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칼럼
Home >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칼럼 기사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이재명 체포동의안 가결, 이제부터라도 팩트·논리·증거의 시간이 되야 한다’
    9월 21일, 국회는 이재명 더불어 민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박광원 원내대표는 물론 친명계 조정식 사무총장과 산하 정무직 당직자들 모두 사의를 표했다. 필자는 지금까지 이 대표와 관련된 사안들에 대해 한동훈의 법무부와 이재명의 민주당의 도전과 응전을 정말 객관적으로 살피려고 노력했다. 이 노력을 이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을 기점으로 ‘한동훈의 펙트, 논리, 증거 앞에 민주당의 가짜뉴스, 엄포, 우기기의 완벽한 패배’로 정리했다. 민주당의 표현대로 한동훈의 경박함과 깐죽거림도 민주당의 무례와 억지와 조롱에 대한 한동훈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응으로 보였다. 그 만큼 민주당의 대 한동훈 전략은 무지했고, 무력했고, 무모했다. 그 만큼 한동훈의 정확한 펙트, 분명한 논리, 확실한 증거에 속수무책이었다. 이것을 국민들은 매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니 민주당 소속 의원이라 할지라도 소위 ‘닥치고 이재명’이 아닌 이상 한동훈의 정확한 펙트, 분명한 논리, 확실한 증거를 부정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필자는 단 한번이라도 민주당이 이런 한동훈에 맞설만한 정확한 펙트, 분명한 논리,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이 모(某)를 이모(姨母)로 부르는 역대급 코메디는 차치하고 전현직 검찰총장을 구분하지도 않고 이리저리 섞어 놓는 것은 물론이고, 확인안된 청담동 술집 사건을 의기양양하게 폭로하다 망신당하는 등등의 사건들을 대하면서 민주당의 어설픔과 어이없는 객기가 가져오는 결말을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아가 소위 개딸로 불리는 적극적인 이 대표 지지층의 언행은 적극 지지자로서의 충심은 이해하나 정도를 벗어났고 너무 거칠었다. 민주주의를 지켜가는 핵심은 의견의 자유로운 표출과 존중이다.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를 결코 민주사회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개딸들은 자신들을 절대선으로 규정하고, 이에 반하는 이들에 대한 정치적 테러를 서슴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이 개딸들이 무서워 양심적 의정활동을 양심적으로 할 수 없다면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도전 세력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 동안 개딸들에 대해 필자는 그들이 표명한 개혁에 대한 의지와 집념을 내심 기대하고 응원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출발은 그러했는지 몰라도 지금의 그들은 완전히 이재명 홍위병이 되어버렸고, 정치적 테러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정말 가슴아픈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민주당과 적극 지지층은 ‘정확한 펙트, 분명한 논리, 확실한 증거’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가짜뉴스의 선정성과 효과에 기대거나 인기몰이 표풀리즘에 익숙하면 안된다. 무모하게 우기고 억지를 부리거나, 정확하지 않는 지인들의 제보들을 확인없이 믿으면 안된다. 빈정거림과 야유와 조롱을 버리고 잃어버린 품격을 되찾아야 한다. 민주당이 이런 노력이 없다면 그들은 한동훈은 고사하고 수사 검사 한 사람도 넘을 수 없는 초라한 정당이 되고 말 것이다. 단언컨대 펙트가 없고 논리가 부실하고 증거가 불확실한데도 어이없는 비루한 방법으로 맞선다면 어제 이 대표 체포동의안에 찬성한 민주당 의원들과 같은 내부 저항세력은 점점 더 거세질 것이다. 그렇다고 여당이 잘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과거 문재인 정부 시절 유행했던 “문재인 정부는 야당복은 타고 났고, 하늘은 코로나로 돕는다”는 말이 떠오른다. 당시 야당은 무능했고, 문재인 정부의 실정은 코로나로 덮혀버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은 스스로 부너지고 있는데도 대통령 지지율은 박스권에 갇혀 있고, 여당 지지율의 변동은 별 의미가 없는 수순이다. 이것은 야당시절 무능함의 연장이고, 대통령의 초기 실패의 여진에서 벗어날 만한 변화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지금 야당과 ‘이념전쟁’을 벌여 지지층을 결속시킬 때가 아니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3-09-23
  • [언론회 논평] 교회가 국가의 저출산 문제 해결을 돕겠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저출산 국가’로 유명하다. 출산율이 0.78명으로 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이다. 오죽하면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의 해리 콜먼 명예 교수는 ‘한국은 현재의 저출산 추세라면 2750년에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나라’로 규정하고 있다. 정부에서도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난 20년간 300조 원의 천문학적인 재원(財源)을 투입했으나,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재정만 사용한다고 저출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 가임(可姙) 세대가 동의해야 가능한 일이다. 출산율을 높이려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결국은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젊은 층 가정은 부부가 함께 직장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신생아를 낳아도 돌봐 줄 곳이 없으면 아이를 출산하기 어렵게 된다. 현재로서는 이런 시설들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이다. 특히 지방 같은 경우는 더욱 심각한데, 전국의 읍면동 가운데 아동돌봄센터가 없는 곳이 500곳이 넘는다고 한다. 