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입맞춤”이란 말은 겉 다르고 속 다른 배신자의 행위를 대표하는 말이 되어 있고, 교회미술에는 <유다의 입맞춤>으로 제목 붙인 그림들이 꽤나 많다. 14세기 이태리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의 <유다의 입맞춤>도 그 중 하나.
깊은 밤 겟세마네, 예수가 최후의 기도를 마칠 무렵, 창과 몽둥이를 든 무리가 예수를 에워싼다. 횃불이 타오르고 몽둥이가 춤을 추는 떠들썩한 분위기 한 가운데, 예수와 유다가 마주한다.
유다가 자신의 몸을 예수에게 밀착시키고 웃옷 자락으로 예수를 감싸고 있어, 예수는 겨우 얼굴만 드러내고 있다. 익살스럽게도 유다가 걸치고 있는 겉옷은 진노랑, 전통적으로 유다의 색으로 알려지고 있는 그 빛깔이 아닌가. 중세에는 게토의 유대인들이 걸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빛깔이었고, 2차 세계대전을 즈음해서는 나치가 강제로 유대인의 가슴에 달아주었던 별모양의 표지로 이어지는 그 노란 빛깔이 아니던가. 조토가 훗날 일어날 일을 미리 점치고 있지는 않았을 터. 그러나 그의 그림은 이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제자들이 무리를 비집고 예수를 구하려 나서는데, 베드로가 칼로 한 병사의 귀를 벨 때 예수가 어떤 말로 제자를 타일렀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들이 한 화면에 녹아있다. 이를테면 연극에서 일정한 시간을 두고 이어져 나타날 장면들이 한 화면에서 동시에 녹아나고 있지만, 그림 앞 우리에게는 예수와 유다면 족하다.
입술을 내밀고 있는 유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예수.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흐르고 있다. 노성과 울부짖음의 소용돌이 속에 교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두 사람 뿐이다.
우리는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알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그 뜻을 헤아리는 사람. 그러니까 십자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은 인류가 아니라 예수였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림에서 유다의 입술이 예수의 입술에 닿았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란 것은 느끼게 한다.
우리는 제사장들이 은돈 서른 잎으로 유다를 매수했다고 알고 있다. 30데나리온은 장정이 꼬박 한 달을 일해서 벌 수 있는 금액으로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앞 서 한 여인은 유다가 보는 앞에서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는데, 그 값이 3백 데나리온이 아니었던가. 명색이 사나이로 태어나서...훗날 유다가 돈을 팽개쳤다는 이야기는 또 무슨...
그럼에도 예수는 주변의 소란과는 관계가 없다는 듯이 태연하기만 하다. 유다를 보는 눈길에는 모멸이나 미움이 보이지 않는다. 화가는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을 뻔했다”하는 예수의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겟세마네에서 자신의 최후를 위해 기도하며 흘린 땀이 핏빛이었지만, 하나님은 침묵했고, 예수는 십자가를 결단한다. 예수가 말했다. “보라 때가 가까이 왔다.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일어나 가자.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와 있다.” 예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 두 제자중의 하나인 유다가 다가선다.
예수와 유다 사이에 오간 교감을 탐색해보고자 했던 예술가는 숱하게 많다. 그 중 한 사람인 조토가 건져낸 바는 오직 그의 작품을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작가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수백 년 후의 감상자가 제멋대로 상상하는 노릇을 작가가 용서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그림을 볼 때 사로잡히는 망상이야 어찌할 수 없으리라.
예수와 유다 그리고 열 한 제자들을 에워싸고 있는 무리가 들고 있는 몽둥이와 횃불이 훗날 유럽 여러 곳에 솟아오를 고딕성당을 상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 말이다.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하고 밖에 나가 몹시 울었다. 복음서의 증언들은 또 한 번 유다의 배신을 곱씹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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