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19(수)

칼럼
Home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실시간뉴스

실시간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기사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호조(互助)의 이상을 꿈꾸다”
    지난 수요일 오후 권혁만 감독님이 제작한 뮤지컬 영화 ‘호조’를 관람하였습니다. 권혁만 감독님은 주기철 목사님의 영화 ‘일사각오’, 손양원 목사님의 영화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을 제작한 참으로 귀한 분입니다. 반 기독교 문화와 사상을 담은 영화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담은 샘물 같은 영화들을 제작하여 온, 이 시대의 요셉과 같은 감독님이십니다. 저는 ‘일사각오’를 비롯하여 권감독님께서 영화를 제작할 때마다 후원하며 섬겨왔습니다. ‘호조’는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와 안창호 선생의 구국적 우정과 독립투쟁을 그린 뮤지컬 영화입니다. 손정도 목사는 일제강점기의 암흑 시대를 살아가는 고통 받는 민족의 현실 앞에 괴로워합니다. 이상적 신앙과 역사 참여의 간극 속에서 갈등합니다. 그러다 신민회를 통하여 안창호 선생을 만나게 되고 본격적으로 나라의 독립과 자강을 위한 애국운동에 참여를 하게 됩니다. 국내에서 너무 극심한 박해가 시작되자 상해로 넘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고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어 의용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해 갑니다. 그런데 상해 임시정부 내에서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갈등하며 심각한 분열의 위기에 빠집니다. 이런 현실 앞에 손정도 목사는 너무나 안타까워하며 “언제까지 나라와 나라가, 백성과 백성이 나뉘어 싸우고 다투어야 하는가”라며 통탄합니다. 결국 손정도 목사는 자신의 신앙과 애국이 결합된 ‘이상촌’을 건설하기 위해 북만주 길림에 땅을 매립하고 추진합니다. 바로 ‘이상촌’의 설립 정신이 ‘호조’(互助)였습니다. 호조라는 말은 서로 돕는다는 뜻으로, 더 이상 서로 분열하고 다투지 말고 서로 돕고 섬기며 하나를 이루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자는 손정도 목사의 정신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손정도 목사는 이상촌을 시작하며 “나는 비단이 아니라 걸레가 되겠다”고 노래합니다. 더 낮아지고 더 섬기면서 고통받는 백성의 눈물과 분열된 나라의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걸레 정신이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젖게 하고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손정도 목사는 이상촌 사람들에게 제주도 왕나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제주도 왕나비는 그 연약한 날개짓으로 바다를 건너간다고 합니다. 그렇듯 우리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함께 호조 정신으로 다시 일어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세상을 만들어 가자고 말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빼앗긴 나라의 봄을 되찾고자 몸부림치는 손정도, 안창호 두 사나이의 우정과 불굴의 투지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무엇보다 손정도 목사님의 장남이신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 기념관을 건설할 때 우리 교회가 3억 원에 달하는 재정을 후원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있는 자유와 평화는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손정도 목사와 안창호 선생과 같은 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온 나라가 진보와 보수, 우파와 좌파로 나뉘어 갈등하고 싸우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오버랩 되면서 손정도 목사님의 호조 정신이 가슴 사무치게 그리워졌습니다. 한국교회의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이 꼭 한 번은 보아야 할 영화입니다. 영화 ‘호조’가 한국교회와 이 시대 속에 다시 한번 호조 정신을 회복하는 사랑과 용서, 화해의 불씨가 되고 꽃씨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한 마리의 왕나비가 되어 연약한 날갯짓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날아가면 분열과 갈등, 파괴와 상처의 검은 바다를 건너 사랑과 용서, 화해와 상생의 봄으로 건너가리라 믿으면서 말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2-1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혼란할수록 가치가 더 중요하죠”
    최근에 병원 생활을 하면서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시국이 어수선하다 보니 결국 손에 들린 것은 신문이었고, 눈길이 머문 곳은 TV 뉴스였습니다. 화면 속 폭력적인 언행과 장면들은 양 진영 간 극한 대립과 충돌의 결과였습니다. 남북으로 나뉜 현실만으로도 억울한데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극단적인 분열과 충돌이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대립과 갈등을 오히려 정치인들이 선동하고 부추기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정치가 왜 존재하는 것입니까? 백성 혹은 국민의 안위와 행복, 그리고 공공의 선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정치인은 진보 진영이 되었건 보수 진영이 되었건 간에 국민의 행복과 공공선을 이루기 위한 이상과 가치를 펼쳐가야 합니다. 그것이 정치의 본질이자,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면 그러한 이상과 가치를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탐욕이 앞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탐욕은 반드시 자기 우상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자기 우상화란, 정치적 이상과 가치보다는 자기 이익을 앞세우며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탐욕을 품게 되면 그 탐욕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종교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의 가치, 그것을 위한 이상을 추구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과 이상이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지배되고 통치되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는 편협한 자신의 신념과 확신을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 소신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가치이며 진리이기 때문이죠. 