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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꼰대 생존프로젝트 ‘요즘’ 것들과 ‘옛날’ 것들의 공존기술
    얼마 전 TV에서 ‘꼰대인턴’드라마를 봤다. TV에 나오는 영업팀장은 툭하면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며, ‘자유롭게 얘기하라’고 윽박지르고, 정작 의견을 제시하면 ‘답정너’(답은 이미 정해져 있어, 너는 그냥 따르기만 하면 돼)를 요구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옳다고 주장하고,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며 그것으로 자신의 우열함을 드러내려는 습성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다 "라떼는 말이야"와 같이 말하는 사람을 만나 오랜 시간 들어주느라 답답해 본 적은 없는가. ‘요즘’세대는 물어본 질문에 답하면 선배, 물어보지 않은 말을 하면 ‘꼰대’로 구분한다. 요즘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화법은 당연히 퇴출 1순위이다. 본인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하는 마음 자체는 순수하겠지만 그것을 강요하면 안된다. 어찌보면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질 수 록 꼰대가 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자기자랑으로 일관하면 ‘꼰대’를 넘어 거의 ‘진상’이다. 우리 주변엔 꼰대를 넘어 ‘진상’도 더러 있다. 어떤 조직이나 기관이든 기본적 ‘의무’는 전혀 감다하지 않으면서 ‘권리’와 ‘자리’만 탐한다. 이런 이들이 지도자라고 자리를 차지하고 설치면 조직은 자연히 피폐해지고 퇴보하게 된다. 의무와 약속은 지도자가 반드시 지켜야할 기본덕목이다. 기본이 안되는 이런 진상에게 무슨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우리 주변 모든 곳에서 ‘무의식적인 꼰대질’와 ‘민폐끼치는 진상’과의 보이지 않는 싸움, 전쟁이 벌어진다. 지난해 가을 남양주 다산신도시 아파트로 이사했다. ‘슬기로운 아파트 생활’에 적응하느라 아파트 활동을 주목하고 관심을 가졌다. 신도시라서 아파트 ‘동대표자회의’가 구성되지 않았고 없었다. 그래서 아파트 동 대표를 하려고 준비하는데 웬 30대 젊은이가 하겠다고 열심히 움직였다. 그래서 동 대표를 하도록 양보해주고, 대신 선거관리위원이 되었다. 선거관리위원도 역시 30-40대 젊은이들이 주를 이루었고 젊은 사람에게 위원장을 맡기고 조언하는 입장이 되었다. 첫 회의에서 선거 규칙에 들어있는 ‘연장자 우선’항목은 당연히 삭제되었다. 코로나사태 이후 사회문화적 흐름이나 구조가 급격히 변하고 있다. 익숙한 전통적 권위주의와 결별이다. 그동안 싫어하면서도 따라주는 척했던 ‘요즘’ 세대들이 이제는 더는 참아주지 않고 반격하고 있다. ‘요즘‘것들은 ‘조직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잘 드러난 현상이 바로 ‘YOLO(욜로, You Only Live Once)’다. 이 현상의 핵심은 ‘지금 당장의 나의 경험, 그리고 감정’이 매우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개인적인 각성에 있다. 상대방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므로 ‘옛날’것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법중 하나가 ‘구성원들의 감정 관리’이다. 1990년대 생(生), 밀레니얼 세대, 사실 그 세대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독립적이며,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하고자 한다. 이는 인간관계에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보다 경제적으로 힘든 세대라고 정의가 내려지면서 이들은 학자금에서부터 압박을 받아왔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채무자가 되어버린 채 사회에 내보내진 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식사 중 ‘더치페이’(dutch pay)는 기본이며, 여러 명이서 함께 식사를 하면 추가로 비용이 더 들 수 있다는 생각에 혼자서 식사하는 ‘혼밥족’ 경향이 뚜렷하다. 그러다 보니 타인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줄어들어 인간관계에서 과도한 친밀감에 오히려 적대감을 드러낸다. 이런 세대는 전화 통화하는 것도 싫어한다. 언텍트(untact,비대면)문화가 가속화되고 익숙해지다보니 현실세계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가끔 전화하지 말고 카톡이나 문자로 이야기하라며 직접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낸다. 사회생활만이 아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딸과 평소 그냥 잘 지내는 편이지만 가끔씩 다툼이 생기는 건 대부분 필자의 ‘오지랖’때문이다. 필자는 ‘관심’과 ‘배려’라고 강력히 주장하지만, 결국은 상대가 원하지 않았으니 ‘잔소리’가 된다. 새로운 시대가 오고,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맞다. 하지만 주연이 있으면 조연이 있기 마련인데, 그 안에서 ‘옛날’ 세대는 조연으로 남지 못하고 ‘꼰대’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과연 꼰대는 밀레니얼의 눈치를 보며 세상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존재일까? 그들의 가치나 존재는 의미가 없을까? 세월이 흐르면서 생각지 못한 것을 많이 잃어 버렸다. 그 사이 젊은 삶들의 가치가 확 달라졌다. 행복과 자아, 기회의 공정, 삶의 여백, 존중받음 등 이다. 다양해진 그 가치와 문화, 고민에 공감하지 못했으니 마음 속 새김과 어울림의 부족이야 일상이다. 젊은이들과 세대간의 간극을 메우며, 어떻게 소통해야 치유될 것인가. 소통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그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소통방식으로, 그들이 자신의 삶에 심사숙고하고 몸부림치며 최선의 노력을 한다는 걸 믿어주는 것까지 하면 어른의 역할은 끝난다. 그래서 어른다운 어른노릇도 힘들다. ‘옛날’세대는 ‘꼰대라는 프레임’에 싸잡아서 갇혀 버렸다.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심판대에 서 있다. ‘요즘 것들’의 눈총(?)에 꼰대들의 ‘빡침’을 해소하며, 요즘 세대들과 공생하기 위해서는 생존의 기술이 필요하다. ‘요즘’세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옛날'것들이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는 ‘자기 성찰’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가끔 과도하게 친밀감을 드러냈다가 오히려 역효과만 낳을 수 있다. 어설프게 ‘요즘’ 세대의 문화를 배워서 소통을 하려다가 분위기가 어색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애정 어린 조언을 해주고 싶은 욕구를 참기 힘들 때 애정 표현은 말을 많이 하려고 하면 안된다. 그냥 모른척하고 밥을 사주면서 경청하고 반응해주면 된다. 여유가 있으면 ‘선물이나 돈으로 한다’는 철저히 자본주의의 원칙만 따르면 된다. 생존위한 꼰대의 변신은 무죄다. 유행을 창조하는 것은 레트로(retro)가 아닌 뉴트로(new-tro)다. 복고(retro)를 새롭게(new) 즐기는 뉴트로(new-tro)가 대세다. ‘미스터 트롯’이 그렇다. ‘옛것’의 가치에 ‘요즘’것의 새로움을 더한 뉴트로처럼 새로운 꼰대가 되어 보자. ‘요즘’세대도 자신을 가르치려는 ‘옛날’세대들이 있을 경우, 무작정 그 사람을 ‘꼰대’라 왕따하기 보다는 그 사람의 진실된 마음이나 진정성이 담겨있는지를 먼저 파악하는 지혜로움이 중요해 보인다. 그 사람의 자리에서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입어 보기 전까지 그 사람의 입장을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한다. 부모가 되기 전까지는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리더가 되기 전까지 리더가 지닌 책임감의 무게를 가늠하기 어렵다. 꼰대의 시선은 늘 내가 아니라 남을 향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 상관치 말고 나나 잘하자. 남의 평가에 의존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가치있게 가꾸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믿자. 내가 옳은 게 아니라 ‘그대가 옳다’고! ‘꼰대’는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니다. 주위의 친구일 수 있지만, 때로는 나 자신 일 수 있다. 어찌보면 화목한 가정이나 조직도 이젠 말 잘 듣는 자녀나 직원의 ‘순종’이 아니라 현명한 어른이나 지도자의 ‘내려놓음’으로 만들어 지는 것 같다. 마음이 따뜻한 꼰대라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생각보다 ‘내려놓음’이 어렵다. 무조건 ‘옛날’것들은 ‘꼰대’라고 비판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보다는, 모든 사람의 다름과 개성을 인정함으로서 더욱 건강한 사회를 함께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언텍트 사회(untact service), 우린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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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2020-07-17
  • [이효상 칼럼] ‘인공지능로봇’ 인간의 조력자인가? 인간을 대신하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 인간을 반영하고 대신할 정도의 새로운 존재가 등장했다. 일명, ‘로봇’이다, 로봇의 영역이 무한정으로 늘어나며 인공지능을 내재한 알파고가 바둑에서 이세돌을 이긴 이후 ‘인간의 조력자인가, 인간을 대체하는가’라는 문제가 현대사회의 화두로 떠오르고, 특히 코로나 19이후 접촉이나 대면을 꺼리는 비대면시대에 로봇과 인공지능(AI)의 결합은 그 역할은 더 커지고 있다. ‘로봇’이라고 하면 궂은 일을 도와주는 심부름꾼의 이미지나, 대화를 나누며 말동무가 되어주는 친구 같은 이미지를 연상한다. 영화<터미네이터>에 나오는 T-600과 같이 인류를 공격하는 침략자의 이미지 등을 가지고 있다. 1920년 카렐 차펙의 희곡인 <로섬의 만능 로봇 R.U.R.>에서 처음 등장했다. ‘로봇’이란 단어가 탄생하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오락적 존재나 살아있는 금속 인형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희곡이 나온 뒤에 로봇은 금속 인형을 넘어 사회에 귀속된 기계 노동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1962년 미국의 유니 메이션사가 최초의 산업용 로봇인 유니 메트를 생산해 제너럴모터스의 자동차 부품공장에 설치하며 로봇 산업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일본의 가와사키 사나 스웨덴의 아베베사 등이 로봇 시장에 뛰어들며 로봇산업의 규모는 커져갔다. 커져가는 규모와 더불어 기술의 수준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발전을 해나가고 있다. 그럼 현재 로봇산업은 어디까지 와 있을까. 인간의 이익을 위해 태어나는 기계의 발전은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서 발전하고 있다. 현재의 로봇 기술은 상상 이상의 매우 높은 수준까지 올라와 있다. 따라서 몇 십 년 전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일들을 현재의 로봇들은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 예들을 몇 가지 살펴보면, 먼저 ‘수술로봇’을 들 수 있다. 