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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을 극복한 신앙 이야기
    화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라는 유명한 찬양 작곡가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평생에 무려 9,000편의 찬송을 작곡했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도 그녀의 곡이 22편이나 수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앞을 못 보는 시각 장애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병을 고치기 위해 병원에 갔다가 의사의 실수로 인해 그만 실명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당당히 일어났다. ‘나는 나의 눈이 멀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믿는다.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괴로운 조건 때문에 나는 오히려 천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성전의 기둥으로써 주님 앞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실로 그녀는 자기에게 닥친 일을 고통이나 실패로 보지 않고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바라보고 믿었다. 그러한 그녀의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엄청난 업적을 남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렇다. 어떠한 환경과 상황에 처하더라도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아주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내도록 할 것이다. 우리가 즐겁던지 고통스럽든지 지위가 높든지 낮든지 우리 앞에 있는 장애물이 아무리 견고하고 어려울 지라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막9:23) 그런데 참 안타까운 사실은 주를 믿는 우리들 역시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조금만 상황이 어려워지면 이내 세상의 불신자들처럼 자기 연민이나 원망, 불평을 늘어놓고 낙심하고 절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또 형통할 때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을 드리기보다는 자기 자랑에 빠지거나 교만, 안일에 빠져 오히려 하나님을 잊을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 진정 믿음을 소유한 성도라면 그 어느 상황에서도 고난이 두려워 낙심하고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 주를 믿는 성도라고 하여 마냥 축복만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난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사계절이 교차되듯 우리의 인생에도 낮과 밤이 있으며 사막의 길을 갈 때도 있고 오아시스를 만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고난과 역경에서 믿는 자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고난과 역경을 피하기 위해 신앙을 포기하고 데마처럼(딤후 4:10)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옳을까?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시적인 고난으로 인해 영생복락을 포기하는 지극히 미련하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다. 또한 우리가 고난과 역경으로 인해 신앙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이 주는 위협적인 고난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참된 기쁨과 평안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사망의 힘이 클지라도 하나님의 권세는 이 힘을 반드시 파하고 마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돌보시고 위로하시는 보혜사 성령을 통해 고난과 역경 중에 괴로워하는 우리의 눈물을 웃음으로, 우리의 아픔을 즐거움으로 변하게 하신다.(고후7:4) 그렇다. 믿는 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역경이 극심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엄청난 기쁨으로 믿는 자를 위로하시고 보호 하신다. 그래서 미국의 신학자 라이트(Lightfoot) 씨는 이렇게 말했다. ‘신자는 자기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허락된 정도만큼 기쁨을 누린다.’ 이는 역설적인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증거이다. 즉 세상의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부요한 자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이 하나님의 지혜인 것들처럼 우리의 고난의 눈물은 곧 우리의 기쁨과 희망을 싹틔우는 봄비가 되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고난과 역경이 오면 원망과 불평보다는 크신 하나님을 기억하여 믿음의 기도를 하고 형통할 때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만에 빠지거나 그것을 쾌락의 기회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 축복을 베푸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먼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야한다.(시50:15, 사43:21, 약5:13)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어두운 길을 밝혀주시며 모든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이다.(시23:3, 27:1) 그렇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에 대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 앞에서 떨지 않도록 한다. 그분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와 담대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요16:33)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위에 굳게 서야한다. 그러면 우리는 불가능하던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믿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감격스러운 은혜인 것이다. 믿는 자들은 세상의 풍조를 따라 신앙생활을 적당히 편한 데로 하려해서는 안 된다. 즉 기도도, 찬송도, 이웃 사랑도, 봉사도, 전도도, 적당히 편한 대로 하면서 하나님의 응답과 은혜가 부족하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은혜와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 미지근한 적당주의를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묵상하며 또한 그분 앞에 매일 새로운 언어들로 기도하며 찬양을 돌려한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더욱더 견고해질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7-05-02
  •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오늘 날 지구상에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최근의 한 통계에 따르면 세계 그리스도인의 수는 약 20억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인구의 1/3 또는 1/4 이 넘는 숫자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숫자나 규모면으로 볼 때 기독교는 가히 세계 제일의 종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작 교회와 사회에서 기쁨과 자랑이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한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명목상 그리스도인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첫째, 명목상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출세 도구로 이용하는 자들이다. 복음에 대한 호기심과 지식이 탁월하지만 신앙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인데 이상하게도 교회 안에 특히 지도자 그룹에 이런 이들이 많다. 누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이들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단지 예수의 이름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주님의 참 제자들에게는 더 이상 자기가 없다. 자기 부인이 첫째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마 16:2).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주’라는 호칭이 단지 공식적인 명칭에 불과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 라고 할 때 이는 곧 자신을 종의 자리에 두는 것인데 이 사람들은 예수의 공식적인 명칭 이상의 그 어떤 의미도 이것에 부여하지 않는다. 예수의 이름을 자신의 출세 도구로 이용하려는 이들은 주 앞에 서게 되는 날 주님께 책망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비록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어 쫓으며 또 주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많은 권능을 행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도무지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마 7:22, 23). 두려운 일이다. 혹 명목적 그리스인으로 살고 있지 않는가 자신의 신앙을 항상 점검하자. 둘째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이들이다. 이들은 진실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의 경건한 모습인데 세례 요한(요 1:29-34)과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았다. 