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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험한 세상 사잇꾼 되어”
    이어령 선생님은 생전에 '사잇꾼'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느 조직이든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좋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조직은 망하지 않아. 개발부와 영업부, 두 부서를 오가며 서로의 요구와 불만을 살살 풀어주며 다리 놓는 사람, 그 사람이 인재고 리더야. 리더라면 그런 '사잇꾼'이 되어야 하네. 큰소리치고 이간질하는 '사기꾼'이 아니라 여기저기 오가며 함께 뛰는 '사잇꾼'이 돼야 해.”(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역시 언어의 연금술사요 천재적 통찰력이 빛나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시대를 보면 사잇꾼은 보이지 않고 사기꾼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정치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고 행복하게 하는 본령을 벗어나서 자기 진영과 정파의 이익만을 위해 온갖 협작과 비난을 앞세워 공격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사회는 이념, 계층, 지역 갈등을 일으키며 분열하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종교마저도 어느 한쪽에 서서 진영과 정파에 치우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종교는 어느 한쪽으로 서는 게 아닙니다. 특별히 종교 지도자는 여기도 품고 저기도 품는 사잇꾼이 돼야 합니다. 코로나 때 저는 이미 정부에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교단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을 하면서 어떻게든지 현장 예배를 지키면서도 국민 보건을 도모하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어떻게든지 션샤인 처치가 되고 허들링 처치가 되도록 나날이 애를 태우며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특별히 초갈등 사회를 맞이하여 진보와 보수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어서 특별한 상황이지만, 그렇지 않은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진보와 보수, 좌우가 서로 잘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을 봅니다. 저도 지금까지 사잇꾼의 지도력을 발휘해 왔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저의 스탠스를 지지해주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극단적 진영에서는 저를 얼마나 공격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특별히 코로나 시기에 만약 제가 어느 한쪽 말만 듣고 잘못된 판단을 하였다면, 한국교회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데드크로스의 깊은 수렁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션사인 처치가 되어 사회적 순기능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에 초갈등을 유발하고 심화시키는 우를 범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코로나 시기에 예배 회복을 위하여 정부와 맞서서 싸울 때는 싸우면서도 동시에 사회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교회의 역할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코로나로 인하여 상처를 입은 한국교회의 사회적 이미지도 점점 회복할 수 있었고, 분열과 갈등이 아닌 협력과 상생의 길을 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저는 여전히 이런 사잇꾼의 리더십을 발휘하려고 했습니다. 분열된 교계 연합기관을 하나로 묶으려고 엄청 노력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여(與)도 아니고, 야(野)도 아닌 중도적 균형을 지켰습니다. 성경적 본질과 가치를 지키는 데는 철저하게 보수적이지만 사회적 약자와 동서 화합, 남북 화해에 있어서는 진보적인 가치도 추구했습니다. 물론 자신의 태도를 극명하게 표현하는 게 가장 쉬운 일이죠. 누구를 비판하든지, 누구 한 사람을 치켜세우든지 이런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양쪽을 다 품고 양쪽과 함께 같이 가는 사잇꾼의 역할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종교가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과 함께 사회에서는 순기능이 되고 선순환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오히려 종교가 사회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종교는 영생의 길을 안내하면서도 갈등하고 충돌하는 사회로 하여금 숨통을 트이게 해줘야 합니다. 종교 지도자가 사기꾼이 되면 사이비가 되고 이단이 되어 자기 욕망과 욕구만 채우게 되죠. 그런 사이비나 이단은 사회에 더 큰 해악을 가져다주고 악순환을 일으키며 인간의 삶을 오염시키고 파멸의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애당초 종교를 잘못 만났으면 잘못된 종교 지도자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소속 목사이고, 그 교단의 총회장과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한교총 대표회장으로 섬기게 된 것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양극단에 서서 대척점을 두는 행동을 하지 않고 저만의 정체성 위에서 화합꾼과 사잇꾼이 되어왔던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저의 욕망보다는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살아온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저는 험한 세상의 사잇꾼 되어 하나님과 성도들, 그리고 우리 교계와 사회에 사랑과 용서, 화해와 연합의 다리를 놓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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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3-17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그대, 웃으라고 꽃피지요”
