. 선거가 아닌 사실상 순번에 따라 자연스레 오른 자리다. 하지만 한교총 역시 이번 지방선거 사태에 철저히 몸을 사리면서 비판의 화살은 교계 일반으로 넓어졌다. 신학생들까지 들고 일어난 시국에 한교총이라는 거대 연합단체가 보여주는 보신주의적 태도는 대중의 실망을 키우고 있다. 더욱이 한교총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김정석 목사의 ‘태도’에 대한 구설은 지도자로서의 자질에 대해서도 잡음을 야기하고 있다. 상임회장단 회의 시간을 자주 어긴다거나, 타 교단 및 단체 인사들에 대한 존중이 다소 결여되어 있다거나 하는 등의 볼멘소리는 "아무리 대교단의 수장이자 초대형 교회의 담임이라 할지라도, 연합운동에서는 겸손과 낮은 자세가 기본이어야 한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감리교 수장, 한교총 대표회장이라는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초대형 교회 담임이라는 배경이 결코 무관하지 않음은 자명하다. 허나 초대형 교회 담임이라는 위치에서 더욱 겸손을 붙들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온전히 그의 노력에 의한 열매가 아니라는 주변의 부러움 섞인 시선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아픔에는 눈을 감고, 교단 내부의 원칙 수호에는 미온적이며, 정작 연합의 자리에서는 겸손치 못하다는 비판. 120만 감리교회와 한국 교계를 대표하는 지도자의 리더십이라 하기엔, 그 행보가 다소 위태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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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침묵과 중립… 김정석 목사의 ‘위태로운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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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파주의 작은 교회’ 어깨에 지워진 짐, 우리는 언제까지 바라만 볼 것인가
- 기자의 기억 속 경기도 파주의 운정참존교회는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변두리의 평범한 개척교회 중 하나였다. 담임인 고병찬 목사 역시 기독교계의 거대한 정치를 쥐락펴락하는 교단 지도자도 아니고, 막강한 재력이나 권력을 가진 인물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성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기도를 이어가는,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한 목회자일 뿐이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이 작은 교회와 평범한 목회자의 이름 뒤에는 늘 ‘우파의 대명사’라는 무거운 프레임과 함께, 셀 수도 없는 고소·고발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사실 그들이 강단과 삶을 통해 외쳐온 주장들은 특정 정파나 극단적 이념이라기보다는, 성경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대한민국 수많은 보편적 교회들의 고백과 맞닿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운정참존교회와 고병찬 목사는 이념의 반대편에 선 이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어 유례없는 고난을 받아왔다. 고 목사가 그간 겪어온 법적 공방의 명목들은 실로 눈을 의심케 한다. 선거법 위반부터 코로나 시기 방역관리법, 사립학교법(학원법) 위반, 그리고 입에 담기조차 힘든 아동학대죄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압박이 가해졌다. 결과는 늘 같았다. 수사기관과 법원은 매번 ‘무죄’, ‘혐의없음’, ‘불송치’라는 결론을 내리며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진실은 밝혀졌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었다. 하지만 법적인 ‘무혐의’가 곧 ‘고통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죄 판결 한 줄이 나오기까지 일개의 작은 교회와 힘없는 목회자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무분별한 고발과 악의적인 소문 속에서 교회는 지역사회의 싸늘한 눈총과 손가락질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수십 년간 한 주일방석에서 눈물을 흘리며 예배드리던 이웃 같던 교인들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다 못해 교회를 떠나갔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주일학교 아이들은 학교에서 ‘이상한 교회의 아이들’이라는 편견과 낙인에 시달려야 했다. 사실이 아닌 억측과 프레임이 더해지면서 평온했던 한 교회의 일상은 철저히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도 운정참존교회 성도들과 고 목사는 단단했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 뿌리가 더 깊어지는 나무처럼, 성도들은 흔들리는 대신 교회를 지켰고 목회자의 곁을 지켰다. 인간적인 계산을 해보자면, 고 목사 역시 여느 교회들처럼 아무런 시대적·정치적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하고 보편적인 목양에만 전념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것을 원치 않았다. 비록 숫자는 적을지언정 진리 앞에서는 외치는 ‘소리치는 돌’이 되기를 자처했고, 자신들을 이끄는 목회자가 불의한 압박 앞에 결코 주눅 들지 않기를 바랐다. 성도들은 오히려 “우리를 위해 침묵하신다면, 그것이 도리어 진리를 찾는 일에 짐이 될 것”이라며,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진리를 향해 나아가자고 목사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 온, 눈물겨운 연대였다. 