인간의 손이 정교하다고는 하지만 그날의 컨디션이나 긴장 정도에 따라 정교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인간의 정교성은 매우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로봇은 프로그램에 입력받은 값만큼 정확히 움직이므로 정교성이 매우 뛰어나다. 이러한 특성을 이용해 수술 로봇이 개발 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술로봇인 ‘다빈치’는 오차 범위 0.1밀리미터 이내로 수술 부위를 절개하기 때문에 수술 성공률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재활로봇’도 등장했다. 재활로봇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일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재활로봇은 전쟁에 의해 발전 했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수많은 장애인들로 인해 나타나게 된 재활로봇이나 장비의 수요 덕분에 충분한 연구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는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현재 인공지능이 내장되어있는 로봇 의족과 생각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전자휠체어 등이 개발되었다. 인간과 로봇, 공생할 수 있을까. 로봇을 통하면 1초 만에 자동결제가 된다. 이처럼 현재 로봇은 많은 분야에서 수많은 일들을 수행하며 인간을 도와주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로봇이 인간의 자리나 존엄을 위협 할 수도 있다. 인간의 일자리 문제가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현재보다 더욱 뛰어난 능력을 가진 로봇이 등장하면 인간은 모든 일자리를 뺏길 것이라는 게 문제의 주요 쟁점이다. 이러한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기술의 진보를 늦춘다고 말하며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현재로써는 어느 누구의 말이 맞다하기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이 때문에 지금도 로봇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은 격렬한 토론의 화두가 되고 있다. 인간을 위해 만든 기술이 인간을 위한 것인지 합의가 필요하다. 문명의 진보는 인간이 저절 컨트롤 할 수 없을 정도로 득이 되기도 하지만 독이 될 수 있다. 공상과학(SF)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로 어떻게 드러날까. 사실 로봇이란 기술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현재도 수많은 연구가 진행 중이다. 특히 ‘인공지능(AI)’은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의 일부를 인공적으로 구현하며 생물학적 진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지능 발전의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가정 하에 인간을 도울 수 있는, 아니 인간보다 더 똑똑한 존재에 대한 관심이 바로 '인공지능(AI)'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20년쯤 지나면 인공지능(AI)이 한층 발전해 ‘로보 사피엔스((Robo Sapiens;로봇+AI)’를 이룰 것이다. 이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인류)를 기능적으로 뛰어 넘을 것이고, 인간의 정체성을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할 것 같다. 한편, 최근 인공지능(AI)로봇과 인간복제에 관해 격렬한 논쟁들이 오가고 있다. 어쩌면 정말 가까운 미래, 다음 버전의 차세대 사이넷은 우리가 찾지 못했던 새로운 방정식으로 기술되는 양자역학의 세계와 우주의 진화를 보여줄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롭고 황당한 답을 던져준다면, 과연 그것을 웃어넘길 수 있을까. 아니면 인간은 절대 찾을 수 없었던 가장 최적의 한 수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과학의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만약 인공지능이 정말 새로운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이 새로운 다음 시대의 과학 혁명을 야기한다면,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아닌 프로그램이 새롭게 그려낸 과학적 패러다임 속을 살아가는 첫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놀랍게도 그러한 미래를 머지않아 마주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성경은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된지라(창 2:7)”라고 설명한다. ‘생령’이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living being- 표준새번역성경, 우리말성경) 또는 산 영혼(living soul-kjv 흠정역성경)을 말한다. ‘살아있는 영혼’이란 생각하고 느끼고 표현하는 기능을 가진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에 로봇이 소유할 수 없고 로봇과 달리 구별되어진 인간만이 가진 특별한 영역이 있음을 보여준다. 알파고는 처음부터 바둑판 너머 우주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가? 결국 이 엄청난 로봇의 존재에 미래를 맡길 수 있느냐, 영혼이 없는 쇠덩어리로만 볼 것인가? 논지는 ‘인공지능로봇’은 인간의 조력자인가, 아니면 인간을 뛰어넘는 대체품인가? ‘로봇’이라는 기계가 못하는 것, 인간만이 가진 본래의 저력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 자체가 대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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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2020-07-10
  • [이효상 칼럼] 한국교회가 주목할 차세대목회자는 누구인가?
    1994년부터 차세대 목회자들을 주목했다. 한국교회에 차세대를 소개하고 세우며 섬기는 일을 사심없이 해 왔다. 당시 장경동 대전중문교회 목사, 최일도 다일공동체 목사, 김학중 꿈의교회 목사, 전병욱 삼일교회 목사, 선우권 세종 온누리교회 목사 등이 등장했다. 이어 박응순 주안중앙교회 목사,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 이찬용 부천성만교회 목사 등이 1996년에 30대 성장하는 ‘신세대 목회전략’에 출현하며 ‘신세대’ 바람을 불러 일으키며 목회현장을 탐방하는 것이 유행이 되기도 하였다. 그 후 3년간 차세대 목회자들의 목회현장을 탐방하여 분석한 ‘한번쯤 가보고 싶은 차세대목회현장’은 새로운 실천목회의 교과서가 되었다. 밀레니엄 세대인 2000년대를 넘어서며 리바이벌클럽과 교회건강연구원을 통해 이성희 연동교회 목사, 양병희 영안교회 목사, 김희태 동광교회 목사, 김석년 서초교회목사, 김대동 분당구미교회 목사, 서길원 빛가운교회 목사, 장학일 예수마을교회 목사, 김문훈 포도원교회 목사, 손현보 세계로교회 목사, 군산 임만호 드림교회 목사, 신용수 바울교회 목사 등 새로운 인물군이 등장하였고 그러면서 ‘미래목회포럼’이 생겨나게 되었다. 김인환 성은교회 목사를 필두로 신화석 안디옥교회 목사, 최이우 종교교회 목사, 정성진 거룩한빛 광성교회 목사, 오정호 새로남교회 목사, 박경배 대전송촌교회 목사, 주승중 주안장로교회 목사, 조봉희 지구촌교회 목사, 고명진 수원중앙교회 목사, 이상대 서광교회 목사 등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미 20여년이 다 되가는 된 과거 이야기다. 2012년 이후 여러 언론에서 차세대 목회자로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 이찬수 분당우리교회 목사,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 유기성 선한목자교회 목사, 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 이재훈 온누리교회 목사, 김기석 청파감리교회 목사, 김학중 꿈의교회 목사 등을 차세대 리더로 주목하며 언론을 장식한 적이 있다. 이미 오래전 일이다. 최근 필자는 한국교회의 향후 10년을 고민하며, 향후 10년을 주도할 만한 목회자들을 주목하고 그 가능성에 기대해 본다. 새롭게 부상하며 향후 10년의 흐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목회자는 누구일까. 예장 합동교단에서는 박성규 부전교회 목사, 조운 울산 대영교회 목사, 이인호 더사랑의교회 목사, 임만호 군산드림교회 목사 등 4인을 주목한다. 먼저 육군 군목 출신으로 미국 남가주 사랑의교회 부목사와 나성 한미교회 담임을 거쳐 2006년 부산 부전교회에 부임해 15년째 목회하는 박성규 목사이다. 그는 대전 중앙교회 출신으로 서울 내수동교회에서 대학부사역을 통해 청년부흥을 견인한 바 있다. 새성전 건축과 더불어 영혼이 살아 있는 교회,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열린 교회를 추구하고 있다. 또 영남지역의 부흥을 주도하고 있는 인물로는 조운 목사다. 울산대영교회는 울산 지역 최대의 교회로, 예배회복과 제자훈련으로 성장을 해가는 교회다. 청년시절 수영로교회에서 정필도 목사의 영성과 기도를 본받고, 사랑의 교회에서 14년간 옥한흠 목사의 애제자로 훈련받아 제자훈련과 영성이 탁월하다. 2002년 부임 18년간 다음세대와 함께하는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또 이인호 목사는 사랑의 교회에서 영성훈련원을 만들어 중보기도사역과 금요심야기도회, 수양관 영성사역 등을 이끌던 노하우를 가지고 2003년 5월 수지사랑의교회를 개척했으며, 기도로 성장하는 교회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더사랑의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로 경기 수도권에선 유명하다. 다음세대 사역의 해답을 찾아 주일이면 주일학생들이 2천여명이 몰려오는 전북 군산의 임만호 목사도 빼 놓을 수 없는 대상이다. 부임할 당시 1999년 장년 300명, 주일학교 100명이 출석하는 평범한 지방교회로 교회들이 쇠퇴에 접어들거나 정체할 때 드림교회는 반대로 평균 출석 장년 2500명, 주일학교 2000명, 교사만 500명에 이르도록 성장했다. 예장 통합교단의 경우는 이규호 큰은혜교회 목사나 류정길 제주성안교회 목사, 박진석 포항 기쁨의교회 목사를 들 수 있다. 이규호 목사는 서울 관악구 낙성대로의 큰은혜교회를 담임하며 서울대 교수들과 학생들이 중심이 된 1만명 출석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제주성안교회나 포항 기쁨의 교회도 5천여 교세를 자랑하고 있다. 성안교회는 첫 제주도 개신교 선교사인 이기풍 목사께서 1908년에 세운, 제주에서 처음 세워진 교회이다. 이 제주도의 가장 핫한 인물이 원희룡 제주지사와 류정길 목사다. 제주 부흥의 주인공인 류 목사는 두레교회의 장학생 출신으로 두레교회 부목으로 사역하다 성안교회에 부임한 이후 꾸준한 성장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 제주시기독교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박진석 목사도 서울 동안교회와 무학교회, 미국 남가주 사랑의 교회를 섬기다 기쁨의 교회에 부임 포항지역에서는 청년집회 등으로 부흥의 바람을 일으킨 바 있으며, 지난해 광화문 집회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 목사는 현재 포항기독교교회연합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독교 감리교단에서는 김성태 큰빛교회 목사와 주성민 세계로금란교회 목사, 박동찬 일산광림교회 목사를 들 수 있다. 