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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절차는 위법인데 결과물은 합헌이라?’
- 필자가 대학에서 일할 때, 발생한 각종 소송에 대응한 일이 여러번 있었다. 그 때마다 우리 일을 맡은 변호사가 필자에게 늘 했던 말이 있다. “본안을 다투기보다 절차상의 하자를 다투는 것이 최선입니다. 절차상의 하자가 발생하면 법원은 본안 자체를 다투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법원과 법관은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중히 여기고 이것이 무시된 법안 자체는 다루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그런데 최근 헌법재판소가 일명 ‘검수완박 법안’에 대해 법안 자체는 유효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근 일년 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안건조정위원회를 그야말로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통과했다. 안건조정위란 다수 정당이 수적 우세를 내세워 자당에 유리한 법안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입법 장치이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은 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과반수를 획득하기 위해 2021년 민주당을 탈당한 무소속 양향자 의원을 2022년 4월 법사위로 사·보임시켰으나 양 의원이 검수완박 법안에 반대하자 민형배 의원을 탈당시켜 안건조정위원으로 만들어 결국 해당 법안 중재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하여 헌법재판소는 국민의힘 의원들의 심의·표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절차상의 하자를 인정하면서도 법안 자체는 유효하다는 이해불가능한 판단을 내놓았다. 입법 절차는 위헌이지만 위법한 절차에서 나온 법안을 인정함으로 정상적인 법감정을 가진 국민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검수완박 법안에 가표를 던진 4인의 재판관인 유남석·김기영·문형배 재판관은 우리법연구회 소속, 이석태 재판관은 민변과 참여연대 출신으로 모두 당시 여당이 지명한 재판관들이다. 이런 구성으로 볼 때 예정된 결과일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헌재의 결정이 정치적 결정인 것에 대한 아쉬움을 던져 버릴 수 없다. 헌법재판소는 이 땅의 사법적 권위의 최종점에 서 있어야 한다. 그 권위는 의심받아서는 안되며, 어떤 정치적 성향이나 이익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아무리 정치적 성향이 분명하다 할지라도 최소한 법정신과 절차에 대한 기준은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법원의 최종적 권위마저도 눈감고 정치적 판결을 내린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하여 공분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시각이 아닐 것이다. 민주사회의 근간은 법이고, 이 법은 언제나 공정해야 하고, 그 정신과 의미에 철두철미해야 하며, 이것은 상급심으로 갈수록 더욱 치열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헌재의 위치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중요성을 시비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므로 그의 결정도 도전 받아서는 안된다. 그런데 지금 헌재는 의심과 비난을 넘어 조롱을 받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사법적 권위가 대단한 도전에 직면에 있으며,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가 궁극적으로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불행한 신호이다. 교회와 목회자들은 이 일에 주목하고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 이는 한갓 일부 정치인이나 정당의 문제가 아니다. 국운과 관계된 것이고 앞으로 사법적 판단을 받을 수 있는 사안들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법치 국가에서 법을 수호해야 할 법원이 스스로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경시한다면, 더 이상 법치국가일 수가 없다. 법원이 이러하다면 과연 이를 바로 잡을 책무가 교회에 있을 수도 있다. 법의 깊은 뿌리에는 인간의 양심과 사회적 윤리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을 깨우고 역동적으로 활성화시켜 법으로 법이 되게 하는 법윤리의 각성을 촉구할 수 있는 것은 종교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사회의 양심적 마지노선으로서,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하는 판결을 계속하는 사법부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우리 스스로도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정 능력을 고양하여 반민주적 적폐들을 응징할 수 있는 역량을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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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택시사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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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절차는 위법인데 결과물은 합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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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공영방송의 개혁과 존폐를 생각한다
- 3월 16일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한•일 관계의 과거사를 딛고, 발전을 통한 양국과의 긴밀한 협조와 동반자 관계 회복을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공영방송인 KBS가 이와 관련된 뉴스와 관계 장관을 대담하는 모습이 사실과 다르고, 편향된 모습을 보여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지난 3월 16일 KBS는 뉴스 특보를 통해 윤 대통령이 일장기(日章旗)에 경례했다고 하였다. 이는 순방 첫 행사로 일본 총리 관저에서 의장대 사열을 하는 가운데, 윤 대통령이 양국 국기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상황에서 방송 앵커가 태극기는 보지 못한, 보도의 큰 실수가 나온 것이다. 이 뉴스를 전하는 앵커는 ‘일장기를 향해서 윤 대통령이 경례하는 모습을 보았다. 의장대가 우리 국기는 들지 않는 것 같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단상에는 태극기와 일본기가 분명히 나란히 있었다. 잠시지만, 윤 대통령을 이상한(?) 국가 원수로 만든 것이다. 이를 받아서 전직 청와대 의전 비서관과 또 이를 다시 받아서 야당 정치인들은 가십거리로 삼았다. 