    언제부터인가 저희가 지하철역과 분당선 전철, 교회 외벽에 교회 이미지 광고를 했습니다. 아름다운 문구를 새겨서 제 사진도 넣고 예배 시간도 안내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대형교회가 자꾸 개교회주의적 홍보에 너무 치우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공익적 홍보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 사진도 빼고, 예배 시간도 뺐습니다. 다만 어떤 이단이나 사이비 단체의 홍보가 아니라는 의미로 작게나마 새에덴교회 이름은 넣어놨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 많은 상처를 받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상처는 그 사람을 절망의 바닥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이 작은 한 문구를 통해서 정서적, 사회적 위무를 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헤밍웨이는 그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현대인에게 질문을 하나 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죄가 어떤 죄인가? 그것은 희망을 잃는 죄”라고 했습니다. 다른 죄는 다 용서받아도 희망을 잃은 죄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쓴 ‘꽃으로 만나 갈대로 헤어지다’라는 시집에 수록된 ‘꽃과 예수’라는 시가 있습니다. “너의 상처를 내게로 가져오면 꽃이 되고 / 너의 눈물을 내게로 가져오면 진주가 되고 / 너의 한숨을 내게로 가져오면 노래가 되리니 / 아무리 힘들어도 너를 버리지 마라 / 피투성이가 되었더라도 / 너를 끌어안고 내게로 오라 / 세상이 너를 버렸을지라도 / 나는 너를 꽃처럼 껴안고 / 이 추운 밤을 지나 / 봄날의 아침을 맞으리니.” 시적화자가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도 꽃이 되게 하고 우리 눈물을 진주가 되게 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한숨을 가져와도 노래가 되게 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어 피투성이가 되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가 되더라도 희망만큼은 버리지 말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꽃이 되게 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꽃처럼 다가오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한 밑바닥에 있어도 그 밑바닥에서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게 하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바닥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인생 밑바닥에서 절망과 탄식을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밑바닥에서 꽃이 피어나게 하는 분이십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 희망을 갖다 주기 위해서죠.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웃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봄이 왔으니 곧 꽃이 피게 될 겁니다. 매화와 목련, 진달래, 개나리 순으로 꽃이 피겠지요. 그런데 그 꽃은 언덕 위에서만 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밑바닥에서도 피어납니다. 아니, 바위틈 밑바닥에서도 피어납니다. 꽃 피는 모습을 보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암절벽 위에서나 언덕 아래 밑바닥에 피어 있는 꽃은 더 아름답고 귀하게 보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항상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꽃 한 송이로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그 꽃송이 하나로 봄이 오도록 하기 위해서이지요. ‘꽃과 예수’라는 시에서 “너를 꽃처럼 껴안고 이 추운 밤을 지나 봄날의 아침을 맞겠다”고 한 것처럼 저 역시 인생의 맨 밑바닥에서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한 송이 꽃으로 다가가고 싶습니다. 실제로 저는 그렇게 웃으며 살죠. 제가 진지한 설교를 하거나 사색에 잠길 때를 빼놓고는 항상 웃는 얼굴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웃으며 악수를 하고 반갑게 맞습니다. 그때 제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 있죠. 희망의 꽃이 화사하게 피어납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주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대, 한 번 더 웃어보라고요. 밑바닥에서도 다시 한번 희망을 가져보라고요. 눈 한번 돌려보세요. 온 세상이 다 꽃피는 봄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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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3-1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저녁형 인간이 아침을 깨우다”
    저는 원래 저녁형 인간으로 태어난 것 같습니다. 어린시절 시험공부를 해도 주로 날을 새기도 했고 낮에 잠을 잤습니다. 낮에 공부를 하는 것보다 밤을 새워 저녁에 공부하면 서너 배 이상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광주신학교를 다니며 백암교회를 개척할 때도 깊은 저녁에 공부를 했습니다. 오후에 학교를 마치고 오면, 부지런히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며 전도를 하고 깊은 밤이 돼서야 레포트를 작성하고 공부했습니다. 깊은 밤에 공부를 하면 그렇게 머리에 쏙쏙 잘 들어오는지 모릅니다. 저녁에는 그렇게 온몸에 활기가 넘치고 총명스러운데 새벽이 되면 맥을 못 추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새벽기도를 인도해야 하잖아요. 어떨 때는 저를 깨우는 정 권사님께 “왜 나를 깨우냐고, 권사님이 새벽기도 좀 인도하시면 안되냐”고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정 권사님이 천막교회당으로 가 버리세요. 그러자 또 교인들이 와서 깨우는 것입니다. “전도사님, 어서 일어나씨오. 새벽기도 설교해 주셔야지요.” 그럴 때 저도 모르게 짜증을 내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짜증을 받아주신 교인들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단 한 번도 새벽기도를 빠져본 적이 없습니다. 한동안 새벽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책들이 많이 나왔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책을 읽고 “나는 왜 이러지? 새벽형 인간이 성공을 한다는데 나는 왜 저녁형인가?”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저뿐만 아니라 정말 저녁형 인간이 많이 있더라구요. 저녁을 아주 유용하게 쓰고 효과적으로 쓰는 사람을 봤습니다. 