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종합기사 검색결과

  • [한교연 논평] 4.10 총선에 부쳐
    4.10일 총선에서 여야가 각자 받아든 성적표에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집권 여당으로선 매우 실망스럽고, 야당으로서는 흡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으나 이것이 곧 패배 또는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언론이 여당이 참패하고 여당이 압승을 거두었다고 앞다투어 대서특필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승리한 것은 투표에 임한 국민이지 그 표를 나눠 가진 정당이 아니다. 국민의 선택에 따른 책임이 그만큼 엄중하고 무겁다는 점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국민 앞에 겸손하게 고개 숙여야 할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여당인 국민의힘은 비례 의석까지 합해 108석을 얻었다. 반면에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175석을 차지했다. 수치로 단순 비교하면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구분된다. 모든 입법과정이 거대 야당의 손에 좌우되고 여당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당장은 야당의 승리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입에 단 것이 몸에 해롭고 입에 쓴 약이 몸을 이롭게 한다는 격언이 있듯이 정치의 풍향계는 수시로 바뀌는 게 진리다. 정부 여당이 오늘의 아픈 결과를 쓴 약을 삼킨 것으로 받아들여 더욱 겸손한 자세로 분골쇄신한다면 쓴 약이 훗날 양약의 효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야당은 달콤한 승리를 만끽하며 자만할 게 아니라 입법의 막중한 책임을 두 어깨에 짊어진 만큼 국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더욱 자세를 낮춰 정진해야 할 것이다. 특히 정부와 여당은 야당과 범야권이 총선 과정에서 부르짖은 ‘검찰 독재’ ‘정권 심판’에 왜 국민이 응답했는지를 자성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일방통행이 되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고 불통은 곧 국민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따라서 야당과의 협치와 대화를 통해 국민의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자세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번 총선 결과를 하나님이 대한민국과 한국교회에 보내는 섬뜩한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만약 총선 출구조사에서 나온 대로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졌더라면 이 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는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의 참화를 딛고 피 흘려 이룩한 자유 민주주의의 토대가 뿌리째 뽑히는 결과가 눈앞에서 벌어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 시점에서 우려되는 것은 지난 21대 국회에서 보여준 거대 야당의 무리한 악법 입법 시도가 또다시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유권자들이 여당보다 야당을 더 많이 지지한 것은 대의민주주의에서 여야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라는 뜻이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동성애 옹호, 차별금지법 등 각종 악법 입법을 남발하라는 뜻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만약 22대 국회에서 지난 21대 국회에서 있었던 불의한 시도가 다시 재연된다면 한국교회는 순교를 각오하고 끝까지 대항할 것임을 엄숙히 밝힌다. 이에 특별히 기독교 신앙을 지닌 국회의원들은 신앙 양심을 저버리고 각 정당의 거수기로 전락하는 과오를 저지르게 되지 않기를 당부한다. 한국교회는 제22대 국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하며, 진정 나라와 국민을 위한 민의의 장이 펼쳐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이다. 2024.4.11. 한국교회연합 대표회장 송태섭 목사
    • 종합기사
    • 종합기사
    2024-04-15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한국형 독립교회’의 새 역사 쓴다