이런 블랙코미디가 어디 있겠는가? KBS가 이 문제에 대하여 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상식 이하의 가짜 뉴스가 되도록 진행한 것은 국민들을 매우 실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또 18일에는 대통령의 외교 순방을 평가하기 위하여 외교부장관을 KBS 뉴스에 출연시켜 대담을 했는데, 이 방송을 진행하는 앵커는 협상을 잘못했다는 식으로 몰아붙였다. 제목도 ‘한•일 정상 회담 후폭풍’이란 것으로, 아예 외교성과를 부정적으로 단정하고 다룬 것이다. 이에 대하여 KBS의 전직 앵커는 그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방송을 진행한 앵커는 흥분한 사냥개처럼 공격적으로 몰아붙였다고 평가하였다. 또 장관의 답변도 중간에 끊어버리고, 마치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국무위원을 몰아세우는 듯한 태도였다고 지적한다. 거기에다 방송을 진행하는 앵커가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가면’이란 전제를 달아, 마치 야당을 대변하는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공영방송의 앵커가 전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하는 방송으로서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자격도 없는 모습이었다. 오늘날 국민의 방송이며, 공영방송을 망치는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KBS 내부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다고 보인다. 공영방송이 공정하지 못하고, 심지어 뉴스마저 정치적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데도, 자신들이 엄청난 권력을 가진 것으로 착각하여 국민들과 시청자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방송사고도, 편파방송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KBS는 거듭나야 한다. 민노총이 움직이는 ‘노영방송’(勞營放送)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신뢰받고 사람받는 방송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수신료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신료를 스스로 낮추면서도 일하지 않는 인원을 감축하고, 불편부당(不偏不黨)한 방송이 되도록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 자구책을 통하여 공정한 방송으로, 정직한 방송으로, 정치와 정권에 휘둘리지 않는 공공의 책무를 충실하게 감당하는 국가기관이 될 수 있다. KBS는 국가와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희망을 주는 방송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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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공영방송의 개혁과 존폐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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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통일 교육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 최근 윤석열 정부가 밝힌 통일 교육 지침서가 그동안 전 정권에서 물타기였던 것을 다시 복원시키고, 우리의 정체성과 북한 정권에 대한 정확한 시각을 가지고 정리된 것으로 나타나 다행이다. 통일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다. 우리에 대한 정체성이 모호하면 통일의 방향이 잘못될 수 있다. 그래서 교육을 통해 확실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에서는 ‘남쪽은 대한민국 정부를,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고 했었다. 그러나 유엔이 인정한 정부는 대한민국만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임이 틀림없다. 두 번째는 북한에 대한 규정이다. 전 정부에서는 김정은 정권을 ‘노동당을 지도하는 최고 영도자의 1인 지배 체제’라는 식으로 추켜세웠으나, 이번 통일 교육 지침서에서는 ‘통치자 우상화를 통한 무조건 충성하는 수령 중심의 1인 독재 체제’로 똑바로 규정하였다. 세계에서 북한 정권처럼 장기적으로 1인 독재 체제로 가는 나라는 없다. 이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 맞는다. 세 번째는 북한과의 관계 설정이다. 북한 정권이 핵을 포기하지 않고 군사적 위협을 가해올 경우는 경계의 대상이고, 비핵화를 포기하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적극 협력해 올 경우 평화통일을 만들어 가는 협력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네 번째는 핵을 통하여 전 세계를 위협하므로 세계가 우려하는 북한에 대한 시각이다. ‘북한은 핵 개발을 통해 한반도 및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김정은 정권 들어서서 더욱 핵 개발과 이를 위협용으로 사용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통일 교육은 제대로 된 지침서를 통하여 교육이 이뤄져야 하며, 이런 정확한 현실 인식 속에서 바른 교육이 이뤄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 이런 정확한 상황 인식 속에서 주변국들에게 협력을 얻어내고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통일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며, 바르게 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정부에서 나온 통일교육에 대한 지침서는 정로(正路)로 가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금까지 왜곡되고 북한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것을 은폐되고 과대 포장했던 부분들을 확실히 뛰어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 한반도의 통일은 아주 느리게 올 수도 있고, 생각 외로 빨리 올 수도 있다. 그런데 바른 통일교육이 이뤄졌느냐, 아니면 잘못된 평화통일 환상 속에 있다가 맞이하느냐에 따라 통일된 현실 속에서 혼란의 정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바른 교육은 바른 가치와 목적을 만들어 가고,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흔들리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않게 되는 예방이 된다. 우리 한반도에서 통일의 궁극적 목적은 평화와 자유 민주주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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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통일 교육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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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우리는 왜 참된 정치 지도자를 갖지 못했나?
