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매산 김양선 목사와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한국교회 해방 10년사 등 다양한 교회사 관련 자료도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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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 김양선 목사

매산 김양선( 梅山 金良善) 목사는 1907222일 평북 의주군 피현면 상두동에서 김관근 목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3126일에 부친이 별세하고, 양선은 1922년 중원학교, 1926년 선천에 있는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 문과로 진학하였고, 그 사이 192811월 광주학생 사건으로 투옥되어 16개월의 감옥살이 이후, 1935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3833회로 졸업해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해방되던 해 미 군정의 배려로 서울 남산 조선신궁 터에 적산 가옥을 이양 받아 한국 최초의 이름도 생소한 기독교박물관을 개원하였다.

 

매산의 가문은 한국 제1세대 기독교 가문이다. 한국 장로교 최초 7인 목사 중 백홍준 목사가 매산의 외조부였고, 아버지 김관근 목사에 이어 자신이 목사가 되었으니 3대 목사 가정을 이루었다. 그가 기독교박물관을 생각한 것도 외할아버지와 선친이 지녔던 한국교회 초기 성경과 찬송가 및 각종 기독교 문헌을 자연스럽게 접했던 데 연유하고 있다.(한국기독교대사전, 박용규 편, 1978. 성은출판사 p.175 이하).

 

한국교회사 관련 자료 수집 및 연구

1945년 해방이 되자, 매산은 대학에 강사로 출강하며 고고학을 가르치고, 신학교에서는 한국교회사를 가르치면서 교회를 맡아 섬기고 있었다. 그의 주된 관심은 교회 목회보다 고고학과 국학연구, 한국교회 관련 유물 및 문헌 자료의 귀중성과 수집에 있었다. 그의 이런 노력은 24세 때부터 역사의식에 눈을 떠 관심을 두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가 한국교회사 관련 자료 수집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숭실전문학교 3학년 때 양주동 박사의 서재에서 국문학에 대한 고서(古書)들을 보고서였다. 국문학과 영문학의 대가였던 양주동 박사가 선조들의 얼이 담긴 노래를 살려 민족의 얼을 찾아내고 국문학 연구에 전력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은 한국교회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 연구하고 정리해 보아야겠다는 역사의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후일 고백한 적이 있다.

 

나는 한국교회 최초의 신앙가정에서 태어나서 손으로 만져 보고 귀로 들은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정리해 연구해야겠다는 자의식이 싹튼 것이다. 내 주위에 흩어져 있고 널려져 있는 초기 자료들을 모으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기독교박물관의 정신적 신앙적 뿌리가 되었다. 여름방학 때에 고향에 내려가서는 외할아버지 백홍준 조사의 집에 가서 여기저기 널려져 있는 문서들과 서책들을 모아 깨끗하게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만주에 있는 존 로스 목사로부터 전해 받았던 성경과 기독교 관계 문헌과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문헌들을 모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외할아버지 백홍준이 로스 선교사와 교제하면서 취득한 성경과 찬송가와 신문 등 중국 문헌까지 정리해보니 500여 종이나 되었다. 이렇게 하고 나니 속으로 흐뭇하고 기쁘기 그지 없었다. 이렇게 시작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고고학 자료들까지 수집하다 보니 8.15 해방 당시까지 약 5000여 종이나 되었다.” (같은 책 p.176 참조).

 

김 목사는 자료를 모으고 수집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모은 자료를 토대로 <한국선교 80년사><한국교회 해방 10년사><한국기독교 연구><한국성서번역사><간추린 한국교회사><장로교회 여전도대회 소사><이수정과 성서번역사><세계선교사><6·25 사변과 기독교 문화재의 수난><고고학 개론><한국기독교사 연구> 등 여러 종의 한국교회사 연구 저서를 남겼다.

