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칼럼
Home >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칼럼 기사

  • [언론회 논평] 지자체들의 현행 학생인권조례는 폐지가 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진보·좌파, 전교조 혹은 친전교조 출신의 교육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학생인권조례’가 있다. 2010년 경기도(당시 교육감 김상곤)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6개 시·도에서 시행 중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이런 학생인권조례로 인하여 교권 추락과 교육현장이 황폐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심각하게 나오고 있다. 서울시 교육청(교육감 조희연)의 ‘학생인권조례’ 내용을 보면, 학생들의 자유권, 휴식권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 결국은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망치는 제도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선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 구성원들에 의하여 제정되는 ‘학칙’인데, 학생인권조례 제3조 3항을 보면, ‘학칙 등 학교 규정은 학생 인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제한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어, 학생인권조례가 학교의 학칙을 우선하고 있다. 또 곳곳에 동성애와 동성애자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5조 1항에 보면,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서,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가족 형태’ 등이 나오는데, 이는 동성애를 보호하고 조장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또 제28조 1항에서도 ‘성소수자’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8항에서도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의 정보를 보호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뿐만아니라, 종교적 목적에 따라 설립된 종립학교에서의 종교활동도 제한하고 있다. 제16조 3항의 1에 보면 ‘예배 등 종교 행사의 참여를 강요하지 못하게 하고’ 있고, 2에 보면 ‘종교 과목의 수강을 강요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또 7에서는 수업 시간에 일체 ‘특정종교를 언급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렇듯 지난 10여년간 진보·좌파 교육감들에 의하여 주도되어 제정된 ‘학생인권조례’는 폐지가 답이라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현재 전국에서 가장 빠르게 충남도에서는 15일 충남도의회 본회의에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의 표결이 부쳐져 재석 44명 가운데 찬성 31명, 반대 13명으로 가결되었다. 이는 매우 획기적인 일로 다른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서는 18일경 서울시의회 상임위에서 폐지안이 표결된다. 그리고 경기도에서는 6일 폐지안이 입법 예고되어 있다. 그밖에 광주에서는 주민조례청구(주민들이 필요한 조례의 개정, 폐지를 주민 참여를 통해 해당 지자체장에 요구하는 것)가 진행 중이며, 전북에서는 학생의무조항을 신설한 개정안이 추진 중에 있다. 왜 이런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지난 10월 광주광역시의회 교육문화위원에서는 여론조사 기관을 통해 만 18세 이상 시민 700명을 대상으로 ‘교권 강화 및 학생 인권 여론조사’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93%가 ‘수업 방해, 교사 조롱, 폭행 등 교권 침해가 사회적 교육적으로 심각하다’고 답했다. 이런 교권 침해의 원인 가운데는 인성교육의 소홀이 32.1%, 학생인권조례 제정으로 인한 것이 23.6%, 교권보호를 위한 법적 제도의 미비가 20.4% 등을 차지했다. 이처럼 학생인권조례의 심각성을 깨달아 교육부에서도 지난 달 29일 이를 대신할 ‘학교 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조례 예시안’을 내놓은 상태이다. 합리적 대안이 나와서 교사, 학생, 학부모에게 적절한 제도가 되고, 교육의 미래를 위한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역행하는 일들도 있다. 지난 5일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송두환)는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숙고해 달라는 의견을 내었고, 서울시 교육청 조희연 교육감은 1인 시위를 통해 서울학생인권조례 폐지 반대를 하고 있다. 조 교육감은 ‘학생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학교에서 선생님의 인권이 보장되기 어렵다’는 동문서답식으로, 여론의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과연 학생인권조례가 교사들의 교권과 인권을 보호해 준다는 것인가? 현재 조 교육감은 전교조 출신 해직교사 4명 등을 불법으로 특채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2심 결과도 곧 나올 전망이다. 교육감은 교육자와 교육 행정가로 최고 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진보•좌파의 입장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합리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도 교권이 붕괴된 조례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입장이라니, 이해하기 어려운 교육가이며, 교육 행정가이며, 교육 정치가이다. 지금 우리의 교육 현장이 무너지는 것은, 지나친 진보·좌파와 친전교조에 매몰된 결과가 아닌가? 또 교육 현장에서 교사나 학부모들의 입장이 무시하고 학생 일변도의 권리만을 내세웠기 때문이 아닌가? 한 마디로 교육에다 지나치게 정치가 개입하였고 교육을 이념화시킨 것이 원인이다. 마치 기둥은 부실한데, 지붕만 자꾸 무겁게 하여 집 전체가 무너질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대한민국의 교육의 미래를 걱정하는 모든 학부모와 교육자들과 국민들과 정치인들과 교육시민단체 등은 악법은 폐지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대안을 합의를 통하여 제정하여 우리 교육의 미래이며, 국가의 주역이 될 학생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12-19
  • [언론회 논평] 정치적 허구를 다룬 영화가 역사적 감수성을 높이나
