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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하미자 목사의 ‘중보기도의 힘’(출 32:11-14)
-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입니다. 대한(大韓)은 고종이 최초로 호칭하였고, ‘세상을 밝히는 큰 지도자’라는 의미입니다. 대한민국의 호칭은 매우 중요합니다. 2008년 8월 8일부터 24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그때 204개국이 출전했는데, 대한민국은 17번째 들어가는 순서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한국으로 격하시켜서 179번째로 입장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20위까지만 관심을 두고 본다고 하는데, 대단한 홍보 효과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상을 밝히는 큰 지도자의 사명이 있는 자랑스런 나라입니다. 그 대한민국은 지금 위태위태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일 5:14) 그래서 악한 세력이 떠나 이 땅이 고침 받고 주님께서 다시 대한민국을 번영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한 모세는 백성의 우상 숭배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1-13절)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말씀하신 재앙을 백성에게 내리지 않으셨습니다.(14절) 이처럼 기도는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백성이 금 신을 만들어 큰 죄를 범하였을 때도 모세는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고 목숨 걸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기도를 들으시고 인도해주시는 주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대한민국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굳건하게 서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주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한 부르짖음을 듣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것을 알고 내려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하실 일을 알고 주님께 가까이 가서 의인이 악인과 더불어 멸망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아뢰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의 실상을 다 아시지만 그들에게 회개하여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의지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공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의인 50명만 있으면,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만 있으면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과 불로 멸망했습니다.(창 19:24) 그럼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응답 안 된 것일까요? “하나님은, 들에 있는 성들을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이 살던 그 성들을 재앙으로 뒤엎으실 때에, 롯을 그 재앙에서 건져 주신 것이다.”(창 19: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롯을 재앙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힘입니다. 에스더 4장을 보면, 에스더는 하만의 음모로 동족인 유다 백성이 멸망하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에게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16절)라고 전했습니다. 그렇게 금식하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유다 사람이 대적들을 진멸하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금식하면 기도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사람의 힘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하자 많은 사람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3일 동안 주야로 금식한 것을 볼 때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고백은 동족을 위해 자신이 죽을지라도 왕 앞에 나가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신앙의 결단이지요. 그런 용감한 결단으로 유대 민족 말살정책은 무산되고 오히려 이틀 만에 대적들이 전멸하는 대역전을 경험했습니다. 기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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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하미자 목사의 ‘중보기도의 힘’(출 3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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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 지금은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며, 그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예수께 내어 맡기고 구속한 주만 바라보는 절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잠 8:17) 사순절에 주님을 간절히 찾아서 뜨겁게 만나기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계시자이시며, 인간의 연약함을 돕는 중보자이신 것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려면, 경건 훈련을 해야 합니다.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합니다.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주기 때문입니다.(딤전 4:7-8) 경건은 사랑 실천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약 1: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순절 경건 훈련으로 회개, 절제, 기도 순으로 말씀을 살펴봅니다. 회개는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고 결단하는 행위입니다. 회개하는 날은 새롭게 되는 날, 편히 쉬는 날, 상쾌하게 되는 날입니다.(행 3:19) 우리는 회개를 통해 구원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고후 7: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항상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것은 심판받을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죄 용서받을 기쁨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더욱 회개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더 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가 생각나는 대로 더욱더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 57:15b) 그것이 바로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열심히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3:19) 회개는 오늘 바로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3:7-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자유는 성숙한 절제에서 오는 것이지요. 