저녁이 되면 가슴에 별이 들어오고 달이 들어와서 시를 쓰는 사람도 있고, 작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저녁에는 은하수의 별들이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 밤을 새워 소설을 쓰게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저녁형 인간도 성공한다’라는 책을 써 보고 싶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저녁에 일을 하고 낮잠을 잡니다. 그러나 저처럼 저녁에 독서를 하고 새벽에 일어나려면 얼마나 몸이 무겁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구미동 목회시절까지는 모든 새벽기도를 직접 다 인도했습니다. 한얼산기도원에 가서 새벽 4시까지 철야기도회를 인도하고, 우리 교회에 와서 또 5시 새벽 기도를 인도한 적도 많았습니다. 목포에서 집회를 마치고 야간열차를 타고 와서 또 새벽기도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또 옛날에는 부흥회를 가도 저녁집회, 새벽집회, 낮집회를 다 인도했습니다. 젊을 때는 그걸 다 감당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왜 그렇게 새벽이 힘든지요. 그래서 저는 새벽집회 대신 밤 특별집회를 인도하게 됐습니다. 밤 특별집회를 인도하면 저는 펄펄 납니다. 그러니까 특별새벽기도 대신 밤 작정 기도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학기를 맞아 자녀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해서 특새를 하게 된 것입니다. 자녀들이 주로 저녁 시간에는 학원을 가니까요. 진짜 저는 잠과의 전쟁, 새벽과의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평소에 늦게 자던 사람이 일찍 잔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늦게 자는데도 기본이 3시에 깨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2시에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합니다. 그때 만약에 누워서 자버리면 더 몸이 무거울 것이기에 책상에 있거나 또 복도를 걸어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맑은 정신으로 새벽기도를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한 다윗의 고백이 더 다가옵니다.(시108:2) 이러기를 반복하면 몸이 축나겠죠.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던 다윗도 70세에 죽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그래도 이번 한 주간은 야행성이고, 저녁형인 제가 새벽을 깨우고 새벽을 울리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새벽에 일어나 교회에 오니 얼마나 눈가에 잠이 오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설교를 워낙 쉽게 하고 짧게 하니까 제 눈에 조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아이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은 저녁형 인간이 새벽을 비추고, 깨우고, 울리는 역설적 주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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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3-0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순수하면서도 광활하렵니다.”
    작년 연말쯤이었던가요? 유럽 코스테 측으로부터 강사 요청 공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송원석 비서목사를 통해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멀리 비행기를 타고 다녀오는 것도 부담스럽고, 젊은이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도 역시 어색함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몇 주가 흘렀는데 갑자기 코스테 대표이신 한은선 목사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목소리라도 들어보려고 안부 전화를 드렸죠.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강사 결정이 다 되었습니까? 지금이라도 간다면 제가 설 자리가 비어 있습니까?” 그랬더니, “아이고, 소 목사님이 오신다고 말하면 얼마든지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듣고 갑자기 제 안에서 멋진 오해 혹은 거룩한 착각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몇 년 동안 쉬다가 작년부터 코스테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내가 한번 가봐? 젊은 유학생들에게 말씀을 전하면 얼마나 소통이 되고 내 가슴속의 정열이 얼마나 전달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며칠 후 송원석 목사님을 통해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대신 저는 밤 집회 한 번 하고 낮 특강 목회자 세미나를 하는 대신에,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낮 특강은 홍윤기 목사님이 맡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코스테 본부에서는 얼마든지 좋다고 해서 홍윤기 목사님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갔습니다. 제가 바쁜 중에도 말씀을 많이 준비해 가지고 갔습니다. 준비한 말씀을 잘 전달하게 된다면, 저나 유학생들에게 인생의 플롯 트위스트(plot twist,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간에 리부트(reboot)가 터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저도 오랜만에 가는 집회이기 때문에 제 사역의 신세계를 이루고 원정 V로그(Vlog)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시간의 제약이 있었습니다. 저 다음에 또 한 분의 스피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최 측에서는 저에게 미안했는지 10분 이상 더 하셔도 된다고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아마 제가 늦게 간다고 해서 그렇게 스케줄이 짜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쩔 수 없이 준비해 간 말씀을 축약해서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젊은 유학생들과 소통을 나눌 수 있어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첫날 저녁, 제가 집회의 포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제 안에 있는 젊음의 야성과 열정이 그들에게 순수하면서도 고스란하게 전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너무 피곤해서 집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나왔지만, 제 메시지를 듣고 오래까지 남아 기도하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튿날 저는 목회자 세미나를 통해 아무래도 닫혀 있을 수 있는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현대 목회 트렌드와 미래의 흐름을 이야기하며 그럴수록 생명을 붙잡고 가치를 붙잡고 무너져 가는 교회를 세워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회가 되는 대로 다른 분들의 메시지도 들었습니다. 