    지난달 정치적인 문제를 소재로 다룬 영화가 한 편 나왔다. ‘서울의 봄’이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으로 우리나라를 뒤흔들었다. 국가 요직과 권력을 가진 인사에 의하여 국가 원수가 살해를 당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하여 수사하는 과정에서 12.12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때의 군대 내 권력 다툼에 대하여 만든 것이 ‘서울의 봄’이다. 그러나 영화가 어떤 역사적인 소재를 가지고 만들어졌다고 하여도, 여기에는 많은 허구(虛構)가 들어간다. 즉 영화적 재미를 위한 것도 있고, 또는 영화라는 장르를 빌려 의도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평론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를 국가의 정치적인 사건들과 연계하려는 의도가 강하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정치적인 큰 이벤트가 있을 때, 즉 대선이나 총선이 있을 때 상대 진영의 부정적인 것을 부각시킬 때 곧잘 효과적으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80년 벌어진 5.18에 대하여 다룬 영화로 ‘화려한 휴가’가 2007년에 개봉되었는데, 이는 그해 12월에 있게 될 대선을 노렸다고 한다. 또 같은 주제로 2017년에 개봉된 ‘택시운전사’가 있다. 역시 이때도 그런 목적으로 본다. 그리고 2012년에 개봉된 ‘광해, 왕이 된 남자’도 당시 대선후보였던 특정 후보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12.12를 다룬 ‘서울의 봄’이 개봉되어 불과 짧은 시간에 대단한 흥행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 과정에서 국군의 중요 보직에 있던 사람들과 당시 보안사령관을 맡았던 전두환 장군과의 힘겨루기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는 나중에 대통령이 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악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선하다는 식의 프레임이 만들어진다. 이는 내년에 있게 될 총선에서 보수층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조장하려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과 허구가 혼재되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기에 부족한 영화를 각급 학교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현재 서울의 송파지역 모 초등학교에서는 6학년 학생들에게 ‘책가방 없는 날’이라면서, 학교부담으로 6학년 전체 학생들에게 ‘서울의 봄’ 영화를 관람시키려고 한다. 그 학교에서 보낸 가정통신문에 보면, ‘영화 관람을 통해 역사적 사실의 심도 있는 이해 및 역사적 감수성을 높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어찌 영화적 재미를 위하여 허구로 각색 되어진 영화가 어린 학생들에게 ‘역사적 감수성’을 높이는 교재로 사용된다는 말인가? 이 영화를 만든 감독도 ‘역사와 허구가 섞여 있어, 자신도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모른다’고 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영화들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얻게 되는가? 전문가들은 ‘우파는 악, 좌파는 선’이라는 등식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분석들이 날카롭게 맞을 수도 있고, 지나친 기우로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영화가 주는 파급력이다. 현재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가장 많이 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잊혀진 역사를 객관적 사실에서 찾기보다는 영화 한 편에서 압축적인 학습을 쉽게 된다.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젊은 세대는 분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반동원식으로 권하여 영화로써 역사를 학습하는 아이들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이는 위험한 일이다. 이 영화 속 당사자들은 이미 단죄를 받았으며, 고인이 된 분들에 대한 분노심만 유발하게 될 것이다. 그 분노는 마치 판도라 상자처럼 열려서, 어쩌면 내년에 있게 될 총선에도 막대한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이럴 경우 영화가 아니라 정치적, 이념적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애써 역사적 진실과 실체와 전모를 제대로, 균형적으로 알려고 하기 보다는 영상(映像)을 통해 본 것을 오랫동안 기억하며, 단순하게 그것을 역사의 실제로 받아들여서 구체화•사실화시킬 수 있게 된다. 이런 일들은 의도된 이념적 계산과 만나게 되면 자칫 바른 사고(思考)에 대한 안대(眼帶)가 된다. 결코 바람직한 일이 될 수 없다. 알려지기로는 전직 대통령도 영화 한 편을 보고, 국가의 에너지 정책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재와 진실과는 무관하게 허구성이 장착된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역사 공부를 대신하려는 교육현장의 강행은 재고되어야 한다. 일선 학교에서는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가르쳐야 할 아이들에게 사실과 허구로 짜여진 문제성 영화에 기대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의도적 목적이 있거나 그것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면, 이를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단체로 감상하게 하는 것은, 교육의 정도(正道)가 아니라고 본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12-1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불 말과 불 수레’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왕하2:11). 이스라엘의 대 선지자 엘리야가 등장하는 곳에 불에 대한 말씀이 세 번 등장합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로 제물을 사른 불입니다(왕상18:38). 이 일로 인하여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인을 기손 시내에서 죽입니다. 둘째는 엘리야를 잡기 위하여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가 보낸 두 오십부장과 각각 오십인 씩 100명의 군사를 사른 불입니다(왕하1:9-12). 세 번째는 본문에 등장한 불말과 불병거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응답을 의미하고, 두 번째는 징벌을 의미하며, 세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제가 군에 입대하여 자대배치를 받고 일병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연대 종합훈련을 처음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임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훈련이 고되다는 것과, 단단히 마음먹지 않으면 자칫 낙오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기간에 정기휴가가 있는 병사들을 모두 부러워할 지경이었습니다. 이때 제가 있던 소대에 전역을 앞둔 선임 병사가 있었습니다. 박 병장이었습니다. 소대는 물론 전 중대원이 존경했으며 심지어 장교나 하사관들까지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 실력이나 인격적으로 훌륭한 선임이었습니다. 