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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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들을 구름위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렸다는 저널리스트 레브레히트(Norman Lebrecht)의 <거장신화(The Maestro Myth, 1991)>에는 “카를로스는 아마 자신에게도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을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카를로스(Carlos Kleiber, 1930-2004)가 남긴 음반이 아주 희소한 터라, 음악애호가들이 그의 연주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을 터인데도, 그를 우리시대의 진정한 마에스트로로 받드는 팬들이 적잖다는 사실로 보아, 레브레히트의 멘트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가 지휘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영상물이 나돌면서 그의 팬들의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는 확신을 더하게 되면서. 
지휘자였던 부친 에리히는 아들이 현실적인 직업을 가지기를 바랐다.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이 나치스의 탄압을 받자 베를린을 떠나, 십년 넘게 남미에서 절망적인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지휘자로서의 험한 과거 때문이었을 터.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일찍부터 인정하고 있었다. 카를로스가 21살 나던 해, 아버지가 친구에게 말했다. “이 아이가 지금은 팀파니를 익히고 있지만 귀가 뛰어나기 때문에 곧 접게 될 것이라 믿소.”
아버지 클라이버는 독재자 스타일의 완벽주의자. <보체크>를 초연하면서는 무려 34회의 풀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을 요구했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으니. 또 시즌이 끝날 무렵이면 보수를 곱으로 올려달라고 으르렁거리기도 하는 인물이었던 아버지가 1956년에 작고하면서, 카를로스는 독일의 여러 오페라극장에서 본격적인 지휘수습을 시작한다.  
디스부르크와 뒤셀도르프를 거쳐 츄리히에서 기반을 다지던 그가 36세에 슈투트가르트의 음악감독이 된다. 그러나 겨우 이태를 버티다가 사임했고, 이후로 다시는 그런 자리에 오르지 않는다. 1973년까지는 레코드회사가 제안하는 작업도 기피했다. 57세가 되어서야 메트로에 등장했고, 베를린 필의 지휘대에 선 것은 거의 60이 되어서였다. 그러나 베를린이 카라얀의 후임으로 지목했을 때에는 이를 거절했다.  
카를로스를 “진정한 천재”라고 했던 카라얀은 “그는 냉장고가 빌 때에만 지휘한다.”는 말로 그의 됨됨이를 평가했다. 데뷔 초에는 제법 폭넓은 레퍼토리를 다루는가 싶더니, 곧 장기로 하는 작품만을 고집하기 시작한다. <보체크> <라 보엠> <오텔로> <장미의 기사> <엘렉트라> <박쥐> <춘희> <트리스탄과 이졸데>. 교향곡으로는 베토벤, 브람스와 모차르트의 후기작품들로 한정했다. 아버지가 즐기던 곡들과 겹치고 있다. 프로의 패를 내건 이상, 요구하는 모든 레퍼토리를 가늠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진정으로 자기만이 다룰 수 있는 작품만을 갈고 닦겠다는 것이 그의 자세였다.  
비평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질적이랄 수 있는 반응을 보였다. 혹 실수로 거슬리는 말을 하거나 글로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기색이라도 비치는 날이면, 곧 공항으로 가겠다며 프로모터를 패닉 상태로 몰곤 했다.  
다루려는 작품이 <라 보엠>처럼, 오랜 세월 익숙해진 작품일지라도, 최소한 2주간의 리허설을 필요로 했다. 연출이 새롭지 않을 경우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준비한다는 자세로 임했던 것이다. 변덕에 가까운 그의 성격이 때로 연기자에게 심한 긴장을 주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철저한 준비에 보조를 맞추게 되면서 단원들이 그에게서 친근감을 느끼게도 된다. 출연진이 입을 모았다. “현존하는 지휘자 중에서는 가장 잘 알아차릴 수 있도록 지휘한다.”라고. 코벤트 가든에서 갑자기 프라시도 도밍고의 대역을 맡게 되어 전전긍긍하는 가수에게는 “내가 그대를 따라 갈 것이니 안심하고 노래하라” 면서 긴장을 풀어주었다는 일화도 남기고.         
영상을 통해 그의 지휘를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노블(noble)”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뿜어내는 그의 품위가 빈의 아낙들을 사로잡은 동기였구나 하고 머리를 끄덕이게도 되고. 그의 “노블”은 자가용 제트기를 몬다거나, 가족들을 이끌고 항공기 일등석에서 으스대는 노불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시대의 마에스토로가 풍기는 “노불”은 그의 당대에 가꾸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2004년 7월 13일, 그의 연주를 아끼던 팬들은, 그를 그의 아내의 고향 슬로베니아의 시골 교회 묘지로 보내주어야만 했다. 아내가 1년 전부터 터 잡고 기다리고 있는...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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