그들의 굳건한 신앙과 버팀목이 된 성도들의 모습은 분명 위대하고 대단하다. 그러나 기자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들을 향한 박수 뒤로 깊은 미안함과 속상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과연 이들이 짊어진 ‘총대’가 무조건 당연한 것인가에 대한 회의 때문이다. 어쩌면 이 땅의 모든 한국교회가 함께 나누어 져야 할 시대적 책임과 무거운 짐을, 경기도 파주의 작은 교회 하나가 온전히 독박 쓰듯 짊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도 결국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목회자고 성도들이다. 평범한 직장인이자 학부모이며, 주일이면 해맑게 웃는 평범한 아이들이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신앙생활을 누리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단지 시국이 너무도 엄혹하고 거칠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의와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잠시 광야로 나섰을 뿐이다. 언제까지 이 작은 교회의 외로운 사투를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바라만 볼 것인가. 이제는 한국교회가 응답해야 할 때다. 이들의 외로운 어깨에 메인 짐을 조금이나마 나눠 질 생각을 해야 한다. 더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이 거룩한 부담감에 동참하고 연대할 때, 우리가 바라는 사회적 정의도, 성경적 가치도 더 빨리 세워질 수 있다. 그 연대의 끝에서, 운정참존교회 성도들이 그토록 꿈꾸는 ‘평범하고 소박한 신앙생활’이라는 당연한 권리가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바란다. 한국교회 전체가 힘을 합쳐, 파주의 작은 교회에 ‘가장 평범한 일상’을 선물로 돌려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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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파주의 작은 교회’ 어깨에 지워진 짐, 우리는 언제까지 바라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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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화합이라는 이름 앞에 지워진 경계… NCCK의 위험한 종교 혼합주의
- 인류에 있어 종교가 평화를 말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다종교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이웃 종교의 경사를 축하하고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올해 석가탄신일을 맞아 발표한 축하메시지 역시 이러한 연대의 연장선에 서 있을 것이다. 전쟁과 폭력, 기후 위기로 신음하는 인류를 향해 종교인들이 마음을 모으자는 호소는 사회적으로 볼 때 그저 따뜻하고 정당해 보인다. 그러나 그 따뜻한 메시지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마음은 무겁다. 이웃 종교를 향한 예의와 존중이 지나쳐, 기독교 신앙의 뼈대를 이루는 '언어의 본질'마저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화합이라는 미명 하에 기독교 연합기관의 언어가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해 버린 흔적들이 메시지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곤혹스러운 대목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시니 온 세상이 기뻐합니다"라는 고백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세상에 오셨다'는 선언은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 아니다. 이는 인류의 역사 속으로 신(神)이 직접 걸어 들어오신 사건,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만 허락된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인 신앙 고백이다. 반면 불교의 부처는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 존재, 즉 인간의 성불(成佛)을 뜻한다. 타 종교의 성인을 존중하는 것과, 기독교적 구원론의 핵심 언어를 투영해 그를 사실상 '신의 반열'로 공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는 포용이 아니라 교리적 정체성을 상실한 혼합주의의 단면일 뿐이다. 더욱이 메시지는 기독교가 목숨처럼 수호해 온 '진리'라는 단어의 무게마저 가볍게 전락시켰다. "부처님이 오셔서 열어주신 진리와 자비의 길", "불자들을 통해 진리가 피어나고"라는 구절은 당혹스럽다. 성경이 증언하는 진리는 다원화된 가치 중 하나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절대성을 지닌다. 타 종교의 철학적 깊이를 인정하는 것과 복음의 유일성을 희석하는 것 사이의 경계선이 NCCK의 문장 속에서는 너무나 쉽게 지워져 버렸다. 인류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대목에 이르면, 이 문서가 과연 기독교 단체의 연합 공문서인지 의심케 한다.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따라 살아간다면 현재의 모든 위기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선언은 교회가 세상에 던져야 할 본연의 메시지를 망각한 처사다. 