강원도 삼척의 김성태 목사는 16년 전 단 두 명의 교인과 함께 전도의 불씨를 살려 1500명으로 부흥시키며 삼척지역 최대교회로 만들었다. 단순히 수적 성장만이 아니다. 체계적인 양육시스템을 통해 내적 성장을 이룬 결과라는데 주목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일산의 주성민 목사는 일산 금란교회로 80명 남짓 교인으로 교회 문을 열어 15년 만에 1만여 명의 교세를 갖추고, 세계로 향하면서 ‘세계로금란교회’라는 이름으로 주목받고 있다. 요즘 화제가 되는 예장백석교단에도 주목받는 인물이 있다. 경기도 안양 평촌의 황덕영 새중앙교회 목사는 1만여명이 출석하는 대형교회 목회를 하고 있다. 황 목사의 방송설교나 청년집회로 인지도가 높은 편이며, 하나님나라를 위한 사명자로서의 삶을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새중앙교회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 안에서 비전 100 , 1000, 10000(백개의 북한교회, 천개의 세계교회, 만명의 선교사 파송)을 선포하고 오직 전도와 선교를 위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예장 고신교단에는 다음세대와 함께 부흥을 이룬 당진 이수훈 동일교회 목사와 남양주 다산신도시에서 개척 2년만에 성전을 건축하여 화제가 되고 있는 최식 다산중앙교회 목사를 들 수 있다. 기독교 성결교회에서는 신용수 전주 바울교회 목사와 이 밖에도 박노훈 신촌성결교회 목사, 안성우 로고스교회 목사, 이춘오 홍성교회 목사, 이기용 신길교회 목사, 박명룡 청주서문교회 목사 등 같은 교단 목회자들을 주목하게 된다. 특히 전북전주 신용수 목사는 용인 비전성결교회를 목회하다 2017년 부임하였으며, 바울교회는 재적성도 2만여명으로 호남의 대표적 교회로 손꼽힌다. 기독교 침례교단에서는 한국교회의 허리가 되는 대전 충천권의 정승룡 늘사랑교회 목사를 들 수 있다. 정 목사는 1999년부터 담임한 늘사랑교회는 ‘젊은교회’다. 출석 성도 2500여명 가운데 10∼40대가 72%를 차지한다. 청장년 중 최다 연령층은 40대로 34.5%에 달한다. 교회 청년부는 재정을 비롯해 각종 프로그램 등을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 이사와 코스타(KOSTA) 강사로도 활동 중이며, 현재 고려대 출신 목회자회 회장을 맡고 있다. 하나님의 성회, 일명 순복음 교단에서는 이수형 순복음춘천교회 목사와 안호성 온양순복음교회 목사의 왕성한 활동을 보게 된다. 강원도 춘천의 이수영 목사는 가장 왕성한 연합사역을 하고 있다. 현재 강원도 기독교 총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안호성 목사는 10여 년 전 젊고 가난했던 시절 복음의 불모지요 울산 변두리인 언양 땅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48평의 건축을 위해 첫 삽을 떤 이후 벌써 5번의 성전건축의 스토리를 쓰고 있다. 현대교회 부흥의 모델케이스가 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차세대 목회자들 중에 교단 정치꾼들이나 문제가 된 인사도 있다. 배제했다. 이미 일부는 은퇴하거나 중도에 사라지기도 했고 총회 정치에 뛰어 든 이들도 있다. 그래도 교단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나름 색깔있고 균형있는 목회를 하는 이들에게 기대가 크다. 대부분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며 그래도 전문성을 지닌 신선한 목회자들이다. 한국교회가 이런 목회자들에게 기대하고 주목하지만 스스로 넘어야 할 장벽도 만만치 않다. 차세대가 지닌 폐쇄성이나 개인주의가 그러하다. 사회나 교계와 소통되지 않고 그냥 큰 교회 담임목사로 만족하고 안주하는 일이다. 간혹 교회가 큰 행사를 한다고 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언론홍보용 이벤트에 지나지 않을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단편적 행사를 넘어 미래과제를 안고 ‘영성’과 ‘연합’, ‘네트웍’이라는 고민과 과제를 풀어가야 한다. 자기 앞가림에만 치중하다보면, 한국교회가 하나됨을 이루는 협력과 연합이 되지 않고 미래가 열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교회는 큰데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등한히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차세대 목회자’들에게도 한국교회와 ‘연합’이란 어려움과 고민, 부담이 많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0-06-25
  • [이효상 칼럼] 포스트코로나의 성찰(省察); ‘사람’을 생각하다.
    코로나 펜데믹(pandemic) 상황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 그 자리에 절망과 슬픔을 남기고 말이다. 또한 라이프스타일과 문화 역시 불신과 차별, 비대면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무너진 삶의 자리를 추스르기도 전 ‘사회적거 리두기’는 심리적 ‘거리’를 만들고 ‘불신’을 키울 때, 절망의 깊은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의사들은 멀어진 사회적 거리, 심리적 안전망 붕괴로 이어지는 9월 재발설을 말하고, 상인들은 정신적·사회적 타격에 어이 경제적 충격까지 더해지면 후폭풍이 우려한다. 지금은 각 영역이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협력 대응하며 버티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며 하반기에 접어들수록 경제·사회적 취약점이 드러나며,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안전망이나 방어막이 붕괴되면서 여러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바이러스의 도전에 대한 응전 과정에서 얻은 포스트 코로나(Post-COVID)의 혜안도 필요하지만 프리 코로나(pre-corona)의 회복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을 다시 보게 되고,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에 대한 관심’은 절망의 위기를 맞은 사람들에 대한 회복이다. 낙오되는 쪽을 도와 함께 가게 하는 ‘사회안전망’이다. 사회안전망의 강화와 삶. 발전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이다. 그래서인지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의 국민 정신건강 실태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국민 10명 중 4명(42.5%) 이상이 우울경험의 정상 범주를 벗어났다고 한다. 특히 중증도 이상의 우울위험군은 17.5%로, 2년 전(3.8%)보다 4배 이상 늘어났고, 우울과 불안을 호소하는 국민이 늘면서 심리상담 전화도 늘었다고 밝혔다. 어찌보면 사람이 아프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누구나 생각지 못한 갑작스런 질병이나 전염병으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찬송가 가사처럼 ‘슬픈 마음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직간접적 영향으로 정신건강에 타격을 입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한 불안과 스트레스에 경제적 충격이 더해지면서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도 그 여파가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심리적 문제만이 아니라,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외롭게 버티고 있다. 존폐위기에 놓인 소상공인들은 좌절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질병이나 혹 전염병, 무너진 경제가 아니다. 사회라는 공동체를 버티는 시스템이 무너질 때 공동체가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과연 그럼 공동체가 꼭 필요한가? 공동체에 소속될 필요가 있는가? 이런 의문과 불신과 불확실성으로 반복되면 코로나 보다 더 무서운 질병, ‘고립’과 ‘외로움’이라는 질병이 찾아온다. 극단적 선택에 내몰릴 수 있는 것이 사람인만큼 변화한 상황에 맞는 적극적 케어(care)는 필수적이다. 일터에서의 이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절망, ‘나를 도와줄 사람, 함께해줄 이가 없다’라는 고독과 무력감이 사회를 무너뜨린다. 이런 고통은 잊어버리자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프고 힘들어도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몰라서가 아니다. 절망의 자리는 상처를 아물지 않고 더욱 벌어지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는 ‘돌봄’(care)이 필요하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상화로 사회적 관계가 느슨해지면서 확실히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줄고 있다.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우울할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다’는 답변은 68%에 그쳤다. 지난해 조사에서 86%를 보인 것에 비하면 코로나19가 무려 18%포인트를 갉아먹은 셈이다. 도움을 청할 기관이 있다는 답변은 38%에 불과했다. 이런 우울과 불안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사회적 관계가 취약해지면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한국은 사회적 관계지수(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 수)가 OECD 국가 중 최하위인데, 우울과 불안은 높아지는데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위기에 빠진 사람을 제때 치료하지 못한다면 위험도는 급격히 높아질 것이다.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고 취약계층이 고립되지 않도록 종교계가 위험 대상자를 조기에 발견해 전문기관의 상담 및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연계하고, 위기상황에서 위험 을 예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관리ㆍ지원하는 게이트키퍼(gatekeeper)의 역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감당해야 할 때다. 하지만 교회도 회복이 만만치 않다. 슈퍼선데이(superSunday)를 선포했지만, 바운스백(bounce back)이 쉽지 않다. 교회가 그동안 진행해온 온라인 콘텐츠를 ‘비대면 격려’에 적극 활용하고 화상 모임으로 기도 제목을 나누는 등 심리적 거리를 좁힌다면 게이트키핑(gate keeping)에 작은 도움은 될 것같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스먼(David Riesman)이 1950년에 출간한『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 』의 책에서 다룬 것 처럼 외로운 현대인들은 ‘군중속의 고독’에 산다. 남들과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정작 내 맘을 터놓을 곳은 없는, 진정한 내 편과 자리는 없는 것 같은 느낌. 말 그대로 군중 속의 고독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이래 저래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다. 그걸 부정하려고 아무리 노력해 봤자, 피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한다고 해서 외롭거나 고독해 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외로움 속의 외로움, 같이 있음의 외로움...