    국제독립교회연합회(설립자 박조준 목사, 총회장 정인찬 목사, 사무총장 임우성 목사/ 이하 국독연)가 점차 한국형 독립교회로 완전히 자리잡는 모습이다. 일반적인 독립교회의 형태에 더해 한국교회만의 고유 장점을 접목하는 것인데, 이제는 세계교회사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어버린 한국교회의 'K-목회'에 한 축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같은 발전적 변화는 국독연이 지난 4월 1일 서울 노량진 CTS아트홀에서 연 제21회 목사안수식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총 25명의 새로운 사명자들이 탄생한 이날 안수식은 그 어느때보다 은혜롭고 경건하게 치러지며 예년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순서자들의 메시지에서는 목회와 선교에 대한 독립교회만의 분명한 정체성을 고지하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간 독립교회는 교권과 정치에 물든 기존 교단의 폐해를 극복하겠다는 취지를 앞세워 한국교회에서 단기간 급속히 성장해 왔다.하지만 이러한 정체성은 오히려 기존 교단들과 마찰을 빚으며,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한국교회는 여전히 독립교회의 성장을 무시한 채 교단 중심의 운영을 지속해 왔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독립교회 스스로 신학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애초 모든 교파의 신학을 존중하고, 개교회의 자율을 보장한다는 취지는 공감하나,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독립교회의 신학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초기 한국의 독립교회는 전 교파를 아우를 수 있는 매우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수준 높은 신학을 연구하고 이를 선보였었다. 그렇다보니 연합회의 역할은 어느새 회원교회의 소속을 증명할 사무적 역할에 한정됐고, 그 안에 신학은 물론 독립교회만의 자율적인 목회 실현도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 한국 독립교회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박조준 목사는 이날 신임 목회자들에 '목회'에 대한 확고한 메시지를 나타냈다. 독립교회의 진정한 가치는 목회와 신학에 있다는 본질적 정체성을 자랑한 것이다. 박 목사는 목회에 대해 '기쁨'을 강조했다. 슬픔 가운데 목회하는 것은 '실패'라며 "목사가 불안하고 평안치 못하면 교회에 평안은 없다"고 단언했다. 이는 독립교회만의 자율적 목회로, 불필요한 간섭이나 정치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목회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독립교회의 최대 장점과 연결된다. 결정적으로 "우리 연합회는 큰 단체가 아니다. 허나 재산,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복음에 입각해 교회를 운영해 나가려는 뜻이 있다"고 말하며, 이를 '조용한 개혁운동'이라고 표현했다. 지난 1997년 한국에 독립교회를 처음으로 세운 박조준 목사는 독립교회의 정체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목회자로, 그가 말한 '조용한 개혁운동'은 애초 독립교회의 설립 취지와 정확히 부합하고 있다. 교단 일색의 교회 문화에 대한 점진적 변화와 보완을 통해 선교 목회적 기능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독립교회의 정체성을 언급하며, 본래의 설립 취지를 잃고 사무행정적 기능에 몰두하는 근래의 독립교회 흐름을 경고한 셈이다. 국독연은 그간 독립교회의 본래 취지를 지키면서도 기존의 교회 시스템을 개혁할 수 있는 여러 연구와 시도를 거듭해 왔다. 교권과 정치라는 기존 교단의 폐단은 몰아내되, 독립교회의 단점으로 꼽히는 회원들 간의 '소속 유대감'을 증진시킬 다양한 바탕을 마련했다. 여기에 자체 신학교 설립, 목회자 재교육 등을 통해 독립교회만의 개성있는 신학을 창출하고 이를 기존 교파 신학과 접목할 수 있는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단순히 회원을 받는데 그치지 않고, 정기적인 목회자 재교육과 신학 교육을 통해 목회 지원과 자연스런 유대를 구축했다. 국독연이 지난 튀르키에 지진 당시 회원교회들로부터 자발적인 성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노력들이 바탕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국독연의 노력은 서구에서 넘어온 독립교회를 한층 발전시킨 '한국형 독립교회'로 자리잡고 있다. 회원들은 목회와 선교에 확고한 지원을 받으면서도, 독립교회의 충분한 자율을 보장받는다. 독립교회 그 이상의 독립교회, 그것이 바로 '한국형 독립교회'를 구축한 국독연이 나아가고 있는 길이다. 또한 서구 미국과 유럽교회의 하락세가 뚜렷한 상황에, 이러한 '한국형 독립교회'가 오히려 세계교회 재부흥의 대안이 될 수 있을지 기대되는 부분이다. 한편, 이번 안수식의 예배는 직전 총회장 임재환 목사(CTS목자교회)의 인도로 서기 김영수 목사(큰사랑교회)의 기도와 한은택 목사(인천영락교회, 웨이크사이버신학원 교수)의 성경봉독(요 10:14-16)에 이어 총회장 정인찬 목사가 ‘선한 목자가 되라!’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안수자 대표로 인사를 전한 홍석준 목사는 "박조준 목사님과 정인찬 목사님, 임우성 목사님 등 모든 과정을 함께해주신 국독연에 정말 감사 드린다"며 "오늘의 초심을 잃지않고 끝까지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이 외에도 국독연은 이날 목회부분 대상에 김시철 목사(벧엘중앙교회)를 선정했다.
