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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차 한 잔의 여유
    제가 지지난 주, 미국에 다녀오자마자 홍복기 목사님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수능생 기도회를 하는데 밤기도회로 하시겠습니까? 새벽기도회로 하시겠습니까?”라며, 선택의 여유조차 없도록 밀어붙이면서 무조건 밤기도회나 새벽기도회 중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좀 당황했습니다. 아니, 교육개발원 주최로 알아서 할 수도 있는데, 언제까지 담임목사만 의존할 것입니까? 그렇지만 곧바로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제가 젊고, 얼마든지 인도할 수 있는데 저도 모르게 좀 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산행하기 딱 좋은 계절 아닙니까? 그리고 가을을 느끼며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기에 딱 좋은 때입니다. 얼마 전 제가 탈진을 했다고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께서 저에게 중국의 전통 보이차를 직접 보내주셨습니다. 이건 진짜로 최상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 목사님은 보이차가 만병통치약이라고 믿으세요. 그분은 아무리 바빠도 보이차를 마시는 여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해외를 가셔도 보이차를 항상 끓여 가지고 다니면서 보이차를 마신다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분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군살 하나도 없어요. 몸에 군더더기 하나 없이 날씬하시고, 아직 머리숱도 많으시고, 머리도 새카마세요. 그 비결이 보이차에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사랑과 배려와 정성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한 두어 주 동안 식사 후에 보이차를 마셨습니다. 물론 그때도 보이차를 마시는 여유와 즐거움을 모르고 그냥 의무적으로 마셨지요. 그런데 미국을 다녀오고 나서 아예 제 식당을 관리하는 박현옥 권사님이 보이차를 끓여주지도 않는 것입니다. 진짜 지난주는 산책 한번 못 했고, 차 한잔 즐기는 여유도 전혀 없었습니다. 큰 집회건 작은 집회건 목사는 집회를 앞두고 항상 부담감과 압박감을 가지게 되거든요. 어쩔 수 없는 목사의 운명이라고 할까요? 물론 운명이 아니라 사명이죠. 그래서 지난주는 진짜 보이차는커녕 제 일상의 시간을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산행 한 번도 못 했습니다. 아니, 설교 준비가 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산행할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차 한 잔 마실 여유를 못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수능생 자녀의 부담이 저의 부담이고, 자녀 기도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저의 부담감으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준비되면 준비되는 대로, 준비되지 않으면 준비되지 않는 대로 항상 부담감을 가졌어요. 준비가 안 되면 쫓기는 마음으로, 준비가 되면 빨리 집회 시간이 다가오는 마음으로... 그래서 금요집회가 끝나고 토요일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산행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보온통에 보이차를 끓여가서 산에서 보이차를 마시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지난주에 못 한 산행도 하고, 보이차 한 잔 마시는 여유를 갖고 살아보겠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해보지만, 얼마나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을지는 저도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여유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도 가을을 맞이하여 차 한 잔 마시는 여유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물론 금주도 기도해야죠. 수능 시험이 끝나기까지 우리는 거룩한 압박감을 가져야지요. 여러분 모두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차 한 잔 마시는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날씨는 차가워져도 따뜻한 차를 마시며 마음을 따스하게 하시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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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11-1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나라 위한 기도’(대하 7:14)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는 의미 있고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동성결혼 합법화를 반대하고 포괄적 차별금지법 악법 저지를 위한 기도회는 간절하고 절박했습니다. 현장에서 느낀 것은 우리나라를 향한 주님의 뜻과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나라와 민족을 구해야 할 긴급한 때입니다.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모여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소망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다음세대들에게 올바른 성경적 가치관을 알려주고 건강한 가정, 거룩한 나라를 물려주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악한 길에서 떠나 악법이 제정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본문을 보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며, 그 땅을 다시 번영시켜 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나라와 민족이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며 악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이 땅이 고침 받고 주님께서 다시 번영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우상 숭배와 동성애로 큰 위기입니다. 로마서를 보면, 하나님이 내버려두실 때 나타나는 현상이 우상 숭배와 동성애입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롬 1:23-24)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우상 숭배와 동성애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창조 순리에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제1계명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와 영광을 우상에게 바치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7-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순리에 불순종하여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기 때문에 죄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6-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동성 연애하는 사람들이 속히 죄에서 떠나 건강한 가정을 이루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창세기 18-19장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의 실상을 다 아시지만 그들에게 회개하여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의지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죄악이 가득해서 결국 유황과 불로 멸망했습니다. 