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15(월)

칼럼
Home >  칼럼  >  이효상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이효상 칼럼 기사

  • [이효상 칼럼] 교회가 플랫폼이다
    급격한 변화다. 상상을 초월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의 연속이다. 주변에서는 코로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수라고 한다. 그 변화는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위기와 불안이 우리를 뒤덮고 있다. 특히 기독교는 코로나19 확산의 주범처럼 인식되어 더욱 큰 지탄을 받고 있어 사회적 신뢰를 잃고 있다. 미국 예일대 교수이자 역사학회장이었던 케네스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 1884년~1968년)는 “영향력 면에서 본다면, 인류 역사에서 기독교만큼 큰 영향을 끼친 단일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했고,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년∼1975년)도 “우리 서양문명은 기독교회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한국의 근대사에서도 기독교의 선한영향력은 다르지 않다.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배재대학교, 배화여자대학교 등 근대교육, 세브란스병원, 이화여대병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등 근대의료, 사회복지의 시작인 태화복지재단 등 기독교로 인한 영향력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다. 성경을 통한 한글보급으로 문명개혁을, 여성들의 교회를 기초로 한 사회활동으로 평등구현을, 근대교육으로 교육혁신을, 근대의료의 시작으로 의료혁신을, 최초의 한글점자개발로 언어혁신을, 민족과 독립운동으로 나라사랑을 이룬 것이 한국교회이다. 한국 기독교는 변화의 아이콘(icon)이었고, 개혁과 혁신의 주역이었다. 한국교회의 회복은 복음으로 근대역사를 이룬 그 선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는 길이다. 영향력도 떨어지고 호감도도 떨어지고 있다. 위기는 기회라고 한다. 그렇다면, 코로나 팬데믹 상황으로 더 힘들어진 시대 상황은 기회로 삼자. 이 기회를 살려야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 다산지역의 교회 예배에 참석해 “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 우릴 사용 하소서” 찬양하다 가사의 한 대목에 울컥 은혜를 받으며 자꾸 입가에 맴돈다. 사도 바울은 ‘에클레시아’로 표현한 ‘에클레시아’는 건물과 조직을 뛰어넘는 공동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요, 신분과 인종과 언어의 경계를 뛰어넘어 평등한 민주적 모임을 생각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질서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생각한 것이다. 지금 현재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새로운 질서(New normal)의 재편’이다. 바울은 그 ‘새로운 질서’를 전혀 새롭지 않은 것에서 찾았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것에서 찾았다. ‘새로운 질서’를 요구받는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 방향성에 대한 고민과 헌신이 필요하다. 남양주시 특히 다산신도시의 발전은 눈부시다. 주거문화가 아파트로 급격히 바뀌고 있다. ‘신도시’라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신도시는 발전과 더불어 양극화로 접어든다. 주변 양정동을 보면 그 발전성과가 과연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가. 도시 형성과정에서 생활터전에서 쫓겨나는 원주민들의 피눈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신도시교회로써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존립 근거부터 명확히 규정하는 일도 시급한 과제다. 그만큼 지역과 선교, 마을공동체에 대한 교회의 관련성이 야기된다. 우리가 사는 지역의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일까. ‘저출산 고령화’아닐까. 출산 어떻게 장려하고, 노인 빈곤문제에 어떻게 동참해 문제를 해소 하느냐가 관건이다. 교회의 방향성에서 지역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괴롬과 죄가 있는 세상을 외면해야 할까. 아니면 두 눈을 부릅떠야 할까.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교회는 모이는 것만큼 지역과 세상을 향해서 흩어지는 본래의 사명을 회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교회가 변화된 현실에서 미래교회를 준비하며 이 땅의 젊은이들과 소외된 자들에게 다시 희망을 노래하고 꿈과 비전을 심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시급한 일들이 무엇일까? 교회가 지역과 함께하며, 다른 세대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 절실해 보인다. 지치고 힘든 때일수록 가정마다 회복되고 지역의 기초인 교회가 소외된 사람을 보듬어 주어야 하는데, 교회마저 코로나 상황에서 심각한 어려움속에 제대로 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다산신도시에는 60여개 교회가 있다. 이들이 자리나 명예에 대한 욕심도 버리고, 섬기고 낮아지고 헌신하고 봉사하려는 마음으로 지역의 필요를 채우기 시작했다. 벧엘교회(양승만 목사)는 다산신도시의 공공재로 교회장소를 필요시 제공하고 꾸준히 협력 후원해 왔다. 남양주광염교회(김세열 목사)에서 지난해 10월 관내 청소년들의 건강한 성장을 격려하기 위해 취약아동의 꿈을 응원하기 위해 운동화 15켤레를 기부한데 이어 연말 겨울 점퍼 10벌을 전달했다. 다산두레교회(차영근 목사)는 지난해 추수감사절 헌금으로 지역의 결식아동과 10kg의 쌀 100여포를 나누기도 하였다. 평화교회(김상권 목사)도 지난해 8월 쌀 1,000kg(10kg 100포)를 기증한데 이어 년말에 700Kg(10Kg 70포)를 추가 전달했다. 다산중앙교회(최식 목사)는 새해 설 명절을 앞두고 선물 꾸러미 150세트를 나누었다. 명절 선물 꾸러미는 담요, 오색 국수 세트, 미역으로 구성됐다. 어떤 방식으로든 지역주민들과 호흡하며 제2의 삶에 대한 준비할 수 있는 동반자가 되어주면 어떨까. 개교회 중심의 작은 영역에서 범위가 점점 넓어져 동네만이 아니라 지역 사랑으로 뻗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다산동은 금년 말까지 인구수가 15만명에 이르게 되는데,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에게 사회보장협의회가 있지만 그래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데 교회가 연합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것 같다. 다산신도시를 마을공동체가 살아나는 ‘다산특별시’로 만드는 일에 다산행정복지센터(박승복 센터장)와 다산기독교연합회(회장 최식 목사), 서부희망케어센터 (신영미 센터장)와 다산문화예술진흥원(이효상 원장) 등 지역의 기관들이 함께 선한 디자이너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서부희망케어센터 신영미 센터장도 “교회가 전하는 따뜻한 마음이 이웃들에게 전달돼 모두가 즐겁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지역 사회를 위한 복지 사업에 사각지대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한다. 교회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죄를 지은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을 베풀었을 때,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된 공생애 동안에 저 멀리 시리아와 요단강 건너편과 예루살렘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도움을 받았다. 교회가 자기 목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적극적으로 지역과 세상을 향해서 나가야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교회 주위에서 고통당하는 강도만난 자에게 참된 이웃으로 다가가는 교회의 예수사랑의 길이다. 교회의 선한 영향력은 지역의 ‘MZ’세대를 품는 일이다. ‘MZ세대’는 밀레니얼(Millennials)의 M과 제네레이션(Generation)의 Z를 합친 합성어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축복하면서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바로 이 시대의 MZ 세대를 품고 v 눈떠야 할 교회를 일깨우는 말씀이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 건물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이를 위해 ‘공유’해야 한다. 십자가를 지는 일과 MZ 세대를 품는 일은 지금 고난 속에 있는 한국교회가 시급한 일이다. 이제 미래한국교회는 스스로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모임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교회의 공간을 제공해 주면 좋겠다. MZ세대를 끌어안는 모임을 위해 교회 시설을 제공한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다산 지역의 미래가 소외된 자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젊은이들의 활동무대가 되어 미래를 향해 날개를 펼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모든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자유롭게 찾아올 수 있는 공유 장소로 활용되어야 한다. 이 참에 NGO단체들이나, 아동센터, 작은 도서관 등 지역 사무실을 별도로 할 것이 아니라 미래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공간이 되도록 사람들이 모이는 중심이 되도로 생각을 전환하고 예산을 재편성해 지원하며, 공유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되었으면 좋겠다. 선한 영향력을 뻗어 갈수록 좋다. 교회가 플랫폼(platform)이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2-01-20
  • [이효상 칼럼] 할 말은 좀 하고 사시나요?