박 병장은 훈련 기간이 전역하는 날이어서 훈련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훈련을 즐기는 모범 사병들도 있었겠지만, 당시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역을 앞둔 박 병장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훈련 날이 다가오자 우리는 박 병장이 전역을 위하여 당연히 사단본부로 떠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대대장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오늘은 박 병장과 김 병장의 전역 날이다. 그런데 이들은 전역을 미루고 자원하여 훈련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우리 대대에 이런 훌륭한 사병들이 있다는 것을 대대장은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모두가 박수를” 그렇게 박 병장 김 병장은 우리와 함께 5일여간 훈련에 참여하였습니다. 박 병장은 나와 같은 화기분대 선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훈련 내내 분대원들과 무거운 M60을 나눠 매면서 이동하였습니다. 모든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돌아와 연병장에 모였을 때였습니다. ‘붕!’ 하고 사단에서 지프차 한 대가 달려왔습니다. 사단장이 탑승한 차였습니다. 하늘 같은 사단장의 차를 보고 우리는 잔뜩 긴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단장은 박 병장과 김 병장을 호명하더니 지프차 뒷좌석에 승차시킨 후 곧장 사단으로 갔습니다. 본문의 불말과 불병거는 저에게 오래 전의 군대 일을 소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엘리야를 엘리사에게서 떨어뜨려 놓기 위하여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프차가 다른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전역까지 연기하였던 배려 깊은 두 병사의 영광스러운 전역을 의미하듯이, 불병거와 불말은 하나님께 충성한 엘리야의 아름다운 인생 전역에 대한 면류관이며, 천군 천사의 출동입니다(왕하6:17).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 영광에 힘을 쓰는지 모릅니다. 어디에서든 감투 하나 써보려고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40:6-8).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이유는 자기 영광을 위하라고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고 만드셨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사43:21, 고전6:1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인 죄는 죄로 여기지만, 명예 영광 허영심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성군 다윗이 저지른 두 가지 큰 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한 후 그것을 덮기 위하여 우리아를 죽게 한 살인 죄입니다(삼하11장). 이 죄는 오늘날에도 도덕적으로 가장 큰 죄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구조사입니다. 인구조사는 큰 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자의 죗값으로 네 사람이 죽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주권을 과시하려 했던 인구조사의 결과 7만 명이 죽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인구 조사를 할 때 생명의 속전을 내야 하는데 다윗이 속전을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출30:11-16). 그러나 이면에는 명예영광심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안병모 목사님은 이에 대하여 간음과 살인죄는 육적인 죄인데 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낸 것은 영적인 죄이기 때문에 그 죗값이 더 큰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바울은 세상 영광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그는 위로부터 오는 상급을 바라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노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9). 우리에게도 세상 영광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이든지 두 가지 갈림길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소망하고 살아가면 세상 것도 필요한 것 만큼 주시지만, 세상 영광을 소망하고 살아가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여 엘리야나 바울처럼 영원한 영광에 동참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12-1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너라는 계절
    저는 제 생애 처음으로 북콘서트를 해보았습니다. 사실 북콘서트를 많이 다녀본 경험도 없고, 또 저도 처음이라 많은 부담을 가졌습니다. 물론 제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샘터사 사장님께서 저의 시집 원고를 받아 보시더니 “목사님, 이번 시집이 너무 좋습니다. 이번에는 북콘서트도 하고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샘터사 사장님께 북콘서트를 하겠다고 약속을 드리고 제 생애 처음으로 북콘서트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의 ‘스펙을 넘어 스토리를 만들라’라는 책이 중국어 번역본으로 출판되었을 때, 감사예배를 드린 기억이 납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북콘서트가 아니었죠. 그런데 저의 13번째 시집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 북콘서트를 기획하는데 너무나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시기가 연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연말에 얼마나 많은 미팅과 약속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더더욱 심적인 부담이 많았습니다. 그날 당일도 오전부터 몇 개 일정을 마치고 차에서 도시락을 먹고 도착을 하니까 저보다 손님들이 먼저 와 계셨습니다. 제가 현장을 점검할 시간도 없이 북콘서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에츠하임 앙상블의 연주부터 시작해서 저의 소개 영상까지 너무나 아름답게 잘 준비가 된 것입니다. 특별히 북콘서트 사회를 맡은 이동준, 차유주 아나운서의 진행이 너무나 세련되고 품격이 있었고, 성수현, 김예령 집사님, 기연호 장로님, 박승혁 목사님, 이경희 전도사님으로 이어지는 시낭독이 너무나 시의 향기를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제갈수영 집사님이 작곡한 노래들을 뮤지컬 배우 박은석, 테너 박주옥 교수, 소프라노 임경애 교수가 너무나 멋지게 잘 불러주었고 바이올리니스트 김이슬 집사님, 지휘자 이종진 집사님 부부의 축하 연주도 환상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대 최고의 문학평론가 김종회 교수님과 정호승 시인님께서 저와 함께 시인 토크를 진행해 주신 것이 큰 영광이었습니다. 