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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회 논평] 북한의 김정은 정권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지난 10일 북한의 김정은 총비서는 우리 대한민국을 처음으로 ‘대한민국’으로 지칭하면서, ‘주적’(主敵)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지난 2021년에는 남조선이 결코 주적이 아니라고 하였고, 2022년 그의 여동생 김여정도 남조선은 주적이 아니라는 말을 사용했었다. 그런데 지난해 말에 김정은은 대한민국을 ‘적대적 교전국’이라고 했다가, 올해 들어 ‘주적’이라는 명백한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북한은 우리 대한민국을 두려워하고 있다. 지난 2020년에는 대한민국에서 사용하는 말투나 표현을 금지하는 ‘반동사상 문화배역법’을 제정하였고, 한류와 같은 외부 문화를 차단하기 위하여 이런 문화물을 유포하는 자들은 최고 사형에 처한다는 법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2024년 들어와서는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어, 대한민국을 주적의 개념에 편입하면서, 우리나라를 점령•평정•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헌법까지 바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난 15일 김정은 총비서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그들의 헌법에서 ‘평화 통일’의 내용을 삭제하고, 남한을 ‘제1의 적대국’으로 규정하는 내용을 넣어야 된다는 발언을 하였다. 그동안 북한이 얼마나 대한민국에 대하여 적대적인 내심을 숨기고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대남 창구 역할을 했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민족경제협력국, 금강산국제관광국을 폐지한다고 밝혔다. 이는 그의 할아버지 김일성, 아버지 김정일이 지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에 계속 유지해 오던 남북 관계의 기본 틀을 깨자는 것이 된다. 그야말로 김정은 독재자의 본색을 확실히 드러낸 것이다. 북한 김정은 총비서의 저런 태도에 대하여 전문가들이 분석하기를, 북한은 자기들이 하는 일들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 한반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으려는 것, 그리고 올 4월에 있게 될 대한민국 총선에서 윤석열 정부를 흔들기 위한 심리전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북한 김정은 정권의 노림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오늘날 북한이 저 정도로 무너진 것은 공산당사(共産黨史)에 전무후무한 3대 세습으로 정권을 잘못 유지해 온 결과이다. 아무리 북한과 같은 공산국가라 할지라도 소련, 중국, 베트남 등은 일종의 개혁•개방정책을 썼다. 그 개혁•개방을 하려는 명분은 공산당 전 정권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북한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에 의한 3대 세습 정권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할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비판이나 개혁을 도모할 수 없었고, 오직 무기 개발과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켜 정권을 유지해 오는 방법을 써 온 것이다. 그마저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남북이 분단된 지 79년이 되었으나 여전히 대한민국에 대한 적화(赤化)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북한 당국이 정말 인민들을 위하고 평화를 사랑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비극적 폐쇄주의, 영구히 변하지 않는 살인적, 전쟁광적 대적관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였다. 무력으로 자유와 평화를 짓밟는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핵으로 일어선 자는 반드시 핵으로 망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의 역대 정부는 저들의 요구대로 ‘퍼주기’와 핵을 개발하지 않거나 사용하지 않는다는 감언이설(甘言利說)을 대변하는 역할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라도 우리나라는 북한 김정은 정권의 속내를 제대로, 확실히 파악하여, 그에 걸맞는 대북 정책을 써야 한다. 대한민국과 북한은 근 80년 동안 분단된 것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이념 등 모든 면에서 다른 행보를 보여왔다. 이제는 막연한 일방적 ‘통일’보다 우선은 북한이 힘에 의하여 꼼짝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안보와 국방, 외교와 국제적 결속을 다져야 한다. 또 한 가지는 북한의 3대 세습에 의한 주민 폐쇄와 그 강요에 의한 일방적인 주권과 인권 유린이 아닌, 북한 주민들이 변화를 일으키도록 유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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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1-2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성령의 페르소나가 되고 싶다