도시라 할지라도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곳이 흔하지는 않다. 이에 우리 기독교계에서는 국가의 저출산 문제 해결을 돕기 위하여, 0~3세의 영유아를 교회 시설에서 돌보는 것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 법률의 제한으로 쉽지 않은 상태이다. 즉 건축법 제19조에서는 건축물의 용도변경 규정을 담고 있는데 ‘아동돌봄센터’가 되려면 종교시설에서 보육 시설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자체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쉽지 않다. 따라서 종교시설인 교회에서 영유아를 돌볼 수 있는 보육 시설로의 허가가 용이해야 하며, 같은 시설군의 제한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법적으로 보장이 안 된다면, 선한 일을 하려다가 교회가 법적 시비에 휘말릴 수 있게 된다. 한국교회는 과거에 선교원, 유치원 등 지역에서 아이들의 돌봄 역할을 톡톡히 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전국에 수만 개의 교회가 있으며 또 교회에는 성도들이 있어, 시설과 사람이 갖춰져 있다. 그러나 현행법에 막혀 국가와 국가의 미래 세대를 위한 봉사와 섬김을 못 하고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기독교계에서는 이런 법안의 신설을 위한 서명 작업에 들어갔는데, 지난 9월 15일 현재 23만 명이 서명한 것으로 집계 된다.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기독교계의 이런 노력에 대하여 협력해야 한다.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여•야가 없고,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고, 정부와 민간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기독교계도 함께 해야 한다. 우리 기독교는 성경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축복의 말씀이 있다. 이에 따라 자녀들을 많이 낳고, 그 자녀들이 잘 자라도록 하는 일에 돕고 힘써야 한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9-20
  • [언론회 논평] 흔들리는 공영방송, 언제까지 사장 교체로 해결되나?
    그 동안 말이 많았던 KBS의 사장이 이사회를 통하여 지난 12일 해임되었다. KBS 사장은 법정 임기가 3년인데, 이를 채우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KBS 사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해임된 것은 이번에 해임된 김의철 사장이 처음이 아니다. 그 전의 정연주, 길환영, 고대영 사장 등과 함께 연속적으로 해임되는 기록을 남겼다. 혹자들은 정권이 바뀌면 예외 없이 KBS 사장이 바뀐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외부의 압력 때문에 사장이 해임되는 것인가? 이번에 KBS 사장의 해임 이유는, 무능•방만 경영으로 심각한 경영 위기 초래, 불공정 편파방송으로 대국민 신뢰 상실, 수신료 분리수거 관련 직무유기와 리더십 상실, 편향된 인사로 공적 책임 위반, 취임 당시 공약 불이행으로 대내외 신뢰 상실, 법률과 규정에 위반된 임명 동의 대상 확대와 고용안정위원회 설치 등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공정성 시비가 아닌가? KBS는 엄연히 공영방송이고, 국가 대표 재난 방송으로, 당연히 누구보다도 공정성에서 확고함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국민이나 방송시청자들의 권익보다는 특정한 정치 세력과 언론 권력에 지배를 받았던 것이 사실이며, 이에 대하여 국민들도 마땅치 않게 여겼던 것이다. KBS의 노조에서도 지난 2년간의 김 사장에 대하여 ‘사내 구성원들의 평가는 무능하다는데 일치한다’는 입장이다. KBS 구성원들도 지난 6월 1,080명이 실명으로 연명한 성명서를 내고, 김 사장과 이사진의 총사퇴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면 KBS의 위기는 단순히 외부의 압력이나 정권이 바뀜으로 수뇌부가 해임되는 것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KBS 사장을 교체하는 문제도 진보 정권일 때는, 자기들 입맛에 맞는 사람을 세우기 위하여 사장을 해임했으나, 보수 정권에서 사장을 해임하는 것은 지나친 편향성에 대한 반작용 내지는 공영방송의 공정성을 되돌려놓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KBS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도, 전 정권하에서 자기들과 노선을 같이하는 인사들을 편중하여 세우고, 그들이 여론을 선동하고, 가짜뉴스의 확성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지난해 대선 전 가짜뉴스를 여러 언론사에서 보도할 때에 KBS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KBS 쪽의 라디오 등에서 더 많은 가짜뉴스들이 증폭된 것이다. 따라서 KBS의 문제는 우선적으로 KBS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그 문제점들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KBS는 ‘노영방송’이란 말을 들은 지가 꽤 되었다. 그런 평가를 받지 않았어야 했다. 또 권력지향적인, 혹은 권력복종적인 태도에서도 벗어나야 했다. 아무리 밖에 있는 정치권과 민주노총 등 권력에서 잡아 흔든다고 하여도, 스스로 공영방송이란 자부심을 버리면 안 된다. 그런 노력은 수뇌부뿐만이 아니라, 모든 직원들이 함께해야 한다. 국민들은 그런 것을 안다. 만약 KBS 구성원들이 그런 노력을 하는데도 외부에서 압력을 넣는다면 국민들이 막아줄 것이다. 사장이 바뀐다고 국민들이 바라는 ‘공공성’과 ‘공정성’이 곧바로 확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모두의 도움이 필요하다. 정권들도 자기들 입맛에 맞는 ‘정권의 시녀’로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KBS 직원들도 편향된 노조에서 탈퇴하여 노조의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공정성을 지키고 품격 높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고, 결코 언론 권력의 달콤함에 취하지 말고 공영방송의 책무를 지키려는 각고(刻苦)가 있어야 한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9-19