김종회 교수님께서는 저의 시집 해설에서 ‘춘풍추우(春風秋雨)의 시적 형상’이라는 글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종교적 언어가 아닌 시의 은유와 함축,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그려 내었다”고 서평해 주셨습니다. 정호승 시인님께서는 “소강석 목사님의 시집을 통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만 있는 줄 알았는데 또 하나의 계절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라는 계절’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목회자 시인은 문익환, 고진하 목사님 정도로 알고 있는데, 소강석 목사님께서 시 창작활동을 하시는 것은 너무나 값지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또한 문화일보 선임기자이신 장재선 시인님께서 객석토크로 함께 해 주셨는데 이런 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요즘처럼 말이 거칠어진 시대에 이토록 아름다운 사계의 서정과 말의 품격을 가진 시집이 나온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신앙과 예술의 영역이 함께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면 신앙의 진정성과 언어 예술의 탁월함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강석 목사님의 북콘서트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꼭 소강석 목사님께서 그런 시의 지평을 열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북콘서트 현장에 있으면서 내내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난 하나님밖에 모르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앞세우며 걸어왔는데 내가 이런 예술적 호사를 누려도 되나...” 그러면서 마지막 청중 질문 시간에 나온 “인간에게 왜 시는 필요하고, 목사님께 시는 어떤 의미인가요?”라는 질문이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이런 대답을 하였습니다. “제가 얼마나 분주한 사람입니까? 또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습니까? 그런데 시를 쓰는 순간만큼은 저만의 케렌시아 같은 공간이 되고 창의적 슈필라움을 이루게 됩니다. 저는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자아를 보는 것 같아 너무 행복합니다.” 북콘서트 모든 순서들마다 진심 어린 환호와 박수가 쏟아지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우리 새에덴교회 장로님들과 성도님들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지금까지 담임목사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알아주고 무조건 기도해주고 지지해 주었던 장로님들과 성도님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눈송이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특히 최소한의 초청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분들이 와서 자리가 부족해 뒤에서 모니터로 본 성도님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번 시집에 실린 ‘겨울5’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별 하나 뜨지 않은 / 밤하늘에 / 별 하나 떠 있다면 / 그건 아마 /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잠든 / 너의 이름이겠지 / 사람들은 보지 못해도 / 내 눈에만 보이는 / 너의 얼굴이겠지.” 저는 앞으로도 사계뿐만 아니라 너라고 하는 계절을 만들면서 계속해서 빚진 자의 마음으로 성도들을 섬기며 또 부지런한 창작활동을 지속할 것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12-1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마음의 중요성을 아시기에 “나는 인간의 중심,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그만큼 인간에게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을 잘 지키고 관리하는 일이 철저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기 때문입니다(23절). 마음은 우리의 모든 언어와 행동이 시작되는 곳이기에, 중생한 우리는 거룩하고 선한 마음을 지켜서 거룩하고 선한 행실과 입술의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마음에서 악한 행동이, 선한 마음에서 선한 행위가 나오고(눅 6:45), 말 역시도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5:18). 마음에서 나오는 것 가운데 아름다운 것들도 있지만,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 등은 모두 마음에서 시작되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마 15:19). 그러므로 더욱 마음을 잘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마음은 생각, 사고, 의식의 원천이며, 그 사람의 중심이 되고,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기에 마음에서 이기면 다 이기는 것이고, 마음에서 지면 이미 다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잘 살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복 하느냐, 불행 하느냐’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증오, 슬픔, 불안, 불평으로 가득 차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지만, 반면에 마음이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고, 평안하고 감사로 가득 찰 때에 행복한 삶을 살며 마음의 천국을 이루어지 때문입니다. 렘 17:9절 이하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말씀과 성령으로 지배를 받아 변화를 받지 못하면 마음을 잘 관리할 수 없고, 온전히 지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과 그 말씀으로 채워지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의 삶 속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받은 마음, 사랑의 마음, 자비의 마음, 화평의 마음은 덕을 나타냅니다. 사람은 마음에 무슨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인격이 결정됩니다. 롬 8:5-6에 보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주님의 꾸중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 16:23). 하나님께서도, 마귀도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기 마음을 지킴으로서, 성령님의 끊임없는 역사와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잘 지키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고 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인생이 되십시다.