절제하면 낭비하지 않고 목표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절제는 이웃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모든 것에 절제할 수 있습니다. 절제하는 사람은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갈 5:22-23) 사순절에 무엇을 절제해야 할까요? 첫째, 음식 절제입니다. 에스겔 16장을 보면, 소돔성이 멸망한 다섯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교만, 음식물의 풍족함, 태평함, 가난한 사람 돕지 않음, 우상 숭배입니다. 음식물의 풍족함은 너무 먹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과식은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요. 사순절에 음식을 절제하고 영의 양식인 말씀으로 배부른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말의 절제입니다.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입을 함부로 여는 사람은 자신을 파멸시킨다.”(잠 1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분노의 말과 부정적인 말을 삼가야 합니다. “속된 잡담을 피하십시오. 그것이 사람을 더욱더 경건하지 아니함에 빠지게 합니다.”(딤후 2: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쓸데없이 지껄이는 잡담은 시간만 낭비할 뿐입니다. 침묵도 중요한 말입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해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해주는 침묵 훈련을 해보기 바랍니다. 셋째, 시간 절제입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엡 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기도하심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없이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를 택하실 때도 밤을 새워 기도하셨고, 오병이어로 수많은 무리를 먹이실 때도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께서는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해 주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면, 말씀으로 우리를 고쳐주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끌어내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시 107:20)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붙잡고 확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기쁨이 충만하면 기도응답이 된 것을 믿기 바랍니다.(요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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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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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삶’ (엡 5:17~21)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어리석은’이라는 단어는 매우 좋지 않은 단어입니다. 꼭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나 어른으로서, 성도로서 반드시 당연히 갖춰야 할 조건들을 갖추지 않았을 경우에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어리석음은 슬기롭지 못하고 둔한 경우를 말하기도 합니다. 어리석음의 반대는 지혜로움입니다. 사람이 지혜롭게 되는 것은, 그것을 원한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만 되지는 않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혜도, 사랑도, 은사도, 믿음도, 아름다운 소망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귀한 은혜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따라, 지혜를 주실 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믿음을 줄 만한 자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달란트를 주실 때도 그 사람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 각 사람의 재능에 따라 소유를 맡겨주셨다는 의미 속에는 사람마다 각각 고유한 인격과 역할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 각각의 인격과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사람에 따라서 일의 운용방식이나 책임과 인품은 제각각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받는 사람의 마음과 자세는 사뭇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막상 눈이 감기고 귀가 닫혀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자신이 스스로 귀하다고 생각하는 일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돼지에게 진주를 주어도 그것을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이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귀한 자원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본문 말씀은 술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술 취함은 방탕한 것이라 했습니다. 술은 일반 음식이나 음료와는 달라서 그것을 섭취함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어둠의 경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는 서로 화답하며 지내야 합니다.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이야기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19절). 교회 안팎에서 성도들이 만나면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눌까요? 사람 이야기, 목사 이야기, 어느 성도 이야기, 사건 이야기 등 다양할 것입니다. 물론 필요한 말을 해야 함이 당연하지만, 기본적이고 근본적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이야기나, 은혜받은 이야기,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하심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대화를 하면서 서로 간에 영적인 은혜를 누릴 수 있을 만한 주제와 내용이 오가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계절, 새로운 시절을 맞이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사는 동안, 우리나라와 교회와 각 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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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삶’ (엡 5: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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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어느 국어 선생님 속에 남은 목사의 기억
