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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몰래카메라의 어두운 그림자’
    최근에 정치권에서는 현 대통령 부인이 고가의 가방을 선물로 받은 것을 두고, 비난하고 있고, 심지어 다른 것과 연계하여 특검까지 해야 한다고 야단이다. 대통령 부인이면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데, 또 대통령 재직 시에 받은 선물은 사사로이 사용도 못 해 보고, 나중에 대통령 기록관에 고스란히 보내질 텐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신중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에는 목사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 함정의 몰래카메라를 들이대고 대통령 부인에게 주기 위한 선물을 사고, 전달하는 과정까지 인위적으로 찍어서 언론에 보냈다는 것이다. 몰래카메라도 문제인데, 함정까지 파고, 목사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목사라면 남의 허물도 덮어주고, 연약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나? 그런 목사가 국회에서 버젓이 기자회견을 하였다. 그는 대통령 부인을 접견하고 소통하는 가운데, 자신이 폭로하지 않으면 나라가 바로 설 수 없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대통령 부인을 뇌물수수죄, 직권남용, 청탁금지와 대통령경호법 위반 혐의로 고발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목사의 직함을 가진 사람이 행동한 것을 보면, 그가 말하는 정의감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정의와는 너무나 동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대통령 부인을 만날 때는 2022년 6월인데, 고향이 같고, 과거 가족들 사이에 왕래한 것을 화두로 만났다고 한다. 그때 대통령 부인의 태도가 불량하고, 인사권을 주무르는 것 같은 언사를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상황들을 채집하기 위하여 그해 9월에 두 번째 만났을 때, 동영상 기능과 증거 채집이 필요한 장비를 준비하였으며, 선물을 사는 것에서부터 모두 카메라로 찍고, 함정을 파고 물건을 전달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터넷 언론에 넘겨주었는데, 그 언론이 지난해 11월 이를 공개한 것이다. 몰래카메라로 찍은 지 1년 이상 지난 시점이며, 국내에서는 곧 총선이 이뤄질 시점이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해 왔는가? 그의 활동을 보면, 그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북한을 여러 차례 드나든 것으로 알려지는데, 2020년 교계의 진보언론과 인터뷰한 것을 보면, 그의 주장을 통해 속내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주장하기를 ‘북조선 사회는 분명히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어 있으며, 종교를 억압하거나 핍박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500여 개의 교회가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지금까지 들었던 북한 전문가나 탈북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북한의)가정교회와 지하교회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지하교회와 가정교회는 전혀 다르다. 북측은 가정교회를 공식 교회로 인정하지만, 지하교회는 불법으로 간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하교회는 있을 수 없다. 북한에 지하교회가 있다는 주장은 사기이다’라고 단정 짓는다. 그의 표현을 통하여 그의 성향을 짐작케 한다. ‘북한 선교는 내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민족의 관점에서 봐야지 제국주의적 내지 공격적 선교 방식으로 가면 안 된다. 간혹 북한 당국에 체포되는 선교사, 목사들이 있다. 이유가 있다. 예배 동참을 강요하고 전도용 CD와 책자를 돌린다. 북한은 이걸 원하지 않는다. 또 그렇게 한다고 변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사람은 1995년 미국으로 건너가 북한을 왕래하며 ‘통일 운동’을 해 왔다고 한다. 이 사람은 대통령 부인에 대하여 함정을 파고, 몰래카메라로 취재한 것이 정당한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대통령 부인에게 고가의 가방을 준 것은 자신에게 적용되어 ‘청탁금지법’ 위반으로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된다. 또 선물을 건네주는 모든 과정을 몰래카메라로 찍은 것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 된다. 그리고 몰래카메라를 소지하고 영상을 찍은 것은 ‘주거침입죄’도 성립된다고 법률 전문가들이 밝히고 있다. 이런 실정법을 위반하면서까지 하는 것이 ‘평화운동’이고, 그가 생각하는 ‘정의로운 행동’인가? 그가 그저 한 시민단체의 일원으로 그런 행위를 했다고 하여도 크게 문제가 될 터인데, 성직자의 직함을 가지고 그런 행위를 버젓이 해 놓고도 반성이나 회개가 없는 모습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에 보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10:23)라고 말씀한다. 상대편을 일부러 골탕 먹이고,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 사람들조차 비난하는 방식을 차용(借用)하여 행동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잘했다고 칭찬하실까?