그러니, 결국 고독의 극복은 이미 철저한 고독일 뿐이다. 외로운 현대인들 디지털 시대, 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과연 행복한 것일까. 행복한 삶은 무엇일까. 오늘날처럼 보이지 않는 공동체 속에서 개인은 홀로 고독하고, 소속을 잃고 무력해 진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생각, ‘다른 사람과 떨어져 있어야 안전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함께 손잡고 걷던 일상의 소중함이 이제서야 깨달아진다. 코로나의 권세 앞에 빼앗기고 잃어버린 소소한 행복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다. 가족과 지인의 대면, 관계의 거리복원, 가족가치와 교제, 공동체 회복이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이자, 정신의학과 전문의인 박한선 교수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자살률이 5배 낮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며 “종교 모임을 비롯한 지역사회 기반의 모임을 통해 ‘혼자가 아니다’라는 마음을 갖게 하는 네트워크가 자살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삶의 방식이 무너져 내린 지금, 길을 잃은 영혼들이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처럼 함께 병을 치유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재해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지 않다. 대구나 취약계층, 소외된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약한 자나, 밥을 굶는 학생들, 건강보험연체나, 신용불량자들에는 회생의 기회가 멀어지고 있다. 돈과 건강 때문에 ‘극단선택’에 내몰린다. 빈부격차는 더 벌어지고 일자리는 줄어들면서 ‘실업’과 ‘실직’은 더 가혹한 상처로 남을 것이다. 코로나가 끝나도 끝나지 않은 위기는 무너진 공동체를 회복하고 세우는 일이다. ‘온라인’으로는 공동체성을 느낄 수 없고 공동체 교제나 활동이 없으면 삶의 많은 부분이 흔들리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세월이 지나가며 어려움도 이 또한 지나 갈 것이다. 돌아온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누릴 것이다. 하지만 전염병이 지나간 자리에 희생된 사람들의 흔적은 쉬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반복될, 끝나지 않는 전쟁과 습격에 대비하며 적극적으로 주위를 돌아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무심, 무례, 민폐를 반성하고 고마움을 느끼는 기회로 삼으면 좋겠다. 내 이웃이 건강하지 않다면 내가 건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함께 건강하고 함께 행복한 사회, 건강한 공동체회복이 절실한 때이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0-06-19
  • [이효상 칼럼] 이태백의 절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말잔치로 지난 3년은 우리나라를 ‘고비용에 멍든 국가’로 변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일자리 대란’이다. 그것은 코로나19 사태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최저임금을 턱없이 올린 2018년 이후 전면화한 경제 재앙의 한 단면이다. 코로나19 이후 가장 큰 두려움은 전 세계가 '실업'이라는 전염병에 감염될 것 같다. ‘실업’이라는 전염병이 사라지지 않고 일상적인 감기처럼 우리 주위에서 잠복하며 쉽게 대유행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코로나19 사태로 올해 4월 취업자 수가 102만명 감소했다는 조사결과를 내놨다. 통계청도 같은 달 취업자 수가 48만명, 5월말 39만명 가량 감소했다는 통계치를 내놓은 바 있다. 통계청의 2000년부터 2020년까지 고용동향을 분석한 결과 올해 1~4월 실직자 수는 207만6000명으로 실직 시기를 조사하기 시작한 2000년 이후 최고였다. 같은 기간 비자발적 실직자도 104만5000명으로 역시 2000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1~4월 실직자 수와 비자발적 실직자 수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고용대란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사실 국가가 실업 문제의 해결사로 나서야 하는가에 의문이지만 기업이 포기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국가의 책임이다. 자본주의하에서 자본가에게 노동자의 해고와 고용의 기준은 단지 ‘이윤’이다. ‘해고’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선택 사항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하에서 대량실업 사태는 주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자본주의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업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렇게함으로써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1997년 IMF 이후 구조조정과 지속되는 불황으로 인한 취업대란과 고용불안정을 풍자할 때 등장한 신조어중 ‘이태백’이란 말이 있었다. 직장인들 사이에 자주 오르내리면서 널리 퍼져 일반명사로 자리 잡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태백’은 ‘20대 태반이 백수’란 뜻인데, 젊은이들에게 일자리가 없어 ‘백수’생횔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외 ‘삼팔선(38세 즈음 퇴직)’,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 ‘육이오(62세까지 일하면 오적)’ 등이 있었는데 다시 재현되는 느낌이다. 요즘엔 정말 취업하기 힘든 세상이다. 날로 갈수록 청년들은 아무리 대학에 잘 나왔다고 하더라도 취업의 문턱이 더욱더 높아지고 좁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학교를 졸업해도 취업이 힘들어서 몇 년씩 취업을 준비하는 ‘취준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자리 충격은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청년들에겐 훨씬 더 가혹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4월 20대(20~29) 고용률은 54.6%에 머물렀다. 정부에서 매달 발표하는 청년 고용 지표는 꾸준히 호전되고 있지만, 실제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은 이를 체감하지 못하면서 비판의 목소리만 나오고 있다. 눈높이를 낮춰도 일자리가 없다는 절규가 확산되고 있다. 일할 능력과 의사를 가진 사람이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일자리를 잃은 상태를 ‘실업(失業)’이라 한다. 실업자도 늘어나고 있다. 경기침체와 코로나19 쇼크로 올해 들어 4월까지 실직자 규모가 200만명을 넘어서며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정부가 월 27만원짜리 노인 일자리를 수십만 개씩 만들어 아무리 통계를 꾸미려 해봐야 실상이 바뀔 리 없다. 돈 되는 원전포기로 기술자들과 일자리까지 사라졌다. 규제·노동 개혁에는 입을 다물고, 그로인해 기업의 해외탈출은 봇물을 이룬다. 지난해 해외직접투자액은 618억5000만달러로 사상 최대다. 이런 판에 대체 무엇으로 첨단산업 세계공장을 만들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사람들이 갑자기 더 이상 일할 곳이 없어진다면, 바로 당신 자신이 갑자기 직업을 잃었다면 어쩔건가. 정리 해고로 실직을 하든 무기한 무급 휴가에 들어갔든 모두 다 마찬가지이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되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물론이고 큰 심리적 변화까지 감당해야 한다. 어떤 직업이든 일단 실직을 하게 되면 불안의 감정은 사람을 집어삼킨다. 하지만 여기에 나이로 인한 장벽 그리고 직업 유지의 불확실성이라는 상황까지 더해지면 스트레스 요인은 가중된다. 심리학자들은 실직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만큼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한다. 코로나 사태가 회복되고 경제가 활성화되더라도 이미 탈진해 버린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은 재기가 힘들 것이라는데 있다. 실제로 1998년 IMF 위기로 실직한 가장들이 거의 20년이 흐른 현재까지 끝내 경제적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가정이 해체된 사례들은 낯설지 않다. 그래서 단순 복지 관점서 보면 안되고 정치적 셈법이 아닌 구조적 변화의 접근이 필요하다. 실직자에게는 실업급여를 지급하지만 사실 실직자의 82%가 고용보험 미가입자이자 비정규직이다. 그들에게도 기본소득을 통한 ‘빵 먹을 자유’가 필요한 상황인가보다. 화석처럼 굳은 이념으로는 한계다. 유연성이 떨어지는 이대론 성장과 번영을 꿈꿀 수 없다. 말이 번드르르하다고 미래가 열려지는 것은 아니다. ‘실업’이라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우리는 쉽게 ‘포기’할 것이 아니라 뜨겁게 ‘분노’해야 한다. '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요구한다. 영국시인 딜런 토마스(Dylan M.Tomas)의 시(詩)중에 ‘인터스텔라(interstella)’라는 영화에서 보여준, 죽어가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지구를 대신할 새로운 행성을 찾아 머나먼 우주로 떠나는 우주 비행사들에게 브랜드 박사가 읽어주는 구절이 있다.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세요)” 현실에서도 어두운 밤이 다가오고 빛은 꺼져 가고 있다. 코로나사태 이후의 세상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간다. 이미 세계 도처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대기업들조차도 정부의 금융 지원을 통해 가까스로 생존을 버텨가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늘어나는 이태백들이 절규하고 있다. 어둠이 더욱 짙어지고 빚이 꺼져 갈 때에 우리는 체념할 것이 아니라 분노해야 한다. 시스템의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것보다 정신건강에 오히려 좋다. 어쩌면 우리는 그 짙은 어둠 속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다 쓰러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둠속에서 대한민국은 결국 답을 찾아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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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2020-06-17
  • [이효상 칼럼] 21대 국회, 주목할 의원들과 슬기로운 신앙생활