- 정치는 사람에 의하여 이뤄진다. 모든 국민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지도자, 즉 국민의 대표자를 투표로 선출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국가의 미래와 발전을 위하여 국민 주권을 위임한다. 따라서 정치가들은 국민들이 믿고 맡겨준 정치적 소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 있어야 하고, 국민들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이 있어야 한다. 뿐만이 아니라 국민들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잘못을 하거나 도의적으로라도 책임을 져야 할 사안이 있을 경우는 지체 없이 실행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요즘의 한국 정치 상황을 보면, 오히려 국민들의 인성과 가치관, 도덕적 수준보다도 훨씬 못 미치는 몰염치와 마비된 양심과 비뚤어진 정치야욕을 가지고 있어, 과연 그들에게 국가의 운영을 맡기고, 국민을 대표할 자격이 있는지를 의심하게 하는 지도자가 있다. 현 거대 야당의 대표는 공직에 나오기 전부터 화려한 전과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고, 공직에 나오면서 추가된 범죄까지 ‘전과 4범’이었다. 현재 진보 계통의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그 흔하게 가지고 있는 주사파 학생운동 경력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한 경력도 아니다. 고작해야 공무원자격 사칭과 도로교통법 위반, 특수공무집행 방해, 그리고 공직선거법 위반이다. 그런데 가관인 것은 지난해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서 ‘전과자라고 저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위해서 뭘 했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단다. 전과자가 아니면 세상을 위해 일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일부 국민들도 전과 4범도 대통령 후보에 나오는데, 일반인들이 죄를 짓는 것을 용납해도 되지 않느냐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는 현재 여러 가지 범죄 의혹으로 재판 중에 있다. 특히 성남시 대장동 개발은 단군이래 최대 치적이라고 했다가 문제가 되자, 슬그머니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저런 범죄 의혹으로 그에 대하여 체포를 해서 정확히 조사를 해야 하는데, 난항에 부딪쳤다. 그가 현직 국회의원이며 야당의 대표이기 때문에 체포를 해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데, 그가 속한 야당에서 ‘방탄국회’를 펼쳐서 체포안이 부결되고 말았다(찬성 139표, 반대 138표, 기권 9표, 무효 11표-무효와 기권을 합하면 충분히 체포동의안이 가결됨) 그가 받고 있는 범죄 의혹의 비중에 비하면, 국민들의 법감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이다. 오죽하면 그가 임명했고, 그가 속한 정당의 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그가)‘8개월간 보여준 모습은 국민을 위한 정당의 대표도 당원을 위한 정당의 대표도 아니었다’며 사즉생(死則生)의 결단을 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최근에는 그의 최측근 가운데 한 명이었던 사람이 그와 관련된 문제점에 대한 1차 검찰의 조사를 받고 나서,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유서를 통해 ‘이 대표는 정치를 내려놓고, 함께 일한 사람들의 희생이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썼단다.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벌써 5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이다’ ‘관계가 없다’ ‘검찰의 과도한 수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라는 말만 되뇌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사에 이런 지도자를 보았는가? 참 국민이 불행하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국력을 낭비시키고, 권력을 방패막이로 삼아 법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국민들의 정신 건강에 심대한 피해를 입히는 그 뻔뻔함과 후안무치(厚顔無恥)는 비교될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지도자의 잘못으로 큰 낭패를 보고, 국가가 결딴나고, 국민들이 불행해지는 모습을 얼마든지 보아왔다. 지도자의 잘못도 문제려니와, 그 정당의 책임감과 국민들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참담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중국 노(魯)나라 시대 공자(孔子)는 당시 높은 벼슬에 있던 소정묘(少正卯)를 처형했다. 공자는 사람이 저질러서는 안 되는 5가지 행위를 말했는데, 심달이험(心達而險-마음이 음험한 것) 행벽이견(行辟而堅-행실이 괴팍하고 고집스러움) 언위이변(言僞而辯-말이 거짓되고 교활함) 기추이박(記醜而博-괴이하고 추잡스런 일을 꾸미고 행함) 순비이택(順非而澤-그릇된 일을 행하면서도 옳다고 하며 백성을 기만하는 것) 가운데 한 가지만 해당해도 군자(君子)는 사형을 면하기 어렵다고 했다고 한다. 우리는 최근 우리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해괴하고 무책임하며,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개인의 괴이한 행위를 방어하는데 사용하는 엇나간 정치 지도자들을 보고 있다. 그러나 민심(民心)은 천심이며, 천심(天心)을 거슬리는 권력자들의 말로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다. 지도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혜안(慧眼)과 책임의식과 도덕과 양심에 따른 철저한 자기 성찰과 솔선과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큰 권력을 주시는 것은, 그에 대하여 심판하고 책임을 물으신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서 잠시 빌려주신 것이다. 정직과 진실은 고대 유물이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다. 그럼에도 정치권에서는 누가 누가 더 잘 속이나 경연 대회처럼 하고 있으니 꼴불견이다. 국민들은 정치인들에게 성현(聖賢) 군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시대 소시민이 가진 보편적인 인성과 양심은 소유해야 되지 않겠는가? 거짓은 눈깜짝일 뿐이다. 성경 말씀에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잠언19:9)고 하신다. 국민이 대표로 뽑은 지도자의 해악(駭愕-놀라게 함) 정치가 얼마나 갈 것인가? 제발 하나님께로부터 권력을 빌려 쓰는 지도자들이 국민을 더 이상 기만하고 국가를 불행하게 만들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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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우리는 왜 참된 정치 지도자를 갖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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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지도자는 선각자여야 합니다”