    • 연지골
    • 토요시평
    2024-01-26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언론학생인권조례는 무엇을 노리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0년부터 진보 교육감들에 의하여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졌다. 벌써 13년이 지났다. 가장 먼저 만든 곳이 당시 김상곤 교육감에 의하여 경기도에서 만들어졌고, 서울, 충남, 인천, 전북, 광주, 제주 등 7개 지역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지난 15일 충남에서는 도의회에서 학생인권조례가 문제가 있다 하여 폐지안이 통과되었다. 서울시에서도 시의회에 폐지안이 올라왔는데, 일단 법원에서 진보성향 단체들이 낸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하여 보류된 상태이다. 그러나 서울시 의회에서 의원 발의로 진행하면 이를 막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서울시교육감 조희연 씨는 지난 13일부터 폐지를 반대하는 1인 시위를 벌였었다. 그리고 19일에는 서울시 조희연 교육감을 비롯하여, 도성훈 인천시 교육감, 이정선 광주시 교육감, 천창수 울산시 교육감, 김광수 제주시 교육감, 최교진 세종시 교육감, 김지철 충남 교육감, 박종훈 경남 교육감 등이 참여하여 서울시 의회의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도대체 학생인권조례가 무엇인가? 정말 학생들의 인권신장에는 도움이 되며, 다른 분야에는 피해를 주는 것이 없는가? 결과적으로 보면, 학생인권조례는 학생들의 일부분 인권을 보호한 측면도 있지만, 너무 지나치게 교권을 무너트리고, 학습권을 흩은 측면이 강하다. 특히 교권 하락의 문제점 앞에서는 언제나 학생인권조례가 말썽이었다. 이것은 국민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10월 광주광역시의회 교육문화위원회에서 18세 이상 700명을 대상으로 ‘교권 강화 및 학생 인권’ 여론 조사를 했는데, 93%가 수업 방해, 교사 조롱, 폭행 등 교권 침해가 사회적으로 심각하다는 인식을 가졌다. 그런 이유로는 인성교육의 소홀이 32.1%, 학생인권조례 제정으로 인한 것이 23.6%, 교권보호를 위한 법적 제도의 미비가 20.4% 등이라고 답하였다. 결국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인성교육이나, 교사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인 것보다는 학생인권조례를 먼저 만들어, 지나치게 학생들 위주의 조례를 운용한 것에 원인이 있다고 본 것이다. 실제적으로 서울시의 학생인권조례를 보면, 학교 구성원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학칙’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제3조 3항에 보면 ‘학칙 등 학교 규정은 학생인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제한할 수 없다’고 하여, 학생인권조례가 최우선되어야함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학생인권조례에서 담고자하는 핵심 내용 가운데 중요시 하는 것은 역시 ‘동성애’이다. 서울시의 학생인권조례 제5조 1항에 보면,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서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가족 형태’가 나온다. 또 제28조 1항에서도 ‘성 소수자’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고, 8항에서도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의 정보를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이런 모든 것들은 ‘동성애’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 진보 성향의 교육감들이 서울시 의회에 대하여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려는 것은, 민주주의의 퇴보이며,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맹비난한다. 그리고 체벌이 사라지고, 복장, 두발 등 생활의 변화가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고 본다. 학생 위주의 학생인권조례로 인하여 교권이 형편없이 무너지고, 학생들에게 임신, 출산 등의 자유를 주었을 때,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이 시점에서 왜 진보교육감들이 학생인권조례를 목숨 걸고 만들고 지키려고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1968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는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항의 표시로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주동이 되어, 소위 ‘6.8 혁명’을 일으켰다. 그들은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며, 기존의 윤리, 가정, 질서, 가치를 해체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반체제, 반문화, 자본주의에 저항함을 보였다. 이때 이들이 현수막에 걸기를 ‘마르크스, 마오, 마르쿠제’를 등장시켰는데, 마르크스는 공상주의 사상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고, 마오는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을 말한다. 세 번째 사람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허버트 마르쿠제이다. 그는 국가를 전복하는데, 섹스나 마약이 더 우월한 무기라고 믿었다. 그리고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에리히 젤리히만 프롬은 성차별과 편견의 배양지가 가정이라며 가족제도의 소멸을 추구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성 해방의 주창자 빌헤름 라이히는 1930년 오스트리아 공산당원이 된 후에 마르크스의 인간해방론을 성욕의 추구와 결부시켜 ‘성 해방’ ‘성 정치’ ‘성 평등’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이런 흐름이 오늘날 한국에서도 ‘성적 자기 결정권’과 ‘성 소수자 보호’라는 것으로 포장되어 학생인권조례에 포함되고 이를 강조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를 소위 ‘문화막시즘’이라고 한다. 공산주의는 70년 만에 망했으나, 마르크스주의에 결부하여, 성해방, 성정치, 성평등이 학교의 학생들에게 인권이라는 미명으로 ‘네오막시즘’이 주입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강행하는 진보•좌파 교육감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국민들의 바른 판단만이 가능하게 된다고 본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12-22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정치지도자들의 말 너무 볼품없다’