    6월 1일 21대 국회가 시작된다, 거여(巨與)가 177석의 의석수를 차지했지만, 대화와 협상을 통한 협치는 필수적이다. 4년간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300명의 국회의원 중에서 초선의원이 151명이나 되는 걸 보면 노련한 기성 정치인들보다 젊은 신인들의 패기를 선택했다. 투표장에도 55만 명이라는 18세 유권자들이 처음으로 합류했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의 승리라는 정치적 판단보다 더 주목할 훨씬 큰 변화는 사회문화적 ‘세대교체’이다. 그 흐름에서 주목하게 되는 지역구 최연소, 초선, 청년 정치인은 더불어 민주당의 오영환 의원이다. 1988년 생으로 올해 34살의 전직 소방관 출신이다. 문희상 국회의장의 지역구였던 경기 의정부 갑에 출마하려던 문희상 의원의 아들인 문석균 상임부위원장이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의정부 갑 주민들은 민주당 전략공천을 받은 젊은 소방관 출신 오영환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21대 국회에서 지역구 최연소 국회의원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비례대표의 경우, 최연소는 정의당의 류호정 의원으로 1번으로 영입 시부터 확정이 되었다. 1992년 생으로 올해 29세로 현직 21대에 입성하는 국회의원 중에서는 가장 젊은 나이다. 정치가 나이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터보다도 더욱 험난한 정치세계에 발을 디딘 만큼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초선의원들이나 청년 정치인들이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젊은이들에게 출신과 학벌에 관계없이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사회’, 청년 젊은이들이 ‘꿈꾸는 사회’를 보여준 의원들도 있다. 그 모델은 양향자 의원과 김미애 의원이다. 광주의 양향자 의원은 중3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형편이 어려워지자 광주여상에 진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삼성반도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주경야독 끝에 학사와 석사 학위를 따냈고 마침내 반도체 전문가의 꿈을 이루며, 고졸 출신으론 처음으로 삼성전자 임원 자리에 올라, 우리 사회의 차별의 벽을 깬 아이콘으로 학벌과 출신, 성별의 유리 천장이라는 쉽지 않은 과정을 깨고 국회 입성했다. 부산의 김미애 의원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극심한 가난, 초등학교 때부터 암으로 투병중이던 어머니의 사망 등 가혹한 환경에서 포항여고 입학했지만 곧바로 중퇴, 미성년자의 나이로 부산의 방직공장, 와이셔츠 공장 등을 전전하며 여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 독학으로 일본어 공부와 잡화점에 취업. 판매원으로 일하며 29세라는 나이에 동아대 법대 야간에 입학. 4년내내 장학금 받고 1학년 때부터 사법시험 준비하여 5년뒤인 34세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37세때부터 변호사로 활동하며 자신의 모교인 동아대에 꾸준히 총 1억여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세 딸 입양해서 아직 미혼이지만 사실상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국회의원이 된 신앙의 승리, 역경의 열매인 경우도 있다. 21대 국회의 최고령은 더불어민주당의 김진표 의원이다. 미래 통합당 소속으로 당선된 홍문표 후보와 1947년 생으로 나이는 같지만 생일이 5개월 정도 빠르게 되면서 21대 국회 최고 연장자가 된 것이다. 신실한 모습과 그 역할들은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준다. 최다선은 19대 국회에서 전반기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더불어민주당 박병석 의원으로, 6선이라는 경력만큼 최다선의 영광을 얻게 되었고 국회의장에 추대 확정되었다. 독실한 신앙과 온건 중도 성향으로 ‘협치’를 이끌 적임자라는 평이다. 그런가하면 국회의원의 진짜 종교가 뭔지도 관심꺼리다. 총선에서 기독교를 표방한 모(某)당의 실패원인중 하나로 정체성 없는 ‘종교행위’였다. 비례대표후보 1번으로 영입했는데 알고보니 ‘불자’라는 사실이 드러나 사임한 이모(某) 의원의 경우다. 종교별로 살펴보면 ‘카톨릭신문’이나 ‘불교법보’의 보도와 언론의 자료로 근거로 추정한 결과 카톨릭 78~68명, 불교 33명, 기독교 89~85명 선으로 파악하지만 다소 오차가 있다. 표를 얻기 위한 기독교, 불교, 천주교 신자로 각각 등록하고 ‘종교탐방’을 하는 의원도 다수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는 최소 68명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은 송영길, 인재근, 박광온, 노웅래, 김영호 의원 등을 포함한 40명이었고, 미래 통합당은 권영세, 김상훈, 정진석, 이명수, 김은혜 의원 등 15명,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은 조정훈, 전용기, 이동주 의원 등 6명, 미래한국당은 윤주경, 한무경,신원식 의원 등 4명, 정의당은 심상정, 강은미, 배진교 의원 등 3명이다. 지난 20대 국회 때보다 줄은 숫자이다. 불자 당선자는 여권 15명, 야권 17명, 무소속 1명 등 총 33명이다. 더불어민주당은 김영주, 서영교, 김영배, 안규백, 이원욱, 정춘숙, 조응천, 박영순, 김두관, 이개호, 이광재, 오영훈 의원 등 12명이고, 미래통합당은 박성중, 김선교, 홍문표, 이종배, 주호영, 임이자, 김석기, 강기윤, 정점식, 서병수, 이헌승, 정동만, 백종헌, 박대출, 송언석 의원 등 15명이다. 더불어시민당은 김병주, 유정주, 이수진 의원 등 3명, 미래한국당은 조명희, 이용 의원 등 2명, 무소속 김태호 의원 1명이다. 불교계는 18대 선거에서 46명, 19대 선거에서 42명,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52명이 당선됐던 것에 비해 절반을 조금 웃도는 33명 선으로 알려진다. 한편 한국교회는 20대 국회보다 감소한 최대 89명, 최소85명 선으로 보고 있다. 기독교 의원 중에는 더불어민주당 김진표, 박병석, 안민석, 변재일, 설훈, 이낙연, 이인영, 이학영, 김두관, 박범계, 우원식, 우상호, 박홍근, 홍영표, 정성호, 윤후덕, 민홍철, 김철민, 백혜련, 전재수, 임종성, 신동근, 김민석, 이용선, 김경협, 소병훈, 민형배, 주철현, 김회재, 소병훈, 진선미, 박찬대, 박정, 김상희 의원 등 40여명이 파악되고, 미래통합당은 김기현, 조경태, 김태년, 박진, 이채익, 하태경, 홍석준, 김태흠, 박덕흠, 조해진, 이철규, 박덕흠, 김미애 등 25여명과 미래한국당은 정운천, 서정숙 지성호 의원 등 3명과 국민의당 권은희 의원 1명이 있다. 무소속으로 이용호, 홍준표, 윤상현 의원 등 3명과 민주당 및 통합당 초선의원까지 포함할 경우 최대 90여명 미만으로 20대에 비해 30여명 이상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종교별로 주목하지만 의원의 신앙적 성향이 어떤지, 몇 명인지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들이 지역구 관리 차원이나 표를 얻기 위해, 또는 취미나 여가생활로 교회출석을 하는 정도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기독교인’으로 알려졌어도 신앙적 정체성이 불분명한 경우도 간혹 있다. ‘기독의원’이라는 이름에 맞는 정작 슬기로운 신앙생활은 기독교적 가치와 세계관을 가지고 정치권 복음화와 한국교회와의 정책협의나 연대,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할 때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이렇게 21대 국회의원으로 주목받는 최고령, 최다선의 연륜도, 역경을 딛고 승리한 경험도, 최연소의 패기도,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신념이나 신앙과 함께 국민의 목소리를 바르게 읽고 대변하고자 하는 기본자세가 아닐까. 모든 문제를 자기 진영이 주장하는 대로 해결하려 한다면, 정치는 결코 우리의 삶을 긍정적으로 이끌 수 없다. 어설픈 진영논리와 조직의 주장에서 벗어나 사안마다 가장 합리적인 해결 방법을 찾고, 미래지향적 어젠다를 제시하려해야 한다. 21대 국회야 말로 과거나 이념보다 경제와 협치, 국민통합이 필요하다. 여당은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야당은 정책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누가 미래지향적 정책을 내어 놓는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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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8
  • [이효상 칼럼] 경기도 다산(茶山)신도시 교회들의 소통(疏通)법
    경기도 남양주시에 신도시가 형성되었다. 구리갈매를 지나면 남양주 별내, 진건, 지금 가운, 다산동 등으로 이어지는 ‘다산(茶山)’신도시는 정약용선생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2022년까지 총 3만 5천세대 가까이 입주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람이 몰려드는 신도시는 분명 황금어장이다. 신도시에서 사역을 하는 수많은 교회들이 부흥하기 위해 어떻게 지역과 소통하고 주민에게 어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신도시는 90%이상이 아파트 문화이다. 이를 이해하고 교회 ‘문턱’을 낮추고 ‘소통(疏通)’하는 것이 관건이다. 대체적으로 새로운 교회로 방향을 설정하고 동네를 교회 공동체로, 주민들 전체를 교인으로, 지역사회 전체를 목회현장으로 생각하고 소통하면 할 일이 생기고 문이 열린다. 신도시아파트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있을까. 소통의 길을 찾으면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남양주‘다산’신도시의 경우 부흥하고 있는 교회들의 소통법은 남다르다. 가람초등학교 옆의 벧엘교회(예장통합: 양승만 목사)는 신도시초기 지역 민원실이 좁은 공간과 민원처리 인력, 주차장 부족 등의 문제로 대규모 전입 민원 처리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지역과 소통하기위해 기꺼이 교회 강당을 현장민원실로 제공하며 입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원활한 전입 민원 처리를 도왔다. 이렇게 주민의 만족도를 높인 동시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 한번쯤 방문하고 싶은 좋은 교회로 자리매김 했다. 도농역 도농도서관 앞의 평화교회(예장합동: 김상권 목사)는 지하철 도동역 앞에서 토요일 무료급식으로 지역 노인분들을 섬기고 있다. 평균 150여명 정도가 식사에 참여하지만 많을 때에는 300여분이 드시기도 한다. 지역 주민의 칭찬과 입소문이 자자하다. 가운동의 하늘누리교회(예장통합: 윤호용 목사)는 지난해 10월 소외계층을 위한 라면 50박스를 서부희망케어센터에 전달했다. 다산2동 주민센터를 통해 관내 홀몸 어르신과 비정형가구 등에 전해졌다. 저소득층 급식지원 및 후원물품 지원을 통해 이웃사랑 나눔의 실천은 지역사회에 귀감이 되고 있다. 이렇게 매년 후원으로 이웃사랑 실천에 앞장서며 나눔의 온기를 살리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보라아파트 정문 앞 예정교회(예장합동; 설동욱 목사)는 금년 5월 어린이날을 맞아 ‘다산어린이축제’를 열고 다산신도시 어린이 3천명을 초청하는 행사를 벌써부터 준비하였지만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정 연기한 바 있다. 지역 아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출석하는 아동들이 300~400명에 이르고 있다. 예스프라자 상가의 다산따스한교회(예장합동: 손진원 목사)는 지난해 3월에 개척하여 교회장소를 ‘다산주민들을 위한 따스한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평일에 개방하고 있다. 공방, 강연, 주민모임 등 커피숍과 강의실로도 활용 가능하게 하여, 차나 음료도 무료 제공한다. 