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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회 논평] 성명(姓名)을 넣은 기념관과 재단 설립은 명예로워야
    부사관으로 군에 입대한 남성이 성전환 수술을 하여 군 당국으로부터 ‘심신 장애 3급 판단’으로 전역 조치된 사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본인은 여군으로 계속 복무하겠다며, 강제 전역 처분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런 일이 끝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다른 여군들의 입장은 생각해 봤을까? 안타깝게도 이 소송이 진행되는 가운데 본인은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지난 2021년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2월부터 군 인권을 위한 명목으로 활동하는 단체에서 그의 이름을 넣은 재단(財團)을 만든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설립을 위한 신청을 하였다. 국가인권위에서는 이에 대하여 몇 차례 다뤘지만,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 상태이다. 이를 반대하는 자유인권실천국민행동 등 50여 개 시민단체들은 ‘군인권센터가 변00재단을 만들어 대한민국 정부 독립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를 압박해 오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공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며, 21일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실 어떤 재단이나 기념관에 사람의 성명(姓名)을 넣어 만들 때에는 그가 역사적으로,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훌륭한 업적이나 공적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이승만, 박정희, 안창호, 김구, 백선엽 등의 기념관이나 재단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다르다. 군 복무를 해야 할 군인 신분으로 성전환 수술을 하고, 군인으로 복무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전역 조치를 당한 후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사람의 이름으로 재단을 만든다는 것은 오히려 고인을 욕되게 하지 않을까? 어떤 국민들이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인정하겠는가? 아무리 세상이 뒤바뀌고 왜곡된 인권을 강조하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국가에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이 성정체성을 겪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의 이름으로 공익적 재단을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에 하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법인을 허락한다면 국가 기관이 이를 인정하고 부추기는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국가 기관이 이들의 요청을 들어줘서는 안 될 것이며, 이를 반대하는 시민 단체들의 우려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개인적인 한 사람의 죽음은 매우 안타까우나, 그렇다고 그의 이름이 들어간 재단을 만들어 기린다는 것은 국민들과 우리 젊은이들을 어떻게 보고 하는 행동인가? 생명은 누구나 소중하고 귀하다. 그런 측면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것과, 그의 이름으로 전 국민 앞에 재단을 만들어 크게 기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불편하고 서로 힘들게 될 것이다. 그런 불편과 불쾌함을 자초하는 우(愚)는 범하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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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효와 사랑과 감동에 대해’ (딤후 1:11~14)
    사람의 마음이 감동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감동’(感動)이란, 무언가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감동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본래 마음과 태도가 변화되고, 비로소 귀한 마음가짐과 행동의 변화를 이루어 무언가 새롭고 소중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일꾼인 디모데를 향해서 안수하기를 원했고, 디모데에게 안수할 때 하나님이 디모데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 불일듯 되살아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안수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그 마음과 능력을 전달하고 전수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안수는 그 자체로 매우 고귀하고 선한 행위에 해당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일꾼, 순수한 사랑의 사역자 디모데의 진실한 믿음은 먼저 디모데의 할머니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에게 있었는데, 디모데에게도 그러한 믿음이 있는 것을 바울은 발견했습니다. 이렇듯 한 사람의 순수한 열정과 진정한 믿음은 어느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으며 대를 이어 나타난 그 성실함과 진실함과 온전한 믿음가운데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디모데의 삶과 인성과 마음을 보았고, 감동했으며, 안수를 주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러한 결심 또한 바울의 개인적이고 자의적인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닌, 하나님과 연결된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또 그분의 거룩한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무슨 자격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인 우리 주님을 증거하는 일과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살고 있음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본문 13-14절)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하나님의 말씀을 본받아 지키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제가 잘 알던 고(故) 최성규 목사의 효(孝) 사역이 시작된 계기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였습니다. 16일만에 극적으로 살아난 3명의 젊은 청년들이, 비록 신앙을 갖지 않았음에도 살아난 것에 대해, 그들이 공통적으로 모두 효자, 효녀였다는 것과 연결되면서 최 목사로 하여금 ‘효’를 본격 연구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효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보면, 일곱가지로 효가 정리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1효), 부모와 어른 스승을 공경하고(2효), 어린이와 청소년, 제자를 사랑하며(3효), 가족사랑(4효)과 나라사랑(5효), 자연사랑과 환경보호(6효)에 이어 이웃사랑과 인류봉사(7효)로 정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곱 효가 이뤄지면 다시 7가지 행복(가정 학교 사회 경제 나라 교회 인류)이 온다는 내용입니다. 