    한 해를 뒤돌아보니 할 말을 다 못하고 살 때가 참 많았다. 살다보니 그렇게 되더라.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아내나 자녀에게까지도 쉽지 않다. 그만큼 마음을 전하고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 같은 말도 어떻게 전해지느냐에 따라 반응이 천차만별이다.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역(逆)으로 바보 취급받는다. 여러 모임에 나가면 한마디를 하시라고 종종 권유를 받는다. 말하려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신경쓰이고 눈치를 보게 된다. 그냥 편하게 느낀대로 말을 했을 때 돌아올 후환(後患)에 대해서. 분위기를 위해 덕담을 해야 하는 건지, 모임의 발전을 위한 의견을 말해야 하는 건지. 초청한 리더를 칭찬해야 하는 건지. 한국인들은 주로 말끝마다 “같아요”를 붙이는 불분명한 화법을 쓴다. 어떤 의견이나 상황에 동의한다면 간결하게 “나도 그렇다”라고 표현해야 한다. 그런데 굳이 “그런 것 같아요”라고 말해 버린다. 본심이 드러나지 않으려 돌려 표현한다. 이는 자신의 생각을 에둘러 말하는 것이 ‘겸손’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많은 사람이 해야 할 말을 못해 즉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는다. 뒷담화로 풀기도 한다. 심지어 그런 자신을 자책하면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살면서 좋은 게 좋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말을 못하는 경우가 참 많다. 앞뒤 재다보면 오늘도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온다. 특히 교회를 다녀보면 제대로 된 말을 못하는 경우가 참 많다. 설교자나 청중이 마찬가지다. 그냥 일방적으로 목사님의 설교만 듣고 와야 하는 것일까. 토크쇼(talk show)같은 쌍방소통의 시대는 안 오는 것인가. 조선시대 허균(許筠: 1569~1618)이 지은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읽어보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고민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사회적 관습의 제약으로부터 언제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형을 형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삶은 늘 그런 것인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 못하는 사람,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부패한 세력들이 갈 때까지 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다. 정치인의 간담회라고 초대받았는데, 정치인의 일장연설만 듣고 소통도 공감도 못하고 오는 경우가 있었다. 시민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자기 할 말만하고 기회를 안줘서 제대로 된 말을 못한 경우다. 이처럼 정치를 오래한 경우 말이 화려하고 그 때 그 때 장소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말하는 실력이 탁월하다. 사람들은 사이다발언이라고 좋아하지만 말의 일관성은 전혀 결여되어 있다. 그런가하면 정치초보는 말을 시원하게 못해 그가 가진 진실성이나 비전을 제대로 어필하지 못해 듣는 이들을 답답하게 하곤 한다. 믿음직한 말은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사용하지 않아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않다는 점이다. 요즘 대선후보가 그렇다. 지인이 코로나19 확진자가 되었는데 같이 있던 밀접접촉자들이 다수 있어 그분들에게 “코로나 검사를 받고 검사결과를 카톡(Kakao Talk)으로 올려 달라”고 했더니 다들 노발대발이다. 전체가 조심하자고, 더 이상 확산을 막자고 한 말인데, 물론 본인도 다른데서 감염돼서 억울하겠지만 감염증상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정말 잘못이다. 이럴 경우 “본의 아니게 이렇게 돼서 죄송합니다”하는 사과의 말 한마디와 함께 검사결과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돌아온 대답은 “위로는 못해줄망정 상처에 소금 뿌리냐”는 것이었다. 검사를 회피하는 밀접접촉자에게 검사를 받도록 독촉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민폐가 될 수 있고, 피해를 발생시킬 경우 피해를 보상해야 할 수도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더 발끈하였다. 이런 코로나로 인하여 그 장소는 최소 한 주간 문을 닫게 되고 여러 사람들이 역학조사와 추운 날씨에 두세 시간 걸려 검사를 받게 되었다. 난 백신을 맞아 괜찮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대처하면 안되는데 코로나가 확진자가 된 건 안타깝지만 공동체를 위해 사후처리가 너무 개인적 편의주의로 가면 안되기 때문이다. 할 말은 좀 하고 살자. 의식적으로라도 침묵의 방조자적 삶을 거부하자. 개인이 소통 회피가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이럴 때 아무도 말하지 않고 그냥 덮고 넘어 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건강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말하든, 온유하고 다정하게 말하든, 거칠고 까칠하게 말하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고함을 치든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말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마스크를 썼다고 말까지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말하고 살자. 사실 필자도 소심한 성격 탓일까 어찌보면 ‘침묵의 방조자’로 산다. 틀린 것에 대해서 "아니요" 라고 말하기 보단 침묵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그것은 아니다' 라고 말해 그 내용이 잘못되었다면 정중하게 사과하거나 용서를 비는 한이 있어도 나에겐 말할 권리가 있다. 책임을 요구하면 책임질 각오로 말이다. 책임지기 싫어서 침묵하고 방조하거나 회피하는 비겁한 삶을 살면 안 될 것 같은 나이다. 젊어서부터 20여년 이상을 그래서 열심히 발언했다. 각종 회의에 참여할 때마다 열심히 듣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고 발언하려고 노력했다. 때로 흐린 판단력 때문에 지적도 받고 비난을 듣기도 했다. 그럴 때는 거침없이 사과하고 싹싹 용서를 빌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잘했다라는 자부심이 든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더 최악의 상황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의 경륜, 선배, 임원, 자리, 완장을 이유로 명백한 오류를 범하거나 잘못 행동할 때는 발언권을 얻어 말했다. 개인의 자리나 이권에 득(得)보려는 사심이 애당초 없었기 때문이었다. 각종 모임에서 회의가 빈번하게 진행된다. 이 회(會)를 운영 하려면 회의 때마다 겸양지덕을 가지고 경청하는 것만이 미덕(美德)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의도된 정치꾼, 조직적으로 세력화된, 소위 "꾼"들이 짜고 자리를 차지하고, 회(會)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고, 재정을 맘대로 집행하거나 사적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좋을 수 있는 분위기를 리더의 잘못된 처신으로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흔히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연합하는 공동체(共同體)를 만들기 보다는 혼자의 생각만으로 모든 일들을 진행하는 친목회(親睦會)로 전락시키고, 소위 ‘나를 따르라’는 리더의 경우 황당하기 그지없다. 회원들의 참여가 줄어들고 행사에는 회원들의 의견 개진이 전혀 없게 된다. 혼자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본인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공유(共有)하거나 함께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럼 계획한 행사가 제대로 되겠는가. 사적인 욕심이 연합을 망친다. 어느 조직이든 사람들이 모여드는 리더가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떠나가는 리더가 있다. 단체든 기관이든 희망을 가진 회원들의 기대를 져 버리지 말아야 한다. 공(公)적인 것을 사(私)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하여 "아니요", "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라고 말하지 못하는 위원이나 임원은 그 모임에서 결정된 잘못된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책임은 회원들 앞에서 뿐 아니다. 역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냉정하게 발언하고, 정당한 의견을 피력하고 표현하는 역할의 상당 부분은 깨어있는 리더들이 해야 할 몫이다. 서로 짜고 치는 것에 익숙해지면 그 책임을 고스란히 자신들이 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렵고 떨림이 있어야 한다. 코로나로 철저히 마스크를 썼지 않는가? 얼굴 표정은 가릴 수 있으니 회의에서 차분하고 당당하게 할 말을 좀 하는 이들이 많아져서 부패의 행진이 계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모임이나 회의에서 발언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언을 하지 못하는 눈치꾼들이 없어지길 바래본다. 명백하게 잘못된 것에 대한 지연, 학연, 혈연, 지역, 지위의 연(緣)을 이유로 침묵한다면 실상은 그 패역에 능동적으로 동참한 셈이다. 패거리들이 저지르는 악(惡)은 침묵(沈黙)을 먹고 자란다. 예전엔 침묵이 미덕인줄 알았다. ‘침묵이 금’이라 하지만 때로는 더럽고 추하고 비겁한 짓이다. 이 시대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말하려면 자신의 말의 수준을 높여야 된다. 무심히 내 뱉은 말이 자신과 가정과 사회를 어렵게 하지 않는다면, 단,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고 개인적 사감(私感)이나 이권(利權)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면 말해야 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말과 혀를 조심하면 ‘범사형통’을 넘어 ‘만사형통’이다. 창조적인 일을 하려면 늘 대화하고 말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넘어 타인과 대화하며 경청해야 한다. 오스틴(J. L. Austin)은 인간의 언어형태를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단순히 소리를 내어 말하는 발음(發音)행위, 둘째, 소리 안에 의미를 포함한 발의(發意) 행위, 셋째,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발동(發動)행위가 있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言語)의 대부분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인가 하게 하는 발동적인 언어이다. 그러므로 말이 어떤 방향으로,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인지 생각하며 말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인생에 기회가 안 오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늘 오고 있지만 수용성 부족이나 감사하지 못해 그 기회를 말이나 행동으로 잡지 못하고 차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자기 결정권과 주체성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으면 늘 누군가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살게 된다. 생각하지 않으면 주어진 환경에 지배당하고, 생각하며 살면 삶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오늘 하루도 생각하며 할 말을 하는 하루로 살아보심이 어떠하실지.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1-12-18
  • [이효상 칼럼] 한글, 위대한 활자의 탄생과 전파이야기