그래서인지 각종 모임을 위해 찾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개척 2년만에 건축하여 금년 4월말 입당한 새봄초등학교 옆의 다산중앙교회(예장고신: 최식 목사)는 다산중앙공원의 2만평을 정원으로 갖춘 아름다운교회이다. 지역아동들을 위한 영어교실과 케익 만들기 등 다양한 창의력 문화교실을 열어 학부모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고 있다. 6월 13일에는 국제기아대책과 함께 지역주민 바자회를 열어 그 수익금으로 굶주린 아이들에게 도와 주는가하면,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박지혜 초청연주회를 개최해 지역민들과 눈높이를 맞춰가려하고 있다. 이렇듯 교회가 지역과 소통하면 매력있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다. 교회의 참된 역할이 무엇일까. 교회가 지역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할 수 일들은 없을까. 교회다운 교회를 지향하며 건강한 교회로 든든히 서가기 위해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목회 패러다임을 바꿔 세상을 목회하면 어떨까. 교인들을 삶의 현장에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내 보내고 소통하는 일이 아닐까. 단회적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 소통으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교회도 자전거의 두 바퀴와 같다. 앞바퀴는 ‘모이는 교회’라면, 다른 뒷바퀴는 ‘흩어지는 교회’이다. 이 두 바퀴가 앞으로 이끌고 나간다. 이렇게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앞으로 계속 전진해 갈 수 있다. ‘모이는 교회’란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말씀을 나누고, 그리고 서로 교제하는 하나님을 향한 교회의 기능을 말하며 반면, ‘흩어지는 교회’란 성도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나아가든 어쩔 수 없이 나아가든, 나아가서 사회와 소통하며 섬기는 선교적 기능을 말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였다. 많은 교회들이 ‘모이는 교회’라는 바퀴는 크고 튼튼한 데 비해 ‘흩어지는 교회’라는 바퀴는 상대적으로 작고 부실하다. 교회는 지역과 소통하려고 몸부림쳐야 한다. 어떤 식이든 한걸음이라도 더 지역으로 다가가는 소통법을 찾아야 한다. 특히 밀레니엄 세대들은 소통하며 삶의 방향성을 제공받길 원하여 교회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때 ‘사역’보다는 관계성, ‘탁월성’보다는 진실, ‘해답’보다는 신비, ‘획일성’보다는 다양성 등의 가치를 잘 귀담아 들어주고 소통할 필요가 있다. 교회나 목회자가 소통하지 못하고 건물안에 갇히면 설 자리가 없다. 그런데도 거의 존재감 제로(0)라면, 다시 소통을 생각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교회는 두 바퀴의 균형과 조화가 무너져 있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우리끼리 모여 즐기고 좋아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때면, ‘독 안에 갇힌 쥐’의 형국이다. 독을 깨고 나가고자 하는 모습이 바로 ‘흩어지는 교회’이다. 이제라도 관심을 지역사회에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요즘 성도들은 건물 큰 교회를 찾기 보다는 건강한 교회와 다음세대를 먼저 생각한다. ‘건강한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 지역사회와 세상·사람들과 소통하는 교회이다.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는, 교인들이 가보고 싶어 찾아가는 교회는, 새신자가 교회를 방문한다면 다니고 싶은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이런 질문에 응답하며, 소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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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8
  • [이효상 칼럼] 책 읽기의 즐거움 속으로
    코로나 시대, 다들 궁금한지 뭐하고 어떻게 사느냐고 묻는다. 비대면과 차단의 시대를 극복하고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있다면, 그것은 '책 읽기'의 즐거움에 푹 빠져 사는 것이다. 좋은 책을 접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다보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도 더 이상 ‘독백’이 아닌 상호소통이 되고, 거꾸로 좋은 관계에 익숙해진 이들은 바람직한 ‘독서’로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매일 신문과 성경을 정독하고 책 한권 정도를 읽으려 한다. 이미 벌어져서 지나간 과거의 사건을 알려 주는 것이 신문(新聞)이라면, 성경은 과거에 쓰여진 책이지만, 사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꼭 필요하다. 우리가 시간을 쓰는 방법에 따라 금도 되고 은도 되는 것처럼 하루의 생활을 신문과 성경으로 거룩한 독서를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 그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인지의 문제는 본인의 선택이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한 손에 신문을, 한 손에 성경’을 이라고 말했던가. 신문은 현 시대의 삶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이 현 시대의 인간 사회의 모습이다. 이 신문과 책을 통해 인간사의 사고방식, 인간의 고통, 사유방식, 문제의식을 캐치하고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성경을 통해 찾아보려 한다. 독서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특히 유아와 청소년의 독서는 그들에게 많은 지적 소산을 안겨줌과 동시에 다양한 창조력을 키우고 풍요로운 감성을 보살펴준다. 하지만 현실은 스마트폰이나 방송 미디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독서 시간은 하루 평균 6분이라면, TV 앞에서는 2시간 이상이라고 한다. 스마트폰 없이 살아가기 힘든 세대를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하는데 혹시 우리는 이미 스마트폰에 중독된 신인류 ‘포노사피엔스’는 아닌가. 인문, 사회, 자연, 과학 등 다양한 융합을 통해 시대를 읽는 혜안이 가지고,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책읽기’이다. “오직 독서 이 한 가지가 큰 학자의 길을 좇게 하고, 짐승과 구별되는 인간다움을 만든다.”는 다산(茶山) 선생의 말처럼, 선생의 첫 번째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배생활 중 그의 방을 책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1,304권의 책을 구비했고 선생의 책 읽는 삶이 그러했다. 평생 저술한 500여권만 봐도 얼마나 많은 책 읽기와 연구 집필에 매진했는지를 보여준다. 수도권 동북부 거점도시 남양주시는 다산 선생의 얼과 정신을 담은 ‘정약용박물관’에 이어 ‘정약용도서관’을 개관한다. 국내 6번째 규모의 22만3천권의 장서를 갖춘 지식의 보물창고(寶庫)이다. 경기도민으로 자랑스러울 정도로 참 아름다운 명품도서관이다. 찾는 이들이 즐거운 명소가 될 전망이다. 그래서 책읽기는 더욱 깊어지고 즐거워진다. 우리나라 선진들은 일찍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였다. 집을 나가서는 천하의 뜻 있는 벗들과 사귀고, 집에 들어와서는 옛 성현들의 책을 읽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신라시대에 관리를 등용할 때에는 그 사람의 독서 범위와 수준을 헤아려 인재를 등용하는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독서를 권장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태학이라는 고등교육기관을 두어 경학(經學:사서오경을 연구하는 학문)·문학 방면의 책을 강독하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이미 우수한 종이를 만들고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성경 보다 빠른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드는 등 인쇄술의 발달로 ‘직지’와 ‘자치통감’ 등 많은 책들을 간행하였다. 성종 때는 수서원(修書院: 학교와 도서관을 겸한 기관)을 창설하고 역사책을 등사하고 소장하게 하여 열람하도록 하였다. ​책 읽기(독서;讀書)는 가장 넓은 세계를 가장 손쉽게 경험하고 상상하게 만들어 주는 가장 좋은 스승이자, 자기성찰의 기회를 마련해주고, 삶에 대한 통찰력과 안목을 길러준다. 또한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우리나라의 책 읽는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성리학이 들어온 뒤이다.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신흥 사대부계층이 역사담당계층으로 성장해 간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르러서였다. 이 사대부들은 박지원(朴趾源)이 “독서를 하면 사(士)요,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이다.”라 지적한 바와 같이, 평소에는 유가경전과 시문·사서(史書) 등을 읽으며 한문교양을 쌓다가 기회가 닿으면 정치일선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이들 선비계층은 주업이 독서였고, 독서를 통해 그들의 덕행과 학식을 쌓았던 것이다. 이런 책 읽는 문화는 유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하였다. 그들의 독서토론과 연구발표도 자연히 유가적 교육기관인 서당·서원·향교·성균관 등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다. 조선조는 유학을 건국이념으로 하고 역대의 임금들이 학문을 장려하였으므로 중국으로부터 많은 서적이 수입되고, 국가적인 도서편찬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어 많은 책들이 출판되었다. 민간에서도 수많은 문집들과 사서들이 간행되었다. 또한, 집현전·홍문관·규장각 같은 일종의 도서관시설이 설치되어 많은 문헌들을 수집, 정리, 보관하여 당시 관료지식인들이 열람할 수 있게 함으로써 책 읽는 문화를 찬란히 꽃피웠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책 읽는 현실은 어떠할까. 1년간 일반 도서를 한 권이라도 읽는 사람의 비율은 성인이 60%,학생이 92%로 각각 나타난다. 성인의 40%는 1년에 한 권도 안 읽는다는 말이다. 참으로 '책 안 읽는 한국인'이다. 1909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독일의 물리화학자 프레드릭 오스트발트는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책 읽기'라는 공통점을 찾아냈다.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며 그 세계는 책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시인 볼테르가 말했던가. 하루 20분만 책 읽기에 투자하면 안 될까.1년이면 300페이지짜리 책 12권을 읽을 수 있다. 하루 20분 책 읽는 즐거움 속으로 들어가 보는 건 어떨까. 우리의 삶과 지성을 건강하게 일으켜 세워보는 건 어떨까. 건강한 지성의 인생의 코드, 그리 멀리 있지 않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0-05-21
  • [이효상 칼럼] 선지적 지성, 담론이 사라진 시대인가?