- 우리 교회 장의곤 집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원래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셨던 분입니다. 이분이 은퇴를 하시고 교회 인근 아파트로 이사를 오셨습니다. 원래 다니던 교회가 서울 강북의 먼 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 집사님께서는 교회가 멀어서 갈 수 없으니까 밤예배나 수요예배 때 우리 교회를 나오셨습니다. 그러더니 장 집사님께서는 부인이신 전순자 권사님께 꼭 새에덴교회로 옮기자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전 권사님께서는 친한 벗들이 그 동네에 많이 살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너무 머니까 결국은 우리 교회로 출석하셨습니다. 그것도 장의곤 집사님이 막 우겨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장 집사님은 우리 교회 예배를 참석하면서 정말 감탄의 감탄을 자아내셨다고 합니다. 첫째는 부족하지만 저의 설교가 너무 명확하고 시원하고 또 감동 있게 전해지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평생 국어를 가르쳐 왔지만 어떻게 저렇게 시원스러울 뿐만 아니라 감동적으로 설교를 하시는가. 그전에는 설교 시간에 많이 졸고 좀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지만 소강석 목사가 설교할 때는 한 번도 졸아본 적도 없다”고 감탄과 경탄을 하셨다는 거예요. 두 번째는 주보에 실린 목양칼럼을 보시고 너무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평생 국어를 가르친 교사였지만 어떻게 매주마다 이런 새로운 글을 쓸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아, 정말 쉽게 읽혀지면서도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글을 매주마다 어떻게 쓴다는 말인가.” 세 번째는 어떻게 목사가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냐는 것입니다. 제가 그분의 성함을 기억해 주고 항상 오실 때마다 “국어 선생님, 국어 선생님”하고 불러드렸거든요. 저는 학교 다니면서 국어와 국사 과목을 아주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더욱 “국어 선생님” 하며 반갑게 인사를 드린 것이죠. 꽤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연세가 들다 보면 몸이 노약해지지 않겠습니까? 하루는 휠체어를 타고 교회를 오셨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저의 얼굴을 보려고 휠체어를 타고 예배당 맨 뒤에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손을 잡고 “아이고, 국어 선생님” 그랬더니 “소 목사님 최고! 소 목사님 최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부축하시는 권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너무 감동이 되었습니다. 몸도 약해지며 약간의 치매기가 오셨지만, 집에서도 입만 여시면 “소 목사님 최고, 소 목사님 최고”를 외친다는 것입니다. 그 국어 선생님을 보내 드린 후 와다 히데키가 쓴 ‘감정이 늙지 않는 법’이라는 책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그 책을 보면 기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지요. 하나는 의미 기억입니다. 이것은 주로 암기를 말하는 것인데요. 연도를 외우고 번호와 숫자를 외우는 인지 기억입니다. 또 하나는 에피소드 기억입니다. 어느 식당에 갔더니 서비스가 엉망이더라, 어느 회사를 갔더니 서비스가 엉망이더라는 감정이나 에피소드로 남는 기억을 의미하죠. 그런데 와다 히데키에 의하면 치매가 와도 인지 기억은 확연하게 떨어지지만, 에피소드 기억은 거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의곤 집사님 속에 있는 저에 대한 기억은 에피소드 기억이라고 할 겁니다. 아니, 에피소드를 넘어 영적인 홀릭의 기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분에게 너무 고마운 마음도 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음의 부담감이 생겼습니다. 제가 국어 선생님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우리 새에덴교회의 역사와 또 한국 교회 역사에 좋은 기억으로 남고 기록이 되어야 할 텐데라고 하는 부담감이 생겼습니다. 저도 요즘은 숫자나 연도를 깜빡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10대, 20대의 인지(認知) 기억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성도들에게 그리고 한국교회에 많은 에피소드의 기억을 남기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보고 또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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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어느 국어 선생님 속에 남은 목사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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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3.1 운동은 아직 미완료다
- 저는 지난 금요일 국회박물관에서 있었던 3.1운동 유네스코 기념 등재 추진위원회에서 주최한 3.1절 기념식에 가서 환영사를 하고 왔습니다. 사실 3.1운동을 유엔 유네스코에 등재하는데 우리 교회가 종잣돈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절차적 과정이 남아 있지만,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3.1운동의 정신과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3.1운동은 상해의 신한청년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애국지사들에게 전이가 되고 동기부여가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서울에서 일어났던 3.1운동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갔습니다. 그리고 3.1운동을 전후로 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수고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기록이 명확하게 안 되어서 그렇지, 3.1운동의 배후에는 선교사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서는 정교분리원칙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정치적인 이슈에는 거리를 두면서 순수한 선교활동만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이 볼 때는 일제의 만행이 너무나 반민주적이고 반휴머니즘적이며 반근대적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자신의 신앙양심과 소신을 갖고 미션스쿨과 교회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 박애, 인권, 민주주의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과 기독학생들로 하여금 3.1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기폭제가 되게 한 것입니다. 