    며칠 전 더불어민주당의 대표를 지낸 송영길씨가 자기의 출판기념회에서 현 정부의 모 장관을 지칭하여 ‘이런 건방진 놈이 어디 있나, 어린놈이 국회에 와서...이런 놈을 그냥 둬야 하겠나, 내가 물병이 있으면 물병을 머리에 던져버리고 싶다’고 했다. 여기에 이어서 같은 당의 김용민 의원은 ‘000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금수의 입’이라고 SNS에 올렸다. ‘금수’(禽獸)는 행실이 나쁜 사람을 말하거나 심지어 짐승을 말한다. 그랬더니 같은 당이었던 민형배 의원도 ‘어이없는 00네. 정치를 누가 후지게 만들어?’라고 했다. 또 같은 당의 유정주 의원도 ‘그닥 어린 0도 아닌, 정치를 후지게 만드는 너’라고 거들었다. 우리 정치가 속된 말로 후지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국민의 대표로 뽑힌 정치 지도자들에게서 이렇듯 공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더러운 말들을 대하고 보니, 참 그 인격이 볼품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과민반응일까? 현 정부의 국무위원을 공개적으로 ‘어린놈’이라고 지칭하는 송영길 전 대표는 소위 말하는 86운동권 출신이다. 그런 송 전 대표는 37세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47세에 인천광역시장이 되었고, 50대에 180석의 거대 여당의 대표가 되었다. 그가 문제를 삼고 있는 국무위원은 현재 50살이다. 20년 전, 86운동권 그룹은 ‘60, 70대는 투표하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했었다. 또 ‘50대가 되면 멍청해지니, 60세 넘으면 책임 있는 자리에 있지 말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 임종석은 34세에, 조정식은 41세에, 우상호는 42세에, 윤호중은 41세에, 이인영은 40세에, 정청래는 39세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임종석은 51세에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 이제 86운동권 세대들도 대부분 60세를 바라보거나 넘기고 있다. 20년 전의 다짐을 이들은 어떻게 반추(反芻)하고 있을까? 86세대와 함께 현재 더불어민주당에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 출신이 70여명 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정치에 입문하여 20년 이상을 정치적 특권을 누려 온 사람들이다. 연봉 1억원이 훌쩍 넘는 국회의원 예우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200여 가지의 온갖 혜택을 누리고 살아왔다. 그러니 자신들 외에는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또 다른 사람이나, 국민들 조차도 안중에 없는 모양이다. 근자에는 2030세대를 향한 청년비하 현수막도 비판을 받고 있다.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 ‘혼자 살고 싶댔지 혼자 있고 싶댔지’ 등 청년들을 이기적인 집단으로 몰아가는 듯한 표현과 그들을 배제하는 듯한 문구는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청년 세대에 대한 것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소식을 들은 국민들이 이들에 대하여 거세게 비판하고 있다. ‘운동권 전관예우’를 받는 것이냐? ‘86특권 의식’을 누리는 것이냐? 심지어 ‘선민의식’을 가진 것이냐? ‘이조 시대 양반계급을 가진 것이냐?’고 말이다. 이들의 말대로 50대가 되면 멍청해지고, 60대가 되면 아무 것도 맡지 말아야 할 대상이 된 듯하다. 그런데도 86세대 가운데 정치권에서 은퇴를 선언한 사람은 별로 없는 것을 보니, 이들은 아직도 권력 향유에 대한 미련이 남은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꼰대’라고 한다. 꼰대는 단순히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비아냥거리는 표현이 아니다. ‘꼰대’라는 말은 본래 군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상관이나 선임자에게 불만을 표할 때 사용된 용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이 단어는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꼰대의 규정은 뭔가? 회자(膾炙)되는 것으로 살펴보면, 자신의 의견이나 방식은 정답이고, 남이 하는 것은 존중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전통이나 관습에 얽매인 것을 말한다. 지금의 86세대의 모습들에서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들이 있지 않은가? 물론 앞에서도 말한 대로 나이를 먹었다고 다 꼰대는 아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남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위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왜 유독 86세대가 주류를 이루는 정치권에서만 이런 현상들이 두드러지는가? 이들 가운데 일부는 30대 젊은 나이부터 소위 말해서 운동권에 몸담았다고 하여, 우리 사회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고, 20년 이상을 권력에 취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나 지금은 이들의 알량한 민주화운동의 유효기간은 벌써 끝났다고 본다. 약효가 떨어진 것을 가지고 만병통치약처럼 흔들어 댄다면, 가소(可笑)로운 일이다. 생각은 말로 표현되고, 그 말을 따라 행동으로 옮겨질 때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과거에 사로잡혀 현재의 시각장애인과 같은 행동을 보인다면, 사고(思考)의 근원을 점검해 보라.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11-23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국가 부채, 누구에게 갚으라는 것인가’
    빚을 지고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무조건 남의 돈으로라도 잘 먹고 잘살아보겠다는 심보는 도둑의 마음으로서 잘못된 것이다. 물론 사업이나 기업하는 분들에게는 채무 없이는 기업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또 국가의 여러 금융 기관들의 활동도 이런 금융 서비스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개인이나 국가가 지나치게 빚에 의존하고 그것을 갚을 능력이 없으면 결국은 망하게 된다. 어느 정도가 되어야 나라가 위험해지는가? 과거에 우리 정치권에서는 야당에서 정부에게 국가 채무가 GDP(국내총생산)의 40%를 넘으면 안 된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나서는 자신들이 말한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그것도 내로남불인가? 참고적으로 ‘국가 채무’와 ‘국가 부채’는 다른데, 국가 채무는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상환의무가 있고, 지급 일정이 정해진 채무를 말하는 것이다. 가령, 공무원 급여, 국채, 지방채 등을 말한다. 그리고 국가 부채는 미래에 지출할 재정부담까지 추계해서 산출하는데, 이를테면,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등을 포함한다. 우리나라가 1948년 건국과 같은 정부 수립 이후 약 70년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국가 채무는 660조 원이었다. 그런데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5년간 늘어난 부채는 무려 408조 1,000억 원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의 모든 정권에서 졌던 부채보다 약 61%가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문재인 정권 들어서기 전까지 국가 채무는 GDP 대비 40.1%였는데, 문재인 정권이 끝난 시점인 2022년에는 54.3%로 14% 이상 상승하였다. 과거 문재인 대통령이 속했던 정당이 주장한 것에서 상당히 지나친 상태이다. 물론 국가 채무비율이 높다고 나라가 곧 망하는 것도 아니고, 채무비율이 낮다고 국가가 안정된 것도 아니다. 다만 국가 부채율이 높아도 신용도가 높고, 다른 방법(다른 나라에 대하여 채권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지하자원, 원유 같은 것을 다량 보유함)으로 그 채무를 갚을 능력이 있다면 이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우리 한국은 과연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그럴 능력이 되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역대 정권하에서 국가 채무의 증가액을 보면, 김대중 정부에서 85.4조 원, 노무현 정부에서 143.2조 원, 이명박 정부에서 180.8조 원, 박근혜 정부에서 170.4조 원인 것에 비하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408.1조 원으로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쉽게 말해서 빚으로 나라를 운영한 것이다. 