    • 종합기사
    • 종합기사
    2024-04-02
  • 하야방송, 함북노회 재판국의 삼일교회 사건 판결 강력 비판
    교계 인터넷 언론 하야방송이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삼일교회(임시당회장 남서호 목사) 사태를 다시 한 번 다뤘다. 삼일교회 교인들이 원로목사와 직전 임시당회장을 고발한 것에 대한 노회 재판국의 판결문을 분석한 것인데, 하야방송은 판결에 심각한 하자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야방송은 지난 3월 26일 정문일침을 통해 예장합동측 함북노회 재판국의 삼일교회 사건 판결 내용을 공개했다. 지난 시간과 마찬가지로 교회연합신문 차진태 국장이 패널로 함께했다.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rht435ao63Q> 앞서 삼일교회 교인들은 직전 임시당회장이 불법으로 당회장의 권한을 원로목사에게 위임했고, 원로목사가 이를 이용해 불법으로 당회, 제직회 등의 회의를 주재했다며, 이를 노회에 고발했다. 이에 대해 노회 재판국은 각 고소내용에 대한 판결을 내렸는데, 피고발인에 대한 유무죄 여부보다는 해당 사건으로 인한 영향 여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론적으로 노회 재판국은 원로목사는 회의 소집의 권한이 없기에 당연히 결의의 효력이 있을 수 없고, 결정적으로 해당 모임은 정식 회의가 아니라 의견수렴의 과정일 뿐 이라는 피고발인들의 입장을 대부분 인용했다. 하지만 하야방송은 노회재판국이 애초 교인들의 고발 취지를 완전히 무시한 판결이라며, 과정이나 동기는 무시한 채 지극히 결과만 부각시킨 꼴이라는 분석을 전했다. 하야방송은 "교인들은 불법적인 행위를 한 것을 지적했는데, 노회 재판국은 행위에 대한 효력이 없으니 문제가 없다는 식의 결론을 내렸다"며 "허나 법은 결과 뿐 아니라 과정도 본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졌는데, 맞지 않거나 다치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인가? 일단 던진 것 자체가 문제다"고 지적했다. 이어 "당회원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한 것이 당회가 아니고, 제직회원들을 모아놓고 회의한 것을 제직회가 아니라식은 곤란하다"며 "이는 처벌을 최대한 배제한 채 원로목사와 임시당회장을 고발한 교인들을 달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정적으로 노회 역시 이번 삼일교회 사건과 무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삼일교회가 지난해 6월 8일(주일) 원로목사의 집례로 명예장로 임직식을 했는데, 여기에 노회장을 포함한 주요 임원들이 대거 참석해 순서까지 맡았던 것이다. 합동측은 명예장로 제도가 없으며, 주일에 행사를 열 수 없다. 결정적으로 원로목사는 집례 권한이 당연히 없다. 여러 불법적인 요소가 다분한 행사에 노회 임원들이 대거 참석해 순서까지 맡았던 것이다. 이에 하야방송은 "노회 역시 삼일교회 사태가 확산되거나 주목받는 것을 원치 않기에 이런 식을 판결을 낸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했다. 마지막으로 하야방송은 노회 재판국이 해당 판결문을 외부로 유출할 시 처벌하겠다고 경고한 것과 관련해 "심각한 월권"이라며, 강력히 비판했다.