    지난주는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광주에서 있었던 전국장로회 모임에서 설교를 하고 대구에 가서 영남협의회에서 설교를 하고 또 대전에서는 전국호남협의회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요일은 글로벌 에듀 신년하례회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각기 다른 곳이지만 같은 설교를 하면 안 됩니다. 왜냐면 중복해서 참석한 분도 계시고 또 기자들이 오기 때문에 재탕 설교를 한다고 할까 봐서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목요일에 대전 유성에서 설교를 했는데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축사나 격려사를 하러 오신 분들이 대놓고 저의 설교를 막 극찬해주셨습니다. 특히 강태구 목사님은 매주 저의 설교를 듣는데 “소 목사님이 논리적이고 법리적 설교를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눈물 흐르는 모습을 보면 자기도 가슴에서 눈물이 젖어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봤더니, “소 목사님의 설교에 진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심과 진심이 통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지요. 순간 저는 성령의 페르소나로서의 설교자상이 생각났습니다. 이것은 얼마 전에 칼빈대학교 설교학 교수인 김덕현 목사님이 발표한 논문이기도 한데요, 그는 설교자의 상을 세 가지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는 명제적 설교자상입니다. 이 설교 형식은 본문에서 추출한 신학적 명제 혹은 중심 사상을 기반으로 작성된 설교입니다. 이 설교는 전통적일 뿐 아니라, 굉장히 논리적이고 권위주의적입니다. 거의 전통적인 설교가 이렇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의 단점은 성경의 의도보다는 설교자의 의지와 사상이 앞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자의 권위에 무게를 실을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서사 중심적 설교자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야기설교를 말하는 것인데요. 이 설교는 신학적 명제나 교리적 내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지 본문의 의도를 이야기나 스토리 중심으로 전달하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이야기꾼 설교자죠. 성경은 원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압축된 문장으로 기록된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날 설교자는 성경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끌어내서 회중에게 스토리텔링을 잘해야 합니다. 이것은 명제적 설교보다는 진일보하고 청중과 더 소통이 되는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한동안은 이야기 설교에 심취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 설교에 대한 강의도 많이 하고 다녔습니다. 세 번째로 김덕현 교수님은 성령의 페르소나의 설교자상을 논했습니다. 제가 쓰는 용어에 의하면 극화적 설교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트리니티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벤후저 교수는 설교를 ‘거룩한 극장에서의 거룩한 공연’, 혹은 ‘교리의 드라마’로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도 거룩한 공연의 차원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는 하나님, 곧 성령의 페르소나가 돼야 됩니다. 영화에서 작가나 감독은 영화에 등장인물로 출연하지는 않지만, 청중에게 표현하고 싶은 감독의 의도를 주연 배우를 통해서 드러나도록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봉준호 감독의 의도를 송강호라고 하는 배우가 잘 연기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연기는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작가와 감독이 의도하는 바에 진실한 감정과 전심을 담아야 제대로 연기가 가능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하고 표현하는 성령의 페르소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한때는 이러한 설교를 제가 광대설교라고 표현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광대라는 말이 별로 그렇게 좋은 어감이 되지 않아서 극화적설교라고 표현한 거죠. 그러니까 성령의 페르소나 역할을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설교자가 성경 말씀을 전심으로 연구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성경에 나타난 이야기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전달해야 됩니다. 옛날에는 성언운반 일념의 사상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만 전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려면 성경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감정도 함께 수반이 돼야 됩니다. 아마 강태구 목사님이 제 설교에 “진심이 있다.”는 말은 전문적인 용어로 제가 성령의 페르소나로서의 설교자의 모습을 보였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필요에 따라 명제적 설교도 하고, 때로는 이야기 설교도 하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페르소나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인격적으로 전하는 설교자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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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1-21
  • [언론회 논평] 증오의 말들이 정치 테러를 만들었다