    한 남자가 자살을 결심하고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라고 삶의 이유를 묻자 이를 위해 철학자 윌 듀런트(Will Durant )는 이 문제를 혼자 고민할 게 아니라 당대 지성인들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여겼다. 자신이 높이 평가하는 당대 지성인 100인에게 편지를 썼고 거기서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이렇듯 전통적으로 ‘지성인’이란,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공적인 참여와 활동을 담당할 때 그렇게 칭한다. ‘지성인’은 문인, 성직자, 철학자, 사상가, 대학교수 등 공적 담론을 이끌어 나가는 이들이다. 사회학자 칼 만하임은 이런 지성인을 가리켜 사회의 “파수꾼”(Wächter)이라 불렀다. 자발적이었건, 강요되었건 일제 강점기말 식민지 조선에서는 지식인만 넘쳐날 뿐 지성인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시국도 있었다. 그것은 다만 그때만이 아니다. 과거 혼란한 6.25전란과 민주화시절 대중들은 지식인들을 사회의 길잡이로 삼아 한 시기를 헤쳐 나가기도 했다. 1970년 이후 산업화·민주화로 이어지며 한국사회는 지성인의 현실 참여의 비중이 커졌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지성인의 사회 참여가 감당해 온 역할과 비중은 오히려 작아지고 희미해졌다. 아니, 어쩌면 지성인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을 정도인지도 모른다. 공적영역에서 무책임하며 도덕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이들을 향해 엄중히 비판하고 올바른 대안과 길을 제시하는 선지자적 지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치열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지성적 담론이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점이다. 지성인에 속하는 이들이 정치적 입장에 서서 지향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향한 비난과 협박만으로 그 담론을 대체하고 있다. 오늘날 지성인이 아무리 객관성과 보편성을 주장해도, 그 발언은 간단히 어느 한 ‘편’의 것으로 매도당하고 만다. 지성인들의 숙명이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하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책임윤리와 신념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며 참여할 수도 있다. 지성인의 덕목은 이성적이고 도덕적 균형 감각을 갖춘 독립된 파수꾼 역할에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지성계는 도덕적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양극화된 정치문화는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라는 갈등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강단 지성인들이 이제는 SNS와 유튜브 채널에서 활약하며 선과 악을 이분법으로 규정하고 심판하는 검사의 역할까지 하려한다. 내 편이면 옳은 선이고, 반대편은 그른 악으로 규정하는 식이다. 최근 386세대 동료를 만나보면 그새 다들 교수가 되어 있고, 수도권 웬만한 대학에선 교수연봉이 1억이 넘는다고 자랑한다. 그들은 교수는 기능이 아니라 신분. 그 신분의 유지를 위해 그들은 자기들끼리도 안 읽는 논문을 써 가며, 그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줄 궁리를 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누리는 특권은 희생양인 시간강사의 노동에 대한 착취를 통해 유지된다. 이들이 침묵하는 데에는 진보나 보수나 차이가 없다. 이른바 ‘진보적’ 지성인들은 지배층이 되었고 이미 기득권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그저 자기 계급을 대변할 뿐이다. 그들은 더 이상 문제를 ‘비판’하지 않는다. 비판해야 할 그 현실을 자신이 만들었고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계, 언론계, 문화계, 종교계 등 사회전반에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그 막강한 영향력으로 대중을 장악해 얼마 남지 않은 희미한 ‘비판’의 목소리마저 잠재우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시스템의 문제점과 허구성이 폭로되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자기들만의 지식이 아니라 서로 함께 손잡고 나갈 수 있는 그런 지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전후해서 소위 진보 지식인 그룹의 진영논리는 극심했다. 이들은 기이할 정도로 당파적 편향성을 띄었다. 특정 정당과 지역으로 나눠 한 쪽 편만 들며 상대편을 폄하하는 등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 지성인 스스로가 나서서 케케묵은 지역갈등의 망령을 되살리거나 한쪽만의 견해를 진실처럼 말해선 안된다. 반대편의 위선에 대해 말하려면 자기편의 위선도 고백해야 한다. 그것이 이성에 바탕을 둔 지성인이 지녀야 할 도덕적 의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난다. 지성인들마저 권력에 줄을 서고 손을 잡기 시작한다. ‘비판’을 사명으로 알던 진보 지식인들이 정부기관에 진출한다. 그러면서 친정부를 표방하며, SNS를 이용해 쏟아내는 정치적 발언은 살벌하기 짝이 없다. 친정부 편향적 미디어의 주장만 받고 옹호하며 SNS에 공유한다. 이런 지성인이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지지자들의 환호를 이끌어 낸다. 그들의 역할이 선동적으로 크나큰 위력을 발휘한다. 추종자들은 SNS에서 강화된 응집력으로 매스컴들과 상호작용을 발휘하며 여론을 주도한다. 언제부터인가 ‘지성인’이라는 말을 듣기 힘들어졌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실제로 지성인이나 논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혹독한 여론과 언론 앞에 고뇌하고 침묵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는 시류에 영합하는 정치인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오늘날 행동하는 지성인 중에 ‘어용’이 많다. 지성인이 침묵하거나 어용 지식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지성의 무덤이요, 지식인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자나 권력기관에 영합하며 자리를 보장받고 줏대 없이 줄서기 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어용’이라 부른다. 물론 아직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인’이 아닌 ‘지성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더러 남아 있긴 한 것인가. 가령, 스스로 지성인이라 일컫는 성직자가 자리를 탐하거나 이권에 개입하고 비즈니스맨(businessman)으로 전락한다면, 선지자적 지성을 포기하고 이런 지식인들이 어떤 편에 서는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이해를 대변하는 지성인은 더 이상 ‘계층’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익집단’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진보는 정치적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가치집단’으로서 진보는 죽었다”라는 진중권 교수의 지적처럼 전통적 지성인은 멸종한 것일까. 가히 지성인들에게 정치를 비롯한 공적 영역에서 도덕적·지성적으로 냉정한 평론과 진지한 토론을 찾아볼 수 없다. 이제는 전통적인 관점의 지성인은 사라져 간다. 현대 지식인은 인스타그램・유튜브・트위터 등 SNS에서 많은 팔로워・구독자를 가진 사용자나 포털사이트에서 큰 블로그를 운영하는 파워블로거 등에 영향을 미치는 ‘메가 인플루언서(Mega-Influencer)’로 형태로 대체된다. 교수・문인・성직자・철학자 등이 이 역할에 해당된다. 최근 친 정부 성향의 메가 인플루언서들은 SNS 상에서 자기만의 전문성을 지닌 ‘마이크로 인플루언서(Micro-Influencer)’들과 조응하며 영향력을 확대한다. 여기에 소위 ‘셀럽(Celeb)’이라 불리는 집단이 지식인 대열에 가세하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지식인은 많지만 이성적이고 깊은 사유(思惟)를 갖춘 지성인들은 침묵하고 자연히 사라지고 만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로『지식인의 아편』을 쓴 레몽 아롱(Raymond Aron)의 명언이 떠오른다. “정치란 선악의 투쟁이 아니다. 과거와 미래의 투쟁은 더욱 아니다. 정치란 좀 더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선택일 뿐이다. 정치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지난해 9월 소설가 황모(某)씨는 1,267명이나 되는 문인들을 모아 서명을 받고 ‘조모(某)지지’ 성명을 주도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랴. 조모(某)를 졸지에 한국의 드레퓌스, 죄 없는 의인으로 추앙받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어용’이 되어간다. 심지어 ‘어용지식인’임을 자랑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어용’이 투사가 되고, 가슴에 빛나는 훈장을 달고, 그 공으로 자리가 보장된다. 이렇게 한국 사회는 중요한 쟁점마다 선과 악 이분법으로 나뉘어 갈등과 대립, 분열의 중심에 어용 지식인들이 있다. 지성인이나 논객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난세(亂世)에 침묵하고 현실을 외면한다. 한국사회에 지성과 도덕적 윤리에 충실한 지성인이 생존하기는 한 것인가. 이 시대 지성인의 역할과 책임, 그리고 용기와 고뇌가 있는가. 권력자 헤롯이나 바로, 혹은 네로의 눈치를 보다 그 목소리를 잃지 않았는가. 가십(gossip)과 먹방(먹는 방송)으로 일관하는 언론 방송이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고 보는가. 선지자적 지성과 메시지가 사라지는 시대, 현실의 부정과 부패, 구조적 모순에 대해 누구도 바른 말하지 않는 침묵의 사회는 과연 건강한 것인가. 오늘 하늘의 소리를 듣고 시대정신을 가리키는 선지자와 예언자적 메시지는 누가 말 것인가. 광야의 들소리처럼, 세례요한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혹독한 비난 가운데서도 작은 신음소리라도 내는 그런 지성으로 인해 역사는 치유되고 발전한다. 지성인들은 당대에 평가 받지 않고 다음 세대에 평가될 것이다. 다음세대는 지금의 한국사회와 지성인들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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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2020-05-12
  • [이효상 칼럼] 빚 가운데로 걸어가는 대한민국, 미래는?