    • 종합기사
    • 종합기사
    2024-03-26

칼럼 검색결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다수의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주님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행12:11).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애굽의 고센 땅에 이주해 왔을 때는 고작 70명이었습니다(창46:27). 그런데 그들이 400년이 지난 후에는 150에서 200여만 명이 되었습니다. 바로는 급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여자들이 태어나면 살리고 남아가 태어나면 죽이도록 산파에게 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던 산파는 바로의 명령대로 하지 않고 남아가 태어나도 살렸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추궁하면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달라서,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미처 아이를 낳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들을 나일강 하수에 던지고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살리라고 말했습니다(출1:15-22). 이처럼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급성장하자, 이스라엘 남자를 전멸시키려고 하였지만, 그럴수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욱 증가하였으며 최후에는 그의 집에 애굽을 황폐시키고 그의 군대를 수장시킬 모세가 자라게 됩니다. 그의 딸이 이스라엘을 구원시킬, 애굽을 전멸시킬 모세를 입양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대 밖의 일을 하십니다(고전2:9). 일본은 1941년 7월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이 일본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은 1941년 12월 7일(일본시간 12월 8일)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과 필리핀 · 말레이 반도를 동시에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미 태평양함대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제한된 시간 내에 동남아시아 일대를 쉽게 장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어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와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이 독립하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상 밖의 방법으로 일본의 기대에서 벗어나 우리를 독립시켜 주셨습니다. 한 번은 헤롯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그 일을 기뻐하였습니다. 이에 고무된 헤롯은 베드로까지 죽이기 위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4인 1조로 4개 조가 그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후에 베드로를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에게 채인 쇠사슬을 풀어줍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환상을 보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 실제인 줄 알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행12:11).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예수님이었기에 사도인 베드로 또한 자신이 무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감옥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12:5). 그것은 바로 간절한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주께서 그 천사를 보내셔서 손에 채인 쇠사슬이 풀렸고, 4인 4개조에 의하여 겹겹이 쌓인 파수꾼과 첫째와 둘째 옥문을 지나고 성으로 통한 철문까지 제지 없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총선입니다. 참으로 국가적인 행사입니다. 오직 이 나라가 헌법 전문에 나오는 것처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고, 신앙인들이 경건하고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딤전2:2). 비록 다수의 기대에서 벗어난다 할지라도, 전혀 불가능하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간절한 기도가 있다면 그 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4-1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참된 헌신’(벧전 4:11)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것입니다. 헌신은 자기의 생각이 아무리 옳고 자기의 방법이 편리하다 할지라도 인간적인 생각과 의지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하나님 방법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으로 한다면 반드시 부작용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일하다 보면 늘 경우가 나오고 불평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나고 갈등을 빚기에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못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헌신은 문제가 생기고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열심과 생각과 힘으로 주님의 일을 하면 자기 의와 공로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을 때 가인이 분노한 것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기에 자기 의가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부작용이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과 은혜로 해야 합니다. 벧전 4:11절에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자기를 위하여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기가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일을 하러 오신 예수님을 방해하는 일을 하였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모압 땅에서 온갖 풍파를 겪었고, 앞으로 당할 고통을 감수하면서 유대 베들레헴으로 향하고 있는 룻과 나오미에게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하는 헌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힘을 공급해주신 것입니다. 룻이 자기 민족을 버리고 남편의 민족에게로 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의 마음이 지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조건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자신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룻에게는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일이 그녀의 최대의 목표이었기에 그녀의 전진은 중단이 없었으며 도중에 머뭇거리거나 곁길로 나가지도 않았고 가야 할 목적지도 잊은 적이 결코 없는 헌신된 발걸음이었습니다. 또한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헌신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해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오직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전폭적으로 거룩한 헌신을 한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타산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헌신을 다짐하시고 온전히 실천하십시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4-0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탄의 유혹 ‘마침’’