효의 원전은 효경이나 유교 경전이 아니라,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효를 가르친 공자는 BC 551년 인물이지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가르친 모세는 BC 1526년 인물입니다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 얻지만 행복은 효를 통해 받는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면 이 땅에서 복과 장수를 얻는다는 약속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위해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열심은 언제나 그 삶의 방향이 주님의 뜻인 복음과 긴밀히 밀착되어 있어야 하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효를 행하는 사람들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으로 살 때,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방법으로 가장 크고 놀라운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순전한 마음과 진정한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부모를 공경하며, 자녀와 이웃을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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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자녀들이 묻거든’(출 12:21-28)
    자녀들이 묻거든 성경에서 답을 찾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중요한 두 가지가 말씀과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며, 우리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일 5:3-4) 본문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말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를 불러서 너희와 너희 자손이 유월절 규례를 영원히 지키고, 후에 너희 자녀가 이 예식에 대해 묻거든, 이것은 주님께 드리는 유월절 제사인데, 주님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의 집만은 그냥 지나가셔서, 우리의 집들을 구하여 주신 것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참 자유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고전 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질문에 이어 성경에서 자녀들이 궁금한 것을 물을 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살펴봅니다. 자녀들이 왜 맏아들을 모두 대속하여야 하는지를 묻거든,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셨을 때 바로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처음 난 것을, 사람뿐만 아니라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셔서, 처음 태를 열고 나온 모든 수컷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고, 아들 가운데서도 맏아들을 모두 대속하는 것이라고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3:11-16)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훈령과 규례와 법도가 무엇이냐고 묻거든,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규례를 명하여 지키게 하신 것은, 주 우리의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만 하면,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가 잘 살게 하여 주실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될 것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6:20-25) 자녀들이 요단강에 있는 열두 개의 돌들이 지닌 뜻을 묻거든, 주님의 언약궤 앞에서 요단 강 물이 끊기었다는 것과 언약궤가 요단 강을 지날 때에 요단 강 물이 끊기었으므로 그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토록 기념물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수 4:7) 위 질문의 공통적인 대답은, 주님께서 그들을 바로의 노예에서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를 되새겨 기억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열두 지파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을 영원토록 자손들에게 기념물로 남겨주는 그들의 신앙과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주고 떠날 것인지, 어떻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것인지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알려주어야 합니다.(신 6:5) 신앙생활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을 왜 공경해야 하는지 묻거든,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약속이 있는 계명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주 너희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다.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 살면서 복을 누린다.”(신 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님을 참 조언자로 중요하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부모님을 공경하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골 3:20) 부모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여 낙심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격분하게 하여 그들의 의기를 꺾지 않아야 합니다. “어버이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격분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의기를 꺾지 않아야 합니다.”(골 3: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격분하게 하는 것은 잔소리를 하거나 멸시하여 분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의기를 꺾는 것은 낙심하고 자포자기하여 자라나는 심령이 훼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비전을 갖고 당당하게 살도록 슬기롭게 양육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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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쑥 캐는 소녀는 어디 있는가?
    4월부터 제 밥상에 어김없이 오르는 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쑥국입니다. 저는 쑥국이 맛있기도 하지만 쑥국을 먹을 때마다 쑥 캐는 소녀가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시절 제가 좋아했던 소녀가 있었습니다. 봄이면 화사한 옷을 입곤 하던 그 아이의 모습이 너무 예뻤습니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마을 뒷동산을 넘으면 냇가가 하나 있는데 소녀는 냇가 건너편 마을에 살았습니다. 