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Home >  칼럼 >  이효상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이효상 칼럼 기사
-
-
[이효상 칼럼] '부활절연합예배, 이대로 좋은가?'
- 부활절에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린다. 지역이건 교단이든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드려진다. 한국교회 최초의 부활절연합예배는 1947년 4월 6일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 터에서 드려졌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전신인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주한미군과 함께 개최했으며, 설교자는 한경직 목사였다. 이후 장로교의 분열로 1962년부터 부활절 연합예배는 진보과 보수측이 각각 따로 예배를 드렸다. 1973년 보수측이 진보측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관하는 부활절연합예배에 함께 하기로 하면서 부활절연합예배준비위원회가 구성됐고 양측은 10여년만에 다시 모여 연합예배를 드리게 됐다. 그러다 1990년대에는 부활절연합예배위원회가 상시조직으로 전환됐고, 하지만 부활절연합예배의 주최권을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면서 부활절연합예배위원회가 해체됐다. 2006년부터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매년 공동으로 번갈아 주관하며,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행사로 자리매김 하는듯 했지만 결국 파행을 맞았다. 2018년 부활절 연합예배는 세 곳을 주목하게 되었다. 먼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31일 토요일 밤 11시에 ‘평화가 있기를’을 주제로 순례 형식의 예배로 드렸다. 부활절 연합예배를 시작한 곳에서 드린다는 일종의 역사적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지역적으로는 부산지역 ‘연합’예배는 '부활 생명, 이 땅을 새롭게'라는 주제로 부산시민공원에서 5만여명이 참석해 부활 신앙이 한국교회에 임하길 기도했다. ‘지역연합’이라는 ‘연합운동’의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사례이다. 또 한국교회총연합은 ‘나는 부활을 믿습니다’를 주제로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드려졌다. 박삼열목사의 “생명의 부활이 불꽃처럼 일어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로 백석대 장종현 총장의 설교로 이어졌다. 장 총장은 설교 서두에서 “엠마오로 가던 무기력한 두 제자의 모습이 한국교회의 모습”이라고 지적하며 시작했다. “선교 130여년이 지난 지금 거룩한 신앙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복음의 본질을 상실했다”고 진단하며, “세속화된 한국교회에 오직 생명의 말씀이 충만하도록 주님께 부르짖어야 한다”고 외쳤다. 또 “한국교회는 십자자가와 부활신앙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체험하는 영적지도자를 길러내야 한다”며, “고상한 종교생활에서 가슴신앙, 마음신앙, 무릎신앙이 될 때 올바로 설 수 있다‘고 일갈 했다. 참석자들의 ’아멘‘이 터져 나왔다. ‘아멘’으로 화담하는 이들에게 “통일한국과 선교한국의 사명을 잘 감당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하며 설교를 맺었다. 역시 장 총장은 한국교회의 열정있는 지도자이자 어른이었다. 순서에 2018년 부활절 선언은 종교개혁 501주년과 선교 133년을 맞이한 한국교회의 선언이라고 발표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134년이다. 장로교 입장에서 보면 133년이 맞지만 한국교회입장에서 보면 134년이 맞다. 발표된 선언문에서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제자로써 개혁자들의 전통과 순교신앙정신으로 거룩한 교회, 개혁하는 교회를 이루어 가다’고 선언한 점은 개혁정신이 쇠퇴해지고 공교회성을 상실하는 지금의 교회 현실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부활절 연합예배, 이대로 좋은가 하는 자성은 항상 있어왔다. 그것은 한국교회 보수와 진보가 함께하는 유일한 연합행사였다가 한기총, 한교연 내홍으로 온전한 ‘연합’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부활절예배는 많이 드려도 좋다. 그러나 ‘연합’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에는 신중해야 한다.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분열을 가져오지는 않는지 말이다. 과거 부활절 준비를 위한 조직의 상설화가 가져왔던 폐단을 바로잡고 공공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부활절의 정신과 신앙을 다시 구현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늘 부활절 연합예배는 결산이 제대로 안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금년 한교총의 경우 전액을 미혼모시설에 기증하기로 한 투명하게 마무리 한 것은 잘한 일로 볼 수 있다. 2014년에는 같은 장소에서 보수와 진보가 함께 드린 부활절 연합예배에는 1만석에 8천여명이 참석했지만 금년 연합예배에는 ‘연합’정신이 절실한 때에 드려져 기대가 많은 탓인지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세밀하게 준비한 주최측 추산 1만 5천명이라고 하니 최소한 1만 2천여명은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주최측이 준비한 여의도 순복음교회와 예장대신(구, 백석)이 양대 축을 이루었지만, 구심점이 사라진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보면 나머지는 관망하던 교회가 한 축을 이루며 참석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연합운동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회복하려는 몸부림에 화답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연합’이라는 이름에 그래도 교회버스로 참석한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서 ‘연합’의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연합’이 필요함은 분열되고 개 교회위주로 돌아가고 있는 한국교회 현실에서 주님이 당부하신 ‘하나됨’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
- 칼럼
- 이효상 칼럼
-
[이효상 칼럼] '부활절연합예배, 이대로 좋은가?'
