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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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예수님의 성전에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사는 복음사역자라 한다면, 예수께서 성전을 허물고 다시 세워야 하겠다는 말씀을 하루정도 묵상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적어도 한 주일에 하루 정도는 항상 곱씹어야 할 것이다. 요즈음 우리는 교황의 행보를 보면서, 그가 묶으면 묶이고, 그가 풀면 풀리는 것을 보고서, 교권의 권세와 능력이 얼마나 큰 것임을 생각할 때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우리교회가 법과 제도를 정해서 한번 묶어 놓게 되면, 그 법과 제도를 다시 바꾼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할 것이다. 우리국회가 조만간 ‘선진화 법’을 바꿀 수 있다고는 하더라도, 우리 교회가 작금에 정해놓은 법 가운데는, 교단이 무너질 때까지 바꾸지 못하게 될 악법이 많을 것이리라......,
칼빈 선생은 장로 직임을 일 년, 혹은 삼 년, 길어도 칠 년 봉사하면 더 이상 할 수 없게 하였다. 장로의 직이란 오늘날 국회의원이나 지방 의원 같은 제도와 같아서, 일시적인 봉사 직제였기 때문이다. 한 신도가 장로 직을 마치고 나면 다시 집사 직으로 돌아와 집사로서 봉사하는 이가 많았던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태동되던 세상은, 유교적 폐해에 쪄든 관료적 행태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기독교로 배를 갈아탔다고 해서 습성까지 바뀐 것은 아니라서, 유교적 행태에 길들여진 나머지, 아주 해괴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 일들이 많았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미국 장로교회조차 알지 못하는 법과 조례를 만들었는데, 그 중에 한 가지가 위임목사 제도를 만들면서 모든 목사직을 상대적으로 임시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고, 장로 직을 항존 직으로 만들면서 장로직의 권한을 영원히 부여한 것이다.
우리가 영원할 줄로만 알았던 위임목사 직도 오늘에 와서는 아무런 효율성이 없다. 어디 이 뿐이랴, 권징을 시행하는 교회나 총회는 솜방망이 처벌에 지나질 않는다. 마태복음 16장 19절, 18장 18절에서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이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오히려 욕심 많고 눈이 어두워진 집단과 아류들이 만든 법과 조례로 인해서, 교회가 묶이고 하늘마저도 묶인 격이 되었다.
요즈음 젊은 교역자들의 앞날은 이보다 더욱 참담하다. 신대원을 나와서 일차 목사 안수를 받을 수는 있어도, 안수를 받은 즉시 시무 지가 없어서 태반이 쉬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총회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를 못한다. 교계에서 대단한 권력을 휘두르는 교역자들에게서도 한국교회를 치유하고 재건할 의지는 희박해 보인다.
빛의 화가로 알려진 네덜란드의 렘브란트는 그의 생애 과정을 자화상을 그려서 자신의 삶을 표현하였는데, 그의 마지막 삶을 사는 기간에는 한 해를 오로지 ‘탕자의 귀향’에 집중하여 그림을 완성하였다. 그가 얼마나 삶의 질과 뜻에 무게를 두었던가를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다니엘서의 벨사살 임금의 향연에서, 불쑥  한 손이 나타나 벽에다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글씨를 쓴 장면을 그린 적이 있다. 렘브란트의 그림 앞에 서면, 화가도 아닌 우리들마저도 그 앞에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은, 그의 그림이 너무나 깊게 우릴 붙들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라면 누구나 이 장면만큼은 간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첫 장 서론에서, 제자들을 징집하면서 ‘너희는 더 큰일을 보리라’ 하였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14장인 유언장에서는 ‘너희는 더 큰일을 하리라’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시점에서 이 ‘더 큰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한 동안은 우리보다 앞 선 문명과 지도자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들을 아끼지 않고 잘 달려 왔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앞의 것들이 잘 보여서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으나, 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면서 부터는, 앞이 보이질 않게 된 것이다. 뒤에 섰을 때는 우리보다 앞서서 나가는 이들과, 그들이 하는 일들이 잘 보여서 두려움이 없었는데, 이제부터는 우리의 뒤를 따라오는 국가들에 의해서 추격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바로 앞이 보이질 않는 것이 우리의 큰 문제가 된 것이다. 지금의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선조들을 보라! 히브리서신에는 ‘우리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보이진 않지만 보이는 것 같이 믿고 나아갔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요한은 더 나아가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보고 심히 즐거워하였다’라고 했다. 우리는 루터나 칼빈이 본 것만 가지고 한 백년을 달려 왔다. 그러나 이제는 저들이 본 것만을 보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저들 보다 더 큰 것을 봐야하고 더 큰생각을 해야 하고, 더 큰일을 해야 할 역사적인 시점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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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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