    • 칼럼
    • WAIC 칼럼
    2023-12-15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아쉽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가 잘 알고 오랜 지기로 존경해 온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주중에는 대부분 기도원에서 말씀을 묵상하시고 영적 수련을 깊이 하시는 내면적 영성이 가득한 분이십니다. 저는 그 분을 생각하고 뵐 때마다 부러운 마음이 가득합니다. 저 역시 태생적으로 외향적인 면도 있지만 의외로 사색하며 홀로 있기를 좋아할 때도 있거든요. 그래서 신학교 다닐 때는 여러 사람과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시간만 나면 무등산 기도원에 올라가서 혼자 무릎 꿇고 기도하며 내면적 영성을 수련하였습니다. 특별히 백암교회를 개척할 때는 발이 닳아지도록 헐몬수양관을 다니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다닐 때 수도원적 영성이나 수도사들의 삶에 대한 책들을 즐겨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정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정 권사님은 대중적 구원운동을 일으키는 분이라기보다 수도원적 영성, 내면적 영성에 몰입을 했던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성령운동, 은사운동을 했던 분입니다. 그러니까 저도 정 권사님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지요. 정 권사님을 만날 때 늘 어둠을 씻고, 빼고, 항상 빛을 마시고 빛을 쐬는 영적 수련을 많이 했죠. 하마터면 저도 수도원적 영성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크게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수도원 중심의 신비 혹은 경건의 영성입니다. 또 하나는 대중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교회 운동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도 중요하지만, 다수가 구원받고 다수가 부흥 운동에 동참하는 계보를 이루어왔지요. 저는 신학교 시절 이 두 사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조용기 목사님과 여러 선진 목사님들의 영향을 받아서 대중 구원과 대중 목회를 지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은 저도 교회 성장 지상제일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40대 중반까지는 여기에 함몰이 되어서 내 교회만 성장하면 되고 내 교회만 부흥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죽기 살기로 뛰어왔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공적사역에 눈이 뜨여지게 되고 연합사역에도 눈이 뜨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부흥과 더불어서 이쪽 사역도 같이 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부흥과 공적사역의 두 날개를 펴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저는 끊임없는 창작활동을 하고 저술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뉴트로 전략, 핵처치’라는 책을 썼고 바로 이어서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시집을 썼습니다. 제가 앞서 언급했던 그 목사님을 만나서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너무 부럽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소 목사님은 앞장서는 사람이고 우리는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소 목사님의 어깨가 무겁고 더 힘든 사역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사실 오늘 저녁에도 ‘CBS와 함께 하는 출산돌봄 2주년 감사예배’를 드리는데 조용히 드릴 줄 알았더니, CBS 방송국에서 판을 크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너무 주요한 분들이 외빈으로 많이 오시거든요. 물론 이 또한 한국교회와 이 시대를 울리는 공적사역의 시그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제 마음은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양 날개를 펴고 대내외 사역을 하다 보니 참 힘들고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쉬움은 있어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저대로의 삶의 비밀이 있습니다. 저는 이동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달리는 차 안에서 성경을 보고 묵상을 하며 설교 메모를 하고 설교를 불러줍니다. 분주한 삶 속에서도 내 마음 안에 외딴방 하나를 만들어 놓고 혼자 사유하고 상념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나만 소통하는 사닥다리가 연결된 골방이 있습니다. 산속은 아니지만 저는 저만의 골방에서 주님이 주신 안경을 쓰고 사회와 시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외로워하며 고독해하며 외딴방에 있을 때, 창의적 사고가 생기게 되고 한 권의 책을 읽으면 3권, 4권의 책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이 적용적 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어느 문장 하나를 보든지 그 한 문장을 통해서 한 편의 글이 나오고, 또 흰 구름과 푸른 숲과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창의적 시의 언어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목회 은퇴를 하면 저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오늘도 부족하지만, 퍼스트 리더로서의 삶이 좀 버겁고 힘들다 할지라도 내 마음 안의 외딴방, 내 마음 안의 골방으로 인해 내면과 영성을 관리하며 삽니다. 때때로 아쉬움은 있지만 결코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외딴방 하나와 골방이 저의 삶과 사역을 지탱해 주고, 아니 창의적 공간으로 저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라는 계절이 제게 안 올 수가 있겠습니까?