종교뿐만 아니라 어느 조직에서든 리더는 개인적 신념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이 속한 조직과 공동체의선한 이미지메이킹을 고려하고, 그것이 공공의 윤리와 가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하는지 고민하며 행동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그리고 진실과 진리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지도자의 위치에서 가짜 뉴스나 거짓 정보를 확산하는 데 앞장서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는 한동안 안토니오 그람시가 세운 동성애 전략에 곤혹을 치러야 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문화적 헤게모니(cultural hegemony)’ 이론을 주장하며 교육, 미디어, 문화, 예술 분야를 장악하여 기독교와 같은 기존 도덕과 가치를 약화시키는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검은 것도 열 번, 스무 번 반복해서 희다고 주장하면 결국 사람들은 그것을 희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처럼, 동성애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안토니오 그람시 못지않게 심각한 괴벨스의 선동 전략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좌파 진영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무너뜨리고 네오막시즘적 사회를 이루려고 하였다면, 괴벨스와 같은 선동 전략은 오늘날 슈퍼 바이러스처럼 우리 사회에 파고들며 정치적 권력을 향한 탐욕의 영웅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공장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국민이라면 집단적 상처와 아픔을 겪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달콤하게 유혹하는 손짓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가치보다는 좌우 이념에 지나치게 편승하면서 어떤 사람을 설정해 두고 그것을 자기와 동일시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가치를 품어야지, 왜 우리는 수많은 군중과 광장에 중독이 되려고 한단말입니까?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길 어귀와 광장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광장보다는 광야를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자신도 얼마든지 편파적일 수 있고, 때로는 왜곡된 시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 저도 광장과 아스팔트에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동성애와 이슬람 스쿠크,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막기 위한 공교회적 행보였지요. 저도 연말연시에 건강했더라면 불의를 못 이겨 욱하며 광장으로 다가섰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뒤꿈치 화상을 통해 저를 꽁꽁 묶어 놓으셨습니다. 문득 어지러운 이 시대에 집단적 상처 속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폴 리쾨르가 쓴 ‘해석학의 갈등’이라는 책이 생각이 났습니다. 시대를 푸는 해석의 길은 어떤 시스템 혹은 이념이 아닌 유일한 진리(필자가 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해석)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난감한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지나친 정치적 워딩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어드레싱을 해야죠. 그런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러한 때에 광장보다는 광야를 먼저 선택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성령의 감동이 임할 때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러나 목소리 역시 타락한 정치 혹은 이기적인 목적과 맞물려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자기 우상화와 얽혀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공교회 지도자가 아닌 사교(私敎)의 리더가 될 수 있지요. 역사를 되짚어 보면, 부패한 정치에는 타락한 종교가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되새겨볼 때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2-09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이 발로 다시 뛰게 하소서”
    주님, 참으로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숨이 가쁠 때마다 심장이 수고하고 폐장이 더 강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지만 두 발이 이토록 수고했고, 소중한 줄을 몰랐습니다. 두 발이 있었기에 전국 방방곡곡뿐만 아니라 오대양 육대주를 마음껏 뛰어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짱짱한 두 다리가 있었기에 매 주일이면 강단에 서서 5번, 6번을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부흥회와 각종 집회를 다닐 때에도 원고에 매이지 않고 강단을 뛰면서 뜨거운 사자후를 토해냈습니다. 저는 두 발 가운데도 발뒤꿈치가 이토록 귀한 줄을 몰랐습니다. 이따금씩 발뒤꿈치에 각질 같은 것이 벗겨지면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두꺼운 발뒤꿈치에 저온화상을 입고 저는 그 딱딱한 가죽이 얼마나 예민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것입니다. 이 낙타 무릎 같은 발꿈치 가죽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우리나라가 너무나 좁아서 세계 각지로 집회를 다녔습니다. 이 무감각하고 딱딱한 발뒤꿈치 가죽이 얼마나 제게 소중한가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것입니다. 