    훈민정음 반포 575돌과 93주년 한글날을 지나며 세종대왕이 반포한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고, 그 고마움을 마음에 깊이 새기게 되었다. 세계에 이런 문자는 없었다. 세계 문자 가운데 ‘한글’, 특히 ‘훈민정음’은 흔히들 신비로운 문자라 부르곤 한다. 그것은 세계 문자 가운데 유일하게 한글만이 그것을 만든 사람과 반포일을 알며,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알기 때문이다. 한글은 사람의 소리를 기호로 나타낸 표음문자로서, 음절을 닿소리와 홀소리로 나누고, 받침은 닿소리가 다시 쓰이게 함으로써 가장 경제적인 문자로 구성되어 있고, 음절구성의 원리가 간단하여 배우기가 쉬운 문자로 세계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한글’은 단지 한국인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인류의 위대한 지적유산이다. 영국의 샘슨(Geoffrey Sampson)교수는 “한글은 의문의 여지없이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지적 유산의 하나임에 틀림없다.”고 단언했고, 미국잡지 <라이프>의 밀레니엄 특집호에서 21세기를 맞이해서 지난 천년동안 일어난 가장 역사적인 일로 금속활자와 인쇄술 발명을 1위로 선정한 바 있다. 한글[훈민정음 해례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고 현재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는데, 사실 국보 1호는 남대문 보다야 ‘한글’로 바꾸면 좋을 것 같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지은 책의 제목이자 오늘날 한글로 불리게 된 한국어의 표기 문자 체계를 말한다. 1443(세종 25)년에 조선의 4대 왕 세종(世宗)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자음 17자, 모음 11자로, 모두 28자로 이루어졌다.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후, 1446년 음력 9월에 이를 반포했다. 이 때 [훈민정음 해례본]은 판각 원본으로 전권 33장 1책으로 되어 있고,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를 밝힌 서문인 예의(例義)와 정인지 등이 지은 해례와 정인지 서(序)로 되어 있다. 그러다 1940년 7월 <훈민정음해례본(解例本>이 발견되었다. 지난 7월, 서울 종로2가 YMCA(한국기독교청년연합)옆 골목길에서 승동교회 방향으로 공평구역 도시환경사업부지에서 400년전의 조선전기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종-중종때에 제작된 물시계의 주전, 세종 때 만들어진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 중종-선조 때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이는 총통 8점과 동종 1점 등이 발굴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6월에도 지표면에서 약 3m아래에 있는 곳에서 깨진 항아리 안에서 훈민정음 창제시기의 금속활자가 출토된 것이다. 사실 인사동은 서울의 전통 문화 예술의 거리로 알려진 곳인데 상전들의 장터나 민가의 창고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1600여점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실물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발견이다. 금속활자는 인류의 문명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런 금속활자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실물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흔히 금속활자의 발명을 이야기할 때 구텐베르크(Johannes Gensfleisch,1398년~1468년)를 떠올리게 되는데, 구텐베르크가 <42행성경>을 인쇄한 것은 1455년이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금속활자들은 구텐베르크의 성경보다 앞서 제조된 활자이면서 활자 중 가장 뛰어난 1434년 갑인자라는 점이다. 구텐베르크의 <42행성경>은 한 페이지가 42행씩 두 줄로 되어 있는 라틴어 성서로, 대략 180부가 인쇄되었고, 남아있는 인쇄도구와 활자가 구텐베르크 사후 약 100년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해 이번 출토된 금속활자는 인쇄도구인 활자와 인쇄물인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직지(直指)심체요절>만하더라도 구텐베르크 <42행성경>보다 78년 앞선 1377년에 인쇄된 것이라 완전체가 된 셈이다. <42행성경>인쇄는 “고려의 금속활자인쇄술을 배워 제작했을 것”이라 영국 셰필드대학 존 홉슨(John. Hobson)교수는 '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에서 주장한다. 왜냐하면 세계최초의 목판 인쇄인 무구정광<대다라나경>이 통일신라시대인 706~51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알리지기 때문이다. 특히 세종 때의 표기법이 반영된 활자들의 다량출토는 한글의 역사에도 큰 의미가 있는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활자에서 이 동국정운식 표기법의 원칙들이 발견되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 후 한자음을 한글로 표기하는 방법을 담은 <동국정운>을 집필했는데, 그 표기법이 바로 동국정운식 표기법이다. 이표기를 인쇄해서 널리 쓰이게 하기 위해서 금속활자로 제작한 것이다. 이 정도면 세계 인쇄사를 바꿀만한 가치가 있다. 이번에 발굴된 활자의 1,600여 자 중 600여 자가 한글 활자다. 최초의 금속활자의 발명과 발견은 동시에 인쇄기술에 대한 논증을 뒷받침할 자료이자 정말 귀중한 유물인만큼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응원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한글’이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전파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암클’, ‘아랫글’이라 불리며 무시당한 훈민정음은 갑오개혁 때 비로소 공식적인 나라 글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천대받고 있을 때, 기독교는 한글만으로 된 성경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들어 왔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한글'이 전파되며, '한글'이 전파되는 곳에는 '기독교'가 전파되는 인과관계를 가져왔다. 해외 선교사들의 한글 접근과 이해는 인쇄 출판문화를 바꾸어 놓았다. 기독교 서지측면에서 보면 천주교는 한자와 한글 성경과 자료를 대원군 박해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뉘(Berneux)주교가 저술한 목활자본 <텬쥬셩교공과(1862년)>, 다블뤼 안또니(Anthony)신부는 순한글 필서체 목판본인 <셩찰긔략(1864년)>과 <회죄직지(1864년)> <신명초행(1864년)> 등을 펴냈다. 연활자목판본 <성경직해(1892년)>도 1740년 북경에서 간행된 ≪성경광익≫(聖經廣益)을 한글본으로 인용 5년간에 걸쳐 9권으로 출판하였다. 개신교는 한글의 보급을 위해 말본, 사전 등의 연구와 출판에 더 주력하였고 금속활자 인쇄법을 사용하였다. 1880년대를 기점으로 신문 잡지의 편찬과 인쇄를 맡아보는 박문국(博文局)이 생기고 최초의 민영출판사인 광인사(廣印社)가 설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양의 활판인쇄술과 접목하며 한글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기술하므로 한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시기였고 대중화, 보편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런 사례로 볼 것 같으면 프랑스 선교사 프랑스인 다레(Claude-Charles Dallet, 1829년~1878년)선교사의 <조선교회사(1871년)>와 파리 외방선교회가 출판한 역사상 최초의 <한불자전(1880년)>그리고 만주에서 시작된 존 로스(John Ross,1842년~1915년)의 <조선어첫걸음(1877년)>은 <예수성교전서(1887년)>와 쪽복음으로, 일본에서 씌여진 이수정의 <현토신약성경(1887년)>으로 이어졌다. 또한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1859년~1916년)의 <한영문법(1890년)>과 <한어자전(1890년)>으로 이어졌고, 게일((James Scarth Gale 1863년~1937년)선교사의 <한영사전(1897년)>등은 한글 체계화의 기초가 되고 한글 전파의 일익을 감당하였다. 그들의 한글사용이 오늘날 한글민족과 문맹제로의 국가를 만드는데 기초가 되었다. 한말, 더군다나 구식교육 즉 한문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에 있던 서민대중이 새로운 진리인 기독교의 성경을 접하므로 심령의 구원을 얻는 기쁨과 더불어, 한글을 깨치어 처음으로 글눈을 뜨고서 지식과 개화의 거듭난 기쁨을 동시에 체험하니 이는 세종대왕이 한글창제의 뜻이 실현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우리나라 공용어가 되었으니 조선성교서회가 설립된 1890년은 공식적으로 한자시대였지만 시대를 앞서간 것이다. 이렇게 한글은 성경과 찬송가뿐만 아니라, 쪽 복음과 전도지 등에도 기독교의 복음전파에 필수적인 수단이 되었고 기산 김준근(金俊根,생몰년미상)의 삽화와 함께 출판된 소설 <천로역정(1895년)>등 기독교문학의 번역과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선교사의 <조선그리스도인 회보(1897년)>, <예수교회보(1910년)> 등 신문과 <신학월보(1900년)> 등 잡지와 1896년 한글전용<독립신문(1896년년)>과 국한문 혼용 <황성신문(1898년)>을 내며 빠르게 대중속으로 파고들며 확장되었다. 초기 기독교의 모든 인쇄물도 대부분 한글만으로 된 것이었다. 그 당시 교회는 한글로 된 성경과 교과서 등 여러 한글책자의 출판을 통하여 민족을 계몽하고 근대화를 여는데 크게 기여했다. 선교 초기 언더우드와 게일선교사를 비롯하여 여러 선교사들은 한글의 과학적인 면과 우수성을 인식하고 이를 해외에 알리려 노력한 원조다. 그들의 연구는 한글의 가치를 널리 세계에 번역 소개할 것만이 아니라 완고한 한학자들에게도 이를 긍정하게 만들었고, 일반 대중에게 이 글의 효용성과 편리성을 깨우치게 하였다. 이렇게 한글이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자리하게 되자 한글에 대한 존중심과 한글을 지키려는 마음, 애국혼을 불어 넣었다. 한글은 우리 민족이 창조해낸 위대한 문자이며 디지털 강국 대한민국의 미래이다. 시대가 발전하고 세대가 바뀌면 사회적인 흐름에 따라 언어는 늘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이 필요해 보이기도 하다. 글로벌시대인 지금 외래어의 사용이 필요한 부분도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글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순우리말을 이해하고 익히는 노력이 없는 무조건적인 외래어와 신조어가 남발되는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훈민정음반포 575돌과 93주년 한글날을 지나며 우리의 언어의 뿌리를 돌아보면 어떨까. 과학적이고 쉽게 배울 수 있는 위대한 언어인 한글을 모국어로 채택한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 이유는 청소년들이 한국 문화와 한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는데 ‘K-팝(Korea-Pop)’이라는 한류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한국 드라마의 인기로 인해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전 세계적으로 문맹률 1% 미만의 유일한 나라 한국. 한글의 가장 큰 특징은 언제 어디서나 같은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글의 특성 때문에 외국인들도 한글을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우리말 한글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 아름다운 한글의 매력에 더 빠져들 것을 기대한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1-10-13
  • [이효상 칼럼] 성공신화의 오류(誤謬)
    최근 미국 투자전문가이자 경제학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가 쓴『행운에 속지 마라(Fooled by Randomness,중앙북스)』를 읽으며 많은 부분을 공감하였다. 책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면에는 상당한 운이 따라주었기 때문이며, 그것을 자신의 능력이라 생각하고 자만할 경우 끝내 모든 것을 잃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지적이다. 대부분의 자기 계발서에서도 주장하듯이 성공하지 못하고 사회적 부를 이루지 못하면 자신이 능력이 없고 게으르고 나태해서라고 다그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은 성공에도 운이 따라 주어야 하며 성공한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보통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사회다. 요즘은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 아니 애당초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발상 자체도 틀렸다. 좁은 도랑에서 용이 나기를 바라는 것 자체나 용이 되지 못했다고 자신을 탓하기엔 세상이 그리 ‘공정’하지 않다. 비단 젊은이들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갈수록 커지는 소득 불평등과 줄어드는 일자리는 탈출구가 없다. 용은 넓고 넓은 바다에서 나온다. 용이 승천하려면 구름이 끼고 비가 내려야 한다. 쨍쨍한 날씨에 용이 되어 승천한 예가 없다. 역시 기회를 얻지 못하면 제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별 수 없다. 본인의 의지와 노력, 유능한 조력자, 절호의 기회라는 삼박자가 맞아야 그나마 연못에 갇힌 용이 비로소 하늘을 날 수 있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정말 우리의 미래는 암울한 것인가. 서울의 경우 열 집 중 세 집이 ‘1인가구’로 위기대처의 어려움과 외로움, 경제적 불안감을 안고 산다. 이런 사회를 보며 어떤 지도자도 ‘미래’를 이야기하는 지도자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졌다. 코로나는 모두에게 큰 ‘위기’이다. 물론 ‘기회’라고 읽는 이들도 있지만 말이다. 특히 최근 신축 300석 이상의 대형교회가 부동산 매물로 300여건이 사이트에 올라와 있다. 그중에 여러 건이 경매에 나오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소위 ‘잘나가던’ 목사님이 무너졌다. 모(某)목사님은 교회를 그만 뒀다. 