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18(화)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

22. 스위스의 개혁자 츠빙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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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작센의 한 광부의 집에서 루터가 태어난 지 몇 주일 후에 스위스의 알프스 산 중에 있는 한 목자의 초라한 집에서 츠빙글리가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아름답고 웅장한 천연계를 바라보며 성장한 츠빙글리는, 하나님을 신실히 믿는 조모(祖母) 곁에서, 순수하지만 웅대한 꿈과 포부를 가진 진실한 크리스찬으로 자라났다. 특히 그는 남달리 명석하고 매우 총명하였으며 그를 가르칠만한 교사를 쉽게 구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13세 때에 당시에 스위스의 가장 우수한 학교들이 있는 베른으로 유학을 하게 되었다.
이 유능하고 뛰어난 어린 학생에 대하여, 당시 서로 대립관계에 있었던 도미니크회(Dominican)와 프란체스코 수도회(Franciscan)는 경쟁적으로 이 아이를 자기들의 편에 두고자 암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그의 아버지는 츠빙글리를 다시 집으로 불러들였으나, 그 산골에서는 이 츠빙글리의 지적, 영적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바젤(Basel)로 갔고, 그곳에서 비템바하(Wittembach)라는 좋은 스승을 만나서,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로마교회의 이단성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성모 마리아상에 대한 도전
사실상 그 당시 츠빙글리와 루터는 서로 교류한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나중에 츠빙글리는 루터의 서적을 통해서 자신의 개혁적 메시지가 서로 일치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두 사람의 주장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술회하였다. 이와 같이 두 개혁자는 오직 성경의 진리를 연구하여 있는 그대로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전력질주 하였던 것이다.
1516년 츠빙글리는 아인지델른(EInsideln) 수도원의 설교자로 초빙되었다. 그곳에 하나의 명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모 마리아상’이었고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곳이었다. 연중 대절기가 되면 여러 나라에서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츠빙글리는 그렇게 많은 군중들이 모여드는 기회를 이용하여 그 미신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복음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였다. 첫째 부류는 그들의 고행을 포함한 순례 여행이 아무 효력이 없다는 말에 크게 실망하였고, 또 다른 한 부류는 로마교회의 의식들로부터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던 차에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소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받은 귀중한 복음을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서 그 소식을 널리 전파하였다.
결과적으로 마리아의 전당을 방문하는 순례객들이 현저하게 감소하였고 아울러 예물의 액수도 감소하였다. 이리하여 츠빙글리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되었고, 3년 후에는 당시 스위스 연방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취리히(Zurich) 대성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복음과 교권이 대립되다
츠빙글리의 설교는 매우 개혁적이고 복음주의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로마교회의 부패와 거짓 교리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정치가들, 학자들, 기술자들, 농부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그 사람이야말로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우리를 애굽의 암흑에서 인도해 낼 우리의 모세가 될 것이다.”(-D’ Aubigne, b.8, ch.6)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츠빙글리의 감화력과 영향력에 대하여 로마교회가 잠잠할 리가 없었다. 수도사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츠빙글리의 주장을 정면에서 반박할 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의 금고를 채우기 위하여 만들어진 면죄부 판매를 적극 추진하였다. 독일에서는 테첼(Tetzel)이라는 신부가 그 판매책임을 맡았고, 스위스에서는 이탈리아의 수도사 삼손(Samson)의 지휘 아래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주관하였다.
한 지역에서 동시에 두 가지 운동이 전개되었다. 하나는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해 준다’는 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해 준다’는 운동이었다. 츠빙글리는 면죄부 판매 운동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저지하였다. 결과적으로 삼손은 한 장의 면죄부도 팔지 못하고 스위스를 떠났다.
츠빙글리의 설교는 언제나 복음적이었다. 그의 설교는 매우 은혜스럽고 흥미로웠기 때문에 많은 청중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독일의 비텐베르그에서는 루터가 교황과 교권에 대하여 단호하게 저항하고 있었고, 스위스에서는 이제 츠빙글리가 교황의 권한에 대하여 도전하고 있었다. 다급하게 된 로마교회 측에서는, 당시 콘스탄스의 감독이 세 명의 사절을 취리히의 의회로 파견하여 츠빙글리가 사람들에게 교회의 법규를 범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질서를 파괴하고 있으니 그를 조치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취리히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평화롭고 범죄가 없었던 안정된 도시였기 때문에, 의회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츠빙글리의 활동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역전(逆轉)이 된 대토론회
독일에서나 스위스에서나 개혁사업이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었으나, 이를 약화시키려는 로마교회의 노력이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이들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들이 츠빙글리에게 제안한 방법은 공개토론회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부적인 조작을 통해서 츠빙글리를 제압하고자 하는 음모였다.
바덴(Baden)에서 대토론회를 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츠빙글리는 직접 그 토론회에 참석하지 않기로 하고, 개혁파의 대표로는 에콜람파디우스(Ecolampadius)와 할러(Haller)가 출석하였고, 로마교회 측에서는 학식이 풍부하다고 인정받는 에크(Eck) 박사가 나왔다.
에크와 그 일행들은 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옷을 입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단에 올랐으나, 개혁파의 대표는 검소한 의복을 입고 경건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에크가 만약 로마교회의 신앙을 옹호하는 일에 성공하면 막대한 상급이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좀 불리한 입장이 되면 상대방에 대한 모멸과 조롱을 서슴지 않고 퍼 부었으며 매우 오만한 태도로 상대방을 무시하였다. 그러나, 개혁파의 대표자는 시종일관 침착하고 신사적인 태도로 오직 성경 말씀에 입각하여 토론에 임하였다.
토론회의 내용은 필기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제하였으나, 한 학생이 몰래 모든 내용을 필기하여 그 내용을 밤중에 츠빙글리에게 보냈고, 츠빙글리는 밤새 그 기록들을 검토하여 그 다음 토론에서 주장하고 답변할 내용들을 작성하여 학생을 통해 전달하였다. 이 토론은 18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에크 일행은 매일 저녁 풍성한 식탁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고, 개혁파는 먹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간단히 식사를 하고 다음 토론을 위해 준비하였다.
토론회에 참석자 중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양측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에크의 주장들에 대하여 혐오스러운 감정을 갖게 되었다.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의회는 개혁파의 패배를 선언하였지만, 이 토론회의 결과로 개혁 사업은 더욱 활력을 얻게 되었고, 마침내 중요한 지역인 베른과 바젤 두 도시가 개혁 사업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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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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