그들은 언제든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자신을 통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했을 뿐이다. 특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명예는 물론, 생명까지도 전혀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분의 이름을 존귀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사양하지 않던 참 진정한 그리스도인 이었다.(행20:24) 고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원하는 이들은 세례 요한과 바울을 본받아야한다. 우리는 주께서 주신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육적이든 영적이든 우리가 가진 일체의 것들은 다 주께서 주신 것들인데 이것으로 자기의 이름을 내려 한다면 그는 참으로 신앙 양심도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겸손한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할까?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 받기 위해서는 입술의 신앙고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는 제자직의 기본 조건들을 갖추어야한다. 주님께서는 이와 관련하여 3가지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자기 부인이다. 즉 자아가 죽어야한다. 육신적인 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 세상적인 것들에 연연하는 나, 바로 이 나, 곧 자아가 죽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부정은 보다 큰 긍정을 위한 일종의 소극적 단계로서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제자가 반드시 거쳐야 할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란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과 그 사명 감당을 위한 희생과 노력을 의미 한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반드시 받은 사명 감당을 위해 피와 땀과 눈물과 희생의 헌신이 있어야한다. 앞서 언급한 자기 부정이 일종의 소극적 준비 단계였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일종의 적극적인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주님을 좇는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방향을 말한다. 진정한 제자는 이렇게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사명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그 뒤를 따르는 자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성령의 충만이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롬 8:9). 겉 모양이 아무리 성도를 닮았어도 성령이 없는 사람은 육체의 소욕을 좇게 마련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들을 내지 못한다(갈 5:16-21). 우리는 이 세가지 기준에 따라서 자신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지를 항상 점검해야 한다. 만일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훌륭한 종교인은 될 수 있어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될 수 없다. 그리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냐 아니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기왕에 신앙을 가졌으면 진정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7-04-21
  • 성경적인 겸손의 이야기
    우리는 유년 시절부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자주 경청하고 성장했다. 겸손은 자신의 능력이나 공을 자랑하지 않는 태도라고 배웠다. 그렇다. 타인들 앞에서 자신의 뛰어난 장점을 드러내지 않고 몸을 낮추는 자세는 분명 아름답다. 스스로 부족하다는 인식에서 더 많은 노력을 하는 태도 또한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자기를 비하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은 겸손은 아닐 것 같다. 겸손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겸손은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드리는 것이다. 즉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를 바로 알고 그에게 합당하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합3:6)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야 할까? 겸손은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귀한 덕목이기 때문이다.(마11:29) 실례로 사람들에게 겸손을 보이시고 가르치신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생각해 보자. 먼저 주님은 스스로 낮아져 섬김의 삶을 사셨다. 그분은 근본이 하나님이시다.(빌2:5~11)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 2위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속성과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란 증거는 성경에 풍부하다.(요10:30, 12:45) 이러한 하나님 되신 주님께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낮아지셔서 섬김의 삶을 사셨다. 즉 창조주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자존심과 영광을 유보하시고 인간으로 나셔서 역사의 한가운데 사시면서 음지에 있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죄인들과 교제하시며 그들과 같이 낮아지시고 핍박받는 처지에서 진정으로 그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친구가 되어 주셨다.(마11:19) 이처럼 주님께서는 분노나 자랑이나 증오가 없는 온유와 겸손으로 충만한 아름다운 삶을 보여 주심으로 우리 또한 그렇게 살도록 요구 하신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은 세상에서 행해지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온유와 겸손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토마스 아베케이트라는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체하며 아침마다 13명의 거지 발을 씻겨 주었다한다. 그는 주님보다 한 명의 발을 더 씻김으로 더 겸손한 모습을 보이려 자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겸손한 모습을 드러내려 했을 뿐 그 마음이 진정으로 겸손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외식적인 행위로 교만을 숨기고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흉내 낸다. 이렇게 행해지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온유와 겸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무엇을 행하지 말라고 하신다.(마6:1) 다음으로 마지막에는 무죄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나시고 죽기까지 낮아지신 것이다.(빌2:8)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를 비천한 죄의 자리에서 이끌어 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함 이었다. 이처럼 주님께서 낮아지심으로 우리는 높아졌다. 그가 비참하게 됨으로 우리는 존귀하게 되었다. 그가 십자기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어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광에도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겸손의 의미를 분명하게 교훈 하신다. 즉 겸손이라고 해서 남 앞에서 무조건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자신이 힘과 권세가 있어도 그것을 자랑치 않고 도리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선용하는 것이 바로 성경적인 겸손이다. 우리는 겸손의 자세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 그대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높아지기 위해 자기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 한다. 그래서 자기 과시를 한다. 없어도 있는 체 하고 몰라도 아는 체 하며 약해도 강한 체 한다. 또 섬기기보다 섬김 받으려 하고 누군가 지시하려하면 지시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다고 높아지겠는가? 아니다. 진정한 높아짐은 낮춤으로 이루어진다. 자기를 극도로 낮출 때 비로써 주님처럼 높아진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세세토록 주 안에서 주님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높여 주시고 영광을 나누게 하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겸손이 너무 지나쳐 자신을 과소평가하기도 한다. 예컨대 지식도 많고 경험이 풍부하여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낮춘다. ‘제가 뭘 아는 게 있어야죠’, ‘자신이 없네요. 능력이 부족 해서요’ 라고 거절한다. 일을 맡기려고 한두 번 부탁했는데 계속 이런 모습으로 사양하면 ‘저토록 자신감이 없는 사람과 무슨 일을 하겠어. 이번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자고’ 이렇게 되고 말 것이다. 지나친 겸손은 결국 손해나 불이익을 야기할 수 있다. 스스로 능력이 없다고 하면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는 게 요즘 세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능력과 경험을 과시해서도 안 되지만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긍심이 없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유념하자.