사실 당시 10대 소녀들은 집에서 밥이나 하고 빨래나 하고 허드렛일이나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 미션스쿨에 다니던 10대 소녀들이 대부분 다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은 기독교 교육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화와 민주주의를 가르쳤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신앙교육을 받은 유관순이나 윤형숙 열사 같은 여학생들이 거리로 나가 태극기를 흔들며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외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3.1운동은 한국교회와 미션스쿨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아니면 3.1운동은 장롱 속 고서가 될 뻔 했습니다. 특별히 스코필드 선교사 같은 경우는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를 외치는 사진을 비롯해서 제암리 사건 사진 등을 직접 찍어서 외신기자회견까지 해서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다녔던 군산제일고등학교(당시 영명학교) 교장을 하셨던 린튼 선교사님은 군산제일고등학교 학생들이 3.1운동을 주도하였다고 교장에서 잘려서 미국으로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부지역 평신도대회에 참석하여 3.1운동의 참상을 알리고 우리 조선을 도와야 한다고 미국 전역에 알리고 다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미국에 있는 가족, 친지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더구나 소안련 선교사는 3.1운동에 대한 사건을 미국 백악관에까지 보냈습니다. 제가 필라델피아의 장로교 선교 역사박물관에 가서 보니까 그런 편지들이 수두룩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3.1운동의 정신과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민족의 자주독립을 세우는 것이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류공영과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 무저항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됐습니다. 물론 3.1운동은 아직 미완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국론이 분열되어 있고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3.1운동을 하고 독립운동을 할 때는 진보와 보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은 그 차이는 좀 달랐지만, 다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남북의 분단도 안타깝지만, 지금 우리 대한민국 국민끼리도 이념과 정파, 어떤 주의에 빠져서 대립하는 것을 보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3.1절을 보내면서 적어도 이 정도는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저는 2018년에 KBS 3·1절 특집 다큐 '이방인과 3·1운동'을 2부작으로 제작하여 방영하기도 하였습니다. 106년 전 3.1운동도 한국교회가 주도하고 이끌어갔다면 오늘날 미완의 3.1운동도 한국교회가 완성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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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3.1 운동은 아직 미완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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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다수의 대결, 차라리 왕정(王政)이 낫겠다’
-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 10:5)”라는 말씀에서 갈등을 느낀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온통 숫자 대결이다. 여기에는 선악도 없고, 참과 거짓도 무의미하며, 오직 내편, 네편의 갈등 밖에 없다. 이 갈등으로 인륜이 무너지고, 질서가 무너지고, 가치가 무너지고, 교육이 무너지더라도 이길 수 있다면 그 무너짐을 가속화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세몰이로 정권이 쟁취하고, 지키기 위해 가치 따위는 안중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세(勢)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펜덤도 그 중에 하나다. 인기 연예인이 몰고다니던 펜덤 문화가 이제는 정치인들이 또 다른 전유물이 되고 있다. 인기 연예인의 펜덤은 순수하다. 그냥 좋아서 쫒아다니는 일명 ‘빠순이’이 수준이며, 극렬 극성팬이라고해도 그 열광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펜덤은 다르다. 순수도 없고 단순함도 없다. 오직 이념적 동질성에 이기적 목적을 위해 얼키고 설켜 이 땅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있다. 지금 여당이고 야당이고 팬덤 만들기에 정신이 없고, 다수의 여론을 선점하기 위한 피나는 전쟁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 전쟁에 무너지는 현실의 것이 무엇인지, 망가지는 미래의 것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다. 이렇게 망가져가는 현실과 미래를 보면서 과연 민주라는 이름과 자유라는 명분으로 지금의 이런 사태를 대책이 없이 방관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의심해 본다. 우리의 근대사에서 급진적 경제성장을 가져온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시절이었다. 필자는 결코 그의 군사장기집권과 유신독재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장기집권의 정권 안정은 경제성장의 기반과 체계적 경제개발계획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만일 그에게서 독재의 굴레가 없이 시해당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우리 현실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것이 진정 우문(愚問)일까? 왜 필자가 안정된 왕정이 낫겠다고 말했을까? 선한 왕의 종신집권은 분명히 안정과 경제적 성장과 문화 창달의 기폭제가 될 것이다. 그에게는 팬덤이 필요하지도 않고, 여론의 조작하고 자의석으로 형성할 필요도 없다. 이 바보같은 생각을 만든 비극적 현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어쨌던 역사에서 왕정은 패배했고, 공화정이 승리했다. 민주공화정은 우리의 정치적 현실이다. 이런 정치의 현실적 승리는 투표에 있고, 그 결과는 권력으로 귀결했다. 그러면 선한 왕정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자유 민주 공화정은 없는가? 문제는 ‘민주’요, ‘국민이 주인인 나라’, 곧 ‘자유’다. 가장 바람직하고 인간적인 나라임에도 지금 우리의 ‘자유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은 자유와 민주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어 괴물처럼 흉물로 우리 앞에 있다. 