인류의 탐욕과 죄악을 치유할 유일한 소망은 십자가의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선포해야 할 이들이, 오히려 타 종교의 해법을 인류의 궁극적 구원책으로 내어놓고 있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종교 간의 대화와 평화는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다. 그러나 참된 화합은 나의 이정표를 지워버린 채 상대방의 길에 동조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을 선명히 붙드는 이들만이 비로소 타자와의 진정한 대화도 시작할 수 있는 법이다. 뿌리가 흔들린 나무는 이웃 나무와 진정으로 연대할 수 없다. NCCK는 화합이라는 명분이 기독교의 절대 진리를 허무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신학적 토대를 엄중히 되돌아보아야 한다. 본질을 잃어버린 언어는 평화가 아니라 배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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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화합이라는 이름 앞에 지워진 경계… NCCK의 위험한 종교 혼합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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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상식의 저울은 왜 교회의 문 앞에서 흔들리는가
- 법의 존재 이유는 상식의 수호에 있다. 누군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그 억울함을 풀어주고 무고함을 증명해 주는 고루한 원칙이 바로 법치주의다. 그러나 최근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담임목사를 둘러싼 일련의 사법적 판단과 이를 다룬 언론의 행태를 바라보면, 과연 우리 사회의 사법과 언론이 그 최소한의 상식을 작동시키고 있는지 깊은 회의가 든다. 사건의 본질은 이미 수년 전 정리된 사안이었다. 의혹의 시발점이었던 당사자는 진술이 거짓이었음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고, 그 거짓을 확대 재생산하며 악의적인 유포를 일삼던 이들은 사법부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고령의 유포자가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기까지, 수차례 이어진 재판부의 결론은 하나였다. 의혹은 '명백한 허위'라는 점이다. 그러나 최근 피고인 B씨를 향한 재판에서 나온 일부 판결은 법의 오랜 격언인 '입증책임'의 원칙을 무색하게 만든다. 법은 본래 문제를 제기한 자에게 증명의 의무를 지운다.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하라는 요구는, 행하지 않은 자에게 불가능을 강요하는 모순과 같다. 다른 재판부들이 일관되게 인정한 당사자의 자백과 정황 증거를 배척한 채, 피해자에게 '완벽한 부존재'를 증명하라는 식의 논리는 사법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이번 재판의 본질은 의혹의 유무가 아니라, 허위임을 알면서도 이를 유포한 행위의 정당성 여부였어야 했다. 더욱 서글픈 것은 이 불완전한 판결을 기화(奇貨)로 삼은 언론의 선택적 침묵과 폭로다. 그간 유포자들이 구속되고 해당 내용이 거짓임이 밝혀진 10여 차례의 판결에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던 모 일간지는, 교회의 주장이 일부 배척된 단 한 번의 판결문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지면을 할애했다. 이를 마주한 독자는 앞선 열 번의 법적 판단을 읽어낼 재간이 없으며, 당사자인 교회 입장에서는 공익을 빙자한 또 다른 형태의 핍박만 받을 뿐이다. 만약 이 사안의 주체가 거대 종교 기관이 아닌 일반 개인이거나, 반대로 사회적 약자였다면 사법부와 언론이 이토록 가혹하고 편향된 잣대를 들이댔을지 의문이다. 거대 교회와 영향력 있는 지도자라는 명성은, 때로 악의적인 공격을 방어할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면죄부로 작동하곤 한다. 의혹을 해명하는 과정 자체로 이미 막대한 영적,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교회 입장에서, 이러한 '진흙탕 핑퐁게임'은 잔인한 소모전이다. 진실이 눈을 감고 편견이 펜을 잡을 때 사회는 병든다. 사법부는 흔들리지 않는 상식의 법리로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며, 언론은 단편적인 판결문 뒤에 숨은 거대한 진실의 맥락을 짚어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양심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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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상식의 저울은 왜 교회의 문 앞에서 흔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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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메마른 AI 시대,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대체 불가의 교회’를 꿈꾸며