    지난 2일 거대 야당의 이재명 대표가 목 부위를 찔리는 사고를 당하였다. 전에도 유력 대선 후보나 정치인들이 피습을 당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는 자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테러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있고 나서 강성 지지층들이 쏟아내는 말들은 더욱 섬뜩하다. ‘연극이다’ ‘사주다’ ‘자작극이다’라는 말들이 나왔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대통령이나 여당의 비대위원장, 그리고 일선 검사들을 지칭하여 비난하거나 살의(殺意)를 품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면 서로가 신중하고 자제하고 언행에 조심해야 되는데, 오히려 더 흥분되고 분열된 집단의 모습이 광기(狂氣)처럼 번득인다. 이를 ‘집단극화’(group polarization)라고 한다. 이는 개인보다 집단의 의사결정이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현상을 말한다. 이제는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에서 탈피해야 한다. 왜 우리 사회가 이처럼 이성 잃은 감정에 함몰되어 갈등에 상처를 더하므로, 그야말로 우리나라가 ‘갈등공화국’이 되었는가? 국민들이 너무 정치에 몰입한 탓이 아닐까? 나와 생각과 의견이 다른 편의 잘못이나 실수를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대는 독침은 모두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정치인들이 진영 논리에 빠져서 옳고 그름보다 자기의 주장만이 옳고, 상대편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 잘못되었다는 주장에 따라, 국민들도 적(敵)과 아군으로 쫙 갈라진 모양새다. 정치 지도자들의 분노 유발의 잘못된 행태들이 국민들의 심성조차 파괴하는 도구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뉴스1이 빅데이터 분석업체 타파크로스에 의뢰해, 지난 몇 년 동안의 언론 기사와 SNS상의 갈등과 관련된 것들을 지수화하여 발표하였다. 이것을 2018년을 100으로 기준 삼았을 때, 지난 2022년의 한국 사회 갈등지수는 178.4로 불과 몇 년 사이에 무려 2배 가까이 치솟았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여러 가지 갈등의 요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진영(陣營)에 관한 갈등이 72.5%로 가장 높았다. 거의 3/4이 진영으로 인한 갈등이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지난 2019년 조국 전 법무부장관 사태 때였다. 그때 조국 전 장관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극렬하게 갈라져서 집회를 하였다. 그리고 2020년 총선 때와 2021년 대선 때에도 진영 간 분리의 강도(强度)가 강하게 나타났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갈등과 분열과 증오를 키워가고 있다. 마치 활화산 속에 감춰져 있던 불길이 어떤 이슈만 떠오르면, 사정없이 분출하는 용암과 같다. 여기에는 정치인들의 계산되고, 때로는 사려 깊지 못한 천박한 언행이 그릇된 동력(動力)을 제공하고 있다. 그들의 말은 국민들의 정상적 사고를 무너뜨리는 쓰나미가 되고, 그들의 행동은 국민들을 양편으로 갈라놓는 폭약의 기폭제와 같다. 정치인들은 이런 국민들의 소모적 논쟁을 먹고 사는 ‘불가사리’가 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확증편향증’에 사로잡혀 죽기 살기로 서로 물고 뜯는다. 이래서는 절대 안 된다. 증오와 혐오를 부추기는 극단의 정치는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2:3) 우리나라를 ‘갈등공화국’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의 사랑과 겸손과 화합이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의 ‘아무 말 잔치’와 추하고 더러운 말들을 국민들이 걸러내는 것이다. 칼로 벤 상처보다 말로 벤 상처가 더 아물기 어려운 것처럼, 우리는 말에 인격을 걸고, 말에 책임을 지고, 말로 다른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는 에너지를 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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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1-17
  • [언론회 논평] 제 자리로, 정상으로, 공정으로, 기본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7일 보도자료를 통하여 “투•개표관리의 투명성•신뢰성 강화 방안을 마련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동안 선거 때마다 문제가 된 것은 2002년부터 도입된 투표지 분류기 문제, 2013년부터 도입된 사전투표와 그에 따른 관리 문제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외부에서 선거 행정과 전산망을 해킹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국민들이 아무리 정당하고 바른 판단을 가지고 투표에 임한다고 하여도, 이렇듯 투표 관리에 문제가 생기면 민의(民意)는 사라지고, 이를 통하여 이득을 노리는 무리들에게 이용당할 공산(公算)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투•개표 업무 개선을 마련한 이유로, 선거 불복이 국민통합을 저해하므로 선거 전반에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라고 설명한다. 본회도 이런 부정선거의 문제점에 대하여 기독교계에서는 유일하게, 지난 8월 8일 중앙 4대 일간지(조선, 동아, 국민, 경향)에 “부정선거를 막을 원천적이고 불가역적인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낸 바 있다. 그렇다면 중앙선관위가 마련한 방안은 무엇인가? 첫째는 개표절차에 수검표 절차를 추가한다는 것이다. 현행 개표과정은 투표용지를 전자 개표기로 나누게 되고, 그것을 특정 후보자나 정당별로 모으고, 투표지 뭉치들을 심사 계수기에 넣어 확인하고, 분류한 대로 떨어지는 투표지를 개표 사무원이 육안으로 보아서 비정상적 것을 찾아내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새롭게 시도하는 것은 분류되어 떨어진 투표지를 개표 사무원(그동안에는 약 40%가 일반인이었는데, 새롭게 바뀌는 것에서는 일반인이 아닌, 오직 공무원만 투표지에 손댈 수 있게 하는 것)이 일일이 손으로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전•우편 투표함 보관장소에 CCTV를 상시적으로 설치하고, 사전투표의 선거인 신분증을 현재까지는 투표마감 시각까지만 보관하던 것을 선거 소송 제기 기한인 30일까지 보관한다는 것, 또 사전투표용지 일련번호를 QR코드가 아닌 1차원 바코드로 인쇄한다는 것, 그리고 투표지 분류기 보안을 강화하며, 투표지 이미지 원본을 임기 만료 때까지 보존한다는 것이다. 