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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년기획] 한국교회가 기도해야 할 가장 우선적 문제는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는 수년 전 보수계 교단연합단체인 한기총의 분열로 사회적 지도력을 상실한지 오래다. 전혀 교계 지도자감이 안되는 각 교단 인사들이 자파 교단의 총회장 자리 하나씩 차지한 경력을 빌미로 돈 몇 푼씩 들고 나와 교계연합단체에서교권행사를 하다가 결국 연합단체도 망가뜨리고, 자신도 망해갔다. 이후 한교연과 한교총이 연이어 발족했으나, 어떤 연합체도 교계의 대표성을 담보하지는 못했다. 거기에다가 코로나로 인한 정부의 교회에 대한 강압조치로 한국교회는 회복키 어려운 폐해를 입었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는 한국교회뿐 아니라, 우리사회의 통합과 개혁에 커다란 손실로 작용하게 될 것이 명백하다. 따라서 2024년 새해를?열면서 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기도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어떤 것인지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그 중 하나가 곧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이다. 지금은 22대 총선을 앞두고 있어 우리사회 전반이 정치권에 휘둘리고 있지만, 선거가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여기에는 특히 한국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사회에 오랜 전통을 가진 종교로서 불교와 유교가 기능하고 있고, 한국 천주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큰 세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역시 사회적 지도력으로 볼 때 기독교(개신교)에 비견하기 어렵다. 현재 한국 기독교인들은 우리사회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전반에 지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사회는 기독교 외에 어떤 종교적 이념이나 정치 이념도, 사회 개혁이나 통합 이념으로 내세울 만한 사상이 없다. 한국 기독교는 초기부터 근대화와 사회개혁을 과감히 지향해 왔다. 근대 학교교육을 통한 인재양성과 서구 선진문화의 창구역할을 통한 사회지도자 양성, 사회개혁에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는 전래의 가치관과 풍속을 타파하는 일 등은 오늘날 우리사회를 선진국으로 이끄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한국기독교는 70-80년대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통한 사회정의와 시대적 양심의 기수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런데 왜 작금에 이르러 사회로부터 기독교가 외면 당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먼저 우리 내면에 있다. 첫째는 교단의 분열이다. 한국기독교는 미국의 이민교회를 모태로 하기 때문에 서구에서 발생한 많은 '교파주의' 교회가 이식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교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 교파에서 수많은 '교단'이 나뉘었다는 것이다. 같은 교리, 같은 신학,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교파에서 수백 개의 교단으로 갈라진 교회는 세계에서 한국교회 밖에 없다. 특히 한국장로교회는 그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 그러다보니 교단연합단체도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둘째는 초기 사회개혁의 명분으로 삼아 왔던 미신이 교회 안에 기복주의로 변질해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점이다. 기복주의는 사회개혁이나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독선적 경직성과 부패현상에 대해서도 무감각한 태도를 보인다.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무서운 적이다. 셋째는 이런 문제를 비판하고 개혁하는 신학적 활동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현재 교계에는 신학대학이 60여 개에 이르고,여기에 종사하는 신학자만 해도 1000여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작금의 한국 신학계는 교단신학의 교권적 강화에 기여할 뿐, 교회개혁에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모두 이들 신학교가 교단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보수주의 신앙에 입각한 교회제일주의로 나타나 정통과 다른 체험은 무조건 부정되는 이단시비로 발전하게 되고, 대사회적으로는 현대사회의 규범을 무시하는 교회지상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결국 한국교회로 하여금 사회개혁에 지도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마땅히 통일한국의 사상적 토대를 기독교에서 찾아야 하는데, 기독교마저 갈갈이 짖어져 있으니 그 기대가 난망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교회관' 바뀌어야 한다 한국기독교에는 6만여 개가 넘는 교회당과 3만 개가 넘는 잘 건축된 예배당, 수백억원씩 들여서 지은 산속의 기도원, 20만이 넘는 안수받은 목사, 1천만에 이르는 신도가 있다. 이것만 보면 한국기독교는 탄탄대로를 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의 흥망은 그런 것과 상관 없이 갑자기 나타난다. 오래 전에 영국에서 '교회'가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일이 있다. 영국은 성공회와 침례교와 감리교와 구세구과 퀘이커의 고향이고, 청교도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낳은 위대한 신앙전통을 가진 기독교 나라이다. 이런 사회에서 기독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고는 세계교회를 놀라게 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한국기독교는 무엇보다 교회본질의 회복이 요구되고 있다. 그래야만 500년, 1000년의 한국교회를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첫째는 교회(에클레시아)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다는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교회를 정의하고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로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정의와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무리이다. 우리 자신인 것이다. 절대로 건축물이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기독교는 입으로는 교회란 에배를 위해 모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면서도, 그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그 공간을 '교회' 또는 '성전'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교인들이 힘에 겹도록 대출을 받아서라도 땅을 사고 예배당을 짓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예배당 크기가 마치 그 교회 신도들의 신앙의 척도인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교회'와 '교회당'이 구분되지 않아 교회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 교회는 그 교회당에 모이는 믿는 사람들이다. 한국천주교는 '교회'와 '성당'을 명확히 구분한다. 성당은 교인들이 모여 미사를 드리는 곳이다. 중국교회는 '교회'와 '교당'을 구분한다. 그런데 한국기독교는 '교회'와 '교회당'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당을 팔면서도 교회를 판다고 한다. 둘째는 설교자들의 기복적 메시지의 문제이다. 작금 한국교계에서 괘 이름있는 목사들의 설교에서도 기복과 축복만 강조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복음의 자유에 대한 말씀을 듣기 어렵다. 누가 어떻게 예수를 잘 믿어 얼마큼 큰 돈을 벌어 예배당을 잘 지었다. 누가 어떤 중병에 걸렸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기적같이 나았다. 믿는 자는 이런 축복을 받는다는 따위만 강조된다. 이런 것은 설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이성과 지성은 무시된 채 맹신과 광신이 믿음인양 떠벌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인류 지성사를 이끌어온 기독교의 논리와 지성은 간데 없고 무지와 억지만 난무하는 꼴이다. 이것이 한국기독교의 수준이라면 한국교회도 오래지 않아 우리사회에서 영국교회처럼 '교회가 사라지는 때'를 맞이하게 될것이라는 우려를 떨칠 수가 없다. 한국기독교 교회관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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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5
  • [학술]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채택 90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과제
    한국기독교의 사회운동은 그리스도인의 양심 앞에 주어진 시대의 요구 이 글은 지난 14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공동개최한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제4차 학술심포지엄에서 강혁 박사가 발제한 "<사회신조>를 통해 본 197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 사회운동-그 의미와 과제" 중 주요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본고는 1932년 9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朝鮮耶蘇敎聯合共議會) 제9차 총회가 가결한 '사회신조(社會信條)'의 맥락 안에서 1970년대 이후 한국기독교 사회운동의 노정을 성찰하고자 한다. 1. 1970년대 개신교 사회운동 1)도시산업선교 산업선교는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2회 총회가 공장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산업전도' 착수를 결의하여 서울 영등포지역에서 활동한데서 시작한다.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등 5개 개신교 교단을 중심으로 계몽·홍보활동, 선교기구의 설립, 공장목회, 평신도 조직 육성, 실무자 양성, 근로현장에 대한 조사·연구활동 등을 주도했다. 초기 산업전도는 순수 복음전도에 그 초점이 맞춰졌다. 산업전도 실무자는 노동자에게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고 노동윤리를 내면화 하여 열심히 일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그러나 1960년대 접어들면서 기존의 산업전도 방식은 한계에 달했고, 산업전도 실무자들은 고용주 편에 서 있는 세력으로 인식되어 노동자들에게 외면 당했다. 이후 1968년에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제4차 총회에서 정리된 ‘하나님 선교(Missio Dei)’신학의 영향 아래 산업 전도는 '도시산업선교'로 전환 되어 복음화와 사회정의를 동시에 추구하는 선교정책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도시산업선교가 노동자와 빈민 등 근대화에서 소외된 민중의 권익을 대변하게 되자 저임금 정책 아래서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을 추진하던 기업이나 정치권력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통한 직접적인 탄압과 함께 여론 및 교회지도자들을 동원하여 도시산업선교의 활동을 방해했다. 산업선교에 대한 정부의 공격과 용공활동으로의 매도에 대응하여 1978년 9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산업선교 신학선언”을 발표하여 산업선교의 신학적 근거를 밝히고,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을 선한 사마리인의 정신을 따라 시정하려는 선교활동임을 천명했다. 도시산업선교 활동은 자연스레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특히 1979년 8월 YH무역사건은 박정희 정권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 정부는 도시산업선교를 YH사건의 배후로 지목하고 산업선교의 실무목사들이 근로자들을 선동하였다고 매도하였다. 2) 도시빈민선교와 농민선교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과 함께 1970/80년대 한국교회의 사회운동의 노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도시빈민선교와 농민선교이다. 도시빈민선교는 1969년 8월 미국 연합장로회 선교사 화이트(H.White)가 내한하여 연세대학교 내에‘도시문제연구소’를 만들고, 노정현 박사가 소장이 되어 도시문제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더불어 실무자 훈련에 주력함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대 경제호황으로 이루어진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농촌 노동자들은 무작정 도시로 몰려들었다. 1967년 당시 서울에 무허가 건물은 23만3천 가구였고, 이 건물에 거주하는 도시빈민은 127만 명에 달했다. 1970년 초가 되자 당시 서울 인구 600만 명 가운데 대략 30%가 무허가 판자촌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정부는 제대로 된 행정계획도 없이 대규모의 판자촌을 철거했고, 약 10만 명의 철거민들이 급조된 위성도시인 경기도 성남 등으로 강제이주 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약속과는 달리 그 어떤 주변시설도 없이 산 중턱에 천막만 들어찬 이주단지의 열약함에 분노한 이들은 1971년 8월 10일 소위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불리는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를 계기로 1971년 9월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서울의 빈민지역이었던 답십리에 센터가 설립되는 등 도시빈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는 빈민지역에 가서 일할 실무자를 파송하여 청계천 철거민 이주, 통일상가 세금문제, 지역사회조직과 훈련들을 실시했으며(1971년), 이듬해에는 광주(성남)단지, 인천동구지역, 뚝방지역(송정동), 남대문 시장지구에 실무자를 각각 선정하여 본격적인 도시선교를 시작했다. 노동력의 도시 집중화와 더불어 수출품의 단가를 낮추기 위해 정부가 시행한 저곡가 정책은 자연스레 농촌 경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러한 농촌의 현실에 먼저 관심을 가진 곳은 천주교였다. 천주교는 1966년 가톨릭농민회를 조직하여 지역별 활동을 개시하였고, 1972년에는 전국단위의 활동을 시작했다. 개신교는 1974년부터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농민교육을 실시하여 농민운동가들의 이론적 기반을 튼튼하게 했다. 1982년 3월에는 전국적 조직을 갖춘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이 창설되어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해나갔다. 3) 인권 및 민주화 운동 김상근은 한국개신교가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유신개헌 반대 투쟁에 나섬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유신체제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영구집권을 위한 반헌법적 권력남용이었다. 서릿발 치는 유신체제에 맨 처음 저항한 것은 개신교 내의 젊은 진보적 저항세력들이었다. 