교회가 경매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코로나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악조건들이 결국 그를 물러나게 하였다. 개척해서 교인들이 몰려오고, 그래서 건축만 하면 더 잘 되리라는 것이 그분의 지론이었다. 빚으로 어렵게 천 석에 가까운 성전을 건축하고 교인들만 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코로나로 건축한 교회에 성도들이 나오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헌금까지 줄어든 것이다. 크게 지어놓은 성전이 무용지물이었다. 매달 건축비의 이자가 수천만원씩 나가자 견디지 못하고 은퇴하겠다고 했으나 그 교회를 인수하거나 감당할 교회가 없었다. 이런 문제로 그분은 교회 앞에 은퇴 퇴직금을 요구했으나 그마저도 감당이 안 되었다. 결국 교회는 경매에 넘어가고 목사님은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코로나 때문만도 아니다. 정권이 정치를 잘못해서만도 아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 근본적 원인을 외부가 아니라 자기에게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있다. “예전엔 그렇게 해도 너무 잘 되는 바람에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사실은 그게 복(福)이 아니라 화(禍)였던 것은 아닐까. 브레이크(brake) 없는 질주를 계속해도 당연히 잘 된다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신중하게 좌고우면해야 할 상황에서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긴장감은 사라지고 ‘하면 된다’는 성공신화나 신념에 사로잡힌 것 같다. 스타트엎(Start-ups)업계에서는 실패를 ‘명예의 훈장’ 또는 ‘수업료’로, 기업가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로 얘기하기 일쑤다. 그러나 실패한 창업자들을 만나보면 분노, 죄책감, 슬픔 등 날 것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실패는 인간관계도 망가뜨리고 경제와 사회에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이렇듯 사람들은 일의 성취를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으로 착각한다. 어찌보면 우리의 크거나 작은 성취는 수없이 많은 변수들의 눈에 띄지 않는 합종연횡 결과인 동시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꼭 교회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사업이나 일터의 세상만사가 그렇다. 관계된 조건들이 제대로 들어맞을 때 일정한 성취가 일어난다. 한 가지 요인만으로 단정하고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세상 만사가 그렇다. 필자의 칼럼을 즐겨 읽는 독자 분이 “모처럼 야외로 나가 매운탕이나 한 그릇 하시죠”해서 나갔는데 길이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그렇게 해서 정작 갔는데 매운탕 가게가 폐업을 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이뤄내는 크고 작은 일에는 언제나 이런 다양한 변수의 영역이 존재한다.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영역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때 사람은 오만해지고 긴장하지 않게 된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의 무용담이나, 사업에 성공했다는 이의 휘황찬란한 신화만 거론될 뿐 전사자나 사업 실패자의 뼈저린 체험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은 생존자 편향의 오류를 유발하는 주요 원인일 수 있다. 열무국수를 잘하는 가게가 있다. 가끔 열무국수의 시원한 맛을 보려고 종종 갔다. 사람 좋은 주인장이 어느 날부턴가 손님이 없다고 하소연을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엔 손님들이 몰려와 줄 설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하긴 예전엔 그런 맛 이었다. 그런데 주방장이 바뀌어서 그런지 요즘은 면을 제대로 익히지 않아 덜 익은 밀가루 맛에, 깔끔하게 씻지 않은 밀가루의 뻑뻑함 뿐이다. 주방장이 인심이 좋아 그런지 기분에 따라 면을 정량보다 두 배로 준다. 잘 드실 꺼 같고, 아시는 분이라서 더 드린다는데, 정량개념은 이미 없다. 1인분이 먹고 싶은 사람에게 2인분을 주면서 먹으라고 하는 건 고역이다. 열무국수의 약간 얼은 시원한 아이스육수도 사라졌다. 미지근한 맛이다. 그나마 국수를 간신히 먹고 있으면 서비스라고 만두를 한 두개 또 준다. 매주 가고 싶어도 먹고 나면 다음에 또 와야지 하는 생각은 자연히 사라진다. 과하거나 부족하면 제 맛을 못내는 음식처럼 모든 문제의 핵심이 ‘균형’과 ‘절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놓친다. 술에 취해서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의 문제는 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절제없음’이다. 술에 취하면 자제력이 없어지기도 하지만, 자제력이 없어서 술에 취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자제하지 않으려고, 자제하지 못한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술이 시켜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기 위해 핑계거리로 술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술만이 아니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양보다 많이 먹으면 그것이 탁한 피와 살이 되어 결국에는 병에 걸린다. 균형과 절제는 인내를 필요로 한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싶지만 건강이 나빠질 수 있으니 참는 것,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먹지 않는 것, 익히 잘 알고 있는 건강에 좋지 않은 인스턴트 음식들을 먹지 않는 것, 무례한 상대에게 욕하고 싶지만 참는 것, 화가 나지만 화를 내지 않고 말하는 것, 본분을 잃지 않는 것, 즐거움을 찾아가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것 등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것도 모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당연한 것이다. 사람의 절제나 인내도, 의지도 한계가 있고 고갈될 수 있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러니 참는 기분이 아니라 당연한 습관으로 시스템화하거나 환경이나 체질개선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남에게 절제를 강요하진 말자. 그의 입장이 되어 보자. 그 입장에서 이해하고 강요하고 싶지만 기다리는 것, 참는 것도 ‘절제’다. 살다보면 힘든 일이 생긴다. 신앙심이 깊다고 결코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도 시련이 꼭 필요하다. 그것이 없으면 ‘신앙과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시련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자신의 신앙도 다시 점검하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질문하기도 한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의 땀과 눈물과 노력이 헛된 것입니까?” 하고 묻게 된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진지한 대화, 진국의 대화가 오고간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점차 진국이 되어 간다. 정치권력은 술과 같다. 크든 작든,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이 가지면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든다. 권력이 문제가 아니라 무절제의 문제다. 민주주의 정치에서도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면, 독재, 독주, 독선, 독단이다.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이 쥔 권력은 주변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그래서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작은 권력은 적은 사람을 불안하게 하지만, 큰 권력은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 술을 마셔서 절제력이 없어진 사람보다 절제하지 않으려고 술을 마신 사람이 더 위험한 것처럼, 권력을 가져서 자기도 모르게 절제력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절제하지 않을 조건으로 충분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훨씬 더 위험하다. 이런 성공이나 권력은 아주 많은 변수들의 합산이다. 눈에 띄지 않는 요인들의 합종연횡의 결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항상 상대적이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때, 그저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것인 양 우쭐대다 결국 교만하여 넘어진다. 이런 사람이 맞게 될 파국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사람이 파국을 맞기 전이나 파국을 맞으면, 주변 여러 사람들이 불안하게 되고 불행케 한다. 사람이 가진 권력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이 경험하게 될 불안과 불행도 커지게 된다. 그래서 시련은 사람을 진지하게 만든다. 절제하게 만든다. 시련 속에서 진지하게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시련을 통해 우리를 빚어 가시는 그 손길을 바라볼 수 있다면. 천하의 주객 이태백은 물 위에 뜬 달을 잡으려고 뛰어들었다가 빠져 죽었다는데,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이태백이 그렇게 어리석었던 건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술이 웬수인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오만, 짧은 순간에 맛보는 그 권력의 황홀함. 그리고 죽음이란 댓가. 사람의 혼을 빼앗아 스스로 죽음의 길로 걸어가게 하는 그 미지의 유혹(템프테이션:temptation)을 이기는 힘이 ‘균형’과 ‘절제'가 아닐까.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1-08-3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지금, 파파게노 효과를 일으켜야 할 때입니다”
    정부가 4단계 방역을 2주 더 연장했습니다. 예배 회복이 신기루처럼 보이다가 다시 멀어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를 걸으며 모두 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부가 예배를 간섭하는 일은 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전염병 창궐이라는 특수적 상황만 아니라면 한국교회가 예배를 축소하고 온라인예배로 전환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합니다. 예배의 존엄성을 지킴과 동시에 방역에도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이죠.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방역을 잘 하면서 현장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작년에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한국교회가 선제적으로 자율방역 시스템을 구축하고 정부가 예배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가보지 않고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기에 결단을 미루는 상황에서 예배의 주도권을 정부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한국교회가 방역 매뉴얼을 만들어 놓고 선제적으로 자율방역을 하며 정부의 예배제재를 최소화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앞으로는 한국교회 연합기관이 하나되어 그 어떤 바이러스가 와도 자체적으로 철저한 방역 매뉴얼을 지키면서 안전하게 예배드리는 길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그랬지요. 중세 사제들은 흑사병이 창궐할 때 공간의 권위를 지키며 믿음의 힘으로 이겨보자고 했지만 오히려 성당이 감염의 온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그때 칼빈은 제네바에서 ‘쿼런틴’(quarantine) 즉, 격리 시스템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창의적 상상력인 하이 콘셉트와 감성적 공감 능력인 하이 터치의 새 길을 모색한 것입니다. 오히려 칼빈은 구빈원을 만들어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며 정부 관리들에게 손을 떼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감염에 노출이 많은 분들은 교회로 모이지 말고 성직자들이 조심스럽게 찾아가 심방하고 예배를 드려주도록 했습니다. 당시 제네바 시민들이 볼 때 전염병을 대처하는 칼빈의 모습이 중세 사제들과 너무 비교가 되니까 칼빈을 응원하고 박수를 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흑사병 이후에 중세 가톨릭은 몰락하고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를 보더라도 흑사병이 결코 예배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가톨릭처럼 무조건 모이라고 해서 이기자는 말이 아닙니다.