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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다윗과 베들레헴 우물 2’
-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삼하23:15~17). 성경에는 우물물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물은 그만큼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중동 지역에는 우리처럼 물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우물은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우물을 차지하기 위하여 때로는 전쟁도 불사하였고, 그것들을 소유한 사람들은 부와 권력까지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양보만 하는 이삭을 그 마음까지 르호봇(장소가 넓음)이 되도록 한 것은 우물이었습니다(창26:12~22). 야곱이 아버지와 형님을 속이고 외삼촌이 사는 하란으로 도망가서 첫사랑 라헬을 만난 곳도 우물가였습니다(창29:10~12). 모세는 스스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려다가 애굽 사람을 죽이는 실수를 범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갑니다. 그곳에서 십보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데 우물이 촉매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출2:11~22). 신약으로 들어와,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 기피하는 사마리아로 통행하십니다(요4:5~42).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앉아 계셨는데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도 이 물은 예수님과 여인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가 됩니다. 다섯 번의 혼인과 이혼을 반복했던 여인은 세상과 남편 어느 것도 그를 만족시켜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영원한 생명수인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생수를 주시기 전, 먼저 여인에게 있는 것을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요4:7). 이처럼 주님이 신앙인들에게 먼저 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 부족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시고 더 많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마침내 여인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신이 사는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합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4:29) 그동안 베들레헴 물이 블레셋 진영에 의하여 차단 된 것처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때문에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에덴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창3:22~24). 그뿐만 아니라 생명의 책 역시 봉인 되었습니다(계5:4). 그야말로 온 인류는 저주 가운데 탄식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기근과 질병과 전쟁과 온갖 잡신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소망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 예수님이 한 줄기 빛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 뿐 아니라 만물이 탄식하고 고통 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신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죄인들을 위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다윗의 세 명의 특공요원은 왕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 우물을 길어 왔지만 예수님은 전능하신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친히 담당하시고 죽으신 후 부활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 생명수가 터졌고,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던 원수들의 머리가 깨졌습니다. 또 봉인 된 생명책을 활짝 펴시고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물을 마실 때마다, 주님께서 성령을 상징하는 생수를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창에 허리를 찔리어 물과 피를 다 쏟으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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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다윗과 베들레헴 우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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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전달자의 사명’
-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이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아들로 여기는 제자였습니다(딤후1:2, 2:1). 이런 디모데가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을 부끄러워하고 있고, 바울은 디모데의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보통은 모르는 척 하고 지나가기 쉬운데 바울은 여과 없이 디모데에게 그의 형편,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이 글을 보는 순간 ‘아이고, 들통 났구나.’ 하며 스승 바울에게 죄송스러운 마음과 부끄러움이 교차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도 디모데의 그런 태도는 다소 실망스러웠을 것이지만 여전히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 디모데야!” 하고 부릅니다. 디모데의 잘못을 직설적으로 지적해주는 바울, 그것은 바울이 디모데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의 입장에서는 순간은 아프지만 자신의 잘못을 회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믿음의 대 선배인 베드로에게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언젠가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그는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과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보냄을 받은 유대인 형제들이 오자 베드로는 갑자가 태도를 바꾸더니 이방인 형제들과 식사를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습니다. 그러자 다른 형제들도 따라 하였고 심지어 바나바조차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였습니다. “당신은 원래 유대인인데도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율법에 구애받지 않고 이방인들처럼 살아왔소. 그런데 이제 와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는 겁니까?”(갈2:14, 쉬운말 성경 역). 바울의 사랑 방법은 좋은 점은 칭찬하고 격려하며, 잘 못한 점이 있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한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가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18~21). 이로 인하여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행20:26~27). 바울이 이 말씀을 하게 된 바탕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신 파수꾼의 자세, 곧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인을 깨우치면 악인이 돌이키든지 안돌이키든지 에스겔은 책임을 면하지만 만일 에스겔이 깨우치지 아니하면 악인은 자신의 죄 값으로 죽고, 그의 피 값은 에스겔이 내게 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겔3:16~21). 