- 최근 교계의 화두는 단연 인공지능(AI)이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막연한 두려움과 거부감으로 AI를 바라봤던 시각은 이제 ‘필수적인 활용’이라는 현실론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기술의 진보를 외면할 수 없다는 점에는 필자 역시 깊이 공감한다. 하지만 얼마 전 한 교단 수양회에서 목격한 장면은 편의성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목회의 본질적 위기를 직면하게 했다. 한 원로목사는 강단에서 AI 앱의 유료와 무료 버전 차이를 설명하며, AI를 쓰지 않고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시대에 뒤처진 ‘바보’ 같은 일이라 설파했다. 주제와 본문만 넣으면 단 몇 초 만에 매끄러운 설교문이 완성되는 시대에, 굳이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효율성 측면에서는 박수를 칠 일일지 모르나, 가슴 한구석에는 서늘한 의문이 감돌았다. 과연 설교가 단순히 ‘글쓰기’의 영역일 뿐인가 하는 점이다. 목회는 사람의 영혼을 상대하는 사명이며, 설교는 그 사명의 가장 강력한 도구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완전무오한 말씀임을 믿는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전하는 설교 준비 과정 역시 성령과 함께하는 ‘영적 분투’의 시간이어야 한다.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한 단어 한 문장을 고르기 위해 고뇌하는 과정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감이 목회자의 삶을 통과해 성도에게 전달되는 필수적인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중견 시인이자 작가이기도 한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가 최근 일간지 칼럼 ‘AI는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를 통해 던진 통찰은 큰 시사점을 준다. 그는 AI의 결정적 한계를 ‘영혼의 부재’로 짚어냈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AI에는 인간 특유의 ‘망설임’이 없다는 지적이었다. 컴퓨터 공학적 관점에서 망설임은 성능 저하를 뜻하는 ‘버퍼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에게, 특히 목회자에게 망설임은 단순한 느림이 아니다. 그 사이 수많은 사고와 고민이 교차하며 영혼과 정신이 성장하게끔 하는 ‘연단의 시간’이다. 말씀을 전하기 전, 이 메시지가 성도들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을지, 혹은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지는 않을지 망설이며 머리를 싸매는 그 시간이 설교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소 목사의 시와 글을 좋아한다. 그가 노래하는 광야와 꽃에는 맑은 영혼의 숨결이 느껴진다. AI도 광야와 꽃을 주제로 매끄럽고 훌륭한 시를 쓸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결코 담길 수 없는 것이 바로 ‘영혼의 울림’이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정보의 나열은 AI가 뛰어날지 모르나, 영혼을 깨우는 생명의 소리는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다.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의 ‘미래의 직업’ 코너에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사라질 수많은 직종이 나열되어 있다. 의사, 변호사, 판사, 심지어 기자의 이름도 올라와 있지만,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는 직업이 바로 ‘종교인’이다. AI가 영혼을 다루는 종교인을 결코 대체할 수 없다는 세상의 인정인 셈이다. 목회자들은 이 지점에서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이 기계로 대체되어도,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만은 대체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AI의 성능을 유료와 무료로 따지며 설교 준비의 편의성만 강조하는 모습은, 목회자 스스로가 AI에 의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소강석 목사는 지난 2년 전 AI 시대에 오히려 교회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 예고했다. AI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메말라버린 인간의 영혼과 그 갈급함을 채워줄 곳은 오직 교회뿐이기 때문이다. 설교의 질은 AI의 성능이나 구독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목회자의 눈물과 망설임, 그리고 연단의 시간을 통과한 ‘영혼의 메시지’가 강단을 지켜야 한다. AI 시대, 목회자가 붙들어야 할 것은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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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메마른 AI 시대,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대체 불가의 교회’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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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백석총회, 한국 장로교 최대 교단으로 올라설까?