前 정권에서는 부정선거 시비가 일어나도 변명하기에만 급급하고, 꿈쩍도 하지 않았으나, 새로운 정부에서는 이런 잘못과 문제점에 대하여 신속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중앙선관위의 신뢰성 강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자 개표가 전면 폐지되거나 완전한 수개표로 돌아선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선거 관리 사무가 시대적 요구에 의하여 변화되고, 유권자들이 그 선거 결과를 빨리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신속성보다 공정성의 가치가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외국에서도 이 같은 시비와 불공정 문제 때문에 전자 개표기 대신, 수개표를 하는 나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KBS는 그동안 부정선거 문제에 대하여 함구하고 있다가, 지난 26일 9시 저녁 뉴스를 통하여 부정선거 의혹과 시비에 대하여 자세히 보도하였다. 우리나라보다 먼저 전자 투•개표를 도입했던 독일, 프랑스, 캐나다, 스위스, 스웨덴, 타이완 등이 해킹 가능성 때문에 전면적인 수개표(手開票)로 전환했다고 보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개연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국가정보원이 지난 7월 17일부터 9월 22일 사이에 선거관리위원회 보안 상태를 점검하였고, 그 결과를 10월에 발표했는데, 선거 조작이나 부정이 매우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발표조차 미심쩍은 것은 혹시 해킹이 정말 있었던 것을 감추려는 것은 아닌가? 라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이는 애국시민들이 끝임 없이 주장해 온 것으로 부정선거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엄청난 국민적 저항과 국가적 손실을 가져오는 부정선거를 막기 위하여 개표 조작이나 부정이나 해킹이 통하지 않는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하여 국민 간 불신과 소모적인 다툼의 원인을 원천적으로 막아야 한다. 그래서 외국의 경우처럼 手開票만으로 할 것을 요구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제 자리로, 정상으로, 기본으로, 상식으로, 공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를 국민들은 적극적으로 원하며, 이런 정부를 지지한다. 윤석열 정부는 더욱 박차를 가하여 내년으로 다가온 총선에서부터 불공정과 불법과 조작이 통하지 않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불법과 부정을 획책한 자들이 드러나면 엄하게 처벌해야 할 것이다. 이제 확실한 제도 개선과 엄정하고 공정한 시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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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1-1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을 결박하는 사람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마27:1-2) 새벽이란 ‘아주 일찍’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일수록 일찍 행동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침에 일찌기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서 떠났습니다(창22:3). 또 다윗도 가드왕 아기스가 블레셋 장관들이 다윗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윗이 이스라엘과 싸우러 함께 가지 못한다고 하였을 때, 다음 날 일찍 시글락으로 갔습니다(삼상29:11). 그는 가드왕이 막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일찍은 중요한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은 일찍 가장 중요한 첫 시간을 드립니다. 그런데 여기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에 일찍 나서게 됩니다. 그만큼 그들은 예수님을 없애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일곱 마귀가 들어가면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일찍 나서게 됩니다. 하나님을 제일 앞장서서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행23:1). 성령은 우리의 양심과 더불어 말씀하시는데(롬9:1), 대제사장은 전혀 양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수를 판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은 삼십을 가져다 주었을 때의 그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래? 예수가 무죄한 자라고? 우리가 너무 빨리 사형 판결을 하였구나. 빨리 다시 돌리자.”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마27:3). 그들이 사실상 예수님을 죽게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에게 모든 책임을 떠 넘기면서 가룟 유다의 마지막 말에 대하여 자신들은 책임 없다고 시치미를 뗀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욕심이 양심을 눌러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양심을 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합당한 양심을 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입니다(행23:1).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빌라도에게 넘긴 이유가 양심을 쓰지 않고 욕심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우리가 거울 앞에 서면 다른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얼굴이 보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들을 때 다른 사람들의 죄가 생각난다면 거울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티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오직 우리 자신을 위하여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대제사장처럼 예수님을 결박하는 행위들이 신앙인들에게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결박하는 행위는 이론입니다. 