바울이 그런 피 값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파수꾼의 자세를 마음에 새기고 산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은 바울 자신의 삶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행24:16).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행20:35). 한 편으로는 당시 베드로와 디모데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대선배 베드로는 바울의 그러한 지적에 불쾌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울에 대하여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는 내용은 성경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울에 대하여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벧후3:15) 라고 하면서 “사랑하는 형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와 베드로 모두 책망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거만한 사람이라면 책망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잠9:7~9). 이처럼 책망하는 말은 아픈 것이지만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장식입니다(잠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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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전달자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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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의뢰의 원동력’
-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삼하22:30). 삼하22:30절 이하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말씀이 여러 절에 나옵니다. ‘의뢰’(30절), ‘방패’(31절), ‘바위’(32절), ‘요새’(33절), ‘구원의 방패’(36절), ‘구원의 바위’(47절) 등입니다. 이러한 힘, 배경을 의지하고 다윗이 행동한다는 말씀이 4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47절부터 51절까지가 하나님께 대한 찬미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나갔더니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뢰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을 어떻게 도우셨을까요? 적군에 달리며 성벽을 뛰어 넘도록 했습니다(30절). 다윗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34절), 그의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셨습니다(35절). 다윗의 걸음을 넓게 하셨으며, 그로 실족치 않게 하셨습니다(37절). 다윗이 원수를 따라 멸하도록 하셨으며, 저희를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않게 하셨습니다(38절). 원수들로 등을 다윗에게로 향하게 하시고, 그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습니다(41절). 적군을 땅의 티끌 같이 부스러뜨리고 거리의 진흙같이 밟아 헤치도록 하셨습니다(43절). 이로 인하여 다윗은 다음과 같이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바위를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바위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47절),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 하리이다.”(50절). 그러면 이제 이런 의뢰는 어디서 비롯됩니까?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하나님께 대한 의뢰는 하나님을 아는데서 시작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시103:7). 하나님이 하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십니다.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에 나타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롬1:19~20). 역사 속에서 하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말 탈 자 일천도 없을 만큼 미약했던(사36:8) 히스기야 군대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하룻밤 사이에 앗수르 군대 18만 5천을 쳐서 죽였습니다(사37:36).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 제자들이 갈리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새 그물을 던졌으나 잡힌 것이 없었습니다. 날이 새어 갈 때에 어떤 분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제자들은 그 분의 말을 듣고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고기가 들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그 때 제자들 중 요한이 말하였습니다. “주시다.”(요21:7). 누구도 주님이신 줄 모르고 말을 들었지만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고 주님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주님께서 지금도 성도들에게 형편에 따라 나타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행사를 통하여 알리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길을 통하여 자신을 알리십니다(시25:12).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고전1:18). 십자가의 길은 말씀을 순종하는 길입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지 알 수 없지만 순종해 보면 알게 되는 길입니다. 안병모 목사님은 처음에는 김현봉 목사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김현봉 목사님이 하시는 일을 그대로 따라 하니 김현봉 목사님이 받은 성령을 자신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할 줄 알지 못하다가도 믿음의 선진들, 선배들이 어떻게 행하였는지 살피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징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문 역시 좁은 문입니다(마7:13~14).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84:5~7) 라고 말합니다. 시온의 대로라고 합니다. 주님은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하셨는데 고라의 자손들은 대로라고 하였습니다. 상호 모순 같습니다. 그러나 모순이 아닙니다. 좁은 문, 좁은 길 같지만 일단 순종하고 들어오면 넓은 길, 넓은 문입니다. 이유는 은혜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간판만 보고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넓은 길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은 자신이 어떠한 분임을 알리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알리신다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리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알게 되면 거룩한 교제가 되며 사귐이 됩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과 슬퍼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도 품게 됩니다. 하나님이 악을 조금도 못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양심을 쓰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에 덕을 실행하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벧후1:5).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고전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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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의뢰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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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심은 대로 거둔다’