    • 칼럼
    • 목회자
    2017-04-14
  • 왜 기독교만 믿어야 하는가?
    복음을 전하다가 간혹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왜 기독교만을 믿어야 하느냐?’ ‘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느냐?’ ‘세상의 종교는 다 같은 것이 아니냐?’ ‘세상의 수많은 종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 ‘어떤 종교든 정성으로 믿으면 되지 않느냐?’ 이런 도전적인 질문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는 정치나 교육이나 사회 제도는 없어도 종교가 없는 민족은 없다. 이에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종족만큼 종교도 다양하다고 말한다. 또 어떤 종교든지 나름대로의 예배 의식이 있다. 제물을 바치거나 어떤 의식을 행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요소이다. 또 대부분의 종교는 구원을 가르치고 선한 행위를 가르친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는 여러 종교 중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종교 다원주의 자들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로도 구원을 이룰수 있다고 주장 한다. 참 황당하다. 더 이상 종교 간의 갈등이 나타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공존하며 연합할 수 있는 문이 열리는 것과 같다. 하지만 아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간 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다. 그것이 기독교만이 믿어야 할 이유가 되며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이유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사람에게는 본성적으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데(전3:10)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다. 그래서 사람은 영원한 것과 무한한 것에 대한 마음 때문에 각종 종교를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종교가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은 다 인간들이 꾸며 낸 것이기 때문에 바른 구원의 방법이 아니다. 예컨대 유교는 예의범절만 가르쳐 줄 뿐 사후의 운명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불교도 확실한 구원의 길을 모르기에 또다시 이 세상에 출생하여 그 죄의 업보를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극락에 간다고 가르친다. 즉 구원의 문이 없기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인생은 윤회한다고 주장 한다. 또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율법과 자기들이 만든 정한 규례를 지켜야 천국에 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마음속에서부터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 만약 율법의 준수가 구원의 근거라면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못한 이유로 모든 사람이 영원히 하나님의 정죄와 진노 아래 있게 될 뿐이다.(갈3:10) 이처럼 인간이 만든 종교는 다 인간의 상상의 산물일 뿐 바른 종교가 아니다. 구원은 인간이 원한다고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에 빠진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부의 도움이 있어야한다. 따라서 인간은 죄에 빠지지 않는 누군가의 구원의 줄을 던져주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구원의 줄? 이 구원의 줄이 바로 기독교가 구원의 방법으로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생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 이 일은 창세전에 이미 계획되었다. 처음부터 이 모든 일을 계획해 놓으시고 때가 되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외부 곧 하늘에서 오신 분이시다. 그분은 사람의 모습을 취하셨지만 죄는 없으셨다. 본래 무죄하신 성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런데 죄인을 구하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구원의 길을 만드시기 위해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기에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시므로 당신이 본래 무죄하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사실을 입증하셨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의롭다 칭해 주시고 거룩한 자녀로 삼아 주시고(롬 3:25, 26) 사명도 주신다. 그리고 그분은 여기에 다른 어떤 조건 곧 지식이나 돈이나 고행이나 수양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거부함으로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절망가운데서 죽게 될 뿐이다. 고로 사람들이 죄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를 구주로 믿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행4:12) 예수 이름 외에 세상에 구원의 길은 없다. 그러면 왜 꼭 기독교만 믿어야 할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기독교에만 구원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실례를 보자. 기독교보다 훨씬 전에 생겨난 불교는 아시아권에 머물고 있다. 이슬람교는 중동지방과 그 인접 국가에만 머물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시아에도 유럽에도 남미에도 아프리카에도 또 오지의 원시 부족에도 전파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종교 학자는 ‘기독교보다 더 확실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종교가 만들어지면 기독교는 쇠퇴할 것’ 이라고 전망했었다. 하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기독교보다 더 나은 종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외에 다른 구세주를 이 땅에 보내신 일이 없으며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일한 구주인 주님을 붙들고 영생을 얻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7-03-31
  • 긍정적인 언어로 말하라
    한 사람의 언어는 그 사람의 프레임을 결정 한다. 따라서 프레임을 바꾸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은 언어를 바꿔나가는 것이다. 특히 긍정적인 언어로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1932년 180명의 젊은 여성들이 미국에서 수녀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 감격적인 순간에 그들에게 자신의 삶을 소개하는 간증문을 쓰도록 했다. 수녀들이 쓴 간증문은 70여년이 지난 후에 심리학자들의 손에 넘겨졌고, 연구자들은 간증문에 쓰인 단어와 문장을 분석하여 각 간증문에 얼마나 긍정적인 정서가 표현되어 있는지를 측정했다. 어떤 수녀들은 ‘매우 행복한’ 또는 ‘정말 기쁜’ 과 같은 단어들을 자주 사용했지만, 또 다른 수녀들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지를 말로 잘 표현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긍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한 상위 25%의 수녀들 가운데 90%가 넘는 수녀들은 85세까지 장수하고 있었지만 긍정적인 단어를 적게 사용한 하위 25%의 수녀들 중에서는 겨우 34%만이 생존에 있었다는 점이다. 