말씀을 결박하는 것은 이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이레를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론으로 결박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삼상13:11-12). 이처럼 부득이하게 느껴지는 이론이 예수님을 꽁꽁 묶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유, 변명, 이론, 까닭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신앙인들은 이러한 것들을 깨뜨려야 합니다(고후10:3-6). 그것이 복종입니다. 이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견고한 진이라면 복종은 그 진을 깨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처럼, 여러가지 믿지 아니하는 이론으로 예수님을 결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주님의 말씀에 더욱 복종하여, 말씀을 대적하는 모든 이론을 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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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설산에 가서, 설산이 되다
    지난 화요일 저녁에 야간산행을 했습니다. 저는 머리가 복잡할 때나 아니면 모든 일을 다 끝내고 나면 산행을 합니다. 그날은 다음 날 있을 수요설교, 그리고 금요 철야기도와 다음주 주일설교까지 다 준비를 하고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산 초입에 누군가가 눈사람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눈이 조금 녹아 흐른 것 같아서 제가 머리 부분에 눈을 덮어서 쓰다듬어 놨습니다. 표정도 미소 짓는 모습으로 단장시켜 놨습니다. 그리고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산 초입에는 여러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그 발자국마저도 눈이 쌓여 희미하게 덮여져 있었지만 산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점점 발자국이 없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정말 발자국 하나 없는 산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저는 설산이 너무 좋아서 끝없이 걷고 싶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으면 눈밭에 그대로 눕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순간, 얼마 전에 읽었던 문정희 시인의 ‘설산에 가서’라는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소리 내지 말고 / 눈물 흘리지 말고 / 한 사흘만 설산처럼 눕고 싶다 / 걸어온 길 / 돌아보지 말고 / 걸어갈 길 / 생각할 것도 없이 / 무릎 꿇을 것도 없이 / 흰 옷 입고 흰 눈썹으로 / 이렇게 가도 되는 거냐고 / 이대로 숨 쉬어도 되는 거냐고 / 이렇게 사랑해도 되는 거냐고 / 물을 것도 없이 / 눈빛 속에 나를 널어 두고 싶다 / 한 사흘만 / 설산이 되고 싶다.” 저는 정말 설산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눈밭에 가면 너무 좋아서 눕기도 하고 저수지 얼음 위에 가면 얼음 위에서도 막 누워버립니다. 그 자체가 동심 천국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발자국 하나 없는 평평한 눈밭에 가서 누워 있으려고 하는데, 동행하던 유송근 장로님이 “목사님, 내일 수요일인데 너무 많이 걸으면 예배에 지장이 됩니다.” 하면서 손을 잡고 자꾸 내려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무덤이 있는 곳으로 더 향하고 싶었습니다. 거기에도 누구의 발자국도 찍혀있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유 장로님이 더 이상 가지 말자고 하도 사정을 해서 그냥 내려왔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너무 아쉬운 마음을 가지니까 제 마음에 마침내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이 설산이 된 것입니다. 제가 눈밭에 누울 것도 없고 제 마음 자체가 설산이 된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설산을 내려왔는데 세상에 그 사이에 산 초입에 있었던 눈사람을 누군가 발로 차서 부서뜨려 버린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그랬을까? 어떤 억한 심정으로 발로 차서 부서뜨렸을까? 눈사람이 그냥 녹아 흘러내리는 것도 안타까운데 어떻게 발로 차서 눈사람을 망가뜨린단 말인가.” 너무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아, 세상에는 눈사람을 만든 사람도 있지만 무너뜨리는 사람도 있구나. 도대체 눈사람을 무너뜨리는 사람은 어떠한 마음일까? 과연, 그 마음에 설산이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박살 난 눈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제 마음 안에 다시 눈사람 하나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언제나 하얗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으로요.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주님께 이렇게 속삭여 봤습니다. “주님, 사흘이 아니라 언제나 이처럼 백야 같은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달빛 하나 없어도 온 땅이 하얀 세계가 되는 세상, 눈사람을 발로 차서 엎어버린 사람도 설산을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실수로 눈사람을 부서뜨렸던 사람도 그 마음 안에 눈사람 하나를 만드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한 사흘이 아니라 평생 눈사람 같은 사람, 설산 같은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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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1-1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하여(롬 14:6-9)’