지금 우리의 민주가 제대로 된 민주인가? 지금 우리의 자유가 제대로 된 자유인가? 지금 우리의 공화정이 제대로 된 공화정인가? 아무리 양보해도 이것은 제대로 된 자유민주공화국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투쟁과 교회의 기도는 ‘하나님의 왕정’이 이 땅의 ‘자유 민주 공화국’의 왕정이 되도록 해야 한다. 진정한 자유는 의무가 앞선 자유이다. 진정한 민주는 책임지는 시민의식이며, 진정한 공화정은 대화와 타협의 정치 미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실종되어버린 의무와 시민의식과 대화와 타협의 정치미학을 되돌려 놓음이 투쟁의 급선무이다. 어쩌면 이것을 잃어버린 시간만큼의 회복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지금부터 이 싸움을 시작하여야 한다. 왕정을 끌어올 수 없는 이 시대에 우리의 새로운 왕정은 정상적으로 국민이 왕의 자리에 올라서는 일이다. ‘의무와 시민의식과 정치미학’을 신봉하는 이가 소수일지라도 그 사람들과 함께 시작하여 그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이미 망가져버린 현실의 우리 자유민주공화국을 고치려고 해봐야 될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쿠데타도, 비상계엄도 방법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제는 소수의 왕정의식을 가진 이들이 모여 혁명을 준비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혁명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제대로된 ‘의무와 시민의식과 정치미학’은 신정에서 왕정으로의 전환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천부적인 권리이다. 이것을 포기하면 펜덤에 휩싸인 독재자이며, 이런 사회는 비극적 몰락과 갈등과 대결의 피투성이만 보게 될 것이다. 차라리 왕정이 낫겠다는 현실적 생각에서 출발한 결론이 너무 이상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러나 정치이념 자체가 이상적이지 않는가? 유토피아는 현실이 아님에도 우리는 그것을 열망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열망하는 유토피아가 그리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인간적인 열망이 실현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이름없는 자의 간절함이다. 그 간절함이 올바른 자유민주공화정을 왕정으로 완성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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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다수의 대결, 차라리 왕정(王政)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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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대통령 탄핵 사건 헌재가 제대로 재판할 수 있나
-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야당 중심)로부터 탄핵을 당하여 현재는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에서 심리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헌재에서 절차상의 문제와 편파적인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국민적 비판들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절차상의 문제이다. 윤 대통령이 국회로부터 탄핵을 당한 것은 비상계엄의 법적 절차와 ‘내란죄’ 문제이다. 국회 측은 비상계엄으로는 대통령을 탄핵하기에 부족하다고 보고 내란죄를 넣은 것인데, 국회 쪽에서는 후에 내란 문제를 뺀다고 하였다. 탄핵 문제에서 핵심이 내란죄인데, 이를 빼면 헌재는 바로 ‘각하’를 결정해야 한다는 헌법 전문가의 의견이 있음에도, 헌재는 그런 법적 하자에 대한 고려는 염두에도 없었다. 이는 ‘형사소송법’ 제298조에서 공소장을 변경할 때, 공소 사실의 동일성을 해치지 않아야 되는 기본을 어긴 것이다. 당초 검찰이 공소장을 쓸 때는 ‘내란죄’를 명시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대통령측의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해 주어야 하는데, 헌재는 그 ‘방어권’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이다. 이를테면 지난 4일 증인 심문에서 홍 모 국정원 1차장에 대한 심문 시간 3분을 더 달라고 대통령측에서 요청했는데 이를 기각했다. 그리고 11일 대통령측에서 꼭 필요한 증인을 신청했지만, 헌재소장 권한대행인 문형배 재판관(이하 문 대행)은 이를 기각했다. 그러다 나중에 비판 여론이 일자 어쩔 수 없이 추가로 증인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 증인에 대하여 대통령이 직접 심문을 원했지만, 법적인 근거도 없이(TF팀이 써 준 각본대로 진행하며, 이를 재판관들이 합의 했다며) 거절하였다. 여기에서 TF팀의 역할과 권한, 그리고 재판에서의 영향력에 대한 것도 따져 보아야 한다. 헌재 재판관들이 누군가가 써주는 대본대로만 한다면, 헌재에 대한 공신력은 더더욱 떨어진다. 또 대통령측에 아주 불리한 시간 배정을 하고 있으며, 헌재가 일정을 임의대로 정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그 밖에 증인 신청에서도 국회측의 증인과 대통령측이 원하는 증인 수에서도 차이가 많이 나고, 대통령측에서 원하는 사람들도 많이 줄였다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이번 비상계엄의 원인인 ‘부정선거’에 대한 것에서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은 헌재의 요청이 있을 때 자료를 공개하겠다고 했으나, 문 대행은 이를 묵살하였다. 국민들이 그렇게 알고 싶어 하고, 비상계엄의 원인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헌재가 왜 일방적으로 가로 막아야 되는가? 탄핵 심판은 단심제(單審制)이기 때문에 피청구인에게 충분한 방어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억울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역사에 큰 오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헌재는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재판 과정에서부터 공정하고 세심하고 바르게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지켜보면서, 국민들 사이에서도 대통령 탄핵을 반대한다는 목소리가 크게 높아지고 있다. 전국에서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집회가 이를 찬성하는 집회보다 월등히 많은 것은 국민들의 민의(民意)를 증명하고 있다. 또 수많은 대학 교수들도 탄핵 반대의 목소리를 냈고,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지난 10일 연세대에서의 ‘탄핵반대시국선언’을 시작으로, 서울대, 경북대, 고려대, 한양대 등으로 번져 나가는 상황이다. 또 헌법학자와 법률가들도 헌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이러한 모든 정황들로 인하여 국회 청원에는 문 대행을 탄핵하자는 의견이 지난 1월 31일 올라왔는데, 2월 17일 기준으로 17만여 명에 달한다. 5만 명이 넘으면 국회는 자동적으로 이를 심사해야 한다. 국민들이 이처럼 분노하고 있다. 거기에다 문 대행은 도덕적인 문제까지 나와서 많은 국민들을 크게 실망시키고 있다. 그가 속했던 고교 동문의 카페에는 약 7,700개의 글이 올라와 있는데, 그중에 2,000여 개가 아동·청소년 음란물과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가 드러난 사진과 영상들이 들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국민들 사이에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비난들이 나오고 있다. 