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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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

 

지금은 일 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하지만, 한 때 자주 한강 둔치를 산책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50대쯤 보이는 사람이 세 마리 개를 데리고 걷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두 마리는 목줄이 걸려 있었고 한 마리는 풀려 있었습니다.

 

풀린 한 마리는 반경을 넓혀 다닐 법도 한데, 그 역시 주인 곁을 떠나지 않고 목줄이 달려 있는 두 마리를 따라 달려갔습니다. 자신이 자유하게 됨을 모르는 것인지, 알아도 지금의 상태가 좋아 자유를 포기한 것인지 전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전 노예를 매매하던 시절 펜톤이라는 선교사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우연이도 그는 노예 경매시장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흑인 여성 노예를 사려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손과 발목이 쇠사슬에 묶인 상태로 웅크리고 앉아있었습니다. 이 때 선교사가 등장했습니다. 선교사는 가장 높은 가격으로 그녀를 샀습니다.

 

그녀에게 다가가서 절단기로 사슬을 끊고 말했습니다. “이봐요 여인, 내가 당신을 샀지만 당신을 노예로 삼기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자유를 주기 위함이요. 사슬을 다 끊었으니 이제부터 당신은 자유의 몸이 됐소. 당신이 가고픈 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지내시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유유히 길을 갔습니다. 선교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여인은, 한 동안 어안이 벙벙해하더니 갑자기 몸을 털고 일어나 선교사가 가는 곳으로 뛰어갔습니다.

 

잠깐만요.” “왜 그렇습니까?” “절 좀 데리고 가주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날 따라올 필요 없습니다.” “아니요, 제발 절 좀 데리고 가주세요. 제가 자유를 갖는다고 한들 또다시 잡혀 노예가 될 터이니 그럴 바에야 당신같이 좋은 주인 아래 있고 싶습니다.”(예화, 안병모 목사)

 

그리하여 그녀는 선교사 집에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사셨지만 주님은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지 않으시고 그 선교사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던지 아니하던지 자유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대로 살다가는 다시 사탄의 종노릇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여인이 자기 주인에게 한 것처럼 우리의 자유를 주님께 드리고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 같은 주인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야 말로 가장 자비하시고 가장 온유하시고 가장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자유를 드리면 어떻게 됩니까?

 

신앙인들에게 자유란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죄에게 종노릇하는 것입니다(6:12). 그럼 참 자유는 무엇입니까?

 

참 자유는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상태입니다. 왜 죄를 짓게 됩니까? 자기의 마음을 자신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좋지 않는 습관을 반복하는 이유는 내가 나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사욕에 지배를 받는다면 참 자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다스리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나보다 강한 누군가가 나를 다스려 주어야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부르기만 하면 죄의 충동으로부터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1-32).

 

주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우리는 물론 사탄도 환경도 다스려 주십니다. 그 때 비로소 참 자유를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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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참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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