역시 후배 목사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메시지는 대부분 단순하고 순수한 면이 많았습니다. 그 단순함과 순수함이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시키는 것도 보았습니다. 물론 순수하다 보면 앳되게 보이는 면이 있기도 했습니다. 순수함과 함께 폭이 넓고 지경이 광활한 면도 있어야겠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제가 생각한 대로 좀 연륜이 많은 목사님들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역시 앳된 면은 보이지 않고 나름 노련하고 지경이 넓고 깊은 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목요일 오전에는 홍윤기 목사님이 유학생들에게 특강을 하였는데, 아주 젊고 단순함을 유지하면서도 폭이 넓고 지경이 광활한 면이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제가 첫 안타를 쳤다면, 홍 목사님은 홈런을 친거죠. 저는 이번 코스테 집회를 통해서 “내가 더 젊어져야 되겠구나. 더 순수한 메시지를 전해야 하겠구나”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장엄하고 폭이 넓고 더 지경이 광활한 설교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젊고도 웅장하며 순수하고 단순하면서도 지경이 넓고 광활한 설교 말입니다. 아쉬움도 있었지만, 수년 동안 가지 못했던 코스테 집회에 오랜만에 가서 젊은이들과 소통하며 그들에게 강렬한 도전을 주었던 것도 나름 의미가 있었고, 후배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고 또 선배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다시 한번 다짐을 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더 순수하면서 깊이 있고 폭이 크며 광활하고 웅장한 설교를 하겠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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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2-25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살아 있기에 글을 쓴다”
    확실히 요즘은 옛날 총회장 시절보다는 달리 조금 덜 바쁩니다.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으로 섬길 때는 분초를 쪼개가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마음은 바쁩니다. 마음이 바쁘다 보니까 때로는 불안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존재적 불안은 아니고 뭔가를 준비하지 못하고 미리 할 것을 해놓지 않았을 때 불안한 마음이 찾아옵니다. 예를 들어 설교 준비가 안 되었다든지 강의안이나 칼럼 등 써야 할 글을 미리 쓰지 않으면 심리적 불안이 오게 되는 거죠. 요즘 돌이켜 보니 시를 많이 못 쓴 것 같았습니다. 물론 ‘문학나무’에 성경인물 시를 계속 쓰고 있습니다마는. 이번 주 같은 경우는 시를 많이 못 쓴 것에 대한 불안감이나 압박감 같은 것이 들어 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시는 고독해서 쓰기 시작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고독해서 시를 쓰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본인이 살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 뿐만 아니라 일반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심해서 쓰다가 보니까 나중에는 살기 위해서 글을 쓰고 그 시와 글이 자신을 이끌어가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시를 안 쓰고 문인이 글을 안 쓰며 가수가 노래를 안하고 목회자가 설교를 안 하면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처럼 글을 쓸 때 자기 인식을 하게 되고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글과 삶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면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자신의 존재가 어떠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죽은 자는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불안을 느끼는 것 자체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죽어 있으면 이런 불안도 느끼지 못합니다. 이 불안이 끊임없이 창의적 세계로 가게하고 또 끊임없이 생명의 글을 쓰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글 쓰는 사람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글을 살고 있는 사람이 글이 안 써지면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해지겠습니까? 저는 전업 시인이 아니기에 시를 써도 되고 안 써도 됩니다. 이번 주는 시는 그만두더라도 목양 칼럼(아포리즘)이 잘 떠오르지가 않았습니다. 물론 먼저 칼럼을 써 놓았습니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아들과 ‘건국전쟁’에 대해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는 글을 썼는데, 아들에게 보여 주었더니 좀 어색한 것 같다고 해서 다른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다시 새로운 글을 쓰려고 하니까 깊은 사유(思惟)를 해야 했습니다. 문득 저는 글과 시, 시와 생명, 그리고 삶과 시간을 연결하는 이야기를 구상해 보았습니다. 분명히 저는 시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시를 써도 되고 안 써도 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까 반드시 시를 써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시가 아니라도 반드시 글을 써야 하지요. 설교문이 됐건 칼럼이 됐건 기고가 되었건 글을 써야 합니다. 제가 글을 쓸 때 창의적인 존재가 됩니다. 창의가 없는 한 저는 죽은 존재와 다름없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글을 써야 합니다. 