4월 22일 남산부활절연합예배 당시 수도권 도시선교위원장 박형규목사, 실무자 권호경, 김동완 전도사 등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의 학생 나상기, 황인성, 정명기, 이상윤, 서창석 등이 민주회복과 언론자유, 현 정부의 회개를 촉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며,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전단을 배포했다. 5월 20일에는 <한국그리스도인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기독교 민주화·인권운동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 선언에서 “유신은 국민에 대한 반역”으로 규정하고,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국민의 요청임과 동시에 교회의 역사적 전통이라고 천명한다. 이후 6월 말이 되자 남산부활절연합예배 관련자 전원이 내란음모죄로 구속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물론 가맹 교단들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구속자들의 조기석방을 위해 조사 및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기도회 등을 통해 민주화의 대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각 신학대학 교수·학생 및 각 교회 청년들이 앞장서 구속자 석방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정부에 항의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인권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이에 대한 교회차원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3년 11월 23일과 24일 신앙과 인권협의회를 열어‘인권선언’을 채택했다. 인권탄압의 해결에 기독교인들이 나설 것을 촉구한 이 선언은, 인권 확립을 위해 교회가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이 무렵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일어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었다. 이에 박정희정권은 1974년 1월 새해 벽두에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와 제2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에 의하면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거나“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모든 행위를 금하였다. 같은 해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다. 학생들은 민청학련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민중·민족·민주선언”등을 발표하고 연합시위를 벌인다는 계획을 가졌는데 이것이 사전에 당국에 알려져 관련자 1,024명이 점거되었고, 이중 8명이사형언도를 받고, 수십 명이 무기징역부터 15-20년의 중형을 선고 받았다. 정부의 인권 탄압이 심해지고 기독교인 구속자가 늘어나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4년 5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성서적 신앙”에 의거하여 “인권의 유린을 방지 또는 제거하는 책임”을 수행할 인권위원회를 창설하였다. 구속자 석방과 유신정권에 대한 교회저항이 들불처럼 타오르자 각 교단들도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1974년 9월 한국기독교장로회 제59회 총회가 선언서를 발표한 것을 비롯해서 장로교(통합) 제59회 총회가 시국선언문을 발표했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제12회 총회도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1974년 12월엔 대한예수교장로교(통합) 총회장의 이름으로 시국과 관련된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는 4개 항목의 요구사항이 담겨 있었다. 첫째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인사들에 대한 조속한 사면, 둘째는 강제 추방된 미국 감리회 선교동역자 죠지 오글 목사에 대한 추방령을 해제하고 그의 재입국 선교활동을 허용할 것, 셋째는 국론의 분열을 방지하고 국민의 능동적인 총화를 성취하기 위해 음성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정보기관의 종교사찰 행위와 공포분위기 조성 등을 즉각 중지할 것, 넷째는 창조적이고 양심적이며 건설적인 비판이 탄압 받지 않는 자유민주사회가 회복되어야 할 것을 촉구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교회의 인권운동 세력이 서릿발 날리는 독재정권의 탄압을 견딜 수 있었던 지원은 WCC와 독일교회 그리고 기타 해외교회들과 재외 한인동포 기독인들로부터의 지지였다. 2. 한국교회의 통일·화해운동 1980년대 후반은 국내외적으로 큰 변혁의 시기였다. 국제적으로는 1985년부터 본격화된 소련의 개혁노선이 대내적 페레스트로이카와 대외적 평화 전략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사회주의권의 해체와 탈냉전을 촉발했다. 내부적으로는 1987년 6월 항쟁을 통한 직선제 개헌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사회에 자신감이 넘치고, 통일운동이 활성화된 시기였다. 한국전쟁과 분단 이후 1980년 이전까지 통일운동은 오직 정부의 몫이었다. 남과 북이 서로 다를 것 없이 국가안보라는 미명하에 통일에 대한 모든 정보는 국가가 독점했고, 독점된 정보를 바탕으로 정부는 상대를 악마화 하며,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유지했다. 한국교회 역시 빈약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부의 통일정책을 따라 갈 수밖에 없었고, 과거 전쟁의 기억 안에서 반공적인 성격을 유지했다. 그러나 1980년대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그간 진행되었던 한국교회의 통일에 대한 관점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반공의 첨병으로 그 역할을 감당했던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의 연대를 통해 북한교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국내에 소개했고, 통일에 대한 제한된 정보를 당국이 아닌 세계교회를 통해서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8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독일개신교회연합회(EKD)가 제4차 에큐메니컬협의회을 개최하여 한반도 통일 문제를 화두로 삼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1981년과 1982년 양국 정부의 통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해외동포 기독교인들 간에 만남이 주선되었다. 1차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2차는 헬싱키에서 만나 남북 화해와 통일 그리고 통일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자세에 대해서 나눔을 가졌다. 그러나 아직 국내의 사회 정치 상황에서 통일을 언급하기엔 적절치 않았다. 그러나 세계교회는 계속해서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꾸준히 언급했다. 1984년 10월 세계교회협의회는 ‘동북아시아 정의·평화 협의회’를 개최하여 한국기독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남북 양 정부 역시 이에 호응하여 남북 이산가족찾기와 고향 방문 등을 추진했다. 1986년 9월 2일에서 5일까지 세계교회협의회는 스위스 글리온(Glion)에서 ‘제1차 남북기독자협의회’를 주관했다. 남북의 교회 대표단은 글리온에서 함께 만나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의 성서적·신학적 기반”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가졌다. 제1차 글리온 회의’는 서로에 대해 어떤 특정 입장을 대한 결론을 도출하기 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만남을 통한 교류를 넓혀 가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특별히 마지막 날에 남북 교회의 대표들이 함께 성만찬을 나누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고, 한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보듬는 시간을 가졌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약 2년의 시간을 준비하여 1988년 11월 23일에서 25일까지 남북교회는 ‘제2차 글리온회의’를 가졌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약 2년 동안 준비 기간을 가져 1988년 2월 29일 제37차 총회에서 소위 '88선언'으로 명명되는‘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선언’을 발표하여 채택했다. 이 선언서는 먼저 정의와 평화를 위한 한국교회의 선교적 전통을 밝히고, 이후 민족분단의 현실에 대해서 논한다. 또한 분단체제 안에서 상대방에 대하여 깊고 오랜 증오와 적개심을 품어왔던 일이 우리의 죄임을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고백한다. 이후 민족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기본원칙을 선언하며, 남북한 정부에 대한 한국교회의 건의와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과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특히 민족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기본원칙에서 선언문은 그 원칙을 1972년 남북 간에 최초로 합의된 7·4공동성명에 나타나는 1)자주 2)평화 3)사상·이념·제도를 초월한 민족적 대단결의 3대 정신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기본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밝힌다.‘제2차 글리온회의’는 1차와는 달리 서로에 대한 친밀도가 있는 상황에 있었고, 나눔 역시 화기애애했다‘제2차 글리온회의’를 통해 남북교회는 서로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글리온 선언을 발표했다. 서로의 주장과 의견이 팽팽히 맞서 선언문의 도출까지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선언을 통하여 남북교회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선언이었다. 본 선언문은 서론에서 1986년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채택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성명서”와 1988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 및 동년 4월 인천의 “한(조선)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교 세계대회”의 메시지 등에 나타난 정신과 합의사항 등에 대한 지지를 표한다. 이후 신앙의 결단으로 한(조선)민족으로 평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연대할 것을 다짐한다. 이후 8가지 건의를 통해 남북교회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꾸준히 노력 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한국기독교회협의회가“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을 발표하자 다수의 개신교 교단과 단체가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개중에는 남북교회의 대표들이 만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다양한 통로를 통하여 만남을 무산시키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가 되자 한국 개신교의 보수성향의 교단들이 하나·둘 북한 선교를 시작했다. 짧은 기간 안에서 고도의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뤘지만,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출렁인다. 1932년에 그랬듯, 1970년대 이후와 21세기의 사반세기가 다가오는 현재까지 그 출렁임이 변함없다. 늘 인권의 사각자리에 놓인 이들과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억압되고, 절망한다. 1932년 9월에 채택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사회신조〉는 채택 이후 오늘날까지 무효화되지 않았다. 즉, 한국교회의 대 사회적 신조로서 그 법적 유효성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는 한국교회에 있어 근대 인권과 노동에 있어서 기본규범이 될 뿐 아니라, 시대의 요구 안에서 재해석되어 지며, 그 정신을 발전시킬 한국교회의 거대한 실천적 믿음의 유산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22-09-27
  • [기획]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교회론 바로 세워 교회분쟁 줄여야 한국교회 희망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남긴 유일한 기관… 분쟁이나 교권 행사는 큰 죄 예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한 교회(에클레시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남긴 유일한 기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는 역사적 산물이나 종교적 결집체인 세상의 여타 종교기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교회는 창세전에 작정된 하나님의 공동체이다. 기독교인들마저도 교회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마치 교회를 기복(祈福)을 위한 ‘세속적 종교’ 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그것이다. ‘예수 믿고 만사형통’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이다. 그러면 예수의 믿음으로 인해 고난 받는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또 예수로 인한 순교자는 무엇인가? 성경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순교자를 가장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마 5:10, 벧전 3:14, 계 20:6). 그러므로 교회는 인생의 진정한 복(福)에 대한 개념을 전혀 달리하는 기관이다. 첫째, 성경은 이 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비밀을 맡은 기관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신 것(행 20:28),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딤전 3:15),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고전 1:2), 모든 만물 위에 있는 것(엡 1:22), 예수 그리스도의 몸(엡 1:23), 만세와 만대에 감취었던 비밀(골 1:26), 최후의 승리자(계 21장)라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어떠한 여타 종교기관과 다른 것이 분명하다.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온 것으로 구성된다. 로마서 5장 14절은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는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했다. 즉 첫 사람 아담은 ‘오실 자’마지막 아담의 표상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 사람 아담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그 신부가 된 것 같이,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신부도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창세기 2장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며 하나님이 그 갈빗대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21-23). 