뒤꿈치 가죽이 있었기에 산행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며 마음껏 걸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떨 때는 산꼭대기까지 다시 내려가기가 싫어 더 걷고 또 걷고 싶을 때도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요 몇 주 걷지 못하는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 시련 속에서 주님께서 주신 발뒤꿈치의 선물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는지요. 저는 재생치료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집사람의 집요하고도 시니컬한 성화에 못 이겨 마침내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전에는 집사람이 원망스럽기도 하였지만, 그것마저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국소마취로 허벅지 살갗을 도려내었을 때 마취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의 고통을 생각해 봤습니다. 봄꽃처럼 예쁘게 피어나고 있는 속살을 강제로 뜯어 피가 나게 하고, 그 쓰린 속살에 허벅지 살을 붙일 때의 쓰림과 아픔이 저로 하여금 저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마취가 풀릴 때 발뒤꿈치와 허벅지의 아픔과 쓰라림은 영혼의 아림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이 작은 화상에도 고통을 느낀다면 암 환자들은 어떻게 투병을 하고 있을까요? 또한 온몸에 악성 종기가 나서 괴로워했던 욥은 어떻게 인내했을까요? 아니, 저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그 고통, 영혼의 아림은 얼마나 크셨을까요? 저는 원하지 않았지만, 당신께서 저로 하여금 로뎀나무 아래 눕게 하셨습니다. 아직은 제 인생에 있어서 겨울 끝자락을 맞을 때는 아니지만 믿음으로는 혹독한 겨울의 시련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황홀한 시련도 다 끝나갑니다. 이제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면, 이식을 한 부위가 잘 생착이 되어 새살이 차오르고 굳은살로 변해간다면 저는 다시 한 번 주님이 주신 힘으로 사명의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숨 쉴 수 없는 고난의 뜨거운 바람 내 영혼을 찢으며 불어올 때 광야에 홀로 남겨진 지독한 외로움 속에 깊은 밤 뜨거운 눈물 흘려도 주님이 주신 사명이라면 가시밭길 맨발로라도 걸어갈 것입니다. 사명이 생명이기에, 사명이 눈물이기에 힘들고 어려워도 사명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사명이 은혜이기에 사명이 축복이기에 외롭고 고독해도 사명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저의 심장과 폐장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모든 체중과 모든 무게를 떠받들고 받쳐줄 수 있는 이 두 다리 그리고 발바닥에 주신 당신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겠습니다. 주님, 저에게 다시 한 번 소생의 은혜를 주시고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저와 같은 화상을 입지 않도록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부족하지만 저의 고난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고난을 대신하게 하시고 성도들이 맞을 환란의 방어막이 되게 하옵소서. 주여 다시 한 번 걷게 하옵소서. 다시 한 번 뛰게 하옵소서. 다시 한 번 달려가게 하옵소서.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2-0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다시 생명나무로 하나 되는 교회
    지난 수요일 저녁에 교구를 담당하시는 김범준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김범준 목사님은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텍사스에 위치한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교에서 성경적 상담 박사과정 코스웍을 마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우리 교회 출신인 박형욱 목사님을 통해서 우리 교회를 잘 알고 또 제가 쓴 ‘생명나무’라는 책을 읽고 정말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위한 생명나무 신학과 성경적 상담 운동"이라는 소논문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생명나무로 하나 되는 교회’라는 설교를 하는데 저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설교는 전교인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도록 주문을 하거나 설명을 한 적도 없는데 본인이 알아서 생명나무 신학과 신앙을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구약학자인 벤게메렌의 글까지 인용하여 설명을 하였습니다. 사실 어떤 분이 제 생명나무에 대한 설교를 듣고 의아한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나중에 벤게메렌의 글과 설명을 듣고 “아, 이렇게 통시적으로 성경을 풀어낼 수 있고 통전적 신학을 세울 수가 있구나”하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벤게메렌이 직접 한국에 와서 생명나무 심포지엄을 할 때 “생명나무: 생명의 충만함에 대한 성경적 접근”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소강석 목사님의 생명나무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과 성도의 교회론적 삶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는 점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생명나무에 대한 그의 연구와 특별히 목회 사역에서의 적용은 우리들에게 좋은 모델이 됩니다. 생명나무 주제에 대한 신본주의적 접근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아주 적절합니다. 소강석 목사님은 우리 앞에 있는 생명과 사망의 길에 대한 선택의 문제에 관해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이 선택의 결단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선택은 우리의 삶,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의 국가의 방향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물론 김범준 목사님이 아주 노련미가 넘치고 성숙함이 배어나는 설교를 한 것은 아닙니다. 좀 앳되고 순수하고 청순하게 설교를 하셨습니다. 제가 설교 후에 언급한 대로 본 바탕이 선하고 품성이 아주 착하신 분처럼 느껴졌습니다. 설교도 그렇게 순수하게 하신 것입니다. 생명나무 신학을 구원사적으로, 기독론적으로 일괄 정리를 하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통하여 생명나무를 통해 서로 감사하며 복음의 사역에 동참하고, 성령 충만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주의 종과 한마음, 한 뜻이 되어야 생명나무로 하나 될 수 있다고 강조를 하였습니다. 