-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삼하 22:26~27). 우리말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연법칙이지만 이 법칙 역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입니다. 식물의 씨만 아니라, 환경 또한 뿌린 대로 거둡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욥처럼 자녀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마련 된 환경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심어 거둔 환경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맛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비를 심었기 때문입니다. ‘왜 나에게는 이렇게 사나운 환경만 있을까?’ 생각하지 말고 혹시 내가 사나운 씨를 뿌렸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완전함을 거두는 것은 완전함을 심었기 때문이며, 주님의 깨끗하심을 경험하는 것은 깨끗함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거스르심을 보는 것 역시 사악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환경은 우리의 심은 열매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라고 말합니다(갈6:7~8). 이처럼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자연 법칙일 뿐 아니라 영적인 법칙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열 두 족장들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왔을 때, 그들은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는 좋은 곳과(민13:27), 거민을 삼킬 만큼 좋지 않은 땅(민13:32)이 있음을 보고하였습니다. 사람들과 성읍에 대하여는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민13:28, 32~33)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형편을 보았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돈시키는 족장들이 있는가 하면, 형편에 빠져 낙심하는 족장들도 있었습니다. 슬프게도 전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열 명의 족장들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민13:31).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3).” 라고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녹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충동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곡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3).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망 소리를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14:27~30).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애굽 땅에서나 광야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말이 주님의 귀에 들린 대로 주님께서 행하십니다. 믿음 안에서 “승리하리라.” 라고 말하면 승리합니다. 반면 “패하리라.” 하면 패하게 됩니다. “안 되리라.” 하면 안 됩니다.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야.” 하면 인복이 들어옵니다. 하지만 “나는 인복이 없어” 하면 정말 인복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하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시고 시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도 말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이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91:9~12).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화나 재앙이 그렇게 말한 사람의 장막에 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말은 드러난 생각이며, 생각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잠23:7).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피차에 말하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과 여호와의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그들을 기록하셨습니다(말3:16). 이처럼 사람들이 심는 것이 곡식과 채소와 과일만 아니라, 말도 심고, 사랑도 심고, 미움도 심고, 감사도 심고, 헌신도 심는 것입니다.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둘 때가 있습니다(전3:2). 우리의 심은 것을 세상에서 모두 거둔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거둘 것이 없을 것입니다. 때때로 주님께서 우리의 선행을 세상에서 모두 갚아주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거두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이처럼 세상에 있는 시간들은 심을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심는 일에 힘을 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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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심은 대로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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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다윗의 의’
-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삼하22:21,22) 다윗의 이 시에서는 그의 의로움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 상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버스를 타고 여행 중이었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아들이 덥다며 창문을 열려고 하였습니다. 힘껏 당겼지만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 이를 지켜본 아버지가 아들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 힘껏 당겼습니다. 그러자 지체 없이 창문이 열렸습니다. 그 창문은 누가 연 것일까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 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16:13). 성령의 감동이란 하나님의 능력이 감동을 입은 사람에게 덧입혀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그 때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비록 아들의 손을 빌렸지만 실제 창문을 연 사람은 아버지였듯이 다윗이 의롭게 행한 것은 자신의 의가 아닌 성령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자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에 이르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다고 하였습니다(왕상18:46). 이처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옵니다. 엘리야 같은 경우 허리를 동이고 달려갈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육신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사울이, 쩔쩔매는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를 괴롭히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주어졌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는 자가 됨이니라 하고”(삼상24:4~7). 자신의 의로운 마음으로 그를 괴롭히는 사울을 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울 치는 것을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결코 그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한 번은 그가 사울을 피하여 숨어 있을 때, 나발이라는 심히 부한 사람의 목장이 다윗과 그 부하들의 도피처에 있었습니다. 