국가 부채도 문재인 정부 들어서기 전까지 70년간 1,433조 원이었는데, 문재인 정부 5년간 무려 770조 4,000억 원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국가 부채는 2021년에 사상 최초로 2,000조 원을 넘게 된다. 문재인 정부가 있었던 2022년까지 우리나라의 국가 채무는 1,068조 4,000억 원이었다. 이것은 국민 1인당 2,200만 원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 빚은 우리 후손들에게 미리 가불하여 쓰게 되므로, 그들에게 빚을 떠넘긴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1년 반이 지난 시점에서, 2023년 말까지 국가 부채 예상은 문재인 정부가 넘겨준 부채 금액에서 더 증가하지 않고 있다. 그동안 윤석열 대통령은 부지런히 구미(歐美)와 중동 등에서 ‘세일즈맨 외교’를 통하여 국가 수출과 국가 신용도를 높이고 있다. 분야별로 보면, 원전, 수소, 친환경 에너지, 미래 차, 금융, 관광, 방산 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해외 수출을 독려•신장시키고 있다. 이를 통하여 국가 경제력을 튼튼히 하고, 국가 기반을 굳건하게 세우기 바란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에도 수십조 원의 성과를 내었고, 최근에도 중동지역을 방문하여 100조 원대가 넘는 경제 분야 수출 약속을 받아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수출 주도 국가이기 때문에,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지도자들이 이런 활동들을 활발하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정치 지도자들의 잘못된 선택과 그들의 그릇된 정책으로 국가 채무와 부채가 늘어나고 결국 나라가 망한 국제적인 사례들을 잘 알고 있다. 벌지는 않고 쓰기만 하고, 막대한 빚을 내서라도 잠시의 호사스러움과 인기를 누리려는 지도자는 국가 발전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엄청난 국가 부채를 만들어 후대들에게 짐을 져 주는 것은, 일종의 범죄가 아닌가? 우리는 내로남불 정권의 빚더미 잔치 국가를 경험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내로남로(내게 사랑이면 남에게도 사랑이어야)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10-27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독립운동가들을 더 욕되게 하지 말라’
    최근 우리 사회에서 거론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 인물들이 있다. 홍범도, 김원봉, 정율성이다. 홍범도는 문재인 대통령 시절 그의 유해(遺骸)가 구 소련 지역에서 운구되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고, 국가에서 제1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 이 건국훈장을 받은 분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한데, 홍범도도 받은 것이다. 홍범도는 이미 1962년 윤보선 대통령 시절에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는데, 그를 더욱 크게 격상시킨 것이다. 그러나 1962년 당시에는 홍범도에 대한 구 소련측 정보가 없었기에, 그의 독립군 당시의 기록만으로 포상하지 않았나 싶다. 홍범도가 독립군 활동을 한 것은 맞지만, 1921년 이후 구 소련의 자유시에서 일어난 참변과 그 이후의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의아한 측면이 강하다. 일본군에 쫓겨 독립군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자유시에 모였을 때, 소련의 적군(赤軍) 참여 여부에 따라 대대적 학살을 당한 비극은 두고두고 애통한 일이다. 그러나 홍범도는 당시 해를 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부대는 적군에 들어갔으며, 그는 모스크바에 들어가 당시 소련의 최고 지도자인 레닌과 트로츠키로부터 상금과 권총, 군복 등을 받았고, 소련군 대위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소련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런 홍범도를 역시 문재인 대통령 시절, 독립군 여러 명의 흉상을 육사 교정에 세울 때에 함께 세운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가 과연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장교를 육성하는 육군사관학교에 귀감(龜鑑)이 되느냐는 것이다. 홍범도는 우리나라가 지난(至難)한 어려움이 있을 때, 독립군으로 활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에는 별다른 보탬이 되지 못했다. 그가 소련 사람으로 살았기에 오히려 북한에게는 관련이 될지 모르겠다. 두 번째 인물은 김원봉이다. 공산주의자 김원봉을 전 문재인 대통령은 ‘국군의 뿌리’라고 추켜세우고, 그에게 훈장을 추서하려 했다. 김원봉은 처음부터 사회주의•공산주의 색채를 띤 단체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그가 의열단과 광복군에서 활동했다고 하나, 언제나 그는 공산주의 계열에 섰다. 그는 1948년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나섰다가 그대로 북한에 남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에 국가검열상, 중앙위원회 위원장,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6.25전쟁 중에는 북한군의 후방에서 물자를 공급하여 전쟁을 독려하므로 김일성으로부터 노력훈장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나중에 김일성과의 권력 암투에서 밀려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역시 김원봉은 영원한 공산주의자로, 국군의 뿌리는커녕, 이 나라를 비극으로 몰아넣고 공산화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임에 틀림 없다. 지금 밀양에는 그의 의열기념관이 있다. 세 번째 인물은 정율성이다. 그는 현재 중국인민해방군가인 ‘팔로군행진가’를 작곡하여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군대가 싸울 때, 중공군을 크게 고무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북한에도 ‘조선인민군행진곡’을 만들어 준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중국 공산당에 들어갔고, 6.25전쟁 때에는 중공군과 함께 서울에 내려와 우리의 소중한 궁중악보를 가져갔다고 한다. 그는 1976년 중국에서 죽었고, 중국 공산당이 만든 혁명투사 묘지에 묻혀 있다. 그는 한국 사람이 아니라, 중국 사람이다. 그런 그를 위해서 현재 광주광역시에서는 기념관을 만들고, 거리를 조성하고, 조형물을 만들고, 기념음악대회를 하는 등 한껏 기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다고 모두, 기릴만한 업적이 되는가? 한때 일제와 맞서 독립 혹은 광복군 활동을 했다 할지라도, 우리 자유대한민국을 세우는데 공훈이 없거나, 반대로 공산주의 활동을 함으로 우리 자유대한민국을 위태롭게 한 사람들을 우리 자유대한민국에서 추앙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본다. 그분들이 살았던 시대는 나라 잃고, 국가의 주권이 없고,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며, 인고(忍苦)의 나날을 보낸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나라의 정체성은 자유대한민국이다. 