  • [언론회 논평] 아동학대처벌법과 아동복지법의 개정이 필요하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아동학대에 대한 신고 건수가 지난해를 기준으로 46,103건이었으며, 이 가운데 아동학대 판단 건수로 분리된 것도 27,971건에 달한다. 특히 지난 2020년 정인이 사건 이후인 2021년에는 무려 53,932건이 신고되기도 하였다. 누구라도 아동(아동복지법에 의하면 아동은 18세 미만으로 규정)에 대한 아동매매, 성적 학대, 신체적 학대, 정서적 학대, 방임행위를 아동복지법 제17조에서 금하고 있다. 이럴 경우 벌칙규정은 최대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상의 벌금에 처할 정도로 엄격하다. 아동학대에 대한 것은 철저하게 신고하도록 되어 있다. ‘아동학대처벌법’ 제10조 2항에서는 아동복지전담공무원, 의료기관의 장, 의료인 및 의료기사, 학교의 장과 그 종사자, 아이 돌보미, 아동권리보장 및 가정위탁지원센터 종사자, 아동복지시설의 장과 종사자 등은 신고하여야 하며, 정당한 사유 없이 신고하지 않으면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게 되어 있다. 일단 아동학대에 대한 신고가 들어오면 아동학대 전담공무원과 경찰이 현장에 출동하며, 피해 아동에 대하여 응급조치로 친권자와 즉각 분리를 하게 된다. 또 학대 행위자에 대해서도 임시조치(판사의 결정으로 주거로부터 퇴거 및 격리, 아동접근금지, 친권 혹은 후견인 권한 행사의 제한 또는 정지, 전문 기관의 상담 및 교육 위탁 등)를 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아동복지법’은 지난 2000년 개정되어, 아동학대 예방을 전담하는 기관들이 신설되는 계기가 되었고, ‘아동학대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은 지난 2014년 제정되어 지역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역할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또 2020년 법무부(당시 장관 추미애)는 민법 제915조의 친권자의 징계권을 삭제하는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였고, 2021년 1월 국회를 통과함으로 사실상 친권자의 권한이 대폭 줄어든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부모로부터 자녀를 격리시키는 일이 너무 쉬워졌고, 그 자녀들은 부모와 떨어지므로 오히려 아동들이 정서적 불안과 정신적 고통을 겪는 문제 점들이 노출되고 있다. 그 과잉에 대한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한 사례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면, 어느 가정에서 부부 싸움을 했는데, 아동들에게 정서적 학대를 했다 하여, 2살, 4살 여아들이 아동보호시설로 보내져, 오히려 아이들이 분리불안장애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또 다른 사례는 집안이 청소가 잘 안 되고 지저분하다 하여 방임학대라며 4세 아이를 보호시설로 데려가는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법원에서 ‘임시조치취소 결정’까지 받았으나, 보호시설에서 아이를 바로 내주지 않아 논란이 된 사건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엄마가 아이를 훈육하는 과정에서 매를 때렸다고 신체적 학대를 이유로 아동과 분리시키는 사건도 있었다. 또 아이가 집에서 놀다 부딪쳐 멍이 들어 병원에 치료하러 갔는데, 의사가 신고하는 사례도 있었다. 사실 아동들에게 있어, 아이들을 가장 잘 키울 수 있는 것은 부모이며 가정이다. 그런데 가정에서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고 하여 행정기관이나 아동보호 기관에서 아이들을 마구 데려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본다. 이럴 경우라 할지라도 그 처리는 매우 신중해야 하며, 공정하고 적법한 판정을 근거로 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아동과 행위자의 정서적 유대관계, 행위자의 아동에 대한 태도, 애착 관계, 주변 지인들의 진술을 고려해야 하고, 이를 판단하는 사람들의 전문성이 충분해야 한다. 아동학대 신고만으로 함부로 아이들을 원가정에서 분리한다면, 가정과 아동을 보호해야 한다는 대원칙으로 놓고 볼 때, 과잉이 되는 것이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미국 전역에서 부모의 훈육권을 인정하고 적절한 훈육은 학대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지나치게 아동보호 차원으로만 만들어진 법률들을 개정하여, 아동을 보호한다는 본래의 취지에도 어긋나지 않고, 지나친 실행으로 가정과 아동에게 무리를 주어, 법 실행이 악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9-1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하나님만 의뢰합시다’(잠 22:19)
    사람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에서 미움의 관계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항상 한결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 못한 것은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렘 17:9) 하신 말씀과 같이 사람의 마음이 타락하고 부패하고 교만하고, 악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닙니다. 그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그 어떤 사건도 아닙니다. 내 마음의 문제요, 내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남의 탓, 환경 탓, 무슨 탓으로 돌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의 어떤 행동도, 환경도 모두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므로,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보고, 사랑으로 보며, 은혜로 보아야 합니다.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좋은 결과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시니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인정하면 적대감, 불평불만, 변심들이 살라질 것입니다.