하루는 우리 동네 한 친구가 쑥을 캐러 간다고 해서 따라가 보니 그 소녀가 쑥을 캐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훔쳐보면서 제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사랑이었을까요, 그저 막연한 동심의 연모였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과 같은 순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날 밤, 쑥 캐는 소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필름처럼 장착되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제 가슴에 사랑의 씨가 싹트면서 밤새 뒤척이며 그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도와줘야 할 일은 없는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애를 괴롭히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공부도 제법 잘했고 인기도 좋아 모든 친구와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얼마 후,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시험을 망쳐서 1등을 못했다고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 소녀를 보며 ‘다음 시험에는 일부러 몇 문제를 틀려서 그 아이에게 1등을 양보해 줘야지’ 하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녀를 위해 다음 시험을 일부러 망쳤는데도 다른 아이가 시험을 잘 보아서 그 소녀가 또 1등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져 그 소녀보다 제가 더 속상하고 분했습니다. 몇 년 뒤 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남자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다녔지만 여자애들은 버스를 타거나 걸어 다녔습니다. 저는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이었는데도, 영어 단어를 외우고 다니는 여학생에게 말 한마디도 건네지 못했습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흐르고 저도 어느덧 중년을 넘긴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쑥 캐는 소녀가 어디에 사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또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 시절의 순수한 마음으로 기억을 간직할 뿐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목회를 한 후 쑥 캐는 소녀를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는 오직 주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목양 사역으로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4월, 5월이 되면 쑥국을 먹을 때마다 쑥 캐는 소녀가 떠오르고 나이와 상관없이 다시 청춘, 아니 소년으로 돌아갑니다. 너무 삭막하고 강퍅한 시대 속에서 순수의 시대를 떠올리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순수를 잃어버리고 온갖 야욕과 음모, 위선과 권모술수로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습니까? 한국교회마저도 너무 이념화, 정치화되어 사회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때에 우리 모두 다시 순수의 시대를 회복해야 합니다. 순수한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을 쏙 캐는 소녀, 쑥 캐는 소년으로 생각하며 언제 어디서나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목양 사역에 전념할 것입니다. 비록 빛바랜 추억의 흑백 앨범 같은 것일지라도 저의 가슴에 쑥 캐는 소녀와 같은 순수한 추억과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런 기억마저 망각한 채 거친 세상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차갑고 삭막한 삶일까요. 저는 우리 교회에 오시는 모든 성도들이 쑥 캐는 소녀라고 여기며 반깁니다. 새로운 4월, 5월이 되면 한 살, 한 살 나이는 더 먹어 가지만 변함없이 저는 다시 소년으로 돌아갑니다. 천국 갈 때까지 저는 콘크리트 도시의 경쟁과 야욕, 망상을 떠나 그 눈부셨던 순수 시대의 봄의 길을 걷고 봄의 사역을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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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이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이 세상에서 성도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의 유명함과 탁월함을 보려고 구름떼처럼 몰려든 당시의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질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 11:7-8) 예수님께서 이러한 질문을 하신 것은, 많은 군중들이 세례요한을 보러 광야에 나간 이유가, 깊은 영적 진리를 찾고 그것을 따르기 이르기 위함보다는, 갈대같이 흔들리는 마음을 갖고 훌륭한 옷이나 외모를 보러 간 것이 아니냐는 사실에 대해 지적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온통 정욕적인 속셈을 갖고 사는 곳이 이 세상이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재무장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와 성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자기 자신도 이중적이고 가증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선택된 나라가 이스라엘인데, 선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진실하고 순전한 사람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어느 한 사람, 나다나엘을 향해 그가 사심이 없음에 대해 기뻐하시면서, “너야말로 참 이스라엘인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을 따라서 순수하고 온전하게 사는 사람이 드문 현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주 여호와의 영이 임하셔야 합니다. 기름 부으신다는 의미는 세워주신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시는 것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며, 믿음의 사람을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바로 이런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셨습니다. 즉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보내셔서 이러한 일들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우리도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교회의 주된 사역으로 표방해서, 이름부터 특색있게 짓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희망의 소식을 들려주어야 하며, 절망이 아닌 소망과 생명과 치유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는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처럼,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나 사상, 물질이나 돈, 혹은 유흥과 각종 중독적인 성향에 포로가 되어 묶여있고,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육신과 영혼에 자유를 선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은혜받고 치유받아야 하며, 말씀으로 깨달아 전적으로 예수님과 마음을 같이하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잡하고 힘겨운 인생들에게 꼭 필요한 고백이 있습니다. 마라나타, 즉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예수님께서 속히 오실 날을 고대하면서, 그날이 오기까지 언제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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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빛의 나라에서부터 빛의 연대기까지