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12-1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의뢰하는 양식’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셨도다.”(시105:16). 제가 집에서 사용하는 의자는 등받이가 탄력이 있어서 제가 끝까지 누우면 140도는 기울어집니다. 여간 편리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마음 편안히 기대고 있다가 거기서 잠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여느 때처럼 등을 기대는데 의자가 그만 바닥으로 쿵 하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지나치게 세게 기댄 나머지 무게 중심이 등받이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하나님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무슨 일을 당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기대면 그런 일이 없을 터인데 제가 지나치게 의자를 믿은 나머지 몸무게에 속도까지 첨가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그 아들들이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전적으로 의자를 믿고 있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듯이 이스라엘과 그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고 양식을 믿고 있다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고 만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중동 전 지역의 현상이었으므로 이스라엘도 여기에서 비켜 나갈 수 없었던 일이지,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의뢰하는 양식을 끊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없어” 그야말로 믿지 아니하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양털에게만 비를 내리게 하시고, 사방에는 마르게 하실 수 있고,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비를 내리게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삿6:36-40). 430년 후 애굽에 재앙이 내릴 때,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만 안전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다른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그것이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던 하나님은 그냥 두십니다. 여러분이 남의 자녀가 잘못해도 간섭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그대로 두시지 않습니다. 근실이 채근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의지하면 의뢰하는 것들을 끊으십니다. 돈을 의지하면 돈이 궁색해집니다. 자녀를 의뢰하면 자녀 때문에 실망하는 일이 생깁니다. 권력을 의지하면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검을 의지하면 검으로 망하게 됩니다. 다리가 들노루처럼 빨랐던 아사헬은 자기 다리를 믿고 아브넬을 추격하다가 아브넬의 역공에 죽임 당하고 말았습니다(삼하2:23). 뛰어난 모사가였던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자기의 모사를 받아들이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가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삼하17:23). 자기의 지혜를 지나치게 의지한 결과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의뢰하는 것들을 끊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것으로 파멸의 결과를 낳게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아니하고 다른 것들을 의뢰하는 것이 미혹입니다. 제가 초중고 시절에는 권투의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그래서 노는 것도 동네에서는 권투 시합하며 놀았습니다. 나보다 세 살 많은 동네 골목대장은 동년배 친구들뿐 아니라, 하급생들을 모아 놓고 권투를 가르쳤습니다. 산에 올라가면 잔디가 넓게 깔린 묘지로 데리고 가서 경기하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 온 동네의 우상은 한국인 세계 챔피언이었습니다. 저는 그 선수는 절대 패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패하는 것을 보고 사람에게 있어서 영원한 승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은 결코 믿을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앙인들이 믿어야 할 분이 하나님입니다. 의뢰해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함은 말씀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의뢰하려면 시험이 따라옵니다. 도저히 말씀대로 되지 않을 것 같은 시험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으로 보여주신 말씀이, 노예로 팔려 간 요셉에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보였을까요? 현실성으로 따지면 1%도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옥중에서조차도 그의 믿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총리대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능성을 믿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여도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만 하면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시37:3-6).