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을 하였던 성직자들이 솔선수범하여 방역의 모범을 보이면서도 예배의 본질과 정체성을 지켰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개혁주의의 전통을 따라 방역을 철저히 하면서도 예배를 지켜가야 합니다. 정부가 예배를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쁜 일입니다. 그러나 어떻게든지 우리는 코로나를 이겨낼 것입니다. 방역에도 애를 쓰고 기도를 함으로써 코로나는 아웃이 되거나 감기수준으로 약화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코로나가 종식되면 우리가 정말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예배와 교회 운영에만 몰두했지 교회 이미지나 브랜드는 신경 쓰지 않았지 않습니까? 제가 늘 강조하는 바이지만 아무리 제품이 좋아도 회사의 이미지나 브랜드가 나쁘다면 현대인은 그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우리가 유일무이한 주님의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교회로 오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없는 거지요. 이제 우리는 우리만의 이너워십이나 카르텔을 벗어나서 행복 바이러스, 파파게노 효과를 이웃에게 퍼뜨려야 합니다. 파파게노 효과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파파게노'라는 인물에게서 유래가 된 말입니다. 주인공 파파게노는 연인인 파파게나가 죽자 같이 자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나타나 파파게노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자 파파게노는 자살 하지 않고 다시 힘을 내 남은 삶을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파파게노 효과는 베르테르 효과와 대비해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유명한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이 자살하면 동조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베르테르 효과인데, 이와 대비되어 파파게노 효과는 절망과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어 행복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코로나는 쇠약해져 갈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누군가로 부터 위로를 받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때, 한국교회가 위로 바이러스,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파파게노 효과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 헤어졌던 성도들, 또 코로나 이전부터 떠났던 사람들이 위로를 받기위하여 교회로 돌아오도록 교회는 지금부터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1-07-25
  • [이효상 칼럼] ‘트롯’ 전성시대의 문화현상을 읽다
    요즘은 ‘트롯(trot)’이 대세다.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미스트롯>,<미스터 트롯>이 코로나 감염이 폭증하던 한 복판에서 TV조선에서 방송되며 시청률 28.6%(분당 최고 시청률 30.2%)로 종합편성채널 10년 역사 이래 지상파를 포함한 전 채널 예능 프로그램 첫 방송 역대 최고 시청률 기록하며 대한민국 트롯오디션의 신기록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트롯’은 명절이면 씨름대회와 함께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TV만 틀면 트롯이 나온다. 뉴스(news) 팔이가 본업인 종편매체가 트롯 쇼 프로그램 하나로 먹고 산다. 1년 전에 뽑은 <미스터 트롯>가수들로 재탕, 3탕, 4탕 계속 찐하게 수익을 짜내고 신상 <미스트롯2>까지 대박이다. 기가 막힌 사업모델이요, 아이템이다. 방송채널마다 앞 다투어 트롯이다. 시청률 고공행진 못지않게 얼마전 열렸던 <미스트롯2> 경선에서는 시청자의 문자 투표가 400만 명을 넘어 섰다니 놀랄 노 자(字)다. 팬심이 나무라면 응원 문자투표는 열매인 셈이다. 국민들이 응원하고 국민들이 우승자를 선택하는 말 그대로 오픈(open)경선(競選)이다. 민심을 읽지 못하는 어느 정당도, 정치도 이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다. 요즘 유행을 창조하는 대세는 레트로(retro)가 아닌 뉴 트로(new-tro)다. 복고(retro)를 새롭게(new) 즐기는 뉴 트로(new-tro)다. 트롯이 그렇다. ‘옛것’의 가치에 ‘요즘’것의 새로움을 더한 뉴트로는 잊혀졌던 옛 것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도대체 <미스트롯>, <미스터 트롯>이 어떤 매력이 있기에 이토록 사람들이 빠져들고 열광할까. 사람들은 트롯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이 시대 트롯이 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시청자들이 선택하는 공정한 오디션(audition)이다. 무명가수의 삶에서 오디션을 통해 일약 스타가 되었다. 세상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한치 앞을 알 수 없다. 미스 트롯에서 발견한 것은 생계형 행사장 가수의 가슴 아픈 모습이었다. 노래가 생업이지만 오를 무대가 없어 생계가 어려워지고 살아갈 희망마져 포기했던 그들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런 모습으로 장터, 행사장을 뛰어다니는 트롯 가수들의 아픔을 진솔하게 많은 시청자에게 전달됐고 그들을 다시 보게 되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 치열한 패자의 부활전, 인생 역전에 도전한 그들의 삶이 담겨 있었다. 노래만이 아니라 인생이 그렇다. 마이크 하나들고 전국을 떠돌며 노래 하나로 살아온 그들이 시청자들의 선택에 의해 영웅으로 등장했다. 신선했고 자랑스러웠다. 박수 받아 마땅하다. 그 중심에는 공정한 오디션 프로라는 장<미스트롯>의 송가인, 홍자 이후, <미스터 트롯>의 임영웅이 나왔다. 또 <미스트롯2>의 양지은과 새로운 인물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우리네 인생도 그러하다. ‘트롯’이라는 노래는 얼마나 어떻게 숙성시켰는지에 따라 깊이와 감동이 다르다. 남의 노래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래를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가는 것이 실력이었다. 아픔을 딛고 저마다 가진 인생스토리를 풀어내고 있다. 우리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꿈을 갖고 성실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눈부시게 아름답게 비상한 날이 온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들은 젊은이들에게 또 다른 꿈을 품게 하였고 세상에 희망이 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금수저’라는 신조어가 논란되었고, 우리 사회에는 ‘공정’과 ‘정의’가 깨어지고 노력한 것이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 우울함을 던져 주었다. 부모의 힘과 재력으로 노력 없이 무임승차해서 누리는 삶을 사는 이들을 보며 평범한 젊은이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좌절할 때. 자신의 가진 재능 하나로 다시 재기하는 역전의 드라마는 보는 이들을 황홀케 했다. 얼마전 연세가 있으신 지인께서 요즘 트롯에 심취하여 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를 찾으셔서 예전의 70~80년대의 테이프를 어렵게 구해 드렸다. 트롯에 감동을 받고 영혼과 마음이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부르는 가수들 역시 스스로가 자신의 노래에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감사해 한다. 우리나라 사람만큼 노래를 즐기는 민족도 드물다. <미스트롯>이나 <미스터 트롯>의 주인공들이 주는 것은 위로만이 아니다. ‘연예인’이라는 특수성이 아닌 우리와 같다는 친근한 대중성에 있다. 마치 동생같고, 옆집의 아들 딸 같아 친근스럽다. 그들은 요즘 또래의 청년들이 놓치기 쉬운 아름다운 품성과 함께 겸손과 배려가 묻어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는 오랜 무명시절을 겪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여준 반듯한 삶의 자세는 그들의 노래와 함께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된다. 출전자는 모두 경쟁자다. 그러나 경쟁이 의미가 없다, 다들 눈물의 시간을 보내며 밑바닥을 경험하였기에 이미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동역자가 된다. <미스터 트롯>의 임영웅과 영탁, 장민호도 세 사람은 경쟁자다. <미스트롯2>의 양지은, 홍지윤, 은가은, 별사랑 등 하지만 그들은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고 상대의 잠재능력을 끄집어내서 높여 준다. 그들의 끈끈한 우정과 의리는 함께 가야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우리는 그들을 보며 경쟁 관계에서 잃어버린 건전한 파트너쉽(partnership)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그들은 무명시절을 겪으며 갈증과 결핍으로 포만감을 느껴 본 순간이 별로 없었을 텐데도 이제 비로소 받은 진수성찬 앞에서 허겁지겁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지 않는다. 상대방의 빈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고 서로서로 맛있게 먹는 걸 지켜보며 미소 짓는 여유와 배려가 있다. 감성의 시대다. 서로 경쟁하고 제압하고 자기편을 만들어야 살아남는 현실에 국민은 피곤하다. ‘트롯’은 코로나로 일상에서 피곤하고 지친세대에 위로를 주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성악이나, 가곡처럼 악을 쓰듯 내지르는 큰소리에 긴장하고 지쳐 있었는데, 비로소 이야기하듯 30초에서 90초 매직(magic)으로 다가와 다정다감한 노래를 만나 위로를 받기 시작했다. 노래를 통해 위로받을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누군가가 내 언 손을 잡아주고, 시린 가슴을 덥혀주고 퉁퉁 부은 발이 푹신한 털신 속으로 쏙 들어갈 때의 그런 편안함과 따뜻함이 있다. 하루하루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미스트롯> <미스터 트롯>, 하지만 최근 많은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지나친 팬심이 경쟁이 되어 악성 댓글이 양산되기도 했고, 과거의 일 때문에 하차를 하는 참가자도 등장하고 있다. 사실 음악성보다 지나친 노출의 선정성, 가벼운 노래만으로 흥행성을 돋우려는 진행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정통 트롯이라면 어린이들의 재롱 잔치를 넘어 세대를 아우르는 노력이 더 필요해 보인다. 정통 트롯을 말하는 시청자, 관객 중 <미스트롯2> 오디션에서 별사랑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정통 트롯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자신만의 노래를 불렀다. 힘들게 코로나를 견디는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려는 그런 이들을 보고 싶어 한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들이 그런 역할을 착실히 해내고 있다. 코로나의 불안속에서 트롯의 열풍으로 이어지는 대중의 마인드를 읽는 것은 중요하다. 문화현상, 문화 코드를 제대로 읽어야 사회가 발전한다. 보고 읽고 생각하고 글 쓰고 발표하고 몸부림치므로 세상을 읽는 혜안을 가지게 되는 것 아닐까. 트롯 전생시대를 방송을 보며 교회를 다니다 보니 본의 아니게 문뜩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교회도 은혜로운 찬양을 이 시대에 맞게 편곡해서 대중에게 다가가 보면 어떨까. 클래식(classic)한 곡만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까. 국악찬양은 되고 힙합(hiphop)이나 랩(rap)으로 찬양하면 안되는 걸까. 트롯찬양, 뽕짝찬송은 커트라인(cut line)에 걸리는 것인가. 성령 뽕필 트롯 찬양가수가 찬양 트롯을 들고 <미스트롯>에 과감하게 도전을 한 그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며 기독교TV 방송들도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설교방솜만 할 게 아니라 다양한 콘텐츠(contents)개발의 대안은 없을까. 꼭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굳어진 생각의 변화,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동안 편견적 시각에 갇혀 있던 ‘트롯’이라는 그 벽을 깨며 향토성 짙은 트롯의 깊은 맛을 보게 해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냄새 풀풀 나는 젊은이들이 보여준 훈훈한 삶의 소통자세 때문 아닐까. 그래서인지 ‘트롯은 장년층의 레퍼토리(repertory)’라는 가설은 이제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어느 덧 세대를 넘어 청소년들까지 열광하며 국민가요로 등장한 것 아닐까.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1-04-16
  • [이효상 칼럼] 영화 ‘자산어보’에 흠뻑 빠지다.