    신앙생활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동기에서 이루어져야지 자기 체면이나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하면 안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8절).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요 방식인 것입니다. 고후 5:15에서도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성령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인생의 성공여부는 신앙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삶의 원리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8절). 6-12절을 보면 ‘위하여’라는 말이 8번 나옵니다. 이것은 목적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삶의 목적이요, 내용이며 중심임을 깨달아 우리의 인생을 보람 있고, 유익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삶의 목표가 오직 예수님일 때, 오직 믿음으로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대표되는 구속사역은 우리를 주님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9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통치권이 지금 살아서 움직이는 자들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에게까지 그 효력을 미치게 되는 우주적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어떻게 시작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해 사느냐’하는 문제 역시 중요합니다. 목적의식, 방향의식이 분명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그 본래의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를 위해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나 됨이 있습니다. 우리가 후회 없이 사는 길은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위해 죽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주님께 헌신한 사람입니다. 주님께 헌신한 사람이란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 생명까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일을 하느라 좌로 뛰고 우로 뛰다보면, 때로는 실망과 낙심이 찾아오기도 하고, 허망한 생각이 들 때도 없지 않으나, 주님을 위해 일하다 보면 힘이 생기고 용기가 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삶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성도란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중심으로 살면서 자신을 높이지 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서 하나님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어렵더라도 주님 중심으로, 말씀으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나는 보잘것없어도 말씀이 내 길을 지도해주십니다. 갈 길을 인도해주십니다. 말씀을 따라가면 반드시 복된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떠나면 고통스런 일들이 생깁니다. 말씀을 떠나면 사탄이 들어오고 역사합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여 사나 죽으나 다 주의 것으로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죽고자 다짐하며 승리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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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9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후회함 없이, 물러섬 없이, 아낌없이”
    드디어 우리는 새해 첫 주를 맞이하였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성도들은 송구영신 예배를 드려서 새해 첫날을 주님과 함께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일로는 우리가 첫 주를 맞는 것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새해 첫날을 맞을 때는 설렙니다. 그것도 성도라면 첫 주일이 더 설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새해를 앞두고는 엄청난 부담감이 들어옵니다. 그것은 35년간 해왔던 송구영신 예배와 신년축복성회 때문입니다. 보통 대부분의 교회는 0시에 한 번 예배를 드리거나 아니면 밤 10시 정도에 미리 예배드리고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성도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저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송구영신 예배와 신년축복성회가 새에덴의 브랜드가 되었고, 저의 목회의 거의 절대적인 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송구영신 예배를 한 번 드리니까 본당에 접이의자를 놓고, 빈 통로까지 앉아야 하고, 비전홀과 교육관까지 넘쳐서 성도들에게 불편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송구영신 예배를 1부, 2부로 나누어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1부 예배부터 꽉꽉 차는 걸 보면서 성도들을 배려하기 위해 앞으로는 3부로 나누어서 드려야 하나 그런 고민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물론 송구영신 예배로만 끝나면 또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년축복성회 설교를 적어도 7편, 8편을 준비해야 합니다. 똑같은 성경 내용이지만 어떻게 새롭게 접근하고 옷을 입혀서 성도들의 마음에 어프로치를 할 수 있는가, 이런 창의적 설교를 준비한다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신년축복성회 뿐입니까? 