- 한국 장로교의 역사는 곧 분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300여 개에 달하는 교단으로 나뉘어 ‘나노 분열’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것이 우리 기독교계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그간 한국 장로교단은 예장 합동과 통합이라는 두 거대 교단이 자타공인 ‘양강 체제’를 유지하며 장자 교단의 자리를 지켜왔다. 하지만 최근 이 견고한 구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바로 예장 백석총회의 거침없는 약진이다. ‘양강 체제’ 뒤흔드는 백석의 무서운 성장세 백석총회는 최근 중소형 교단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며 급속도로 교세를 확장해 왔다. 지난 5월 5일에도 5개 교단과 통합하며 아홉 번째 교단 통합이라는 결실을 보았다. 각 교단이 주장하는 수치가 상이해 객관적인 교세를 정밀하게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교계 일부에서는 이미 백석이 통합의 교세를 넘어섰으며, 합동의 자리까지 위협하거나 혹은 이미 추월했다는 분석까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이러한 성장은 우연이 아니다. 백석은 전신인 ‘합동정통’ 시절부터 ‘연합’을 교단의 명운이 걸린 사명으로 여겨왔다. 1981년 첫 통합 당시부터 분열된 장로교단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선구적 기치를 내걸었고, 2009년에는 교단 통합을 위해 명칭과 기득권까지 내려놓는 대승적 결단을 보인 바 있다. 이처럼 ‘기득권을 내려놓는 연합’이라는 백석만의 정체성이 오늘날 최대 교단을 넘보는 동력이 된 것이다. 백석의 행보를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분열된 한국 장로교를 다시 하나로 엮으려는 진정성 있는 시도와 노력에 대해 아낌없는 지지를 보낸다. 300개로 쪼개진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치유하기 위한 백석의 행보는 분명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평가다. 반면, 우려의 목소리도 작지 않다. 너무 공격적인 교단 영입과 통합이 자칫 한국 장로교 본연의 생태계를 깨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장로교의 하나됨이라는 대전제에는 찬성하지만, 그 과정이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비판이다. 양적 팽창에 치우쳐 질적 성숙이나 정체성 확립이 뒤처질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최대 교단’ 그 이상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때 백석총회는 이제 ‘최대 교단’이라는 수식어를 넘어, 자신들이 내건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토대 위에서 진정한 교회의 회복을 증명해야 한다. 단순히 숫자를 늘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장종현 대표총회장의 말처럼 인간의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연합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백석의 시도가 한국 장로교의 부끄러운 분열사를 끝내는 ‘치유의 마중물’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될지는 앞으로의 행보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백석이 던진 ‘연합’이라는 화두가 한국교회 전체에 묵직한 울림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장로교 최대 교단을 향한 백석의 도전이 양적 1위를 넘어, 한국교회 전체를 하나로 묶는 질적 지도력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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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백석총회, 한국 장로교 최대 교단으로 올라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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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소강석 목사의 ‘감성’이 존중 받아야 하는 이유
- "It is difficult to get the news from poems yet men die miserably every day for lack of what is found there." (사람들은 시에서 소식을 얻기 어렵지만, 많은 사람들이 결국 중요한 것을 얻지 못해 비극적으로 죽어간다) 미국 '이미니즘' 시학의 핵심으로 꼽히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 1883~1963)는 인생의 말년에 쓴 시 '아스포델, 저 지옥 같은 꽃'(Asphodel, That Greeny Flower)에서 이와 같은 문장을 토해낸다. 감성이 메마른 시대, 오직 삶의 실리만 앞세우는 시대에 대한 비관을 담은 이 문장은 한 마디로 "시 따위는 인생에 도움이 안된다"고 외면하는 시대를 향한 작가의 한탄이 담겨 있다. 작가는 시가 현실의 ‘정보’(실리)를 제공하지는 못한다고 인정한다. 허나 동시에, 시를 외면한 채 실리만을 좇는 사람들이 결국 ‘중요한 것’, 곧 영혼을 상실한 채 비극적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영혼을 가진 인간에 있어 삶의 정답은 결코 세속적 계산이나 효율 논리로만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소강석 목사가 최근 출간한 『영혼을 담은 시 쓰기』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60여 년 전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당대 사회를 향해 던졌던 한탄에 대한, 오늘의 응답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살던 당시는 스마트폰이 지배하고 AI가 인간을 대신하는 지금보다 인간애(愛)가 훨씬 더 풍성했음에도, 그는 산업화 속에 빠르게 메말라가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을 염려했다. 반면 소 목사는 종교조차도 AI가 대신할 수 있는지를 논하는 무(無)감성의 시대 한가운데서 '메마른 영혼'에 대한 궁극적 회복을 꿈꾸고 있다. 