    • 칼럼
    • WAIC 칼럼
    2023-12-0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
    저는 지난주 목요일 황순원문학촌을 방문했습니다. 김종회 황순원문학촌 촌장님께서 여러 가지를 설명해 주시는데 제가 이런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교수님, 제가 국문과나 문창과를 전공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랬더니 김종회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그런 전공을 하셨으면 그 틀에 갇혀 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문학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더 폭넓은 문학적 잠재력과 가능성, 암시의 진폭이 커지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저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지리산 자락 아래 한 학년에 두 반밖에 없는 시골학교에서 자랐습니다. 대부분 담임선생님이 교대 출신이 아니라 양성소 출신이어서 글쓰기나 웅변을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글쓰기대회를 나가거나 웅변대회를 나가면 상을 받았습니다. 제 안에는 천부적으로 마음속의 연필이 있고, 마이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도 꾸준하게 시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 월간 문예사조로 시인 등단을 하였고, 윤동주문학상, 천상병문학대상을 수상하면서 중견시인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쓴 시를 보면 그것도 나름 제 시의 순수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는 하지만, 너무 너저분하고 불필요한 서사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시집을 불태워버리고 싶지만 그러나 그것도 제 시의 역사고 발전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이번에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13번째 시집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가 얼마나 전문성이 있냐의 차이일 뿐이지 사랑하는 사람은 다 시를 쓰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시는 사랑이고 사랑은 시이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시를 쓰는 순간만큼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이든 사랑의 계절을 걷고 있음을 느낍니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소나기가 내리고 낙엽이 지고 하얀 폭설이 내리는 날이라도, 그 모든 계절은 사랑으로 물듭니다. 그래서 이번 시집의 제목을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고 정하였습니다. 어렵고 난해한 시 보다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감성시들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한 줄 한 줄 사람과 자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순수한 고백의 언어를 남겨보고 싶었습니다. 독자들의 마음에 봄날의 꽃이 되고 여름날의 소나기가 되고 가을날의 낙엽이 되고 겨울의 눈송이가 되어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꽃이 필 때도 있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릴 때도 있습니다. 아니, 언젠가는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폭설에 갇혀 길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한다면 그 모든 날들이 상처의 계절이 아닌 사랑의 계절이 되어 감싸주리라 믿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제 시집을 읽고 슬픔과 절망, 상처를 딛고 다시 사랑과 희망의 마음을 찾을 수 있다면 너무 행복할 듯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추운 바람이 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으로 감싸준다면 우리의 계절은 언제나 찬란한 빛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시대 최고의 평론가인 김종희 교수님께서 성도들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소강석 목사님은 윤동주, 정호승, 나태주, 이해인 계열의 감성 시인이십니다. 흔히 말하는 전형적인 한국교회 목회자의 시의 계보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여시는 시집을 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 목사님은 대중적 호소력과 전파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정말 과분한 시 해설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습니다. 황순원 선생님이 6.25 전쟁 중에 ‘소나기’라는 소설을 쓴 것은 전쟁 중에도 없어서는 안 될 순수한 인간의 서정과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으셨던 것처럼 저의 시집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시집도 겨울왕국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계절을 선물로 주고 또 사랑의 계절을 가슴 속에 전달해 주면 좋겠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12-03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9·19 남북군사 합의로 우리를 희롱한 북한에 대한 우리의 대응’
    정부가 9·19 남북군사 합의 일부를 효력 정지시키자 북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23일에 9·19 남북군사합의의 전면파기를 선언했다. 그들은 보다 강력한 무력과 신형 군사 장비들을 전진 배치할 것이라 엄포놓으며 지금까지의 모든 합의위반을 정당화했다. 보도에 의하면 2018년 합의 이후 북한은 3,400회 이상 포문 개방, 서해 해상 완충 구역에서의 약 600발 이상의 포탄 사격, 북한 무인기의 서울 상공 침투는 물론 탄도미사일과 정찰위성 발사 등으로 북한은 이미 9.19합의를 실질적으로 폐기한지 오래였다. 그동안 이 합의는 우리만의 족쇄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해 우리 포대의 포문 폐쇄, 연평도·백령도 해병대의 육지 K-9 자주포 사격 훈련, 대북정찰 활동 불가 등이 그 예들이다. 이 합의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예산을 소모하면서도 안보 위협은 날로 증대된 현실에서 그들의 정찰 위성 발사를 계기로 9·19 합의 일부 조항의 효력을 중지시킨 것의 정당성은 충분하다. 이에 대하여 민주당은 정부가 위기를 조장한다고 비난하고, 북한의 휴전선 군사도발 혹은 우발적 충돌을 걱정하지만, 그것은 안보는 안중에 없는 지극히 이기적 자기 정치의 전형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상대가 지키지 않는 합의를 우리만 지키면서 눈가리고 귀가린 안보태세로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다는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더더욱 평화를 구걸하는 비굴한 안보는 더는 불가하다. 