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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거시적 안목을 가집시다’(창 13:14-15)
    세상을 너무 근시안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고, 당장의 이익에만 집착을 합니다. 그러나 멀리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와 같은 지혜를 갖지 않고는 인생을 올바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집(믿음의 집)을 지을 때 아주 견고하게 지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눈앞의 이익에만 연연했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실수는 멀리 보지 못하는 인생의 비극을 교훈합니다. 당장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 팥죽 한 그릇에만 집착했던 에서는 장자의 축복권이라는 뒤에 것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창 13장에 보면 애굽에서 올라온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가축이 너무 많아 목자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자 아브라함은 다투지 말고 서로 갈라서자고 하며 조건 없이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먼저 주었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넓은 들판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마치 에덴동산과 같고 애굽 땅과 같이 아주 비옥하고 기름진 곳으로 보였기에 그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의 환경은 생각지 않고 어디를 가든지 신앙생활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눈앞의 이익이나 모든 기득권을 조카에게 양보하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자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 것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14-15절). 사람이 눈앞에 이익을 위해 욕심의 노예가 되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 더러운 탐욕과 정욕과 이기심과 명예욕과 정욕으로 가득 차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신령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겠으며, 신령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의 귀가 열릴 수 있겠습니까? 롯은 당장 눈앞의 이익을 선택했지만 멀리 보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땅을 택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롯은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 그 후 그곳은 죄악 때문에 유황불의 심판을 당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당하고 난 후에 롯의 두 딸들은 아버지에게 술을 잔뜩 취하게 한 뒤 번갈아 자면서 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과 대적하는 민족으로 살았습니다. 가족의 족보를 그와 같은 방법으로 이어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멀리 보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근시안적인 생각으로 할 일들은 후대까지 악영향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화려한 것에 속지 말고, 지금 당장은 서운하고 안타까워도 먼 장래를 위해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먼 곳을 바라보는 지혜를 갖아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믿음의 눈을 들어 지경을 넓히며, 넓게 멀리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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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9
  • [언론회 논평] 러시아는 한국인 선교사를 속히 석방하라
    지난 11일 러시아가 언론을 통하여 한국인 선교사를 간첩혐의로 체포하여 모스크바에 구금하고 있음을 밝혔다. 러시아는 1월 중순에 한국인 선교사를 블라디보스톡에서 체포하여, 2월 말에 모스크바로 이송하고, 그리고 3월 11일에야 그러한 사실을 뒤늦게 공개했다. 러시아답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러시아 당국에 의하여 소위 간첩혐의를 받고 체포된 선교사는 러시아 내 탈북민과 북한 벌목공들에게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것들이 간첩혐의가 된다면 러시아는 심각한 인권 탄압국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가 한국인 선교사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체포•구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는데, 과연 러시아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간첩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믿기 어려운 억측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한국인 선교사를 즉시 석방해야 한다.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러시아와 북한 간의 정상 회담이 이뤄지고, 서로의 무기 거래를 위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그렇다하더라도 러시아가 인도적 차원에서 궁핍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하는 한국인 선교사를 붙잡아 억류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전쟁 중에도 인도적 활동은 계속되는 것이고, 특히 북한 당국의 독재와 그 주민들을 돌보지 않아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탈북한 사람들을 돕는 활동은 정당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러시아는 주권국가로서, 북한 당국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신속히 한국 선교사를 돌려보내기 바란다. 한국 정부도 자국민의 안전이 보장되도록, 또 인도적 차원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안전하게 귀국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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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 [언론회 논평] 살인권도 헌법에 보장하나? 프랑스가 세계 최초가 되다