아니 글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글이 어느 때부터 인가는 저를 창의적인 세계로 인도하고 창의적인 공간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사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한도 내에서 제한적으로 사는 게 육신의 삶입니다. 물론 우리는 부활을 하고 예수 믿는 자는 영원히 천국에 거하지만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글을 써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글과 함께 사는 사람이고 글을 사는 사람이고 글의 인생이 되고 글의 생명이 됩니다. 살아있으나 사유하지 못하고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살기 위해서 오늘도 글을 쓰고 시를 씁니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목양 칼럼을 쓰게 되고 새로운 시를 써야겠다는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써야 할 글이 많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서 적어도 제 키만큼의 책은 써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은 턱없이 모자란 것 같습니다. 물론 출판되지 않는 글 분량이야 제 키보다 훨씬 많지만요. 하여간 저는 앞으로도 창의적인 글을 쓰고 끊임없이 시를 쓸 것입니다. 살아 있는 한 생명의 글을 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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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2-1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성도와 목사는 품격을 지켜야”
    지난 월요일 낮에는 이슬비가 내리더니 저녁에는 갑작스럽게 눈바람이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눈이 오면 무조건 산행을 하는 습관이 있거든요. 산에 가니까 역시 길에는 쌓이지 않았던 눈이 고스란히 하얗게 쌓여 있었습니다. 벤치에도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는데, 앉아 보고 싶었지만 눈이 쌓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앉지를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습니다. 교회 뒷산만 잠시 갈까 싶었는데 너무 아쉬워서 죽현산까지 올라갔습니다. 죽현산에 올라가니까 눈이 더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나무들마다 하얀 눈꽃을 피운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것 역시 하나님의 솜씨요 걸작품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떤 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요즘 목사님 설교가 굉장히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기사를 많이 썼더라구요. 목사님 설교를 기자들까지 많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인문신답시리즈’를 주제로 ‘전도서 강해’를 하면서 해당 구절을 그대로 설명하고 우리의 현실과 삶에 적용했을 뿐입니다. 저는 먼저 누구든지 사람이 살면서 잘못했을 때는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지혜자라고 하였습니다.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손함이 큰 허물을 용서받게 하느니라”(전10:4) 또한 주권자의 허물은 백성에게 재난을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재난을 보았노니 곧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허물이라”(전10:5) 그리고 연이어서 또 함정을 파는 자는 자기가 빠지게 되고 담을 허는 자는 뱀에 물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면서 절대로 남을 넘어뜨리기 위해 함정을 파거나 덫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전10:8) 그러므로 지혜자는 언제나 사람을 살리고 덕을 세우며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 대목으로 통화녹음을 하여 오용하거나 몰카 촬영을 하여 유튜브에 올리는 것은 성도들이나 목사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항상 조심하며 덕을 세우고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엡4:29) 당연히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파장이 클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어느 기자는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건 목사님의 잘못이 아니죠. 목사님은 분명히 설교를 잘 하신 것입니다. 목사님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겠죠. 우회적으로 시그널을 준 것이지만 어쩌면 목사님의 지혜는 대단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인 정치평론가 최진 박사도 동일한 견해를 전해 주셨습니다. “목사님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그만큼 목사님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셈이죠. 사실은 자연스럽게 터치하고 적용한 설교였는데요. 하지만 영향력이 커진만큼 더 성경적 가치와 복음의 진리를 잘 전해야 하겠습니다.” 어쨌든 기자들은 대단합니다. 자연스러운 이야기도 빅 이슈화를 시키니까요. 물론 기사가 부정적으로 실린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저의 설교를 시청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흐트러지지 않고 중심을 잡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때로는 제사장적 위로의 설교도 해야 되지만 때로는 선지자적 견책의 설교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저는 절대로 이념에 치우치거나 어떤 편파적 성향을 가지고 설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언제나 성경적 가치와 진리를 전하는 설교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 본문으로 다시 설교를 한다 하더라도 지난번과 같은 현실적 삶의 적용을 피해 가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는 성도답게 살고 목회자 역시 품격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 모두 성경적 가치와 진리를 지키며 품격 있는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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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2-1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역사의 거울 앞에서 외친 유레카!
