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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할렐루야로 찬송하라’(계 19:1-5)
- 할렐루야는 구약에서 시편에 많이 나오고,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옵니다. 할렐루야의 ‘할렐’은 ‘노래하다, 송축하다’라는 히브리말 ‘할랄’의 강조형태이고, ‘루’는 2인칭 복수명령형, ‘야’는 여호와의 축약형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는 ‘너희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반드시 찬양하여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왜 할렐루야를 불러야 할까요? 첫째, 구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영광은 하나님만이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찬양해야 합니다.(1절)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2a절) 하나님 심판이 왜 참되신가를 보면, 첫째, 하나님만이 사람의 깊은 속마음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만이 바른 판단을 하실 수 있는 지혜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계 7:12)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2b절) 하나님은 순교자들의 피를 반드시 갚으십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 6: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갚아 주시지만,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작정한 수가 찰 때까지 순교자들이 계속 생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끝까지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처럼 우리도 끝까지 믿음 지키기를 소망합니다.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4절) 여기서 이십사 장로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네 생물은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인 사자(용맹성 상징), 송아지(힘), 사람(지능), 독수리(빠름)입니다. “하나님 종들”(5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인 선지자와 순교자를 의미합니다.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두 사회 계급 차별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의 찬양 핵심은 어린양,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찬양 내용은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희생적인 죽음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찬양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이루어졌음을 노래하는 것이 찬양의 핵심입니다. 다음으로 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소유하신 일곱 가지를 찬양합니다. 즉 능력, 부, 지혜, 힘, 존귀, 영광, 찬송입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찬송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찬송’, ‘복’입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10)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우리가 드리는 찬송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서 거기에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나머지 우주가 찬송하는 것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입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동격으로 찬양받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연이 아멘하고, 우리는 경배해야 합니다. 예수의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는 평생 할렐루야로 주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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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할렐루야로 찬송하라’(계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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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CBS 라디오 이야기와 행복 스토리
- 제가 광주신학교를 다니며 화순 백암교회를 개척할 때였습니다. 저는 매일 저녁 잠들기 전에 CBS 라디오 방송을 들었습니다. ‘라디오 강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거든요. 그때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며 푸른 꿈을 꾸며 잠들었습니다. “주여, 저도 저런 목사님들처럼 크게 쓰임 받을 줄로 믿습니다” 어릴 때부터 제 고향 남원에 CBS 방송이 송출되었다면 제가 CBS를 청취하였을 텐데, 아쉽게도 우리 고향에는 방송이 송출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CBS에 남원중계소가 필요하다고 해서 우리 교회가 선뜻 중계탑을 설치하는데 후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웬 은혜로 제가 CBS 재단 이사장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CBS 이사장이 되기 위해서 어느 누구도 개인적으로 만나 식사를 모시며 표를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최인 이사님을 비롯하여 여러 이사님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현명한 선택 때문에 제가 이사장이 된 것입니다. CBS는 한국교회의 공공재로 쓰임 받아 왔습니다. 먼저는 설립자 감의도 선교사님의 선교 정신을 지켜서 라디오와 TV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잘 전해 왔습니다. 동시에 빠르고 신속한 뉴스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실현하는 데 기여를 하였습니다. CBS는 그 어떤 군사 독재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신속하고 공정한 뉴스를 전하는데 앞장서는 방송이었습니다. 