    최근 화제가 되는 영화가 개봉됐다. 볼만하다. 영화 ‘자산어보(玆山魚譜)’다. 배우 설경구가 주인공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역(役)으로, 그의 형제 다산 정약용(丁若鏞)역(役)에 류승룡이, 그리고 변요한이 흑산도 청년 장창대(張昌大) 역(役)으로 나온다. 이들이 받아들인 서학(西學)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밑바탕에 깔고, 약전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영화 ‘동주(東柱)’를 예전에 찍은 이준익 감독이 흑백영화로 만들었다. 그림같은 풍경에 사람냄새와 바닷냄새가 물씬나는 볼수록 진한 여운이 묻어나는 영화다. 칼라 시대를 넘어 3D/4D 시대에 다시 흑백영화를 본다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흑백 사진이나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感性)을 되살린 참 좋은 영화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정약전의 책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삼았다. 주자의 성리학을 더럽히고 백성을 현혹하는 서학(西學)을 했다는 이유로, 신앙의 배교자가 되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며 흑산도로 유배 간 약전과 약용, 그리고 그와 함께 훗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실용서를 쓴 창대와의 우정이 영화 ‘자산어보’의 주요 골격이다. 정약전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차남으로, 조선후기의 유명한 실학자인 정약용의 형이다. 일찍이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성호 이익(李瀷)에게 지도를 받으며 서양의 신(新)학문을 익혔고 이 집안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통해 일명 서학으로 불리는 기독교(天主敎)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그 집안과 관련된 인사들은 이승훈, 이벽, 황사영 등이 모두 매형, 처남, 사위 등으로 연결된다. 정조 7년(1783) 생원시, 정조 14년 증광별시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종9품)에 제수되었다. 정조는 정약전의 직급이 먼저 급제한 동생보다 낮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재위 21년 정약용을 곡산부사에 제수하면서 정약전을 특진시켜 사관(정6품)에 제수했다. 약전‧약용 형제의 인품과 탁월한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정조의 애정 어린 배려였다. 그러나 재위 24년(1800) 정조가 독살당하면서 약전‧약용 형제의 관운도, 조선의 명운도 함께 끝났다. 1800년은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해였다. 순조(純祖) 원년(1801)에 일어난 신유박해, 그리고 황사영 백서사건 등이 터지자 수많은 명신들과 함께 약전‧약용 형제도 서학과 신앙을 받아들인 죄목으로 기약 없는 유배길에 올랐다. 이 때 전라도까지 함께 내려간 형제는 나주에서 길이 갈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갔다. 흑산도(黑山島)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전은 이곳 주민 문순득(文淳得)이 해상에서 표류하다가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와 중국을 거쳐서, 만 3년만인 순조(純祖) 5년(1805)에 조선으로 돌아오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를 찾아갔다. 문순득에게서 표류의 전말을 듣고 조선시대 홍어장수표류기인『표해시말(漂海始末)』을 저술(著述)했는데 이는 조선시대판 ‘하멜표류기’다. 순조(純祖) 원년(1801) 제주도(濟州島)에 낯선 배 한 척이 표류해 왔다. 배에는 외국인 5명이 타고 있었는데, 나라이름을 쓰라하니 막가외(莫可外)라고만하여 몰라서 중국 요녕성 성경으로 보냈다. 1802년(임술년, 순조 2년) 10월. 중국 성경의 예부에서 어느 나라사람이 알 길이 없다며 조선으로 다시 보냈다. 그 와중에 5명 중 1명 병사했다. 관청의 건물과 먹거리를 내주고 조선의 풍토와 언어를 익히라 하였다. 그러면서 4명 중 1명 또 사망하게 된다. 1807년(순조7년) 8월 10일. 제주 목사 한정운이 표류인들이 ‘여송인(呂宋人, Luzon(현재 필리핀의 루손섬)’임을 알고, 본국 송환을 상계한다. 이들 표류인을 제주에 표류해온 ‘유구인(琉球人(현재 일본 오키나와)‘들과 만나게 하니 유구인 궁평(宮平)이 여송인임을 알아차렸다. 유구사람 통사 경필진이 궁평에게 물으니, 문순득의 표류이야기를 하며 문순득 일행에게 들은 이야기를 회상하며 알려주었다. 여송국과의 외교 소통이 없고, 중국에서 이들을 송출한 예가 있어서 유구인에게 부탁하여 보내라 명하였으나, 유구인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1809년(순조 9년) 6월 26일. 통역관 문순득을 만나게 하여 여송국 방언으로 문답하니 딱 들어맞았다. 비로소 여송국의 표류인을 송환시켰던 이야기를 기술했다. 흑산도에 와서 무서움이 많았던 약전은 창대를 만나 어류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삶을 살게 된다. 흑산도의 정약전은 생업도 외면한 채 오로지 물고기 연구에 평생을 바쳐오고 있는 장덕순(張德順) 또는 장창대(張昌大)라 불리는 사람의 “홍어 다니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 다니는 길은 가오리가 안다‘는 말에 도전을 받아 어류에 대해 널리 알려 백성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함께 연구해 이 어류도감을 만들게 된다. 집으로 불러 함께 기거하며 물고기에 대한 공동연구를 계속해나갔다. 그의 도움으로 자신이 평생 관찰해온 결과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이론을 붙여 순조(純祖) 14년(1814) 그는 각종 물고기와 해조류를 포함해서 수중생물 226종(種)의 명칭, 크기, 형태, 외형의 특징, 생태, 맛, 어획 시기와 방법 등이 자세히 기록한『자산어보』를 펴낸다. 자산(玆山)은 흑산도의 다른 이름이고, 어보(魚譜)는 물고기 백과사전이라는 뜻이다. 정약전은 흑산도라고 하면 서신을 받아보는 가족들이 무섭게 여길까 싶어 섬 이름을 자산으로 바꾸었다. 그는 『자산어보』서문에서 자신을 ‘박물자(博物者)’, 요즘 말로 하면 과학자라고 표현했다. 영화에서는 창대가 ‘자산어보’보다 ‘목민심서’의 길을 택하여 진사로 공직에 나가게 된다. 창대는 권력이 있으면 더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약전은 유배생활 16년 만인 순조(純祖) 16년(1816)에 끝내 유배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우이도(牛耳島)에서 자신의 생(生)을 마감한다. 그런데 동생인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중이라 형의 장례(葬禮)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때 정약전의 장례를 대신 치러준 사람이 바로『표해시말(漂海始末)』의 주인공 문순득(文淳得)이다. 조선후기는 실학의 영향으로 백과사전류의 책이 저술된다. 건축, 의학, 과학, 수학, 천문학, 생물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19세기 조선의 지식을 집대성한 서유구(徐有榘)의『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도 출판된다. 이렇게 명작들이 나오자 그동안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매달려 있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겐 충격이었다. 실학의 영향으로『자산어보』나『임원경제지』처럼 손에 잡히는 실질적인 내용의 책을 저술했던 것은 근대화를 위한 조선 나름의 최선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은 이후 쇠락의 길을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망국에 이르게 되면서 아쉽게도 이러한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선시대 유배지에서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자산어보’를, 동생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수많은 저서들을 집필했다. 고난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던 그들과 함께, 순창 군수와 전라감사를 지낸 서유구도 순조(純祖) 6년(1806)부터 헌종(憲宗) 8년(1842)까지 36년에 걸쳐 일평생 집필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길을 열어갔다. 약전과 약용이 꿈꾸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하나님이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아니었을까. 또한 그들에게 신앙과 순교는 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주자의 나라 조선’이라는 틀에 갇혀 서학을 못 받아들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그 시대에 “누가 주인이냐”는 약전의 외침은 진한 메아리가 되어 울려온다. 그에게 어보는 어떤 의미였을까. 약용에게 목민심서나 약전에게 자산어보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해야 할 일 즉 사명이 아니었을까. 상하(上下)를 따지고, 나와 다름을 거부하는 시대가 조선시대인데도 약전은 자신을 창대보다 낫다고 여기지 않는듯 했다. 창대의 스승이 아닌 '우리 거래하자'라고 하며 서로에게 배우는 관계를 만들어 갔다. 그 시대를 앞선 사상이 있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느 시대든 시대 문화발전과 성숙은 다양성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소통하고 공감하며 이를 즐길 줄 아는 수용의 마음과 태도를 가지는데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이는 창의성의 근원이자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출발점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표현의 차이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해하고 배려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다양함이 공존하는 풍요로운 사회를 함께 이루려는 것이 건강한 시민들의 꿈이었으면 한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1-04-09
  • [이효상 칼럼] 부활의 아침에 넘어서야 할 것?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이 오고 고난의 시간이 지나 부활의 아침이 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친히 오셔서 우리 인생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은혜중의 은혜다. 부활사건은 하늘 길을 열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죄로 인한 사망의 자리에서 살 희망으로 막힌 담을 허물어 소통케 하는 새로운 길이었다. 사실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나 돌무더기가 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다. 인간을 사망의 길로 몰아내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지이자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 장벽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면 우상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날카로운 현안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만든 물체나 이교도들의 신들을 섬기곤 했다. 성경에 주로 나오는 우상은 바알과 아세라, 아스다롯 등이다. 아세라는 바알의 어미이다. 바알은 천둥과 번개의 우상이다. 아스다롯은 농사의 우상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우상이 황금 송아지 우상이다. 한편 초대 교회 안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의 옛 관습이나 문화가 우상의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신약시대에는 우상숭배 개념이 더욱 넓어졌다. 재물, 탐욕, 음행 등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모두를 우상과 동일하게 간주했다. 그런 우상은 세계 도처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과 교회를 움직이는 힘에는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첫째가 교회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맘몬’의 힘이다. 이른바 ‘물질(돈)’이다. 오죽하면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생겼을까. 