소돔의 죄악을 보면, 저녁때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하룻밤 묵을 생각을 했는데, 롯의 간청으로 롯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잠들기 전에 소돔 성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19:5)라고 소리쳤습니다. ‘상관하다’라는 히브리어는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성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은 주된 원인은 비정상적인 성 관계, 즉 동성애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위의 성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함에 빠져서 다른 육체를 좇았기 때문에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아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유 1:7) 이처럼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 질서와 성 질서를 무너뜨리는 큰 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0장 13절을 보면,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죄값으로 죽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관계를 갖도록 하셨습니다.(창 2장) 동성끼리 성 관계를 갖는 것은 하나님의 결혼 제도와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그래서 동성 연애하는 사람들이 속히 죄에서 돌이켜 구원받고, 대한민국이 거룩한 나라 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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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심장 속 불타는 곳, 그게 우리의 사역
    저는 지난주 한국 선교 140주년을 맞이하여 주요 일간지 기자단과 함께 미국 동부를 다녀왔습니다. 일정 중 제일 먼저 한 것이 언더우드와 그의 가족들이 다니던 그로브 개혁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선교사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에 대한 꿈이 있다고 바로 선교 현장으로 올 수는 없었습니다. 나이도 어렸지만, 그는 선교사로서의 실력을 갖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명문대학인 뉴욕대학교를 입학합니다.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는 뉴브런스윅 신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학창 시절 은둔의 나라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국 선교의 꿈을 꾸고 북장로교 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로 가겠다고 지원하였지만 북장로교회 선교부는 재정이 없다는 이유로 선교사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한 장로님이 이 소식을 듣고 언더우드에게 5천 달러를 후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5천 달러면 오늘날 환산을 해보면 수십억에 이르는 돈입니다. 그 소식을 북장로교에 전달하자 북장로교회는 마침내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미국 북감리교의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함께 1885년 4월 5일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가 도착한 조선은 은둔의 나라요 미지의 나라요 온갖 우상숭배의 나라였습니다. 그의 기도문에 보면 얼마나 그가 참담한 조선의 현실 모습을 보고 개탄하였는지 모릅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이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중략)”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절망과 개탄 속에서 오히려 희망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습니까? “(상략)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중략)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하략) 그는 처음에 고아원 사역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민심이 흉흉한지 “키 큰 코쟁이 언더우드가 아이들을 미국에 팔아먹고 잡아먹는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너무 험악한 인포데믹 가짜뉴스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난관을 거쳐 광혜원(훗날 제중원으로 명칭이 바뀜)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선교사 최초로 한국어 문법서를 출판하였고, 한국 최초로 한영사전을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새문안교회를 개척하고 경신 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선교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콜레라가 창궐할 때 새문안교회를 중심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치료와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줬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그는 건강이 악화하여 미국 뉴저지로 돌아가서 요양 치료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기 전에도 꿈에도 그리운 나라가 조선이라고 했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아들과 손주들까지 한국 선교사로 오지 않았습니까? 과연 심장 속 불타는 곳, 그것이 언더우드의 조선을 향한 선교였고 그 가문의 선교였습니다. 심장 속 불타는 곳이 그의 선교였다면, 저도 심장 속 불타는 곳이 저의 목회이고 설교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니 심장 속 불타는 곳 그것이 우리 성도들의 사역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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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3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견풍전타(見風轉舵), 충언 측근을 귀히 여겨라!’