물론 한동안 군사 독재에 의해서 뉴스를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다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공정하고 정확한 뉴스를 전하는 방송이 되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뉴스뿐만 아니라 교양, 시사,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가고 또 수많은 설교나 메시지를 통해서 많은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길 기도합니다. CBS는 진보와 보수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리고 복음의 가치를 추구하는 방송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시가 있습니다. “하루가 끝나면 /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둔다 / 저녁이 식기 전에 / 나는 퇴근을 한다...(중략) / 서랍에 넣어 둔 저녁을 꺼내면 / 하루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 나는 퇴근을 한다 / 퇴근을 하면서 / 저녁을 꺼내어 / 따뜻한 한 끼를 먹는다 / 하루의 끝에서” CBS 방송이 몸과 마음이 지치고 외로운 사람들의 서랍에 들어 있는 한 끼의 밥이 되고, 사랑이 되고,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족한 종도 작지만 그러한 일에 기여를 하고 섬기겠습니다. 특별히 지금까지 재단 이사회를 잘 이끌어 주신 육순종 전 이사장님께 감사드리고 육순종 목사님의 지도를 받아 CBS를 잘 섬기겠습니다. 이사회뿐만 아니라 CBS 나이영 사장님을 비롯하여 모든 임원과 직원들을 잘 섬기겠습니다. 특히 취임식에 참석하신 수많은 국회의원님들, CBS 이사님들, 교단 총회장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성도들도 CBS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더 크게 확장되기 위해서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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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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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CBS 라디오 이야기와 행복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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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다’ (계 19:11~16)
- 요한계시록의 내용에는 상징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잘 읽으면서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상징하는 언어가 나타내는 의미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성경말씀 해석의 관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요한의 눈을 열어주셨고, 주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사도 요한을 통해 기록되었으니, 이는 요한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과 그 뜻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된 책을 덮어만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치유받고,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 말씀이 믿어지고 깨달아지며 지혜가 임하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여야 될 줄 믿습니다. 요한은 하늘이 열리고 거기 흰 말 위에 ‘충신’과 ‘진실’이라고 부르는 분이 앉아서 정의로 심판하며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위해 변호해 주고, 몸소 싸워준다면 얼마나 큰 은혜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러한 분이십니다. 주님은 완전히 신실하시고 진실하십니다. 그리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도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하늘문을 열어놓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열고 오직 주님을 먼저 생각하며, 생사를 주께 맡기며,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에 신실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싸움은 선과 악의 싸움이며, 진실과 거짓의 싸움이고,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며,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과 어둠의 영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도, 정치권에도, 사회 속에도, 가정과 개인의 마음 안에도 이러한 선과 악의 싸움과 진실과 거짓의 싸움과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싸움은 결국 하나님 안에 거하는가, 어둠과 정욕에 거하는가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거기에서 이겨야 할 줄 믿습니다. 백마를 타신 분이 충신과 진실이며, 피 뿌린 옷을 입으신 것으로 보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피는 예수님께서 박해와 순교로 인해 흘리신 피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요한복음 1장 초두에 나오는, 이른바 말씀이 곧 예수님이신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읽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과 같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좌우에 날선 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주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행함을 통해서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인해 크고 놀라운 은혜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16절). 우리는 이 사실을 온전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말씀과 권능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심판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뜻에 합당하도록 선하고 공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뜻과 그 말씀에 맞추어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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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다’ (계 19: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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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두려운 영광, 설레임”