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 37:8)고 하셨습니다. 분을 내고 불평을 하면 이것이 습관이 되어 악한 길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정로로 가는 것입니다. 분노와 불평을 하다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불평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자신은 어떻게 되든지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훌륭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삶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잠잠히 바라는 삶입니다(시 62:5). 사람 앞에서, 환경 앞에서 잠잠한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실망하고, 속고, 세월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만 의뢰해야 합니다. 신령한 계시의 정신을 받아 마음눈이 밝아지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영광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엡 1:18). 우리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사랑하시면 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냈다는 것은 그때부터 사는 목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며, 사는 방향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셨기 때문에 나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되고,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미래 지향적인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진리를 주신 목적은 여호와를 믿고 의뢰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닫는 대로 그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긴 채, 어떤 어려움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것을 지키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하며 맡기고 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화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시며, 그 믿음의 분량대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사역을 완수하도록 필요한 지혜와 물질과 건강을 주십니다. 지난 날 우리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지금까지의 체험을 통해 현재와 앞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이끌어주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더욱 의뢰하여 의지하는 삶을 삽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09-19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그것은 편지였고, 시와 노래였다”
    지난 월요일 우리 교회 몇 목사님들과 산행을 하던 중에 천국에 가신 조용기 목사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조용기 목사님이라는 말씀에 갑자기 조 목사님이 보고 싶고 그리워졌습니다. 그래서 당장 다음 날 모든 일정을 미루고 조용기 목사님 묘소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마침 그때가 2주기 즈음이었거든요. 그래서 의전하는 장로님들에게 꽃다발을 준비해서 미리 도착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했더니 장로님들이 안 계시는 것입니다. 알고 봤더니 오산리기도원으로 내비게이션을 쳤는데 원주로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왜 원주로 갔냐”했더니 “오산리를 오살리로 쳐서 원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시간이 넘게 차 안에서 기다렸습니다. 제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혼자 묘소를 찾아갈 수도 있지만 어떻게 빈손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꽃다발을 들고 가야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차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장로님들이 도착을 하자 꽃다발을 들고 갔습니다. 아직 가을이지만 한낮이라 땡볕이 이마를 찡그러지게 했습니다. 그 땡볕 아래서 묘소 앞에 꽃다발을 드리고 잠시 묵념을 하며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제가 장례위원장으로 목사님의 장례식을 섬긴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주기가 되었네요... 목사님이야 하나님의 품에 안식하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목사님이 그리워서 왔습니다. 그리워서 꽃다발 하나 들고 왔습니다.” 그 순간에 조 목사님과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특별히 국민일보 31주년 기념예배 때의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영훈 목사님께서 통성기도를 인도하셨고 저도 강단에 서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데 누가 제 손을 잡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조용기 목사님이 제 손을 목사님의 머리에다 얹으며 안수기도를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소 목사님 같은 패기와 용기 그리고 영력을 다시 회복하고 싶어요. 소 목사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세요.” 저는 순간적으로 조 목사님을 꽉 끌어안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조 목사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조 목사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조 목사님이 젊은 날 얼마나 체력을 소진하셨습니까?