이것은 교회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성도들의 마음속만이 아니라 목회자의 마음속에서도 이미 자리하고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 하신 후 첫 행하신 일은 성전에서 돈 매매하거나 돈 바꾸는 장사치들의 좌판을 둘러엎으신 것이다. 그렇게 성전을 청소하시고 몸과 영혼이 병들고 상한 자들을 고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실로 교회의 장래를 밝게 볼 수만은 없는 현상이 아닌가 싶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부귀와 명예를 취하는 일들이 난무하다. 교회나 교계도 마찬가지이다. 순수했던 그들이 어느 순간 자리를 누리다보니 이벤트(event)를 벌여 돈맛을 보게 되고 그러면서 모든 이권에 개입하고 권력까지 탐하게 된다. 주님을 사랑하는 맘에서 시작한 일이 어느 날 장사가 되고 영업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행여나 혹시나 어쩌다 금송아지를 주님보다 더 사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종교든 비우는 성빈(聖貧)생활이 없는 종교는 타락하게 되어 있다. 출력이 없이 입력만 하면 반드시 탈나게 되어 있다. 이런 금송아지 우상을 넘어서야 산다. 코로나 보다 더 무서운 탐욕이 우리 사회를 망치고 있다. 코로나에도 매년 재산이 몇 억씩 불어나는 공무원들은 투자의 귀재들인가. 최근에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LH 부동산투기는 인간의 탐욕은 과연 끝이 없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여의도에 봄향기를 가득 머금은 벚꽃이 만발하였지만 ‘가자농부’는 왜 그리 많은가. 여야 할 것 없이 다 썩은 것인가. 공직자와 법관이, 정치인과 종교 지도자가 부패하면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있나. 인간이 추구하는 욕심은 돈, 권력, 명예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를 치열하게 만드는 원초적 욕망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에서 이룬 성과에서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하나나 둘을 가지려는 순간이 탐욕이다. 그만큼 삶의 존재 자체가 불안정해지고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삶의 역설이다. 지금도 주변엔 돈 많은 재벌이 권력이나 명예를 더 갖고 싶고, 권력을 가진 공직자가 그 권력을 이용해서 돈이나 명예도 갖고 싶고, 사회적인 명예를 충분히 가진 사람이 돈과 권력을 더 가지려 하다가 소중히 일궈온 삶이 탐욕으로 한순간에 추락하는 모습을 무수히 보게 된다. ‘무소유’를 강연하던 어느 종교인이 페라리자동차와 건물주로 ‘풀소유’로 추락하였으니 말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병폐는 끝없는 욕심이 아닐까. 코로나가 소멸되어야 한다. 길가의 개나리와 벚꽃은 만발하였지만 코로나로 일상의 회복을 맛보지 못한다. 모두들 참으로 어렵다. 사회와 교회의 양극화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 혹자는 우스개로 말하기를 종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마 곗돈(?)전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한다. 부활의 아침을 만나니 달라진다. 우리가 너무나 좋아했던 세속적인 것들, 우상들을 제거하는 변화의 은혜가 임하게 된다.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라는 말이 요즘 여기저기서 들린다. 천상병 시인은 그의 시집 ‘귀천’에서 이 땅에서의 삶을 ‘소풍’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한 대로 소중한 삶과 물질들을 드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인가.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을 고치고 다스리고 버려야할 그 모든 것을 거듭나고 깨끗케 하시는 은혜를 사모하고 있는가. 코로나로 위기를 맞은 이 시대 백성들에게 교회는 물질이 아닌 영적인 복음으로 교회됨을 보여줘야 한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주님과 함께 하는 교회로 가기 위해선 금송아지 우상을 넘어서 다시 복음으로 가야 산다. 고난가운데 탄식하고 신음하는 사회과 교회와 이 백성들에게 ‘평안하라’하시는 주님의 위로와 음성이 다시 들려지기를 기대하며, 아직도 세상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저 영원한 하늘나라와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며 달려가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지 않은가. 부활의 아침에 유안진 시인이 쓴 ‘내 믿음의 부활절’이란 시를 다시 읽었다. “지난겨울/ 얼어붙은 그루터기에도/ 새싹이 돋습니다./ 말라 죽은 가지 끝/ 굳은 티눈에서도/ 분홍 꽃잎 눈부시게 피어납니다./ 저 하찮은 풀포기도/ 거듭 살려내시는 하나님/ 죽음도 물리쳐 부활의 증거 되신 예수님/ 깊이 잠든 나의 마음/ 말라죽은 나의 신앙도/ 살아나고 싶습니다./ 당신이 살아나신/ 기적의 동굴 앞에/ 이슬 젖은 풀포기로/ 부활하고 싶습니다./ 그윽한 믿음의 향기/ 풍겨내고 싶습니다. / 해마다 기적의 증거가 되고 싶습니다.” 이런 부활에 참여하므로 개인이 살아나고 민족이 살아나는 역사를 꿈꾼다. 나사로처럼 사망의 자리를 털고 나온 부활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1-04-09
  • [이효상 칼럼] 부활의 아침에 시를 읽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이 오고 고난의 시간이 지나 부활의 아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친히 오셔서 우리 인생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은혜중의 은혜다. 부활사건은 하늘 길을 열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죄로 인한 사망의 자리에서 살 희망으로 막힌 담을 허물어 소통케 하는 새로운 길이었다. 사실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나 돌무더기가 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다. 인간을 사망의 길로 몰아내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지이자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 장벽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면 우상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날카로운 현안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만든 물체나 이교도들의 신들을 섬기곤 했다. 성경에 주로 나오는 우상은 바알과 아세라, 아스다롯 등이다. 아세라는 바알의 어미이다. 바알은 천둥과 번개의 우상이다. 아스다롯은 농사의 우상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우상이 황금 송아지 우상이다. 한편 초대 교회 안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의 옛 관습이나 문화가 우상의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신약시대에는 우상숭배 개념이 더욱 넓어졌다. 재물, 탐욕, 음행 등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모두를 우상과 동일하게 간주했다. 그런 우상은 세계 도처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과 교회를 움직이는 힘에는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첫째가 교회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맘몬’의 힘이다. 이른바 ‘물질(돈)’이다. 오죽하면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생겼을까. 이것은 교회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성도들의 마음속만이 아니라 목회자의 마음속에서도 이미 자리하고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 하신 후 첫 행하신 일은 성전에서 돈 매매하거나 돈 바꾸는 장사치들의 좌판을 둘러엎으신 것이다. 그렇게 성전을 청소하시고 몸과 영혼이 병들고 상한 자들을 고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실로 교회의 장래를 밝게 볼 수만은 없는 현상이 아닌가 싶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부귀와 명예를 취하는 일들이 난무하다. 교회나 교계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맘에서 시작한 일이 어느 날 장사가 되고 영업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행여나 혹시나 어쩌다 금송아지를 주님보다 더 사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종교든 비우는 성빈(聖貧)생활이 없는 종교는 타락하게 되어 있다. 출력이 없이 입력만 하면 반드시 탈나게 되어 있다. 이런 금송아지 우상을 넘어서야 산다. 코로나 보다 더 무서운 탐욕이 우리 사회를 망치고 있다. 코로나에도 매년 재산이 몇 억씩 불어나는 공무원들은 투자의 귀재들인가. 최근에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LH 부동산투기는 인간의 탐욕은 과연 끝이 없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여의도에 봄향기를 가득 머금은 벚꽃이 만발하였지만 ‘가자농부’는 왜 그리 많은가. 여야 할 것 없이 다 썩은 것인가. 공직자와 법관이, 정치인과 종교 지도자가 부패하면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있나. 인간이 추구하는 욕심은 돈, 권력, 명예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를 치열하게 만드는 원초적 욕망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에서 이룬 성과에서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하나나 둘을 가지려는 순간이 탐욕이다. 그만큼 삶의 존재 자체가 불안정해지고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삶의 역설이다. 지금도 주변엔 돈 많은 재벌이 권력이나 명예를 더 갖고 싶고, 권력을 가진 공직자가 그 권력을 이용해서 돈이나 명예도 갖고 싶고, 사회적인 명예를 충분히 가진 사람이 돈과 권력을 더 가지려 하다가 소중히 일궈온 삶이 탐욕으로 한순간에 추락하는 모습을 무수히 보게 된다. ‘무소유’를 강연하던 어느 종교인이 페라리자동차와 건물주로 ‘풀소유’로 추락하였으니 말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병폐는 끝없는 욕심이 아닐까. 코로나가 소멸되어야 한다. 길가의 개나리와 벚꽃은 만발하였지만 코로나로 일상의 회복을 맛보지 못한다. 모두들 참으로 어렵다. 사회와 교회의 양극화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 혹자는 우스개로 말하기를 종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마 곗돈(?)전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한다. 부활의 아침을 만나니 달라진다. 우리가 너무나 좋아했던 세속적인 것들, 우상들을 제거하는 변화의 은혜가 임하게 된다.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라는 말이 요즘 여기저기서 들린다. 천상병 시인은 그의 시집 ‘귀천’에서 이 땅에서의 삶을 ‘소풍’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한 대로 소중한 삶과 물질들을 드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인가.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을 고치고 다스리고 버려야할 그 모든 것을 거듭나고 깨끗케 하시는 은혜를 사모하고 있는가. 사월의 봄, 부활의 봄에 코로나로 위기를 맞은 이 시대 백성들에게 교회는 물질이 아닌 영적인 복음으로 교회됨을 보여줘야 한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주님과 함께 하는 교회로 가기 위해선 금송아지 우상을 넘어서 다시 복음으로 가야 산다. 고난가운데 탄식하고 신음하는 사회과 교회와 이 백성들에게 ‘평안하라’하시는 주님의 위로와 음성이 다시 들려지기를 기대하며, 아직도 세상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저 영원한 하늘나라와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며 달려가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지 않은가. 부활의 아침에 유안진 시인이 쓴 ‘내 믿음의 부활절’이란 시를 다시 읽는다. “지난겨울/ 얼어붙은 그루터기에도/ 새싹이 돋습니다./ 말라 죽은 가지 끝/ 굳은 티눈에서도/ 분홍 꽃잎 눈부시게 피어납니다./ 저 하찮은 풀포기도/ 거듭 살려내시는 하나님/ 죽음도 물리쳐 부활의 증거 되신 예수님/ 깊이 잠든 나의 마음/ 말라죽은 나의 신앙도/ 살아나고 싶습니다./ 당신이 살아나신/ 기적의 동굴 앞에/ 이슬 젖은 풀포기로/ 부활하고 싶습니다./ 그윽한 믿음의 향기/ 풍겨내고 싶습니다. / 해마다 기적의 증거가 되고 싶습니다.” 이런 부활에 참여하므로 개인이 살아나고 민족이 살아나는 역사를 꿈꾼다. 나사로처럼 사망의 자리를 털고 나온 부활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1-04-02