매일 사용하는 단어 속에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까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감사, 감동, 기쁨, 설렘, 만족... 이런 단어들이 우리 삶 속에, 나아가 우리들의 말속에서 넘쳐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반대로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거 아니겠어? 또는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라는 표현이나 ‘대충, 아무거나’ 등의 단어들은 하루라도 빨리 마음에서 지워 버려야 한다. 이런 말들은 우리의 마음가짐을 ‘최고‘의 프레임에서 순식간에 ’충분한‘ 프레임으로 바꿔버린다. 누군가 이런 체험적인 말을 던졌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순식간에 탁월함에 대한 추구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표현들이 갖고 있는 무서운 전염성의 위력을 공감할 것이다. 특히 부모와 교사, 상사들은 자녀와 학생들 부하 직원들 앞에서 절대로 이런 말을 해선 안된다. 습관적으로 내뱉은 이런 말들은 듣는 이들 하여금 ‘좋은 것에서 위대한 것으로‘가 아닌 ’위대한 것에서 좋은 것으로‘의 마음가짐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항상 긍정적의 프레임을 만드는 긍정적인 언어로 말하는 습관을 가져야한다. 긍정적인 사람이 될 것인지 아니면 부정적인 사람이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해 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며 인간관계, 일, 자신에 대한 태도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모습까지 인생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지에 따라 세상을 보는 필터가 결정 된다.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다면 맑고 투명한 필터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세상의 걱정거리나 문제점을 보는 동시에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햇살과도 같은 가능성 역시 볼 수 있다. 반면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어둡고 흐릿한 필터로 세상을 보는 것 같다. 무얼 보든 간에 모든 것이 뒤틀려 보인다. 더 나쁜 것은 인생의 긍정적인 면조차도 전혀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례로 구약성경 민수기 13:1~11절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넌 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나온다. 모세는 12명의 사람을 보내 정탐하게 한다. 40일간의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12명의 사람들은 가나안 땅이 풍요롭고 아름답다는 점에서는 일치된 보고를 하였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는 그곳 거민이 강하고 성읍이 견고하여 이스라엘이 정복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 하다는 부정적인 보고를 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것은 그들이 사물을 보는 눈은 가졌으나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신앙의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의 불신앙적인 보고는 백성들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가득차게 했고 그들 전체를 불신앙으로 오염 시켰을 뿐만 아니라 비극적인 운명으로 내몰았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피해가 얼마나 큰 지를 잘 보여준다. 한편, 여호수아와 갈렙은 비록 10명의 정탐꾼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믿음 위에 선 긍정적인 보고를 하여 듣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축복을 받았다.
    • 칼럼
    • 목회자
    2017-03-24
  • 나귀 한 마리의 교훈
    나귀 한 마리가 높이 쌓인 건초더미 두 개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어느 쪽을 먼저 먹어야 할지 도통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쪽을 맛보려 하니 저쪽이 맛나 보이고 저쪽을 먹어치우자니 이쪽이 마음을 당긴다. 우왕좌왕 건초더미 사이를 오가던 나귀는 결국 입맛만 다시다 굶어 죽고 말았다. 바른 선택 없이 고민만 하다가 최악의 상항을 맞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꼰 우화다. 모름지기 좋은 결과가 있으려면 실행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선택을 하는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며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은 실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선택은 대부분의 경우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이나 인생관의 반영이다. 한 남자가 건축가를 찾아 왔다. 자신의 집을 짓고 싶어 하는 그 사람은 건축가에게 자신이 직접 스케치한 그림을 보여 주었다. 건축가는 방문객에게 흔쾌히 집을 지어주기로 했다. 게다가 돈은 한 푼도 받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공짜로 집을 지어준 건축가는 나중에 큰 돈을 벌어들였다. 건축가를 찾아온 사람은 그 유명한 피카소였다. 피카소는 자신이 원하는 집의 구조와 전체적인 모습을 스케치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린 대로 집을 지어줄 사람을 찾았던 것이다. 건축가는 피카소의 그림이 공사비보다도 훨씬 높은 가치가 있음을 알았고 집을 공짜로 지어준 후에 그림을 팔아서 수십 배의 이익을 챙겼다. 결국 피카소는 창의적 아이디어로 집 한 채를 얻었고 건축가는 창의적인 거래를 ‘선택’해 수십 배의 이익을 챙긴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 하면서도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망설일 때가 많다. 이것도 가능성이 보이고 저것도 전망이 밝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평소 선택의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로 어떤 일의 선택에 앞서서 먼저 살펴야 할 것이 있다. 이것은 이타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고 자문해야한다. 과연 우리는 일생의 선택적인 삶속에서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성경을 보자. 애굽에서 많은 재산을 모아 가나안으로 귀환한 아브람의 일가에게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하나는 아브람과 롯이 머물렀던 벧엘은 각각의 가족들과 권속들이 다 함께 거하기에는 너무 협소했다. 그들의 재산이 너무 많아져서 더 이상 그 땅에서 동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아브람의 목자와 롯의 목자 간에 다툼이 일어났다. 당시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목초지와 충분한 물을 확보하는 일은 지극히 필수적이며 이는 곧 생명 유지와 직결되는 일 이었다. 그러므로 어찌 보면 그들 사이에 다툼은 불가피했다. 특히 주인에게 충성심이 강한 목자들일수록 그들의 반목은 더욱 컷을 것이다. 이에 아브람은 롯과 화목을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질 것을 제시한다. 롯에게 먼저 땅의 선택권을 양보하는 것이다. 당연히 아브람이 롯보다 연장자로서 선택의 우선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 이런 숙부 아브람의 양보의 말에 일말의 의리도 생각지 않고 롯은 눈앞에 펼쳐져 있은 애굽과 같이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을 바라보고 요단 온 들을 택한다. 그는 선택에 있어서 자기에게 물이 넉넉한 평지는 보았으나 죄악이 관영한 그곳의 환경은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기적 선택이 자신의 일생에 어떤 끔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알지 못했다. 