첫사람 아담은 흙으로 지어졌으나, 그 배필 하와는 흙에서 지어진 것이 아니고 아담의 몸에서 나온 것으로 지어졌다. 세상의 모든 들짐승이나 공중의 각종 새들은 모두 흙으로 지어진 것이고, 첫사람 아담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따라서 흙으로 지어진 것들은 그 어떤 것도 아담의 배필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로 하와를 지었다. 아담의 배필은 오직 아담의 몸에서 나온 것만이 그 자격이 있다. 그리고 “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24)고 했다. 에베소서 5장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하노라”(24-32)라고 한다. 즉 첫사람 아담이 그의 몸에서 나온 것으로 만들어진 하와만이 배필로 삼은 것 같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온 것으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온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의 몸에서 나온 물과 피이다.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물과 피로 구성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한1서 5:5-7).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물과 피로만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온 것이 아니면 그것이 어떤 이름을 가졌든, 또는 공교히 꾸민 교리를 내세우든, 그리스도의 교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 교회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자신을 '거룩한 보편적 교회'(catholic church)라고 불렀다. 이 보편적 교회에는 아무런 차별이나 구별이 없다. 종이나 자주자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여자나 남자나 차별이 없다. 누구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 교회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 보편적 교회는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구분된다. “가시적 교회는 선택된 사람들의 전체 회원으로서 구성되었으며, 그들은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 아래 모여서 하나가 되었고, 또 하나이며, 하나가 될 것이다.” “그 교회는 모든 것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몸이고 충만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국이며 하나님의 집이고 가족이다. 이 교회 밖에는 구원의 정상적인 가능성이 없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재25장). 또 이 보편적 교회는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기관이다. 하나님은 죄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태초부터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인간과 언약을 맺었다. 그 언약은 때때로 인간 편에서 배신도 있었지만 파기된 적은 없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1-3)고 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증언하는 기관이 곧 교회이다. 교회는 이처럼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이다. 그래서 인류의 삶에 교회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넷째, 교회의 분쟁은 대부분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서 온다.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 교회를 놓고 분쟁하거나 교권을 행사하는 죄 또한 얼마나 크겠는가? 오늘날 교회의 분쟁은 모두 교회론이 잘못된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교회론이 바로 되면 교회가 분쟁할 수가 없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첫사람 아담의 죄가 불순중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더욱 확연해 진다. 그러므로 목화자들은 바른 교회론에 대한 설교를 자주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성령강림, 재림과 심판이라는 교회론을 구성하는 내용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세와 만대에 감취었던 하나님의 비밀임을 알고, 그리스도 안의 영원한 생명을 알았다. 초대교회가 무서운 박해 아래서 수많은 순교자를 내면서도 끈질긴 생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설교에 기인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승천과 재림과 심판이 없는 설교는 아무런 생명도 능력도 없는 종교강화(宗敎講話)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가짜 설교가 난무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무슨 기복신(祈福神)으로 알고 세상에서 만사형통만을 역설하는 설교는 교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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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4
  • 학술 / 한국전쟁의 발발과 독일 개신교회의 재무장 논쟁
    재무장 지지측 가톨릭과 반대측 개신교 사이에 심한 분열 드러내 EKD “기독교가 적대감을 조장하고 전쟁 준비에 선전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명확한 반대” 본고는 강혁 박사의 독일 튀빙엔대학 교회사 박사학위 논문으로, 지난 11일 서울 소망교회에서 개최된 제150차 한국교회사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제1회 소망교회 후원 '연구지원 공모전'에서 우수논문으로 수상한 논문이다. <편집자 주>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현실 안에서, ‘교회가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필요하다. 이 동일한 질문이 1950년 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된 ‘독일개신교회’ (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EKD)에서 제기되었다. 이 질문은 곧바로 발발한 한국전쟁에 대한 실질적인 대응을 놓고, ‘평화를 위한 교회의 사회적 책무’와 ‘정치적 여론’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들을 일으켰다. 이 논쟁들이 1950년 가을 EKD의 ‘서독 재무장’ 논쟁에서 구체화 되었다. 본 연구는 1950년 서독 사회 안에서 한국전쟁 발발의 영향을 추적하고, 특히 서독 개신교가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정당하게 수행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검토한다. 한국전쟁발발과 서독의 여론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전 세계를 크게 뒤흔들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한국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은 서독 언론을 통해 빠르게 퍼졌고, 서독 국민들 사이에 큰 공포와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냉전 시기 한국전쟁과 서독의 안보정책을 연구한 마이(Gunther Mai)는 여론을 빌어 당시의 충격에 대해 “한국전쟁은 서방을 마치 ‘번개’처럼 강타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의 근간’을 뒤흔들었다”고 증언했다. 서독의 많은 신문들이 1945년 이후 분단국가인 한국과 독일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동독과 서독에서 한국전쟁 발발 후 첫 몇 주 동안 생필품 사재기가 극성을 부렸다. 또한 베를린의 아이들은 “한국, 한국, 전쟁이 다가오네.(Korea, Korea, der Krieg kommt immer nher.)”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는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공포를 담고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서독의 안보 정책 독일연방정부의 첫 반응 역시 서독의 안보에 대한 우려였다. 당시 아데나워 총리는 소련이 한국에서처럼 분단된 독일에서도 전쟁을 벌일 수 있다고 공공연히 언급했다. 1950년 8월 11일, 윈스턴 처칠은 유럽 평의회자문회의에서 유럽국방장관을 사령관으로 독일군이 참여하는 유럽군대의 구성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세계대전 이후 해체되었던 독일군의 재건과 무장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서독 총리 아데나워는 한국전쟁 발발을 기회로 독일군을 재건하여 자국의 안보를 자신들의 손으로 지키고, 이로서 서독이 패전국의 굴레를 벗고 서유럽 공동체의 일원으로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길 원했다. 그는 9월 초, 뉴욕에서 열린 미국, 영국, 프랑스 외무장관 회의에, 자신의 서독 재무장정책을 담은 ‘서독의 안보에 관한 건의서’를 비밀리에 전달했다. 그러나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내각 안에 큰 논란이 일어났다. 총리의 독단적인 결정에 반대하여 내무장관 하이네만은 공개적으로 사임을 선언했다. 총리 아데나워와 내무장관 하이네만의 갈등은 개신교 교회 내부의 재무장 논쟁의 여론에도 커다란 파장을 불러왔다. 나치에 대항한 고백교회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하이네만은 당시 EKD총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고, 내각 안에서 개신교를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 독일 가톨릭교회의 지지를 받는 총리 아데나워와 독일 개신교를 대표하는 하이네만의 갈등은 단순히 정치적 갈등을 넘어 사회적, 종교적 갈등으로 발화될 가능성도 안고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과 서독의 재무장을 둘러싼 EKD 안에서의 반응과 논쟁 한국전쟁의 발발과 그로 인한 서독의 안보논쟁은 EKD에 있어서 1948년 창설 이후 꾸준히 강조되었던 교회의 평화의지에 대한 실질적인 시험과 같았다. EKD 내부에도 두 가지 반대 입장이 팽팽히 맞섰다. 한쪽은 안보상의 이유로 서독이 재무장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이었다. 서독의 재무장이 안보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확신한 개신교 주요 인사로는 EKD의 회장이자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주교회의 감독이었던 오토 디벨리우스 (Otto Dibelius) 목사가 있다. 그는 BBC라디오 연설에서 한국전쟁 발발 이후 독일의 안보에 대해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 독일은 강대국들의 계획에 무력하게 노출되어, 유럽에서의 새로운 전쟁의 주요 전장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비단 디벨리우스 감독뿐 아니라 한국전쟁이라는 특수성 아래서 EKD의 다수의 회원들이 서독의 재무장을 통한 안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EKD의 주요 인사들의 상당수는 니뮐러 목사의 주장을 지지했다. 헬무트 골비쳐(Helmut Gollwitzer)는 “강대국들이 독일을 대표 하지도 않고, 독일이 그들과 무조건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고 주장하며, 서구 강대국들의 일방적인 논리에 서독이 휩쓸리지 말라고 촉구했다. 이와 함께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갈등은 의미가 없으므로, 기독교인들은 ‘화해의 사람들’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많은 이들이 EKD위원회가 이와 같은 교회 내의 분쟁에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이에 에센의 교회의 날 행사에 모인 EKD위원회는 한국전쟁에 직접 관여한 UN에 평화를 호소하고, 독일의 재무장 문제에 대해 교회의 입장을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먼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으며,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연대하고 계심을 선포했다. 또한 두려움은 불신앙이며, 전쟁의 위험을 더 가까이 가져 올 뿐이므로 극동의 전쟁 소식에 흔들리지 말 것을 촉구했다. 둘째로 한국전쟁을 언급하며 한 나라에 강대국들이 임의로 경계를 긋는 것만큼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 없다고 언급했다. 독일을 포함한 모든 곳에서 전쟁과 폭력 그리고 분열을 종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는 정치세력들 간의 평화 약속이 얼마나 진정성 있게 지켜질 수 있는 지에 달려 있으며, 각 나라들은 질서와 평화를 훼손하려는 자들에게 맞서 적절한 경찰 보호가 필요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선한 양심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표현은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UN의 경찰활동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하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계속해서 EKD는 독일의 재무장과 관련하여 서방의 입장도, 동구권의 입장도 지지할 수 없으며, 절망적인 군비 경쟁을 끝내고, 정치적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강대국들에게 계속해서 호소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을 해치지 않을 자유가 주어져야 함을 강조했다. 끝으로 이 성명은 다음의 단락으로 EKD의 모든 회원 교회들와 신자들에게 권면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평화를 상징하며, 교회는 기독교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평화를 유지하도록 도울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세계의 어떤 강대국도 자국민의 단호한 내부 방어에 부딪친다면 감히 평화를 가볍게 깨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짓 선전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을 증오의 영으로 몰아넣는 모든 시도에 단호히 맞서고, 전쟁 선동이나 두려움에 의한 정신 불안에 빠지지 않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특히 심하게 분열된 민족들에게 해당됩니다. 독일 형제자매 여러분, 철의 장막 너머에 대해서도 서로에 대해 좋은 말을 하십시오! 서로를 신뢰하고 교제를 유지하십시오! 독일인이 독일인을 쏴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직하게 평화를 구하는 곳에서 하나님은 그의 축복을 보류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에게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손을 높이 들어 올립니다. 주 하나님, 우리 땅에 평화를 주소서! 이 모든 고통 받는 세상에 평화를 주소서!” 1950년 10월 초가 되자 EKD 내부의 재무장 반대운동은 더욱 강력해졌다. 니뮐러목사와 고백교회 대표자들은 1950년 10월 4일, 서독의 재무장을 옹호하는 아데나워 총리의 정치적 행보에 반대하는 두 개의 공개서한과 성명을 공포했다. 아데나워에게 보내는 공개편지에서 니뮐러는 개신교 교인들은 어떤 재무장 정책에도 실질적으로 반대하며, 서독의 기본법이 그들에게 이 권리를 부여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재무장이 전쟁 위험을 증가시킬 것이기 때문에 이 정책은 연방 영토 안에 거주하는 모든 국민이 투표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기본법의 규정으로 인해 이러한 설문조사가 국민투표로 실시될 수 없다면, 내각에 대한 새로운 신임투표를 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개신교 안팎에서 니뮐러의 입장에 대한 지지와 비판이 터져 나왔고, EKD와 주교회들의 여러 위원회와 기관들이 이 문제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서독의 언론들도 이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뤘다. 이러한 상반된 견해에도 불구하고 EKD가 동서독 독일인들에게 공통으로 호소하는 내용이 있었다. 첫째는 안보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과 공포가 같은 민족 안에서 증오와 적개심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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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4