  • [이효상 칼럼] 빌 게이츠의 10년 연구결과 보고서 '기후위기(재앙) 대처법'
    코로나19의 팬데믹(pandemic)은 273만 명이라는 사망자를 내고 전 세계 인구의 1억 2342만 명(2021년 3월 25일 기준)을 감염시켰다. 미래학자들은 전염병은 코로나가 끝이 아니며 앞으로도 코로나와 같은 변종이 계속 생길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 중심에 지구환경의 변화 즉 기후위기가 자리하고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여러 재난가운데서 지구의 창조환경을 복원하고 건강한 환경을 만드는 문제에 굉장한 관심을 쏟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Bill Gates,1955~)도 1995년 ‘미래로 가는 길’을,1999년 ‘생각의 속도’에 이어 금년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원저:How to avoid a climate disaster,김영사)’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앞선 두 권이 모두 IT, 디지털, 정보통신 혁명 등의 미래를 예견한 책이라면, 이번에는 ‘기후’문제다. 저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빌 게이츠라는 것, 그 책 제목이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이라니, 빌 게이츠는 도대체 왜 기후변화를 말하기로 했을까? 빌 게이츠가 왜 이렇게 기후 문제에 관심을 가질까. 그것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관심 집중! 전 세계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빌 게이츠는 책에서 20년 전 소프트웨어(software)를 본업으로 했던 그가 부인과 함께 2000년 게이츠 재단을 설립하고 저개발국을 여행하며 에너지 빈부 격차를 해결하고 싶었다는 얘기로부터 풀어간다. “기후변화에 대해 알아야 할 두 가지 숫자가 있는데, 첫번째는 ‘510’이고, 다른 하나는 ‘0(제로)’”라고 설명한다. 510억톤(t)은 전 세계가 매년 대기권에 추가로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양이다. 0(제로)는 지구온난화를 막고, 기후변화로 인한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인류가 목표로 해야 하는 숫자다. '넷-제로(Ner-zero)'라 부른다. 그는 말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 기술이 청정에너지 기술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이토록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고. 그에 따르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깨끗한 에너지를 만들어내야만 온실가스 배출량을 "0"으로 만들 수 있다. '510억'이 '0'이 되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빌 게이츠는 어렵지만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기후 변화로 인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온실가스 배출을 없애는 탄소제로(carbon zero)를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년 배출하는 510억톤의 온실가스 사실 그 양이 도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양인지 가늠조차 안된다. 온실가스를 제때 줄이지 못한다면 지구 전체에 대규모 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런 탄소를 줄이지 않으면 기후 재앙으로 코로나 사망자의 5배의 인구가 숨질 것으로 예측하며, 그 해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혁신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상용화한 경험을 바탕으로 게이츠는 ‘탄소제로’달성을 위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린 프리미엄'이라는 용어로, 온실 가스를 배출하지 않고, 친환경 청정에너지를 사용하는 데 드는 추가적인 비용을 의미한다. 빌 게이츠는 '더러운' 에너지를 '깨끗한' 에너지로 바꾸기 위해 드는 비용, 즉 '그린 프리미엄'을 낮추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깨끗한 에너지 기술이 정부의 정책이 되고 시장에서 활성화된다면 그린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높아질 것이고 결국엔 그린 프리미엄이 낮아져서 탄소 감축이 아닌 탄소 배출 제로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럼 그린프리미엄을 어떻게 낮추나? 510억톤의 이산화탄소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31%를 차지한 제조 분야이다. 다음은 전기 생산(27%), 동물 사육과 농업 재배(19%), 교통과 운송(19%), 냉난방(7%) 순이다. 이 중에서 어느 부분을 먼저 바꿔야 그린 프리미엄을 효율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전기차 만으로 안된다. 철강, 시멘트, 육류등의 탄소제거가 시급하다. 책에서 ‘여러 수단들이 여전히 탄소 제로의 목표 중 일부만 달성하게 되므로 나머지 목표 달성에 필요한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출시해야 한다"고 제시하며 가장 적극적인 해법으로 기술혁신을 들고 있다. 기술혁신은 삶의 편리함을 유지하면서 대기 오염을 획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란다. 또 하나는 태양광과 풍력 등 이미 보유한 수단들을 더 빨리, 그리고 현명하게 사용할 것을 제시한다. 한다. 그 중 가장 비용이 싸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원자력 발전에 대한 그의 견해다. 인도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일부 지역을 방문했을 때, “왜 이렇게 어둡지? 조명은 어디에 있나?”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빈곤의 본질 중 하나는 전기의 부족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빌게이츠는 “사무실, 공장, 콜센터 등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조명과 백신을 24시간 냉장고에 냉각시킬 수 있는, 믿을 만하고 저렴한 전기는 어디에 있는가”하고 묻는다. 그러면서 원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기술과 발을 맞추지 못하는 (에너지) 정책의 대표적인 예는 원자력 산업이다. 원자력은 거의 모든 곳에서, 매일 24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탄소 에너지원이다. 새로 개발하는 원자로는 더 안전하고 더 저렴하다. 하지만 올바른 정책이 부재하고 적절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이런 차세대 원자로 기술과 과학은 무용지물이다” 원자력은 매일 24시간 사용 가능한 유일한 무탄소 에너지원이라고 한다. 그가 제시하는 깨끗한 에너지 기술인 풍력, 지열, 태양열, 배터리, 바이오 연료, 탄소포집 등에 대한 기술 혁신과 정부 지원, 민간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하게 된다. 세계적으로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정 이후 선진국들은 탄소 제로 실천을 위해 화석연료를 친환경 대체에너지로 전환하는 일에 주력해왔다. 탄소배출 7위 국가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한국은 탈원전 기조하에 재생에너지에 집중해왔지만 사실 기후악당 국으로 인식되고 있다. 탄소배출 측면에서 효율성이 가장 높은 것은 원자력 발전이다. 무분별하게 태양광 발전을 보조하는 것이 혁신의 전부가 아니다. 태양광 설비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과 그로 인한 간접적인 건강 위험까지 없애는 노력이 진정한 혁신이다. 또한 작은 위험 때문에 원전을 포기하기보다는 원전 위험 제로 기술에 도전하는 것이 혁신이다. 빌 게이츠는 책의 마무리에서 기술 변화와 혁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삶의 방식에 많은 변화가 찾아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기에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유권자들이 한목소리로 기후변화 정책을 요구할 때 정치인들은 움직인다”고 말한다. 정치인들은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은 유권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정부는 기술혁신을 주도하고 기업 활동을 자극하고 시장을 유인해야 할 것이다. 종말의 징조인가.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미래가 불타고 있다. 자연이 우리에게 SOS(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회복을 위한 ‘회복으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미국 지구물리학보에 따르면 ‘지구 온난화로 여름은 길어지고 더 더워지며 겨울은 짧아지고 더 추워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소개했다. 2100년이면 1년 365일중 절반인 174일이 여름이고, 가을은 57일, 겨울은 27일로 한달도 채 안되는 것으로 예측했다. 프랑스는 최근 헌법 1조 "기후변화에 맞서 싸운다"를 통과시키고 "공화국은 생물 다양성과 환경 보전을 보장하고, 기후 변화와 맞서 싸워야 한다"를 추가하기로 했다. 이렇게 지구 온난화 등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전 세계 100여국, 400여 개의 도시에서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를 목표에 힘을 쏟고 있다. 미국 조 바이든(Joe Biden,1942~) 대통령은 취임 직후, 트럼프가 탈퇴했던 파리 협정에 재가입했고, 각 나라와 연구소들마다 풍력발전소, 저탄소 제트 연료 등 복잡한 계산을 통해 다양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 세계가 노력하는 가운데 탄소 포집 기술 개발하는 팀에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Elon Musk,1971~)가 1억 달러를 상금을 주겠다는 기사도 보았다. 이산화탄소를 땅속에 주입하고 봉인하거나 이산화탄소를 잘 흡수하는 물질로 탄소를 줄이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서울시도 그린뉴딜(Green New Deal)로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도시로 만들려는 플랜(plan)을 계획하고 있고 한다. 하지만 기후 재앙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도 가장 큰 문제이나 제대로 방향을 못 잡고 실현 가능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대중도 물질적 욕구가 우선되다보니 환경은 아직 관심대상에서 제외되는 측면이 크다. 적절하게 제어할 수단도 부족하니 기업에겐 그저 환경과 관련된 비용지출은 세금 걷는 명목 정도로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기후위기’는 사실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이라기보다 당장 살아가는 이번 세대의 이야기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나마 돈이 개입되니 사람들이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그런 비용을 가장 적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것도 이제 우리 모두의 몫이다. 요즘 기업들도 ESG(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경영을 확대하고 비중을 늘려가는 추세다. 예를 들어, 전자제품을 만들 때 에너지소비효율 1~5등급으로 나눠서 생산할 것이 아니라 1등급만 만드는 식으로 바꾸는 것도 대안이 될 것이다. 물론 현재도 1등급을 구매하는 이들에게는 보조금이 지급되지만 모든 전자제품을 1등급으로 만든다면 빌 게이츠가 말했듯이 그린 프리미엄이 낮아지지 않을까? 우리 삶이 더욱 변화해야 한다. 숨 막히는 미세먼지부터 가뭄과 폭염, 슈퍼태풍, 식량 폭동과 테러, 대규모 환경 난민 발생까지. 코앞에 닥친 기후 위기의 현실 앞에서 그리고 대안은 찾고 그런 노력을 할 순 없을까. 창틀에 정원을 만들고,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보는 것은 어떨까. 탄소금식을 실천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탄소제로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기회다. 탄소문명을 청정에너지 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한 전 세계인의 공동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먼 훗날의 기후재앙에 미리 대처하려면...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1-03-2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