제가 정말 은혜 받았습니다. 제가 임직대상자들에게는 무조건 생명나무에 대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게 하려고 합니다. 신정주의 책에 대해서도 읽고 독후감을 내도록 할 작정인데요. 물론 제가 생명나무와 신정주의에 대해서 직강을 할 것입니다. 아무튼 김범준 목사님의 설교는 발꿈치 화상과 싸우고 있는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고무를 시켜 주었습니다. 실은 김 목사님이 베테랑이 아니라 우리 교회 사역을 한 지 한 달밖에 안 됐습니다. 세상말로 초짜 되는 분이 어떻게 꼭 제가 설교하는 것처럼 담임목사의 목회철학을 간파하고 제가 세운 생명나무 신앙과 신학을 통시적이고 통전적으로 정리해서 현장에 맞게 적용을 잘할 수 있나, 설교 들으면서 감탄을 했습니다. 이런 동역자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저와 함께하는 모든 동역자들이 다 하나하나가 귀하고 또 하나님이 보내주신 선물이지만 우리 김범준 목사님의 수요일 저녁설교는 참 빼어나고도 독특한 온리 원의 설교였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1-2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하나님은 왜 멈추게 하시는가?”
    지난 수요일 낮 예배는 우리 교단 전국장로회 임원 신년하례회 예배로 드렸습니다. 당연히 제가 설교를 하기로 하였는데, 갑작스럽게 입원하는 바람에 고영기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중에 저의 공적 사역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셨습니다. 제가 한교총 대표회장과 연합기관 통합위원장을 할 때 했던 사역 얘기를 하신 것이죠. 그분은 제 옆에서 함께 사역을 했기 때문에 저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제가 했던 연합기관 통합 사역이 9부 능선을 넘었다고 하셨습니다. 실제 그랬습니다. 한기총과 한교총이 통합을 하기로 상세 합의서까지 작성했고 사인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다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의 이견으로 인해서 지연이 된 것입니다. 그 지연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내놓고 보니까 이견을 가졌던 분들은 지연작전을 썼던 것입니다. 그분들은 자기 이해와 자기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봐도 그런 이견은 분명히 좁은 안목과 소아적 관점이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오직 공적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교총을 섬기면서 대사회적, 대정부적 성명서를 낼 때도 한기총과 함께 냈습니다. 사실상 정서적 연합, 내면적 연합은 다 이루어졌던 것이죠. 제가 일찍이 공적 사역을 해보니까 한국교회는 원 메시지를 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게 안 되니까 언제부터인가 교계 안에서도 이념적, 정치적 영향력이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념적,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다 보면 한국교회의 위상이나 이미지 제고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전체적 정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작년에도 배후에서 연합기관 통합을 위해 힘써 노력했지만 또 안되었습니다.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돼서 올해는 제가 한기총 회장으로 출마를 해볼까도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유력한 지도자들과 논의를 하였고, 현 한교총 대표회장님과도 상의 된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제가 한기총 대표회장으로 가면 바로 올 봄에 연합기관을 통합하는 걸로 이야기가 됐습니다. 정말 절호의 찬스요, 라스트 찬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새해가 오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발뒤꿈치 화상으로 인하여 연초에 입원을 해야 했고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사실은 지난 12월에 미국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 제안을 받았는데 그 일도 다 포기를 해야 했습니다. 제가 부시 대통령 취임식을 할 때는 취임식뿐만 아니라 만찬과 무도회도 다 참석을 했습니다. 아니 저는 트럼프 대통령 재임 시절에 미국 국가조찬기도회 런천 프레이어에서 스피치를 한 사람입니다. 참 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입원한 상태에서 볼 때 잠정적으로 연합기관 통합은 물 건너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가장 중요한 때 제가 아무런 활동을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위안을 삼으려고 해도 너무나 허전하고 아쉬웠습니다. 여기에는 연합을 반대하는 악한 마귀의 시험도 있었다고 봅니다. 이 대마(大魔)를 잡는 일이 참 힘들다는 생각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더 넓게 볼 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더구나 인간의 때와 하나님의 때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그렇게도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 동안을 넘게 기다리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 나라가 어수선한 때입니다. 이 어수선한 때에 하나님께서 저를 뜻밖의 장소로 옮겨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멈추게 하시는가?”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이 너무나 많이 거침없이 달려오셨으니까 하나님이 강제로 쉼을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정 권사님과 이재훈 목사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만 더 잘 아시고 하나님께서 더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지내놓고 보면 항상 그것이 더 좋고 옳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이죠. 여러분도 이따금씩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쉼표를 찍고 멈추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거기서 조용히 속삭여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왜 저를 멈추게 하십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이런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더 좋은 길로, 더 선한 길로 인도해 주리라.”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1-19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아쉽지만 후회하진 않습니다”
