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1(금)
 

홍성표 목사.jpg
 
지금 세계사의 시간은 어렵고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지난 인류사가 어렵지 않던 시절이 있었던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흔들고 있는 상화이고, 미국 주도의 세계 패권의 힘이 중국과 맞서는 현실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경제적으로 G2에 올라오고 타이완과 홍콩 등의 한 국가 주장과 시진핑 주석의 사회주의(신 공산주의?)의 강한 드라이브는 과거 영국의 홍콩 식민지역사의 경험에 비취어 오늘 날 자본주의, 즉 미국과 서구 세계에 대한 강한 저항과 자존심의 싸움이기도 하다.

 

장개석은 소위 그리스도인 이었다. 문화혁명을 통해서 장개석을 타이완으로 몰아 낸 모택동은 중국을 공산당으로 통일하고 자본주의를 받아 드리며 잠자던 중국을 세계 역사의 무대 전면에 올려놓았다. 기독교와 자본주의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상당하다. 영국으로부터 아편전쟁을 겪고 150년 식민 경험을 한 이후 홍콩을 돌려 받은 중국은 개혁 개방과 함께 세계의 새로운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 서 있다. 미소의 냉전에 대하여 이제는 미중의 신 냉전 시대가 도래 한 듯하다. 미중의 패권 전쟁에 반환 된 홍콩은 국가보안법이 통과되고 홍콩의 민주 시민들의 앞날은 매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러한 변화된 세계적 상황은 한반도의 역사적 시간과 매우 밀접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남북의 분단 속에서 지금까지 한반도를 점령한 미군의 통치는 계속 되고 특히 남한의 대한민국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역사를 이루어가지 못하고 있다.

 

북의 공산 사회주의와 남한의 썩은 자본주의는 상충된다. 김정은도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개방 정책을 생각하고 있지만 미국의 비핵화와 제재 정책 등으로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촛불혁명을 내세우는 문재인 정부가 하반기를 가고 있다. 친일, 독재와 학살 사기 농단 세력의 후예인 미통당과 그동안의 분단팔이에 세뇌 당해 온 세력들은 남남 갈등을 부추기는 현상은 여전하다. 세계의 재편과 동북아의 새로운 정세와 동남아시아와 유럽의 변화와 아프리카와 남미 등 세계는 뒤 틀려 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시간을 잘 파악해야 한다. 분단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문제가 풀어지면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된다. 전쟁과 싸움은 코로나가 잠잠 하면 새로운 바이러스가 등장 하는 것과 같다. 보수는 보수대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진보는 서님과 민중들을 팔아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 한다. 미통당은 썩고 부패한 세력이라고 치자. 민주당의 국회의원들이 여러 채의 집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는 부동산 정책은 거짓이다. 정말 인간다운 인간을 찾기 힘들다. 거룩을 내세워 밥벌이 하는 종교귀족들도 그러하다. 역시 답은 잠에서 깬 민중이다.

 

민중은 누구인가? 현실의 자본과 권력의 중심에서 항상 소외된 삶을 사는 변두리 사람들이다. 이들은 기득권에 매여 있지 않다. 이들의 깨어난 힘들의 연대적 개혁과 혁명의 길만이 답이다. 오늘의 삶은 존재보다는 소유와 정복에 있다.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 인간들이 무엇인가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야만 불안한 마음과 정신을 잠시나마 안정감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꼬리를 문다. 이러한 문제들에 사람들은 이골이 나있다. 한 시도 쉬지 않고 늘어나는 인간들의 문제에 대하여 사탄들 악한 세력들은 춤을 춘다. 악한 세력들이 하는 일은 악을 도모하고 죄인들과 같이 가며 오만한 자리에 앉고자 한다. 이 세상에는 악한 세력과 선한 세력들이 공생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과 처지는 다를지라도 유사한 고통과 고난들은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 대하여 대처하거나 이것을 극복하는 것들의 방법은 전혀 다르다. 사람들은 평화와 행복을 갈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와 행복들은 혼자만으로는 이루어 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삶의 환경은 유기체적인 네트워크가 형성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가 함께 사는 사회적 동물이고 정치적 동물이며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부르고 너는 나를 부르며 서로가 필요로 하는 존재로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시간은 마주쳐 흐른다. “도전과 응전의 반복을 통해서 더 큰 도전과 응전을 경험하며 산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인간이란 존재의 깊이를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크고 작은 것들은 산처럼 쌓이고 큰 바다를 이룬다. 작은 빗방울들이 모여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며 마침내는 큰 바다의 대양을 이룬다. 역사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문제들을 가슴에 안고 흐르고 있다. 슬픔과 눈물, 억울함과 고통의 잉태를 통하여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시간은 영원한 현재를 가르친다. 생명의 출산은 신비롭고 위대하다. 한 생명은 저 우주와 동일하다. 한 생명의 의미와 가치는 인간의 생각과 이성으로는 저울질 할 수 없고 계산할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을 조종하고 인위적으로 만들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생명 자체의 손실을 가져오고 극단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사회는 매우 살벌하고 냉철하다. 어떤 잘못들을 구분하기도 힘들고 용서라든지 이해를 하려는 아무런 공간이나 노력들이 보이질 않는다. 역사의 존재적 시간은 지금도 운동하고 있지만 이것을 담보해 낼 인간들의 움직임은 보이지를 않는다. 창조주를 말하지만 그의 뜻은 아랑 곳 하지 않는다. 창조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짓밟는 것들이 홍수를 이룬다. 우리는 역사가 시간을 창조 하도록 허락해야만 한다. 진정한 생명의 가치와 진리를 실현 시키려면 창조와 역사는 분리 되어서는 안 된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통일칼럼] 역사의 시간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