  • [성경의 바른 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61]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 (골 1:24)
    바울은 골로새에 가 본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그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 비록 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무슨 자격으로 그들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의 글은 비교적 수준 높은 성경지식과 신학적 이해가 요구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당대에 풍미했던 영지주의 이단 사설이나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부터 골로새 성도들에게 확실한 복음진리를 알려주고 심어주기 위한 변증적인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론적인 글을 썼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너희를 위하여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아마도 1:19에 언급한 말씀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이 아들 안에 있기를 기뻐하시고,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시어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목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골 1:19).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신 것은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화평을 이루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화목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화평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카랏소”(ἀποκαλλάσσω), 화목이라는 말은 “에이레노포이에오”(είπηνοποιέω)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아포칼라쏘”(화평)이라는 말은 사실 서로 화해한다(reconcile)는 의미이고, “에이레노포이에오”는 평화를 만든다, 곧 화목한다는 의미이다. 13절과 2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향하여 “어둠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 “전에 악한 행위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 되었던 너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원수 노릇하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반역과 죄 안에 있던 자들,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어둠과 죄 아래 있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죄 값으로 내주고 이 죄인들과 화해하고 화목하려는 계획을 세우셨다.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로 말미암아 화해와 화목을 이루려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계획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이다. 이 경륜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 경륜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에게 알려주신 것이 바로 계시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ESV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알려지게 하기 위하여” (to make the word of God fully known)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 “경륜”이라는 말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마치 연극의 연출자처럼 역사의 무대 위에 시대와 세대에 따라 그가 계획하신 사건과 그 사건의 주인공을 배분하고 배치하여 역사의 흐름을 인도하고, 관리하며, 감독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헬라어 “오이코노미아”(οίκονομία) 라는 말은 “분배”(distribution)라는 말로도 번역한다. 역사에서 역할을 분배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두신 경륜은 무엇인가?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고 복음을 증거한 예루살렘 교회는 나날이 성장하였다.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빵을 같이 떼고, 함께 기도하였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복되고 평화로운 교회, 결코 떠나고 싶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잊은 것 같다. 바로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역사의 무대로 등장시킨다. 사울은 젊었으나 정통 유대인으로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으며, 당대의 저명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들어가 성경과 신학에 뛰어난 학식을 가진 종교 지도자였다. 그의 언행은 흠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으며, 열열한 유대주의자였다. 따라서 그는 나사렛 예수와 그를 쫓는 자들은 반 유대주의자로 간주하고 이들을 소탕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으로 아는 자였다. 결국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인 집사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데 앞장선 사람이었고, 그 사건에 이은 그의 교회에 대한 핍박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하게 만들었다.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로 피난 온 제자들은 피난처에서 오히려 복음을 증거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스데반의 순교가 제자들의 복음사역을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사마리아로 확장시켰다. 그런데 사울은 제자들에 대한 핍박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고, 제자들이 피신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까지 가서 이들을 체포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의 망나니 짓을 중지시키고, 그의 눈을 멀게한 가운데, 그를 그의 일꾼으로 부르셨다. 아나니아의 입을 빌어 “(가라) 이 사람은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파하도록 내가 택한 그릇이다”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을 고난을 겪어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일 것이다.”고 말씀하신다(행 9:15-16). 하나님께서는 사울이라는 이 살인자를 그의 이름을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택한 그릇”으로, 그의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 “고난의 종”이 될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자기의 제자를 죽이고, 자기의 교회를 파괴하고, 핍박하던 이 원수를 오히려 자기의 이름을 전파하는 그릇으로 택하시고, 그의 제자들을 핍박하어 고향을 떠나 전 세계의 나그네로 내 몰았던 이 폭력배의 우두머리를 이제는 반대로 그리스도, 그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고난의 종으로 쓰시겠다는 것이다. 이제는 사람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 이름을 붙들고,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이었다. 사울이라는 청년은 결국 변하여 새 사람되고, 온 세계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할 때에, 이제 그가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되었다. 골 1:24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위하여 당하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 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오히려 괴로움을 기쁘게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입장이 예전과 완전히 바뀐 상황이 되었다. 헬라어 원문은 “파데마”(παθημα)라는 말은 “괴로움”이라는 의미보다는 고난(suffering)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는 말이다. 바울은 왜 고난을 당한다는 것인가?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그의) 육체에 체운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를 그분의 몸이라고 말한다. 앞에 18절에서 “그분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죄인들을 위한 대속으로서 충분하지 못하여 그것을 바울이 대신 채운다는 말인가? 그것은 말이 안 되는 해석이다. 바울이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모진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하시며, 심지어 그의 목숨을 바치기까지 당한 그 고난이 우리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여, 마치 바울이 예수님의 부족한 것을 자기가 당하는 고난으로 계속 채우는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 것이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 3:22-24)고 선언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하셨다. 예수께서 더 이상 우리의 속죄를 위하여 하실 일이 없다. 또한 히브리서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가 되기 위하여 더 이상의 예수님의 고난이나 공적이 필요치 않는 “단번”의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뜻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을 통하여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 제물을 드리지만 그것들은 결코 죄를 없앨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한번의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의 오른 쪽에 앉으셔서 이후로는 자신들의 원수들이 자신의 발 받침대가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분은 한 번의 제사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다.”(히 10:10-14. 참조 히 9:11-12, 24-26). 그리스도의 속죄는 흠없고 점없은 그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반복해서 고난을 당해야 필요가 없고, 예수님 이외의 다른 어느 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덧붙일 것도 없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하여 한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섬김에 관한 말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 창조를 위하여 하실 일을 다 하셨다. 이제 남은 일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몫이다. 예수께서는 바울을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부르실 때에, 땅에 엎드린 사울을 향하여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고 물으시고, 그의 정체를 묻는 사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고 대답하셨다.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울이 자기를 핍박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사울이 핍박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지, 예수님이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사울이 예수님 자신을 핍박하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바울은 앞에서 그리스도를 설명하며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일뿐만 아니라 “또 그분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골 1:18)고 말하고, 에베소 성도들에게도 교회는 그분은 교회의 머리리시고, 교회는 그분의 몸이라고 가르친다(엡 1:22-23). 따라서 교회가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당하는 고난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고난을 당하고, 죽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땅끝까지 가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가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지상명령을 주셨다(마 28:16-20). 선지자적 사명을 주셨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대언한 말씀을 해석해주고, 해석한 말씀을 적용하여 지키도록 가르치는 자이다. 오순절이 되어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선지자로 세운 제자들의 입에 성령으로 인치심으로 그들을 선지자로서 인증하시고, 선지자의 직분을 위임하셨다. 오순절 성령세례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선지자를 세우는 위임식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기획하신 새 아담을 통하여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새 백성을 모으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사단의 사주를 받은 아담의 후예들은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새나라의 백성들을 모으는 일에 뒷짐찌고 바라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최후에 백기를 들 때까지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님을 대적할 것이다. 성도들은 끊임없이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끝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의 행진에 바울을 부르신 것이고, 우리 성도들을 부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그를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막 9:34).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향한 부르심은 꽃방석을 향한 부르심이 아니라 고난을 향한 부르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야 한다. 코로나19가 온 세상을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 전염병을 구실 삼은 그리스도에 대한 핍박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는 바울의 심정으로 이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 교회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1-07-17