    • 칼럼
    2024-03-18
  • [언론회 논평] 살인권도 헌법에 보장하나? 프랑스가 세계 최초가 되다
    지난 4일 프랑스에서는 상•하원 통합회의를 통하여 여성들의 낙태할 권리를 헌법에 보장하는 결정을 무려 찬성 780대 반대 72표의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쉽게 말해 살인권을 헌법에 보장하는 최악의 참사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그리고는 좋아하고 있다.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의 자부심’이라고 하였다. 무슨 자부심일까? 생명을 죽이는 것이 그다지도 기뻐할 일인가? 총리는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라는 역사적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낸 것’이라고 하였다. 어쩌면 그 엄마들이 그런 살인허용 속에서 살았다면, 그들도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생명에 관하여 이처럼 정치적 결단을 내리고 대단한 위업을 이룬 것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이 매우 불편하다. 물론 여성의 건강권이나 혹은 성폭력과 같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임신하는 경우는 매우 불행한 것이며, 또 그런 예들은 각 나라에서도 합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전면적인 낙태를 헌법에 보장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의 생명을 이처럼 인간들이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결정을 하고 득의양양(得意揚揚)하는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엄마가 자기 몸속에 들어온 생명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놓는 것이라면,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더군다나 이번 프랑스에서의 낙태를 헌법에 보장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 2022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권을 폐지한 것에 대한 반발이라는 말도 있는데, 어찌 생명을 죽이는데, 낙태권이라는 쟁점을 국제간에 선점하려는 것이 되어야 하겠는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이런 결정에 대하여 로마 교황청은 ‘생명을 앗아갈 권리는 없다’는 성명을 냈다. 당연한 것이다. 낙태를 합법화하고, 이를 헌법으로 제정하는 행위는 인간의 가장 타락하고 교만한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19년에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다며 낙태죄가 폐지되었다. 이때 임신 14주까지는 무조건, 15~24주까지는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한다는 대체 입법안을 냈으나 아직까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 극단적인 성폭행이나 산모의 건강이나 어떤 유전적 질병에 의한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면, 엄마에 의하여 어린 생명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법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한 유럽국가에서 낙태권을 헌법에 보장하는 ‘살인 면허’를 허용하는 법을 만들어 놓고 무슨 위엄을 달성한 것처럼 자랑스럽게 여기는 무서운 광경을 보고 있다. 이래서는 절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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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험한 세상 사잇꾼 되어”
    이어령 선생님은 생전에 '사잇꾼'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느 조직이든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좋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조직은 망하지 않아. 개발부와 영업부, 두 부서를 오가며 서로의 요구와 불만을 살살 풀어주며 다리 놓는 사람, 그 사람이 인재고 리더야. 리더라면 그런 '사잇꾼'이 되어야 하네. 큰소리치고 이간질하는 '사기꾼'이 아니라 여기저기 오가며 함께 뛰는 '사잇꾼'이 돼야 해.”(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역시 언어의 연금술사요 천재적 통찰력이 빛나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시대를 보면 사잇꾼은 보이지 않고 사기꾼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정치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고 행복하게 하는 본령을 벗어나서 자기 진영과 정파의 이익만을 위해 온갖 협작과 비난을 앞세워 공격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사회는 이념, 계층, 지역 갈등을 일으키며 분열하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종교마저도 어느 한쪽에 서서 진영과 정파에 치우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종교는 어느 한쪽으로 서는 게 아닙니다. 특별히 종교 지도자는 여기도 품고 저기도 품는 사잇꾼이 돼야 합니다. 코로나 때 저는 이미 정부에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교단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을 하면서 어떻게든지 현장 예배를 지키면서도 국민 보건을 도모하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어떻게든지 션샤인 처치가 되고 허들링 처치가 되도록 나날이 애를 태우며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특별히 초갈등 사회를 맞이하여 진보와 보수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어서 특별한 상황이지만, 그렇지 않은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진보와 보수, 좌우가 서로 잘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을 봅니다. 