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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다산신도시 작은교회 도전기
- 25년 살던 경기도 구리시를 떠나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이 살았던 남양주로 이사했다. 다산신도시로 입주한 탓인지 다산 선생 형제들의 신앙과 정신을 생각하게 되고, 교통사정이 좋은지, 가까이에 편한 마트가 있는지, 맛집은 어디인지, 스포츠센터가 좋은지 등에 관심이 가게 된다. 학부모라면 자녀들이 다녀야할 유치원과 초중고가 있는지, 주변 환경에 관심이 크다. 그 중 크리스천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아마 처음엔 이전 교회를 계속 다닐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교회를 정하고 기존교회를 떠나는 것은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다. 사정상 교회를 다시 정해야 할 경우도 있다. 너무 멀리 이사 왔거나, 자녀들이 어리거나,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어 먼 교회로 가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롭고 건강한 교회를 찾는다. 신도시 입주민들은 새로운 교회를 생각하고 찾는다. 아마 주님도 여러 모습으로 교회다운 교회를 찾으실 것 같다. 신도시 새로운 지역, 새로운 교회는 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틈새전략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꼭 큰 건물교회가 아닌 작은 공간도 좋을듯하다. 카페나 레스토랑, 학원이나 식당을 빌려 주일 오전만 이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도 가능하다. 어차피 작은 교회는 소그룹이기에 중대형 교회를 흉내로는 생존이 어렵다. 기존의 생각이나 패러다임을 바꾸고 가족같은 공동체, 교회다운 교회를 지향하면 좋겠다. 여기에 목사 1인의 교회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투명성과 건강한 공동체로서 공교회성까지 갖추면 더 할 나위가 없이 좋다. 요즘 성도들은 건물이 큰 교회를 찾기 보다는 공동체가 건강한 교회를 찾는다. 다산에 도전장을 내밀고 개척한 작은 상가교회나 목회자를 만나보면 참 순수하고 열정이 대단하다. 이런 개척도전기, 건강한 생존기에 관심과 애정이 더 생기고 주목하게 된다. 다산동의 예장합동 다산따스한교회(손진원 목사)는 3월에 개척한 성복중앙교회 분립 1호이다. 손 목사는 제자훈련의 전문가로, 교회소개 전단을 잘 만들어 전도에 사용한다. 예배가 찬양과 경배로 뜨겁고 예배 후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는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결단, 축복, 격려하는 악수례를 하는 독특함이 있다. 이어 따스한 애찬과 따스한 소그룹 활동으로 친교하며 말씀을 나눈다. 수요예배에는 성경66권을 공부하며, 금요철야는 주기도로 하는 기도회를 가진다. 가운고등학교 정문앞에 위치한 예장통합의 하늘누리교회(윤호용 목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과 관계가 깊어지도록 하는데 사명을 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새신자에 대한 교인들의 친밀도가 높다. 예배전 중보기도팀을 통해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를 기도한다. 예배는 차분하고 안정감을 지녔다. 매월 말씀주제(예를 들어 ‘공감’)를 가지고 진행되며, 오후예배는 목장예배로 후원협력 선교지를 중심으로 모인다. 다산동 예스프라자의 감리회 주이음교회(정현수 목사)는 퇴계원에서 시작하여 오남리를 거쳐 다산동에 세 번째 정착한 교회다. 정 목사는 서글서글한 인상과 차분함, 친근감이 장점이다. 교회적으로 성도들이 큐티에 열심을 내며, 말씀사경회와 새가족전도를 위해 ‘릴레이’기도를 주일오후와 수요기도히는 성경통독을 진행하며, ‘가족소통학교’를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예장합동 기쁨누리교회(성성섭 목사)는 감자탕교회에서 개척한 교회로 분당에서 6월에 이전해 왔다. 사모님의 인테리어 실력으로 꾸며진 성전이 포근하고 아름답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영향력을 끼칠 사람을 키우자’는 창립비전을 가지고 설립 1년 정도된 교회이다. 가운동의 예장고신 온생명교회(손재경 목사)는 칼빈이나 루터 등 종교개혁가들이 만든 ‘시편찬송’(고려서원)을 예배 전이나 예배에 별도로 사용하는 전통적 예전으로 드린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예배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좀 생소하고 적응이 낯설다. 예배전 결석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예배에서 십계명 낭독도 있다. 대표기도가 5분 정도면 좀 긴 편이다. ‘전교인 성경읽기와 돌아보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설립 10년을 넘겼다. 이렇듯 다산에는 괜찮은 교회들이 꽤 많다. 사랑하는교회, 세한교회, 바라봄교회, 풍성한교회, 신풍라파교회, 도동세광교회, 한빛교회, 경성교회, 두드림교회, 세은교회, 미금제일교회, 우리이웃교회, 도동순복음교회, 주마음교회, 선한교회 등 이름처럼 교회마다 특징도 다양하다. 비록 상가지만 부흥하는 교회, 목사님의 성품이 참 좋은 교회, 구제와 사회봉사를 잘하는 교회, 매주 기도와 전도를 열심하는 교회, 설교의 말씀이 좋고 성경공부를 하는 교회, 성도들의 교제가 풍성한 교회 등이 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선하고 좋은 교회들이다. 10월말 구리에서 이전해 온 나루순복음교회(나송아 목사)나, 11월말 한양수지인 상가에서 개척한 순복음 다산충만한교회(이평수 목사)도 있다. 참고로 한국교회는 70%가 출석교인 100명 미만이다. 개척교회가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한 작은교회 목회자들의 꿈과 믿음에 마음이 간다. 새신자가 와도 반겨줄 사람이 없고 재정의 부족함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희망과 열정을 잃지 않는다. 전도와 예배준비, 안내와 반주, 점심식사 준비까지 다 목회자와 사모의 몫이다. 돕는 손길이 절실하다. 이런 작은 교회가 한국교회 생태계의 근원지이다. 작은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국교회가 전체가 살 수 있다. 새로운 신앙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작고 열악한 교회들을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좌석수는 최대 100석 미만, 평균 교인 출석수 50여명 남짓하지만 주님의 임재가 있고 부흥의 가능성을 믿기에 관심이 간다. 다산신도시에는 좋은 교회가 많다. 새로 이사 와서 건강한 교회와 좋은 공동체를 만나 행복한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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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다산신도시 작은교회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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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크리스천의 사명은 ‘문화번혁’이다
- 2016년, 15년 가까이 하던 사역을 그만 뒀다. 3년 임기를 다섯 번 다 채운다는 것은 과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변명하자면 사실 머리에 새로운 것이 없었다. 그만두고 사무실을 연 것이 ‘근대문화진흥원’이다. 역사와 문화가 없는 교회처럼 이상한 것도 없다. ‘역사’와 ‘문화’가 없는 미래는 없다. 미래를 여는 빛이자 등불이다. 사무실에 틀어 박혀 근대문화자료를 3천여점 정도 정리해 데이터화하였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선 지난 4년간 발표한 100편의 칼럼과 논문, 신문, 방송, 포럼, 잡지의 내용 중 일부를 정리하여 심포지엄을 통해 발표하기도 하였다. 근현대 역사에서 기독교문화는 복음의 풍성함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일상과 시대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이야기와 증언이 주는 감동이 문화를 통해 전해진다. 2017년 윤동주 시인탄생 100주년을 맞아 연 ‘별이 된 시인 동주’ 전시회와 시낭송, 콘서트가 그렇다. 창조와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교회가 무슨 문화에 관심을 갖느냐는 일부 목회자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기도 했다. 교회는 신학만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가? 