그의 결국은 소돔이 침략을 받았을 때 포로 신세가 되었고 가족과 재산을 잃게 되고 딸과 불륜의 관계를 맺는 등 실패와 수포로 돌아갔다. 우리는 여기서 성공과 실패로 이끄는 두 가지 유형의 선택이 나온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아브람의 이타적인 선택이다. 아브람은 골육간의 분쟁을 없애기 위해 확보할 수 있는 이익을 포기했다. 그는 조카 롯에게 ‘골육’ 임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다투지 말자’고 하면서 선택의 우선권을 롯에게 양보했다. 그런데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광활한 기업과 무수한 후손에 관한 약속을 베풀었다.(창13:14절 이하) 이 약속은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날 때 이미 받은 내용이다.(창12:1,2) 다음으로 롯의 이기적인 선택을 보자. 롯은 어느 땅을 택할 것인가 하는 결정의 순간에 눈앞의 넓은 들을 바라보고 비옥한 땅과 성읍을 선택했다(창13:10). 그 결과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롯은 영적인 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육적인 기준에 따라 소돔 땅을 선택했다. 고로 우리는 아브람과 롯의 선택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어 실천에 옮겨야 한다. 즉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하며 불신자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한다(고후6:14~18).
    • 칼럼
    • 목회자
    2017-03-17
  • 사랑하라
    미국의 한 젊은 사회학과 교수가 가난한 200명의 아이들을 인터뷰한 다음 그들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대학생들을 볼티모어 빈민가로 데려갔다. 빈민들의 상태에 충격을 받은 학생들은 아이들의 90%가 언젠가는 교도소에 가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25년 후 같은 교수가 다른 대학생들에게 과거의 예측 결과가 얼마나 맞았는지 조사하게 했다. 그런데 아이들 가운데 196명이 정상적인 삶을 살았고 4명만 교도소에 갔다. 왜 그렇게 어긋난 예측을 한 것일까? 빈곤층 아이들 중 100명 이상이 그들의 삶에 영감을 준 고등학교 교사 실라 오루크를 기억했다. 오랜 수소문 끝에 70살이 넘은 오루크를 찾아내 아이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하자 그녀는 당황하며 말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은 사회개혁, 교육개혁, 경제 개혁, 또는 혁명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볼셰비키 혁명의 결과물인 소련의 몰락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기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만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 중 하나님을 처음 믿을 때의 순수한 열정이 식어버렸거나 아예 없는 성도들이 많다. 남을 내 가족 내 형제로 보는 따뜻한 시선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오직 남을 비판하는 냉철한 눈빛만이 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해야 할까? 먼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일3:16) 이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자. 그분은 본디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셨다. 인간과는 도무지 비교가 불가능한 거룩한 분이셨다. 그런데 그분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즉 주님은 자신이 짊어지신 십자가에서 못과 창에 찔리셨다. 더군다나 주님은 우리 대신 저주의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살갗이 점점이 찢겨진 사이에서 생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저 검붉은 피는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느라고 주님이 흘리신 보혈 이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몽땅 주셨다. 이것이 주님의 크고 넓은 사랑이다. 고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을 향해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힘차게 달려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기로 결정하고 실천할 때 주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다음으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하셨기 때문이다. 새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의 계명이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은 지키면 좋고 안 지켜도 그만인 정도의 사소한 말씀이 아니라 실로 준수하지 않으면 과거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 계명(십계명 출20:3~17)을 지키지 않음으로 심판을 받아 이방의 침입을 받고 나라가 멸망하여 포로 생활을 했던 것처럼 오늘 날 우리들도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제자들의 표지(tradmark)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외모, 학벌, 돈, 지위, 명예, 권력, 큰 저택, 고급 승용차 등으로 자신의 지위를 알리는 표지를 삼지 말고 오히려 낮은 모습으로 음지에 있는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천국을 보여 줄 수 있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들이 되어야한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도 강제적인 힘은 원칙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무난하다. 무력 앞에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복종이나 영합에 불과하다. 마음속에는 반발 불만 원한 시샘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업무 등 일상생활에서 정확한 정보의 유통이 제한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 문제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힘을 행사하는 사람에 대해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보다는 그가 좋아하고 그에게 영합하는 말만 골라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윗사람의 기분을 거스르는 비판이나 충고 자신을 평가절하 시킬 수 있는 내용들은 전달하지 않게 된다. 업무상 잘못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사의 강제적 힘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실을 보고하지 않게 되면 상사 역시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하게 된다. 결국 잘못이 있어도 즉시 해결되지 못한 채 그대로 진행되므로 이후에 커다란 실패를 자초하게 된다. 장기적으로 볼 때 감정적인 측면이나 업무적인 측면에서 강제적 힘은 될 수 있으면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에서 상사나, 가정에서 부모나 학교에서 교사나 교수 등 많은 사람들이 강제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은 아랫사람을 움직이는데 가장 손쉽고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능력이나 지식, 인간적인 매력에 자신이 없는 사람일수록 강제력을 행사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위협이나 공갈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버려야한다. 우리는 주께 사랑의 은사를 구해야 한다(고전13:31).