- 지난 목요일 오후에 황순원문학관 소나기마을에서 ‘영혼을 담은 시 쓰기’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백일장대회에 가는 것만큼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슴이 설레기도 하였습니다. 시를 쓰는 것은 시상을 갖고 순간순간 시가 찾아올 때 쓸 수 있지만 시 창작 강의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에서도 저명한 시인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들었지만 ‘시란 무엇인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한 분은 못 봤습니다. 그냥 자기 시 몇 편을 소개하고 삶의 이야기로 마감하는 걸 봤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할 수가 있죠. 저에게도 많은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기회에 ‘시는 무엇이고 어떻게 시를 쓸 것인가’ 정리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적지 않는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의안을 준비해도 왠지 낯설고 두려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성도들이나 일반인 앞에서 강의를 한다면 그렇게 두렵고 떨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시대 최고의 문학평론가인 김종회 교수님 앞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이 엄청난 부담이고 스트레스였습니다.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큰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꼭 두려움과 불안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영광스럽고 가슴이 설레이기도 하였습니다. 강의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는 국문과나 문창과를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소나기마을 촌장이신 김종회 교수님께서 어느 정도는 저의 필력과 구술력을 인정하셨기에 저를 강사로 부르셨지 않나 싶어 더 가슴이 뛰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엿장수, 사탕장수의 이야기로 시작하였고 상여의 만가 소리를 시연하며 시 강의를 접근 했습니다. 결코 녹록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앉아서 할 수도 없고 일어서면 강의안이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원고가 보이고 안 보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원고를 이미 그림 언어로 거반 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강의를 했는지, 무슨 꽃으로 내 가슴을 문질렀는지 땀이 눈속으로 들어 갈 정도였습니다. 종교적 언어, 신앙의 언어를 쓰지 않아도 시는 에덴을 향한 원형 혹은 근원을 향한 향수적 갈망이라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움에 대한 향수를 이미지 언어로 쓰는 것이 시라고 강조했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해도 어느 누구도 저항을 하거나 반발을 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설교를 하는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억양이나 설교의 이미지가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마저도 강의 흐름 상 모두 수용하고 용납하는 듯했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김종회 교수님께서 “이곳이 대학 강의실이라고 한다면 교수로서도 99점을 줄 정도라”고 하셨습니다. 강의가 끝나도 그 설렘이 싹둑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련과 아쉬움이 컸습니다. 왜냐하면 준비한 내용을 절반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1시간 40여 분 동안 강의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많은 시간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럼에도 준비한 내용을 절반도 못했습니다. 아쉬움은 미련을 낳았지만 그럼에도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두려움과 설레임은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여전하기만 합니다. 좀 더 잘할 수도 있었다 싶었는데 저희 장모님이자 기도의 어머니이신 정금성 권사님이 오셔서 부담감이 더 커져 갔습니다. “아니 지금 젊은 연세도 아니신데 왜 여기까지 오시는가...” 그래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이 계기를 통해 저의 시가 한 단계 더 발전하고 다 하지 못했던 저의 시론이 활자화 되기를 바래 봅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고 성원해 주신 김종희 교수님, 참석해 주신 주민들, 그리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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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두려운 영광, 설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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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욥의 고백’(욥 42:5)
-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1:1)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9절)라고 하며 욥의 모든 소유물을 치면 주님을 욕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11절) 하나님께서는 욥을 신뢰하심으로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시며 사탄에게 욥을 맡기셨습니다.(12절) 그래서 욥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사탄의 전략을 다 보게 되었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도 중보자가 계심을 믿었습니다.(19:25) 본문을 보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그동안 하나님을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고, 고난 문제를 단순한 죄로만 본 것을 회개하며 하나님 섭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이 매우 심한 고난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스발이 찾아왔습니다. 나중에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세 친구는 욥의 고난을 죄의 값으로 보았습니다. 엘리후는 욥을 훈련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다고 말하지만, 나중에는 죄의 값으로 보았습니다. 고난은 죄의 값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의 그런 주장에 노하셨습니다. 사람 자체만으로도 우주를 다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섭리와 무궁한 지혜를 사람이 다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네 친구가 욥의 고난을 보며 말한 내용을 살펴봅니다. 