그러기에 문화적 대변혁기를 맞고 있는 한국 사회의 크리스천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특별히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문화가 급속하게 밀려오고 있는 때에 한국교회는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 매년 10월 31일이 되면 유령이나 괴물 분장을 하고 집집마다 다니며 사탕과 초콜릿 등을 얻는 축제이지만 해마다 살인마 흉내를 내며 총기난사로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할로윈(Halloween)축제가 그렇다. ‘총격’으로 얼룩진 미국산 축제를 국내에 도입할 필요가 있을까싶다. 타락한 이 세상의 문화는 반신적(反神的)이고, 심지어 사탄적인 문화가 아닌가 할 정도로 막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흔히 문화와 문명 개념을 뛰어 넘는 고도한 문화 이해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반문화적이라는 이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28절은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다. 이는 사람이 온 세상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잘 다스려서 그 피조계에 그 뜻을 잘 드러내도록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문화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 형상됨을 실현하고, 인간의 인간됨을 실현해내는 매우 중요한 삶의 방식이다. 얼마 전 가톨릭 신부님을 만났다. 그런데 명함을 받고 놀랐다. 가톨릭 본부에서 직접 가톨릭영화제를 담당하고 매년 진행하고 있어서 의외로 충격과 도전을 받았다. 문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온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도록 하는 것과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인간의 생각과 힘을 다해서 그분의 의도에 부합하게 잘 개발하여 원하시는 문화(culture)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드러내는 것이 ‘온전한 문화’라면, 인간 자신들의 의도에 따라서 피조계에 힘을 가해서 자신들의 뜻대로 변형시키는 것을 ‘잘못된 문화’라 말할 수 있다. 뉴에이지(New Age)운동처럼, 종교성을 제거한다면서 인간성을 높인다는 미명하에 하나님을 무시하는 방식의 문화가 현저하게 나타남도 사실이다. 기존의 사회 ·문화 ·종교에서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여 영적 공허를 느낀 사람들이 신비적인 것에 도달하기 위해 여러 종교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요소와 과학 ·심리 ·기술 ·정신분석 등을 혼합시킨 뉴에이지가 그렇다. 이처럼 타락한 인간이 생성해내는 문화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다. 구속함을 받은 크리스천의 사명은 문화 번혁이다. 기존의 잘못된 형태의 문화나 정치를 방치하고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번혁해 건강한 공동체 문화를 만드는 번혁사역을 해야 한다. 번혁사역은 결국 거듭남의 열매이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적(神國的)이다. 거듭남이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것은 아무리 순수해도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적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목적이 있다하더라도 인간들의 단순한 흥미나 취미, 여흥을 위한 수단정도라고 여긴다면 전혀 성격이 다르다. 그런 문화 사역은 하나님 나라적인 것이 없고, 따라서 오래 갈 수 없다. 이런 문화에 대한 인식전환과 더불어 받은 소명에 따라서 각 문화 영역에서 전문가들이 되어야 한다. 문화는 다양한 분야에서 진정한 전문가들이 있어야 참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작은 글 한편, 그림 한 장, 찬양음반, 찬양팀의 집회, 기독서적, 동영상, 문학의 밤, 기독교유튜브, 기독영화 한편 등은 삶에 생기를 불어 넣으며 더 깊은 신앙의 길로 이끌어준다. 교회는 이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의 활동을 넓게 지지해 나갈 수 있는 교두보가 되며, 지성인과 시민들에게까지 폭을 넓혀 나갈 수 있도록 층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런 지지기반이 없으면, 크리스천인 전문가가 아무리 능력을 지닌다 해도 한 사회속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전문가를 폭 넓게 지지하는 교회의 관심과 지지가 있을 때 진정한 문화번혁이 이루어진다. 신실하게 이런 문화 번혁 활동을 하는 크리스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세력들도 크게 나타나 결국 세상은 끝까지 영적인 전쟁터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전쟁터에서 깨어 진정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일에 피흘리며 묵묵히 감당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 세상에서 무엇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문화 번혁 사역을 하기보다는,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기에 우리의 힘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이 일을 꾸준히 진행해 나가므로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소망해야 한다. 주께서 ‘문화’의 주로 임하셔서 그런 노력을 의미 있게 보시며 인정하시고 위로하실 것이다. 우리의 본 무대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어찌보면 우리의 문화 활동은 하나님의 손으로만 온전함을 얻게 될 것이다. 지금 여기서 그 사역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첨병들이다. 학문과 문학, 문화사역은 바로 구속함을 받은 우리가 사역해야 할 장이며, 이는 우리의 삶이 주께 드려지는 합당한 산제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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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크리스천의 사명은 ‘문화번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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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기독정당, 가능성이 보인다
- 기독정당은 원내진입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한 정당이다. 기독정당은 제16대 총선부터 5번에 걸쳐 사랑실천당, 기독자유당, 기독민주당, 기독당의 이름으로 원내진출을 시도했다. 우리나라 70년의 정치사에서 선거 때마다 등장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것은 기독정치인들이 기존 정당의 공천을 받아 후보로 나서기 때문이라는 변명도 있지만, 인재양성이나 영입과 공적 영역을 확보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또 “‘정교분리’를 내세워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느냐”는 관념이 국민들의 머릿속에 꼭 차 있는 것도 이유가 된다. 초기 선교사들이 일본강점기 선교의 유익을 위하여 뿌려놓은 ‘정교분리’라는 벽과 한계에 부딪쳐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70-80년대 군사정권에 맞서 현실참여로 예언자적인 사명을 감당한 목사들을 향해 ‘정치목사’로 매도했다. 대신 그러면서 이들은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온갖 혜택을 누리는 기득권자가 되었다. 기독정당의 출현은 기존 정당이나 기독교 국회의원들이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120여명이나 되지만, 이들이 오늘 문제가 되고 있는 동성애법을 비롯한 성직자과세, 차별금지법,낙태와 안락사 등에 대해서 한국교회와 채널을 소통하거나 그 입장을 전혀 대변하지 못하는데 책임이 있기도 하다. 오늘 한국교회의 교인 대부분은 교회나 목회자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다. 사실 기독교인 대부분은 “나라가 어려운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됐지, 목사가 무슨 정치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서 합리적이고 균형있는 좋은 인재를 내놓아야 한다. 교회나 목회자는 정치 일선에 참여하지 않아도 여러모양으로 도와야 한다. 교회와 정치의 가는 길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나 기독교 정당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에 부정적인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 정치를 하려면 당연히 목회자를 사임하고 정치인으로 하면 된다. 그렇게라도 벽을 깰 수 있다면 하는 것이 맞다. 