시를 통해, 언어를 통해, 인간이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마지막 영역을 사수하는 것이다. AI가 글을 쓰고, 곡을 만드는 이 시대에도, 결코 인간의 감성, 즉 영혼의 영역은 결코 침범할 수 없다는 그의 강력한 믿음은 변화하는 시대에 '본질'에 대한 더욱 간절한 확신을 불어넣는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제4차 산업 혁명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뚜렷이 드러났는데, 그는 AI에 대한 시대의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영혼의 갈급함이 커지기에, 이를 충족시킬 교회의 존재는 훨씬 더 두드러질 것이라는 예측을 했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을 향해 '감성' '영혼'의 워딩을 토해내는 소강석 목사는 사실 그의 행보를 볼 때, 분명 엇갈리는 의문을 품게 한다. 그는 분명 현존하는 한국교회의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코로나로 한국교회가 가장 힘든 시기, 위기를 넘겨낸 불세출의 인물로 꼽힌다. 지금도 정치, 지도자의 영역에서 분명한 자기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그에게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실리를 담보치 않은 '감성'은 굳이 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정점에서도 '감성'을 노래하고 '영혼'을 구하는 그의 행보는 어쩌면 지독히도 초심에 집착하는 천상 목회자의 모습인 듯 싶다. 60년 전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며 한탄한 미국의 한 시인과 오늘 이 시대의 영혼에 다시 숨을 불어넣고자 애쓰는 한국의 한 목회자.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밥만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중요성을 공유하고 있다. 소강석 목사의 초심이 너무도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가 교계의 정점에 서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최고가 된 자리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돈, 명예, 정치, 권력이 아닌 바로 '영혼'임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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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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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소강석 목사의 ‘감성’이 존중 받아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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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합동중앙의 정통성과 김록이 목사의 복귀
- 최근 양평힐링기도원 제2성전 건축으로 한국교회 재부흥의 깃발을 내건 김록이 목사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양평힐링기도원에서 주기적으로 열리는 현장 집회가 연일 대성황을 이루는 것은 물론 김 목사의 유튜브 채널은 이미 10만명을 넘어섰다. 온라인에서 그의 영향력이 이미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주목할 것은 이미 충분한 유명세를 구축한 김 목사가 돌연 지난 9월 총회에서 그의 모(母)교단인 예장합동중앙(총회장 권필수 목사)으로 복귀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신학목회연구원의 제3대 총장과 재단영구이사장직으로 말이다. 이런 김 목사의 선택이 의아스러운 것은 이미 그는 한국교회 최대교단에 올라선 예장백석총회에서 매우 안정된 목회를 보장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굳이 극한 난장에 놓인 합동중앙에 올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합동중앙 출신의 김 목사는 일전에 백석총회에 새둥지를 트고 본격적인 힐링 부흥, 힐링 목회를 시작했다. 한국 장로교 재통합의 기치를 내 건 백석총회는 장종현 목사의 영향 아래, 중소교단을 흡수하며, 엄청난 교세 성장을 이뤘고, 이제는 예장합동측과 더불어 국내 2대 교단 반열에 올라섰다. 여기에 김 목사는 최근 양평힐링기도원 제2성전을 구축하며, 무너져 가는 기도원 문화의 유일한 돌파구로 주목받던 상황, 여기에 더해진 백석총회라는 배경은 김 목사의 기도원 성공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열쇠였다. 하지만 김록이 목사는 안정된 성공을 뒤로하고, 올해 9월 합동중앙으로 돌아왔다. 교단은 지난해 분란과 이탈측의 여파로 여전히 어수선하고, 재정, 행정 모든 면에 있어 백석총회와 비교가 불가했지만, 굳이 고난의 길을 택한 것이다. 김 목사가 지난 9월 총회에서 밝힌 복귀의 이유는 복잡한 듯 했지만 매우 간단했다. 모 교단에 대한 책임과 사명, 무엇보다 애초 백석총회로 간 것이 합동중앙으로의 복귀를 염두한 결정이었음을 강조했다. 마치 조선시대 선진문물을 공부하기 위해 고된 청나라 유학을 자처했던 학자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백석총회에서의 경험과 한국교회 재부흥의 선두로 주목받는 그의 이력은 새로운 회복을 준비하는 합동중앙에 있어 절대적인 도움이 됐다. 마치 하나님이 예비하셨던 계획인 듯, 그의 복귀는 교단이 가장 어려울 때, 가장 그가 필요로 하던 시기에 이뤄진 것이다. 무엇보다 교단 회복의 핵심으로 꼽히는 신학목회연구원의 제3대 총장까지 맡았다. 그의 영향력은 위에서 주지했듯 오프라인은 물론 온라인을 통해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만큼, 김 목사의 이름값이 교단 신학교에 입혀질 수 있다면, 그 시너지는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근래 계속되는 김 목사를 향한 근본없는 일각의 시비다. 그의 신학성을 운운하며, 시비하는 일각의 행태는 정당함보다는 질투(?)에 가깝다. 