    제가 총회장 시절에 저의 행보를 은근히 비판하던 기자가 있었습니다. 저와의 관계를 봐서라도 얼마든지 칭찬 기사를 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칭찬에 아주 인색하였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그 분이 제 총회장 시절의 업적을 웅장하게 찬하하는 기사를 쓴 것입니다. 박형룡 박사와 정규오 목사 중심의 51인 신앙동지회의 역사가 묻힐 뻔했는데, 다행히 105회 총회장인 소강석 목사가 이걸 밝혀내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소강석 목사는 총회 재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자신이 섬기는 새에덴교회를 통해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역사 다큐멘터리’와 갈라콘서트 ‘불의 연대기’를 제작하여 총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에 대한 중요성을 각인시켜 주었다는 것이죠. 이러한 역사를 집대성한 일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 창립 이후 최초의 일이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지금껏 총회는 총회 설립 기념일을 지키는 일 외에 이러한 역사의 파노라마를 집대성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강석 목사와 새에덴교회는 엄청난 재원을 헌금하여 100년이 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역사를 집대성하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제105회 총회가 박형룡 박사와 정규오 목사 중심의 51인의 신앙동지회의 역사를 조명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며, 이러한 신학적 정체성을 거부한 자들은 총회의 신학적 정체성에 반하는 자들이 틀림없다는 평가까지 기술하였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고 참으로 많은 회한과 상념의 바다에 잠겼습니다. 제가 총회 갈라콘서트를 하자 영상을 보고 일부에서는 51인 신앙동지회와 정규오 목사님을 너무 치켜세우지 않느냐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를 쓰신 분은 51인 신앙동지회를 연구해서 석사학위를 받은 분입니다. 그분이 이번에 아주 공정하게 글을 써주셨는데, 소강석 목사의 갈라콘서트가 정말 총회의 역사적 팩트를 다큐멘터리로 잘 정리했을 뿐 아니라, 극화하여 뮤지컬로도 잘 정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총회장이 없었다는 거예요. 사실 저는 부총장 시절부터 전략적으로 기독신문에 ‘총회 100년을 설계하다’라는 제목으로 47회에 걸쳐 총회 역사를 정리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걸 바탕으로 하여 다큐멘터리 시나리오와 갈라콘서트 대본을 썼지요. 그런데 이번에 다시 한번 보며 “아, 내가 이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면서 까마득한 옛날 시절로 돌아가 보았습니다. 특별히 코로나 시국에 목사장로기도회를 하고 갈라콘서트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아예 모일 수도 없었거든요.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도와주려고 했는데, 시와 도에서 동의를 해줘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모든 어려움을 풀어내고 목사장로기도회를 했고 갈라콘서트를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다시 봐도 총회 역사 다큐와 갈라콘서트는 정말 대작이었습니다. 특히 갈라콘서트는 제가 직접 작곡하지는 않았지만, 처음 작곡해 온 곡들 중에 많은 곡을 버리고 계속 다시 수정하라고 주문했고, 나중에는 제가 부분적으로 편곡까지해서 만들어낸 작품들이었습니다. 당시 류형길 지휘자가 참 수고를 많이 해 주었습니다. 제가 밤을 새우며 보고 또 보면서 제 자신에 대해서 감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교총 대표회장으로서 코로나를 대응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예배에 대해서는 지고지순한 믿음의 절개를 지키면서도 보랏빛 소의 전략을 구가하는 양면적 전략을 짜느라 잠 못 드는 밤이 많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찔하기도 하고 어메이징 합니다. 과거의 일이지만 “내가 다시 총회장을 한다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내가 다시 연합기관 대표회장을 한다해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제가 부총회장 때부터 전략적으로 글을 쓰면서 축적을 한 것입니다. 사실 갈라콘서트도 원래는 세종문화회관을 대관해놓고 뮤지컬로 공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에서 한 것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저의 전략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영감, 창의적 지혜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총회장을 하면서 그 누구로부터도 부정적인 청탁을 받거나 단 한 푼의 부정적인 돈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총회장을 하면서 수많은 교회를 살리려고 후원을 하였고, 총회 재정을 통하여 2160교회에 21억6000만원을 전달하였고, 또 500명의 선교사들에게 5억을 전달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교회 자체에서도 총회와 개척교회와 선교사들에게 20억이 넘는 재정을 지출하였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다음은 담임목사의 결단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해주신 우리 장로님들과 성도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성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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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2-0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추억을 재현하면 젊음이 온다”
    추억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선물일 것입니다. 기억과 추억은 또 다른 차원이죠. 동물도 본능적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러나 동물은 추억의 사유를 할 수는 없습니다. 짐승들에게 무슨 추억의 인문학이나 심리학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 추억이란 기억보다 몇 차원이나 높은, 뭔가 아름답고 푸근하게 채색되고 윤색되어 있는 차원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기억이라 하더라도 그 기억이 나쁜 기억으로만 남아 있으면 상처가 되고 수치스럽지만, 그것이 좋은 채색으로 윤색되어 있으면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 그토록 꾸중을 듣고 매를 맞았지만, 다시 지내놓고 보면 그 역시 그리운 지청구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꽤 오래전 복지TV 최규옥 회장님이 사시는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앞에는 갈담저수지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곳인데요. “아, 이런 곳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제가 회장님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회장님, 이 집을 저에게 파시지 않겠습니까? 