    지금 나라 안팎이 온통 난리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급기야 북한군까지 이 전선에 투입되는 극단의 상황에 이르렀다. 전혀 예상 못했던 일은 아니지만 현실이 되고나니 심란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렇다고 국내 정치 현황이 공고한 것도 아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은 20%조차도 위험하고, 여당은 분렬하고 다수 야당은 폭주하고 있다. 책임있는 인사는 없고 비판적 인사들의 말의 잔치는 절망적인 지금, 여기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다. 최고 지휘권자이며 결정권자인 대통령에게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스스로에게 모든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해소할 의무와 권리 역시 자신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재임기간에 치러진 총선에서 대패했다. 대선의 승리는 총선 승리의 견인차임에도 총선의 대패는 누가 뭐라고해도 이 원인자는 대통령이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지지자들의 절망 원인이다. 정권 말까지 윤대통령은 김건희 여사의 문제를 끌고 갈 것인가? 정치와도 경제와도 외교와도 아무 상관이 없는 김건희 여사의 문제를 털지 못해 문제 삼은 야당을 탓하고, 이를 다투는 여당 대표를 탓하고, 알아주지 못하는 여론을 탓하며, 돌연히 찾아올 어부지리를 기다리는 모습이 통탄할 지경이다. 대통령 주변에는 유능한 검사 빼고는 그리도 사람이 없는가? 어쩌면 두는 수마다 패착이고 졸수 투성이니, “하수(下手)는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를 둔다”라는 바둑교훈이 딱 이 상황이다. 사실 윤 대통령의 성적표가 지표상으로 그리 나쁜 것이 아니다. 외교는 물론 내치도 시비에 시달려 그렇지 정황에 비추어 선전하고 있지만, 정치만이 낙제점이다. 그 낙제의 중심에 김건희 여사가 있다. 사과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가? 여당 대표를 조건 없이 만나 주는 것이 그리 문제가 되는가? 야당 인사들을 만나는 것이 그리 힘든가? 솔직 담백한 직진 스타일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던 윤 대통령의 지금 모습이 너무 초라하다. 견풍전타(見風轉舵)라는 말이 있다. 바람을 보고 키를 돌리라는 말이다. 바람을 거슬러 키를 돌리면 배는 제자리를 돌거나 옆으로 회전할 뿐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도 사공은 바람을 탓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 바람을 힘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배가 힘들지 않도록 키의 방향을 잡아야만 배도 사람도 화물도 안전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배에 항해술이 뛰어난 선장이라고 할지라도 그 항해 중에 돌연히 나타날 위기 상황에 차분히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바다라고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차분히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은 선장으로서는 여간 중요한 자질이 아닐 수 없다. 야당도, 여당도, 국민도, 외국도, 김정은도, 푸틴도 대통령의 실책과 허물을 상쇄해 해줄 요인이 되지 못한다. 이 모든 난관들이 모두 대통령이 감당해야 할 상황일 뿐이다. 그것은 탓할 대상이 아니요, 넘어야 할 대상이고 힘을 얻을 동지가 될 수 있다. 상황을 부정한다고 해결되면 세상에는 해결 못할 문제가 없다. 여하간 그 키를 잡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이다. 그 키를 운전할 자신이 없으면 내려놓아야 한다. 지금 야당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이 쥐어준 대권은 그렇게 쉽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도 안된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가장 큰 적이 앞에서 아부하는 가신에게 있음을 살펴야 한다. 너무 흔한 말이지만 “양약(良藥)은 고구(苦口)이나 이어병(利於病)이요 충언(忠言)은 역이(逆耳)이나 이어행(利於行)”이라는 말을 명심하여야 한다. 충언하는 각료와 측근을 귀히 여겨야 한다.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대통령이 아니라, 모두가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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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4-10-3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영적 건축자’(눅 6:46~49)
    우리는 모두 집을 짓는 자들입니다. 집을 짓되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각자의 믿음의 집을 지어 가고 있습니다. 그 집이란 믿는 자의 삶이며 인생 전체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에 관한 비유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엄숙하고 두려운 구절입니다. 주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책망(46절)과 더불어 환난을 견디지 못할 것이며 또한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암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49절; 겔 13:10-16). 여기에서 반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순종을 가리키고 모래는 모래사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석이 나올 때까지 깊이 파지 않고 얕게 파다 말은 그냥 흙으로 된 터를 가리킵니다. 건물을 건축할 때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건축물 구조의 안전입니다. 특히 기초가 중요하기에 지반이 단단한 반석 위에 건물을 세우면 어느 곳보다 안전합니다. 