    지난주 수요일 오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빛의 연대기’ 공연을 하였습니다. 남들은 그냥 지켜보는지 모르지만 저는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제가 작사를 할 뿐만 아니라 영상 하나하나, 멘트 하나하나까지 다 체크를 해야 했거든요. 사실 제가 영상 내레이션을 몇 번을 보면서 “이렇게 고쳐라, 이렇게 편집하라”고 수정하고 또 수정했습니다. 영상 실무를 담당하는 나유진 자매가 우리 교인이 아니었다면 엄청난 시험에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마지막 순간까지 꼼꼼하게 체크를 하고 지적을 했거든요. 사실 장소를 허락해 주신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님께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마는. 아쉬운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직도 한국교회 연합기관이 하나 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애당초 한교총과 한기총이 합하여 이 칸타타를 공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무선에서부터 반대가 심하고 어떤 적대감, 증오심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같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또 하나는 사실 ‘빛의 연대기’ 공연을 더 넓은 광장에서 하고 싶었지만, ‘광장’하면 긍정적이라기보다 부정적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잠실에 있는 체조경기장이나 기타 다른 곳도 찾아봤지만, 대여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본당 2층을 가득 메운 우리 교회 성도들의 그 뜨거운 열기는 강단으로까지 전해졌고 저의 제스처에 따라서 다 움직이는 성도들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음악감독을 맡은 류형길 지휘자가 너무 수고가 많았습니다. 사실은 총 9곡인데 제가 과감하게 한 곡을 뺐습니다. 저라고 아쉬움이 있는 걸 왜 모르겠습니까마는, 저는 항상 시간을 예측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한 곡을 더 불렀으면 그 한 곡 때문에 지루함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류형길 지휘자에게 서곡을 한번 멋지게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지역 차량이 돌기 때문에 12시까지 예배를 마쳐야 되거든요. 그런데 정확하게 행사가 끝나는 시간이 12시 1분 30초였습니다. 제가 7번 곡을 뺀 것이 너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특별히 서곡에서부터 시작하여 피날레에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할 때는 그야말로 모든 청중이 감동을 받고 다 일어서서 함성과 박수를 보냈습니다. “태초의 밤하늘에 떠오르던 별 / 달빛 아래에 잠든 꽃들이 깨어나고 / 구속사의 푸른 장강이 흐르고 / 한라에서 백두까지 그 길을 따라가 /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역사 / 길고 길었던 시간들 / 하나님 섭리로 이겨냈네 / 빛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 / 이제 어두웠던 역사 그치고 / 밝은 빛의 향해를 시작하네 / 우린 진정한 하나가 되어서 / 이 빛을 지켜가리라 / 우린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 빛의 선민으로 나아가리라 / 우린 진정한 한민족 되어서 / 이 빛을 지켜가리라 / 거룩한 환상 생명의 언어로 /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리라 / 어둠을 뚫고 밝아오는 찬란한 / 찬란한 새벽빛이여 /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 아멘 아멘 아멘 아멘!” 행사가 끝나고 나니까 어느 국회의원은 “이거 목사님이 진짜 쓴 거 맞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또 어떤 총회장은 “목사님이 시인이라는 걸 이제 알았네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국민일보도 안 보십니까?” 사실 이 공연은 한 교회에서만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유튜브에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본다 한들 현장에서의 느낌과 감동을 그대로 전해주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유튜브를 시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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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4-2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부활하려면’(롬 8:11)
    그리스 철학자들과 플라톤은 영과 혼을 하나로 묶어서 사람은 영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과 영혼을 분리하여 육은 죽지만, 영혼은 불멸하여 끊임없이 윤회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이 플라톤이 주장한 영혼불멸설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영, 혼, 육이 다 죽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다시 흙으로 되돌아갑니다. 모든 피조물 중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몸에서 떠나면, 즉영이 죽으면 사람의 심장에서 나오는 혼과 육도 죽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님의 영, 혼, 육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의 몸에 하나님의 영이 다시 임함으로써 예수님의 영, 혼, 육이 다시 일으켜 세움을 받았습니다.(행 13:30) 어떻게 예수님의 영, 혼, 육이 죽을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신적인 것을 비우시고 인간적인 것으로 낮아지셨기 때문에 영, 혼, 육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빌 2:6-8) 죽음의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무서워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눅 24:38-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아직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눅 24:41)라고 말씀하셔서 제자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더니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눅 24:41-43) 이처럼 예수께서는 육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육과 혼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영도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영, 혼, 육이 죽고, 성령님에 의해서 영, 혼, 육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사도신경을 보면,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육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 즉 영혼육이 부활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영, 혼, 육이 죽었다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영, 혼, 육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런 부활의 몸을 바울은 신령한 몸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5:44) 신령한 몸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육의 몸이 새로운 신령한 몸으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즉 부활한 몸은 사람의 형상과 육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나 부활 이전 육의 몸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지상의 물질적 공간과 역사적 시간을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신령한 몸도 지상의 몸과 초월의 몸이 연합된 것입니다. 즉 지상의 몸이 초월의 몸 곧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 부활입니다.