  • [성경의 바른 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60] 선하신 하나님(엡 2:10) 아담, 오실 분의 모형
    바울은 아담을 오실 분의 모형(type)이라고 가르친다(롬 5:14). 아담이 모형이라면 오실 분은 실형(antitype)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살게 되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본문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는 않은 자에게도 사망이 다스렸으니 ...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아담이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거역하여 결국 죽게 되었지만, 아담처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본적도 없고, 따먹지 말라고 명하신 말씀을 들은 적도 없고, 그것을 먹은 적도 없는 자들이 아담처럼 죄인으로 취급되어 아담처럼 죽게 된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왜 세상 사람들이 아담과 같은 죄를 범하지 않았는데도 아담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결국은 죽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 1-2장은 이 사건에 대한 배경과 그 구체적인 전말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이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접근하기 전에 창세기 1-2장은 만물의 기원을 우리에게 말해주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에 어떠한 조직과 질서가 있는 가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창세기 1:1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첫째 날에는 빛을, 둘째 날에는 궁창을, 셋째 날에는 땅과 식물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시어 첫째 날 지으신 빛의 세계를 주관하게 하시고, 다섯째 날에는 둘째 날에 창조하신 궁창의 하늘을 나는 새, 물에서 살 물고기를 창조하시고, 여섯째 날에는 땅위서 살 갖가지 짐승을 창조하신다. 따라서 1-3일에는 빛과 궁창과 땅이라는 영역을 창조하시고, 4-6일에는 이 영역을 다스리고 보살펴야 할 해와 새와 물고기, 그리고 짐승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대신하여 그가 창조하신 모든 세상을 다스릴 그의 대리통치자로 그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드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위로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다음으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 만물을 볼보고 다스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인 사람이 있고, 그리고 사람 아래는 만물이 있다. 특히 창세기 2:1에 “하늘과 땅과 그 만물이 완성되었다”라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끝맺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만물”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콜 츠바암”이라는 특별한 어휘를 쓰고 있다. 이는 “모든 군대”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모든 “군대”가 완성되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그가 지으신 세계를 일종의 군대 조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군대는 상명하복의 위계질서와 책임과 의무가 동반되는 연대성 원리가 작용되는 조직이다. 따라서 이 창조 기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도 하나님-사람-만물이라는 상명하복의 철저한 권위 체계가 있는 조직 세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들어 그의 대리 통치자로 세우시며 모든 나무의 실과는 따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시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절대로 따먹지 말라고 명하심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세계의 위계질서를 세우시는 것이다. 사람이 비록 모든 피조물의 우두머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해서는 안 되며 그 명령을 거역할 때는 죽음이라는 응분의 대가를 치루게 될 것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실과를 따먹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죽음을 선고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시는 것을 보면 사람과 만물 사이에도 대리통치자로서의 권위와 관리자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수반되는 연대성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창 3:17-19). 이와 같은 연대 책임이 수반되는 위계질서는 고대 근동의 종주와 속주 사이의 계약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권위체계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사람-만물의 관계를 특별한 언약관계로 간주한다.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권위를 무시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 아담뿐만 아니라 아담의 수하에 있는 모든 만물이 다 아담과 함께 저주를 받는 것은 아담과 만물이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왜 우리 인간이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아담이 받는 죄벌을 똑같이 받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우리가 창조 시부터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죄의 피를 물려받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아담처럼 죽음의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담과의 안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아담과 함께 죄인이 되고, 사망의 권세 아래 갇히고, 결국은 아담과 함께 죽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 안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으며, 그리하여 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렀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롬 5:12)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담을 본적도 없고, 아담이 지은 죄를 지은 적도 없지만 아담처럼 죄의 누명을 쓰고 죽는다는 것은 억울하지만 우리는 태생부터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억울한 생명들을 살리기 위한 일을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 죽음이라는 언약적 저주를 그가 창조한 만물에게 퍼붓는 것이 어쩌면 너무 잔인하신 잔인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외아들을 희생시키며 죄인들을 살리는 일을 하신다는 것은 죄는 벌하시지만 죄인을 살리시는 그의 정의와 사랑과 인애를 볼 수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죽게 되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살리는 원리를 적용하여 모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려고 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을 세워,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여 새 아담의 순종하는 의 때문에 모든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계획을 염두에 두시고, 아담과 여자와 뱀을 불러놓고, 이들에게 불순종에 대한 죄를 문책하고 죽음을 선포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원복음을 주시는 것이었다(창 3:15-19).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자의 후손에 대한 계시를 역사 가운데 점진적으로 보여주시고, 결국은 처녀의 몸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신다.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보다 아담과 그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또한 목숨을 내놓기만 하면 그가 과연 아담의 죄 값을 완벽하게 대신 치렀는지를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는 반드시 부활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결국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지는 가운데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다(마 27:51-53). 예수님의 죽음이 죄인들의 죄 값을 온전히 치르고 죄로부터 해방시켰음을 증명하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놓인 죄의 장벽을 완전히 허물어지고, 거두어지고, 회복되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무덤에 있는 자들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완전한 죽음과 장사가 확인되기까지 예수께서는 무덤에 사흘간 더 머물러 있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과 부활은 모든 사람을 살리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새 아담으로 세워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세상을 여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는 이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를 염두에 두며, 아담을 가리켜 “오실자의 모형”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성경에서 “모형”(type)이라는 말은 앞으로 이루어질 사건이나 사람 혹은 물건이나 원리 등을 가리키는 말이고 실제로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는 “실형”(antitype)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아담이 모형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실형이고, 새 아담이 되는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며 다스리는 왕이었듯이, 이제 새 아담 예수님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왕이 되시고, 모든 만물의 우두마리가 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이다(골 1:15-20). 우리가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지만 아담과 같은 죄인이 되고, 아담처럼 죽는 것은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 새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롬 8:5).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의 왕이 되는 것이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구원의 문제를 바로 언약적 연대성이라는 틀 안에서 믿고, 이해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1-07-12
  • [성경의 바른 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45] 선하신 하나님(엡 2:10)
    나는 하나님의 고귀한 성품 가운데 가장 으뜸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선”이라고 생각한다. 히브리어로 “토브”(טוב)라고 하는 말은 성경에서 흔히 “선하다”(good), 혹은 “좋다”는 의미로 번역되고 쓰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관심이 많지만, 그의 “선,” “선하심”도 사랑 못지않게 중요한 성품이다. 누가복음 18:18-19에 보면 한 유대교 지도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상속 받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라고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기 자신도 선하다고 칭함 받는 것을 거절하시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유일하게 선하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새겨보면 우리 인간들이 함부로 “선하다”는 말을 써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염두에 두신 선이란 어떤 것일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자, 곧 손이 오그라든 자를 고치시는 사건을 좋은 예로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막3:1-6). 안식일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모든 종교 지도자들과 일반 성도들이 함께 모인 가운데, 이들은 예수님을 죽일 고소 거리를 찾고 있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가 안 고치시는가를 지켜보는 것이다. 고치시는가 못 고치시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고치시는가 안 고치시는가 문제였다. 물론 예수께서는 이러한 상황이 자기 목숨이 걸린 문제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문제를 두고 회피하시지 않고 오히려 도전하셨다. 이들을 향하여 질문을 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목숨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나?”고 물으셨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선과 악” “목숨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이라는 대칭되는 병행구를 사용하여 선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고, 악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선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악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염두에 두고, 우리는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 속에서 바로 선과 악의 개념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의 창조 기사는 6일 동안 매일 창조를 마치시고, 계속 “하나님 보시기기에 좋았다.”