도피 생활은 정착 생활에 비하여 의식주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약탈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나발의 가축에 조금도 손을 대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가축들의 담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들어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고 했을 때(양털을 깎을 때면 잔치도 함께 있음), 다윗은 부하들을 시켜 나발에게 음식을 달라고 정중히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발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윗이 주인을 배반하였다며 모욕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에 화가 난 다윗은 나발과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를 없앨 작정이었습니다. 사환들과 함께 칼을 차고 나발에게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때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이 와서 다윗이 나발에게 요구한 것 이상 되게 준비하고 그의 범죄를 막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삼상25:32~33). 아비가일이 다윗의 범죄를 막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막아주신 것입니다. 다윗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버려 두었을 때, 그는 어느 왕보다 음란하고 교활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사건을 숨기기 위하여 우리아를 맹렬한 전쟁에 선두로 나가게 하여 죽게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영토가 확장 되고 인구가 많아지자 교만해졌고, 사탄은 그를 충동하여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이스라엘 인구조사를 하게 하였습니다(대상21:1). 하나님께서 잠시 다윗을 내버려둔 것입니다. 그 결과 7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고 사탄이 함께 하니까 그런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다윗의 의로움은 그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성령이 그와 함께 계셔서 한 것입니다. 다윗만 아니라, 요셉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해도 죄를 짓지 아니할 수 있었고, 자기를 애굽에 팔아넘긴 형님들에게 복수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본래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지만(딤전1:13),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15:10). 이처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악을 조금도 행하지 못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고후13:7), 수고 또한 많이 하게 합니다. 요한도 이와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 하나님의 씨가 있는 사람은 죄를 범치 못합니다. 죄를 끔찍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실족하지 않게 막아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의가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처럼, 오늘날 신앙인들의 의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이 의롭게 살아가는 것 또한 성령의 도움 없이는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 자신에게서 선이 나올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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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다윗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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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땅 짚고 헤엄치는 신앙’
-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어릴 때 동네에 보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깊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종종 물놀이하기 일쑤였습니다. 초등학교 4학 년 때의 일인데 한 번은 저의 헤엄치는 모습을 보더니 한 친구가 “너 수영 참 잘하는 구나”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의 칭찬에 기분이 좋았고 그 때부터 저는 수영을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땅을 짚고 헤엄치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 때 저는 누구나 저처럼 하는 줄 알았습니다. 한 번은 물을 가르며 전진하는 친구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애써 나아가는데 그만 키보다 깊은 곳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이미 수영할 줄 알았던 친구는 유유히 다녔지만, 키보다 깊은 곳에 땅 짚고 헤엄을 치려니 머리마저 물속에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그곳은 보 안에서도 웅덩이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한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모두 제가 장난치는 줄 알고 지나쳤는데, 나중에 사태가 심각한 것을 안 사촌 형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후 저는 수영은 땅 짚고 하는 것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강도 땅 짚고 헤엄칠 수 있는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이 있고, 바다도 깊은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믿음 또한 깊은 상태와 얕은 상태가 있습니다. 땅 짚고 헤엄치는 신앙이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사사기 1장 19절에는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라고 나옵니다. 참 이상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산지 거민 뿐 아니라 골짜기 거민들도 이겨야 하는데 그곳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어 못 이겼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철병거를 못 당한다는 말일까요? 누가복음 8장(41-56절)에는 회당장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서 죽어가는 그의 딸을 가셔서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병들고 가난한 자를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는 마다하시지 않고 가십니다. 그런데 도중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사람들이 만류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까지는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죽은 자를 살리실 능력까지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병자는 간혹 의원들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의 정도에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은 자도 능히 살리실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죽은 자까지는 못하고 단지 살아있는 사람 정도 회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사사시대 하나님의 능력 범위를 스스로 그어 놓고, '철병거는 도저히 하나님도 안 돼' 하고 포기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사람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계산으로 가능한 범위는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믿고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믿지 못하고 '철병거는 하나님께서도 안 돼' 하는 잠재적인 불신앙이야 말로 주님의 깊은 은혜 속을 헤엄치지 못하고 얕은 물가에서 맴도는 신앙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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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땅 짚고 헤엄치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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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명이 있는 사람’