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계 최대의 교회로 키우고 5대양 6대주를 다니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온 몸의 진액을 짜내며 희생하셨습니까? 또한 위태로울 한국교회 수십 년 후를 바라보시며 공적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는 대변지 국민일보를 창간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 목사님은 몸을 축내고 축내셨습니다. 부디, 조 목사님의 수고를 보상해 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청년의 몸과 두뇌와 혀와 기백을 주시옵소서” 조 목사님께서도 기도하는 내내 어린아이처럼 제 품에 안겨서 “아멘, 아멘”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동안 정말 제 몸과 마음이 불덩이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저를 사랑하고 또 저의 젊음이 부러웠으면 그러셨을까... 그런 분이 흙으로 돌아가 땅속에 누워 계시니 제 자신도 흙이 되는 것 같았고 흙과 제가 동일체라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저도 언젠가는 흙 속에 묻히게 될 터인데, 흙이 그냥 흙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흙의 원소가 내 몸 안에 있고 나도 언젠가 저 흙 속에 묻힌다는 걸 생각하니까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주신 사명에 더 충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오는 그날 저녁에 빗소리가 나서 창문을 열어봤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문득 시상이 떠올라 펜을 들어서 ‘가을’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문득 / 가을비가 내리고 / 바람이 불고 / 나뭇잎들이 허공 위로 날아가다 / 나의 발 앞에 떨어졌을 때 / 그건 / 나뭇잎이 아니라 / 편지였다 / 쓰고 싶은 시였다 / 불 꺼진 창문 아래서 / 혼자 부르고 싶은 노래였다 / 눈을 감아도 보이고 / 귀를 막아도 들리고 / 숨을 참아도 부르게 되는 / 사랑이었다.” 그날 내린 비는 그냥 비가 아니었습니다. 그 가을비는 아직은 초가을이지만 바람을 몰고 왔고 나뭇잎들을 떨어지게 하는 비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떨어진 나뭇잎은 그냥 나뭇잎이 아니라 편지였고 시였고 노래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눈을 감아도 보이고 아무리 귀를 막아도 들리고 아무리 숨을 참아도 부르게 되는 가을 사랑이었습니다. 늘 그렇겠지만, 매년 가을이 오면 저는 천국에 가신 조용기 목사님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생각하며 묘소를 찾아갈 것입니다. 그분을 그리워하는 편지를 쓰고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를 겁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9-1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당신의 가을이 더 행복하길...”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넣으십시오. 많은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극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하략)” 이는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입니다. 여름이 그토록 길고 폭염의 나날들이었지만 정작 가을 문턱에 서니까 그래도 남극의 여름의 햇빛을 그리워하고 있는 시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폭염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어떻게든지 여름 햇빛을 피하려고 하였지만, 아직도 푸른 나뭇잎들은 여름 햇빛에 환호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햇빛이 강렬할수록 더 부지런히 광합성 작용을 하며 과일들은 단맛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뜨거운 햇빛이 여름의 꽃들을 피어나게 하였습니다. 지금 어디를 가든지 길가엔 과꽃, 패랭이, 초롱이 꽃들로 한창입니다. 아니, 제가 산행하는 길에는 벌써 앙증맞게 코스모스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웬 시골 처녀가 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수줍은 듯 서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화려하고 흠모할 만한 미의 자태를 갖춘 모습은 아니지만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순결한 작은 몸짓으로 저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듯 느껴졌습니다. “지난, 8월의 뜨거운 햇빛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시원하게 될 수 없었노라고... 살아있는 모든 이들은 여름을 사랑해야 한다. 가을이 오면 올수록 지난 여름이 그리워질 것이라고...” 산행을 한 후 책상에 앉아 아까 전에 본 코스모스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아니, 산 녘에 피어난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초가을에 피어난 꽃들의 미소가 제 가슴속에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침묵의 모국어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 여름이 폭염의 계절이었다면 지금 맞는 가을은 당신에게 정염의 계절이 되기를 바래요. 지난 여름의 폭염이 오늘의 우리들을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듯이 이번에 맞는 가을은 당신에게 꼭 행복한 계절이 되기를 바래요. 