동네의 불량배가 무서워 뇌물을 주어 안전을 지키는 부자는 불량배의 호구일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북한의 호구였음을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북한이 핵을 개발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우리 정치지도자들의 말을 믿었고, 우리가 퍼준 대북 지원금이 결국 핵무기로 되돌아왔는데도, 170여발의 방사포탄을 퍼부은 연평도 포격사건이 13년 전의 일이고, 우리 함정의 침몰로 수많은 꽃같은 청춘의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 결코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에게 절대 불리한, 상대는 지키지 않는 합의를 우리만 지키라고 강변하는 세력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세력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북에 대한 대화와 협상의 여지는 열어둘지라도 강력한 힘으로 우리의 안보를 우선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북한은 우리를 위협하여 얻어간 것들이 너무 많다. 순진한 우리 정치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사회, 경제, 종교 지도자들의 헌납이 도를 넘은 것도 사실이다. 그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도 아직도 깯다지 못하고 그들의 편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뒷 배경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상식에도 맞지 않고, 현실에도 맞지 않는 주장을 서슴없이 내놓는 그들의 속내가 궁금하다. 적어도 안보를 두고는 여야도, 진보도 보수도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까지 윤석렬 대통령의 국정의 방향은 큰 틀에서 바른 듯하다. 다만 디테일에서의 서투름이 무능 혹은 독단으로 비친 것이 사실이다. 큰 틀에서 얻은 소득을 디테일에서 망실하여 적자를 누적시킴을 살펴야 한다. 특히 이번 9.19 합의의 부분파기의 큰 방향은 옳지만, 북한의 전면 파기에 대응 등의 디테일에서 쓸데없는 오해와 부실함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야 한다. 우리 교회와 목회자들은 안보라는 큰 흐름이 교회의 신앙을 유지하고 선교의 대사명을 완수하는 주요한 과제임을 유념해야 한다. 교리적 보수와 진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반 교회적인 적그리스도의 세력에 동조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는 동시에 우리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그 어떤 세력보다 앞장서야 한다. 9·19 남북군사 합의로 우리를 희롱한 북한과 새롭게 맞서야 하는 우리에게서 임박한 총선은 한국 교회에게는 지극히 중요하다. 우리 땅에 진정한 애국과 평화와 미래의 통일을 위한 초석을 놓는 중요한 선거이기도 하다. 목회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신앙적 양심을 버리고 머뭇거리면 우리의 양떼들은 곤궁한 삶을 살 수밖에 없고, 한국 교회의 선교의 현장은 황폐해지고 만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3-11-25
  • [언론회 논평] 기독교 대학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한동대학교(총장 최도성)는 자타가 공인하는 기독교대학이다. 28년 전 온누리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계가 만든, 기독교 정신의 건학이념과 비전으로 만들어진 고등교육기관이다. 지금까지 이 학교로부터 신실한 기독교인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최근 동성애를 인정하고 두둔하는 ‘차별금지법’의 발의자인 더불어민주당의 고민정 의원을 초청하여 학교 내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다. 고 의원은 지난 2021년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대표 발의한 ‘평등에 관한 법률안’(차별금지법)에 공동 발의한 상태이다. 이에 대하여 지역 교계와 총학생회까지 나서서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총학생회는 ‘평등이라는 허울 아래 성경의 진리를 선포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반기독교적이고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고민정 의원을 하나님의 대학 한동대학교에 초청한 것은 용인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동대학교 이사장이신 이재훈 목사님과 수많은 교계의 목사님들이 국회에서 ‘1인 시위’를 통하여 막아온 것을, ‘소통’이라는 강의 주제와 무관하게 초청한 것은 정치적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임을 분명히 밝힌다고 했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학부 주관으로 20일 고 의원을 강사로 초청하여 진행했으며, 교계와 학생들의 간절한 요청은 묵살한 것이다. 한동대학은 기독교계에서 자랑할만한 학교였고, 지금까지도 건학이념과 비전대로 성경적 창조론 회복, 훼파된 윤리 도덕의 회복, 기독교 복음주의 신앙,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관 교육을 주창해 왔다. 그야말로 열악하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학교의 전통과 가치를 지키는데 공동체의 희생과 섬김이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허물어지지 않고 있나 염려스럽다. 물론 대학이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을 청취할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가정과 교회를 무너뜨리고, 우리가 가진 올바른 도덕과 윤리를 허물려는 것이 ‘차별금지법’(평등법)임을 모를리 없는 해당 교수와 학생들이, 이를 적극 지지하는 정치인을 데려와 강의를 강행한 것은 심히 유감스럽고 개탄스럽다. 어떤 이는 강사를 통해 차별금지법 강의를 들은 것도 아닌데, 왠 호들갑이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묻는다. 그 초청된 강사가 소통의 달인(達人)인가? 한 가지 희망은, 이번에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차별금지법이 얼마나 집요하게 우리 사회에 파고 들어와 전통 질서와 가치를 망가뜨리려고 하는가를 깨닫기 바란다. 아마도 한동대학이 철저한 기독교학교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더욱 접근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소통’을 주제로 하면서, 소통의 상징적 인물로 보기에는 미흡한 사람을 강사로 선택한 것은 분명히 어떤 의도성이 엿보인다. 한동대학이 추구하는 성경적 가치를 지키는 것은 구성원 모두의 노력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누군가 이를 해체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노력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한동대학이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는 대학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학문하는 사람들이 그런 훈련과 연단으로 계속 길러지기를 바란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11-2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