기독정당은 낡은 정치판을 재현하는 방식으론 안된다. 새롭고 신선하고 감동적이어야 하다. 기독정당이 확실히 성공하려면 어떤 조건들이 선행돼야 하는 조건이 있다. 우선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있다. 한국의 정치위기가 필요조건이고, 지지확장성이 충분조건이라 볼 수 있다. 지지확장성을 위해서는 정의사회의 암초인 황금만능주의로 인한 양극화와 권위주의 타파를 통한 자유민주주의를 이끌어낼 리더십이 선행돼야 한다. 아직까지 기독정당들을 보면, 이런 리더십을 위한 충분조건 결여, 호소력 있는 정책 제시 실패, 기독교 정치철학의 부재, 인재양성이나 영입 실패 등을 보여주고 있다. 준비된 정책팀이 없이 선거철만 되면 나타나는 떳다방처럼 이벤트적이다. 나와 견해가 다르지만 기독교의 정치세력화라는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방법에 동의하지는 않는 이유이다. 조국 교수 사건으로 국민들의 반감이 심할 때, ‘국민혁명 대표의장 전광훈 목사가 광화문 집회를 통해 명분과 대세를 잡았다. 기가막힌 타이밍이다. 전목사는 확실히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문재인 탄핵’이라는 카드를 흔들며 극우 보수를 지향하는 우리공화당이나 애국당을 확실히 제꼈다. 특히 대중적 인기를 지닌 장경동 목사까지 앞장서 합류하며 생각외로 반응이 있다. 기독정당, 가능성이 보인다. 아마 현재 기독자유당(대표 고명일)과 기독당(의장 민승)이 상승 기로에 놓이지 않았나 싶다. 내년 4월 총선에 기독교 정당이 원내진입으로 주목받을 것 같다. 2016년 선거에서 전체 2,443만 746표 중 기독자유당 득표율은 2.63%로 62만 6,853표를 얻었다. 비례대표 국회의원 1명을 배출할 수 있는 3%를 넘기지 못했다. '기독당'은 득표율 0.54%(12만 9,978표)를 기록했다. 1%도 안 되지만, 지지율만 놓고 봤을 때 21개 정당 중 9위에 올랐다. 70년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기독당의 저변도 만만치는 않았다. 두 정당이 합쳤을 경우 75만 6831표가 된다. 그러니 이번에는 기독정당이 기존표에 일반표까지 가져오는 상승효과로 인하여 150만표를 전후할 것으로 예상되며, 5석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나 (개인적으로) 전망한다. 기독정당의 고질적인 병은 ‘분열’이다. 매번 선거에서 분열은 표 분산으로 이어진다. 벌써부터 기독정당이 2개로 나뉨에 따라 또 다시 기독교 표심이 분산되어 실패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여기에 몇몇 인사들이 또 다른 기독교정당을 만들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기독교의 원내진출이 무산될 수도 있다. 한국교회 연합기관의 분열처럼 기독교정당의 난립은 기독교의 정치세력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며, 정당의 모습을 우습게 만드는 공적이 될 것이다. 기독정당에 전직 장관, 전직 국정원장, 공천에 탈락할 인사 등 명망가나 정치에 뜻을 둔 이들까지 줄서기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여기에 김동길 박사, 조갑제, 이재오, 이영훈, 김문수, 전원책 등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혁명 정치학교’까지 개설하며, 인재들을 모으고 있다. 개신교가 극우정치에 말릴 수 있는 충분한 위험성과 가능성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개신교가 극우집단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최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국 20세 이상 개신교인 1000명과 비(非)개신교인 1000명을 패널로 활용한 온라인 조사를 실시해 10월30일 발표한 ‘2019 주요 사회현안에 대한 개신교인의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이 기독교를 표방하는 정당을 창당해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개신교인 79.5%가 반대 입장을 보인데 비해 찬성은 5.2%에 그쳤다. 보통, 혹은 모르겠다는 응답은 15.2%였다. 이렇듯 오늘 기독교인 중 80%가 기독교정당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상황서, 기독교 정치세력화의 꿈을 이룰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기독교인 1천만명 시대를 맞아 기독교의 정치세력화는 필연적이라는 정치목사들의 머리는 뜨겁지만 성도들의 가슴은 싸늘하다. 여기에 고민이 있다. 한국교회가 그만 표류하고 갈 길을 찾게 되길 함께 손 모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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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기독정당, 가능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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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강연에서 책 출판, 베스트셀러까지
- 글은 말에서 나왔고 말은 자기 삶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삶이 말이 되고, 말이 글이 된다’는 것이다. 좋은 강연과 글이 되려면 삶이 풍부하고 알차야 하겠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이 말과 글을 결정하게 된다. 말과 글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일이 결코 아니다. 바탕은 삶이다. 삶이 풍부해야 글감도 풍성해지고 결과적으로 삶이 건강하면 말과 글도 건강해진다. 말이나 글이 숨김없이 진실되이 드러낼 때 감동이 있고 생명력을 불어넣게 된다. 80년대 후반 시집을 낸바 있지만 글쓰기를 포기한지 오래되었는데, 월간목회 발행인 박종구 목사님이 글쓰기를 자꾸 권유하셔서 7년간 월간목회의 집필위원으로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하였다. 그러다 초짜 글쟁이가 겁없이 낸 책이 『영혼을 깨우는 예배기도』라는 책인데, 반응이 좋아 5만권 이상이 팔리며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고 졸지에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말도 듣게 되었다. 2002년 교회건강연구원을 설립한 이후 강연과 더불어 집필에 신경을 써 가능하면 매년 한권 정도는 출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17년간 출판된 책이 15권 정도가 된다. 하지만 쓸 때마다 힘들다. 그중에 『관계의 벽을 넘어라』라는 119관계전도훈련 세미나 강연집으로 세미나에 5000여교회 5만여명이 참여하며 필독서가 되다보니 관계전도의 교과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글을 쓰고 책을 왜 내는가? 최근 집필 출판한 『나이롱 집사와 기둥 같은 제직』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세상에 시시각각 달라지는 신앙의 여러 모습들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 가는 길을 헤매지 않도록 세워주고 싶어 냈다. 텅 빈 마음 채워주고 영혼에 꺼진 불을 피우며 심장을 새로운 감정으로 뛰게 하고 싶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와 청지기·직분자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3·1운동을 다시 시작하는 심정으로 펜에 피땀과 교회를 향한 사랑을 찍어 썼다. 하지만 글을 쓰고 책을 출판하는 일이 부족한 사람이 요란을 떠는 것은 아닌지, 과연 예수그리스도와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를 위한 것인지 많이 성찰하게 된다. 이 책의 시작은 2002년 가을, 40년 목회를 은퇴하시던 고 김우영 목사님(만나감리교회)께서 전국목회자들을 초청하여 세미나를 열고 필자를 주강사로 세워주셨다. 그 때부터 전국교회를 돌며 1000여 교회에서 강연했던 것에서 20여년의 강연 녹취와 자료를 정리하다보니 사람의 부족함이 글에까지 전달되었음을 느꼈다. 책이 출간되자 “제목부터 참신하다”, “신앙의 위기에서 용기를 찾았다”, “몸과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극복했다”, “단단하게 버틸 힘과 해낼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안 것이다”,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존재이며, 훨씬 더 귀한 일을 하는 사역자라는 사실이다”라는 독자들의 반응과 소감, 그리고 “팬심으로 꼭 사서 읽어 보겠다”는 격려의 말들을 듣게 된다. 특히 '글 쓰느라 애썼다’, ‘글에 반했다’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은 글쓰기가 참으로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다. 글쓰기가 뭐라고 이렇게 힘들까 하면서 홀로 지새운 숱한 밤들을 알기나 할까. 오자와 싸움에서 죽을 고생을 다하며 글재주가 부족함을 절감한 걸 알기나 할까. 출산한 산모처럼 그래서 또 다시 책을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글 잘 쓰는 사람은 틀리다. 