저도 지금까지 사잇꾼의 지도력을 발휘해 왔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저의 스탠스를 지지해주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극단적 진영에서는 저를 얼마나 공격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특별히 코로나 시기에 만약 제가 어느 한쪽 말만 듣고 잘못된 판단을 하였다면, 한국교회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데드크로스의 깊은 수렁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션사인 처치가 되어 사회적 순기능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에 초갈등을 유발하고 심화시키는 우를 범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코로나 시기에 예배 회복을 위하여 정부와 맞서서 싸울 때는 싸우면서도 동시에 사회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교회의 역할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코로나로 인하여 상처를 입은 한국교회의 사회적 이미지도 점점 회복할 수 있었고, 분열과 갈등이 아닌 협력과 상생의 길을 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저는 여전히 이런 사잇꾼의 리더십을 발휘하려고 했습니다. 분열된 교계 연합기관을 하나로 묶으려고 엄청 노력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여(與)도 아니고, 야(野)도 아닌 중도적 균형을 지켰습니다. 성경적 본질과 가치를 지키는 데는 철저하게 보수적이지만 사회적 약자와 동서 화합, 남북 화해에 있어서는 진보적인 가치도 추구했습니다. 물론 자신의 태도를 극명하게 표현하는 게 가장 쉬운 일이죠. 누구를 비판하든지, 누구 한 사람을 치켜세우든지 이런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양쪽을 다 품고 양쪽과 함께 같이 가는 사잇꾼의 역할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종교가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과 함께 사회에서는 순기능이 되고 선순환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오히려 종교가 사회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종교는 영생의 길을 안내하면서도 갈등하고 충돌하는 사회로 하여금 숨통을 트이게 해줘야 합니다. 종교 지도자가 사기꾼이 되면 사이비가 되고 이단이 되어 자기 욕망과 욕구만 채우게 되죠. 그런 사이비나 이단은 사회에 더 큰 해악을 가져다주고 악순환을 일으키며 인간의 삶을 오염시키고 파멸의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애당초 종교를 잘못 만났으면 잘못된 종교 지도자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소속 목사이고, 그 교단의 총회장과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한교총 대표회장으로 섬기게 된 것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양극단에 서서 대척점을 두는 행동을 하지 않고 저만의 정체성 위에서 화합꾼과 사잇꾼이 되어왔던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저의 욕망보다는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살아온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저는 험한 세상의 사잇꾼 되어 하나님과 성도들, 그리고 우리 교계와 사회에 사랑과 용서, 화해와 연합의 다리를 놓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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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3-17
  • [언론회 논평] 이승만의 건국 일대기 을 말하다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다는 말에 일리가 있다. 그러나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성경 말씀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건국전쟁>이 우리 사회 화두(話頭)가 되었다. 이승만의 일대기와 다름없는 이 영화는 어떤 다큐멘터리 영화보다 명백하고, 더 다이나믹하게, 영상 속에 더 많은 것을 함축하여 나타내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고 본다. 이 영화는 어떤 픽션이나 논픽션으로 하여금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감동시켜야 한다는 작의적 의도 보다도 진실을 말하므로, 보는 이들의 탄식, 혹은 역사적 미련함과 왜곡된 편파성에 빠져 있던 것에 대한 송구함, 건국 아버지에게 빚진 자들의 미안함, 선조 애국자들에 대한 고마움과 진실을 알게 됨으로써 오는 기쁨이 클 것이라고 본다. 이는 영화 <건국전쟁>에 대한 평가 중에 일부이다. <건국전쟁>이 증거하는 역사적 사실들은, 그동안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많은 왜곡과 거짓으로 엮여졌다는 주장에 대하여, 사실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역사를 바로잡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본다. 물론 거짓과 왜곡과 선전•선동으로 자신들의 진영을 구축해왔으며, 그것을 사수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진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증언하는 진리 중에 하나는 ‘진실보다 더 강한 무기는 없다’이다. 아직도 이승만은 친일파이며, 독재자이며, 미제의 앞잡이이며, 남북 분단의 원흉이며, 부정선거를 획책했던 대통령으로, 그래서 어떤 원수보다 더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소련군이 해방군이며, 김일성의 6.25 남침은 조국 해방을 위한 성전(聖戰)이라는 거짓말에, 더 이상 속아 넘어갈 사람들이 있겠는가? 이승만에 대하여 비난이나, 욕이나, 칭송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말하는 것이 지성인의 자세라고 본다. 왜인가 하면, 자신의 주장과 다른 것을 말하는 이들의 견해를 함께 들어보는 것이 순리가 아닌가? 