얼마면 되겠습니까?” 저는 제 아호를 지산(池山)이라 할 정도로 전원적이고 지산(池山)적 삶을 구가해왔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최 회장님이 저에게 이런 제안을 하셨습니다. “허름하긴 하지만 작은 방갈로 별장이 있는데 이걸 수리해서 쓰고 싶은 의향은 없으신가요?” 저는 그 자리에서 오케이 했습니다. 호화 주택도 아니고 아주 작은 방갈로였기 때문에 저에게는 너무나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뛰는 심장과 함께 꿈을 꾸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저수지에서 여름이면 수영을 하고, 겨울이면 썰매를 타는 추억을 재현해 보리라. 산들바람이 산들 불어오는 날 저녁은 야간낚시도 한번 해보리라...” 그러나 아직까지 수영 한 번도 못 해보고 낚시 한번 던져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정말 너무 일정이 바빠서 하루저녁 자고 온 날 외에는 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겨울이 왔습니다. 저는 당장 김정호 장로님께 “썰매 좀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겨울 초에는 얼음이 단단치 않고 그 위에 눈까지 내려서 썰매가 잘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명훈 안수집사님이 우산대로 썰매를 만들어 선물로 가져오셨습니다. 게다가 지난주는 평균 날씨가 영하 10도를 밑돌면서 얼음이 더 단단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썰매가 참 잘 나갔습니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저수지 맨 끝에서 맨 끝을 몇 번이나 왕복을 했습니다. 얼마나 신이 났으면 두꺼운 점퍼를 벗어버리고 겨울 사나이가 되어 반팔 차림으로 썰매를 탔겠습니까? 저도 모르게 “아하, 썰매의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동심 천국이었습니다. 너무나 좋아서 얼음 위에 눕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대로 재현해 본 것이죠. 문득 순간적으로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면 그리움이 생기지만, 그 추억을 재현하면 젊음이 찾아오나니...” 정말 소년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고 마음이 청춘처럼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짧고도 긴 추억의 여행을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좋은 추억을 삶의 책장에 기록하면 그 시절이 그리워지지만, 추억을 재현하면 그리움을 넘어 젊음의 시절로 돌아가고 젊음이 내 안에 찾아옵니다. 2024년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젊음을 되찾고, 젊음의 유레카를 많이 외치는 해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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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1-2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성령의 페르소나가 되고 싶다
    지난주는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광주에서 있었던 전국장로회 모임에서 설교를 하고 대구에 가서 영남협의회에서 설교를 하고 또 대전에서는 전국호남협의회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요일은 글로벌 에듀 신년하례회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각기 다른 곳이지만 같은 설교를 하면 안 됩니다. 왜냐면 중복해서 참석한 분도 계시고 또 기자들이 오기 때문에 재탕 설교를 한다고 할까 봐서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목요일에 대전 유성에서 설교를 했는데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축사나 격려사를 하러 오신 분들이 대놓고 저의 설교를 막 극찬해주셨습니다. 특히 강태구 목사님은 매주 저의 설교를 듣는데 “소 목사님이 논리적이고 법리적 설교를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눈물 흐르는 모습을 보면 자기도 가슴에서 눈물이 젖어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봤더니, “소 목사님의 설교에 진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심과 진심이 통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지요. 순간 저는 성령의 페르소나로서의 설교자상이 생각났습니다. 이것은 얼마 전에 칼빈대학교 설교학 교수인 김덕현 목사님이 발표한 논문이기도 한데요, 그는 설교자의 상을 세 가지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는 명제적 설교자상입니다. 이 설교 형식은 본문에서 추출한 신학적 명제 혹은 중심 사상을 기반으로 작성된 설교입니다. 이 설교는 전통적일 뿐 아니라, 굉장히 논리적이고 권위주의적입니다. 거의 전통적인 설교가 이렇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의 단점은 성경의 의도보다는 설교자의 의지와 사상이 앞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자의 권위에 무게를 실을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서사 중심적 설교자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야기설교를 말하는 것인데요. 이 설교는 신학적 명제나 교리적 내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지 본문의 의도를 이야기나 스토리 중심으로 전달하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이야기꾼 설교자죠. 성경은 원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압축된 문장으로 기록된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날 설교자는 성경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끌어내서 회중에게 스토리텔링을 잘해야 합니다. 이것은 명제적 설교보다는 진일보하고 청중과 더 소통이 되는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한동안은 이야기 설교에 심취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 설교에 대한 강의도 많이 하고 다녔습니다. 세 번째로 김덕현 교수님은 성령의 페르소나의 설교자상을 논했습니다. 제가 쓰는 용어에 의하면 극화적 설교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트리니티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벤후저 교수는 설교를 ‘거룩한 극장에서의 거룩한 공연’, 혹은 ‘교리의 드라마’로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도 거룩한 공연의 차원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는 하나님, 곧 성령의 페르소나가 돼야 됩니다. 