고전 3:11절에서는 그리스도를 터(기초)라 하였고 눅 6장에서는 성도의 실천적인 신앙이 건축에 있어서의 기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세속에 빠지거나 정욕대로 살지 말고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자기를 건축한다는 것은 성도가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옷을 입고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자기의 인격을 만들어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못하여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이들은 결국 그 집이 무너지기에 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행함의 완성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에 대한 의지적 순종과 실천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참 성도로 만드는 비결입니다. 순종이 없고 실천이 없는 신앙은 아무리 지식이 많고 은사를 많이 받았어도 환난 풍파가 닥치면 곧 무너져 내리는 부실한 집과 같은 헛된 신앙인 것입니다.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칠”(48절) 때가 바로 신앙의 진위가 드러나는 때입니다. 그때에 순종의 반석 위에 지은 참 성도의 신앙의 집은 건재하지만 불순종의 모래성을 지은 불순종한 신앙인의 집은 그대로 무너지리라(49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의 영혼이 파괴되고 인격이 무너지면 좋아하는 것은 오직 마귀뿐입니다.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48절중)라는 말씀은 성도가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환경과 사건을 의미합니다. 누구에게나 시험과 환난의 날이 있습니다. 반석 위에 견고한 집을 짓기 위해서는 결코 듣는 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듣고 반드시 행하여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건물을 질 때 설계도면 그대로 짓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내 뜻을 죽이고 자기를 부정하며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육신에 속한 자의 삶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경성하여 우리 신앙의 모습을 끊임없이 살펴보고 깊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재료를 주십니다. 각기 다른 달란트를 주시고 사명도 주십니다. 그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짓느냐는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고전 3:12-1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말씀을 준행하되 정직과 성실로 최고의 믿음으로 나의 믿음의 집을 건축하며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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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29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아쉽지만 마음은 함께 합니다
    제가 탈진을 하여 링거를 맞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부산 세계로교회를 섬기시는 손현보 목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이러다가 한국교회가 큰 일을 당할 것 같습니다. 10월 27일 종교개혁주일 오전 11시에 광화문에서 한국교회를 지키는 연합예배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누워 있는 채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긴박한 상황인가요? 아직은 그 정도의 상황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목사님이 함께하자고 하면 해야지요. 제가 주일날 예배를 포기하면서라도 기꺼이 가겠습니다. 그러나 주일 오후에는 제가 참석할 수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기념하여 일간지 기자들과 함께 초기 내한 선교사들이 자라고 배운 신학교, 교회와 역사관을 방문하기 위해 미국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한국교회를 위한 염려와 걱정은 같았고 의견이 동일했습니다. 그 분도 단순하고 저도 단순하게 쉽게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사실 말이 그렇지 주일 낮 예배를 포기하고 광화문으로 모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주일 오전에 광화문에서 모인다는 것은 다른 집회와 괜한 혼선을 빚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그런 복잡한 계산보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동의를 한 것이죠. 저의 몸은 많이 지쳐서 계속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회 시간이 오전에서 오후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자단과 순례하는 일정을 조정하기 위하여 담당 목사에게 날짜를 조정해 보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각도로 노력해봤지만, 기자단의 출장 날짜와 선교사들의 출신 신학교 총장과 교수, 역사관 예약 등의 변경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펜젤러 선교사의 후손도 어렵게 시간을 마련했다고 해서, 이를 어찌할까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때 손현보 목사님께서 저에게 공동대회장을 맡아 달라는 간절한 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저는 이 일을 놓고 제 주변에 있는 동역자들과 의논을 하였습니다. 저는 비록 참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제 이름만은 넣는 게 좋지 않느냐고 설득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와 함께한 동역자들이 만류를 하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님, 동기와 목표는 참 좋은 것이지만 일회성 집회로는 대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으니 기도회 후에도 있을 일을 감당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적지 않는 재정적 부담도 있을거구요. 