모 의원은 그를 ‘변태적 이중인격자’라고까지 비난하고 있다. 물론 문 대행이 음란물을 직접 올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음란물들이 난무하는 커뮤니티에서 오랫동안 같이 있었다는 것은 사회 최고위직인 판사로서 우선 도덕적으로 적절하지 못했다. 동문 카페는 음란물을 올리는 공간이 아닌데 이를 묵인한 것이다. 그들을 지도하지 못한다면 속히 이곳을 빠져나왔어야 옳았다. 문 대행은 320여 차례 입장하였고, 그 안에서 댓글도 18차례 썼다고 알려진다. 문 대행은 도덕적인 책임감과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도 문 대행은 이에 대하여 미안함이나 사과보다는 헌재의 공보관을 통하여 이에 대하여 경찰에게 수사를 요청하고 해킹까지 수사해 달라고 하였다니, 기가 차다. 이 문제는 이미 사적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최고 지도층에 관한 사건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특히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문 대행 ‘감싸기’ 한다며, 정치적,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나섰다. 우리나라에는 약 4만 명의 법조인(판사, 검사, 변호사)이 있는데, 현직의 최상위 법조인은 헌법재판관이며, 그중에서도 문 대행은 최상위 으뜸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만한 도덕적, 지도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누가 모든 법률의 다툼에서, 최종 권위인 헌법을 가려 위헌이냐 합헌이냐를 결정할 것이며, 또 정당을 해산시키고, 심지어 국민들이 투표를 통하여 뽑은 대통령까지 파면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이는 헌재와 여기에서도 가장 책임 있는 문 대행이 아닌가? 그런데 작금의 상황을 보면, 참담할 정도로 부끄럽다. 우리 자녀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되는가? 헌법재판관은 모두 장관급이며, 특히 소장은 총리급이다. 예우도 국민들이 낸 세금에서 상당히 많이 받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수장인 문 대행은 좌파의 상징인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지낸 이념 편향적인 문제까지 가지고 있다. 자신의 성향은 얼마 전 방송통신위원장 탄핵 재판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고 목숨까지도 바꿀 정도로 막중한 권한으로 재판을 하는 헌법재판관으로서, 국가의 운명까지도 가를 정도로 중요한 대통령의 탄핵 문제를 다루는 재판관 중의 수장으로 적합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헌법재판관을 영어로 ‘Justice’라고 한다. ‘정의’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헌재나 문 대행에게서 ‘정의’를 느낄 수 있나? 지금 우리나라는 종북(從北)·종중(從中) 세력에 의한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다고 걱정하는 국민들이 많다. 그야말로 국민들이 침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직도 이런 위기 상황을 모른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침묵이 배신이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지금 누가 불법인가? 누가 부정을 감싸고 있는가? 누가 누구를 재판한단 말인가? 헌법 최고 기관인 헌재와 그 일부 재판관들과 특히 헌재소장 권한대행에게 나타난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매우 낙심이 된다. 헌법재판소와 특히 이를 이끌고 있는 문 대행은 공직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재판관의 명예심을 살려, 국가의 안정과 국민의 행복을 위한 양심적이고, 헌법에 따른 정의를 올바로 세워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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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대통령 탄핵 사건 헌재가 제대로 재판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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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유럽 이슬람의 문제, 타산지석의 교훈 삼아야
- 우리는 요즘 이슬람의 문제를 잊은 듯하다. 워낙 국내 정치문제로 복잡하고 시끄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슬림으로 인하여 몸살을 앓는 유럽에서는 이슬람 사람들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다. 올해 1월 1일 이탈리아 밀라노 두오모 광장에서는 무슬림 이민자들에 의한 집단 성추행 사건이 벌어져 조사가 진행 중이고, 지난해 12월 24일 독일의 마그데부르크 마켓에는 무슬림이 차량으로 돌진하여 5명이 죽고, 20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런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유럽에서는 무슬림 인구가 상당히 늘어난 때문으로 본다. 스웨덴은 무슬림 인구가 85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8.1%, 영국은 413만 명으로 6.5%, 이탈리아도 413만 명으로 5%, 독일은 350만 명으로 4.2%를 차지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는 10%가 넘는다고 한다. 유럽에 이렇게 이슬람 인구가 많은 것은 1950~1970년대 이슬람 국가로부터 대규모 노동자들의 이민을 받아들인 것이고, 1980년대 이후에는 ‘이민법 제정’으로 난민이 더욱 많이 유입되었다. 그리고 무슬림은 비무슬림에 비하여 출산율이 3배 정도 높다. 최근에 프랑스와 독일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25%가 무슬림 자녀라고 할 정도이다. 무슬림 인구의 증가로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는가? 기독교 혐오범죄 증가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지난해 유럽에서 발생한 기독교 혐오범죄는 총 2,444건에 달한다. 대부분 무슬림 인구가 많은 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서 일어났다. 그중에는 강간, 폭탄테러, 총기 범죄, 아동 성적 학대, 인신매매, 집단 성추행, 폭력 등으로 다양하다. 이들에게서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것은 무슬림이 유럽의 문화와 관습에 제대로 동화되지 않고, 그들은 각 나라의 법보다 샤리아법을 고집하고,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각종 범죄와 사회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다 보니 유럽에서도 현재 반이민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를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그럼, 국내 이슬람 상황은 어떤가? 지난해 11월 말 기준으로 무슬림 인구는 375,000명이 넘었다. 그중에 외국인은 315,000명, 내국인은 60,000명 정도가 된다. 그리고 국내에 모스크 수가 26개이며, 대구와 경주 등에서도 모스크를 짓는 중이고, 지으려고 한다. 국내 무슬림 인구가 증가하는 이유는 E-9(취업)비자 때문이다. 