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신사참배와 공산당에 끝까지 저항하다 ‘순교’


 
김익두(金益斗, 1874~1950)목사는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부친 김응선과 모친 김익선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비교적 집안형편이 좋은 가정이어서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성장해 갔다. 그의 나이 여섯에 서당(書堂)에 다니며 한문을 익히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너끈히 떼내어 주위로 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익두 소년에게 생각지도 못한 갑자기 부친을 여의고 13세 나이에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사야 하는 세상 물정도 몸소 겪었으며 때로는 술로 세월을 보내며 깡패처럼 살아가는 모진 인생사를 겪기도 하였다.
한편 장래의 큰 희망을 품고 선비의 꿈을 가지고 과거시험에 응시한 적도 있었으나, 낙방의 고배를 맛보기도 했다. “너는 살아가면서 사람구실을 제대로 해야 한다.” 이는 어린 익두가 13살 때 아버지가 임종에 가까워지자 아들을 불러놓고 한 유언이었다. 익두는 아버지가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때로는 생활이 어려울 때도 있었으나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어 아들을 한문서숙에 보내 가르쳤으며 개인적으로 아들에게 한문과 산학(算學·산수)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때는 인생문제에 회의가 들어 당시 유행이던 동학(東學)에 입문해 심취하기도 했고, 불도(佛道)에 기웃거리기도 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마지막엔 주색잡기에 빠져 불한당으로 변모해, 갖은 행패를 다 부리는 망나니로 전락하였다. 오죽했으면 당시의 평양시민들이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성황당에 들러 오늘은 제발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다고 했겠는가.
평양신학교를 설립한 사무엘 마팻이 길가에서 전도책자를 나누어주며 전도하고 있는데 주정꾼이요 깡패였던 익두가 던진 돌에 턱을 맞아 흉터가 생겼다는 일화가 그의 과격했던 삶을 반증해주고 있다.

27세에 예수 영접, 소명 받아
1900년 27세가 되던 해에 김익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게 된다. 하루는 익두가 평양 장날 볼일을 보러 갔다가 장터에서 서양 선교사가 주는 전도지 한장을 받았는데 집에 돌아와 호주머니에 무심코 꾸겨넣어 두었던 전도쪽지를 읽게 되었는다. 그 내용인 즉 이러했다. “인생은 풀의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벧전 1:24). 그 글을 보는 순간 그의 가슴은 뛰기 시작하였다.
이때 마침 친구 박태후가 스왈렌(蘇安論 Dr. Swallen willian)선교사가 이끄는 부흥회에 한번 가보자고 했다. 예전 같으면 콧방귀나 뀌었을 그는 순순히 친구를 따라 나섰고 비로소 바로 그날 예수를 영접 했다. 그러나 방탕의 오랜 습관에 물들어 있던 그는 얼마 못가 다시 옛 술친구들과 어울려 또 술을 다시 마시게 되었다. 얼마후 내가 이런 삶으로 살아가선 안되겠다는 자각이 있었고 스왈렌 선교사에게 서약했던 고백이 떠오르게 되어 자주 친구들과 함께 드나들던 기생집에서 밖으로 박차고 나가 산속으로 들어가 가슴을 치며 밤을 꼬박 세워가며 자기도 모르게 참회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고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자기 가슴속으로 큰 불덩어리가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는 너무나 놀라 “어이쿠 불벼락이야”하며 놀라 소리치게 되었는데 안방에서 자고 있던 그의 어머니가 놀라 밖으로 뛰어 나올 정도였다.  익두는 난생 처음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성령의 불세례를 받은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 그는 죄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멀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8세에 재령읍교회에 전도사 취임
이윽고 김익두는 28세 때 재령읍교회 전도사라는 명예로운 성직을 얻어 본격적으로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복음을 위한 역군이 된 것이다. 그의 첫 목회지는 여성도 10여명, 남자 1명이 출석하는 빈약한 목장이었으나 그해 10월에 그에게 세례를 베푼 스알렌(Swallen)목사의 부탁으로 신천(信川)교회로 임지를 옮겨갔다. 그곳에서 김익두는 서양귀신을 섬기는 자라 하여 발길로 차이고 온갖 욕설과 조롱, 돌 팔매질을 당하는 핍박을 받았다. 막상 가서 보니 교인 한명 없는 빈 교회였다. 그가 빈 교회에서 기도한지 6개월이 지나서야 절룸발이 장애인 여자 하나가 찾아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얼떨결에 그 장애인을 두 팔 벌리고 환영하였다. 뒤이어 남자 걸인이 찾아왔다. 그는 그 걸인도 잘 모셨다. 그후 그가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교인 한명 없던 교회가 3년만에 30명의 교인으로 부흥했다. 그후 그는 신천교회를 크게 부흥시켜 1924년에는 700명의 교인이 모이게 되자 동·서로 분리하기에 이르렀다.
1906년 33세 때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 목사안수를 받았고 1920년엔 드디어 총회장에 피선되어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게 된다. 나중 그는 평양뿐만 아니라 만주와 시베리아(러시아)에 이르기까지 776회가 넘는 부흥사경회를 이끌면서 나라 잃고 고통 받으며 방황하는 동포들에게 구원의 메세지와 위로의 말씀을 힘있게 전했다.