-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행27:21). 바울이 죄수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압송 당할 때였습니다. 미항이라는 곳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행27:9~12).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그 항구가 겨울을 나기에 불편하기 때문에 거기서 떠나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았습니다. 다수결이 민주주의에서는 최선의 방법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수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침 순풍까지 불자 득의한 줄 알고 행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습니다. 최종 결정자인 백부장의 잘 못된 선택으로 배가 파선되는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애초에 잘못된 선택을 한 백부장, 선장, 선주 또 그들의 말을 동의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만, 미항에 머물자고 한 바울의 일행이나 바울의 말에 내심 동의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제 대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지도자 선택의 결과는 한 나라의 앞날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선택이 자신만 아니라, 이웃과 후손들에게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고, 기도하며 정해야 할 것입니다. 풍랑 앞에서는 고도의 전문지식이나 능수능란한 항해술도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사공들은 짐을 바다에 풀어버리고, 배의 기구를 내어 버리고, 이리저리 쫓겨다녀야했습니다. ‘이렇게 모두 죽는가 보구나.’ 하며 체념하려 들 때 바울이 나서서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흑암도 그대로, 풍랑도 그대로, 파선된 배도 그대로인데 바울은 “안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심해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며 말씀이 은혜입니다.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은 바울에게 “내가 너희를 다 건지겠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할 것과, 배에 탄 사람들을 모두 바울에게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본 것입니다. 바울이 가이사 앞에 서려면 바울은 분명히 생존해야 할 것입니다. 또 바울을 제외한 거기 있는 사람 275명을 전도하려면 그들 또한 구출 되어야 합니다. 생존이 목적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가이사 앞에 서야 할 사명,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할 사명, 그 사명이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환경 속에서도 모두를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명을 받은 사람은 그 사명이 이루기까지 하나님께서 생존케 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강건케 하신 것은 그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 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딤후4:17). 사명 때문에 강건케 하신 것입니다.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말했던 모세는(시90:10) 대부분의 사람들이 80이 못 되어 죽는 시대에 120세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건강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며, 여호수아 또한 110세까지 살 수 있었던 것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래 뱃속에서 요나를 살리신 것 역시 니느웨에 복음을 전할 사명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 모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공통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사명입니다(마5:13~14). 빛과 소금은 행위와 관련 된 것입니다. 소금은 녹아져 맛을 내는 헌신이며 빛은 본입니다. 뿐만 아니라 각자 위치에서 맡은 사명이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녀로서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며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드러낼 사명이 있습니다. 모두가 사명자로서의 역할을 인식하고 그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강건케 하시며 그것을 이루기까지 남겨두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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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명이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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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책망할 것이 없는 자’
-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1:8). ‘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며, 심판의 날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날입니다. 그 날을 위하여 신앙인들이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이 있지만 본문에서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된다는 의미는 지금은 책망할 것이 많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다윗은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19:12) 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도 다른 사람도 우리 허물을 알고 있는데 우리만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책망하십니다. 먼저 양심을 통하여 책망하십니다. 양심의 책망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양심 쓰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항상 양심의 책망을 듣고 살았습니다.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 없기를 힘쓰노라.”(행24:16). 양심의 소리는 강력하지 아니하고 세미하기 때문에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들을 수 없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거나 들어도 육신의 충동이 강하여 무시한다면 일을 행한 후에 강한 책망이 옵니다. 반면에 양심의 소리를 듣고 양심을 써 나가면 양심의 담대함을 얻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책망은 양심으로 오는 책망입니다. 양심으로 오는 책망을 듣고 회개한다면 환경의 책망이나 사람의 책망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서 잘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가정 총무가 된 것은 그 집에서 일을 할 때 양심을 써서 하였기 때문입니다. 눈가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 역시 하나님을 경외함과, 자신을 신뢰하여 가정총무로 삼아준 보디발에 대하여 양심을 썼기 때문입니다(창39:7~9). 성령은 양심을 통하여 책망하십니다. 성령이 양심을 통하여 깨닫게 해주시면 비록 책망일지라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소성함을 얻습니다. 두 번째 책망은 환경의 책망입니다. 