라고 말씀하신다. “God saw that it was good.”(וירא אלהים כי טוּב). 여기서 “좋았다”고 번역하고 있는 “토브”라는 말은 “좋다”는 의미도 있지만 “선하다”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 어휘이다. “선하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창조가 다 선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것은 분명의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동산의 모든 질서가 파괴되고, 죄와 죽음이 들어오게 된 것과는 반대되는 개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죽이고 파괴되는 곳에는 악이 있는 것이고, 살리고 살아 있는 곳에는 분명 선이 있고, 사랑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살리는 것이 선이라면, 생명을 주시고 살리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선하신 것이다. 아마도 바울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우리는 그가 만드신 작품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들을 통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은 나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만들었을까? 엡 2:10을 보면.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로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신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선한 일”이 무엇인가? 단순히 “좋은 일”을 의미하는 것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나쁜 일 일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은 유일하게 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으로서 히브리어 “토브”라는 말은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적인 의미보다는 동사로 “살리다”는 의미로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살리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다스리다”는 말의 의미는 정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유형 무형의 만물이 각각 그 목적에 따라 그 생명이 유지되고 그 기능이 작동하도록 살피고 돌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세계의 조직과 질서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지켜지도록 돌보는 것이 다스리는 것이다. 다스리는 것은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정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창조와 출생부터 정치하는 존재이다. 모든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살고, 살리기 위하여 정치를 한다. 따라서 모든 정치는 살리는 것이 목표이고, 모든 정치 행위는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만드신 목적은 그가 만드신 모든 만물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기”위함이고, “다스리는 일”이 바로 “살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가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살리기 위하여 돌보고 가꾸는 일을 하도록 지으시고, 사명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선”이라는 것이다. 모든 정치 행위는 그 목적이 “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일”을 하도록 만드셨는데,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살리는 일을 하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리는 일을 하도록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 안”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아담을 머리로 하는 언약적 연대성이 있고,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언야적 연대성이 있다. 아담을 머리로 하는 언약적 연대성은 아담 한 사람의 죄와 불순종으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만물이 다 죄인이 되고, 죽음 가운데 있는 존재들을 말하고,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언약적 연대성은 아담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심으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나라를 이루게 된 존재들을 의미한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한 목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한 뜻을 두시고 우리를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두신 뜻이 선하다는 이 사실은 내가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야 할 고귀한 목적을 부여하고, 내가 존재해야 할 당위성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나는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결코 하찮은 존재,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존재가 아니다. 꼭 필요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태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선한 일을 해야 할까? 어떻게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다. 비록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한 손이 마른 지체 장애자를 고쳐주신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면 붙잡아 고소하여 죽이려고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데도, 그는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시고, 살리는 일을 하신 것이다. 살리는 일은 희생이 필요하다. 희생이 없이는 생명이 없다. 예수님은 이 손 마른 자를 고쳐주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하여 그의 목숨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한 뜻을 두시고 창조하셨다. 그래서 그 속에는 근본적으로 선을 사모하고, 선을 행하고자하는 소원이 있다. 그러나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사람, 곧 사탄의 왕국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그의 영향력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고,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다.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해하고 죽이는 악을 행하며 살다가 결국은 자기도 죽게 될 것이다. 관계를 잘 못 맺은 것이다. 아담과 연대성 안에 있는 한 그는 사망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연대성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선한 뜻을 두시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들을 살리는 선한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모든 것을 살리는 선을 행하실 수 있고, 선을 행하게 하실 수 있다. 심지어 인간의 악행과 실패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롬 8:28). 그래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에게는 실패가 없다(말 3:6; 히 13:8). 하나님의 이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두신 그 창조의 목적은 선한 것이다. 살리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그들이 지향하여 나갈 길은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 서로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관계를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내가 희생을 치르더라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사는 길이고, 살리는 길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1-03-29
  • [손석태 칼럼] 새 나라의 새 백성(롬 3:21-25: 골 1:12-20)
    사도 바울은 로마서 5:14에서 아담을 “오실자의 모형(type)”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실형” (Antitype)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히브리서의 저자는 9장에서 성막의 모양과 제사법을 자세하게 설명하며, 첫째 장막이 서 있는 한 성소에서 제사 드리는 제도를 가리켜 “비유”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비유”라는 말은 헬라어 “파라보래”(παραβολή)를 번역한 것인데, 대부분의 서양 역본에서는 “상징”(symbol)이라고 번역하고 있다(히 9:9). 아울러 9:24에서는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것들의 모형인 손으로 지은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이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하늘 성소 그 자체에 들어가셨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대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때 온 백성을 대신하여 지성소에 홀로 들어가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이 모형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자신이 대제사장의 실형으로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에 있는 성소로 들어가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성전과 제사제도가 다 그리스도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형이라는 것이고,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가 실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과 이스라엘의 성전, 그리고 그 성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제사 제도가 다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에 대한 모형이고, 더 나아가서 구약 성경의 모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역사가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아담을 머리로 세워진 세상의 구조와 조직과 질서도 역시 앞으로 새 아담이 이루실 새 세상의 모습,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새 아담의 모형이다(롬 5:14).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모든 피조물의 우두머리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고후 4:4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Χριστός ὅς ἐστιν εἰκὼν τοῦ Θεοῦ.)이라고 가르치고, 빌립보서 2:6에는 예수께서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본래 하나님”라는 말은 “이미 존재하셨던 하나님”( θεος ὑπάρχων)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골 1:12-20에는 그리스도께서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분 안에 계시고, 만물의 으뜸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왕으로 세우셨듯이, 이제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모든 피조물의 왕이 되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무릎 앞에 꿇게 하셨다”(빌 2:10)는 것이다. 예수께서 모든 피조물의 머리가 되시고 왕이 되신 것이다. 이 세상은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대왕)-예수님(왕, 그리스도)-만물로 이루어진 조직과 질서로 새롭게 재편 된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머리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이시다.”(골 2:10). 그래서 새로운 세상은 이제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새로운 언약 체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왕이시고, 예수께서 그의 피의 언약으로 구원하신 자들이 그이 백성이고, 세상 만물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새로워진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신 것이다. 그런데 이때 우리 예수님의 백성들은 옛 아담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높고 영광스러운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예수님의 백성들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하여 새사람을 입게 된다. 아담 이후 계속 죄인으로서 가죽 옷을 입고 반역자라는 죄명을 붙이고, 사형 집행을 앞두고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살아온 우리들이, 이제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새 사람이 된 것이다(골 3:10). 무엇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 되고,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왕을 모시고, 새 사람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신분으로, 새로운 꿈과 소망을 가지고, 새로운 왕을 섬기며, 새로운 왕과 함께 새 출발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새 출발은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리 개개인은 순서가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는 아담 안에서 온갖 죄를 짓고 살았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다 죄로 물든 죄인이다. 죄인이라는 신분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아담 안에서” 이제 “새 아담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아담의 나라”에서 “새 아담의 나라”로 들어와야 한다. “아담의 백성”이 “새 아담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아담의 옷을 벗고, 몸을 씻고, 새 아담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리고 새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 나아와 그의 왕이 아담이 아니라, 새 아담,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고백해야 한다. 