이것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고, 부인한다면 국가 정체성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들이 그 당시에 그렇게 살았고, 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을 탓하기에는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 평가하기에는 일정 부분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그분들은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본다. 괜히 그분들을 높인다고 들먹거리다가, 과거의 모든 행적이 들춰져 전 국민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민망하고 볼썽사납다. 그분들에게 ‘독립운동’을 넘어 ‘건국’이라는 좋은 옷을 입혀 드리려다 오히려 욕이 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엄연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자꾸 변명하고, 항변하고, 두둔하고, 덮으려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역사는 편향된 사람들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9-19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586운동권’ 세대들 반성문을 써야’
    현재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에는 소위 말하는 ‘586세대’가 상당수 있다. 이들은 1960년대에 태어났고,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며, 대략 나이로는 50대들이다.(2020년 총선 기준) 이들이 제도권 정치에 대거 참여한 21대 국회에서는 국회의원 가운데 58%가 ‘586세대’이다. 지역구 당선자만 놓고 보면 61%가 ‘586세대’이다. 이는 국회의원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이다. 우리 헌정 사상 이렇게 많은 세대가 한꺼번에 국회 의석 다수를 차지하기로는 역대 최다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뤄지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었던 것이다. 이 세대는 1980년대 대학가에 데모가 한창일 때, 자신들도 여기에 참여하고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자부심을 갖는 세대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우고 현실정치에 적용하고 있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586세대가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정치권의 모습은 어떨까? 586세대 가운데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 ‘민의의 전당’에 들어갈 때 기대와 우려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이 우려하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586세대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민낯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586세대라고 모두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고, 또 그 시대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제도권에 들어가 모두 정치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최근 그 시대에 함께 캠퍼스에서 운동권을 형성했던 사람들이 2023년 광복절을 맞은 지난 15일, 의외의 ‘반성문’을 내놓았다. 여기에 동참한 사람들이 580여 명이라고 하니 적은 숫자는 아니다. 이 자리에는 ‘586 운동권’ 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함께 자리를 했는데, 그래도 대부분은 586세대이고, ‘586 운동권’에 참여했으나, 지금은 비판적인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있었던 반성문을 들어보자. ‘586 운동권’ 세대가 말한다. ‘우리가 젊은 시절 벌였던 잔치판을 설거지하여 다음 세대가 새 잔치를 벌일 수 있도록 하자. 먼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담긴 반대한민국적이며, 일면(一面-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적인 역사 인식부터 치우자. 민주화운동의 상징 자산을 주사파가 사취하여 독점 이용하는 이런 어이없는 사태에 책임을 지고 잘못을 바로 잡자’고 하였다. 젊은 세대는 이런 말을 하였다. ‘민주를 말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 헌정을 무너뜨렸고, 노동을 말하는 사람들은 기득권을 위해 더 어려운 사람들을 사지로 몰았다. 연금 고갈, 부동산 폭등으로 수혜를 받지 못한 계층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희망조차 포기해야 했으며, 미래 세대는 수백 조의 나랏빚까지 떠안게 되었다’고 개탄한다. 다른 ‘586 운동권’ 세대는 ‘이제는 정말 북한체제를 추종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그런 세력들과는 완벽히 결별한 새로운 민주주의, 새로운 민주화 세력이 출범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 됐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이 가장 경악한 것은 ‘민주화 운동권 사람들 다수가 조국(전 법무부장관) 가족의 비리를 강하게 비호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님이 옳았다. 저희들이 틀렸다. 이 순간 우리는 흔들리는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고 통렬하게 반성한다. 같은 시대, 같은 운동권을 형성했던 사람들의 눈에도 현재 제도권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586 운동권’ 세대에게서 ‘민주화 운동’의 변질을 느끼는 모양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586 운동권’ 세대는 전 정권하에 여당의 대표에서부터 국회의원, 장관, 사법부의 중직, 각계각층의 요직, 정치권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이 바라보는 ‘586 운동권’의 행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들을 바라볼 때 느끼는 것은 ‘주사파의 폐해’ ‘내로남불’ 이조 시대에나 있었던 ‘당파 싸움의 재현’ ‘민주화운동의 망령’ ‘피해자 코스프레’ ‘방탄 국회의 선봉장’ ‘제 편 감싸기’와 같은 분위기가 묻어 난다. 그들에게서 보고 있는 것은 참된 민주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을 빙자한 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결핍 상태를 현실 정치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일반 서민들의 상식에서 보아도 분명히 잘못된 것인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막무가내(莫無可奈)이다. ‘586 운동권’이 제도 정치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 때부터이다. 아마도 그들에게 거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586 운동권’ 세대가 밀물처럼 몰려 들어간 21대 국회를 보면, 그런 기대를 함께 했던 것이 오히려 실망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철저하게 국민들 앞에서 ‘반성문’을 써야 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고, 민의(民意)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지도자는 더 이상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8-19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국회의원의 특권을 줄여야 한다’