차원이 다르다. 가끔 주보와 인터넷에 실리는 소강석 목사님(새에덴교회)의 칼럼을 읽으면, 감동을 받곤 한다. 한국교회와 성도사랑이라는 글의 고민이 절실하기에 웃음이 있고 즐거움이 있으며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힘이 크다.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사실 사랑한다는 고백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촛불로 길을 내고, 그 길 위에 꽃가루를 뿌리고, 장미꽃 백 송이를 들고 음악이 흐르게 하는 준비성에 ‘감동’하겠지만, 겉치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심을 담은 한마디 “나, 너 좋아해”라는 그 한마디가 아닐까? 이렇듯 책으로 진정성을 전달하는 것처럼 힘든 것도 없는 것 같다. 솔직한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도 아니다. 계속적인 글쓰기와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많이 읽어야 하고, 누구나 읽어도 좋을 솔직한 글을 쓰기 위해서 매일 밥 먹듯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주변 환경이나 다른 사람의 눈치 보지 않고 쓰는 용기를 전제로 한다. 십자가 지고 순교할 각오 아니면 맨땅에 헤딩이라도 하듯, 어쩌면 짱돌 맞을 각오를 하고 글을 써야 글이 산다. 스마트 폰에 빠져 책을 안 읽는다고 하지만 역시 베스트셀러는 내용의 충실이자 독자들의 입소문이다. 최근 출판된 『교회오빠 이관희 집사』처럼, 꼭 필요하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공감하고 감동하는 글쓰기·말하기·출판하기·책 읽기를 권하고 싶다. 글을 쓰고 강연하고 책을 출판하는 것이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나 무엇을 하든 ‘정석’은 중요하다. 중요하기 때문에 ‘정석’이다. 기본을 지키지 않는 기술은 ‘겉멋’에 불과하다. 삶이 그렇다. 시대를 읽고 역사를 알고 사람과 문화, 십자가를 사랑하는 그런 책이 더 많이 출판되고 ‘거룩한 독서’를 위해 ‘책 읽기’를 권하는 가을이 되었으면 한다. 결실의 계절에 추수를 기다리듯 건강한 사회를 위한 사랑이 말이나 글로 표현되고 출판되므로 그런 사역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문화의 융성과 영적 회복을 가져오는 거룩한 출발이 있기를 나는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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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강연에서 책 출판, 베스트셀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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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다산신도시 교회이야기
-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건강한 교회는 어디에 있을까? 교인들이 한번쯤 가보고 싶은 교회는 없을까? 새신자가 다니고 싶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주거문화가 바뀌었다. 주택에서 아파트로 바꾸면서 생활양식도 달라지고 있다. 지역마다 신도시가 형성되고 낡은 주거지가 아파트단지로 변모하고 있다. 서울지역만이 아니라 경기도도 하남, 용인, 평택, 갈매, 별내, 다산, 가운 지구 등을 중심으로 신도시가 형성되고 있다. 특히 성남의 분당개발 이후 구리지역의 갈매지역을 이은 남양주의 별내와 다산신도시는 2022년까지 2만5천여 세대(인구 7만~10만)가 들어설 것으로 전망되며, 왕숙지구까지 이어지는 뜨거운 지역으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남양주하면 거의 원진레이온이나 빙그레 공장을 떠올리게 되는데, 바로 그 지역이 그렇다. 지하철 도농역을 중심으로 동화 중고등학교가 있고 양쪽으로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이런 큰 변화앞에 교회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다산신도시가 형성되면서 오랜 세월 지켜온 교회 건물을 잃은 경성교회도 있다. 지역 토박이교회로 동화중고등학교 강당을 사용하는 길가에 교회와 주영광교회, 성림교회, 동화교회, 새중앙 교회 등이 버티고 있으며, 변화를 시도한 교회들이 있어 그, 가능성에 주목하게 된다. 통합측 벧엘교회(담임 양승만 목사)의 경우 아파트 단지를 옮겨 다니며, 3차례 이전과 건축을 한 경우로 단지내 보상을 받고 신축한 교회이다. 자이아파트 옆에 위치하여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있어 새신자들이 유입되고 있다. 찬양대는 새가족을 위한 사역자리로 활용하고 있으며, 주보에서부터 해외선교를 표방하고 있다. 합동측 남양주광염교회(담임 김세열 목사)는 감자탕교회로 알려진 서울광염교회(조현삼 목사)설립 10주년을 기념하여 2003년 분립 개척한 교회로 상가교회로 자리를 잡았다. 투명한 운영과 공동체성을 주보에 담아 전도지로 사용하며 버스에 광고게재를 강점으로 새신자라면 한번쯤은 방문하는 매력있는 교회에 속한다. 여기에 도전장을 내민 교회들이 있다. 합동측 예정교회(담임 설동욱 목사)가 대표적인 교회이다. 중량구에서 지성전을 건축하여 양쪽을 다 뛰며 목회하는데, 설동욱 목사는 부흥사로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인지 아님 교회가 시설과 해피맘기도회 등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잘 갖춰서인지 한해 300여명 정도가 자연스럽게 등록하는 형편이다. 예배 시 광고는 톡톡튀는 동영상뉴스로 주목을 끈다. 주일에 차량을 두고 교회차를 이용하라는 것과 교회주차장은 새신자와 장애인에게 양보하라는 광고는 바람직해 보이기까지 하다. 같은 중량구에서 옮겨온 기감 다산방주교회(담임 이명준 목사)는 다산지역의 끝자리에 건축하여 접근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지만, 진건배수펌프장의 주변 환경이 전원교회 분위기를 연출한다. 1층에 무지개 작은도서관과 노아어린이집, 커피숍을 열고 바리스타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주민들을 불러 올 수 있는 나름의 유입전략이 더 필요해 보인다. 남양주경찰서 뒤편 가운동의 기감 빛가운교회(담임 최정훈 목사)는 기존자리에서 아파트단지와 함께 재건축된 오래된 교회이다. 성시교독(교독문)을 하는 차분하고 심플( simple)한 전통적 예배로 조용히 입소문나며 그래서 잠재가능성이 크다. 인원 대비 공간을 잘 맞추었다. 주보에 담임목사의 글쓰기가 감성적이며 탁월하다. 총동원전도축제 겸 바자회, 주부대상 ‘마더와이즈’와 ‘어성경’성경공부반, 탁구교실, 서예교실 등을 활용하고 있다. 도농 도서관앞에 위치한 합동측 평화교회(담임 김상권 목사)는 겉모습은 상가형태이지만 지하 성전은 5~600명이 들어가는 정도로 규모가 크다. 소그룹 목회로 젊은 40~50대가 주류여서인지 지적이며 모던(modern)하다. 교회 시스템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수요오전 광야학교와 PAT다음세대 교사 학부모기도회, 붕어빵 전도에 주력하고 있다. 워커힐에서 덕소방향으로 가운동 사거리의 기감 하늘숲덕일교회(담임 이정형 목사)는 덕소에서 다산지역으로 건축 이전했다. 주민 초청 문화행사를 가지고 있다. 9월달 조혜련 집사의 간증집회부터 10월에는 유명한 교수들의 특강까지 이어지며, 주민들의 참여로 주목받고 있다. 이 밖에도 상가교회로 풍성한교회, 온생명교회, 나루순복음교회, 하미소교회, 따스한교회, 한빛교회, 두드림교회, 충만한교회, 바라봄교회, 주이음교회 등이 포복으로 전진하고 있다. 교회마다 다양한 전략을 가지고 전도지와 전단지로 교회를 홍보하기도 하고, 전도자들이 아파트 가가호호를 방문하기도 하고, 차량을 돌리기도 한다. 신도시 목회는 준비된 교회, 준비된 목회자에겐 분명 황금어장이다. 40만명의 남양주 시민에 신도시 유입 인구 10만을 바라보고 유동인구 100만을 예상하기도 한다. 최소 10%의 크리스천을 생각하면 1만명 정도로, 1천명 정도 모이는 교회 열 개가 나올 수 있는 그림이다. 단지당 1,500세대, 주민수 5,000명으로 추정 할 때, 건강한교회 하나 정도는 필요하고 가능하지 않겠나 싶다. 신도시에선 새신자를 붙잡지 못하는 교회는 분명 어렵다. 그러다보니 교회를 방문해보면 준비된 예배도 아름답다. 예배시간도 칼같이 1시간 분량이다. 간혹 찬양을 예배전 10분 예배시간에 10분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찬양팀들이 예배에도 계속 찬양을 이끌어 간다. 대예배시간도 현대인에 맞춘 예배시간으로 모이며, 주일오전11시 30분과 12시예배가 공통적이다. 예배찬양(15~20분), 준비된 예배기도, 준비된 설교, 성가대의 찬양까지 거의 모든 부분이 기획되고 있어 현대인의 입맛을 잘 맞추고 있다. 담임 목사와 설교자들의 설교도 내공이 보통이 아니고 화력이 대단히 탁월하다. 다들 탄탄한 구성과 감성에 호소하는 설교에 찬양까지 더 하면 부족함이 없어 보일 정도이다. 여기에 안내도 많다. 그런데 새신자 영접 및 안내에 대한 교육이 전혀 없어 보인다. 교회마다 점심식사는 성찬이다. 은혜로운 예배에 맛있는 식사는 덤이다. 그러나 한 끼의 먹는 것 이상 교회는 지역에 무엇을 줄 것인가를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지역과 소통하지 못하는 교회는 설 자리가 없다. 교회는 지역이나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교회마다 강조점이 다를 수는 있다. 어느 교회는 열심히 새신자 등록할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어느 교회는 신앙생활은 십일조를 꼭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어느 교회는 새 성전을 건축하였으니 헌물을 드려야 한다 광고한다. 왠지 낯설고 부담스럽다. 신도시 이사 와서 예수님 믿어보려고 나온 새 신자에겐 주님이 디자인하신 교회의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가 많이 나와야 한다. 십자가의 복음을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은혜와 영성이 있는 교회, 다산신도시 교회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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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다산신도시 교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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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솔직한 글쓰기와 한국교회 논객