- 이 세상에는 현자와 우자가 있습니다. 우자는 가르쳐줘도 모르고 현자는 가르쳐주면 아는 자입니다. 그런데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싹을 보고 미래를 아는 사람을 명자(明者)라고 하고, 싹이 보이지도 않지만 기미만 보고도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을 철인(哲人)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싹도 안 나고 기미도 안 보이는데 미래를 꿰뚫어 보고 예측하며 그것을 대비하는 사람을 선각자(先覺者)라고 합니다. 지도자는 미래를 내다보고 대안을 세우는 선각자여야 합니다. 코로나가 왔을 때 저는 교단 부총회장으로서 몇 분의 교회사 교수들로부터 자문을 받은 후, 한국교회 지도부에 칼빈의 ‘쿼런틴’(quarantine) 즉, 격리 시스템을 제안했습니다.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할 때 중세 가톨릭 사제들은 공간의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무조건 성당으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걸 주도한 교황이 클레멘트 6세였습니다. 그 결과 성당이 집단감염의 진원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였고 중세 가톨릭은 몰락을 자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선각자적 시각을 가지고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구빈원을 만들어서 사회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흑사병이 왔을 때 구빈원 자체가 쿼런틴, 즉 격리시설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일반 성도들에게도 쿼런틴 시스템을 적용했습니다. 그래서 노약자는 물론 일반 성도들도 교회로 오지 말고 집에서 격리를 해 있으라고 했습니다. 대신 성직자들이 찾아가서 예배를 드려 주었습니다. 당연히 교회에서는 비록 소수였지만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건강한 사람들, 혹은 중요한 사람들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칼빈은 예배의 존엄성을 끝까지 지키면서도 이웃 사랑과 생명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의 종교개혁 운동은 제네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계속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당시는 제가 부총회장 때라 나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훗날 내가 총회장이 되고 한교총 대표회장이 된 후 한국교회에 쿼런틴 시스템을 제안하고 정부와는 협상을 하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아 균형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물론 비난과 공격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극단적인 입장을 취했다면 엄청난 언론의 공격을 받고 교회의 대사회적 이미지는 곤두박질쳤을 것입니다. 또한 총회장 임기 때 저는 총신의 임시이사 문제를 해결하고 정상화를 이루어냈습니다. 사실 다들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손을 놓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동안 소통과 신뢰를 바탕으로 쌓아온 사회적 네트워크와 인맥을 최대한 활용하여 총신의 정상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총회 이사회를 구성할 때도 교육부가 여성 이사를 파송하기 전에 총회가 선제적으로 여성 이사를 추천하자고 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105회 총회 때 기여 이사제를 시행토록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일부 정치권에서는 “당신은 총회에서 매장된다. 당신은 정치적으로 죽는다” 하면서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응대했습니다. “나는 백번 죽어도 좋습니다. 총신이 발전하고 총회가 잘 될 수 있다면, 나는 총회에서 쫓겨나도 좋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걸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아니나 다를까, 교육부에서 3명의 여성 이사를 선임하였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총회 입장에서 반대 성명서를 내고 기자회견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저는 반대를 하였지만 다른 분이 교육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총회장 이름으로 소송을 해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총회장 이름으로 소송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총신이 부당한 손해와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곧바로 소송을 취하했습니다. 요즘일수록 새삼스럽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지도자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판단하고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눈앞에 있는 현실만을 바라보고 교권적 안목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지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 총회와 총신에는 진정한 선각자적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과거에 허허벌판에서 다시 교단을 일궈낸 선진들은 이런 선각자였지 않았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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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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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지도자는 선각자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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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랑을 깨닫는 날부터’