-
-
[이효상 칼럼] '2018년, 고난주간 어떻게 보내시렵니까?'
- 존경하고 사랑하는 동역자님. 마음은 봄을 향해 달려가는데 날씨는 느릿느릿 거북이 걸음이네요. 봄을 시샘이라도 하듯 꽃샘추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순절 절기 중 고난주간이 다가옵니다. 사순절(四旬節)에서 종려주일을 지나 고난주간까지는 주님이 가신 고난의 자취를 쫓아가면서 회개로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며 갱신하는 기간입니다. 초대교회는 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에 동참하는 중생의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로 부활절에 새로운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부활의 의미를 기리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에 2세기 초기부터 자연스럽게 부활절을 준비하며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동참하는 준비 기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기간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사순절 기간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금식(禁食)과 금육(禁肉)을 통해 절제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2018년 사순절, 고난주간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먼저 예수님처럼 철저히 십자가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며 그분이 걸어가신 그 길과 삶을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회개와 기도, 화해와 용서, 금식으로 이어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비움과 결단의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봄이 오고 부활절이 다가오고 남북이 화해분위기로 나가며 분단된 이 땅에 전쟁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화해와 평화의 부활 아침이 밝아 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아직도 분열과 갈등이라는 차가운 장벽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성경’, ‘하나의 찬송’이라는 긍지를 지닌 한국교회가 사분오열의 분열과 고난속에서 다시 정신차리고 연합과 일치를 이룸으로 사명의 끈을 동여매야 할 시점입니다. 물론 분열과 갈등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큰 명분이 아니라 사소한 명예와 이익, 자리 욕심입니다. 이런 일로 분열을 종식시키지 못한다면, 제동 풀려 질주하는 기관차처럼 자멸의 길로 곤두박질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지 못한다면, 자유와 풍요, 화려한 겉모습에 매몰된 채 영혼의 고갈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고난주간이 행사가 되고 부활절이 하나의 이벤트가 되지 않도록 영성의 깊이를 더해야 하겠습니다. 동역자님. 올해 고난주간이 인생의 마지막 고난이 되고 영혼이 찬란한 부활의 아침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자세로 마음을 찢고 통회함으로 부활의 영광이 임하는 새벽이 되도록 준비합시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시던 예수님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이 되고 피땀흘려 기도하시던 그 옆자리가 우리의 자리가 되며, 십자가 지고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크리스천과 교회가 나올 때 그래도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가끔 교회가 성장제일주의에 빠지고 자본주의에 심취하면서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귀족교회로 변질되고 있지 않는지 깊이 우려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한국교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미래학자들이 주는 경고를 귀담아 듣게 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교회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으면 합니다. 2018년 고난주간에는 세상이 비판하는 교회의 아픈 치부와 부패의 고리를 근절하고 건강한 미래교회로 나가기 위해 교회와 성도들은 이 시대에 고난당하는 이들과 고난의 현장에 함께했으면 합니다. 교회안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당한 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 거리로 말입니다. 또한 특별히 열강들의 각축장이요, 지구상의 화약고와 같은 이 땅의 핵을 녹일 수 있는 것도 강력한 무기가 아니라 무너진 교회와 민족의 아픔, 그 고난을 짊어지고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는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부활의 4월에는 한반도를 에워싸는 열강의 힘겨루기가 끝나고 비핵화와 종전선언이 나왔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교회는 어둠과 시대의 고난을 몰아낼 등불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복음통일은 우리민족의 희망의 등불이자 이 민족의 부활입니다. 동역자님. 마음만은 포근한 봄날 되시기를 바라며 주님과 동행하며 깊이 대화하고 묵상하는 고난주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
- 칼럼
- 이효상 칼럼
-
[이효상 칼럼] '2018년, 고난주간 어떻게 보내시렵니까?'