더구나 참석 못하면서 이름을 올리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날짜가 안 맞아서 출국하시는데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저희가 담임목사님을 대신해서 희망하는 성도들과 함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여당이나 야당에서도 차별금지법이나 동성애법이 발의된 게 없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차분하게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저에게도 어떤 직책을 맡으면 재정적 부담이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 저는 잠들어도 10.27, 일어나도 10.27 생각뿐이었습니다. “집회가 잘 되어야 할 텐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든지 간에 순수한 진의가 잘 전해져야 할텐데...” 저는 개인적으로 손현보 목사님께 죄송한 마음이 많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집회 시간이 오후로 변경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참여를 못하게 되었지만요. 물론 한 번의 큰 기도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략적으로 반기독교의 흐름과 공격을 막아내는 것입니다. 장수는 앞서서 전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선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죠. 어쨌든 큰 기도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방식의 차이일 뿐이지 생각은 다 똑같을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전략적으로 계속해서 반기독교 악법을 막아내는데 앞장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도 정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집회나 기도회를 통해서도 한국교회를 갈라치기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회를 우려하고 너무 비판을 하는 분들도 자제해야 합니다. 칭찬은 못할망정 비판을 하는 것은 그 또한 한국교회를 갈라치기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쉬운 마음을 전하면서 기도회가 순탄하게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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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27
  • [언론회 논평] 탁류(濁流)는 청탁(淸濁)을 가리지 않고 무너뜨린다
    지난 7월 대법원에서의 동성 파트너에 대한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아주 잘못된 판결이 결국 동성애와 이를 지지하는 세력들에게 큰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일부 진보 진영의 시민단체와 이를 지원하는 변호사 모임 등이 지난 10일부터 나서서 동성 커플 22명에 대하여 ‘동성결혼 법제화 소송’에 나선다고 발표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헌법에서 동성 간 결혼은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법을 잘 알고 있는 일부 법조인들이 이런 일에 앞장선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법의 체계를 무시하고 결국은 법의 보호 속에서 지켜온 가정들을 무너뜨리고, 우리 사회를 혼란하게 하려는 책동으로 보인다. 동성애자나 동성 간 파트너로 지내는 사람들이 극히 일부 있다는 것과 이를 법제화하겠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이렇듯 동성애를 차별하지 말고, 동성 간 결혼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것은 지난 십수 년간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근원지이다. 또 이들에게 논리를 제공하는 것은 김대중 정권 때 만들어진 국가인권위원회법 때문이다. 동성 간 결혼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낙태, 인권, 차별금지 등 온갖 방법으로 우리 사회의 근간이 되는 가정의 소중함을 파괴하고, 생명을 살상하며, 더 나아가 가정이 중심이 되어 모이는 교회의 존립에 악영향을 주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잘못된 흐름이 있게 된 것에는 일부 몰지각한 목회자들과 신학생들, 이것에 동조하는 진보 성향의 기독인들의 동참이 문제이다. 이들은 마치 타락한 도덕의식인 마른 장작에, 동성애라는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 옹호를 하면서 반대로 동성애 반대자들을 효과적으로 억압하기 위하여 만들려는 차별금지법은 뜻 있는 국민들의 노력으로 절대로 성공할 수 없게 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이런 악한 현상들을 물리치고, 가정과 교회를 지키기 위한 10월 27일 “한국교회 연합예배의 날”은 매우 긴박한 필요성을 가진다. 지금 전 세계는 동성애로 몸살을 앓고 있고, 양심과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시련과 도발이 되고 있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 되어야 하고, 도덕은 하나님이 허락한 양심에 거리끼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동성애는 인간의 가장 기본인 양심과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도덕과 사회 구성원 서로 간에 질서를 지키고, 피해를 막아주는, 안전장치인 법률마저도 무력화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이를 막는 역할이 한국교회에 주어진 시대적 큰 사명이 되고 있음을 절실하게 느끼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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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10-2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꼭 지켜내야 할 것들”