-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골1:6). 얼마 전에 제가 사는 빌라 3층과 2층 사이 계단에 반려견 한 마리가 묶인 채로 있었습니다. 아랫집 청년이 그 옆에 앉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왜 강아지가 그곳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11세대 가운데 그런 강아지를 기르는 집은 없었습니다. 분명 누군가 그곳에 버리고 간 것으로 보였습니다. 강아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를 만지는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버려진 상태가 아니고 분명 주인이 자신을 데리러 올 줄 굳게 믿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보아 주인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강아지로 보였습니다. ‘이런 강아지를 누가 왜 버렸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다음 날에야 풀렸습니다. CCTV 확인 결과 버려진 강아지가 아니라, 주변에 연로하여 정신적인 장애가 생긴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길을 지나다가 강아지가 밖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노끈으로 목에 채운 후에 끌어다가 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인이 그를 학대하였다면, 그는 사람을 경계하거나 심하게 짖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불안한 기색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강아지,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강아지였습니다. 알고 보니 어떤 목사님 가정에서 기르는 반려견이었는데, 주인이 잠시 한 눈판 사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강아지가 낯선 환경에서 조금도 요동도 없이 평온하게 지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들입니다. 임금이나, 주인을 위하여 대신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종종 들은 바가 있지만, 왕이나 주인이 종의 죗값을 죽음으로써 대신 치러 주었다는 말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저 같은 죄인을 위하여 대신 돌아가신 것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7-8).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보답하는 마음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을 깨닫는 것, 사랑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골1:6). 듣는 사람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39:3). 묵상하는 것은 읽고 듣고 기억하고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묵상할 때 감사 감격으로 뜨거워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읽고 들을 뿐만 아니라 묵상해야 깊게 깨달아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겸비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단10:12). 겸비케 하기로 결심만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마음이 둔해지는 것은 겸비치 못하고 높은 마음을 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현자도, 철학자도 아닌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배우려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작은 것부터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사랑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한 것만큼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눅7:47). 자신의 죄악을 깨달은 사람은 죄 문제는 보혈공로 아니면 해결될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보혈을 흘려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보답하는 자세입니다. 그 보답하는 자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에게 어떤 인심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께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한 것임을 알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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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랑을 깨닫는 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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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JMS 정명석에게 엄정한 형벌이 선고되게 하라
-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사교(邪敎)가 있다. 일명 JMS 정명석교(애천교회, 세계청년대학생MS연맹, 국제크리스천연합, 기독교복음선교회 등으로 명칭이 계속 바뀜)이다. 이들의 악행이 얼마나 심각한지 OTT 서비스 넷플릭스에서 정명석에 대하여 다룬 ‘나는 신이다’라는 방송을 통하여 더욱 두드러졌다. 물론 그전에도 정명석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다 알다시피, 정명석은 여신도 성폭행 문제로 지난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 감옥형을 살고 나왔다(대법원 2009도2001 선고: 강간치상ㆍ강간ㆍ강제추행ㆍ준강제추행) 그런데 출소 후에 또다시 성적인 문제를 일으켰는데, 외국 여자 신도 2명을 성추행ㆍ성폭행하는 등 22차례 성폭력을 저지른 혐의로, 지난해 말 고소를 당하고 구속기소된 상태이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면, 현 이원석 검찰총장이 ‘JMS 정명석에게 엄정한 형벌이 선고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하라’고 일선 검찰에 지시까지 했겠는가? 이에 해당 검찰에서는 엄정하게 수사를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정명석은 젊은 여성들을 자신의 신부인 ‘신앙 스타’로 뽑아 관리하며 이들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질러 왔고, 1만 명의 여성을 하늘의 애인으로 만든다는 것이 하늘의 지상명령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 이곳에 몸담았다 탈퇴하여 지난 30년간 ‘안티 JMS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 모 교수가 기독교계 방송에 나와 증언한 것을 보면, 정명석이 이런 사교를 구성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제대로 단죄(斷罪)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권력 기관에 속한 사람들의 보호와 비호, 그리고 사건 은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찌 범죄자를 잡고, 사회를 정의롭게 하고, 국민들의 삶을 평안하게 해야 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고약한 범죄자를 두둔했단 말인가? 