    제가 지난 12월 2일 저녁에 잠을 자다 오른쪽 발뒤꿈치가 전기장판에 저온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날 저는 저온화상인지도 모르고 주일 낮 예배와 5부 예배 성찬식까지 다 인도했습니다. 전기장판에 화상을 입을 줄이야 저도 몰랐고 주변 사람들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화상인 줄 알고 연고를 바르고 항생제와 소염제를 먹었습니다. 약간의 차도가 있는 듯했지만, 저는 계속해서 박순애 전도사님 초청 집회 시간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이후로 교역자 연말정책수련회와 루체비스타 성탄절 행사를 준비하고 이끌어야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CBS 설립 70주년 및 여러 교계 행사 모임에도 다 참석을 했습니다. 집사람은 빨리 화상 전문병원으로 가보라고 했지만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아서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만약 화상 전문병원에서 입원을 하라고 했더라면 교역자수련회나 루체비스타 성탄절을 이끌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성탄절예배와 송구영신예배도 이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신년축복성회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중간중간 그 사이에도 나름 드레싱을 하고 연고를 바르고 약도 처방하여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집회가 끝난 후 1월 5일, 첫 주일저녁예배를 마치고 이재훈 목사님을 오시게 해서 화상을 입은 뒤꿈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께서 화상 전문시스템을 잘 갖춘 대학병원에 연락을 했고, 저는 다음 날 오전 11시 응급 처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강제 입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화상 전문 성형외과 선생님은 저한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환자분님, 큰 교회를 섬기고 목회하는 분으로 들었습니다. 이 발뒤꿈치를 앞으로도 10년 아니 20년 이상을 써야 할 텐데 왜 이렇게 방치하셨습니까?” 저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죠. “교수님, 나름 드레싱을 하고 연고도 바르고 약도 먹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다시 말씀하시는 거예요. “왜 이렇게 병을 키워 갖고 오셨어요? 처음에 바로 왔으면 간단하게 처치할 수 있는 것을 왜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왔습니까?” 그러자 또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죠. “어느 교회든지 연말연시는 다 바쁩니다. 특별히 저는 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화를 내시면서 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해만 목회를 하시려고 하십니까? 앞으로 10년, 20년 일을 해야 하는데요? 조금만 늦게 왔으면 뒤꿈치를 절단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시급함을 모른단 말입니까?” 병실에 누워 있자 얼마나 답답하고 하루가 긴지요. 아무리 기도를 하고 성경을 봐도 하루하루가 길게 느껴졌습니다.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염증 부분을 잘라내는 아픔, 억지로 피를 나오게 해서 생살이 돋아나게 하는 처치의 시간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가슴 저리기까지 하였습니다. 3일째가 되자 그토록 엄격하고 원칙적인 주치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피부 이식 수술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잘 치료하면 빨리 새살이 돋아날 것 같습니다.” 금요일 오후에는 국소 마취를 하여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염증을 제거하였습니다. 제가 휠체어를 타고 가서 설교를 하면 안 되냐고 했더니 그분은 “절대로 안 됩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번 주를 잘 참아내면 다시 후회 없이 발바닥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만류를 하였습니다. 병실에 앉아서 생각해 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다른 일정을 다 취소하고 일찍 화상병원에 올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 당시로서 저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병실에서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성도 여러분을 생각하며 인생의 새롭고도 또 다른 페이지를 써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년집회가 끝나면 쉬고 치료를 받으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더 엄격하게 강제적으로 치료를 받게 하시네요. 성도 여러분에게 심려를 끼쳐서 죄송하고 제가 더 새롭고 신선한 얼굴로 뵙겠습니다.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1-1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너무나 숙연했던 송구영신”