- 사람은 솔직한 글과 말, 마음을 열고 진정성을 가지고 하는 말과 살아있는 글을 대하게 되면 굳게 닫아 놓은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솔직함을 너그러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도 가슴 깊이 묻어 두고 밖으로 마음껏 나타내지 못한다. 그러면서 마음에도 없는 입술의 언어로 겉만 번지르하게 꾸며 낸다. 이것이 예의바르다고 착각한다. 솔직한 말이 어떤 땐 자신의 생각이나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버릇없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벽을 넘어야 성도들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진 비밀스럽고 부끄러운 일들을 가슴에 깊이 묻어 두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산다면, 교회공동체가 건강하게 미래로 나갈 수 없다. 성도들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도록 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모든 것, 모든 일을 사랑의 눈으로 살펴 볼 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힘없고, 불쌍하고, 보잘 것 없고, 작고,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 남에게 버림받은 것들을 사랑할 줄 알게 해야 한다. 더욱이 그들의 아픔을 사랑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이다. 세상에는 진정 아름다운 것도 많지만, 겉으로만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많다. 겉은 번드르 하게 꾸며져 있어 남 보기에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한 번쯤은 따져 보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와 반대로 겉은 볼품없어도 속은 아름답고 쓸모 있는 것도 많으니 그 또한 살려보도록 할 일이다. 거룩함 속에 속된 것이 있고, 속된 것 속에 거룩함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세상사는 참으로 묘한 것들이 많다. 20여 년간 15권의 책을 출간하고 매주 칼럼을 쓰다보니 간혹 이런 분들이 있다. 그냥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면 될 것이지 굳이 썩고 병든 것까지 들추고 파헤쳐 보여서 무얼 배우겠느냐고. 그렇게 걱정 아닌 걱정들을 주시곤 한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찍, 될 수 있는 대로 일찍 찾아내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썩은 원인을 여러 면에서 찾아보게 하고 그 원인에 따라 스스로 치료하면서 바르게 살아가려는 능력을 가진 곳이 ‘교회’요, ‘개혁주의신앙’이 아닐까. 카톨릭교회는 ‘교황’을 만들고 이단 사이비는 ‘교주’를 만들지만, 교황도 교주도 아닌 개혁교회는 건강한 ‘목회자’를 세운다. 그런 가운데 목회자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바르게 세워 가면 쓰임받게 된다. 이렇게 자라고 커야 제대로 사람 구실, 직분자로 사명 감당할 수 있다. 요즘처럼 가령 ‘연합기관들이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존재감 제로라면 해체해야 한다’고 말하고 글을 쓰면 이익집단으로부터 온갖 비난을 각오해야 한다. 이렇듯 솔직한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그렇게 쓸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은 깨끗하다. 솔직한 글을 쓴다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가 꾀나 요령이나 거짓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바보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땀 흘리며 일 할 줄 알고, 어려움을 이겨 낼 줄 알며, 옳지 못한 일에 대해서 강하게 대항할 줄 알고, 그릇된 일은 비판하여 올바른 길을 찾을 줄도 안다. 또한 보는 눈이 넓고, 생각이 깊고, 앞서 가서 멀리 내다볼 줄도 안다. 그것뿐 아니라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며 아름다운 마음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논객’이라고 부르고, 한국교회에도 보수와 진보의 균형을 이루는 중심추이자 개혁의 아이콘 정성진 목사와 시인으로 가장 왕성한 집필과 반기독 운동에 대처하는 사역을 하며 ‘창조적 퍼스트무버’를 자처하는 소강석 목사가 이런 일들을 하고 있지만, 이런 예언자적 지성인 ‘논객’이 한국교회에는 더 많이 필요하다. 꾀나 요령으로, 거짓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눈앞의 이익에만 어두워 자기 밥그릇 지키기 위하여 아웅다웅 다투며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남의 괴로움 따위는 모르거나 알아도 모르는 척 한다. 사실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척 하지만 정말 어렵게 더불어 살아야 할 일에는 발뺌한다. 참되게 사는 맛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아주 불행한 사람이다. 한국교회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기쁜 일, 슬픈 일, 억울한 일, 답답한 일, 따져 볼 일, 외로움, 놀라움, 신비로움 등 수 도 없이 많다. 신앙이나 인생은 매일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같다. 그래서 끝까지 가본 사람만 이 시작을 알 수 있다. 듣는 이들이나 글을 읽는 사람 중에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큰 위로가 될 것이고, 그와 같은 처지에 있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처지를 잘 이해하게 되어 결국 모두 한마음, 한 뜻, 한 방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사성 있는 주제를 다루는 논객이 생각할 것은 시대정신과 역사, 그리고 사람 등 일 것이다. 이런 깊이와 넓이, 그리고 안목을 가지고 슬기로운 신앙생활과 나라사랑, 사명감당의 말과 글로 사회와 소통하며 마음껏 풀어 놓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설교문의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논객, 즉 글쟁이들은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마음의 눈을 크게 뜨도록 해야 한다. 솔직한 글쓰기를 통해 최근 집필한『나이롱 집사와 기둥같은 제직』이라는 책은 한국교회와 직분자와 청지기들을 세우기 위해 다시 3·1운동을 시작한다는 관점에서 펜에 피땀과 교회를 향한 사랑을 찍어 썼다. 글 쓰는 재주가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며 쓰다가 죽을 뻔 했지만 제 두 어깨는 교회를 향한 소명감으로 항상 무겁고, 제 가슴은 건강한 교회를 만들 열정으로 뜨거웠다. 제 머리에는 온통 주님이 디자인 하신 새로운 교회를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예수님을 닮아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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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솔직한 글쓰기와 한국교회 논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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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피로사회’에서 살아남기, 교회는?
