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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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용서와 화해의 종교이다. 사람은 죄인을 용서하는 가운데 그의 의가 들어나는 것이며, 사회는 용서하는 가운데 평화가 긷든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죄값을 치러야 하며, 용서를 받아야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용서받지 못한 자는 항상 죄에 따르는 심판과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죄지은 자만 그렇게 불안한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못한 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죄는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 원리는 죄의 용서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하여 우리의 죄 값을 그의 몸으로 치러주시고, 부활하신 후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를 명하신다(눅 24:46-47).. 그리고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신다.
마태복음 18:15-35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이 죄를 용서하려면 일정한 절차를 밟도록 가르치신다. 먼저 둘이만 있을 때 타이르고, 그래고 듣지 않는 경우 둘째는 두세 사람의 증인들 앞에서 그의 죄를 확인하고, 그래도 듣지 않을 경우 셋째는 교회에 공고하여 치리하고, 그래도 듣지 않을 경우에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사람의 죄를 광고하거나 소송을 벌릴 일이 아니고, 그의 인격을 존중하고, 가능하면 조용히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 말씀의 취지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고,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져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땅의 일이 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땅의 일은 땅에서 풀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미결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땅의 일은 땅에서 끝나야 한다. 사람은 언제 이 땅을 떠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용서와 화해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머뭇거리고 미뤄서도 안된다. 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땅에서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무슨 일이든지 그들에게 이루어 질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서로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우리가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일곱번 까지가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까지 해주어라”(22)고 대답하신다. 헬라어 성경의 “알라 헤오스 헵도매콘타키스 헵타”(마 18:22) 에 대하여 역본상 차이가발견된다. 한글 개역에서는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이며, 새번역은 “일흔번을 일곱 번이라도 해야 한다.”로, 개역개정판은 “일곱번을 일흔번까지라도 할지니라.”로 번역하고 있다. 영역본에서는 “Until seventy times seven”(일흔번씩 일곱 번까지, KJV, NAS, RSV), “Until seventy times seven and seven”(일흔번의 일곱 번 씩 그리고 일곱 번, ETH), “but seventy-seven times”(일흔 일곱 번을 하라, ESV, NIV, NRS) 등이다. 그러나 주로 최신 역본들은 일흔 일곱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데 이는 창세기 4:24 의 라멕의 말, “가인을 위한 복수가 칠배라면 라멕을 위하여는 칠십칠배이다”라고 한 말의 헬라어 역본, 칠십인역에서는 “알라 헤오스 헵도매콘타키스 헵타”라고 읽고 있어서, 마태 18:22과 그 문장이 같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의 번역도 창세기와 맞춰서 칠십칠배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고대 근동세계의 시가서 가운데 흔히 볼 수 있는 숫자병행(Number Parallelism, n x 11의 형식)이다.  여기서 7이라는 숫자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숫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천지 창조가 칠일이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창 2:2; 출 20:11).
따라서 7이라는 숫자는 가장 완전하고 (completeness), 전체적인 (totality)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제사장은 온전한 속죄를 위하여 짐승의 피를 일곱 번 뿌린다(레 16:14, 19). 스가랴 4:10은 일곱은 온 땅을 살피는 여호와 눈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계시록 5:6에서는 어린 양, 곧 그리스도의 형상은 일곱의 뿔, 온 땅으로 보냄을 받은 하나님 일곱 영, 곧 일곱의 눈으로 기술하고 있다. 계시록에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책망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하여 논하며, 구약성경 구절을 7번 인용하고 있다(히 1:5-14). 요한 복음에서는 7개의 기적을 기술하고, “나는 ... 이다”(생명의 떡, 진리, 선한 목자, 포도나무, 등등), 소위 “I Am Saying” 도 일곱이고,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말씀도 일곱마디였다(가상칠언). 칠이라는 숫자가 완벽함을 나타낸다면 칠십칠은 더욱 완전하고 충만하고 많음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용서를 끝없이, 헤아릴 수 없이, 완벽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용서를 하지 못하고 안 한다. 특히 많은 것을 용서받은 사람이 더 용서를 못한다. 스스로 용서받지 못할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용서하지 못하는 용서받지 못할 한 종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왕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종이 그의 친구가 빌려간 돈을 값지 않는다고 학대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비유 속의 왕은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긍휼히 여겼어야 하지 않느냐?” 고 말하며, 그를 다시 빚을 갚을 때까지 옥에 넣으라고 명한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며 다음과 같이 끝을 맺으신다. “너희가 너희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실 것이다.”(35). 바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신자들은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자기가 용서하지 않으며, 용서하는 자 마저 원수로 몰아 증오한다. 용서를 모르는 사람을 과연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울도 에베소 성도들에게 권면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여라.”(엡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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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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