    저는 지난 주일 저녁예배부터 금요일 저녁까지 5일 동안 신년축복성회를 인도했습니다. 이 성회는 35년이 넘도록 이어온 집회입니다. 그런데 저는 주일날 제주항공의 참사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한숨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왜 우리나라에 이런 참사가 일어나는 건가...” 순간 비행기를 조종하는 우리 교회 집사님과 전철과 고속철을 운행하는 성도들이 떠올랐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무안으로 직접 내려가서 조문을 하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발뒤꿈치에 저온화상을 입어 장거리를 오가는 것은 정말 무리가 될 것 같았습니다. 대신 저는 용인시청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 가서 조문을 하고 왔습니다. 누구에게 뭐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어 이런 글을 남기고 왔습니다. "참척스런 슬픔에 잠겨 애도를 표하며 기도합니다“ 문득 한강 작가의 말처럼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는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이 땅의 살아있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구하고 이어가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 집회 때마다 박수를 치거나 기쁨으로의 찬양을 금지하도록 했습니다. 새해 0시가 되면 당연히 기립해서 박수도 치고 환호성을 지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찬양대가 찬양을 한 다음에도 박수를 치지 않고 모든 집회 전에 애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집회 중에 찬양을 부를 때도 손뼉을 치지 않고 주로 회개와 사모함, 헌신의 찬양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제가 송구영신예배를 두 번을 인도했습니다. 하루 저녁에 설교만 총 4회를 한 거죠. 저는 그때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애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기쁨으로 가슴이 벅찰 뿐만 아니라 목이 터질 정도로 환호성을 내질렀을 때 조용하고 숙연하게 새해를 맞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집합적 인격체(corporate personality) 신앙이 있습니다. 집합적 인격체 신앙이란 한 인격 안에 여러 세대가 함께 하나가 되거나 혹은 한 역사 안에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백성이 시공간을 초월해 함께 하나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널 때 이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다 죽었지만 집합적 인격체 안에서 함께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넌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미 모세 이후 수백 년 후에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도 집합적 인격체 안에서 함께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넌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신학에 와서는 '아담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사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공동체 신앙,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연합의 정신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저는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번 참사에 대해 당연히 애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예배를 안 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한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으로 기도회를 하였습니다. 설교를 하는 제 자신도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시간마다 가슴이 쪼이고 심장에 압박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목사이기 전에, 또한 그리스도인이기 전에, 대한민국 국민 이어서였을까요? 저희의 기도가 부족하고 너무나 방심했던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다시는 우리나라에 이런 사고가 없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거의 모든 집회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 전철과 고속철, 또 자동차를 운전하는 분들을 위해서도 새삼스럽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니 가슴 벅차야 할 송구영신 예배와 신년축복성회가 숙연할 수밖에요. 그렇지만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 생명을 이어가고 사명을 이어가야 할 사람들에게 축복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애도하는 마음과 더불어 축복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부디 역사와 주권과 생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와 민족에 안전하고도 평안한 복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1-05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환대가 인저리 타임(injury time)을 오게 한다”
    김난도 교수가 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있지 않습니까? 그 책에 보면 인생 시간 계산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24시간 아닙니까? 그런데 하루를 분으로 하면 1440분, 한국인 평균 수명을 80세로 본다면 1년이 18분으로 계산이 됩니다. 즉 내 나이에 18을 곱하고 대략 60으로 나누어 보면 하루 중 내가 몇 시쯤에 있는지가 짐작이 되지요. 제가 계산해 보니까 0살은 0시, 10살은 새벽 3시, 20살은 오전 6시, 30살은 9시, 40살은 12시입니다. 50살은 15시, 60살은 저녁 8시이지요. 70살은 21시, 80살은 24시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생을 80으로 볼 때, 평균적 기준을 말합니다. 모두가 그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축구 경기를 보면 인저리 타임이 있지 않습니까? 경기 도중 부상 선수 발생으로 인한 시간 손실을 만회하는 추가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래도 승부가 안 나면 연장전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시간이 인저리 타임, 연장전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환대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인생 후반전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고 인저리 타임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브라함은 100세에 인생 후반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을 낳은 후에 나이를 잊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마침내 이룬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인생의 전반전을 자기중심으로 살았다면 인생 후반전에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사명을 붙들고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삭을 낳고도 75세 이상을 더 살았거든요.