내가 잘못 이해하였던 사실에 대하여는 진실을 제시하면 받아들이고, 이를 바로 인정해야 되지 않겠는가? 세계의 변화를 홀로 모르는 어리석은 조선 임금과 조정의 관리들, 불쌍한 백성들, 바람 앞에 등불과 같았던 구한말, 조국의 현실을 보며 미래의 불행을 어찌하든지 막아보려는 선각자 이승만은 우리나라를 위하여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승만 개인의 헌신과 역량이 아니고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시작될 수 있었겠는가 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 물론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통하여 인류의 역사, 그 무대에 주연으로, 혹은 조연으로 등장시키고 역할을 맡겨 주신다. 이승만의 역사적 역할은 어떤 주인공보다 더 헌신적이고, 기독교 신앙으로, 굳건한 정신으로, 지혜와 헌신으로, 그 사명을 감당한 인물을 다시 찾아볼 수 있을까 싶다.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며,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이다. 그 신념은 ‘70여년 동안, 90 평생을 오로지 조국을 위하여’ 살았다. 보이지 않는 손과 그 보이지 않는 분의 능력이 인간 이승만을 이끌어 주셨음을 알게 한다. 또한 나라 잃은 선조들의 눈물겨운 애국 운동과 전쟁의 불길 속에 목숨을 던진 영웅들, 다시 만나지 못하는 용사들, 그리고 혈맹 미국과 유엔군의 희생은 오늘 대한민국이 있게 한 하나님의 계획이셨고, 하나님 군사들의 행동이었다.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 같았던 구한 말, 일제 식민지의 비극, 전 세계를 집어삼키려던 공산주의의 화마(火魔)와 거친 땅에 심겨진 희망의 복음 씨앗과 같았던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이제는 거대한 나무가 되었는데, 이 나무에 무지막지하게 도끼질을 해 대는 역사의 반역자들이 없기를 바란다. 다시는 건국 역사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란다. 오직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 하나님께서 선각자들, 애국자들이 생명 다해 헌신으로 세운 나라, 특별히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게 빚진 자들이 이제 모두 한 마음으로 세계사에 빛나는 조국 대한민국의 영원한 번영과 세계사적 자유민주주의 사명을 다하는 나라를 계속 세워가기를 하나님께 간구(懇求)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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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여호와 이레 ‘마침’’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15:21) 성경에는 ‘마침’이라는 단어가 종종 나오거나 행간에 숨어 있습니다. 여기서 ‘마침’은 부사로 가장 적절한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마침을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은 우연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크리스천들이 볼 때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하나님의 개입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의 마침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예수님이 자원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지옥에 가는데 너무 불쌍하구나. 네가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다오.” 그러자 예수님은 “아버지 제가 십자가를 감당하기는 너무 힘이 듭니다. 십자가 통나무는 너무 무거워서 제가 골고다 언덕으로 도저히 지고 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가라고 하시니까 무조건 “예” 하고 순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순종하실 때에는 순종에 자신이 있어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믿음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실 때에는 예수님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을 뿐 아니라 풍채 또한 기골이 장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예!” 하고 순종하신 것입니다. 커다란 통나무를 지고 가시던 예수님은 몇 번 비틀거리며 쓰러지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 때 구레네 사람 시몬이 나타난 것입니다. 시몬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식민 통치를 받는 피지배인 신분으로서 억압하고 누르는 로마 군병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할 수 없는 그것을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해주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신격을 사용하신다면 능히 감당하고 남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는 인간의 대표였기 때문에 신적 능력을 하나도 쓰시지 않고 쓰러지신 것입니다. 더 이상 갈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대신 짊어질 구레네 사람 시몬을 보내신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마침’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도 하고 그러지 못하는 사람 또한 많습니다. 차이는 그들의 믿음의 정도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자신이 비록 부족할지라도 무조건 “예!”하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감당할 힘과 감당할 사람을 주십니다. 하지만 자신만 바라보는 사람은 이론의 한계에 자기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 한 발짝도 앞으로 가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침’을 체험하지 못하고 맙니다. 계속 제자리 신앙에 머물게 됩니다. 