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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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는 아름다운 요셉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 리는 요셉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형들의 미움을 사 장사꾼들에게 팔려가 억울한 머슴살이와 감옥살이를 하며 갖은 고생 끝에 성공하여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지만 그를 괴롭혔던 형들을 용서하고 오히려 그들의 생명은 물론 이집트의 온 백성을 살리는 모습을 통하여 후진국 시골의 한 청년의 입지전적인 생애에 박수를 보내며 감동하곤 한다.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한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들보다 그의 생애가 더 위대하고 의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은 요셉의 이야기를 자주 설교하고, 주일학교에서는 요셉 이야기를 많이 가르친다. 심지어 일부 설교자들은 요셉처럼 꿈을 가지라고 권면한다. 또한 일부 신학자들은 요셉의 이야기를 독립된 단위로 분리하여 지혜의 장르로 분류하거나 영웅담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하여 젊은이가 출세하려면 요셉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요셉에게 우리는 배울 점이 많다.
그러나 창세기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면 요셉의 이야기는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과 같은 주역도 아니다. 요셉은 두 가지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하여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실행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횃불 언약을 주시며,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방 나라에 가서 400년 동안 객이 되어 이방을 섬기며, 괴롭힘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다(창 15:13). 따라서 창세기 15장 이후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실현해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말하자면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로 내려가게 된 내력을 적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요셉을 통하여 실현하고 계신 것이다.  둘째로 요셉 이야기는 야곱 이야기의 배경이다. 창 37:2에 “야곱의 내력은 이러하다. 요셉이 열 일곱 살에 ...”이라고 적고 있다. 즉 창세기 저자는 야곱의 인생유전을 요셉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다. 야곱이 어떻게 이집트에 내려가게 되었으며, 그가 죽어 어떻게 이집트에서 그의 조상의 묘실인 막벨라 굴에 묻히게 되었는가를 설명함에 있어서 요셉의 이야기는 그 배경이며 원인이다. 따라서 요셉은 결코 창세기의 주인공이 아니다. 성경에는 여호와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요셉의 위치를 우리는 바로 이해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요셉이 꿈을 꾸었다고 해서 우리도 꿈을 가져야 한다고 설교해서는 무리가 많다. 요셉은 자기가 꿈을 꾸고 싶어서 꾼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그에게 닦칠 일에 대하여 꿈으로 계시하셨다. 요셉이 꾼 꿈은 형들의 곡식 단이 자기의 곡식 단을 향하여 일어나 절한 것이 그 첫 번째의 꿈이고, 두 번째는 해와 달과 별들이 그에게 절하는 것이었다. 그의 부모나 형제들은 이 요셉의 꿈들을 그의 부모와 형들이 그에게 가서 절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고 이 당돌한 꿈을 꾼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고, 결국 요셉은 이 꿈으로 말미암아 형들에게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고 대신 이집트로 팔려가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요셉은 꿈과 관련이 많은 사람이었다. 억울하게 감옥살이 하던 중 왕의 신하들의 꿈과 왕의 꿈을 해석해주고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된다. 요셉은 꿈만 꾼 것이 아니라 꿈을 해석도 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하게 꿈을 통한 계시와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을 이루어 가신 것이다. 이 일은 요셉 자신의 의지나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요셉이 이러한 꿈을 꾸고 싶어서 꾼 것도 아니고, 자기의 능력으로 꿈을 해석한 것도 아니다. 요셉은 술 맡은 시종장에게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창 40:8)라고 말한다. 이집트 왕이 꿈을 꾸고 요셉을 불러 “내가 한 꿈을 꾸었는 데,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너에 대하여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더라.”(창 41:15)고 말하자 요셉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평안한 답을 주실 것입니다.”(창 41:16)라고 대답한다. 그가 꿈을 해석한 것이 결코 자기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해석하실 것이고 자기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셉은 그가 꿈을 꾸게 된 것도, 꿈을 해석한 것도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고 말하고 있다. 요셉은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증거했다. 이집트에는 신들이 많았고, 그 신들의 제사장이나 마술쟁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바로 왕도 사실은 신격화된 사람이었다. 이들 앞에서 그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이 쉽니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는 자기의 목을 내놓아야 할 상황에 부딛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는 담대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하나님이 꿈을 꾸게하신 분이시고 해석할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설교자들은 이 요셉 이야기의 본문을 읽고 “청년들이여 꿈을 가져라.”고 외친다. 그런데 그 꿈이란게 자세히 들어보면 비록 후진국 무명의 청년이라 할지라도 요셉처럼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꿈을 가지고 살면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젊은이는 꿈을 가져야 한다. 꿈이 없는 젊은이는 장래가 없는 사람이다. 꿈을 가지라고 하니까 허황된 꿈을 붙들고 인생을 낭비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요셉은 그러한 사람이 아니고 꿈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붙들고 산 사람이었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세상에 형님들의 후손을 보존하시고, 큰 구원으로 형님들을 살리시려고 형님들 앞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분은 형님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바로의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안의 주로 삼으시며, 이집트의 온 땅을 다스리는 자로 삼으셨습니다.”(창 45:7-8)라고 말한다. 이러한 요셉의 말을 유추해보면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꿈 가운데 주셨던 계시를 마음에 새기고 산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의 가족들을 살리려고 자기를 이집트로 먼저 보내셨다고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다. 요셉은 바로 이 섭리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어떠한 역경에서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형들이 자기에게 저지른 모든 악한 행위들도 다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셉은 자기의 인생 여정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이해하고 해석하고 실행해 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꿈은 요셉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을 살리려는 것이며, 나아가서 세상 만민을 살리려는 것이었다. 요셉은 바로 이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안고 산 사람이었다. 만일에 우리가 요셉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꿈, 곧 세상 만민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꿈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신 목적이 사람과 세상을 살리시려는 데 있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살리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 살리는 일에 쓰임을 받는 사람은 그 인생이 반드시 순퐁을 만난 배처럼 순탄하지만은 않다. 요셉의 인생이 결코 평탄하지 못했듯이 참기 어려운 절망과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수고를 통하여 살리는 일을 했다는 사실이 의미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유대인들을 불러놓고 “나는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이 쇠사들에 매여 있다.”(행 28:20)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두신 소망을 가슴에 안고 로마에 죄수로 온 것이다. 우리도 꿈을 가지려면 이러한 하나님의 꿈을 가져야 한다. 세상 만민을 살리는 하나님의 꿈을 품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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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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