가을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야 다시 오게 될 불볕더위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마침내 그 불볕더위가 그리워지고 그 더위 속에서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갑바도기아 대교부 중 한 사람인 닛사의 그레고리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산상 보훈을 보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는데(마5:8), 닛사의 그레고리는 이 청결한 마음이란 에덴동산에서 창조되었을 때의 본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을 회복하면 자연과 교감하게 될 뿐만 아니라 저절로 아름다운 시가 나오고 음악이 나오며 천재적 예술성을 발휘하는 영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신학자의 말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감히 이런 글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다시 산행을 한다면 이번에는 제가 꽃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그래, 너희들도 여름을 잘 견뎌냈지. 지난 여름에 불볕더위가 있었기에 오늘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지 않았느냐. 너희들도 가을이 오면 지난 여름을 더 그리워하게 될 거야. 그러나 짙은 가을이 온다고 아쉬워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거라. 아직은 가을이지만 여전히 폭염을 일으키는 저 태양의 불꽃처럼 너희들도 이글거리는 삶을 살거라. 우리 모두 함께 가을이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정말 올 가을은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름 햇볕으로 인해 모두에게 가을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고 좋은 소식의 열매를 따 먹는 계절이 되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가을이 행복한 계절이 되길 기도합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9-1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형편에 따른 치료’
    “창세 이후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2-33). 소경으로 태어나 구걸하며 지내던 사람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 ‘그가 어떻게 고침을 받았는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한두 번도 아니고 반복해서 물어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침받았던 사람은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 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0-33)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요9:34)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하여 소경이었던 사람의 말은 상당히 조리 있고 설득력이 있지만, 유대인들은 다소 감정적이고 억압적이며, 전혀 말씀에도 맞지 않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경이었던 자가 직업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던 당시 구걸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지만, 그의 지적 소양과 인격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무시 받을 만큼 천박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공생기간 많은 환자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고침을 받는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장애인들과 불치병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셨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자 한센병 환자 한 사람이 절하며 말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자 즉시 깨끗해졌습니다(마8:1-4). 반면 누가복음 17장에서 등장하는 열 명의 한센병 환자에 대하여는 그들이 소리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했을 때 손을 대지 아니하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17:14)고만 하셨습니다. 물론 그들도 다 나았습니다. 이 외에도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을 때, 그것을 직접 꾸짖으셨고(눅4:39), 손 마른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도록 하였습니다(눅6:10). 귀먹고 어눌한 자에게는 예수님의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손에 침을 뱉어 그 혀를 만진 후 “에바다”라고 하시며 고쳐주셨습니다(막7:31-35). 여러 방법 가운데 본문에 등장하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과정은 4복음서에 나타난 병 고치는 사역 가운데 가장 많은 과정을 거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진흙에 침을 뱉으시고 진흙을 이기셨습니다. 둘째, 그 진흙을 소경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셋째,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대로 순종한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단지 한마디 말씀만 하셔도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게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모두 헤아릴 수 없지만, 그것은 각 사람의 형편에 따른 치료였을 것입니다. 그 형편은 각 사람 인품의 정도와 믿음의 정도입니다. 이 소경이었던 사람이 바리새인과 같은 유대인 장로들을 상대한 것을 보면 상당히 똑똑하고 야무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믿음에 있어서 야무지고 똑똑한 것은 썩 바람직한 것이 못 됩니다. 