    지지난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발표가 났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대한민국 문학계에 큰 경사요 쾌거이지요. 사실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으면 좀 들떠야 되지 않겠습니까? 일반적으로라면 본인이 언론에 나와 기자회견도 하고 들뜬 소회를 밝혀야 되지요. 그러나 그녀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향에서 잔치를 하려고 하는 아버지에게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느냐”며 만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준 것은 즐기라고 하는 게 아니라 더 냉철해지라고 준 것 같다”고 밝혔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왜 그렇게 해야만 했었을까요? 그녀는 애당초 유명 스타가 되기 위해서 글을 쓴 게 아니라 자기만의 문학 세계를 열어가기 위하여 글을 썼기 때문일 겁니다. 영국 가디언지에서도 “매우 중요한 목소리와 놀라운 인간성을 가진 작가”라고 평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도 자기만의 정체성과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서 한동안 두문불출해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켜왔던 문학성 또 앞으로 전개해 나갈 밝고 새로운 문학의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서 힘을 자랑하지 않고 한동안 자기 자신을 조심스럽게 관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들뜨지 않았을까요? 들뜨지 않았으면 인간이 아니겠지요. 자신이 말하기를 “심장 속 불꽃이 타는 곳, 그게 내 소설”이라고 했다면 왜 가슴이 타오르지 않고 뛰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만 앞으로는 자신이 밝은 글을 쓰고 싶다고 한 것처럼, 자신의 문학성과 새 문학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은둔을 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지난 목요일에 공개석상에서 “지난 일주일 특별한 감동이었지만, 이전과 일상이 달라지지 않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또한 수상 소식을 통고받을 때 “믿어지지 않는 현실처럼 느껴졌다”고 했지요. 사실 인문학이란 잃어버린 존재의 질문을 다시 찾아주는 것이지만, 스스로 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 대답은 오직 성경만이 해주지요. 글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이제부터는 한강 작가가 하나님을 만나고 더 밝고 희망찬 작품을 써 주기를 기대도 해 봅니다. 저도 산책을 하면서 생각을 해보니까 앞으로 이루어야 할 일도 많이 있지만 지금까지 해낸 일들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십수 년 전부터 한국교회 대형교회 목사로서는 최초로 이슬람의 전략과 문제를 한국교회에 알려서 경각심을 일깨우고 각 교단마다 이슬람 대책 위원회를 생기게 하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또한 빌헬름 라이히의 성 혁명에 기반한 동성애 운동의 폐해를 설교와 강연, 오피니언을 통해서 알리고 한국교회동성애대책협의회(한동협)의 초대 회장을 맡으며 반동성애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수 차례 차별금지법 입법화 시도가 있었지만, 최전선에 서서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종교인 과세 문제가 대두 되었을 때도 ‘종교소득 과세’가 될 위기에서 ‘종교인 과세’가 될 수 있도록 대처를 하였습니다. 코로나 시국에서도 이미 정부에 예배의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한국교회의 사회적 이미지를 지키면서도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 모든 일들은 단 한 번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용기와 의협심도 있어야 하지만, 정말 치밀하고 전략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소회처럼, 저도 지금까지 너무 은밀한 영역에서 전략적으로 활동을 했는데 앞으로는 좀 더 선구적이면서도 격이 있는 사역을 해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걸 해 나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꼭 지켜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저의 건강과 목회, 교회와 성도들, 한국교회 생태계, 또한 개인적인 지성, 감성, 영성, 예술과 문학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하리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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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20
  • [언론회 논평] 한반도의 통일은 북한 주민을 살리는 길이다
    최근에 정치권의 한 인사가 갑자기 ‘통일을 포기하자’ ‘두 국가 체제를 수용하자’는 발언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 헌법을 고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통일부를 정리하자고 하였다. 너무나 뜬금없는 말이며, 무책임한 말이다. 그는 다름 아닌 문재인 정권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고, 1980년대부터 ‘통일운동’을 주창해 온 임종석 전 의원이다. 그가 9·19평양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서 한 말인데, 이것은 문재인 정부와 김정은 사이에 맺어진 선언이다. 그런데 북한은 지난해 11월, 이를 전면 폐기한다는 선언으로 그 합의는 완전히 무의미해졌다. 그런데 이처럼 아무 쓸모도 없는 선언을 자기들끼리 6주년 행사를 한다면서, 뚱딴지같은 발언이 나온 것이다. 문제는 이런 주장이 북한의 주장을 맹신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은 지난해 12월 당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북남 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우리 헌법 제3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임종석 전 의원은 1980년대 전대협 의장으로 임수경 전 의원을 밀입북시켜 북한에 들어가게 했었고, 2018년에는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평화를 지키고, 통일을 위하여 수많은 희생을 치루면서 기다려 왔다. 그런데 이것을 깡그리 무시하는 발언을 해도 되는 것인가? 그럴 리는 없지만, 임종석 전 의원의 발언이 매우 위험한 것은 우리가 두 국가 체제로 가게 되면, 북한이 급변 시에 북한의 주민들을 구해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또 북한 지역의 우리 영토에 대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학생운동을 했었고 1999년에 정계에 입문한 임 전 의원이 통일의 중요성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북한 당국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정치가로, 국민으로서도, 그가 20대부터 해 왔던 통일운동에 대한 진정성을 모두 부정하는 꼴이 되었다. 