    저 출산율, 암 사망율, 음주 소비량, 양주 수입률, 교통사고율, 청소년 흡연율, 이혼율, 국가부채…이런 각종 타이틀은 손가락 순위권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중에 하나가 국내총생산(GDP)에 비해 국가부채, 가계부채 증가폭도 코로나19 위기 이후에 경고음이 더 크게 울렸다. 2019년 회계연도 국가결산 보고서를 보면 국가부채가 2019년도 1743조6000억 원으로, 그 전년보다 60조2000억 원이 늘면서 국민 1인당 1409만원 상당의 빚을 떠안고 전 국민이 3년 동안 한 푼도 안 써야 다 갚을 수 있는 상태이다. 국가채무 급증은 재정수지 악화로 국채 발행이 늘기 때문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재정안정 마지노선’인 40%를 넘어 41.4%로 치솟고 있다. 하지만 이는 향후 예상되는 6월 추경이 반영되지 않은 수치로 추경이 반영되면 국가채무비율은 더 높아질 전망이다. 늘고 있는 나랏빚, 경기 불황으로 세수마저 줄면 나랏빚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게 된다. 국가 채무에 국세마저 1조3000억 원 덜 걷히는 세수 결손까지 발생하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경제의 먹구름은 언제 걷힐지 아무도 모른다. 고용부가 발표한 ‘3월 사업체 노동력’발표에 3월 한 달 새 강제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59만명이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전 산업으로 번진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앞으로 재정 지출은 더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정부가 코로나충격으로 어려움을 겪는 서민을 돕는 것은 마땅히 할 일이지만, 부유층에도 재난지원금을 뿌려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지난 해 본 영화 ‘국가부도’가 생각나면서,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불과 20년 전 1998년 IMF 현실을 소재로 ‘국가부도’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던 상황을 그린 영화였는데 어찌나 실감나든지, 어떻게 예나 지금이나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아니다”.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 하는 것인지 참 모를 일이다. 모두들 힘들다 어렵다고만 하는데 당국자나 정치권만 여전히 괜찮다고 하니 도무지 무엇을 보고 괜찮다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더 혹독한 댓가를 치르고 나서 깨닫지 말고 현실을 직시해야 할 시점이다. 정부는 6월, 3차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을 서두르고 있다. 1969년 이후 처음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동제한 장기화에 따른 내수 위축과 전 세계적 경제 추락으로 인한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각국이 천문학적 재정을 투입하고 있는 게 ‘뉴노멀(New Normal)’이 되고 있다. 추경도 적정 규모를, 적기에 처리하는 게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재정 건전성 악화를 최소화하는 노력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재정 쓰임새가 커질수록 재정의 투명성과 건전성을 유지하는 노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한데 그 누가 감당할 것인가. 국민 혈세는 꼭 써야 할 곳에 써야 한다. 빚낸 돈을 자기 주머니 쌈짓돈 쓰듯 선심성으로 뿌린다면 국가 미래는 어두워질 수 밖에 없다. 브레이크 없는 재정 질주 및 1당 독주는 미래전망을 어둡게 만든다. 그래서 ‘’견제와 균형‘이라는 선명 야당의 역할이 더 기대된다. 하지만 이 지경이 되면 나라 살림을 관리하는 정부와 정치인이 무슨 대책이라도 내놔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6월 21대 개원국회는 나라 살림을 알뜰하게 운영하도록 여야 없이 지혜를 모으고 협치하는 새 풍속도를 기대하면서도 이미 두 차례 추경 과정에서 줄일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쥐어짠 상황이겠지만 공기업 등 강도 높은 추가 세출 구조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계속 적자 국채 발행만 늘릴 경우 통화 팽창과 국제 신인도 추락 등의 부작용이 예상된다. 정부투자 대부분 비생산적 혈세 낭비로 정부가 재정 지출을 늘릴수록 세금이 늘어나고 그만큼 민간은 새로운 투자 기회를 잃게 된다. 결국 정부의 확장정책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국가의 부담만 늘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만큼 정부는 512조원 규모 슈퍼 예산에서 불요불급한 지출을 삭감하는 등 과감한 세출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 이것이 나라 곳간을 맡은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다. ‘빚 살림살이’는 정부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340개 공공기관의 부채는 지난해 21조원 이상 불어 사상 최대인 525조1000억원에 달했다. 당기순이익은 2016년 15조4000억원에서 6000억원으로 쪼그라들었지만 지난 4년간 임직원을 10만명이나 늘렸다. 경영이 얼마나 방만한지를 말해주는 수치다. 근거도 없고 기준도 애매한 나라빚 불리기는 정부나 공공기관이나 똑같다. ‘전시상황(戰時狀況)’이라는 대통령의 간곡한 발언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헌(改憲) 군불 때는 여(與)당은 개헌안 처리를 들고 나왔다. 어차피 재적 3분의 2를 얻어 국회를 통과하기는 힘들다. 국민들은 4.15 총선에서 개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여당에게 주었다. 그만큼 경제 위기극복과 책임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와 당부였다. 장차 개헌 논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우선순위는 제왕적 대통령제 극복일 것이다. 지금 개헌 논의에 국력을 쏟을 여력이 없다. 경제 위기극복에 총력을 기울여도 부족할 판에 여당이 개헌 논의로 국력을 분산 시키는 행동이나 궁리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장기집권을 대비한 권력의 오만함으로 비춰질 것이다. 대통령이 현 경제상태를 ‘전시상황’이라고 하는데, 여당은 왜 그렇게 반대로 가야 하나. ‘국민개헌발의’와 통합당 일부 의원들을 흔들어 보려는 꼼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나라 두 동강 내는 진보의 폭주, 극단의 정치는 더 이상 안된다. 우리가 살면서 하는 걱정의 대부분은 아마 이런 돈 걱정일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라고 하지만 결론은 돈 걱정이다. 돈에 신경을 쓰고 걱정하고 힘들어하며 스트레스도 받지만 우리로 하여금 각성(覺醒;깨달아 앎)케 한다. 코로나 보다 빚이 더 겁난다고들 한다. 코로나 충격속에 서민들은 빚으로 버틴다. 실물경제 침체로 사회취약 계층은 생활고와 빚으로 살아간다. 민생경제가 응급상황에서 1700조 넘는 국가부채, 선심성 긴급재난지원금으로 과연 발등의 불은 꺼질까?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양극화는 더 심각해진다. 어차피 70% 국민은 대출깔고 사는 서민이다. 빚 가운데서 빚으로 산다. ‘재난지원금’으로 인해 경기부양이라는 큰 도움이 되기보다는 어려움 당한 사람들에게 심리적 위로는 될 듯하다. 국가가 공짜 돈을 준다는데 싫어할 국민은 없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배급과 할당 등을 공유하는 국가주도형 사회경제가 형성되고, 정부의 선심성 퍼주기 정책이 오히려 정부의 의존도만 높여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환상 속에 국민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경제 위기극복을 핑계로 ‘묻지마 지원’은 안 되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개인적 일자리 마련을 위한 노력의 엄중함과 노동 창의력 등이 상실되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지 염려된다. 서민들은 일자리와 빚 상환 걱정뿐이다. 올해 1분기 파산신청이 5년 새 최다를 기록하고 있다. 국민도 돈이 없고 국가도 돈이 없다. 국민은 은행 이자내기 바쁘고 국가는 매년 늘어나는 국가부채를 부담스러워 한다. 이렇게 늘어난 빚은 누가 갚을 것인가? 향후 계속되는 적자 국채발행은 향후 미래 세대가 떠안게 될 잠재적인 빚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선심성 퍼주기가 마냥 환영할 일만은 아니다. 정부와 여당은 4인가구 기준 최대 100만원의 지원금을 주는 대신 돈 많은 사람은 알아서 자발적으로 기부하라며 주었다. 재난지원금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는 세액공제를 해주는 특별법까지 만들면서, 빚 낸 돈을 무차별 살포한다는 비판을 면하려는 황당무계한 ‘기부운동’을 벌였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재정정책은 끝없는 ‘땜빵식’, ‘돌려막기식’으로 이어져 혼란을 부른다. 돈이 ‘빚’이 되면 어떻게 될까. ‘빚 진게 죄인’이라는 말이 있다. ‘죄인’되고, 자유함을 잃고 매이는 ‘노예’가 된다. 그래서 성경에는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빚의 대물림은 불행이다. 지금 우리는 후손들에게 너무나도 큰 빚을 안겨주고 있다. 이 기회에 ‘포퓰리즘 정치’에 맛을 들인 그리스 ‘국가부도’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아르헨티나도 부도국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빚’ 가운데로 걸어가는 대한민국, 후손들에게 ‘빚’이 아니라 ‘빛’ 가운데로 걸어가게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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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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