그게 끝나고 나면 당장 장년여름수련회 설교에 대한 부담이 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교회를 지탱해 주는 큰 두 기둥이지만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힘들게 하지 말고 외부강사를 초청하면 되잖아요!"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고, 어색한 집회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미 새에덴의 린치핀(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연말은 너무 바빴습니다. 왜냐하면 한꺼번에 ‘뉴트로 전략, 핵 처치’,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그리고 북콘서트까지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총 9편의 설교를 준비한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또 욕심이 많아가지고 원고를 작성하면 넘쳐서 흐릅니다. 그러니까 원고를 줄이고 짧게 전하려고 하니까 수정작업이 또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 현대인은 시간이 길어지면 자칫 지루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원고를 줄이고 줄이며 계속 수정하였습니다. 게다가 두 번의 송구영신 예배 때 제가 개인적으로 안수기도해 준 사람만 수천 명이 넘을 것입니다. 또 예배 중간중간에 특별기도 받으러 온 사람들 수십 명을 위해 기도해 주고 강단에 올라가면 진짜 마지막 날은 심장이 뻐근하고 현기증이 팍 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 설교를 했는데 머릿속에 사라지지 않는 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바로 “후회함 없이, 물러섬 없이, 아낌없이”라는 제목입니다. 영신예배 설교 제목인데, 선교사 윌리엄 보든의 말이기도 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그래도 선교지에서 후회함 없이 물러서지 않고 아낌없이 자신의 인생을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그런 말을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었지 않습니까? 이게 지금도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많은 기회를 주셨다면 우리도 후회 없이, 물러섬 없이, 아낌없이 살면 좋겠습니다. 저도 생명이 있고 건강이 있는 한 후회 없이, 물러섬 없이, 아낌없이 새에덴의 린치핀이 되어 송구영신 예배와 신년축복성회, 장년여름수련회를 끝까지 이어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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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강성률 목사의 ‘셈하자’(눅 16:1-13)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허비한다는 것은 조금만 소비해도 되는데, 많이 소비하거나 소비해서는 안 될 곳에 소비한다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것같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공금횡령이 됩니다. 그러자 평소에 청지기를 믿고 일을 맡겼던 주인은 그러한 청지기가 의심스러워서 장부를 정리해서 넘겨달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썼는지 감사가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모두 받은 것입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 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4:7). 우리는 모두 받았습니다. 우리의 몸도, 두뇌도 받았습니다. 재물도 받았습니다. 직업도 받았습니다. 은사도 받았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우리가 만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연장되는 것 역시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허비하고 있습니다. 허비란 무엇일까요? 주님을 위하여 쓰지 않는 것은 모두가 허비입니다. “셈하자.” 하는 것은 주인의 소유가 허비되니 그것이 사실인지 조사해 보자는 것입니다. 나아가 소문대로 허비하였다면 허비했던 것들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할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들을 어떻게 사용하였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쓰셨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위하여 쓰셨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쓰지 않았다면 그것은 허비되는 삶이었습니다. 허비하고 사는 사람과 주인의 것을 합당하게 쓰는 사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것은 자신 스스로 잘 나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리는 대신, 사울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사울이 오직 할 일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하신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고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겼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삼상15:11).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지만, 사울이 세움 받은 왕으로서 합당하게 하지 않고 제 뜻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파면당하고 다윗을 세운 것입니다.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행13:22). 