엘리바스는 고난에 대한 지혜를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5:27) 엘리바스의 태도는 잘 관찰하고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빌닷은 고난에 대한 지혜를 과거 전통으로 보았습니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8:8) 전통과 격언은 참고는 되지만, 사람의 것이므로 한계가 있습니다. 소발은 고난에 대한 지혜를 자기 느낌, 즉 즉감으로 보았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으면 옳은 것입니다. 소발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12:12) 소발은 자신의 지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지혜의 근본 된 것이 문제입니다. 엘리후는 욥에 대해 심각하게 비난하지 않지만 세 사람이 놓친 것, 즉 고난은 사람을 사람되게 만들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33:17) 그러나 엘리후가 잘못 생각한 것은, 고난을 이기면 반드시 번영과 축복이 온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견해입니다.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36:11-12)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에 대한 지혜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8:28) 우리도 고난을 이기는 지혜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이 고난에 대해 말한 것이 욥의 말처럼 옳지 못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42:7)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세 친구가 욥의 고난을 죄의 값으로 본 것은 맞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단순화시킨 것이 잘못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한 것이 잘못입니다. 세 친구 생각에 교훈이 될 말한 지혜는 사람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겼는데,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안다고 한 것이 잘못입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욥의 기도를 통해 어리석게 말한 것을 용서받게 되었습니다.(42:8) 한편, 엘리후는 책망에서 제외됩니다. 사람 만들기 위해 고난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죄의 값이기도 하지만, 회개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신다고 본 것이 문제입니다. 죄의 값의 결과가 이 세상에서 꼭 일어난다고 볼 수 없으며, 회개하더라도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지혜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섭리를 다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참다운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경외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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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욥의 고백’(욥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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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저 푸르지만, 아직 연약한 잎새들”
- 저는 이따금 머리를 식히기 위해 창문의 커튼을 열고 푸른 나무들을 바라봅니다. 보기만 해도 마음에 푸르름의 기운이 들어오듯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따라 바람에 퍼덕이는 잎들이 가여워 보입니다. 서로 바람에 부딪혀 상처받지 않을까 해서요. 그렇지만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푸르름을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대단해 보입니다. 바람이 불어도 새들은 날아다니고 지저귑니다. 제가 창문으로 다 보고 있는데, 새들은 누구도 보지 않는 것처럼 자유롭게 지저귑니다. 도대체 저 새들의 보금자리는 어디일까요? 어렸을 적에는 새들의 보금자리에서 알도 훔쳐먹은 시절이 까마득한데, 저 습자지처럼 얇고 부드러운 나뭇잎 사이에 둥지를 틀리는 만무할 것이고... 우리 교회가 지어질 때만 해도 오동나무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지금은 거목이 되어 있습니다. 하긴 거의 20년이 흘렀으니까요. 나무는 자라서 모든 날아다니는 새들의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정말 여리고 부드럽게 느껴지던 것이 제법 푸르름의 빛을 반짝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푸름보다 여림이 더 강하다고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심방을 했던 한 성도가 떠올랐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지, 저의 첫사랑과 첫 열정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보통은 처음부터 그렇게 열심을 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얼마나 교회 생활에 몰두했냐면, 학업보다 교회 일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그런 세월이 거의 반세기, 안식년이나 안식월을 한 번도 갖지 못하고 푸르름이라고 하는 페달을 밟고 왔지요.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셨다면 이미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 오동나무는 가을이 되면 스스로 낙엽이 되지만, 교회 뒤편에 있는 소나무들은 겨울도 쉬지 않고 푸르름을 자랑하죠. 낙엽으로 떨어질 때는 떨어지더라도, 이 순간 푸르름으로 발화하고 있는 저 넓적한 활엽수들을 축복합니다. 겨울에 폭설이 내리면 저 넓은 잎사귀가 그 무게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저 푸른 잎들을 바라보며, 얼마 전 심방 했던 새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가을이 온다고 푸르름을 포기하지 않으시겠지... 아직은 푸르름보다는 여린 면이 더 많지만, 가을이 와도, 겨울이 와도 더 단단하겠지.” 부족하지만 저처럼 말이죠. 푸르지만 아직은 여린 그 성도님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가호가 그분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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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저 푸르지만, 아직 연약한 잎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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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이재명 대통령의 NATO정상회담 불참의 이해득실’