    지난 시간에는 여호와 이레 ‘마침’에 대하여 글을 썼습니다. ‘마침’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타이밍이기도 하지만, 항상 좋은 편에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듯(고후11:14), 신앙인들이 혹할 수 있도록 적절한 때 행동을 부추기는 추임새로 ‘마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거짓말쟁입니다(요8:44).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지만(창3:17), 죽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창3:4-5). 아담 이후로 사람들의 두뇌가 점점 발달 된 것처럼, 사탄도 사기술이 점점 고도화되었습니다. 아담 때의 뱀이 지금은 용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아무런 가책 없이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사탄의 사자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욘1:2).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이 싫었습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니느웨는 그대로 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쪽 끝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을 가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마침 다시스행 배가 왔습니다(욘1:3). 그 당시 배는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외국행 배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스행 배가 떡 앞에 나타나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배를 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이해해 주신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였습니다. ‘마침’ 다시스로 향하는 배가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이 아니라, 마귀의 유혹이었습니다. 그 배와 선원과 승객들이 마귀라는 것이 아니라,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하여 다시스로 가려할 때 나타난 적절한 타이밍이 마귀 유혹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넘어가서 그는 배를 탔고 배는 얼마쯤 가다가 대풍랑을 만났습니다(욘1:4). 이처럼 ‘마침’이라고 해서 항상 하나님의 이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죄수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이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배가 더 가면 생명까지 위태하다고 권하였습니다(행27:9-10). 하지만 선장과 선원들은 그곳에서 겨울을 나기가 불편하니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자신들은 득의한 줄 알고 갔습니다(행27:13). 그러다가 얼마 못 가서 유라굴로 광풍이 덮쳤고(행27:14), 배에 탄 사람 모두는 죽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마침’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것도 있지만, 마귀도 그것을 활용해 적절하게 속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못 가 본색을 드러내고 맙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결코 복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탄의 속임수 마침’과 ‘여호와이레 마침’을 어떻게 분별합니까?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첫째는 말씀에 맞아야 합니다. 아무리 순풍이 불어와도 우리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마침’이 아닌 사탄의 속임수 ‘마침’입니다. 요나는 분명히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욘1:2)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따르지 않고 다시스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시스로 가려고 했던 것 자체가 잘 못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을 맡았던 백부장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도 바울이 미항이라는 곳에서 떠나지 말라고 하면 그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선장과 선원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전문가의 말입니다. 전문가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었던 것입니다. 일례로 신앙인들 가운데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지겹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마침’ 비가 온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오늘은 집에서 쉬라고 하시는 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매 주일 첫 날에 떡 떼고 말씀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행20:7). 떡을 뗀다는 것은 성찬식의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말씀의 떡을 나누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주일에 말씀을 먹지 않고서는 한 주를 살아가기 힘듭니다. ‘마침’이라고 모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말씀에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3-2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거시적 안목을 가집시다’(창 13:14-15)
    세상을 너무 근시안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고, 당장의 이익에만 집착을 합니다. 그러나 멀리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와 같은 지혜를 갖지 않고는 인생을 올바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집(믿음의 집)을 지을 때 아주 견고하게 지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눈앞의 이익에만 연연했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실수는 멀리 보지 못하는 인생의 비극을 교훈합니다. 당장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 팥죽 한 그릇에만 집착했던 에서는 장자의 축복권이라는 뒤에 것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창 13장에 보면 애굽에서 올라온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가축이 너무 많아 목자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자 아브라함은 다투지 말고 서로 갈라서자고 하며 조건 없이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먼저 주었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넓은 들판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마치 에덴동산과 같고 애굽 땅과 같이 아주 비옥하고 기름진 곳으로 보였기에 그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의 환경은 생각지 않고 어디를 가든지 신앙생활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눈앞의 이익이나 모든 기득권을 조카에게 양보하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자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 것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14-15절). 사람이 눈앞에 이익을 위해 욕심의 노예가 되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 더러운 탐욕과 정욕과 이기심과 명예욕과 정욕으로 가득 차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신령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겠으며, 신령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의 귀가 열릴 수 있겠습니까? 롯은 당장 눈앞의 이익을 선택했지만 멀리 보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땅을 택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롯은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 그 후 그곳은 죄악 때문에 유황불의 심판을 당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당하고 난 후에 롯의 두 딸들은 아버지에게 술을 잔뜩 취하게 한 뒤 번갈아 자면서 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과 대적하는 민족으로 살았습니다. 가족의 족보를 그와 같은 방법으로 이어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멀리 보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근시안적인 생각으로 할 일들은 후대까지 악영향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화려한 것에 속지 말고, 지금 당장은 서운하고 안타까워도 먼 장래를 위해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먼 곳을 바라보는 지혜를 갖아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믿음의 눈을 들어 지경을 넓히며, 넓게 멀리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3-1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