예수님의 변모사건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마 17장) 우리도 부활하면 예수님처럼 지상의 몸과 초월의 몸이 연합된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으로 일으켜 세움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죽은 몸도 성령님에 의해서 일으켜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성령님에 의해서 사람이 다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타락 이후 사람에게서 이미 성령님이 떠났기 때문입니다.(창 6:3)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이 떠나시지 않도록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성령님이 임하십니다.(행 2:38) 부활하려면, “생명을 주시는 영”(고전 15:45)을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 즉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인 다른 보혜사가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도 부활합니다. 즉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죄 때문인 것으로 시인하고 믿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 곧 생명을 주시는 영이 오셔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살고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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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기독교가 융성하고 과학이 발전하는 나라
    저는 이분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송봉현 선생님이신데 과학기술부에서 국장까지 지내신 분이십니다. 이분이 ‘두뇌자원 나라’라는 책을 쓰셨는데 직접 사인을 해서 저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고 감탄을 하였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모르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5천 년 전 빈곤을 말끔히 씻고 천국과 같은 선진국의 삶을 누리는 나라가 우리나라라는 것입니다. 유엔 설립 후에 새로 가입한 150여 국가 중 우리나라만이 최고로 올라선 유아독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마르티아 센 교수의 주장처럼 기독교가 융성한 것이고, 두 번째는 과학자들, 첨단기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디서부터 시작이 됐냐하면, 미국의 원전 대가 워커리 시슬러가 경무대를 방문하셔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라늄 1g은 석탄 3톤과 맞먹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석탄은 땅에서 캐내지만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캐내는 자원입니다. 과학자들을 기르십시요.”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이 200명의 우수 과학자들을 선발해서 1인당 6천 달러씩 지급하여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과학 인재 투자의 열매를 박정희 대통령이 근대화, 산업화의 자산으로 거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정근모 박사였습니다. 이분이 산파 역할을 해서 69년도에 키스트(KIST)가 생겼고 그 이후에 카이스트(KAIST)대학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 교회 최진경 장로님과 같은 우수한 과학 기업인이 나온 것이죠. 우리나라는 키스트와 카이스트 설립 후에 원자력 발전 국산화, 고속전철 개발연구원, 자체 인공위성 발사, 농약 신물질 창출, 제약 국산화 기반 구축, 화학연구원 등이 생겨났고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진보 진영이었지만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도 경제정책, 과학기술 업무는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이어져 오던 정책 기조를 뒤집지 않고 그대로 이었다는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반원전을 표방했다가 완전수용, 과학기술부 승격, 정보화 고속도로 구축, 과학 훈장제를 신설하였고, 노무현 대통령도 과학기술부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시키면서 과학기술 발전을 향한 확고한 국정철학과 의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이런 역사를 몰랐는데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습니다. 앞으로 과학 계통의 노벨상도 우리 한국이 받아야 할 차례라고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 AI 기술도 대한민국이 앞장서야 하는데, 아니 우리 한국교회도 정말 미래 인재를 키워내야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 저의 사역도 인재를 키우는데 앞장 서려고 합니다. 개척교회 목회자들을 교육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방학 중에 신학생들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주면서 교육하고 인재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대통령입니다. 다음 정권이 과학기술정책을 뒤집지 말고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특별히 AI 부분을 국가가 통제하지 말고 자발적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하는 환경과 지원을 해 주어야 합니다. 삼성 반도체가 대한민국의 보물창고였다면 AI산업이 미래의 보물창고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요즘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 촉발로 인하여 세계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위기감에 휩싸여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정치 역시 너무 이념과 정파적 이익에 치우지기 보다는 미래 경제발전을 위한 과학기술의 진보를 위해 투자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앞으로 그런 국가지도자가 나와서 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다시 한번 선진 대한민국으로 비상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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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삶이 곤고한 이유에 대해’(시 107:10~12)
    사람이 흑암과 죽음의 그늘에서 살며 쇠사슬에 매여 고통하는 죄수처럼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가르침을 거절하였기 때문임을 본문은 말씀합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사실과 진실을 콕 집어서 이야기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제각각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였었거나 매여있는 처지이거나 합니다. 어디가 흑암이며, 어느 부분이 쇠사슬에 매인 것일까요? 