이미 김 목사는 백석총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신학의 건전성을 검증 받은 인물임에도 말이다. 백석총회는 근래 교단 규모가 급작스레 커지며 나타난 부작용을 예방키 위해 여타 장로교단과 달리, 교회 및 회원 관리를 단순히 노회에 맡기지 않고, 총회가 직접 일일이 검증한다. 김 목사 역시 백석총회에서 신학적인 부분을 매우 면밀히 검증받은 인물이라는 뜻이다. 지난 7월 양평힐링기도원 제2성전 입당 예배 당시 백석총회 이단대책위원장 박계환 목사도 이 부분에 대해 "김록이 목사의 신학적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확인한 바 있다. 항간에 일고 있는 불필요한 시시비비에 대해 백석총회의 이름으로 모두 거짓임을 확인해 준 셈이다. 사실 김 목사에 대한 이런 불편한 시비는 김 목사 자체에 대한 이슈라기보다 현재 합동중앙이 처한 상황의 여파로 보여진다. 지난해 합동중앙은 일부 인원들의 이탈로 상당한 곤란을 겪었다. 고 강용식 목사가 설립한 합동중앙총회는 지난 역사에서 수차례의 분열을 겪으며 정통성에 대한 부분이 매우 중요한 교단이 됐다. 지난해에도 교단 이탈이라는 혼란 속에 이종남 총회장이 고군분투하며, 합동중앙의 정통성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그런 합동중앙에 대외적으로 영향력을 갖춘 김록이 목사의 복귀는 합동중앙의 정통성을 무너뜨리고자하는 누군가에게 매우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미 교계 연합단체들에 이를 문제삼는 이간질(?)이 횡행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다. 합동중앙은 예전에 비해 교세가 현저히 적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자생교단’으로 성공한 사례적 측면에서 한국교회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한국교회 최고 부흥을 이끌던 오산리, 용문산, 한얼산 등의 기도원 문화를 다시 살리는 것은 회복을 고민하는 한국교회에 있어 반드시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작업이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적 가치가 불필요한 시비에 희생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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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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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합동중앙의 정통성과 김록이 목사의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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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한국 기독교 140주년, 교회는 존중받고 있는가?
-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이라는 뜻깊은 한해를 보내고 있지만, 어째 한국교회의 분위기가 좀처럼 오르지 않고 있다. 일부 교단과 단체가 1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와 이벤트를 진행키도 했지만, 사회는 물론 기독교 내부에서도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지난해 말부터 이어진 계엄과 탄핵정국, 그리고 대선의 여파로 한국교회는 자연스레 시국의 이슈에 묻혀 조용한 축제를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인천 제물포항에 첫 발을 디딘 140년 전 이 땅은 가난과 불평등이 지배한 암흑 그 자체였다. 허나 모두가 포기하고 외면했던 그 곳에 하나님의 복음은 기적을 싹틔웠고, 한국교회는 전 세계 유례없는 성장을 거듭하며 세계 최고의 교회들을 배출키 이르렀다. 1,000만명이라는 최대 집단, 최대 세력으로 성장한 한국교회는 단연코 대한민국의 가장 압도적인 주류가 됐다. 허나 오늘날 기독교의 사회적 입지가 심히 불안하다. 대한민국의 기적을 일군 절대적 공로자인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반국가 집단으로까지 매도되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기독교 대다수를 '극우'로 몰며, 마치 한국교회가 국가의 가장 큰 골칫거리라 말하고 있다. 급기야 최근에는 교회가 선거법 위반을 빌미로 공권력의 압수수색을 받는 것도 모자라, 상당수 목회자들이 '내란선동'이라는 이유로 고발까지 당했다. 국가와 국민을 향한 자유로운 의사 표현조차 '내란선동'으로 매도되는 것은 지금 이 사회가 결코 정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여기에 굳이 이념의 잣대로 교회의 행동을 구분짓는 것은 오히려 교회의 순수한 애국심을 왜곡하기 위한 심히 의도적인 행위로 보아진다.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역"이라고 했던가? 지난 탄핵정국 속 전국을 그야말로 뜨겁게 달궜던 한국교회의 '세이브코리아'가 이제는 언론들에 의해 '극우 집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140년 전 이 땅에 들어온 기독교는 의료, 교육, 경제 등 대한민국의 모든 토대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기독교가 없었다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복음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결코 허세가 아니다. 굳이 기독교의 근대적 기여와 업적을 알아달라고 읍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건실한 애국조차 이념의 잣대에 짓밟혀, 조롱당하는 현실은 어쩌다 교회가 이 지경까지 됐는지에 대한 불편한 자문을 하게 된다. 