영화에서 작가나 감독은 영화에 등장인물로 출연하지는 않지만, 청중에게 표현하고 싶은 감독의 의도를 주연 배우를 통해서 드러나도록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봉준호 감독의 의도를 송강호라고 하는 배우가 잘 연기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연기는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작가와 감독이 의도하는 바에 진실한 감정과 전심을 담아야 제대로 연기가 가능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하고 표현하는 성령의 페르소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한때는 이러한 설교를 제가 광대설교라고 표현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광대라는 말이 별로 그렇게 좋은 어감이 되지 않아서 극화적설교라고 표현한 거죠. 그러니까 성령의 페르소나 역할을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설교자가 성경 말씀을 전심으로 연구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성경에 나타난 이야기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전달해야 됩니다. 옛날에는 성언운반 일념의 사상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만 전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려면 성경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감정도 함께 수반이 돼야 됩니다. 아마 강태구 목사님이 제 설교에 “진심이 있다.”는 말은 전문적인 용어로 제가 성령의 페르소나로서의 설교자의 모습을 보였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필요에 따라 명제적 설교도 하고, 때로는 이야기 설교도 하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페르소나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인격적으로 전하는 설교자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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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1-2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설산에 가서, 설산이 되다
    지난 화요일 저녁에 야간산행을 했습니다. 저는 머리가 복잡할 때나 아니면 모든 일을 다 끝내고 나면 산행을 합니다. 그날은 다음 날 있을 수요설교, 그리고 금요 철야기도와 다음주 주일설교까지 다 준비를 하고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산 초입에 누군가가 눈사람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눈이 조금 녹아 흐른 것 같아서 제가 머리 부분에 눈을 덮어서 쓰다듬어 놨습니다. 표정도 미소 짓는 모습으로 단장시켜 놨습니다. 그리고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산 초입에는 여러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그 발자국마저도 눈이 쌓여 희미하게 덮여져 있었지만 산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점점 발자국이 없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정말 발자국 하나 없는 산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저는 설산이 너무 좋아서 끝없이 걷고 싶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으면 눈밭에 그대로 눕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순간, 얼마 전에 읽었던 문정희 시인의 ‘설산에 가서’라는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소리 내지 말고 / 눈물 흘리지 말고 / 한 사흘만 설산처럼 눕고 싶다 / 걸어온 길 / 돌아보지 말고 / 걸어갈 길 / 생각할 것도 없이 / 무릎 꿇을 것도 없이 / 흰 옷 입고 흰 눈썹으로 / 이렇게 가도 되는 거냐고 / 이대로 숨 쉬어도 되는 거냐고 / 이렇게 사랑해도 되는 거냐고 / 물을 것도 없이 / 눈빛 속에 나를 널어 두고 싶다 / 한 사흘만 / 설산이 되고 싶다.” 저는 정말 설산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눈밭에 가면 너무 좋아서 눕기도 하고 저수지 얼음 위에 가면 얼음 위에서도 막 누워버립니다. 그 자체가 동심 천국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발자국 하나 없는 평평한 눈밭에 가서 누워 있으려고 하는데, 동행하던 유송근 장로님이 “목사님, 내일 수요일인데 너무 많이 걸으면 예배에 지장이 됩니다.” 하면서 손을 잡고 자꾸 내려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무덤이 있는 곳으로 더 향하고 싶었습니다. 거기에도 누구의 발자국도 찍혀있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유 장로님이 더 이상 가지 말자고 하도 사정을 해서 그냥 내려왔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너무 아쉬운 마음을 가지니까 제 마음에 마침내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이 설산이 된 것입니다. 제가 눈밭에 누울 것도 없고 제 마음 자체가 설산이 된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설산을 내려왔는데 세상에 그 사이에 산 초입에 있었던 눈사람을 누군가 발로 차서 부서뜨려 버린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그랬을까? 어떤 억한 심정으로 발로 차서 부서뜨렸을까? 눈사람이 그냥 녹아 흘러내리는 것도 안타까운데 어떻게 발로 차서 눈사람을 망가뜨린단 말인가.” 너무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아, 세상에는 눈사람을 만든 사람도 있지만 무너뜨리는 사람도 있구나. 도대체 눈사람을 무너뜨리는 사람은 어떠한 마음일까? 과연, 그 마음에 설산이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박살 난 눈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제 마음 안에 다시 눈사람 하나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언제나 하얗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으로요.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주님께 이렇게 속삭여 봤습니다. “주님, 사흘이 아니라 언제나 이처럼 백야 같은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달빛 하나 없어도 온 땅이 하얀 세계가 되는 세상, 눈사람을 발로 차서 엎어버린 사람도 설산을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실수로 눈사람을 부서뜨렸던 사람도 그 마음 안에 눈사람 하나를 만드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한 사흘이 아니라 평생 눈사람 같은 사람, 설산 같은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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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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