-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불참하기로 결정한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정상회담, 이 결정에 대한 정권 차원의 고민이 있었겠지만, 국익에 미칠 영향을 따져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NATO는 북미와 유럽 중심의 군사동맹체이지만, 최근에는 글로벌 전략파트너들과의 협력, 특히 중국·러시아 견제, 인도·태평양 전략, 사이버 안보, 방산 협력, 기술 동맹 등으로 역할이 확대되었다. 우리나라는 회원국은 아니지만 파트너 국가(Asia-Pacific Four)로서 2022년부터 초청을 받아 정상급 외교를 이어왔다. 그렇기에 이번 이 대통령의 NATO 정상회의 불참 결정은 여러 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이 있다. 먼저 가장 큰 우려와 부정적 영향으로는 (1)글로벌 외교 네트워크의 약화이다. 살펴보면 새 정부 출범 직후 세계 리더들과의 직접 대면 기회인 NATO는 이 대통령의 국제적 위상과 신뢰 구축에 매우 중요한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불참은 나토 및 서방국가들에게 ‘한국의 외교적 후퇴’로 비칠 수 있다. 특히 미국, 유럽, 호주, 일본과의 다자외교에서 입지 약화는 단순한 우려가 아니다. 자칫하면 미국과 일본과 함께 하는 대중·대러 견제 틀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있다. NATO는 최근 중·러의 영향력 확장에 대한 견제의 장이 되었기에 한국이 불참은 안보·경제 측면의 공동 대응 논의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2)방산·기술 산업 외교의 기회 손실이다. NATO 회의 기간 중 열리는 정상회담은 방산 수출, 기술 협력, 에너지 안보 분야의 정상급 교섭 기회임에는 특림없다. K-방산, 반도체, AI 등 전략산업 외교 무대를 놓치는 것은 엄청난 국익의 손실이다. 그러면 이런 선택을 한 이 대통령과 신정부의 의도는 무엇일까? (1)표면상으로 균형외교의 의지로 보인다. 나토의 성격상 중국·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는 외교 무대인데, 균형외교 또는 비동맹적 중립외교를 추구하는 관점에서 불참은 그 전략의 일환일 수는 있다. (2)한중 관계 개선,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공간 확보의지로 해석될 수 있다. (3)국내 우선 의제에 집중하겠다는 시그널로 볼 수도 하다. 취임 직후라서 민생·경제 회복·개혁 드라이브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로 ‘외교보다 당장은 국민’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을 의도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을 확보하고 외교·경제 실리를 챙기려면 초기 외교 무대인 NATO정상회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보다 유리했다. 특히 미국과 유럽 중심의 다자외교 흐름에서 한국의 입지와 안보 전략을 어떻게 설정하고 유지할지에 대한 일관된 메시지가 필요하다. 일부 평론가들과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이 대통령의 NATO 정상회담 불참을 국제 정세 속에서의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하지만 정말 “친미 일변도 외교에서 균형외교로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선택한 전략적 불참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다른 외교적 성과나 메시지 보완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이지 아니한다. 반면 이에 따르는 전략적 리스크인 오해와 신뢰 손실의 가능성이 높졌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한국의 신정부가 자신들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약화시키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미동맹의 신뢰 기반이 흔들릴 경우, 북핵 대응, 방산 협력, 기술 안보에서 한국 입지의 약화는 불문가지이다. ‘균형외교’는 결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국제 정세가 미중 신냉전 구도로 재편되면서, 양쪽 모두 중립을 허용하지 않는 압박 외교가 현실이다. 이는 '전략적 모호성'이 오히려 양쪽 모두의 신뢰를 잃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대통령의 NATO 정상회담 불참은 단기적으로 중·러의 반발을 사전 차단하고 경제적 충격을 줄이려는 ‘방어적 외교’일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균형외교를 위한 시험적 조정일 수 있으나, 그러려면 미국·서방과의 외교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한 ‘보완 외교’가 반드시 뒤따라야 할 전략적 과제로 남겼다. 그러나 최근 그의 내각을 살펴보면, 이를 뒷받침해줄 인사들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더 친중, 친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처럼 이미 실패한 전략을 다시 집어 드는 것이 지난 날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오기가 아니라면, 이 대통령은 민족 장래를 위하여 밤을 지새우는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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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이재명 대통령의 NATO정상회담 불참의 이해득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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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순간 촬영되는 우리 신앙’ (빌 2:12~18)
- 성도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 매우 허영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나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 물건을 나르는 모습에서, 일상적인 걸음걸이에서, 눈빛과 머리를 흔들어 보이는 과정에서 그러한 모습이 묻어나 보이게 됩니다. 사진을 촬영할 때 쓰는 용어로 ‘스냅샷’(snapshot)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순간적인 장면을 촬영한 사진으로, 인물 사진에서는 자연스러운 동작이나 표정을 재빠르게 포착한 사진을 뜻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0.1초의 순간적 동작과 모습 속에 휙 하고 지나가는 몸동작이지만 그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기만의 현실과 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게 됩니다. 그러한 모습은 대개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는 습관적인 것들입니다. 