오히려 걸림돌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들과 논리들이 믿음을 사용하지 못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소경 되었던 사람도 그가 고침을 받기 전에는 얼마간의 변화 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과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음을 깨달은 후로는 겸손과 약함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의 본성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를 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 사람 뭐 하는 거야? 내가 앞을 못 본다고 이렇게 더러운 흙을 내 눈에 발라? 나를 무시해도 보통이 아니구먼.”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을 때는 “바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씻으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눈을 씻기 위하여 실로암까지 갈 필요가 있어? 여기서 씻으면 되지. 참 별사람도 다 봤네.”하고 따지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소경은 한 마디 대꾸하지 않고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만큼 그가 볼 수 없는 약점을 통하여 온유하고 겸손해진 표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이 세 과정을 통과하게 한 후 고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쓰실 때는 이전 모습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새롭게 고치신 후에 쓰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질까지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모세의 기질대로, 베드로는 베드로의 기질대로 쓰셨고 바울은 바울의 기질대로 쓰셨습니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게 하고 십자가에 처리하신 후 성령의 열매를 바탕으로 일하게 하신 것입니다. 소경의 경우 이전에는 자신을 위하여 이론이 강하고 변론적인 사람일 수 있었지만, 믿은 후에는 하나님이 주신 기질로 예수님을 위하여 유대인들 앞에서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09-09
  • [국독연 칼럼] 이상길 목사의 ‘기도합시다’(출 14:15-17)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일이 기도를 통해서 계획되고,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정로로 가게 됩니다. 기도는 내 뜻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려고 하면 어려움이 많이 생깁니다. 때로는 기도가 힘들고 귀찮을 때도 있습니다. 특히 새벽기도는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답이 나옵니다. 기도에 길이 있습니다. 새벽기도는 성도들만이 힘든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도 힘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오래 전에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미국교회는 새벽예배를 하지 않는데, 꼭 새벽예배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한인교회는 새벽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새벽예배가 힘들거나 귀찮아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청년시절에는 ‘새벽예배는 순교다. 그러므로 새벽예배는 순교정신으로 드리는 것이라며’ 독려하시던 목사님이 생각이 납니다. 하루의 시작점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야 힘도 얻고, 믿음이 새로워지고, 성장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중,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왔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그때 모세는 무엇을 했습니까?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기도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홍해는 갈라졌습니다(출 14:15-16). 탈북여성 1호인 김영실목사님은 총살장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 살려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절규입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뼈가 녹는 간절함이었겠지요. 그 결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감옥과 같은 문이 가로막혀 나갈 길이 없어도, 기도하는 성도에게 문이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행 16:19-26). 에스더는 위기에 처한 자기 민족의 소식을 듣고, 사흘 동안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담대하게 왕에게 나아갔고(에 4:16), 결국 위기에 처한 자기 민족을 구했습니다. 다윗도 여러 번의 죽을 지경에 처했으나. 그러한 위기에서 생명을 구해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여주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우리에게는 좌절보다 신앙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용기를 갖고 기도할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교회 성장, 교회 부흥 역시 열심히 기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만능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심은 불신앙인 것입니다. 특히 영적전쟁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마귀가 물러가지 않습니다. 고함지른다고 물러갈 줄 압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최근에 한미일 동맹관계가 강화됨으로 중국과 북한이 심한 자극을 받아 반발이 심한 상황입니다. 북한은 전술핵을 사용하여 우리나라의 주요위치를 선제공격대상으로 삼아, 연일 미사일을 쏘아 되며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대처해야 할 가장 우선순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의 편이십니다. 기도는 나를 변화시키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킵니다. 방법론에 앞서 우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됩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09-0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인문신답 시리즈를 시작하며
