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과 평화
2019/08/01 11:22 입력
트위터로 기사전송 페이스북으로 기사전송
1.jpg
자살을 사전적 의미로 보면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이다. 민족적인 문제나 역사적 문제에 대한 의분을 참지 못하거나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자결이라 한다. 자살이나 자결이나 목숨을 스스로 끊는 행위는 같다 다만 자결은 민족이나 역사적인 공동체를 바로 세우기 위한 행위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을 스스로 단절 시킨다는 것은 장려될 일은 아니다. 자결은 민족이나 역사, 인간의 삶을 바로 세우는 일 등에 대하여 진정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스스로 끊는 일은 장려될 사항이 아니고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민족의 운명을 가르는 일등 과 같은 시대와 역사 바로 세우는 일과, 더 많은 생명을 지키기 위한 충신과 순교적 죽음들은 신중한 평가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식민 치하에서 뿐 아니라 불의가 팽배하고 역사가 돌이킬 수 없도록 왜곡 된 현실 속에서는 그 시대적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의인들의 고난과 죽음들의 결단을 볼 수가 있다. 자신과 자기의 혈연 등을 위해서 민족공동체와 민중들을 속이고 비굴한 부귀영화를 위해서 권력과 자본에 아부 아첨하는 사람들의 반역사적, 반생명적, 반 평화적, 반통일적 삶을 산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못한 삶이 아닐 수 없다. 생명은 분명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역사적 현실이 반성서적이고 반생명적인 정화에서 미친 운전사에 의해서 승객들을 살리기 위한 의인들의 죽음을 폄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로운 일이라 해도 생명을 끊는 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생각하고 생각할 일이다.
사실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들의 죽음은 계속 된다. 이러한 의인들의 생명 단절 외에 오늘날 우리 사회는 oecd(경제개발협력기구)에 대한 나라들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오랫동안 지켜 오고 있다. 이것의 근본 원인은 분단에 있고 그리고 남남 갈등에 있으며,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양극화에 있다고 본다. 소수의 재벌경제 구조악이 자살률을 높인다. 경제적 양극화는 상대적 박탈감 뿐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가치와 의미들을 상실하게 하는 가장 큰 사회적 요인이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권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하여 분단의 현실을 악용한다. 여기에서 희생의 주체들은 민중들이고 서민대중들이다. 어용 지식인들조차 민중들과 서민들을 속이며 자신들의 삶의 보호를 위하여 합리화 정당화를 꾀하며 자본과 권력의 눈치를 본다. 자본과 권력의 양극화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직장의 양극화의 골을 깊게 하고, 수많은 아파트와 집들을 지어 가지만 한 평이 쪽방촌의 서러움을 해결 할 수 없는 주거 양극화와 생활 경제 양극화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권력과 비굴한 재벌 중심의 간교함이 춤추고 있다. 세계적 남북의 양극화(지도의 북쪽과 남쪽의)는 동시대의 비극을 줄이거나 중단 시키지 못한다. 서구의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경제적 자원의 착취를 통해서 오늘도 그러한 결과로써의 가난과 불행의 구조를 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소위 기독교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큰 몫을 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을 갖고 있다.
청소년들이 매년 13092명, 40분당 1명이 자살을 하고 있다. 청소년 자살률 세계 1위이다.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이라는 것이다 1년에 수만 명이 스스로 자신들의 목숨을 끊는다. 7-8-90 년대까지 한국교회는 기독교 역사에서 볼 수 없는 수적 성장을 자랑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자살 통계에 의하면 소위 교인들, 기독교인들의 자살률은 상상을 초월한다. 성서에서 죽음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단절은 물론, 생명의 왜곡, 생명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나 압박, 그리고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공권력들에 대한 타살들의 절대 반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의 자살이 늘어 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것은 말씀에 대한 생명의 소중함과 경외를 상실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들을 이원화 시키는 잘못 된 복음 선포와 성서적 이해에 근거 한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이 세상은 육적이고 저 세상은 영적인 것처럼 이분법적 설교와 성서의 이해가 그렇다는 것이다.
영과 육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한 것처럼 쏘마, 즉 하나의 몸을 이루는 온전한 인격체의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성서는 플라톤이 죽음을 친구요 해방자로 노래한 것처럼 죽음을 예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의 앞서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죽음은 단순히 자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분과 국가권력, 즉 공권력에 의한 타살이 존재한다. 기업들의 이윤 추구에 희생 되는 노동자들의 죽음과 전쟁과 국가의 양극화 정책에 희생되는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죽음들이 널려 있다. 살고 죽는 것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추상적이고 무책임한 변명을 늘어놓는 교회나 기독교는 깊은 회개와 반성을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살리는 일로 이 땅에 오셨다. 선교와 복음의 궁극적 목적은 생명 살리는 일이다. 바로 내 곁에 있는 병들고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 그것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고 진정한 복음의 성육신화이다. 평화운동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분단의 극복도 온전한 생명을 살리는 일로 성취된다.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epnnews@empas.com
교회연합신문(www.ecumenicalpress.co.kr) - copyright ⓒ 교회연합신문.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화제의 포토

화제의 포토더보기

  • 회사소개
  • 광고안내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회원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 교회연합신문 (http://www.ecumenicalpress.co.kr)  |  발행인 : 강춘오  |  설립일:1991년 11월 16일
    | 사업자:206-19-64905  | 03127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16길 73-10  |  대표전화 : 02-747-1490              
      Copyright ⓒ  교회연합신문 All right reserved.
    교회연합신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