신앙인들이 ‘마침’을 체험하려면 모든 이론, 이유 까닭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성막을 세울 때 하나님의 지시는 매우 정교하고 다양하고 그것을 기억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이 명령하셨을 때 그렇게 하겠다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지을 수 있는 은사를 가진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하셨으며(출31:1-7), 성막을 지을 재료 또한 넘치도록 공급받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의 아버지가 곡식과 건포도 심부름을 군대에 가 있는 형들과 그곳의 감독자들에게 전달하라고 했을 때 다른 형들에게 시킬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겠다고 순종하였습니다(삼상17:20).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마침 골리앗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삼상17:23). 그는 골리앗과 싸울 것을 청하였으며 골리앗을 죽였고 그가 이스라엘의 중앙에 진출하는 계기가 됩니다. 신앙인들이 이처럼 ‘마침’이라는 ‘여호와 이레’를 체험하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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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그대, 웃으라고 꽃피지요”
    언제부터인가 저희가 지하철역과 분당선 전철, 교회 외벽에 교회 이미지 광고를 했습니다. 아름다운 문구를 새겨서 제 사진도 넣고 예배 시간도 안내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대형교회가 자꾸 개교회주의적 홍보에 너무 치우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공익적 홍보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 사진도 빼고, 예배 시간도 뺐습니다. 다만 어떤 이단이나 사이비 단체의 홍보가 아니라는 의미로 작게나마 새에덴교회 이름은 넣어놨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 많은 상처를 받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상처는 그 사람을 절망의 바닥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이 작은 한 문구를 통해서 정서적, 사회적 위무를 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헤밍웨이는 그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현대인에게 질문을 하나 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죄가 어떤 죄인가? 그것은 희망을 잃는 죄”라고 했습니다. 다른 죄는 다 용서받아도 희망을 잃은 죄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쓴 ‘꽃으로 만나 갈대로 헤어지다’라는 시집에 수록된 ‘꽃과 예수’라는 시가 있습니다. “너의 상처를 내게로 가져오면 꽃이 되고 / 너의 눈물을 내게로 가져오면 진주가 되고 / 너의 한숨을 내게로 가져오면 노래가 되리니 / 아무리 힘들어도 너를 버리지 마라 / 피투성이가 되었더라도 / 너를 끌어안고 내게로 오라 / 세상이 너를 버렸을지라도 / 나는 너를 꽃처럼 껴안고 / 이 추운 밤을 지나 / 봄날의 아침을 맞으리니.” 시적화자가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도 꽃이 되게 하고 우리 눈물을 진주가 되게 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한숨을 가져와도 노래가 되게 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어 피투성이가 되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가 되더라도 희망만큼은 버리지 말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꽃이 되게 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꽃처럼 다가오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한 밑바닥에 있어도 그 밑바닥에서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게 하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바닥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인생 밑바닥에서 절망과 탄식을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밑바닥에서 꽃이 피어나게 하는 분이십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 희망을 갖다 주기 위해서죠.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웃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봄이 왔으니 곧 꽃이 피게 될 겁니다. 매화와 목련, 진달래, 개나리 순으로 꽃이 피겠지요. 그런데 그 꽃은 언덕 위에서만 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밑바닥에서도 피어납니다. 아니, 바위틈 밑바닥에서도 피어납니다. 꽃 피는 모습을 보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암절벽 위에서나 언덕 아래 밑바닥에 피어 있는 꽃은 더 아름답고 귀하게 보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항상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꽃 한 송이로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그 꽃송이 하나로 봄이 오도록 하기 위해서이지요. ‘꽃과 예수’라는 시에서 “너를 꽃처럼 껴안고 이 추운 밤을 지나 봄날의 아침을 맞겠다”고 한 것처럼 저 역시 인생의 맨 밑바닥에서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한 송이 꽃으로 다가가고 싶습니다. 실제로 저는 그렇게 웃으며 살죠. 제가 진지한 설교를 하거나 사색에 잠길 때를 빼놓고는 항상 웃는 얼굴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웃으며 악수를 하고 반갑게 맞습니다. 그때 제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 있죠. 희망의 꽃이 화사하게 피어납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주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대, 한 번 더 웃어보라고요. 밑바닥에서도 다시 한번 희망을 가져보라고요. 눈 한번 돌려보세요. 온 세상이 다 꽃피는 봄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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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3-10
  • [언론회 논평] 의사 선생님, 어찌 그러십니까?