다윗을 왕으로 세운 것은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버리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 헛된 삶입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은 “셈하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보면 많은 능력을 가진 분이지만 자신을 위하여 신적인 능력을 하나도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셨으면 돌이 떡이 되게 하실수도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하나도 아프지 않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열 두 군단도 더 되는 군대를 불러 올 수도 있었습니다(마26:53).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구름 위로 가실 수도 있었습니다(요4:3,4).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도 자신을 위하여 신적인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들을 당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을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고 임의대로 살아가는 삶은 모두 헛된 삶입니다. 반면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영광을 주십니다. 그 영광은 세상이 주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영광의 힘입니다. 새해에는 자신에게서 나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전심전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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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나만의 유레카, 파이팅”
    저는 34년 동안 한 번도 안 빠뜨리고 신년축복성회를 해왔습니다. 초창기에 신년축복성회를 하는데 저의 의욕감이 얼마나 불탔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어떤 분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천만 원을 헌금하신 것입니다. 그때 돈 천만 원이면 지금 우리 교회로서 10억이 넘는 큰 헌신입니다. 그렇게 말씀의 은혜와 헌신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처음에는 열정과 패기와 의욕감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묵직한 집회가 된 것입니다. 어느새 장년여름수련회와 더불어서 우리 교회의 문화가 되고 기둥이 된 거죠. 그런데 오래 하다 보니까 점점 부담감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 두 가지 마음이 생겼습니다. “내가 꼭 이렇게 해야 되는가. 외부강사를 모셔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문화를 바꾸기에는 너무 어설프고 어울리지 않는 시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든 집회를 인도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은혜인 것은 신년축복성회 전에는 몸살이 와도 신년축복성회 때는 몸살이 나아 버린 것입니다. 안면마비도 신년축복성회가 끝나고 왔습니다. 몇 년 전 장년여름수련회 때 신장결석이 왔지만 마약진통주사를 맞으면서까지 고통을 이겨내고 제가 집회를 끝까지 마쳤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어떻게, 언제까지 직접 인도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장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5년 후가 마지막일지 10년 후가 마지막일지, 누구도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끝까지 할 것입니다. 올 연말은 왜 그렇게 바빴는지 모릅니다. 저는 현 총회장도 아니고 연합기관 대표회장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바쁠 수가 없었습니다. 특별히 이번에는 연말에 두 권의 책을 냈지 않습니까? ‘뉴트로 전략, 핵처치’라는 미래목회 전략서와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감성 시집을 냈습니다. 감사하게도 교보문고 시집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연말 교역자정책수련회를 하고 그 와중에도 신년축복성회 말씀을 다 준비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스스로 “유레카!”를 외친 것입니다. 유레카는 고대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깨닫고 난 후에 했던 외침인데요,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고민은 차량 임차 문제도 있고 해서 설교 분량을 어떻게 압축해서 짧게 할 것인가입니다. 원고를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이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원고를 줄이려고 읽고 또 읽으면서도 계속 “유레카!”를 외친 것입니다. “아, 내가 이런 설교를 준비하다니...” 늘 우리가 읽고 알고 배우는 말씀이지만 새삼스럽게 말씀을 준비하고 정리하다 보니까 “유레카!”의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이번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에도 우리 성도들에게 유레카가 터지고 유레카의 탄성을 자아내는 집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 주간 방학했다 생각하시고, 또 교육받고 훈련받는다 생각하시고, 아프지도 말고 꼬박꼬박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대신 여러분들은 방심하고 아무 사람이나 만나러 다니고 분주한 모임을 갖다가 독감이나 코로나에 걸리지 않길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꼭 참석해 보세요. 새해에는 새로운 태양이 뜨고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는 유레카의 은혜, 유레카의 축복이 임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새에덴 성도들이여, 나만의 유레카 파이팅! GO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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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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