이들도 공범이나 마찬가지이다. 정명석의 온갖 범죄행위는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한다. 그리하여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정명석의 더러운 범죄행위를 도와주므로 계속 억울한 피해자들이 발생하게 만든, 권력 기관의 당사자들도 찾아내어 엄벌로 다스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교 집단은 종교를 빙자하여 반종교적, 반사회적, 반윤리적, 반도덕적 집단임을 깨달아, 이곳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빠져나와야 한다.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국민들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이참에 각 피해자들의 진술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는 성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JMS 정명석 집단이 과거에 저지른 여러 가지 범죄행위에 대한 것도 엄밀히 조사하여 필벌(必罰)로 다스려야 한다. 교계 언론에 의하면 JMS 정명석교는 기독교의 교회 간판을 달고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파악된 것만도 100여개가 된다고 한다. 그 사이 이들은 정통 교회를 빙자하여 얼마나 마각(魔脚) 행위를 했겠는가?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나게 하여 선량한 젊은 여성들과 국민들, 그리고 성도들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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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JMS 정명석에게 엄정한 형벌이 선고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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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건국 대통령 ‘이승만 지우기’ 이래서는 안 된다
- 올해는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지 104주년이 된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지 처음으로 3•1절 기념행사를 하였다. 그런데 기념식장의 배경이 되고, 독립운동을 위하여 애쓴 분들을 넣은 현수막에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빠졌다. 그 현수막에는 안창호, 김구, 유관순, 이봉창, 이회영, 박은식, 안중근, 김규식, 민영환, 신채호, 윤봉길 의사 등은 들어갔으나, 조선독립을 위하여 가장 많이 애쓰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최고의 헌신을 한 이승만 대통령은 뺀 것이다. 행정안전부가 주관한 이번 행사에 이승만 대통령이 빠졌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898년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활동을 했으며, 19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었고, 1919년 8월에는 구미위원부를 설립하였고, 1921년 6월 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하였으며, 1941~45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외교 분야에서 탁월한 독립활동을 하였다. 뿐만이 아니라 해방된 조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판을 치던 시대에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른, 자유 민주주의 체제와 기틀을 만들었고, 제헌국회 의장으로 우리의 법의 기초를 만들었으며, 초대 및 건국 대통령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든 훌륭한 거인(巨人)이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을 정부가 홀대하는 것은 좌파의 지난 정부가 하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재인 정권은 독립운동가들 가운데도 좌익이나 공산주의자들을 부각시켰고, 지난 2019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때도 서울 도심에 10명의 독립운동가 초상화를 내걸면서도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을 뺏었다. 그리고 2021년 하와이에서 독립유공자들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는 자리에서도, 그곳에서 20년 이상을 독립을 위해 애썼던 이승만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지독한 ‘이승만 지우기’를 했었다. 그런데 좌파정권에 넌덜머리를 낸 국민들의 여망으로 탄생한 윤석열 정부에서조차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지운다는 것은 뿌리가 없고, 줄기가 없는 나무처럼 살겠다는 매우 어리석음을 보여준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야 어찌 균형 잡히고, 국가와 국민들의 구겨진 역사관과 자존심을 바로 잡는 정권이 되겠는가? 이번 사건은 분명히 의도적으로 이승만 지우기에 앞장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정부는 이런 편향되고 반역사적, 반민주적인 인물들을 찾아내어 문책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는 우리의 당당한 역사와 인물을 가지고 해괴한 이념 놀이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념식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후손과 김구 선생의 후손들도 손을 맞잡고, ‘국민이 한마음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는데, 국가가 국민들의 마음만도 못해서야 어찌 국민들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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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건국 대통령 ‘이승만 지우기’ 이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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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군인들에게 사적 공간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나?