    정부가 국민의 의료 혜택을 늘이기 위하여 의대생 정원을 늘린다는 정책 발표 후, 의료계는 반발해 왔다. 그러다가 19일 서울의 ‘빅5’(서울대, 세브란스, 서울아산, 삼성서울, 서울성모)병원의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내기 시작하면서, 환자들의 불안은 가시화 되었다. 환자들에게 있어, 의사는 직업인 이상의 존경의 대상이며, 질병 치료에 대한 큰 기대를 하는 선생님이다. 따라서 그런 전공의들이 의료 현장을 떠나, 정치적 투쟁을 한다는 것은, 매우 불행하며, 환자들은 버림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전공의가 절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국가 가운데 최하위라고 한다. 즉 인구 1,000명당 전공의 숫자는 그리스 6.3명, 스페인 4.5명, 스웨덴 4.3명, 호주 4.0명, 뉴질랜드 3.5명, 영국 3.2명, 미국 2.7명인 것에 반하여 한국은 2.6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각 나라들은 수년간 꾸준히 전공의를 늘려왔다. 미국은 20년간 38%를 늘려왔고, 프랑스는 2000년 3,850명에서 2021년 1만명으로, 영국은 2002년 4,300명에서 2021년 9,280명으로, 독일은 2015년 10,728명에서 2022년 11,752명으로, 일본은 2007년 7,625명에서 2019년 9,330명으로, 호주도 2010년 2,662명에서 2019년 4,022명으로 늘렸다. 그러나 한국은 1998년 3,507명에서 현재까지도 그 숫자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병원에서 전공의는 수술실, 응급실, 중환자실을 도맡고 있기 때문에, 그 전공의들이 빠져나가면 의료 공백과 환자들에 대한 심각한 피해는 불을 보듯 뻔하다. 때문에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의사는 환자의 곁을 떠나면 안 된다. 의사는 다른 직업과 다르게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고, 아픈 환자들에게는 절대적 의존의 대상이다. 그런데 정부의 정책에 반대한다고, 함부로 의료 현장을 떠나는 것은, 간접 살인과 같은 것이다. 더군다나 정부의 정책이 국민들에게 의료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게 하겠다는데, 오히려 의료계도 찬성해야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의료계의 주장대로 의료의 질이나 국민들의 건강보험료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일견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의료진이 진료 현장을 팽개치듯 떠날 만큼의 명분은 아니라고 본다. 의사들은 현대적 의미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다. 즉 “제네바 선언”이다. 이에 의하면 ‘나는 인류에 봉사하는데 내 일생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로 시작하여, ‘나는 환자의 건강과 행복한 삶을 가장 먼저 고려할 것이다’ ‘나는 환자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존중할 것이다’ ‘나는 최고 수준의 치료를 제공하기 위해 자신의 행복한 삶, 잠재력을 키울 것이다’라고 선서(宣誓)한다. 의료진은 환자들에게는 질병 치료의 희망이다.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환자 없으면 의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 국민들의 76%는 의사의 숫자를 늘리기 위하여 의대 정원 늘리는 것에 찬성하고 있는데, 이런 국민들의 바람을 저버리고, 환자들 아픔의 신음 소리를 외면한다면, 이를 어찌 의사(醫師)라고 하겠는가? 의사(疑師)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이런 의료 대란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며, 혹시라도 여기에 가담할 의료진이 있다면, 돌이켜서, 환자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 주지 않기를 바란다. 정부도 의료계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통하여 국민들이 불안하지 않도록 조처해 주기를 간곡히 바란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3-05
  • [언론회 논평] 이만희 신천지교에 대한 언론의 보도 자제해야