    주일설교의 ‘한 말씀 시리즈’를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2회를 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해야 할 내용도 많습니다. 그런데 너무 한 주제로 오래 하면 약간 정체되거나 고착화 될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이런 강박 때문에 새로운 주제로 말씀을 전할 수는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 말씀은 다 진리이고 변함이 없는 말씀인데 같은 말씀이지만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새로운 언어와 옷을 입혀서 설교한다는 것은 목회자에게 큰 관심이자 일종의 강박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코로나 엔데믹 시기에 잠언을 강해 할까, 전도서를 강해 할까 고민을 하였습니다. 언젠가 잠언을 전공했던 교수님이 저에게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물어봤습니다. “코로나 엔데믹 시기에 잠언서를 기반한 설교를 하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전도서를 기반한 설교를 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인문신답 시리즈를 하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잠언을 전공했지만 코로나 엔데믹 시기에는 전도서가 훨씬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도서를 택하게 된 것입니다. 14세기 중엽에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그래서 유럽 인구의 1/3이 죽었습니다. 적어도 1억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페스트는 우리나라 말로는 흑사병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시커멓게 변해서 죽는 병입니다.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도 죽었습니다.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아이들도 이 병에 걸리면 새까맣게 타서 죽었습니다. 그때 가톨릭에서는 무조건 성당으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클레멘스 6세 교황은 “우리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 페스트를 물리쳐주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제들의 명령에 따라서 다 교회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지내놓고 보니까 성당이 흑사병의 진원지가 되고 감염의 원천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른과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그리고 심지어는 성직자들까지도 흑사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러자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성직자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교회를 희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왜 저 사람들이 저렇게 죽어가도록 놔두신단 말인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 까닭에 아무 죄도 없이 태어난 어린아이가 새카맣게 타서 죽는 걸 놔두고 계신단 말인가? 심지어는 기도하는 성직자까지도 페스트에 걸려 죽게 놔둔단 말인가?” 그러면서 르네상스, 곧 인문주의가 성행하게 된 것입니다. 인문주의를 하다 보니까 당연히 인문학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사람이 묻고 사람이 답하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 시작하고 신의 자리에 인간이 서고 인간 스스로 학문의 상아탑을 쌓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거기에 진리가 있고 행복이 있고 참 만족이 있었을까요? 아니죠. 오히려 사람이 중심이 되는 인문주의가 성행할수록 삶의 회의론자들이 생기게 되면서 실존주의 철학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거기에서도 진정한 답이 있을 수 없지요. 답이 없으니까 인생 회의론에 빠지든지 아니면 쾌락주의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약, 동성애, 알코올, 성, 게임 중독 등 사람들이 다 어디에든 중독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코로나를 맞았습니다. 정말 현대의학이 발달하지 않았으면 엄청난 인구가 죽었을 것입니다. 이쯤 돼서 ‘인간이 묻고 하나님이 답하다’라는 주제로 한번 설교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 주제가 딱 맞는 게 전도서였습니다. 그래서 ‘인문신답 시리즈’를 준비하게 됐습니다. 첫 설교도 이미 몇 주 전부터 준비를 했는데요, 이 설교를 준비하느라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20회 전후로 ‘인문신답 시리즈’ 설교를 할텐데요, 저는 매 주가 기대되고 매 주가 설레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많은 기대와 관심을 가져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9-0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