수많은 신자들이 환경으로 오는 책망을, 고통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시험하신다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양심을 쓰지 않아 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따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뱀의 유혹을 받아 따먹었기 때문입니다(창3:6). 그 양심에서는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지만 따먹고 싶은 육신의 욕구가 너무 강하여 제어하지 못한 것입니다. 양심의 음성을 듣지 않자 결국 에덴 낙원을 잃어버리는 환경을 만났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하와는 잉태하는 수고를, 아담은 땀을 흘려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는 환경이 임한 것입니다(창3:16~17). 야곱 역시 양심을 쓰지 않고 아버지를 속이고 형님을 속이다가 자신보다 꾀가 많은 라반의 압제에서 20여 년 동안 품삯을 열 번이나 속임 당하고 도망 나오다시피 나옵니다(창31). 발람은 부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발락의 청함을 받아 가다가 말 못하는 나귀의 책망을 받습니다(민22:21~35). 나귀는 환경의 책망입니다. 솔로몬은 왕비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신전을 만들어 준 후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만(왕상11:9), 듣지 않다가 사방의 대적을 만나는 환경의 책망을 받습니다(왕상11:14). 환경의 책망도 받지 않으면 그 때는 사람의 책망을 받습니다. 사람은 환경의 벌어진 일을 가지고 책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책망을 받아도 듣지 않으면 최후 몸으로 옵니다. 몸의 책망도 받지 않으면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시거나 아예 세상을 떠나게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병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약해서 오는 병도 있고, 관리하지 않아서 오는 병도 있고,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서 오는 병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무서운 책망은 내버려 두는 책망입니다(롬1:28). 이 책망은 불신자처럼 심판 때 한꺼번에 오기 때문입니다. 구스왕이 백만 대군을 이끌고 왔지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물리칠 수 있었던 아사왕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왕을 의지한고로 하나니라는 선지자의 책망을 받습니다(대하16:9). 그러나 하나니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옥에 가둡니다. 그러자 발에 병이 납니다. 발에 병이 났을 때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자 그로 인하여 죽고 맙니다(대하16:12~13).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 과정을 통하여 신앙인들을 책망하십니다. 오늘날에는 선지자 대신에 주일 말씀을 통하여 책망을 받습니다. 책망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모르는 것을 전하는 사람을 통하여 알게 해주셨다고 생각하고 회개하면 빛을 받게 되지만(엡5:13), 그것을 누가 고자질했다고 생각한다면 점점 어두워지고 맙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부지런히 책망을 받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책망이든 기쁨으로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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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책망할 것이 없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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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바라는 것보다 더 좋은 것’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16:28).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신 말씀입니다. 이에 앞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만류하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책망하신 후 아무든지 주님을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과,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고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다소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이상하다. 선생님께서 분명히 그리스도이시면 왜 죽으시는 것일까? 이 나라에 왕으로 오셔서 원수들을 모두 물리치고 우리를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시켜주셔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죽으신다고 말씀하시니 우리가 제대로 된 길에 들어선 것일까?” 그러자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소망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16:28). 북의 남침으로 6.25가 일어나고, 630여만 명의 피난민이 발생하면서 휴전 이후 천만여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하였습니다. 원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지구 반대편도 갈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도 부모형제를 지척지간에 두고도 만날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 생전에 자녀를 만나볼 수 있으려나?’ 자기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자녀들을, 부모님을 머리카락이 하얗도록 그리워하면서 살다가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젠 생전에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손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도 ‘내 생전에 독립이 올 수 있을까?’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엿새가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이 되셔서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그러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였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17:1~5). 베드로는 후에 이때 본 경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벧후1:16~17).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님의 크신 위엄을 보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크신 위엄과 존귀와 영광은 왕권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을 다스리는 권한이 있고, 성도들은 들어야 하는 위치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왕권을 말씀하심입니다. 사실 베드로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정치적인 왕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이 사상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도 머뭅니다(행1:6~8).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들이 변화산상에서 체험한 예수님의 왕권은 세 명의 제자들에게는 다소 실망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았던지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지만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 않을 만큼 좋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20). 