- ‘오늘도 행복하세요.’ 채팅이나 문자메시지를 통해 종종 주고받는 말이다. 이런 문자를 받으면 ‘행복이 뭔지’ 고민하게 된다. 2018년 연말 발표된 전 세계 나라별 행복지수에서 우리나라는 57위에 올라있다. 행복지수는 그 나라 △국민1인당 GDP(국민총생산)△건강하게 사는 기대수명, △어려울 때 도와줄 친구, 친척, △선택의 자유, △관용(어려운 이웃을 지난날 도왔는가), △부패지수 등을 반영한 것이다. 한국인이 바라는 행복한 모습은 아마도 능력(업적)과 성공의 일치일 것이다. 그러나 모 언론사가 조사한 한국인의 주관적 행복도 결과 100점 만점에 55.95점으로 매년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능력(업적)=성공이 행복이라는 생각은 능력(업적)을 최상의 가치로 만드는 성과사회의 패러다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경제적 요소나 성공이 행복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성공’이 ‘행복’이라는 성과사회의 모습은 한국사회의 현실과 일치한다. 이 점은 긍정의 힘을 통한 성공을 설교하는 처세 관련 책들이 한국의 도서 시장에서 얼마나 많이 팔리고 있는지를 보더라도 확인되는 점이다. 이런 현대사회의 성과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한 철학 서적이 한병철 교수의『피로사회』이다. 이 책에선 냉전, 규율사회 등 부정성을 바탕으로 한 과거의 사회에서 현재는 부정성이 제거되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화했다며. 이 새로운 사회를 ‘성과사회’,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성과주체’라고 말한다. 과거의 사회가 “해서는 안 된다”라는 금지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라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유일한 규율처럼 여겨지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Yes, we can!”의 긍정의 정신이다. 이런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 한 교수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성과위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가 가져온 결과라는 것이다. 더 큰 성과를 올려서, 더 큰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자본주의는 전체적인 생산성을 극대화해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착취는 이렇게 해서 자발적인 착취의 양상을 띤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노동수용소에 스스로 가두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존재하려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가 모든 개개인의 마음속에 고착화된 지상과제가 될 때, 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양산하게 된다. 현대사회의 시대적 질병으로 ‘우울증’을 들 수 있다. 근현대에 접어들면서 인간 착취의 동력은 억압으로 부터 자유(롭다는 느낌)으로 전환됐다. 타자보다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며, 자아는 자아에게 무한으로 긍정되며 착취에 매혹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이렇게 긍정성으로 무장된 자아들은 그럴 수 없는 현실의 자아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마주치며 갈등하고 소모된다. 활동하는 인간의 소진은 여기에서 온다. ‘성취할 수 있다, 그러면 좋은 사람일 수 있다’라고 착각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인간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양극단이다.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이런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상태에 만들게 된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성과위주의 사회가 주는 피로도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이다. 이런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오직 자아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그러므로 극단으로 치닫게 한다. 모든 권위를 타파하고 가장 완전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한 서구사회나 현대사회에서, 부정성이 거의 완전히 제거된 듯한 긍정성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의문이 있다. 다시 말해 “왜 우리는 여전히 진정 자유롭지 못한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라는 의문이다. 교회는 성과사회의 과잉활동, 과잉자극에 맞서 사색적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쉼과 안식이라는 영성적 가치를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피로’의 개념도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성과사회에서 보면 ‘피로’란 할 수 있는 능력의 감소이고, 그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무위의 가치에서 출발하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아나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깊은 사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라고 보아 한다. 모든 것을 ‘예’라고 긍정하던 자아는 "아니오(NO)” 라는 선을 설정하고 말해야 한다. 적당히 얼버무리는 처세가 지혜로운듯해도 양심이 신음하는 소리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인 동시에 그로 인해 악화(惡化)가 악화(惡化)를 더 견고히 구축케 한다. 아니라고 말할 용기는 깊은 자아 성찰을 불러온다. 막간의 시간이 주어지고 사유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부정’인 것이다. 부정되는 것이 자아인지, 타자인지, 자아의 긍정성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부정하는 행위가 반드시 필요하다. 한 교수는 평화로운 ‘막간의 시간’에서 ‘쓸모없음의 쓸모’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쓸모없음의 쓸모를 깨닫고 나서야 치유적 피로, 피로의 공동체적 해결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어찌보면 "깊은 심심함"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현상이 극대화된 긍정의 징후는 아닐까. 현대인들이 일이나 스마트폰 등 여러 중독에 빠지는 이유라는 점에서 유감을 표시한다. ‘깊은 말씀묵상으로 멍’때리기’나 ‘거룩한 독서’가 정신건강과 자아에 오히려 큰 도움과 유익이 될 수 있다. 현대인의 자아는 리비도적 에너지의 대부분을 자기 자신에게 사용한다. 그렇게 쓰고 남은 리비도는 계속 늘어나는 연락처와 일시적 관계에 배분되고 사용한다. 매우 약한 리비도를 타자에게서 빼내어 새로운 대상에 투여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므로 소중한 사람의 가치를 외면하고 관계성이 가장 낮은 수준의 스치는 만남 정도로 그친다. 이렇듯 현대인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성과위주의 피로사회에서 살아남기가 참 힘들다. ‘수고하고 무거운 짊진 자들’을 부르시고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의 교회는 그들에게 쉼과 안식을 주는 그런 ‘공동체’가 되고 있는가? 대안이 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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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피로사회’에서 살아남기, 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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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천로역정’(天路歷程) 이은 ‘명심도’(明心圖)
- 나는 애서가(愛書家)이다. 그러다보니 책 수집 특히 고서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일을 즐겨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한국교회에서 ‘기독교서지연구가’라는 평까지 듣게 되었다. 여러 책들을 구입하게 되면 제일 먼저 사진을 찍고, 스캔을 뜨고, 그 내용을 읽고 요약 정리하여 문서화하고 하다 보니 어느새 그 자료가 칼럼이 되고 논문이 되고 말았다. 특히 근대기독교 고서 중 독특한 것으로, 역사적 평가와 함께 주목하게 되는 책이 ‘그림’이 있는 「천로역정(天路歷程,ThePilgrim's Progress)」과「명심도(明心圖)」이다. 「천로역정」은 영국의 청교도 작가 존 번연(1628∼1688)의 소설로 1678년 초판이 나왔다. 1895년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과 부인 깁슨이 당시 한글로 번역한 「텬료력뎡」은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가 읽고 감명을 받음으로써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이끌어낸 원동력이 됐다. 초판은 소설의 제1부를 2책으로 나눠 목판으로 인쇄하였으며 미려한 한지를 사용하여 한 장 제본으로 만들어졌다. 책 중 삽화는 총 42장으로 당대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 화백의 삽화도 수록돼 있다. 기산의 이 그림은 외래종교인 기독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해 토착적인 전통을 반영한 한국 개신교 미술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가하면 1913년 출판된 「명심도(明心圖)」는 「천로역정」을 이은 최고의 전도책자로 주목하게 되는 미서(美書)중 하나이다. 