 

이들 저서 중 한국교회 해방 10년사는 간행 직후 총회적인 비난이 쇄도해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왜냐면 해방 10년사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생존해 있다보니 사학자의 평가에 피해의식이 발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총회종교교육부장 안광국 목사는 이 책을 출판한 후 책임론과 구설수에 휘말려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저자 김양선은 한 발자욱도 물러서지 아니하고 사가(史家)의 소신을 끝까지 지켰다.

 

매산이 한국교회에 남긴 가장 큰 선물은 기독교박물관

오늘날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후학들은 1950년대의 한국교회 분열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발표된 성명서 내용과 김양선 목사의 평가를 외면하고서는 이후 예장합동과 통합 뿐만 아니라 고려파와 기장파의 분열 요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필자의 생각으로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김 목사가 원래 계확했던 1955년 이후, 1960-1970년대의 한국교회 역사를 끝내 정리하지 못하고 19631011일 작고 한 것이다.

 

또 한 가지 매산 김양선 목사의 한국교회사적 공적은 위에 언급한 저서들만이 아니라, 현재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설립의 실체가 바로 매산의 유산이요, 한국교회 과거를 오롯이 담고 있는 한국기독교의 산 역사를 눈으로 보고 배울 수 있는 유물과 문헌과 아울러 매산의 연구 범위가 조선조의 역사 문헌 및 고고학과 국학관계와 과학기구들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박물관의 핵심 콘텐츠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매산의 꿈이 바로 이 기독교박물관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박물관이 숭실대학교에 설립되기 전(1967. 10.10 기증)에 실은 국학자료가 이미 신촌의 연세대학교로 많은 양이 옮겨가 있었다. 숭실대와 함께 연세대도 기독교박물관 설립에 관심이 있어 매산과 협의한 결과 현재의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있는 유물이 연세대로 가기로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 목사가 연세대에 내세운 조건이 세 가지였다. 첫째, 캠퍼스 내에 박물관 건물을 먼저 세워줄 것, 둘째, 내가 교수 할 수 있도록 배려할 것, 셋째, 자신의 생존시 박물관장으로 임명해 줄 것이었다.

 

그런데 연세대 측에서 박물관 건축에 착수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이유는 당시(1960년대) 연세대 측은 박물관 건물 건축보다 이공대 건물 신축이 급한 때였기 때문이었다. 학교 측이 이공대 건물 신축 후 박물관을 짓겠다고 하자 김목사는 약속 위반이라면서 연세대와 맺은 약속을 파기하고, 자신의 모교요, 자신이 교수로 있었던 숭실대가 같은 조건을 수락하자 연세대에 넘어가 있던 유물이 숭실대로 옮겨가게 된 것으로 후일 밝혀졌다.

 

기독교박물관 유물은 우리나라 운명이 일제의 침탈과 6.25라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부산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피난을 가야 하는 상황에서 유물이 여러 곳으로 흩어지고, 3·8선이 갑자기 막히자 북한에 있는 유물을 남으로 옮기는 과정에 한필려 사모가 서해상에서 인민군에 의해 순직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필자는 19583월부터 신학교에 다니면서 틈 날 때마다 남산자락에 있던 기독교박물관을 수 차례 방문해 관람했다. 일본식 적산가옥 2층 건물을 드나들 때마다 마루바닥이 삐거득 삐거득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관람했던 기억이 새롭다. 신학교에서 교회사 강의를 할 때, 신학생들 졸업여행 가이드를 몇 차례 하면서 상도동의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을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남산 시절의 박물관 이야기를 하는 나를 바라보며, 어찌 학예사인 자신들보다 내가 더 잘 해설한다고 할 때는 자부심이 있어 내 어깨가 나도 모르게 으슥했던 기억도 난다.

 

매산 김양선 목사가 한국교회와 기독교회사에 남기고 간 가장 큰 선물은 이 기독교박물관이라고 필자는 평가하고 싶다. 이 박물관 설립자 김양선 목사의 조카 되시는 김광수 박사의 강의를 듣고 필자가 한국교회사 교수가 된 것도 주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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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매산 김양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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