때로는 평소 감사를 잃어버린 채 불만족스러워하던 습관적인 모습이, 때로는 자신의 우월함을 은근히 나타내 보려는 모습으로, 때로는 무능력함의 뒷모습으로, 때로는 자기의 이익을 애써 감추며 생활이 어려운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상대방을 속으로 조소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자기만의 연약하고 부족한 허영심의 모습은 자기 내면에 숨어있는 과거의 모습이며,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연약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믿음의 부모와 같이 신앙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뤄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작은 일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일은 그렇게 ‘값싼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요,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교회의 철천지 원수입니다. 값싼 은혜란, 회개가 없는 사죄요, 교회의 권징이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요, 개인의 참회개가 없는 용서입니다. 값싼 은혜란 뒤따름이 없는 은혜요, 십자가가 없는 은혜입니다.” 즉 하나님과 구원이 가장 귀한 것인데도, 실상은 은혜와 신앙을 쉽고 값싼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나님도 교회도 하찮고 쉬운 존재로 여기는 잘못된 신앙, 빗나간 교인의 모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기도회에 곧잘 나오지만, 막상 참된 회개는 없는 그런 기도를 하는 모습이라든지, 하나님과 교회 앞에 분명히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교회는 권징하지 못하고, 잘못을 행한 자들은 여전히 교회의 주요 활동에 참여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쉽게 여긴다든지, 참된 회개가 없는데도 형식적인 용서를 받은 것처럼 예배드리며 마당만 밟고 자리를 떠나는 모습 등에 대해 ‘값싼 은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값싼 은혜로 무장된 마음이 우리 안에 있게 된다면, 그러한 모습은 하나님과 신앙과 교회를 등한시하는 내면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실상은 이런 값싼 은혜가 아닌, 순전하신 예수님의 보혈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값진 은혜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따른 진정한 값진 은혜를 체험하고 그것을 끝까지 소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값진 삶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순간의 동작이 회개를 이룬 고귀한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 한 동작이 그 사람의 신앙의 현주소를 정확히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 자신과 하나님의 현재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귀한 뜻을 위해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도록 하신다고 하셨습니다(13절). 그러므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며(14절),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우리의 양심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놓여 있는 우리의 모습과 마음이 더욱 값진 은혜를 사모하는 자의 모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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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순간 촬영되는 우리 신앙’ (빌 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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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탈북민이라는 용어 대신, 반도자(叛逃者)라니
- 최근 국무총리 후보자로 나선 김민석 의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왕설래(說往說來)가 있는 가운데, 그가 중국의 모 대학에서 석사 학문을 쓰면서, 북한 정권의 압제로 인하여 탈북한 탈북민들을 도북자(逃北者)와 반도자(叛逃者)라고 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현재 탈북민(脫北民)은 지난해 기준으로 34,314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체제 불만에 의한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정권의 3대를 이은 폭정과 탄압, 그리고 주민의 가장 기본적인 식량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건들이 탈북민들을 양산하였다. 우리는 그들을 탈북민(脫北民)이라고 부른다. 북한의 생지옥 같은 체제를 벗어나 탈출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들의 사연 하나하나를 들어보면, 기가 막히고, 눈물겹지 않은 사연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김민석 의원은 중국의 유명 대학에서 석사 학위 논문을 쓰면서, 도북자(逃北者)라는 표현을 여러 번을 썼다. 이는 말 그대로 북한을 버리고 도망한 배신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물론 북한이나 북한과 혈맹인 중국 입장에서는 그런 표현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김민석 의원은 한국인이지, 북한이나 중국인이 아니다. 그가 이런 논물을 쓰던 2010년에도 탈북민은 2,402명에 달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대한 용어를 굳이 도북자(逃北者)라고 써야 했을까? 심지어 반도자(叛逃者)라는 용어도 썼다고 한다. 북한을 배반하고 도망친 사람이란 뜻일 것이다. 그가 속한 당에서는 그를 감싸기 위하여 사전에 나오는 말이라느니, 또 색깔론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지긋지긋한 북한 당국의 폭정을 피해 지금 우리나라에 수 많은 탈북민들이 들어와 가슴에 피멍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용어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변명한다고 이해가 되겠는가? 도북자(逃北者)나 탈북민(脫北民)의 차이는 세계 최악의 인권 박해국인 북한을 탈출했던지, 혹은 도망했던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문제는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이다. 중국이나 북한 입장에서는 북한 당국을 배신하고 도망간 사람들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우리의 따뜻하고 감싸는 마음으로는 자유와 생명을 찾아 탈북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지금, 사전에 나온 것이라느니, 중국에서 중립적 의미로 사용하는 용어라느니 하는 것이 마음에 와 닿겠는가? 