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런 축복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을 잘 환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세 나그네를 마주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환대하며 물로 발을 씻기고 떡을 가져다주고 송아지 요리를 하여 극진하게 대접합니다.(창18:1-8)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들이었습니다. 그가 내년 이맘때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합니다.(창18:10)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창18:18) 저는 저온화상으로 아직도 상처의 아픔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저는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과 하나님만이 주시는 인저리 타임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미 준비한 설교 원고이지만 또 다듬고 보완하며 보충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정말 하나님을 환대하고 성도들을 환대하는 마음으로 설교준비를 하면, 반드시 저에게 인저리 타임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35년이 넘도록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단 한 번도 다른 누군가를 강사로 모신 적이 없습니다.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 그리고 장년여름수련회는 오로지 저만 강사로 서 왔습니다. 언제까지 제가 이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올해도 변함없이 말씀을 준비하고 강사로 서려고 합니다. 비록 그때까지 발이 완치될지, 상처가 덜 아물지는 몰라도 저는 끝까지 강사로 나설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상처로 소모한 시간을 만회하는 인저리 타임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2025년 한 해에 인저리 타임뿐만 아니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환대하는 새해에 인저리 타임뿐만 아니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더해 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확고한 신앙과 신념이 있기 때문에 신년축복성회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를 통해 새해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온 생애에 인저리 타임과 플러스알파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12-29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루체비스타, 그 밤이여”
    올해는 성탄절을 좀 뜻깊게 맞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1월 초부터 교회 주변 가로수에 성탄 트리를 장식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용인시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일이고 또 전기사고 등 안전상의 이유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죽전 중앙공원에서 루체비스타 성탄 행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헌혈을 하여 헌혈증을 모아 한국소아암재단에 기부하고, 취약계층을 위한 사랑의 쌀 나눔을 비롯하여 소방공무원, 경찰공무원을 위한 성탄 선물도 전달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영호 집사님을 비롯한 우리 성도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별히 헌혈을 하신 성도들과 지역주민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저는 행사를 하는 동안 너무 음악 소리가 크고 음향 소리가 커서 혹시 민원이 제기되지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앉아계신 이상일 용인특례시장님이 “목사님, 저기 좀 보세요”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보니까 많은 아파트 주민들이 베란다에서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정말 희한하고 놀라웠습니다. 사실 제가 담임목사의 직권으로 혹시라도 주민들이 불편해할까 봐 브라스밴드 연주를 생략하라고 했거든요. 그런데도 희한하게 아파트 주민들이 다 내다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행사가 끝난 이후에 물어봤습니다. “혹시라도 민원이 제기되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한 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냥 브라스밴드 공연을 하도록 놔둘 걸 하고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성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거리를 지나가는 분들도 다들 보고 가셨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루체비스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왜 이런 어려운 언어를 썼냐”고 묻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설명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루체비스타는 ‘빛의 풍경’이란 말입니다. 저는 언어에 있어서 선점을 하고 좀 앞선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거든요. 지금 생각해 봐도 그 밤의 긴장과 설렘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 거룩한 잔상이 제 심장에 전류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루체비스타 행사가 끝나고 줄을 서서 교회로 오시는 성도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고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한강 작가의 표현대로 사람과 사람, 또 사랑과 사랑 사이에 연결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금실이라는 것입니다. 루체비스타 행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의 가슴 가슴에 금실로 연결되는 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거룩한 금실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교회 주차장으로 오는 모습이 금실에 이어진 행렬처럼 느껴졌습니다. 