임 전 의원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대표 주자로 보고 있으며, 소위 말하는 386세대의 핵심으로 불린다. 이 세대는 아직도 한국 사회의 주류이다. 지난 제22대 총선에서 386세대로 구별되는 1961년부터 1969년생까지의 국회의원은 전체 300명 가운데 178명이나 된다. 그중에 더불어민주당은 자그만치 117명에 이른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하여 정치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386세대의 이런 행태는 우리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1999년 임 전 의원과 정치계에 함께 입문했던 우상호 전 의원은 최근 그의 책을 통하여 ‘총론으로 보자면 그룹으로서의 386세대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지금도 80년대식 사고에 갇혀 있고, 진정으로 민주화를 위하여 정치권에서 제대로 기여하지도 못하는 불완전한 모습이 아닌가. 40여 년을 우리 사회에서 활동하는 386세대의 잠꼬대 같은 소리를 정말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국가의 미래와 바른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것에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사회적 혼란만을 가중시키니 말이다. 우리가 통일을 포기하면 북한 주민의 생존과 인권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또 헌법에 명시된 국가의 주권을 버리는 것이 된다. 그래도 되는가? 그러려면 왜 통일운동을 해 왔는가? 통일은 현실을 외면한 환상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힘들고 어렵다고 포기할 사안도 아니다. 북한의 2,000만 주민들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불행이 이제는 멈추도록 해야 하는 것이 통일의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황당하게도 북한의 3대 세습 독재자의 말에 휘둘리는 정치인의 주장은 공허하게 들리고,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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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1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은혜를 입은 자의 삶’(출 33:19)
    성도라면 그 누구나 지나온 날들을 회상할 때 일절이 하나님의 은혜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믿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다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9절). 은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무엇을 받으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대가가 필요 없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돈으로 금은보석으로 권력으로도 이 세상에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이며 하나님께서 뜻대로 주시는 은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측량할 수 없는 넓고 큰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욥 5:9-11, 9:10-11, 11:7-9, 롬 11:33, 고후 9:14-15). 이를 통해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더 넓고 깊으며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 은혜의 고마움은 결코 인간의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 시 116:12-14에서 시인의 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우리도 이 시인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절대로 배은망덕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망각하지 말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어 가나안 땅까지 오는 한 순간 한 순간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셨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지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천국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끊임없이 계속해서 허락하여 주십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모든 과정들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볼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셨고(요 1:16)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산 것이 아닙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은혜와 평강을 더하여 주셨고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때마다 일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길을 벗어나면 영적으로 질식할 수밖에 없고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은혜가 있어야 사는 존재이오니 하나님의 은혜를 귀한 줄로 알고 마지막까지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합당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환경이나 상황을 만나든지 불평하지 마십시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로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원하십니까? 일절을 은혜로 여기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영광을 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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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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