    • 칼럼
    • 목회자
    2017-03-03
  • 현명한 선택을 한 사람들
    미국 명문 예일대의 스톨리 블로트닉 연구소는 1965년부터 20년 동안 예일대와 하버드대 학생 1,500명의 졸업 후 생활을 파악했다. 이들이 어떤 기준에 따라 직업을 선택 했고 사회생활을 통해 얼마나 재산을 쌓았는지를 추적한 것이다. 조사결과 우선 직업선택에 있어서 전체의 83%에 해당하는 1,245명은 좋아하는 일보다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봉이 직업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 이었다. 나머지 17%(255명)는 연봉은 적더라도 좋아하는 일, 꿈과 관계된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여기까지는 특이할 것이 없다. 요즘처럼 사람이 가진 돈으로 평가받고 ‘부자’ 되기까지가 지상과제처럼 여겨지며 모두가 재테크 전문가가 돼야하는 물질만능시대에 17%의 사람들은 순진함을 지나 모자란 사람들로 보일 정도다. 하지만 20년 후 연구 대상 학생들이 재산을 얼마나 모았는지 파악하니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전체에서 이른바 백만장자 반열에 오른 사람은 101명 이었다. 그런데 이 중 돈벌이를 기준으로 직업을 골랐던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100명은 사회에 발을 디딜 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했던 사람이다. 돈을 추구하는 그룹과 좋아하는 일을 좇는 그룹이 백만장자가 된 비율은 각각 0.08% 대 39.2%, 물론 돈이 성공의 절대적인 척도가 될 수는 없겠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위력을 엿보기 충분한 근거다. 전심으로 즐길 수 있는 일에 배팅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훨씬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을 예일대 연구는 잘 보여 주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이는 좋아하는 일과 꿈과 관계된 일을 업으로 삼는 일은 참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서 좋아하는 일과 꿈에 관계된 일에 뛰어 드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때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경제적 이유다. 의식주 문제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육체를 지닌 자들이기에 물질적 필요를 늘 채우면서 살아가야할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인생은 본능적으로 물질을 추구 하는 것이다. 돈만 있으면 현실을 편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날 인간의 삶을 영위함에 있어 경제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돈은 곧 힘과 권력의 원천이 되어버렸다. 즉 현대의 물질문명사회에서는 경제적 부를 소유한자가 사회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 땅에서는 아무리 부와 권력을 가진 자라도 안식과 평강을 누리는 사람은 없다. 아니 역설적으로 이 세상은 재물과 권력을 많이 소유할수록 오히려 불안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담장을 더 높이 쌓고 이중 삼중으로 보험과 같은 안전장치를 해두는 것이다. 그렇다. 이 땅의 사람들은 아무리 배부르게 먹어도 내일의 주림과 목마름을 염려해야 하고 오늘 아무리 질병을 치료해도 또 언제 재발하여 고통을 줄지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너무 행복에서 불안하다’라는 역설적인 말까지 있다. 이 땅은 예기치 못할 위험과 불행이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참으로 불안정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돈이나 권력, 지위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다. 좀 더 잘 살고 싶고 권력을 휘두르고 싶고 좀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이나 권력, 지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수없이 많다. 특히 지금도 정치인이며 고위 공직자며 사업가들이 돈을 사랑하다가 평생 힘들게 쌓은 명예를 하루아침에 잃고 있다. 헌데 불의의 재물을 사랑하는 것은 비단 명예만 잃게 하지 않는다. 자신을 영원히 망하게 한다. 육적으로 망하게 하고 영적으로도 망하게 한다.(행1:18) 고로 우리는 물질 만능주의 풍조가 만연한 이 시대에 더욱 영적으로 깨어 있어 물질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불의한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 불의한 삯을 위해 일하지도 말아야한다. 오히려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오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한다. 그리고 돈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과감히 버려야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돈, 권력, 지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그것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이 적잖이 있다. 그들은 좀 더 편안히 살고 싶은 욕심 때문에 또는 애써 모은 돈이 아까워 선한 일을 하는데 인색하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들을 모두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잘못된 미련과 집착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결국은 파멸의 길로 이끈다면 속히 그 마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돈에 대한 애착으로 이웃과의 사이가 언짢게 되지는 않았는가? 또는 나의 변변찮은 지위를 남용함으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는가? 버려야 할 것에 아직도 미련을 두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살펴보자. 혹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에 정신이 빠진 사람이 아닌지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때이다. 그러니 정신을 차려야한다. 그리고 조심해야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7-02-24