    우리나라에 많은 권력기관들이 있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권력기관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영국의 레가툼이라는 싱크탱크가 여러 나라의 권력기관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조사 대상 국가 167개국 가운데 한국의 사법부는 155위, 정치권은 114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에서 경제권 10위, 국방력 6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여러 가지 면에서 꽤 앞선 모양세다. 그러나 최고의 권력층에 대한 평가는 심히 부끄러울 정도이다. 특히 30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은 국가로부터 186가지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데, 그에 걸맞게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제대로 일하고 있을까? 어떤 의원은 교도소에 갇혀 있어도 월급이 나오고, 어떤 의원은 잠적하여 국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월급이 나오고 어떤 의원은 기소가 되어 재판을 받고 있어도 월급이 나오는 곳이 국회이다. 또 심각한 것은 어떤 의원은 나라 팔아먹을 짓을 하고 다녀도 월급이 나온다. 우리나라 국회의원의 연봉은 1억 5천 만원이 넘는다. 이 금액은 전 세계에서 미국, 일본, 독일 다음으로 많이 받는 것인데, GNP(국민소득)로 따지면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그뿐인가? 국회의원들은 해마다 1억 5천 만원의 정치 후원금을 받을 수 있고, 선거가 있는 해에는 갑절인 3억 원을 후원금으로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선거에서 15%이상 득표하면 선거비용 전체를 국고에서 환급해 준다. 결국 이것 저것 다하면 국회의원이 1년에 5억 원은 가져간다는 것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해외여행경비, 자동차 유류세, 운전기사 공무원 채용, 항공기, KTX 무료 사용, 국회 안의 각종 편의, 문화, 복지 시설 무료 사용, 국가의 휴양시설 무료 사용의 혜택을 받고 있다. 또 입법활동비, 정책자료 발간비, 정책자료 발송비, 문자 메시지 발송비, 업무용 택시비 등 수 많은 다양한 지원을 받고 있다. 거기에다 보좌관, 비서관 등 국회의원 1인당 9~10명을 채용할 수 있다. 결국 국회 한 회기의 4년이 끝나면 4~5조원의 국가 예산이 들어간다.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과연 300명의 국회의원이 우리나라에 필요한가? 국회의원은 100명만 있어도 충분히 입법 활동이 가능하다고 본다. 큰 혜택의 수혜자인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면책 특권’을 이용하여, 국회에서 온갖 잡다하고 허접하고 국민들 수준에도 한참 못 미치는 말들을 쏟아내도 그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다. ‘불체포 특권’을 이용하여 온갖 범죄와 혐의가 있어도 국회 회기에는 잡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신성한 의회인 국회를 ‘방탄 국회’로 만들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사회 일각에서는 국회의원들의 특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회의원 중에는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에 몰두하고 열심인 의원들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전반적으로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국회 무용론’이 나올 정도이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국회의원들은 어떨까? 우리나라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우선은 보좌진을 줄여야 한다. 독일, 영국, 일본, 프랑스는 국회의원 1명당 보좌진이 2~3명이다. 스웨덴은 국회의원 2,3명 가운데 보좌진은 1명이다. 일하지 않는 국회의원도 문제지만, 보좌진과 비서관에게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들이 과연 성실하게 그리고 국가의 미래와 국민들의 행복을 위한 의정활동에 헌신하고 있을까? 그리고 국회의원 수를 대폭 줄여야 한다. 인구 50만 명당 1명꼴로 하면, 100명 정도면 충분하다고 본다. 어느 지역에 보면, 갑, 을, 병 등 같은 지역인데, 쪼개서 국회의원 수를 늘이고 있다. 그리고 전국구 의원을 없애야 한다. 이 전국구 의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별별 꼼수를 둬서 의석수를 늘이려는 것을 보아 오지 않았는가. 또 국회의원들에 대한 대우를 도시근로자 평균 임금과 맞먹는 400만 원대로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래도 연봉이 5천 만원이 넘는다. 우리나라의 정치권이 세계 최하위 수준의 신뢰감을 나타내는 것은, 최고의 예우와 온갖 특권을 주니, 이것에만 관심이 있고,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권을 줄이면, 명예와 사명감으로 일할 진정한 국민의 일군이 나올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7-22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공영방송 KBS는 신속히 개혁되어야 한다’
    그동안 국민들로부터 심각한 편파방송으로 지탄을 받고, 공영방송으로서 위상이 크게 실추되었던 KBS에 개혁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KBS는 TV시청료를 현행 전기세에 부과하여 준조세적이며 일방적으로 징세하던 것을 이제는 분리해야 한다는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면서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다. 그동안 KBS는 ‘국민의 방송’이 아니라, 민주노총 산하에 있는 ‘노영방송’이라는 비난을 받아왔었고, 정치적으로 매우 편향된 모습을 보여, 공영방송의 신뢰는 무너지고, 오히려 상업방송만큼도 공정성을 지키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이런 가운데 KBS는 전기세에 포함하여 걷어 들이는 시청료가 연간 6,2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손쉽게 확보하였다. 그러다 보니 연봉 1억 원이 넘는 직원이 51.3%를 차지하고, 그중에 1,500명은 무보직이라고 한다. 보직이 없다는 것은 책임지고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국민들은 이런 KBS를 위하여 영문도 모르고 따박 따박 수신료를 내온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급기야 국민들의 불만이 커져서 억지로 낸 TV수신료 환불 요청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2017년에는 2만 246건이 있었는데, 2021년에는 4만 5,266건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뿐만이 아니다. 국민제안 공개토론에서 국민들은 무려 96.5%가 수신료 분리징수에 찬성하였다. 아예 이런 제도를 없애자는 의견도 64%를 차지하였다. 왜 그런가? 공영방송인 KBS가 노조위원장 출신을 3연속 보도국장으로 채우고, 나머지 중요한 보직도 언론 노조 출신을 앉혀서 방송의 편파성을 극대화한 때문이다. 오죽하면 현재 KBS 이사들 일부가 나서서 ‘KBS의 편파성은 독재정권 때보다 심하다’고 폭로하였다. 국민들의 시청료 납부와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는 KBS가 공정성, 공공성, 공익성, 공평성을 크게 상실한 것이다. 그야말로 공영방송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이다. 