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하나님 앞에서 신앙만은 타협없이 산 사람



 
1959년 9월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였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소위 합동(合同)과 통합(統合)이란 아리송한 이름으로 두 개의 교단으로 분열하고 말았다. 갈라져 나간 에큐메니칼 지지파 쪽에서는 이창규(李昌珪 1886-1982)목사가, 보수를(N.A.E측) 지향하는 합동측  총회장에는 양화석(1902-1987)목사가 총회장이 되었다.

경북 예천에서 출생
양화석목사는 1902년 11월 18일(화)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리에서 부친 양재근장로와  모친 최옥금집사 사이에서 4남3여 중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어머니 등에 엎여 교회를 나갔고, 7살 때부터 주일학교에 나가 기독교분위기 속에 자랐는데, 그것은 할아버지께서 1907년부터 복음을 받아들였고 고향에 상락교회를 설립하였기 때문이였다.
14세 때에 이르러는 안동읍교회(安東邑敎會)에 선교사가 세운 계명(啓明)학원에 입학하게 되면서부터 그의 마음 속에는 늘 훌륭한 목회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후 1920년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하였으나 갑자기 그의 부친이 돌아가시게 되어 장남으로서 가정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대구에 있는 계성(啓聖)학교로 전학하여 공부하다가 1921년 졸업하였다. 이후 사범학교로 진학하여 국민학교 교사로 후진을 양성하던 중 1922년 3월 임성례사모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으며, 교사로 봉직하던 중 어릴 때부터 가슴에 품고 서원하였던 소명에 부름받아 교사직을 그만두고 목사가 되기 위하여 26세의 청년의 몸으로 1926년 4월 마침내 꿈꾸어 왔던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함으로써 길고도 먼 목회자의 길에 들어 선 것이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목회자로 일생
일제의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잠시 신학교 학업을 휴학하고 1930년부터 경북 문경지방에 내려와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점촌, 농암, 과목 등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고, 평양으로 돌아가 공부를 계속한 결과 1933년 3월 드디어 신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사역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후 낙성교회를 시무하던 중 1933년 6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34년 1월 경북 예천읍교회에 부임하여 50평의 새예배당을 건축하였고, 1938년 12월까지 시무한 후 1939년 1월 경주제일교회에 부임하여 1949년 5월 27일 대전으로 임지를 옮기기 전까지 만 10년간 시무하였다.

신산참배 반대로 투옥 해방으로 출옥
이때 일제말엽 총독부에서는 한국교회를 향하여 신사참배를 집요하게 강제요구하게 되자 이를 반대한 양화석목사는 1945년 7월 29일  주일에 체포되어 투옥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신앙지조를 지키려는 그의 열정과 순수함을 보여주는 인생 여정이었다. 환난 중에도 도우신다는 성경말씀대로 사형집행 며칠을 앞두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여 구사일생으로 출옥, 자유의 몸이 되는 감격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양목사의 일사각오적인 신념의 목회는 큰 힘을 얻게 되었는지 대전중앙교회의 목회는 10년동안 500여명이 모이는 당시로서는 대교회로 발돋움하게 되어 부흥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양화석목사가 대전으로 목회지를 옮기게 된것은 대구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안의와(安義窩, James Adams)목사를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안선교사는 대전이 앞으로는 한국선교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확신있게 말하면서 권고하였다.
양화석목사의 탁월한 목회 리더쉽은 그의 인자한 인품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인품이 가장 강점이요 동시에 자신의 목회철학을 교회에 무리없이 뿌리내리게 하였다는 것이 교인들의 평이다. 그래서 교회는 큰 용기를 얻었고 그의 지도에 따라 열심히 말씀을 배웠고 기도하면서 서서히 그 틀을 다져가기 시작하였다. 부임 후 1년만에 교회를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게 되었고 부흥의 발판을 놓게 되었다.
그가 대전중앙교회에 부임한 후 전도기관이 없음을 보고 경주제일교회의 목회 경험을 바탕으로 교회의 균형적인 발전의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남·여전도회를 조직, 신자들의 전도활성화를 도모하였다.
양목사 부임 후 1년만에 민족의 비극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사변이 발생한지 이틀만에 6월 27일 정부가 대전으로 옮겨왔고 피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교통의 요충지였던 대전은 각지로부터 몰려드는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7월초에 이르러서는 북한 괴로군들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두고 천안을 지나 마침내 대전으로 계속해 남하하였다. 포성은 점점 가까이에서 들리고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것은 온갖 비인간적인 만행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을 박해한다는 잔인한 소식들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교회도 잠시 피난하기로 단안을 내렸다.