- 지난해 11월 국방부는 ‘군인징계령 시행규칙 일부개정령안’을 입법 예고하였다. 그에 따르면 군인들의 징계 사유 중 (성)‘추행’을 포함하여 군인, 군무원에 대한 동성 간 항문성교나 구강성교, 그 밖에 유사한 행위에 대하여 처벌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는 현재 군형법 제92조의6에 의한 것으로, 당연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지난 해 4월 대법원(대법원장 김명수)에서 판결하기를, 남성 장교와 남성 부사관 사이에 사적 공간(영외 독신자 숙소-군 부대 재산)에서의 군인 간 성행위는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다수 의견 13명 중 8) 이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사적 공간에서 자발적 의사 합의에 의한 동성 간 성관계는 징계에서 제외하라’는 의견을 냈으나 국방부는 합의 여하와 관계없이 징계한다는 시행령을 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편향된 외부의 압력에 의하여, 최근에 국방부가 ‘사적 공간에서 합의된 성관계는 벌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는 방안을 검토한다 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군인들에게 사적 공간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영내(營內)가 아닌 영외(營外) 숙소도 사적 공간은 아닐 것이며, 또 휴가를 간 곳에서의 모든 행동도 군인의 행동이지 민간인의 행동은 아닌 것이다. 만약 군대 영내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동성 간 성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요즘은 스마트폰에 동성애 앱을 깔아 동성애자들끼리의 연락과 연결이 용이하고, 또 그것이 같은 부대나 인근 부대라면 동성애 행위는 계속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영내냐, 사적 공간이냐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왜 군대 내 동성애를 금하는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전력(戰力)의 손실일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질병에 노출되어, 언제나 전투력을 갖춰야 할 병사들에게는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다. 또 군대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조직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쌍방 합의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상관에 의한 위압으로 동성 간 성행위를 막을 수가 없다. 현행, 군대 영내에서 이성 간에도 아무리 합의에 의한 성행위라도 발각 시 징계를 받는데, 하물며 동성 간 성행위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킬 것이 뻔하다. 때문에 동성 간 성행위를 예외로 하는 사적 공간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리고 이런 예외 규정을 두면 우리 자녀들이 동성 성폭력에 심각하게 노출된다. 이를테면 고참병이나 상관이 후임병이나 부하에게 휴가나 외출 날짜를 맞추게 하고, 이를 합의로 가장한 동성애를 요구할 경우, 그 병사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군대에 보낸 것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라고 보낸 것이지, 동성애의 피해자가 되어 돌아오라고 보낸 것이 아니다. 현재 이런 징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군형법상 추행죄를 폐지하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하나를 허용하면 두 개, 세 개, 나중에는 모든 것을 내주어야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저들은 차청차규(借廳借閨-대청을 내주면 안방까지 밀고 들어옴)하려 들 것이다. 국방부는 군대 내 ‘추행’ ‘성희롱’ ‘성폭력’ ‘동성 간 성관계’(합의든 강제이든) 등을 엄격하게 징계하여 군대 내 질서를 유지할 뿐 아니라, 병사들과 하급자들의 인권과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군인들에게 ‘영외’ 혹은 ‘사적 공간’과 같은 어설픈 예외 규정을 둘 때, 병영문화는 위험해지고 병사들을 동성에 의한 성폭력으로부터 막아내기 어렵게 될 것이다. 국방부는 군대 내 불합리한 동성 간 성관계에 대하여 미온적인 태도로 국가의 미래를 어렵게 하고, 젊은 병사들을 동성애 공포로부터 지켜내지 못한다는 비난을 듣지 말아야 한다. 지금 전 세계가 동성애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신성한 국방의 의무 자리까지 ‘평등’이니 ‘행복추구권’이라는 빌미로, 국가 안보까지 무너트리려고 한다. 국방부는 편향된 시각으로 동성 간 성폭력과 국가 안보를 무력화하고 조장하려는 주장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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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군인들에게 사적 공간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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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상남자보다 중요한 것은··· ”