비숙련직 노동자가 E-9비자를 통하여 한국에 들어오는 사람은 지난해의 경우, 11월 말까지 74,987명으로 2023년보다 6,000명 정도가 늘어난 것이다. E-9비자는 한국과 고용허가제를 체결한 국가 국민에게만 허용되지만, 그 16개국 가운데 이슬람 국가도 다수 있다(방글라데시, 키르기스스탄, 인도네시아,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그런데 E-9비자를 통하여 입국하는 외국인의 99.8%가 이슬람 국가 출신이다. 이런 E-9비자로 들어온 사람 가운데 기간, 급여, 한국어 능력 등이 충족되면, 그들의 가족을 초청할 수 있는 E-7-4비자로 전환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하여 무슬림들의 가족들까지 대거 한국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나라에서 무슬림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또 이슬람 사람들이 불법체류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8월 말까지 외국인 불법체류자는 54,898명에 이른다. 그중에 이슬람 국가 출신은 48,273명으로 대부분이 무슬림들이다. 그러다 보니 E-9비자는 ‘불법체류자 입국 통로’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외국인 불법체류자는 경남의 모 도시에만 1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당연히 그곳은 범죄가 많아지게 된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특히 이슬람권에서 E-9비자로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하여 국가적 차원의 엄격한 통제와 관리가 필요하다. 오늘날 유럽에서 무슬림에 의하여 벌어지는 각종 범죄는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려면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오는 국가를 통제하고, 또 이슬람 국가 사람들의 숫자를 일정 비율로 제한해야 하고, 비록 그들이 노동자로 들어오더라도 철저하게 사후 관리하여야 하며, 무분별하게 그 가족들이 대거 입국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는 절대로 무슬림에 의한 범죄를 일어날 수 없는 곳으로 인식시켜야 한다.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 국가의 미래를 어둡게 할 ‘국가 안전망’에 구멍이 뚫릴 사안들에 대하여 철저히 감독해야 한다. 무슬림은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유럽에서 일어나는 무슬림에 의한 온갖 범죄 상황을 보면서, 경계와 관리의 대상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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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유럽 이슬람의 문제, 타산지석의 교훈 삼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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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빛의 연대기
- 저에게는 오래된 꿈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 민족의 빛과 소금이 되고 희망의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십수 년 전, 죽전 신도시에 프라미스 콤플렉스를 건축하고 부흥의 최정점을 맞았을 때 저는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반기독교 세력의 실체와 전략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개교회 성장을 넘어서 공교회를 세우는 공적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아마 계속해서 개교회 성장 지상주의로 갔다면 지금쯤 더 큰 예배당을 짓고 숫자적으로 더 큰 성장을 이루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교회와 건강한 사회를 지키는 영전, 사상전, 문화전의 최전선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스쿠크, 동성애 차별금지법, 종교인 과세 등 한국교회 생태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반기독교 법안이 올라 올 때마다 정계와 교계의 깨어 있는 소수의 분들과 함께 대처하고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다 보니까 한 개인이나 개교회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권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한국교회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예장합동 총회장, 한교총 대표회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가장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은 한국 교계의 분열이었습니다. 한국교회가 대정부, 대사회를 향해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원 리더십, 원 메시지를 낼 수 있어야 하는데 계속 분열하면서 각자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지금도 그 꿈은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한국교회 연합기관이 하나 된다면 ‘빛의 연대기’라는 창작 칸타타를 제작하여 공연하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국교회 연합기관은 하나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소망을 담아 공연을 준비하였습니다. 우상과 미신, 가난과 차별로 가득했던 조선 땅에 복음의 빛을 전해준 푸른 눈의 선교사들, 평양 장대현교회의 대부흥,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빛을 지켰던 믿음의 선진들의 고난과 희생, 폐허 위에서 조국 근대화와 부흥을 이뤄낸 한국교회의 눈물의 기도와 부흥의 대서사, 그리고 뼈아픈 분열과 상처... 다시, 연합과 부흥을 꿈꾸는 희망의 대서사시가 빛의 선율처럼 울려 퍼질 것입니다. 음악의 힘은 위대합니다. 남아공의 만델라가 종신 징역살이를 하고 있을 때, 1988년에 영국에서 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성악가 80명이 모여서 만델라의 석방을 기원하는 음악회를 하였을 때, 그 음악회의 영향으로 그 이듬해 봄에 만델라가 석방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유창한 연설이나 은쟁반에 담긴 옥구슬 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언어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음악은 무조건 하나를 만듭니다. 영국 황실에서 음악회를 하면 여야를 다 초청합니다. 그래서 영국 의회는 극한으로 가다가도 음악 안에서 하모니를 이룬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얼마나 극한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고 있습니까? 