책의 간기를 살펴보면 배부인(裵夫人)역술로 나오는데 이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William M. Baird, 裵偉良)선교사의 부인(夫人)을 말하는 것 같다. 조선예수교서회의 초기 전도책자 「명심도」는 기독교의 진리를 그림을 통해 쉽게 전달하려는 전도책자로 국판 22면을 순한글 내려쓰기로 돼 있는데 이 책은 원래 1820년 초반, 고스너(J. E. Gossner)에 의해 독일에서 발간된 책인데 중국어로 돼 있던 것을 베어드 선교사 부인이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명심도(明心圖)」는 9장의 그림과 그 그림에 대한 설명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으며, 인간의 마음과 마음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생각들을 동물로 비유했다. 기독교의 진리를 그림을 통해 쉽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충분히 반영된 이 전도책자는 성결교단의 최고의 부흥사이자 한국의 무디로 칭송 받아온 이성봉 목사는 전국을 다니며 「텬료력뎡」과 ‘명심도 강화’라는 제목으로 부흥회를 개최할 정도로 두 책을 높게 평가했다. 1956년에 이성봉 목사는 그 동안의 부흥회 내용을 정리하여 그림과 찬송을 넣어 「명심도강화」라는 이름으로 책을 출간했다. 이 목사는 머리말에서 이 책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을 밝혔는데 무엇보다 정결함, 특히 마음을 단정하게 갖는 것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안과 머리로 보고 아는 것이 아니요, 맑고 맑은 심정을 가진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만이 알게 되는 분”이라고 피력했다. 그리고 그는 ‘마음’에 대해서도 역설했다. 9개의 그림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 단계부터 죽음이라는 마지막 단계까지 어떠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마음이라는 그릇을 어떻게 채우는가에 따라 천국에 갈 것인가, 지옥에 갈 것인가가 결정되기 때문에 바른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도를 좇아 하나님을 공경하고 정욕을 좇아 마귀의 꾐에 빠지지 않기를…” 이성봉 목사는 간절히 바랬다. 이성봉 목사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늘나라 본점에 가기 전 우리의 심령에는 하늘나라 지점이 이루어지는데, 성도인 우리 모두는 천국 본점의 영광을 잘 반영하는 천국 지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명심도’는 발전하여 해방 후 「박군의 심정」으로 기독교부흥협회에서 발행되었으며, 부흥회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고 그 후 「박군의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개편돼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전도하는데 널리 사용되었다. 1984년 승리의 생활사에서는「당신의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현대인에게 맞춰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마음에는 항상 어둡고 어둠을 좋아하는 일곱 가지 동물들이 있는데, 이 동물들을 다 쫓아내야 우리의 마음이 밝아지고 참 평안과 즐거움이 깃든다면서 일곱 가지 동물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 남들 앞에 나서서 자기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공작새. 둘째, 욕심 많고 지저분한 돼지. 셋째, 턱에 긴 수염을 달고 어른인체하기를 좋아하는 염소. 넷째, 자기 필요에 따라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자라. 다섯째, 얕은꾀와 눈치지 하는 여우. 여섯째, 이간질하는 뱀. 일곱째, 혈기를 부리는 호랑이. 그런데 이 일곱 동물을 우리의 힘으로 몰아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들을 내어 쫓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마음에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 모시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우리 마음에서 예수님이 잠시만 떠나시면 그 순간 일곱 동물들은 다시 쏜살같이 들어온다. 들어오되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더 악한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온다(마 12:44-45). 그러므로 중요한 일은 항상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는 일이다. 오늘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잡다한 것들이 자리 하지 않도록 예수님을 모시는 일을 최우선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맑고 깨끗한 영성, 더 나아가 건강한 신앙은 그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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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천로역정’(天路歷程) 이은 ‘명심도’(明心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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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목사] ‘방애인(方愛仁)소전(小傳)’ 저자 배은희 목사의 신앙 여정
- 근대기독교 자료 중 1934년 출판된『방애인(方愛仁)소전(小傳)((전주 유치원)』은 일제 강점기 한 신앙인의 삶이 이리도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 ‘방애인 성자’는 이북 황주에서 1909년에 출생하여 개성 호수돈여고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 뒤 전주기전여학교에서 재직하게 되었다. 교회 일과 남들이 외면하는 거리의 정신병자를 보살피며, 고아들을 손수 업고 다니는 거리의 천사로 살았다. 그 시절에는 거리에 정신병자도 고아도 많았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24세의 나이로 아깝게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았다. 아침 한 끼 금식하면서 기도로써 모든 일을 실천했고 서문밖교회 옆에 고아들을 모아 고아원을 처음으로 세웠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예수님을 닮으려 했던 한 여성의 삶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책의 저자 배은희(裵恩希) 목사의 삶도 또한 그러하였다. 저자는 경북 달성(현 대구 달성) 출신으로 17세 때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잠시 방랑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교회에 발을 드려놓게 되었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자신이 살던 집을 교회로 사용하도록 허락하였으며, 교회 안에 숭덕학교(崇德學校)를 세워 피폐했던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기도 했으며, 스스로 전도자를 자임하며, 학교장으로, 젊은이들의 스승으로 1인 3역을 감당하기도 했다. 그 후 평양신학교 재학시절에는 1919년 3.1독립운동을 맞이하여 학생시위 운동에 앞장서 민족의 울분을 터트리기도 하였다. 이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3월 8일 대구만세시위에도 주도적으로 가담하였으며, 이후 일제 당국의 감시가 심해지자 일경의 눈을 피해 마산과 부산 등지로 옮겨 다니며 살아야만 했다. 당시 경주지역 계남교회 시무할 때 전주의 서문밖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던 만남으로 192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후인 1921년에는 서문밖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활동을 하면서 1927년 경성(京城)에서 조직된 국내유일의 민족유일운동으로 조직된 신간회(新幹會) 전주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지역의 민족의식과 자립자활의 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교회 안에 유치원 설립과 야학을 개설해 계몽과 교육에 앞장섰다. 야학은 한때 학생수가 5,6백명에 달하였다. 또한 배 목사는 농촌교회부흥운동을 모색하며 1929년부터 ‘독신전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는데 그 대상지역은 전북 일대였다. 후에 ‘독신전도단’을 ‘복음전도단’으로 개편하여 재출발했으나 일제와 신사참배 문제로 갈등이 생겨 강제해산 당하는 아픔을 겪고 투옥되기도 하였다. 배 목사의 청년과 다음세대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보여준 조선성자『방애인소전』책 서문에서 “그를 보고 들은 대로 또는 그의 고향인 황주를 찾아 그의 부모님들에게 눈물겨운 일화도 듣고, 남겨둔 적은 일기 두어 책을 얻어서 옛사람이 된 방애인양보다 장차 움터 나올 미래의 수많은 조선의 성자를 향하여 이 적은 전기를 썼다”고 밝히고 있다. 배 목사는 이 책을 통해 “기독청년에게 희생은 사랑”이라며 “청년들이 조선교회를 살리자”고 역설하며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걸었고, 젊은이들의 신앙적 스승이 되었다. 