베드로처럼 예수님 앞에서 “주는 그리스도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는 고백적 서원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새로운 몸의 지체가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새 아담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이 되어야 한다. 이제 새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 인생을 새 출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기 전에, 이미 우리 안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령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죽은 영혼을 일깨우셨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호흡을 들이쉬게 되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하고, 눈이 뜨이며,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을 주셨다. 영혼의 젖을 주시고 그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는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죄를 회개하고 고백해야 한다. 자신이 아담의 연대에 속한 자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는 새 아담의 나라에서,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는 서원을 해야 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고, 그것을 가시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그의 종을 통하여 그의 머리에 상징적으로 물을 붓게 하신다. 이제 그는 새로운 새 아담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의 신분이 변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아담의 옷을 벗고, 새 아담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 된 것이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온 군사가 되었으며, 새 아담의 나라의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세례를 상징하는 물세례를 받음으로 이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된 것이다. 우리 죄인들이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엄청난 신분의 변화와 특권과 은혜와 축복을 받은 새로운 생명체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하여 항상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받은 특권과 이 영광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신 우리의 신분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하게 확립해야 한다. 우리는 비록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이지만 분명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그의 피로 세운 새 아담의 나라, 예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더 이상 아담과의 안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새 아담, 예수께서 우두머리이시고, 왕이신 새 언약의 연대성 안에 있는 새 아담의 나라의 나라 백성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언약 백성이다. 만물의 머리 되신 예수님의 지체이다. 예수님과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 예수님 계신 곳에 우리도 있고, 예수님 가신 곳에 우리도 가고, 예수님 하신 일을 우리도 함께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서 자라듯이 우리도 점차 자라며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옛 사람을 그 행위와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라.” (골 3:9)고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가 지식에까지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빌 3:7-8).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되려면 지식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사고방식이 바꾸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뇌를 바꾸어야 한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틀에 맞추어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손발을 움직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새 아담의 새 사람들은 신자로서의 신분에 걸 맞는 정체성과 인생관의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 것이다. 둘째로 새 아담의 나라의 새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새로운 소망 가운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소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그래서 이리와 어린양, 송아지와 젊은 사자, 암소와 곰, 어린아이와 독사 등 도저히 공생공존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약육강식의 태생적인 적대감을 버리고, 손에 손을 잡고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사 11장). 바로 예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이루시기 위하여 일하시고, 이 나라를 위하여 새 백성을 모으시려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마 23:37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자기 병아리를 자기 날개 아래 모으려 하는 것과 같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하였느냐?”고 울부짖으셨다. 새 나라의 새 백성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에스겔 34장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흩어진 양들을 모으시는 목자로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새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시고, 우리를 그 백성 삼으셨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소망과 비전을 공유해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백성을 모아 하나님의 새 나라를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God’s fellow worker), 곧 동역자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세우셨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모으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이미 다 선택하여 준비해 놓으셨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다만 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 앞에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 인도자의 노릇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선지자 노릇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지자로 세우기 위하여 성령세례를 주셨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새로운 나라의 새 사람으로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사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각박한 세상에서 몸부림치며 살지라도 세상 나라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세상 나라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탐욕을 쌓게 한다. 우리를 파멸의 길로 빠지게 한다.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오로지 하나님 나라, 새 아담의 나라를 바라보고, 새 나라의 백성을 모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서의 복된 삶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1-01-2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42
    “엘리야아,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숨어 있는 아담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같이 들린다.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어 있는 상황이라면 엘리야는 여호와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큰일을 하고서 별 효과가 업는 것 같아서 두려움과 좌절감에 빠져 있는 그의 종에게 찾아오시어 위로와 용기와 새로운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르시는 말씀이다. 오늘 말씀은 특별히 주님을 열심히 섬기다가 실망하여 주저앉아 있는 그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엘리야는 주전 9세기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다. 남북이 나누어진 나라에서 북왕국 오므리 왕조의 반복되는 구테타로 말미암은 위정자들의 악행과 왕권과 결탁하여 여호와의 종교를 탄압하는 바알 선지자들의 권세에 대항했던 대표적인 선지자였다. 열왕기 저자는 엘리야와 가장 큰 대결관계를 가졌던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전임 왕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여호와 보시기에 더욱 악을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 16:30). 그가 행한 악행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은 시돈 사람들의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고, 그의 아내를 따라 바알을 섬기며 그에게 경배한 것이다. 이세벨은 북왕국 아합 왕과 결혼하며 바알 종교를 지참금으로 가져온 셈이 된 것이다. 아합 왕은 바알 사당에 아내와 바알을 위한 제단을 만들고, 바알의 아내, 아세라 신상도 만들었다. 18:19에는 엘리야가 이세벨의 식탁에서 먹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400명의 아세라의 선지자를 모으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무려 1000여명의 이방신 선지자들이 왕실의 녹을 먹고 있는 바알 종교가 국교화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세벨은 왕후라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여호와 종교를 탄압하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섬멸하는 정책을 밀고 나가, 북왕국에는 여호와의 선지자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숨어 살거나 남왕국 유다로 도망가는 수 밖에 없었다. 바알은 여호와의 백성들을 짓밟고 온 세상은 바알의 수중에 들어가 바알의 천지가 되었지만 여호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더구나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3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난세에 목숨을 걸고 바알 세력에 대항하여 일어난 사람이 바로 여호와의 종, 엘리야 선지자였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여호와와 바알 중에 누가 참 살아있는 하나님인지 알아보기 위한 대결을 청했다. 갈멜 산에 제단을 세우고, 그 위에 제물을 얹어 놓고, 각자의 신에게 불을 내려 달라고 기도를 하자는 것이었다. 어느 신이든자 자기의 선지자가 기도할 때 불을 내린다면 그가 참으로 살아있는 능력의 신이라는 것이 증명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알 선지자들은 그들의 바알 신이 구름을 타고 다니며 번개를 치며 불을 내리고, 때를 따라 비를 내려 농사를 짓고 양떼들의 번식을 촉진시키는 신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주저 없이 엘리야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바알에게 불을 내려주도록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그러나 불은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자마자 하늘애서 불이 내려와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을 불사르고, 제단 주위에 넘치데 부어놓은 물을 다 핥아 마르게 하였다. 이 일을 본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그분이 참 하나님이십니다.”(왕상 18:39)라고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연호했다. 그리고 엘리야는 3년 동안이나 계속된 가뭄을 해갈해주시도록 기도하자 비가 쏟아져 내렸다. 이 일로 엘리야는 바알이 참 신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 눈앞에 보여주었고, 여세를 몰아 850명의 바알과 그의 아내 아세라의 선지자 도합 850명을 갈멜 산 밑으로 흐르는 기손 강으로 끌고 가서 모두 도륙해버렸다. 이 일은 당시 고대 근동 세계에서 신들 중에 신으로 종주 노릇하던 바알에 대하여 치명상을 입힌 결과를 초래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하시고, 물과 비를 제어하시는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심을 만방에 선포하고 증명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북왕국의 왕후,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에 대한 보복을 감행하고 엘리야에 대한 체포령을 전국에 내렸다. 엘리야는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엘리야는 이스라엘 서북쪽에 있는 갈멜 산에서 내려와 유다의 가장 남단에 있는 브엘세바에 이르러, “여호와시여, 이제는 충분합니다. 제 목숨을 거두소서, 제가 조상들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19:4)라고 죽기를 청했다. 자기가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하는 말은(19:4) 그의 속마음을 다양하게 표출하는 말인 것 같다. 자기는 주님을 위해서 열심을 냈는데, 이제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말한다. 엘리야는 지쳤다. 주님을 향한 열심과 특심이 사라지고, 이제 좌절과 실망만 남겼다. 아무것도 변환 것도, 남은 것도 없다. 여전히 이세벨은 자기 목숨마저 노리고 있어서 자기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깨워 일으키셨다. 심신이 기진하여 누워있는 그에게 먹을 것을 먹여 주셔서 기운을 차리게 하셨다. 엘리야는 이후 다시 40여일을 밤낮 걸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여전히 죽기를 청하며 굴속에 들어가 있는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이 물음은 마치 엘리야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있는 것을 묻는, 일종의 문책성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질문이 끝나자마자 엘리야는 이세벨이 온 나라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엘리야 자기 혼자만 남아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때에 엘리야는 굴속에서 나는 세미한 소리를 들었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다시 물으신 여호와의 음성이었다. 