6·25 피난 와중에도 교회는 건재
1950년 7월 14일(금)이었다. 부득이 모든 성도들은 양목사와 손에 손을 잡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눈물로 작별하게 되었다. 양목사 가족은 부안까지 내려가 피난생활을 하게 되고 성도들도 뿔뿔이 헤어져 피난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후 UN군의 참전으로 대전은 1950년 10월 28일에 탈환되었으나 아직 전시 중이라 여러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1951년 초에 이르러야 비로써 수복된 대전에 흩어졌던 성도들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몰려들기 시작하였는데 피난 떠난지 6개월만이었다. 6·25전쟁으로 대전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교회건물은 폭격이나 화재를 면한채 건재하였다. 피난 갔다 돌아 온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라고 찬양하였다. 그것은 UN군이 폭격을 하면서도 십자가가 있는 교회당 건물을 피하였기 때문이었다.
수복 후 처음 한성술장로 가정에서 1951년 3월 4일 첫 당회를 개최하여 모두 눈물의 기도로 감사 감격하였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피난 나온 북한의 교인들을 아무조건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여  교회가 안정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이에 발맞추어 지금까지 <대전제2교회>로 불리어 왔던 교회 이름을 <대전중앙교회>란 새이름으로 개칭하였다.
양화석목사의 헌신적인 목양으로 교회가 날로 부흥하여 성전 신축문제가 대두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점점 안정되어 가자 전도와 선교, 나아가 구제사업을 위해서라도 교회의 기구 정비가 필수적이었다. 1951년 12월 30일 당회는 교회전체 구역을 15개로 편성해 구역장을 임명하였고, 성가대가 편성되었고, 면려회로 청년과 학생면려회로 나뉘어 설립하였다.
이어서 1953년 9월에는 중앙유치원을 개설 종교교육의 활성화를 시도하였고, 전쟁으로 인해 풍지박산이 된 사회 정치적인 혼란에 이어 한국교회에도 50년 고려파 분열, 51년 기장파 분열에 이어 WCC 에큐메니칼 문제와 복음주의 NAE가 서로 대립되어 전쟁이 채 가셔지고 정돈이 되기도 전에, 대전중앙교회에 모인 1959년 9월 제44회 총회가 뜻하지 않게 분열이란 수순을 밟게 되는 틈바구니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었던지 우리는 몰랐으나 본교회를 시무하고 있던 양목사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44대 총회장으로 승동교회에 개최된 본교단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합동·통합 분열 후 최초 총회장
그가 이끈 44회기 총회에 남긴 업적을 든다면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를 WCC로부터 영구히 탈퇴하기로 한 것과 동시에 교단분열의 불씨로 작용하였던 NAE로부터 탈퇴할 것을 결의하였다. 아울러 연동교회에서 속회하여 조직된 이창규목사 측의 예장통합측과의 결별을 선언하였다.
오늘날까지 양교단의 교세가 비등하게 성장해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필자의 심정은 애초부터 분열로 치달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다.
양화석목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사가(史家)들의 생각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도상에 나타났던 구레네 시몬의 역할을 졸지에 감당하게 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양목사 자신은 총회장 하겠다고 나선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시무했던 대전중앙교회 50년사(1997년 12. 15발행 pp.193~4)에 의하면 한 교회의 목회자로 한평생을 성공적으로 살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시대는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양화석목사! 그는 큰 나무로 비유된다. 그는 결코 잡목이 아니라 하나의 거목(巨木)이었다. 그는 숲을 만드는 사람이었고, 누구와도 화합하여 포용할 수 있는 특유의 친화력과 덕이 있었다. 한 평생 오로지 하나님과 교회만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그것이 그의 전부였다. 자신의 마지막 피와 살이 다 마를 때까지 그리하여 마치 한 자루의 초가 자신을 태우면서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일생을 마쳤다.
본 교단지(기독신문 1984. 4.21~6.8.)에 피력한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나는 총회장으로 있을 당시나, 그 이전 수십년간 총회 전도부장 등의 임원으로 있을 때나, 그 이후 총회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하나님을 바로 믿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바른신앙을 굳게 지키며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사는 길을 걸으려고 신앙에 만은 타협없이 살았다. 지금까지도 나는 시대는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살고 후배들에게도 이 이야기만을 해주고 싶다”라고 한 것을 보면 아침 동녘에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만큼이나 저녁 노을에 물들면서 서산에 넘어가는 석양 또한 아름다움처럼 살아간 삶이 양화석목사의 참 모습으로 오늘까지 남아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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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44회 총회장 양화석(梁華錫)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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