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벌금에 처하거나 투옥하거나 화형시켰다. 그리고 1546년 ‘모’에 최초의 위그노 교회가 설립되었으나 그 해 당국의 검색을 받아 예배 중에 62명이 체포되고 그 중 14명이 사형 선고를 받고 그 해 10월 8일 공개적으로 화형당했다. 그로부터 2년동안 파리의회는 500명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투옥하고 그 중 68명을 사형시켰다. 그로부터 끊임없이 박해가 시작되다가 1572년 8월 23일에서 24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교회의 종소리에 맞추어 위그노에 대한 대학살이 벌어졌다. 이 날이 마침 성 바돌로매 축일이어서 ‘바돌로매 대학살’이라 부른다. 이 날 파리에서 희생된 위그노만 1만2천여명으로 추산된다. 그 후 대학살은 여러 도시로 확산되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수가 희생되었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체포되어 노예로 전락하고 남자는 양 발에 착고를 찬 채 갤리선의 노잡이가 되어 죽어갔다. 비무장을 주장해 온 위그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앙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귀족군에 합류하여 왕과 주교의 군대인 가톨릭군에 대항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인해 프랑스는 끝없는 종교전쟁에 휘말렸다. 이 후, 처음에는 자신도 위그노 신앙을 가졌으나 프랑스 국왕이 되기 위해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간 앙리 4세가 1598년 4월, ‘낭뜨 칙령’을 통해 위그노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용했으나, 이 칙령도 1685년 10월 18일, 루이 14세의 ‘몽텐폴로 칙령’에 의해 취소되고, 위그노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수 많은 위그노들이 죽고, 살아남은 자들은 인근의 종교자유가 허용된 나라로 이민을 떠났다.
◇프랑스 개혁파 위그노는 오늘날 세계교회가 ‘장로교’라고 부르는 칼빈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한국교회는 약 70%가 장로교이다. 이 개혁파 신앙은 그냥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희생을 딛고 지켜온 신앙의 자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혹독한 고난 속에서 박해를 통과한 위대한 신앙이 한국교회에서 그 성결성과 전투력을 잃고 기복주의로 변질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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