적어도 임명직으로는 국가 최고의 위치에 올라가려는 국무총리 후보자라면 정중히 사과해야 하고, 같은 당이라고 생떼 같은 소리로 덮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할 내각의 책임자를 찾는 것이지, 우리 국민들을 억압하는 세력의 입장을 대변하여 표현하면서, 탈북민들에게는 사과조차 없는 뻔뻔함과 그를 덮어주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정치가 뭔가?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 주는 것이 아닌가? 아픈 상처를 더 후벼파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의 모습이 아니라고 본다.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바로 잡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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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탈북민이라는 용어 대신, 반도자(叛逃者)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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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목사의 설교를 ‘내란선동죄’로 몰아가나
- 지난달 5월 26일 경기도 파주에 있는 모 교회의 담임목사에 대하여 경기북부경찰청에 고발장이 접수되었다. 그 이유는 내란선동, 초중등교육법, 아동복지법 위반이라고 한다. 고발 내용을 보면, 담임목사가 교회의 설교에서 ‘종북주사파 등 반국가 세력을 척결해야 한다’ ‘비상 계엄이 나라를 살리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목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설교를 한다. 그 말씀에는 기독교 교리와 신앙과 영성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또 성경에 나타나는 사회적 정의와 공의에 대한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 무엇이 이 나라의 정체성을 위하여 필요한가를 판단하여, 교인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자유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나라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에 대하여,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또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편파적인 내용이 아닌 사실에 근거한 교육을 하여, 학생들이 올바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지금 일선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교육이 과연 균형 잡히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아이들이 담임목사에게 배운 대로 정치적 발언을 한 것을, 정서적 ‘아동학대죄’로 몰아가고 있다. 아이들도 자기들의 주관이 있고 사고(思考)가 있고, 판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정치적 상황에 대한 것을 충분히 피력할 수 있다고 본다. 과거에 학생운동에서 청소년들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가? 그런데도 목사가 교회 안에서 설교한 것을 극우로 몰고, 계엄을 찬성한 것을 내란 선동으로 몰아가는 것은, 국민들에게 보장된 기본권인 헌법을 외면하는 것이 된다. 우리나라에는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분명히 보장된다. 이것은 어떠한 정부나 정권, 체제하에서도 보장받고 보호받아야 한다. 국민 가운데에는 탄핵 사태에 대하여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현 정부를 지지하는 국민들도 있고, 반대하는 국민들도 지난 대선에서 절반이 넘었다. 그런데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인용된 4월 4일 이후인, 5월 26일 목회자의 설교에 대한 것을 문제 삼아 고발한 것은 분명히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는 세력이 고 목사를 표적으로 삼아 공격함으로, 결과적으로 한국교회 전체에 대하여 재갈을 물리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 교회는 지난 1월 19일 일어난 서울서부지법의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좌파 유튜브 방송에서 마치 관련이 있는 것처럼 방송하여, 교회가 ‘방화범 교회’ ‘폭력범 교회’로 낙인이 찍혀, 교인들이 떠나고, 교인 가정에서 이혼을 당하고, 그야말로 고립무원으로 전도와 복음 전파의 길이 막히는 집단적 폭력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지역의 한 교회에 대한 도발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무력화시키려는 책동으로 본다. 일찍이 김구 선생은 ‘10곳의 경찰서보다 한 곳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을 하였다. 교회가 무너지면, 우리 사회도 국가도 흔들린다. 도덕도 윤리도 가치관도 허물어지게 되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큰 기둥이 무너져 내림으로 나라 전체가 붕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경찰도 간첩을 잡아야 할 시간에, 건전한 교회의 목사가 설교한 것을 가지고 고발을 일삼는 것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이 나라는 국민들이 알게 모르게, 상당히 좌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고 있음을, 뜻이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종교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가 더 민주화된 나라인가? 이런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억압하는 사회가 더 민주적인 사회인가? 종교의 역할을 보장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가? 그렇지 않은 사회가 더 건강한가? 종교인들의 양심적이고 바른 목소리에 재갈을 물리는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도, 좋지도 않은 사회임을 알아야 한다. 목사의 설교를 트집 잡아 ‘내란선동죄’로 몰아가는 사회는 지독한 전체주의, 독재주의로 가는 길목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 독재 시절이라고 말하는 시대에도 종교인들의 발언과, 특히 교회 안에서 전하는 설교에 대하여 ‘내란 선동’으로 몰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들은 민주주의가 뒤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되물을 일이다. 한국교회도 이번 일에 대하여 결코 침묵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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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목사의 설교를 ‘내란선동죄’로 몰아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