물론 교회의 사회적 신뢰가 무너진 것은 스스로의 잘못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교회를 향한 의도적인 공격과 왜곡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게 존재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사회와 국민은 기독교의 업적을 존중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무시해서도 안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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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한국 기독교 140주년, 교회는 존중받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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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교회에 내란선동을 묻는 몰상식한 시대
- 서부지법 투블럭 청년 이슈의 최대 피해자로 몰린 운정참존교회와 IBMS신앙공동체가 한국교회와 경찰당국을 향해 정의로운 관심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다. 좌파 유튜버에 의한 근거없는 '거짓 좌표' 공격 이후, 그야말로 교회와 신앙공동체가 붕괴 직전까지 놓인 것인데, 이러한 흐름이 자칫 한국교회 전체로 번질까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 6월 13일, 경기도 의정부에 위치한 경기북부경찰청 앞에는 불법 고발에 대한 경찰의 공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운정참존교회(담임 고병찬 목사) 성도와 IBMS 신앙공동체 부모연대(대표 김훈희 집사)의 집회가 펼쳐졌다. 약 1시간여 계속된 이날 집회에서는 자신들을 '극우집단' '내란선동 세력'으로 호도하는 고발의 불법성과 위법성을 지적하는 한편, 경찰의 정의롭고 공정한 수사를 촉구했다. 운정참존교회의 피해는 올 초 서부지법 투블럭 청년 이슈가 한창 불거진 무렵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모 좌파 유튜버가 아무 근거없이 투블럭 청년이 파주의 모 교회 성도라고 지목했고, 이후 운정참존교회는 파주 지역은 물론 인터넷 상에서 극우교회, 내란 세력 등으로 낙인됐다. 황당했던 것은 서부지법 투블럭 청년은 운정참존교회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교회측은 거짓 정보가 밝혀지면 금새 상황이 마무리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번 찍힌 좌표는 진실과 관계없이 교회를 향해 끊임없는 공격을 강요하며, 점차 고병찬 목사와 성도들의 목을 옥죄어 갔다. 교회를 향한 공격은 매우 치밀했다. 각종 언론들이 교회와 성도들에 '극우 프레임'을 씌우는 것으로 시작해 다음에는 지자체에 다양한 명목으로 교회를 신고했다. 물량 앞에 장사 없다고, 하루가 멀다하고 밀려오는 신고와 조사에 교회 전체가 넉다운 직전까지 몰렸다. 이후 이들의 공격은 교회 내 신앙공동체에까지 뻗쳤다. 교회가 학부모들의 요청으로 아이들을 위해 운영한 신앙공동체에 난데없이 '초중등교육법' 위반을 들이밀어 형사고발했다. 한국교회 대다수가 신앙과 성경을 기초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음에도 유독 운정참존교회만 문제 삼아 이를 고발한 것이다. 거기에 고병찬 목사는 '내란선동'으로까지 고발당했다. 예배 시간에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고 비상계엄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했다는 이유다. 단순히 '투블럭 청년'에 대한 오해라 생각했던 사건이 '내란선동' '교육법위반' '아동학대' 등으로까지 이어지자 결국 성도와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섰다. 이날 성도들은 각자 이번 사태에 대한 소신 발언을 펼쳤다. 모두가 고발 내용에 대한 불법을 규탄하고, 경찰의 공정 수사를 촉구하는 등 매우 당당하고 단호한 투사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실상은 뒤에서 몰래 눈물을 삼키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손을 덜덜 떨면서도 준비해 온 발언문을 끝까지 읽어 내려가는 모습은 도대체 누가 평범하고 온순한 이들을 이렇게까지 하게 했는지를 궁금케할 정도였다. 우리가 알아야 할 운정참존교회 이슈의 진실은 분명하다. 첫째, 투블럭 청년은 운정참존교회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그와 관련된 뉴스와 정보는 모두 거짓이다. 둘째, IBMS신앙공동체는 정부인가가 필요한 교육기관에 해당치 않으며, 학부모와 성도들이 자발적 헌신으로 만든 신앙공동체로, 그 속에서 아이들이 자기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 셋째,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표현의 자유를 갖고 있다. 비상계엄과 탄핵 등 이념간의 대립이 격해진 사회적 상황에서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고 이를 공유하는 것이 죄라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교회는 운정참존교회 사태를 결코 좌시해서는 안된다. 운정참존교회 사태는 일개 교회의 문제라기보다 향후 한국교회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새 정권 이후 일부에서 교회를 향한 몰상식한 상황이 벌써부터 벌어지고 있다. 일부 언론은 대선 당시 양 당에 기독교 정책을 제안한 교계 단체를 ‘로비’로 몰았다. 개인의 정당한 의견 표현은 ‘내란 선동’이 되고, 기독교 정책을 제안하면 ‘로비’가 되는 시대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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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교회에 내란선동을 묻는 몰상식한 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