-
-
[이효상 칼럼] '한국교회가 풀어야 산다'
- 얼마 전 한목협에서 2017년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목회자 의식조사’를 통해 전국의 담임목회자 50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다. 그중 한국교회가 개혁해야할 부분으로 ‘신앙의 실천부족(26.6%)’과 ‘지나친 양적성장(23.6%)’, ‘목회자의 자질부족(19.1%)’, ‘개교회주의(11.3%)’, 교회양극화현상(5.7%)’을 들고 있다. 이 다섯가지는 목회자 스스로 진단한 것이기에 그 의미가 더 크다. 특히 주목하게 되는 부분이 ‘지나친 양적성장’과 ‘개교회주의’, ‘교회양극화현상’은 같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가 급성장해야 하고, 우리(?) 교회만 성장해야 하고 주변교회나 지역을 돌아볼 여유가 없을 정도의 의식이라면 함께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까? 교회의 급성장주의는 그만큼 교회가 성장한만큼 후유증도 동반하고 있다. 1970년대 산업화와 80년대 피터 와그너의 교회성장은 경영전략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만 바라보고 있고, 중형 교회, 중견 목회자들이 수수방관 할 것이 아니라 역할감당으로 적극 나서야 한다. 어찌보면 저수지는 물을 가두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흘려보내지 않으면 그 많은 물은 재앙이 될 날이 온다. 한쪽에서는 가뭄으로 고통당하는데 둑이 무너질 정도로 물을 가두어 두고 흘려보내지 않는 저수지가 있다면 모두를 불행하게 할 것이다. 어느 정도 성장하고 웬만큼 자립한 교회 정도라면 그동안 쌓아둔 것을 흘려보내서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건강한 교회와 더불어 사는 한국교회를 만들어 낼 것이다. 요즘은 한경직 목사님같은 분열의 상처를 감싸고 치유하며 소외된 자를 품는 통합형 지도자가 그립다. 한국교회 전체를 읽고 사회와 소통시키며 미래로 이끌 다음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역사와 미래, 세상과 사람을 품고 양극화를 치유하며 한국교회 미래를 열어보려는 노력도 보이질 않는다. 한국교회 양극화, 정말 심각하다. 대형교회와 작은 미자립교회 갈등과 격차, ‘이건 아니다’싶을 정도로 심각하다. 신음소리가 커져만 간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현안은 80%에 달하는 농․어촌교회와 작은 미자립 교회들이다. 대형교회는 점점 몸짓이 커져가고 농․어촌교회나 작은 미자립교회는 점점 힘을 잃고 사라져 가고 있다. 어렵게 공부시킨 청년들은 대학가고 취직하면서 다들 도시로 나갔다. 도시교회는 넘치고 시골 농어촌교회는 노인들뿐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자녀 공부시키는 것도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고 도시교회가 자녀 장학금이라도 한번 보내지 않는다. 농어촌 미자립교회나 목회자의 인내와 눈물이 한계점이 달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가 그들에게 도움도 희망도 되어주지 못한다면, 그들을 품고 위로도 격려하지 못하고 방치하면서 어떻게 지도자라고 어찌 한국교회의 미래와 희망을 논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 양극화, 풀어야 할 숙제이다. 양극화가 심한 곳이 교회이다. 한국교회 양극화, 풀어야 산다. 강한 자만 살아남고 살아남은 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함께 상생하는 교회가 그래도 생명력이 있다. 양극화를 극복하려면 농어촌 미자립교회를 찾아가고 부축하고, 건강한 교회로 세워가는 일에서부터 자립의 길을 찾아야 한다. 보아스가 룻을 위해 일부러라도 이삭을 떨어뜨렸듯이 이 시대에 농어촌과 작은 미자립교회, 특별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배려의 손길이 필요하다. 양극화 극복하고 함께 상생하며 미래로 나가려는 대안 있는가? 한국교회, 미래로 가기위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양극화의 대안이 있다면 ‘성장제일주의’가 아니라 '건강한 교회‘세우기운동이다. ‘건강한 교회‘가 해답이다. ‘건강한 교회’= ‘거룩한 교회’가 해답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건강한 교회’ 운동을 통해 세상 속에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하며 세상속으로 들어가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의 영광을 다시 드러내야 한다. 도농교회가 자매결연을 맺고 농수산물을 수매하여 판매하는 등 농어촌를 지원하여 함께 상생하는 프로젝트를 전개하는 것도 좋은 방편이 될 것이다. 사실 물량적 지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함께하는 동료이자 동역자라는 메시지와 따뜻한 손길을 펼치고, 마음을 전하는 일이다. 이렇게 전개해온 것이 설과 추석에 ‘고향교회 방문하는 캠페인’이었다. 이렇게 귀하고 복된 나눔과 배려의 손길을 펼 때 손 마른 병이 고치지고 ‘건강한 한국교회’의 희망을 볼 수 있다. 그러면 교회와 동역자님은 한국교회 양극화를 극복하고 상생하려는 어떤 대안이 있는가? 의지나 그런 관심과 청사진을 가지고 있는가? 전략과 이를 실천할 마음이 있기는 한 것인가? 묻고 싶다.
-
- 칼럼
- 이효상 칼럼
-
[이효상 칼럼] '한국교회가 풀어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