그들은 현실 세계에서 나라의 독립보다 변화산상에서 더 좋은 영광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세상이 있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분명히 보이는 나라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권과 다스림이 더 중요하고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직접 체험한 사람과, 들어서 체험하는 사람의 느끼는 정도가 다를 것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다른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말한다면 그들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선생님이 왕이 되셨어? 그리고 우리나라는 독립국가가 되었어? 그대로 있잖아. 무엇을 보았다는 거야?” 예수님은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다른 제자들과 유대인들을 아시고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17:9) 라고 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후에는 성령을 받아서 성령으로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정치적인 메시아이기 전에 영적인 메시아로서 자기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하고 마귀와 세상과 육신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립은 죄와 마귀와 세상 풍속습관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죄가 주장하는 대로 살아가지 않고 새 생명을 따라 살아갈 때 정치적인 독립도 따라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마6: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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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바라는 것보다 더 좋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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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남은 자’
-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사10:22). 코로나19가 창궐한 시기, 백신이 개발 되었다고 하나 여러 변이가 나와 백신을 무색케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주님의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시기일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남겨두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남겨두실까요? 성경은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에 “빈천한 국민을 남겨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렘52:16) 라고 말합니다. 당시 느부갓네살왕은 사회 집권세력들, 부한 사람들, 능력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포로로 끌어가 왕실에서 인질로 사용하거나 유다로부터 먼 곳으로 흩어버리고,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만 남겨 두었습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듯이 당시에도 사회에서 볼품없고, 반란을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만 남겨 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가난하고 천한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런데 가난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의 가난은 마음의 태도입니다(마5:3). 실제로 풍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가난한 태도를 갖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간혹 빈곤하면서도 허영심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 속에 포함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가난한 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7:29~30). 여기서 “~같이 하라.”는 말씀은 마음의 태도입니다. 마땅히 누릴 권이 있는 풍족한 사람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을 다 쓰지 않고 실제 부족한 사람들을 위하여 쓴다면 이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인들의 상급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을 주님을 위하여 다 쓰지 않는 것입니다(고전9:18). 우리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실제 부요하신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고후8:9).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남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계7:2~3). 종이란 자기 뜻이 없이 오직 주인의 뜻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목회자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자신의 뜻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목회의 직분을 갖지는 않았지만 범사에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아간다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바라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작정하는 종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시며, 이러한 종을 붙잡고 계십니다(사42:1).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또한 먹을 것을 주십니다(사65:13). 하나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우므로 찬송을 합니다(사65:14).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 한분 기쁘시게 할 마음을 품습니다(갈1:10). 하나님 한 분의 기쁨을 추구 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인을 치도록 하십니다. 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거나 물질을 의지하거나 과학을 맹신하는 자는 짐승의 표를 받습니다. 666은 인간 지혜의 최대의 숫자입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발전해도 7로는 가지 못하고 6옆에 6이라는 숫자가 붙을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종을 남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하고, 세상 신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을 남기십니다(롬11:4). 아합 시대에 이세벨이 선지자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엘리야는 자신만 살아남은 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왕상19:14).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자신이 잘 해서 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남기셨으며, 그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칠천 인을 남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명예와 영광을 섬기는 사람은 세상 신에게 무릎을 꿇은 사람입니다. 돈을 섬기는 사람 역시 세상 신에 무릎을 꿇은 사람이며, 세상 풍속과 유행과 여러 가지 이념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신에게 무릎을 꿇은 사람입니다. 신앙인들의 이념은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 의일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 신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사람을 남기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남기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거룩하게 되는 것은 진리를 순종할 때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그러므로 거룩함의 씨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남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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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남은 자’