  • 수직선 사고 보다 수평적 사고를 하라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본다. 어떤 이들은 인생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며 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올바른 선택을 하고 대인관계도 좋다. 개방적이고 늘 배우고 성장하여 즐거운 삶을 살고 있는 동시에 활기차고 열정적이며 모든 일에 흥미를 갖고 있다. 반면 똑같이 좋은 사람들인데도 어떤 이들은 인생을 그다지 잘살고 있지 못한다. 어딘지 막혀 있고 곤경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이에 필자가 호기심을 갖고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전자는 수직선 사고 주의자로 살았고 후자는 수평적 사고 주의자로 살았기 때문인 것을 깨달았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생각’대로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 같다. 그러기에 현재의 우리의 모습은 우리의 생각대로 인생을 걸어온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직선 사고와 수평적 사고의 의미는 무엇일까? 수직선 사고를 버리고 수평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야 할 필요성을 생각해 보자. 수직선 사고는 논리적, 직선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수평적 사고는 직관적 곡 선적 사고에 가깝다. 수직선 사고가 수학이라면 수평적 사고는 음악이나 미술이다. 수학 문제에는 정답이 하나뿐이지만 그림 그리기에는 정답이 없다. 아니 정답이 수 없이 많다. 모두가 정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직선 사고가 앞으로 나란히 라면 수평적 사고는 옆으로 나란히 이다. 앞으로 나란히는 앞 사람만 보면 되지만 옆으로 나란히는 좌도 보고 우도 보아야야 한다. 수직선 사고가 목표물 하나만 보고 추격하는 사냥이라면 수평적 사고는 나물을 뜯듯이 여기도 살피고 저기도 살피는 방식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수직선 사고를 하기가 쉽고 여자는 수평적 사고를 하기가 쉽다. 수직선 사고에서는 하나의 방법론을 깊이 파고들지만 수평적 사고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 실례로 수직선 사고주의 자와 수평적 사고자로 알려진 유명한 인물들의 일화를 보자. 먼저 미국의 맥아더와 아이젠하워 두 사람을 보면 이들은 성격도 스타일도 걸어간 길도 극적으로 대비되는 군인들이다.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50세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이는 미군사상 가장 빠른 승진 기록이다. 그만큼 그가 유능한 군인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관료제의 병폐가 나타난다. 만약 미국의 대통령 선발이 선거가 아닌 관료주의의 특성인 내부 승진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더라면 연공서열에서 절대로 유리한 맥아더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반면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보다 12년 후배로 그저 그런 성적으로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령 계급장만 16년 동안 달았던 무명의 장교였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이젠하워는 마샬 장군에게 발탁되어 승승장구 해마다 소장 중장 대장으로 진급했고 마침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영웅이 되어 귀국했다. 두 사람을 비교하자면 맥아더는 장군으로서는 유능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무능했고 군사적인 전략밖에 모르는 고집불통 이었다. 즉 수직선 사고 주의자였다. 하지만 수평적 사고주의 자인 아이젠하워는 장군이 되면서부터는 조정자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아이젠하워를 보자. 연합국 사령관인 아이젠하워는 영국의 몽고 베리 장군, 미국의 패튼 장군, 영국의 처칠수상,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의 협조가 절실했다.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협조하지 않으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성공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해관계가 다르고 색깔이 강한 당대 최고의 고집불통들 이었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색깔이 강한 이들을 다독거려 공통의 분모를 만들어낸 인물이 아이젠하워였다. 맥아더는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아집의 사나이였지만 아이젠하워는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재능이 뛰어났던 것이다. 그것이 높은 자리로 승진할수록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산 이었다. 따라서 조직에 있어서도 하위직은 전문적인 능력이 필요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전문지식보다는 전체를 보는 안목과 조직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수평적 사고의 달인으로 알려진 한국의 고 정주영 회장을 보자. 한국전쟁 종전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1952년 12월에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극비리에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전선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그의 일정 중 하나는 부산에 있는 유엔군 묘지 참배였다. 황량하게 방치되어 있던 유엔군 묘지를 대통령 당선자에게 보여야 했던 미군의 담당자는 황급히 정주영 회장을 찾아 5일 이내에 유엔군 묘역에 푸른 잔디를 입혀 달라고 부탁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정 회장은 무릎을 치면서 공사비의 3배를 받는 조건으로 승낙을 했다. 그리고는 낙동강변의 보리밭을 트럭 30대를 동원하여 통째로 옮겨와 유엔군 묘역에 심었다. 이 문제의 핵심은 ‘푸르게’ 이지 ‘잔디’ 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만 보는 것이다. 이것이 수평적 사고방식이다. 문제 자체에만 집착하지 말고 문제에서 한 발 물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해결책이 쉽게 보인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들은 사고를 바꾸어야한다. 즉 수직선 주의를 탈피하고 수평적 사고자들이 되어야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7-02-10
  • 어떻게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가 있을까?