    우리나라에서 신흥 이단으로 지목되는 곳이 이만희가 교주인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이 있다. 신천지는 불과 17년 전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7년 모 공중파 방송의 ‘PD수첩’을 통해서 그 부정적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2015년에는 CBS가 신천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더욱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계에는 초교파신문(지금은 해산됨)이란 것이 2005년경부터 나타나 약 3년간 신천지 교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일부 교계 언론사 기자로 활동하는 등의 문제로 한동안 떠들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천지가 우리 사회에서 크게 유명(?)해진 사건이 벌어졌는데, ‘코비드19’가 한창 유행하던 2020년 3월 2일 신천지의 이만희 교주가 기자회견을 열어 기자들 앞에서 사죄한다며 큰 절을 두 번씩이나 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이만희는 (신천지 관련된 조사에서 문제가 있는 것에 관하여) ‘이 모든 일에 사죄하고 최대한 정부를 인적, 물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하였다. 교주가 직접 나서서 사죄하는 것은 그야말로 흔치 않은 장면이다. 신천지에 대하여 ‘나무위키’에 보면, 신흥 종교이며, 사이비 종교이며, 기독교계 이단이며, 반사회단체로 소개되고 있다. 또 목적이 명목상으로는 세계평화, 평화통일, 봉사이지만, 사실상으로는 지도부의 금전적 이득과 선민사상, 반지성주의, 전체주의라고 표현하고 있다. 신천지교를 세운 이만희는 1931년생으로, 정통 교회를 다닌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박태선의 천부교, 유재열의 장막성전을 전전하면서, 오늘의 신천지교를 설립한 것이다. 어쩌면 신천지는 사이비•이단 족보의 끝판왕이라고 할 정도이다. 정통교회에서는 신천지를 일찌감치 이단(異端)으로 규정하였다. 예장 통합 교단이 1995년, 기성 교단이 1999년, 예장 합신 교단이 2003년, 예장 고신 교단이 2005년, 예장 합동 교단이 2007년, 예장 대신 교단이 2008년, 기감 교단이 2014년에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신천지 집단은 정통 기독교의 신론, 기독론, 구원론, 종말론, 계시론과 다르며, 교주를 신격화 하는 것을 이단으로 명백하게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신천지가 이단으로써 혹세무민하는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신천지를 보도하는 언론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지난 1년간(2023년 1월 1일~12월 31일까지) 신천지에 대하여 보도한 언론을 찾아보니, 30여 개에 이르고 있다. 그러한 언론 가운데는 각 지방에 널리 알려진 언론사들도 여럿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언론이 각각 1년간 보도한 건수는 10~560개에 이른다. 이들이 전체 보도한 건수는 1,240건이 넘는다. 그중에 가장 많이 보도한 언론은 천지일보로 무려 564개의 신천지 보도를 하고 있다. 어느 언론들이 정통교회의 활동에 대하여 이렇듯 많이 보도하고 있는가? 신천지에 대하여 보도하는 언론은 전국에 걸쳐 있는데(표1 참조) 신천지가 전국에 지파별로 산재한 것과 그 지역 언론들이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신천지가 대대적으로 언론 보도에 치중하는 것에 대하여 신천지 내부를 잘 알고 있는 전문가에 의하면, 첫째는 신천지가 주도적으로 언론을 만든 것들이 있다. 둘째는 언론사나 기자 요원 가운데 신천지 교인이 있는 것으며, 그들이 적극적으로 보도에 관여한 것이다. 셋째는 기사를 돈을 주고 사는 경우들도 있다고 한다. 뿐만이 아니다. 광고를 돈을 주고 사서 이를 자신들의 홍보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한다. 신천지가 아무리 기발한 방법으로 포교를 한다하여도, 그들에게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그런데 이런 한계점을 뛰어넘게 하는 것이 언론의 잘못된 역할 때문이다. 언론들이 신천지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끊임없이 많은 보도들을 해 주는가? 그것은 돈과 신천지 조직과의 밀착 관계로 보는 것이 합리적 의심이다. 언론이 국민들의 ‘알권리’를 충족시켜주는 보도 기능을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신흥 이단집단인 신천지를 홍보하는데 사용한다면, 이는 바른 언론의 기능을 상실한 것과 다르지 않다. 신천지가 주도적으로 언론의 형태로 만든 것이야 신천지 내부에 변화가 오면 시들해지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지역에서 전통과 역사를 가진 언론들이 이런 행위를 하고 있다면, 이는 언론의 정론직필(正論直筆)의 책무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재고해야 한다. 그리고 각 지역민들은 단합하여, 불건전한 언론 보도에 대한 자세를 물어야 한다. 언론이 어찌 이단들의 나팔수와 전파자의 역할을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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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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