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다섯가지는 목회자 스스로 진단한 것이기에 그 의미가 더 크다. 특히 주목하게 되는 부분이 ‘지나친 양적성장’과 ‘개교회주의’, ‘교회양극화현상’은 같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가 급성장해야 하고, 우리(?) 교회만 성장해야 하고 주변교회나 지역을 돌아볼 여유가 없을 정도의 의식이라면 함께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까?
교회의 급성장주의는 그만큼 교회가 성장한만큼 후유증도 동반하고 있다. 1970년대 산업화와 80년대 피터 와그너의 교회성장은 경영전략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만 바라보고 있고, 중형 교회, 중견 목회자들이 수수방관 할 것이 아니라 역할감당으로 적극 나서야 한다. 어찌보면 저수지는 물을 가두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흘려보내지 않으면 그 많은 물은 재앙이 될 날이 온다. 한쪽에서는 가뭄으로 고통당하는데 둑이 무너질 정도로 물을 가두어 두고 흘려보내지 않는 저수지가 있다면 모두를 불행하게 할 것이다. 어느 정도 성장하고 웬만큼 자립한 교회 정도라면 그동안 쌓아둔 것을 흘려보내서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건강한 교회와 더불어 사는 한국교회를 만들어 낼 것이다.
요즘은 한경직 목사님같은 분열의 상처를 감싸고 치유하며 소외된 자를 품는 통합형 지도자가 그립다. 한국교회 전체를 읽고 사회와 소통시키며 미래로 이끌 다음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역사와 미래, 세상과 사람을 품고 양극화를 치유하며 한국교회 미래를 열어보려는 노력도 보이질 않는다.
한국교회 양극화, 정말 심각하다. 대형교회와 작은 미자립교회 갈등과 격차, ‘이건 아니다’싶을 정도로 심각하다. 신음소리가 커져만 간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현안은 80%에 달하는 농․어촌교회와 작은 미자립 교회들이다. 대형교회는 점점 몸짓이 커져가고 농․어촌교회나 작은 미자립교회는 점점 힘을 잃고 사라져 가고 있다. 어렵게 공부시킨 청년들은 대학가고 취직하면서 다들 도시로 나갔다. 도시교회는 넘치고 시골 농어촌교회는 노인들뿐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자녀 공부시키는 것도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고 도시교회가 자녀 장학금이라도 한번 보내지 않는다.
농어촌 미자립교회나 목회자의 인내와 눈물이 한계점이 달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가 그들에게 도움도 희망도 되어주지 못한다면, 그들을 품고 위로도 격려하지 못하고 방치하면서 어떻게 지도자라고 어찌 한국교회의 미래와 희망을 논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 양극화, 풀어야 할 숙제이다. 양극화가 심한 곳이 교회이다. 한국교회 양극화, 풀어야 산다. 강한 자만 살아남고 살아남은 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함께 상생하는 교회가 그래도 생명력이 있다. 양극화를 극복하려면 농어촌 미자립교회를 찾아가고 부축하고, 건강한 교회로 세워가는 일에서부터 자립의 길을 찾아야 한다. 보아스가 룻을 위해 일부러라도 이삭을 떨어뜨렸듯이 이 시대에 농어촌과 작은 미자립교회, 특별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배려의 손길이 필요하다.
양극화 극복하고 함께 상생하며 미래로 나가려는 대안 있는가? 한국교회, 미래로 가기위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양극화의 대안이 있다면 ‘성장제일주의’가 아니라 '건강한 교회‘세우기운동이다. ‘건강한 교회‘가 해답이다. ‘건강한 교회’= ‘거룩한 교회’가 해답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건강한 교회’ 운동을 통해 세상 속에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하며 세상속으로 들어가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의 영광을 다시 드러내야 한다.
도농교회가 자매결연을 맺고 농수산물을 수매하여 판매하는 등 농어촌를 지원하여 함께 상생하는 프로젝트를 전개하는 것도 좋은 방편이 될 것이다. 사실 물량적 지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함께하는 동료이자 동역자라는 메시지와 따뜻한 손길을 펼치고, 마음을 전하는 일이다. 이렇게 전개해온 것이 설과 추석에 ‘고향교회 방문하는 캠페인’이었다. 이렇게 귀하고 복된 나눔과 배려의 손길을 펼 때 손 마른 병이 고치지고 ‘건강한 한국교회’의 희망을 볼 수 있다.
그러면 교회와 동역자님은 한국교회 양극화를 극복하고 상생하려는 어떤 대안이 있는가? 의지나 그런 관심과 청사진을 가지고 있는가? 전략과 이를 실천할 마음이 있기는 한 것인가?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