그런 KBS 안에도, <새로운KBS를위한KBS직원과현업방송인투쟁위원회>(새KBS공투위)가 조직되어 1,100명의 직원들이 나서서, KBS의 고약한 실태를 알리며 국민들에게 엎드려 사죄를 한 것이다. 이들은 현 경영진이 퇴진하고 KBS 자체에 고강도의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이 지난 21일 발표한 대국민 성명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KBS는 지금까지 오직 운동권과 민노총과 민주당만을 위한 방송을 해 왔습니다. 견해가 다른 국민들의 시각은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생각이 다른 국민들을 훈계하고 윽박질렀습니다. 우리는 경영진과 이사회만을 탓할 수 없습니다. 불공정 방송과 무능 경영을 통해 국민의 자산을 가로채고 횡령하고 낭비하는 범죄행위가 버젓이 벌어지는데도 우리는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부당한 보도, 불공정한 시각을 강요하는 보도, 프로그램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몸을 던져야만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루하루의 편안한 삶에 만족했습니다. 그 와중에 회사는 썩어들어가고, 오늘의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국민들께 사죄드립니다. 토를 달지 않고 이유도 달지 않고 사죄드립니다. 국민들은 무조건 옳습니다. 앞으로 국민들께서 더 회초리를 들어주십시오. 무조건 다시 기회를 달라는 말씀도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도 역시 국민의 판단입니다. 우리는 다시 KBS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라는 사뭇 비장한 어투로 대국민 사죄 성명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투쟁 방향을 제시하였다. 현 사장과 본부장, 이사진 전원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 모든 민노총 출신 간부들이 민노총으로부터 탈퇴하라. 기자, 피디, 아나운서 등 방송 현업인들은 민노총을 탈퇴하라. 민노총 간부들의 모든 부당한 요구를 거부한다. 이런 투쟁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고강도의 투쟁에 돌입한다고 천명하였다. 그동안 KBS 안에도 바른 목소리를 내는 제3의 노조가 있었지만, 이번과 같이 강력하게 개혁을 요구하지는 못했었다. KBS가 진작 그런 자체적인 개혁의 목소리를 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는 당장 수신료 문제가 현실적으로 다가오니까, 그런 자구책을 쓰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러나 지금은 KBS 구성원들이 그런 얕은 잔꾀를 부리다가는 공멸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이제라도 KBS가 심각한 편파성의 악몽에서 깨어나서 그동안 끔찍하게 불명예스럽게 들어왔던 ‘노영방송’이나 ‘정치방송’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KBS는 편향되고 정치 이념에 사로잡힌 인적 청산도 신속히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공영방송의 각오를 새롭게 다져서, KBS의 구호대로 참된 ‘국민의 방송’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6-23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왜 성경과 성탄절을 문제 삼나?'
    최근에 불교 언론을 보니, 불교계에서는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성경’과 ‘성탄절’에 대하여 독점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시 정립해서 사용해야 한다며 내부적으로 논의되었다고 한다. 즉 성경은 ‘바이블’로, 성탄절은 ‘기독탄신일’이나 ‘크리스마스’로 해야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불교계가 ‘석가탄신일’로 하든 ‘부처님 오신 날’로 하든 상관한 적이 없다. 이 자리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방문 시 의회 연설에서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가 된 자유와 연대의 가치가 선교사들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는 말을 문제 삼아 대통령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결의했다고 한다. 불교계는 ‘종교 편향’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고, 그에 대해서는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모양새다. 정부에서는 이번 5월부터 전국의 70여개 사찰들이 그동안 오랫동안 받아오던 ‘문화재 관람료’ 대신 이를 100% 국가에서 보전(保全)한다고 발표하였다. 그것이 자그만치 올해에만 419억 원이 지원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언론들에서는 각 사찰들이 문화재 관람료를 ‘무료’로 한다고 대서특필하고 있다. 그것이 무료인가? 각 사찰들이 현장에서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려면, 불교의 문화재를 관람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한다. 심지어 법원에서도 그런 행위는 ‘부당하다’고 판결까지 내렸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고 수고하지 않아도 재정 지원이 이뤄진다. 그야말로 정부와 지자체가 따박 따박 재정을 지원해 주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무료라고 하는가? 이것은 엄연히 국민들의 피 같은 세금에서 보전해 주는 것이다. 불교계의 이런 모습에 2021년 국회에서 모 의원은 ‘봉이 김선달’이란 말을 사용했다가 불교계로부터 호되게 항의를 받고, 항복하기도 했다. 혹자는, 이처럼 불교계가 문화재 관람료 대신 국가로부터 100% 재정 지원받는 것은 우수한 불교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정책 차원이라며 비난의 화살을 피하려 변명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동안 정부에서는 불교를 포함한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국가 예산 집행을 하지 않았던가? 지난해 문화재청이 낸 보도자료에 의하면, 2023년 문화재청 예산을 1조 2,935억 원으로 잡았고, 그중에 문화재 보존 예산으로만 6,814억 원을 책정하였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상당수의 금액이 불교계의 문화재 보존에 사용될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문화재를 보존하고 보호하는 일은 필요한 일이다. 다만 그동안 국민들이 낸 세금에서 천문학적인 국가 예산이 계속 종교계에 문화재 보호 명목으로 들어갔지만, 그에 대하여 공개적이며 투명한 감사(監査)는 제대로 이뤄졌는가를 묻고 싶다. 어찌 보면 불교계는 국내에서 오래된 종교라고 하여, ‘종교 우대’의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데 타종교에 대해서 ‘성경은 바이블로, 성탄절은 기독탄신일이나 크리스마스로, 가톨릭은 카톨릭으로 해야 한다’는 논의를 했다고 하니, 어리둥절해진다. 사실 불교계는 전에도 기독교가 성탄절에 기독교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성탄 트리’를 세우면서 트리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웠다고 시비를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십자가는 안 되고 별을 달라는 것이다. 별은 되고 십자가는 안 된다는 이유는 뭘까? 십자가가 기독교를 상징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제 우리 기독교가 불교의 상징물에 대하여 이래라저래라 한 적이 있는가? 