그러자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자기만 남았다는 같은 대답을 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다마스커스로 가서 하사엘을 기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예후를 기름 부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며,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선지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주셨다. 엘리야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근동 세계의 정치 판세를 새롭게 짜려고 하고 계셨다.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로서 엘리야에게 명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칠천 명을 이스라엘에 남겨놓을 것인데, 이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그에게 입을 맞추지도 않은 사람이다.”(18)라고 말씀하셨다. 왜 하필 칠천명일까?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에 광야에서 고기를 달라고 울며 하나님께 불평하고, 심지어 그의 지도자 모세마저도 원망했던 때가 있었다(민 11장). 이때 모세는 자기 혼자 이 백성을 다 돌볼 수 없기 때문에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70명의 장로들에게 모세에게 주셨던 같은 하나님의 영을 주시어 선지자로 세우고, 모세의 동역자로 주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70명을 주셨지만, 엘리야에게는 그의 100배인 7,000 명을 남겨 두겠다고 말씀하신다.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많은 동역자를 주실 것을 말씀하시며, 다마스커스로 가서 하사엘을 기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예후를 기름 부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며,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선지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주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죽게 해달라고 청하는 엘리야에게 세계 정치는 물론 북왕국 정치 판도의 재편 사명을 주신 것이다. 여호와꼐서는 이스라엘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정세를 재편하는 이 막중한 일에 엘리야를 쓰시려고 한 것이다. 엘리야는 혼자서 이방 출신의 왕후, 이세벨 하나 때문에 온 세상이 바알 천지로 변해가는 상황을 혼자 대항하다가 지치고 좌절하며 심지어 목숨을 버릴 작정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켜 세우시며,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고 두 번이나 물으신다. 그는 자기의 목숨을 사냥하기 위하여 추격하는 이방 계집 하나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려고 있는 엘리야에게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북왕국 원수, 아합의 나라를 보게 하시고, 이웃 종주국 아람을 보게 하시고, 그의 후계자, 엘리사를 생각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7천명의 선지자를 동역자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이방의 한 계집 때문에 주저앉아 죽을 생각을 하고 있는 엘리야에서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질문은 바로 이 힘든 코로나 세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음으로 들려온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12-1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40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전쟁이 없을 날이 없다. 전쟁은 살상과 파괴만 남긴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황폐함뿐이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자도 전쟁에서 패배한 피정복자도 다같이 평화를 갈망한다. 사람은 유사이래 지금까지 평화를 추구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평화가 없다. 로마의 황제 Caesar Augustus는 자기가 세계를 정복하고 이룩한 평화를 기념하고, 그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리석으로 “The Ara Pacis Augustus” 라는 평화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그 제단은 지금도 로마에 가면 재건되어 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전쟁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는 없다. 우리는 인간은 누구나 어떻게 하든지 마음을 진정하고 평안을 누리고 싶어한다. 그래서 전쟁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피난을 가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들 사이에 비뚤어진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은 한 평화는 없다. 우리는 평화를 갈망하지만 평화의 길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우리 주님은 바로 우리 인생들의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을 아셨다. 그래서 그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려고 하신다. 우리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주시고자하는 평화는 어떤 것인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끼친다” 는 헬라어 “아피에미”(ἀφίημι) 라는 말은 “용서하다” (forgive) “떠나다”(leave, depart), “계속 남아있도록 남겨둔다”는 의미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이 죽으면서 자식을 남겨둔다, 혹은 유산을 남겨둔다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그래서 평안을 끼친다는 말은 평안을 남겨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번역하면 “평안을 너희에게 남겨두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언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주셨는가? 바로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며 주신 말씀이다. 보혜사 성령을 주시고, 또한 평안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겨 주니, 내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으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27).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마치면 그의 제자 가룟 사람, 유다의 배신으로 군병들에게 체포되고, 공회와 빌라도 앞에 끌려가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이다. 죽음을 앞둔 분이 자기의 평안을 제자들에게 유산으로 남기고 가신다는 것이며, 또한 그의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평안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의 평안이 이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으며, 그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죽음처럼 두려운 것이 없다. 사람은 죽음 이후의 일을 알지 못하기 때ㅅ문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지만, 사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인간은 죄인이고, 죽으면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평안하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과 완벽한 교제, 곧 거룩한 관계성을 유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아들로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바르고 인격적이며 거룩한 관계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죽음 앞에서도 그 마음이 평안한 것이며, 그러한 평안을 오히려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그가 낙원에 들어갈 것을 아셨고, 같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낙원을 약속하셨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눅 23:46)고 마지막 말을 남기시고 평안히 숨을 거두셨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자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게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평안이다. 죽음을 초월한 평안은 이 세상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빌라도도 두렵지 않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유대인 군중도 두렵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예수님은 그의 내면에 더 깊은 평안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어떻게 주시는 것인가?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결코 이 세상에서 평안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사람은 자기의 죄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후, 부할하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처치하셨음을 증명해 보이셨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권세 아래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사람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누리셨던 하나님과의 평화를 우리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남겨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결과적으로 그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길을 여시겠다는 뜻이다. 우리가 진정 우리 속에 평안을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평해야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사람들과 화해하고 평화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 흔히들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자기의 가정이나 자기 자신의 평화를 지키고, 유지하려면 기본적으로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힘이 돈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학식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사는 것이다. 힘과 돈이 가져다주는 평화에 대해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큰 힘과 많은 돈을 가져도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정 반대의 길을 택하셨다. 강자에게 져 주고, 아예 가난하게 되신 것이다. 화해와 평화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먼저 내 주신 것이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어떻게 하든지 이웃과 더불어 공생공존을 이루려고 힘쓰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원수를 맺고 사는 사람이 있고, 만나는 사람마다 상처를 주고 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만 있으면 온 세상이 시끄럽다. 이러한 사람과 맞서면 설령 이겨도 마음에 평안이 없다. 사람이 사람과 바른 관계를 가질 때 평화가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평안을 가지려면 예수님처럼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먼저 사람을 살리려고 해야 한다. 먼저 져주고, 양보하고, 비켜주는 것이다. 사람들과 싸우면 이겨도 기분 나쁘다.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나 져주면 마음에 찌거리가 남지 않는다. 우리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목사와 장로, 교수와 학생, 사장과 사원, 대통령과 국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관계가 비뚤어지면 결국 모든 것이 파국으로 빠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관계”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시간과 돈과 마음을 힘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손해보고, 먼저 양보해야 한다. 이웃을 이용해서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고 하면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 내 자존심만 내 세우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도 없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도 없다. 성경의 중심주제는 “관계”이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만물의 관계가 하나님의 법대로 잘 유지될 때, 그곳에 평화가 임한다. 우리는 관계를 잘 맺고, 그것을 잘 유지하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아무 일도 안하고 관계가 잘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손해도 보고, 무시도 당하고, 배신도 당해 봐야 한다. 관계를 살리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예수님처럼 희생을 해야 한다. 관계는 자기가 손해보는 가운데 상대방을 살릴 때, 참 순수한 사랑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살리셨다. 평화를 남기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 우리도 우리의 후임이나 후손들에게 평화를 남겨주는 선배, 부모, 선조들이 되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 형제와 원수 갚음을 물려주고, 분열과 분쟁의 씨를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한번 원수 갚음을 대물림해주면 그 원수 갚음은 대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땅에 한 번 와서 한 번 살다가 가는데, 이 세상에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겨야 할까? 평화를 유산으로 남겨주어야 하지 않을까?
    • 해설/기획
    • 손석태
    20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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