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

12-1.jpg
 
44. 방언은 무조건 성령의 은사인가

요즘 퍼져나가는 방언의 파급이 심상치 않다. 불교에도 천주교에도 방언과 신유는 있다고 한다. 오순절주의에서는 이 방언을 그리스도인의 필수 요소로 간주할 정도로 방언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그런데 이 오순절/은사주의가 오늘날 매우 급격한 성장을 이루고 있다. 전 세계 약 20억 명의 기독교인 중 오순절/은사주의에 속한 사람들이 대략 6억 명에 이른다고 하니, 기독교인의 약 30%가 이 오순절 성령운동과 관련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1900년 초에 시작된 이 운동이 1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5개의 교회들이 오순절주의 혹은 은사주의에 관련된 교회들이다.

오순절주의의 방언
오순절주의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증거로 ‘방언’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어떤 오순절파 교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인도한 새 신자의 입에서 방언이 터졌습니다. … 나는 열심히 교회 다니고 신앙을 해도 방언을 못하는데, 교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초신자가 방언을 하니 은근히 질투가 생기고 다른 교인들 보기에도 부끄럽습니다. 왜 나에게는 방언이 터지지 않을까요?”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걱정일까?
성경에서는 방언이 성령의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들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8~11).
방언은 여러 가지 은사들 중에서도 거의 마지막 위치에 있다. 그 다음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9~31).
그 “더욱 큰 은사”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이 말씀 후에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가장 큰 은사로 ‘사랑의 은사’를 강조하고 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고전 13:1)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이 권면에 의하면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여러 은사 중에서 극히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은사를 성도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성령의 은사로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말씀과는 조화가 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첫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성령의 임하심과 함께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이제 막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려는 시기에 오순절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모여든,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5개 국 이상의 다른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각기 자기들의 언어로 제자들의 설교를 듣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복음은 신속하게 넓은 지역으로 멀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분명히 언어의 은사였다. 그런데, 이 방언이 시작된 지 약 20년 이상이 지난 다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행전의 방언과는 변질된 다른 방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 방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단정하여 말하지는 않았지만,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전체의 흐름을 보면 부정적인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아마 그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다른 은사와 비교하여 외적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가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 방언에 대하여 긴 권면을 하고 있는 듯하다. “방언보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방언을 하면 알아듣는 자가 없으니, 방언 보다는 예언(대언)을 하려고 힘쓰라.” “통역 없는 방언은 예언보다 못하다.” “혀를 가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다.” “뜻을 알지 못하는 말을 하면 말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야만이 된다.” “방언으로 말하면 마음의 열매가 없다.”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 “방언 통역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라.”
사도 바울의 이러한 권면들을 깊이 숙고해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혼란스럽게 방언을 하는 것은 교회에 덕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이러한 방언을, 성령의 은사를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처럼 가르치고 그것을 받으려고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현대 방언의 문제는 무엇인가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의 방언은 사도행전의 방언도 아니고 고린도교회의 방언도 아닌 제3의 방언에 해당된다. 우선 오늘날의 방언은 정상적인 통역이 불가능하다. 여러 해 전 미국에서 방언통역에 대한 실험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통역의 신뢰도를 확인하기 위해서 방언을 녹음한 후 통역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7명에게 각각 녹음을 틀어 주고 통역을 요청했다. 그 일곱 가지 통역 중 비슷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 아프리카어에 능통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방언 집회에서 그는 아프리카어로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러자 갑자기 근처에 있던 통역은사를 받은 사람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지금 이 형제가 방언으로 곧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John P. Kidahl, The Psychology of Speaking in Tongue, Harper & Row, 1972, p. 63). 그리고 방언과 신유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삶이나 신앙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미국의 한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십 여 년동안 매주 출연하여 방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목사가 있었다. 한 신문에서, 그 목사가 방송을 하는 기간동안 다른 여인과 부정한 관계를 해 왔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대단히 큰 화제거리가 되었던 일이 있었다. 이것이 그 목사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2, 23).

성령 은사의 가장 확실한 증거
예수님 승천 후에 그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은 매우 분명하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령의 최초 은사는 복음이 전파되는 초기 시대에 큰 능력을 더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필요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고 그것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켜 주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성령의 가장 현저한 역할 중의 하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회심시키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 시대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을 것이 예언되어 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욜 2:23). 복음의 파종기에 이른 비 성령의 역사가 넉넉히 임하였듯이, 예수께서 알곡을 추수하러 오시기 직전에 다시 한번 늦은 비 성령의 역사가 충만히 임할 것이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4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