배 목사는 1932년과 1936년 두 차례나 전북노회 노회장을 역임하며, 1936년 산상보훈을 해설한『천국오강(天國五講(성서연구사)』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소화3년(1925) 무주군 적산산성에서 청년들에게 산상보훈을 강해하였고, 그 해 8월 경성시 우이동에서 개최하는 조선 남녀 기독청년연합회에서 산상보훈을 강해 한 일이 있어 청년들의 요구에 응하여 방인근 선생의 주선으로 소화6년(1931년) 출판 인가가 되었으나 출판비로 어려움을 겪다 몇 몇 친구들의 원조로 출판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배 목사는 계속해서 1939년 출판한『기독교는 무엇인가 (상편)(성서 연구사)』라는 그의 설교집은 그가 복음을 들고 강단에 선지 30년을 회고하며, 시대사조를 따르는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회개, 참회를 공개하며 기독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인생관, 신관, 속죄관, 진리관, 생명관, 신앙관, 심판관, 천국관 등 11강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렇듯 목회와 저술을 통하여 젊은이들과 소통하며, 신앙적 문제에 깊은 성찰을 통해 해답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1943년 일제 패망직전에 더 이상 교회에 머물며 정상적인 목회활동이 어렵게 되자 스스로 전주교회를 사임하고 건강악화로 요양하며 그의 사역은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하고 1945년 8.15 해방을 맞으며 전북치안대책위원장을 맡았고 1946년 광복 이듬해 6월 12일 서울 승동교회(勝洞敎會)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2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까지 선출되었다. 한국교회가 해방 직후 혼란기에 처했던 교회를 이끌어갈 총회장으로 선택한 것은 그의 올곧은 신앙과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6.25전쟁 중이던 1951년 경북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등 목사로써 해방된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영광과 기회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조국에서 신앙의 정도를 걸어가고자 고뇌했던 한 목회자가 남긴 세 권의 유작을 주목하게 된다. 젊은이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신앙스승이 된 배은희 목사의 삶의 여정, 그래서인지 저자 배은희 목사의 삶과 신앙이 아름답게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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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목사] ‘방애인(方愛仁)소전(小傳)’ 저자 배은희 목사의 신앙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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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1919년 임시정부수립을 주도한 현순(玄楯) 목사
- 3·1운동 100주년을 보내며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중 대표적 목회자를 꼽으라면, 함태영(연동교회)·전덕기(상동교회)·신석구(수표교교회)·손정도(동대문교회)·현순(정동교회) 목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이 땅에 진정한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 국가가 수립되기를 바랐던 열렬한 애국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과 사상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상해(上海)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4월에 기독교가 중심 되고 주도하였던 상해 임시정부수립에 있어 상해 임시정부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현순 목사 등을 기억하므로 이름없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고뇌와 열정, 독립을 위한 헌신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 수립의 공로자 중 현순(玄楯) 목사는 하와이 이민사에 있어 막중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현순은 1880년(고종17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6년 선교사 무어가 설립한 승동교회에서 처음 윤치호의 설교를 듣게 되고, 일본 유학시절 1901년 친구를 따라 YMCA 성경반에 들어가 공부한 후 도쿄의 제일침례교회에 들어가 찰스 피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그는 관립외국어학교에서 공부한 후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으로, 인천 내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독립협회를 거쳐 1902년 감리교 선교사들이 주도한 한국인들의 하와이 이민에 깊이 참여한다. 1907년 하와이에서 귀국한 현순은 1909년 전덕기, 최병헌 등과 감리교 협성신학교 제1회를 졸업한 후 배재학당과 상동청년학원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며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서울의 대표적 감리교회인 정동제일교회에서 목회하면서 1914년에는 전국을 순회하는 부흥사로 활약하였다. 현순 목사는 부흥회와 복음전도라는 장(場)을 통해 기독교와 민주주의 정신을 가르침으로써 장차 한국민이 일본으로부터 독립 할 수 있도록 영적·정신적 능력을 배양하고자 했다. 인재양성을 위해 현순 목사는 서강(西江) 창전리(倉前里)의 의법학교(醫法學校)의 교장으로 1918년『영어입문(英語入門)』을 출간하였다. 100년전, 1919년 2월 19일 현순 목사는 당시 김필수 목사의 권유로 3·1운동 모의에 참여한다. 다음날 함태영 목사 등 운동 지도부는 영어를 잘하는 현순 목사를 상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3·1운동을 해외에 널리 알리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2월 24일 그는 가족들을 남겨둔 채 용산역을 떠나 3월 1일 상해에 도착,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서방 세계에 타전하였다. 그 뒤 중국 상해에 밀파되어 평화회의의 주도자인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T. W.)과 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어 동양평화유지에 있어 한국의 독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여 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에게 한국독립을 찬성하도록 고조하는 한편, 한국과 파리와의 통신연락을 취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의 독립지사가 상해에 모이자 이광수·선우혁 등과 함께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에 임시독립사무소를 개설, 총무로 위임받아 각국에 독립선언서를 발부하였다. 같은 해 서울에서 개최된 국내 13도 대표의 국민대회에서 결의한 각원(閣員) 명단에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4월 11일 상해에서 손정도 목사 등 29명과 함께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조소앙·남형우·이시영·한기악 등이 기초한 임시헌장 10개조를 통과시킴으로써 4월 13일 역사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외무차장으로, 그 뒤 정부의 조직개편으로 외무위원에, 8월 5일 내무부차장에 임명되었고, 9월 20일에는 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노령(露領)·만주 등지에서 많은 활동을 전개하고 귀환한 뒤 11월 14일 내무부차장직을 사임하였다. 그 후 1920년 4월 21일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안현경과 함께 상해를 떠나 미국 뉴욕에 도착, 구미위원부 위원장서리에 추대되어 외교공세를 펴기도 하였다. 1922년 7월 안창호·이동녕·김구·차이석·여운형·이시영·노백린·홍진 등 10여명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외곽단체 중의 하나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주요간부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현순 목사는 3.1운동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연결시킨 가교적 인물이었고, 통합 정부의 출범에도 남다른 기여를 하였다. 임시정부가 재정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1930년대에는 하와이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 그는 임시정부가 민족진영의 대본영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1941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태평양 전쟁 시기 그는 중한민중동맹단과 조선민족 혁명당 하와이총지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좌우 연립정부의 구성과 직접적인 군사행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945년 일본의 패망후 신국가의 체제가 미국식도 아니고 소련식도 아닌 한국식이어야 한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주창한 것이다. 당시 한국교회사 속에서 현순 목사 같은 독립운동가로 지성과 영성을 소유한 실력있는 부흥사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그의 저서『현순자사(玄楯自史)』와『영어입문(英語入門)』은 기독교자료만이 아니라 근대 역사 교육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3·1운동 직전에 상해로 망명한 후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조국독립을 위하여 세계를 한 바퀴이상 돌며 분투했던 목회자 현순,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고 1968년 소천했다. 그리고 10여년 후 1975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되었다. 해방된 지 30년이 지나 조국의 땅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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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1919년 임시정부수립을 주도한 현순(玄楯)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