초기 부흥사로서의 김익두
그의 부흥집회로 150여개 교회가 세워졌고 그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목사가 된 이들만도 200여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김재준과 순교자 주기철목사도 포함되어 있다.
이때부터 김익두목사는 전국을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사도행전적인 이적 기사가 따랐다. 1919년 달성군 현풍교회에서 턱이 빠진 걸인을 위해 금식기도 하던 중 턱이 나았고, 경산교회에서는 중풍병이 든지 3년된 환자를 안수기도로 고쳤고, 대구에서는 반신불수된 남자 신자를 고친 바 있고, 부산에서는 생후 8개월만에 앉은뱅이 된 자를 안수하여 고쳤고, 경남 김해에서는 23년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완쾌되는 역사가 뒤따르면서 선풍을 이르켰다. 
한편 이즈음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식민통치는 날이 갈수록 더욱 교회와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라는 멍에가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었다. 당시 총회는 1938년 평양 총회에 당국의 악랄한 압제정책으로 총회원사이사이에 일본 형사들이 한사람씩 끼어앉아 강제로 총대들의 팔을 들어 올리면서 총회적으로 신사참배 결의를 가결하는 천추의 오점을 남기는 결의를 하고 만 것이다. 당시 총회 결의에 잘못됨을 지적하고 현장을 이탈한 주기철목사를 총회 항명죄로 목사직을 면직하는 불법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1984년 한국선교100주년에 즈음하여서는 해당자(주기철목사)도 또 당시 벌했던 총대들도 이미 하늘나라에 가 있는데, 총회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후배 총대들에 의해 <해벌복권>이란 웃지못할 결의를 또 감행하고 말았다.

총회의 신사참배에 반대
신사참배 결의는 한국교회의 분열로 이어졌고 그로인해 상처입은 생채기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일제당국은 김익두를 찾아와 협력을 강요했으나 거절하였다. 이런 이유로 김익두목사는 전신에 구타를 당하고 손가락 사이에 각목을 끼워 비트는 고문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손톱밑에 대나무 침으로 고문했다. 김목사는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기도만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게 된 조국은 혼란에 혼란을 더하더니 드디어 민족상잔의 6·25전쟁이 발발, 이 민족과 교회는 또다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해방이 되자 북쪽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고 김일성은 강양욱목사를 앞세워 반공의 보류였던 기독교를 포섭, 조직적인 파괴와 통제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공산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받기 위해 김익두목사의 허락도 없이 명목상의 총회장 자리에 옹립하였다. 김목사는 황해도에서 피난을 못하고 은신해 있으면서 라디오를 통해 전황을 들으면서 국군수복을 고대하고 있었다.

공산당에 대한 저항으로 끝내 순교
1950년 10월 14일 새벽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었다는 감을 잡고 교회 새벽종을 쳤는데 50여명의 교인들이 새벽에 모여들었다. 김목사는 모여든 신자들에게 “하나님 감사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압제에서 이 백성을 건져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눈물로 기도를 마치고 김목사가 설교를 하려는데 한 청년이 다급하게 뛰어와서 “목사님과 성도님들 위험하오니 피하세요. 패잔병들이 이 산에 숨었다가 교회를 향해오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김목사는 피신할 생각을 하지 않고 설교를 계속하였다. 오히려 성도들을 향해 “여러분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곧 들어옵니다. 우리 두 손을 들고 그들을 환영합시다”라고 했다.
예배를 마치고 일부는 돌아가고 몇몇 교인들은 남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공산 패잔병들로 보이는 1개 분대가 교회당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에 김목사는 “왠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구둣발로 짓밟는 거요?”하고 만류하자 공산군 사병 중 하나가 “어 영감쟁이 무슨 잔소리야”라고 받았고, “어서들 나가시오. 함부로 들어오는 데가 아니요”라고 김목사가 말하자, 공산군은 “반동이군”하면서 김목사의 가슴에 총을 드리댔다. 교인들이 앞을 막으면서 소리치기를 “이 분은 하나님의 사자예요”라고 하자, 공산군 사병 중 하나가 “간나이들 비키지 못해” 하면서 총을 쏘아 교인 한 사람이 쓰러졌다. 그러자 김익두목사는 “죄없는 사람을 해치지 말라.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라 말하자, 병사는 뭐야 하며 총부리를 김목사를 향해  쏘았고 김목사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증언에 의하면 김익두목사는 나무토막처럼 그 자리에 쓰러졌다고 했다. 초대교회 교부(敎父) 터틀리아누스가 말했던가. “교회는(신앙공동체)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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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9회 총회장 김익두(金益斗)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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