그런데도 불교계가 타종교에서 사용하는 고유한 용어까지 독점하고 있으니 바꿔야 한다고 거론하고 따지는 것은 그야말로 볼썽사납다. 이런 것들이 종교 간 다툼을 일으키는 발단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종교 간에 서로 이해하고 관용하려면 그 종교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 타종교에 대하여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무리한 비판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불교를 보면, ‘종교 차별’을 주장하면서, 여러 사안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선점(先占)하려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눈에 띤다. 그러나 종교 간에 간섭함이 도가 지나쳐, 타종교에서 오랫동안 사용한 명칭과 활동까지 따지고 든다면 이를 우리 국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각 종교는 종교 화합을 통하여 국민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이를 보여줌으로 국민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종교가 국민들에게 짐이 되고, 배척의 요인이 될 것이다. 종교는 권력기관이 아니다. 정치 집단도 아니다. 종교의 본분은 국민들의 영적, 정신적 만족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며,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는 역할을 감당하는데 치중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5-19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부활(復活)과 부활절(復活節)’
    지난 3년간 한국교회는 코로나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제는 실내(室內)에서도 마스크 벗기가 실행되는 가운데, 이번 부활의 예배에는 그동안 쉬고 있던 성도들도 함께 나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언제나 부활의 감사 예배는 기대와 설렘과 기쁨과 엄숙함의 은혜가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시기까지도 여러 사람들의 온갖 괴롭힘과 모욕과 야유, 조롱과 비난과 비웃음을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생각할 때, 너무나도 감사하여 눈물이 난다. 세상에서 나의 슬픔을 위하여 울어주고, 기쁨을 위하여 함께 웃어주고, 내가 아플 때 대신 앓아 주고, 그리고 나의 잘못의 짐을 지고 죽어줄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할 사람들이야 다소 있겠지만, 나를 대신하여 죽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분은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면서까지 나를 위해 죽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행해 보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희생을 통한, 세상에 대하여 엄청난 사랑을 보여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지만, 정작 스스로에게는 아무 욕심도 없으셨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셨다. 당신의 몸은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 죽음의 희생으로 내어놓으시고, 복음 전파는 제자들에게 맡기고, 육신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고, 영혼은 하나님께 의탁하고, 심지어 당신이 입으셨던 옷을 십자가 밑에서 병사들이 제비뽑아 나눠 갖는 것도 두고 보셨다. 그야말로 빈손, 빈 몸이셨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세상에서 작은 욕심 때문에 때로는 마음이 상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 부끄럽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명백하다. 섬김을 받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섬기고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代贖) 제물로 주시기 위한 것이다. 어떤 종교도, 어떤 종교의 교주도,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그런 사랑을 베푼 경우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만 자신을 ‘메시야’로 지칭하는 사람들이 100여 명이 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그분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다가 끝내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극진하고도 지고지순(至高至純)한 희생과 사랑을 보여 주었는가? 부활(復活)은 영어로 Resurrection으로 되살아나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부활절(復活節)은 영어 표기가 다르다. Easter라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것과는 좀 다르다. ‘Easter’란 말은 영국 앵글로색슨족의 ‘봄’과 ‘다산의 여신’인 이스터(Eostre)에서 나온 것인데, 초창기 영국 교회에서는 지역 전통과 연계하기 위하여 부활절을 ‘이스터(Easter)’로 명명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우리 신앙은 절기(節氣)인 부활절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참 의미와 소망을 되새기는 신앙을 가져야 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부활절이라는 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그 감사와 믿음과 소망을 더하기 위하여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런 신앙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날마다 부활의 소망이 더욱 또렷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셨다. 뭘 이루셨는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이루셨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동시에 이뤄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대로 인류의 영혼 구원 계획을 이루셨다. 또한 구약 성경 예언의 말씀을 이루셨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예언된 메시야 오심을 이루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대로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죽어주심도 이루셨다.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마귀를 멸하신다. 해마다 부활절을 맞이하는데, 절기가 아닌, 부활의 은혜, 부활의 능력, 부활의 기쁨, 부활의 삶, 부활의 증인, 부활의 소망이 더해지기를 바란다. 지금도 이단(異端)들은 구약 성경의 절기 지키기를 가지고 정통교회를 공격하고, 성경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빌미로 삼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가?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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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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