한국기독교 선교 140주년 기념 칸타타 ‘빛의 연대기’가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하나로 만드는 사랑과 용서, 화해의 하모니가 되고 희망의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교총 주관으로 4월 23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릴 예정인데, 한국교회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정관계의 주요 지도자와 기자들을 초청하여 다시 한번 사랑과 빛의 하모니를 이루는 감동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시적으로 표현한 서정적 해설과 더불어 장엄한 연주와 감동의 노래로 빛의 대서사시를 연출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격동의 역사, 감동의 기록, 눈물의 시가 담겨 있는 ‘빛의 연대기’가 분열과 갈등으로 상처 입고 신음하고 있는 한국 교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하나로 만드는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빛의 파동을 일으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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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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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빛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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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신앙의 발견’ (막 10:17~22)
- 본문에 등장한 이 사람은, 본문 후반에 가면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나오며, 마태복음에는 재물이 많은 ‘청년’으로, 누가복음에는 ‘어떤 관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유하고 안정된 직업을 가진 젊은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신변이 남부러울 만큼 갖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한 마음과 알 수 없는 미래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한계상황을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만날 결심을 하고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겸손해 보이는 자세를 취하며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 또한 가장 예수님께서 듣기 좋아하실 것 같아보이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 젊고 부유한 청년은 하나님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으로 보아 더욱 그러함을 알게 됩니다. 이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볼 때, 그는 사실 주님과의 깊은 만남이나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깨닫지도, 실천하지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본다면 온전하지 못한 성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는 있지만, 마음 중심에서 허무함과 허탄함을 갖고 하나님과 긴밀한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인 현대 교인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묵상해보면서, 나 자신은 이러한 사람이었거나, 현재 이러한 삶을 사는 자는 아닌지 무거운 고민을 해보게 됩니다. 이와 같은 고민은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음성을 통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18절 말씀(“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은 얼핏, 예수님조차도 선하지 않은 분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질문자가 어떤 마음으로 질문했는지에 따른 예수님의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칼뱅(John Calvin)은 18절,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내가 하나님에게서 온 사실을 너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거짓으로 나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구나”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진심에서 나온 표현이 아닐 경우에는 상대방을 괜히 띄워주고 바람잡으려는 역할처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진정한 마음을 갖고 순수하고 진실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젊은이가 평소 계명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젊은 부자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중 사람과의 관계에 해당하는 대인(對人) 계명 여섯 가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십계명 중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제1~4계명을 생략한 이유는, 여섯 가지 대인 계명이 제1~4계명의 실천적인 방안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제대로, 진정으로 잘 섬기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향한 관계 또한 제대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역순으로 적용할 할 경우, 즉 가까이 있는 보이는 사람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자라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젊은 부자의 대답(20절,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은 단지 본인의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겉보기에는 흠이 없을 정도로 계명을 지킨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그는 하나님과 사람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신앙적 열심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말씀을 이어가신 것입니다(21절). 그 젊은 부자가 놓친 것은 자기가 그토록 아끼고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는 물론 하나님과도 나눌 수 없었던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주신 주님의 말씀은, 비단 돈을 아까워하지 말고 어려운 자를 도우라는 단편적인 의미만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보다는, “너가 진정 원하고 바라고 사랑하는 바가 무엇이냐?”라고 물어보시는 의미가 더 강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중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예수님께서는 그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으로써 우리 삶의 실천적인 부분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터치하시고 점검하신 것입니다. 2천 년 전 젊은 부자에게 말씀하셨던 그 말씀은 오늘 이 시간 우리 각자에게 주신 예수님의 음성인 줄 믿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진정으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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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신앙의 발견’ (막 10:1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