- 수요일 저녁 예배에 갑작스럽게 미국 뉴욕에서 목회를 하시는 김성국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분은 퀸즈 장로교회 장영춘 목사님의 지도아래 목회 훈련을 받고, 아주 충직하게 부목사 생활을 하였던 분입니다. 장영춘 목사님은 뉴욕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디아스포라 세계 한인 목회자들을 하나로 묶는 세미나와 포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때 저희 교회도 적지 않은 후원을 해 주었는데요. 한번은 장 목사님이 한국에 오셨다고 해서 제가 식사를 대접했는데, 다음날 캄보디아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얼굴이 밝아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캄보디아에 가지 마시고, 한국에서 쉬셨다가 미국으로 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캄보디아 선교지에 꼭 가야 된다고 하시며, 그 마음을 꺾지 않으시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소식을 들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뇌졸중이 와서 급히 미국으로 가셨다고 말입니다. 전화를 해보니까 언어도 불편하신 듯 느껴졌습니다. 사모님께 자초지종을 들으니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중풍에 어떤 특수 약재가 정말 효과가 있다는데, 미국에서 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까 더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어찌해서 그것을 하나님 은혜로 구하여 오전 비행기를 타고 뉴욕까지 갔습니다. 제가 갔더니 목사님이 너무 감격해서 막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소 목사님이 의리가 있고 신의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토록 상남자인 걸 몰랐습니다. 그간 한인 목회자를 섬겨준 것도 감사한데, 약재까지 가져온 게 너무나 고맙습니다.” 저는 그 분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드리고, 그날 저녁 비행기로 다시 왔습니다. 돌아와서 계속 전화로 확인해 보니까 그걸 드시고 아주 좋아지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세월이 흐르고, 그 일은 세월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 목사님을 모시고 부목사를 하다가 퀸즈 장로교회 담임 목사가 되신 김성국 목사님을 대면하니까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김 목사님도 “온 교인들이 소 목사님의 그 헌신과 섬김에 위로를 받고 큰 힘을 얻었습니다. 정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라고 설교 서두에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때 장 목사님께서 하셨던 그 한마디가 요 며칠 동안 계속 뇌리에 스쳐 갔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상남자’라는 단어입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상남자의 길을 걸어왔다고 자부합니다. 항상 약자를 보면 보호해 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강자 앞에 전혀 굴하지 않는 용기와 패기가 넘쳤던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의리와 신의를 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오죽하면 한동안 우리 교회 당회에서 “믿음이 없으면 의리라도 있자”를 슬로건으로 삼았겠습니까? 모름지기 남자로 태어났으면 상남자가 돼야 합니다. 대장부가 돼야 합니다. 제가 키는 작아 어찌 보면 소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저의 가슴 안에는 대장부의 심장이 꿈틀거리고 있고, 대장부의 기상과 결기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라면 무엇보다도 소명감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요즘 하나님께서 저에게 온유와 겸손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옛날 같으면 누가 저를 욕하거나 비방을 하면 당장 찾아가거나 전화를 했을 것입니다. 버럭 화를 내며 “왜 그러냐”고 그럴 텐데, 요즘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참는 훈련, 또 온유 훈련, 겸손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제가 누구보다 배짱이 있고, 용기와 결기가 가득한 사람이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참아야 할 때는 참고, 온유해야 할 때는 온유하게 만드십니다. 어느 현인의 말처럼 말이 되지 않는 사람과 말을 섞으면 ‘실언(失言)’을 하게 되고, 말이 되는 사람과 말을 하지 않으면 ‘실인(失人)’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는 아예 말조차 꺼내지 않으셨던 것을 보지 않습니까? 글을 쓰는 이 시간, 상남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가슴속에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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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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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상남자보다 중요한 것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