진짜 욕심 같아서는 그 행사를 한 번 더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 평생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그날 밤, 유달리 별이 반짝이었던 것처럼 지난주 저녁에 우리는 가슴에 별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별들이 금실로 연결되는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헌혈을 비롯하여 헌신해 주신 성도들에게 감사합니다. 또한 그날 현장에 함께 하신 성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올해는 크리스마스 전야제 행사는 없지만, 성탄감사축하예배 때 다 오셔서 다시 한번 아기 예수가 주신 별의 선물을 받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 별빛을 기대합니다. “루체비스타, 그 밤이여. 우리 가슴에 빛나게 될 아기 예수의 별빛이여.”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12-2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루체비스타여, 더 낮은 곳으로”
    지난 12월 11일 오후에 저는 국회에 가서 ‘2024 성탄절 축하 및 송년 감사예배’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또 국회의사당 분수대 앞에서 있었던 성탄 트리 점등식에서 성탄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 예배를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습니다. “과연, 이 예배가 드려질지, 이런 시끄러운 정치 상황에서 여야 크리스천 국회의원들이 어찌 하나 되어 예배를 드리고 성탄 점등식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저조차도 우려하는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한 주 전에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날짜를 좀 미루자고 하는 제안도 들어왔습니다. 저 역시 그러자고 할 수밖에 없었죠. 그렇지만 크리스천 국회의원들끼리 모여서 성탄예배를 드려야 되고 성탄 트리 점등식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더 컸습니다. 또 하나 소식이 들려온 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강석 목사가 온다면 여야 그리스도인들끼리 함께 손을 잡고 성탄 예배와 점등식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배 전날까지도 제 마음속으로는 좀 조마조마 했습니다. 마침내 당일에 저는 국회에 갔고 많은 여야 크리스천 의원들께서 하나 되어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윤상현 의원님이 큰 결단을 해주셨고 송기헌 의원님이 강력하게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자리가 정말 불편하였고 초조와 긴장을 하였습니다. 저도 연약한 사람인지라 한마디라도 실언(失言)을 하면 파장이 심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정말 조심하면서 한마디, 한마디 설교를 이어갔습니다. 설교 도중에 제가 작사한 성탄절 칸타타 ‘카르네우스’의 첫 곡을 시연한 것은 정말 백미 중에 백미였습니다. 모두가 감동하여 박수를 쳤습니다. 특별히 순서를 맡은 의원들께서 카르네우스의 시연에 감동을 받았다며 박수갈채를 보내 주었습니다. 이어 국회 분수대 앞에서 성탄 트리 점등식을 하였습니다. 거기서도 저는 아주 짧지만 강렬한 카르네우스의 신비와 루체비스타의 의미와 가치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회와 우리나라에 아기 예수의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축복했습니다. 물론 그곳에 우원식 국회의장님이 직접 오셔서 축사도 해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와 국회의장님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명의 국회의원들과 점등식 버튼을 누를 때 루체비스타가 마치 아기 예수의 맨살의 향기처럼 비춰졌습니다. 제가 국회에 가서 점등식을 여러 번 했지만, 이번처럼 성탄의 루체비스타가 가슴이 저리도록 느껴졌던 적은 없습니다. 그 가슴 저린 심정으로 루체비스타가 대한민국 국회와 우리 국민들의 마음속에까지 환하게 비춰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사실 저는 국회 트리 점등식도 하였지만 청계천 광장에서 김삼환 목사님과 함께 성탄절 점등식을 몇 번 주관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작 우리 지역에서는 단 한 번도 성탄 축하 루체비스타 점등식을 해보지 않은 것입니다. 고작 우리 교회 앞에 작은 나무들에만 성탄 트리를 했을 뿐입니다. 물론 성탄을 맞아 이영호 집사님과 함께 사랑의 쌀 나누기 행사를 했지만요.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 교회와 가까운 죽전중앙공원에서 루체비스타 점등식 행사를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약 40여 분 동안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며 점등식을 하고 헌혈과 사랑의 쌀 나누기를 비롯하여 희망과 사랑, 나눔 운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도 성탄절 이브날 밤이 아니라 좀 미리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5일 오후 5시 반에 죽전중앙공원에서 루체비스타 성탄 공연과 나눔 축제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루체비스타는 연말 아니 연초까지 빛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행사에 많은 분들이 초청되기를 바라며 구경 나오신 분들도 함께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 축제가 끝난 후에도 많은 분들이 이 빛의 풍경을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가족, 친구, 연인끼리 중앙공원으로 나와서 사진도 찍고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만들어 가시기를 기대합니다. 아니, 그 빛을 보고 아기 예수의 사랑과 희망, 나눔의 마음을 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지역 주민들과 죽전로를 지나가는 많은 분들에게 이 루체비스타가 사랑과 희망, 나눔의 빛으로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전달하는 사랑의 쌀, 그리고 헌혈, 공연 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더 낮은 곳으로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깊이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12-1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