    어떤 분이 몇 년 전 미국 잡지에서 우연히 인기 직업 순위를 보았는데 대통령은 167위 였다. 예상을 빗나간 결과여서 자세히 보니 그 이유가 대통령이 과다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 이 세상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대통령 뿐일까? 아니다. 아이들도, 청소년들도, 장년들도 노인들도 가정, 학교, 직장,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실례로 아이들과 청년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먼저 아이들을 보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학교에서 받는 심리적 스트레스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다고 한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아야 하고 하기 싫은 공부와 숙제를 매일 해야 하고 수업 시간 내내 꼼짝 않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은 겨우 여덟 살인 아이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청년들도 수많은 경쟁을 뚫고 직장에 들어갔지만 출근해서 얼마 안 되면 앞날을 걱정해야 한다. 승진을 해도 해고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히 떨칠 수 없다. 그리고 성격이 거칠고 교만하며 이기적인 상사들이나 동료들과의 껄끄러운 대인 관계나 개인, 빚, 질병이 스트레스의 주범이다. 암 치료 전문의들은 암을 예방하려면 첫째, 스트레스를 줄이라고 조언 한다. 스트레스가 인체의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그대로 방치하면 불면증이나 우울증, 나아가 갖가지 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스트레스는 욕망으로부터 비롯되므로 욕망을 줄이라고 충고한다. 욕망 없는 사람은 없다. 또 욕망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이루어 내기 힘들다. 그러나 돈과 명예와 권력의 욕심이 지나치면 자기와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고 불행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치 창밖에서 비치는 달이 초승달에서 점차 커지다가 보름달이 되면 다시 하현달로 변해가듯이 우리를 죄악으로 기울게 하기 때문이다. 고로 꼭 필요한 것이 주어지면 그 이후에는 과한 욕심을 내지 말자. 셋째, 하루에 수십 번씩 억지로라도 웃고 살라고 한다. 짜증이나 화를 내면 몸의 면역 기능을 저하시키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지만 웃음은 몸의 방어 능력인 면역력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다. 넷째, 운동을 하던 사우나를 가던 여유를 갖고, 주말에는 가족들과 교외로 나가기를 권유한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약간의 위로가 될 수 있겠지만 근본 해결책은 아니다. 휴가를 내 해변으로 놀러가 게으름을 피우며 충분한 휴식을 만끽하고 돌아온들 스트레스는 여전히 남아 있다.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벼드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지 문제는 그대로 남겨둔 채 그 문제로 인해 생긴 스트레스를 풀어버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다섯째, 일을 놀이처럼 즐기라고 한다. 토마스 스탠리의 ‘백만장자 마인드’에 보면 미국의 백만장자 86%는 ‘내가 성공하는 것은 일과 직업을 사랑한 결과’ 라고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일하는 것이 취미이고 일을 재미있게 즐긴다. 하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자신이 미치도록 좋아하는 일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하게 된 일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그 일을 사랑하고 즐김으로써 능력과 적성을 힘껏 발휘할 일로 바꾼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일에 세 번 질리고 다섯 번은 하기 싫고 일곱 번은 짜증이 나는데 아홉 번째 일에 리듬이 생겨 묘미가 생긴다’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수밖에 없다. 일이 놀이보다 재미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가능할까? 일에 재미를 못 느끼면 평생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 재미가 없으면 열정이 없고 열정이 없으면 평균 이상을 해낼 수 없다. 그렇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즐겁게 일하자’ 말을 반복하면 할수록 실제 즐겁게 일하게 되고 즐겁게 일하는 습관이 몸에 붙는다. 일을 좋아하면 일에 몰입할 수 있다. ‘몰입’한다는 ‘집중한다는’는 뜻이고 집중한다는 것은 미친다는 뜻이다. 그러면 까닭 없는 불안이나 걱정으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고 외적인 문제에 휘둘리지도 않을 것이다. 여섯째, 괴로운 일이나 슬픈 일을 당할 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우선은 ‘이것으로 충분해, 이 정도면 괜찮아’ 라고 말하라고 한다. 이유 따위는 당신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 괜찮은지 따위도. 어째든 ‘충분해 괜찮아’ 라고 말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취해라. 그렇게 하면 뇌의 ‘자동목적 달성 시스템이’ 그 이유를 찾아준다. 당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당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만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일어난 일은 당신의 미래에 반드시 플러스가 될 것이다. 예외는 없다. 모든 것이 당신에게 플러스가 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것으로 충분해’라고 말하라. 그러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자(빌 4:6).
    • 칼럼
    • 목회자
    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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