자기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온통 마음이 흑암에 싸여있고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으며 곤고해하고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매여있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환경과 삶의 터전 또한 그렇게 어두워지고 곤고해지며 매여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만드시고 바라보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간단하고도 명쾌하게 그렇게 곤고해지며 매여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있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서 사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옥에 갇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이나 베드로같이 선교와 희생, 또는 애국의 일환으로 옥중 생활을 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옥에 갇히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말고, 남을 해하지 말며, 살인하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며, 간음하지 말며,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은 극히 도덕적인 내용이지만, 그 이전에 그러한 기준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감옥에 갇힌 적이 없다고 자부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감옥은 아닐지라도 자기 마음이 이미 감옥인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게 되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있는 불행한 현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감옥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 의하면 이러한 마음의 감옥은 이미 스스로 자초했던 잘못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랑의 중요성보다는 다른 관계나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약 사랑의 관계이어야 할 부부의 모습이, 현실을 살다보니, 배우자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거기에 푹 빠져있게 된다면, 이는 불륜이며 배신이고 범죄로 이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혈연 그 이상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멸시함에 따라 겪게 되는 고통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울 때는 엎드러져도 돕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12절).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며 어떤 상황에 놓여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감사와 평안입니까? 흑암과 쇠사슬에 매임입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는 가운데 진리의 말씀 안에 거하여서 참된 사랑과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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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빛의 연대기, 사랑의 하모니
    우리가 생일을 맞으면 서로 축하해 주고 기념을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70세를 맞으면 고희연을 열어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무병장수와 가정의 화목을 기원하지 않습니까? 올해는 한국교회가 14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어쩌면 140의 생일과 같은 것인데 100주년 이후로 뚜렷한 행사나 기념대회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한국기독교 140주년의 역사를 결코 잊지 않아야 합니다.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희망이 없습니다. 역사 속에는 역사를 세우고 만들어 갔던 사람들의 땀과 눈물과 피가 스며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은 그 역사 속에 담긴 땀과 눈물과 혼을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한국기독교 140년의 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대대적 행사를 광장에서 해 볼까도 생각했는데 워낙 광장 하면 많은 국민들의 인식에 나쁜 이미지로 각인이 되어서 고민 끝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특별히 직접 제가 대본과 작사를 한 칸타타 ‘빛의 연대기’가 공연될 것입니다. 그날 행사에는 한국교회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정관계의 주요 지도자들과 기자들을 초청하여 다시 한번 우리 사회에 사랑과 빛의 하모니를 전하는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새롭게 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유창한 연설이나 말이라 할지라도 언어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음악은 무조건 하나를 만듭니다. 영국 황실에서 음악회를 하면 여야를 다 초청하여 음악 안에서 하모니를 이룬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사회가 이념과 정파에 따라 얼마나 갈라지고 대립하고 있습니까? 심지어 한국교회마저도 사랑과 화해의 중재자가 아니라 분열과 갈등의 한 중심에 서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심각하게 이미지가 훼손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빛의 연대기’를 통하여 우리나라 역사의 고난과 위기의 순간마다 나라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사랑과 희망의 빛을 발하였던 한국교회의 역사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우리 사회를 하나로 만드는 빛의 파동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흑암의 땅에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해 주기 전 예수님을 알았던 믿음의 선진들, 우상과 미신, 가난과 차별의 어둠으로 가득하였던 한반도에 복음의 빛을 전해준 푸른 눈동자들의 사랑과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복음의 빛으로 가득한 나라에서 경제 번영과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참혹한 역사의 밤이 찾아왔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별빛 언덕에 빛의 서시를 쓰며 아침을 노래하였던 순교자들의 피와 눈물의 희생이 있었고, 한국교회 성도들은 새벽마다 차디찬 교회 마룻바닥에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우리나라가 세계 속의 경제강국, 문화강국으로 우뚝 비상하는데 사상적, 문화적, 영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기독교 140년의 역사야말로 빛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격동의 역사, 감동의 기록, 눈물의 시가 담겨 있는 ‘빛의 연대기’ 공연을 통하여 분열과 갈등으로 상처 입은 한국 교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하나로 만드는 사랑과 빛의 하모니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일정을 미리 조정하여 다가오는 4월 23일 수요일 10시 30분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모입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빛이 되어 함께 빛의 연대기를 씁시다. 한국기독교 140년의 역사를 시적으로 표현한 서정적 해설과 더불어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감동의 노래로 빛의 대서사시가 연출될 것입니다. ‘빛의 연대기’ 공연은 여러 방송과 일간지를 통해서 보도가 되고 기사화될 텐데 우리 모두가 역사의식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며 협력하고 헌신도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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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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